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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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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사상가로, 일본 정치 사상사와 초국가주의를 연구하며 전후 일본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914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유년 시절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 등이 있으며, 일본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마루야마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민주주의 담론을 주도했으나,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은 현재까지 일본 정치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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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4년
이름마루야마 마사오
본명마루야마 마사오
출생일1914년 3월 22일
출생지오사카
사망일1996년 8월 15일
사망지도쿄
국적일본인
학력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직업사상가
정치학자
역사가
교수
활동 기간1950년–1971년 (교수)
부모마루야마 간지
형제마루야마 데쓰오
형제마루야마 구니오
자녀마루야마 아키라
서명마루야마 마사오
학문적 배경
연구 분야정치학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 기관일본 학사원
도쿄 대학
주요 업적근세 유학 연구
초국가주의론
후쿠자와 유키치
주요 작품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이다’라는 것과 ‘하다’라는 것)
수상
주요 수상제7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1953년)
제4회 오야부지로상(1977년)

2. 생애

2. 1. 유년기와 학창 시절

마루야마 마사오는 1914년 3월 22일 오사카시 아베노구에서 저널리스트 마루야마 간지(丸山幹治)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마쓰시로번 사족 가문 출신으로, 형은 방송인, 평론가인 마루야마 테츠오(丸山鉄雄), 동생은 평론가인 마루야마 쿠니오(丸山邦男)이다. 1921년 도쿄 요츠야로 이사했으며, 아버지의 친구 하세가와(長谷川如是閑) 등의 영향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15] 요츠야제일심상소학교, 제일중학교를 거쳐 1931년 제일고등학교 (일본)에 진학했다.

1933년 4월 10일, 혼고 불교 청년관에서 개최된 유물론 연구회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마루야마는 후지경찰서에 구금되어 특별고등경찰의 조사를 받았다.[75][15] 이때의 경험에 대해 "나도 모르게 한숨도 못자고 구치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 경험이 내가 지성에 의존하지 않게끔 자각시켰다."고 회고하며, "군대 경험 못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76]

1934년 일고 졸업 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강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1936년 현상논문 공모에 응모한 「정치학에 있어 국가의 개념」은 1등 없는 2등으로 입선했고,[77][16] 『녹회잡지』에 게재되어 조수 채용이 내정되었다. 원래 저널리스트를 지망했지만, 체포 경력이 있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짙은 논문을 쓴 자신을 조수로 채용할 정도의 사람이 도쿄 대학 법학부에 있다면 연구실에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도교수였던 난바라 시게루는 마루야마를 사상적 동지로 간주하고 채용했다.[78]

1937년 졸업 후 난바라 시게루의 연구실 조수가 되었다.[79][17] 유럽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싶어했지만,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를 시작했다.[3] 1940년 「근세 유교발전에서 소라이학의 특질과 국학의 관련」을 『국가학회잡지』에 발표했고, 6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조교수가 되었다.[18] 1941년에는 「근세 일본사상사에 있어 자연과 작위」를 같은 잡지에 발표했다.

1944년 3월 코야마 유카리(小山ゆか里)와 결혼했고, 7월 「국민주의이론의 형성」을 발표했다.[80] 같은 해 이등병으로 징집되었으나,[19]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지 않고 평양에 보내졌다.[20] 9월 각기병으로 전역하여 11월 귀환했다. 평양 복무 시절, 마루야마는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일병에게 괴롭힘을 당했다.[81] 그는 "군대란 지방의 집안,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화족(華族)의 도련님이 잡역부 출신의 상병에게 따귀를 맞습니다. 어쩐지 그 묘하게 민주적인 느낌이 사회적 계급에서 오는 불만을 마취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대의 역설적인 점이지요."라고 말했다.[82][83]

1945년 다시 소집되어 히로시마시 선박통신연대에서 암호교육을 받은 뒤 선박사령부에 배속되었다가 참모부 정보반으로 전속되었다. 마루야마는 연합 통신의 주간지를 바탕으로 국제 정보를 정리하여 보고하는 '비망록'이라는 메모를 남겼다.[84][21] 8월 6일, 사령부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원폭이 떨어지는 피폭을 경험했다.[23]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맞이했고, 9월 귀향했다.[85][25] "상관의 의도를 알아맞춰야 하는 것은 궁궐의 하녀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하며, 이러한 경험은 이후 '자립한 개인'을 목표로 삼게 된 원인이 되었다.[86][26]

2. 2. 종전까지의 연구 활동

1914년 3월 22일, 저널리스트 마루야마 간지(丸山幹治)의 차남으로 오사카시 아베노구에서 태어났다.[2]마쓰시로번 사족 가문 출신으로, 형은 방송인 겸 평론가 마루야마 테츠오(丸山鉄雄), 동생은 평론가 마루야마 쿠니오(丸山邦男)이다. 1921년 도쿄 요츠야로 이사했으며, 아버지의 친구 하세가와 뇨제칸 등의 영향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요츠야제일심상소학교, 제일중학교를 거쳐 1931년 제일고등학교 (일본)에 진학했다.

1933년 4월 10일, 혼고 불교 청년관에서 개최된 유물론 연구회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의해 불법화되어 후지경찰서에 구금, 특별고등경찰의 조사를 받았다.[75][15] 체포 당시 경험에 대해 "나도 모르게 한숨도 못 자고 구치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 경험이 내가 지성에 의존하지 않게끔 자각시켰다"고 회고하며, "군대 경험 못지않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76]

1934년 일고 졸업 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강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1936년 현상논문 공모에 응모한 「정치학에 있어 국가의 개념」이 1등 없는 2등으로 입선,[77] 『녹회잡지』 8월호에 게재되면서 조수 채용이 내정되었다.[16] 원래 저널리스트를 지망했으나, 조수 공모에 응모한 것은 체포 경력과 마르크스주의 영향이 짙은 논문을 쓴 자신을 채용할 정도의 사람이 도쿄 대학 법학부에 있다면 연구실에 남아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도교수 난바라 시게루는 마루야마를 사상적 동지로 간주하고 채용했다.[78]

1937년 졸업 후 난바라 시게루의 연구실 조수가 되었다.[79][17] 유럽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싶었지만, 난바라 시게루의 권유로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를 시작했다.[3] 1940년 「근세 유교발전에서 소라이학의 특질과 국학의 관련」을 『국가학회잡지』에 발표하고, 6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조교수가 되었다.[18] 1941년에는 「근세 일본사상사에 있어 자연과 작위 - 제도관의 대립으로서」를 같은 잡지에 발표했다.

1944년 3월, 코야마 유카리(小山ゆか里)와 결혼하고, 7월 「국민주의이론의 형성」을 발표했다.[80] 같은 해 이등병으로 징집되어 평양직할시로 보내졌으나, 9월 각기병으로 전역하여 11월에 귀환했다.[20] 평양 복무 시절,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일병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을 통해 "군대란 지방의 집안,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화족(華族)의 도련님이 잡역부 출신의 상병에게 따귀를 맞습니다. 어쩐지 그 묘하게 민주적인 느낌이 사회적 계급에서 오는 불만을 마취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대의 역설적인 점이지요."라고 말했다.[81][82][83]

1945년 다시 소집되어 히로시마시 선박통신연대에서 암호교육을 받은 뒤 선박사령부에 배속, 참모부 정보반으로 전속되었다.[21] 연합 통신의 주간지를 바탕으로 국제 정보를 정리하여 보고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비망록'이라는 메모를 남겼다.[84] 8월 6일, 사령부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원폭이 투하되는 것을 경험했다.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맞이하고 9월 귀향했다.[85] 군대 경험에 대해 "상관의 의도를 알아맞춰야 하는 것은 궁궐의 하녀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하며, 이러한 경험이 '자립한 개인'을 목표로 하는 사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했다.[86][26]

2. 3. 전후 활동과 민주주의 담론 주도

1946년 2월 도쿄 제국 대학 헌법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어 헌법 개정 절차를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위원장 미야자와 도시요시는 마루야마가 제시한 '8월혁명설'을 발전시켜 「8월혁명과 국민주권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87] 마루야마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세계』 46년 5월호에 발표했다.[88] 이후 전후민주주의 사상전개 국면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미시마 타이샤(三島大社) 등에 설치된 서민대학 등 여러 곳에서 강연을 다녔다. 1950년 교수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 평화문제담화회의 중심인물로 1960년 안보투쟁을 지지하는 등 아카데미즘을 넘어 민주주의의 여론 주도자로 발언하고 영향을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학술계와 저널리즘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인은 현실정치분석을 분점으로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본점이라고 불렀다.[89]

1960년대 후반엔 반대로 기만적인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전공투 학생 등에게 격렬하게 공격당했다. 1968년 도쿄대 투쟁시 연구실을 점거하고 귀중한 자료나 필름을 파괴한 전공투 학생들이 기동대에 의해 해산되고 법학연구소에 들어갔다가 이런 회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남겼다. "진흙발에 뭉개진 책이나 문헌을 닦아내며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되지만 연구결과는... 이것이 문화의 파괴가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것인가. 누를수 없는 분노로 입술이 떨렸다."[90]마루야마는 파시스트도 하지 않은 일을 할 것인가라고 분노했다.[91] 이에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겨우 연구실이 대학생에게 짓밟힌 것으로 그렇게 과장하느냐며 자신들은 자료 수집을 위해 어떻게든 도서관에 줄서서 들어가면서도 틈틈이 생활비를 벌기위해 일을 하면서 연구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92]

1959년 초기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에 참여했으며, 다양한 시위 활동과 조약 반대 성명 발표에 참여했다.[5] 1960년 5월 19일 기시 노부스케 수상이 일본 국회를 통해 조약을 강행 처리하자 마루야마는 반조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5월 24일, 그는 도쿄 중심부의 한 강당에서 수용 인원을 초과한 군중 앞에서 "선택의 때"(''선택의 toki'')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마루야마는 일본이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서 선택을 앞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시의 폭거로 인해 평범한 일본인들은 조약 자체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반조약 시위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1969년 간기능 악화로 입원했고[93] 1971년 교수직을 조기 퇴직했다. 1974년 도쿄 대학 명예 교수, 1978년 일본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1993년 간암을 발견했다.[94] 이와나미서점에서 전집을 발간하던 중 1996년 8월 15일에 82세로 사망했다. 가족끼리 장례를 치르고 사망 1주일 뒤에 발표되었다. 8월 26일 추모회가 열렸다.[95]

스스로 딜레탕트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문학, 영화,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어서[96] 퇴임후 만년까지 음반과 스코어를 수집, 분석하며 지냈다. 베토벤, 바그너, 푸르트벵글러를 좋아했다.

2. 4. 말년과 죽음

마루야마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다.[2] 1960년대 후반부터 전공투 학생들로부터 “허위로 가득 찬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격렬하게 비난받았다.[31] 1969년 3월 10일, 간 기능 장애로 입원했으며, 같은 해 6월과 1970년 2월에도 계속해서 입원했다.[31] 심적 고통과 병이 겹쳐 1971년 3월, 도쿄대학을 조기 퇴직했다. 1974년 5월에는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되었고, 1978년 11월에는 일본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은퇴 후 주요 업적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요 저서인 「문명론개요」(Bunmeiron no Gairyaku)에 대한 3권짜리 해설서였다. 이는 소규모 연구팀과 함께 진행한 장기 세미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1986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문명론개요를 읽는다」(「文明論之概略」を読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1] 이 외에도 일본 문화 또는 현대 일본의 번역 과정에 대한 주목할 만하고 논쟁적인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바소 오스티나토 개념을 인간 사상의 사회·역사적 기저를 포착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적 틀로 경험하며,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11]

1993년 12월 9일, 간암임을 알게 되었다.[32] 1996년 8월 15일(종전 기념일), 이와나미 쇼텐에서 『마루야마 마나오 전집』을 간행하던 중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가족만으로 비밀 장례를 치렀고, 약 1주일 후 사망 사실이 공표되었다. 8월 26일에는 신주쿠구신농정의 센니치야 카이도에서 “추모회”가 열렸다.[33] 묘소는 다마령원이다.

3. 사상과 영향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뒤 이와나미 쇼텐의 「세카이」지에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기고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초국가주의[ultra nationalism]'를 맹렬히 비판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심층 분석하였다. 그가 비판한 초국가주의의 문제는 일본 제국의 통치 원리가 중립에 기초한 공익 추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모든 가치를 천황제를 이용해 독점했다는 데 있었다. 즉 일본 제국의 전체주의란 개인의 자유라는 보편 가치의 침해가 아니라, 국가가 국가로서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결과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나 민주주의를 보편의 가치로 신봉하지 않았고, 국가가 여러 가지 특수한 가치에서 중립을 견지해야 하는데도 초국가주의는 가치의 독점에 집중해 특정한 가치, 즉 ‘천황=지고(至高)한 선’이라는 것을 보편화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헤겔주의자였으며, 서구의 근대를 인류사의 절대 가치로 여겼고 이를 전 인류의 목표로 승화시켰다. 또한 동양에서 유일하게 중세를 거친 일본은 근대 또한 동양에서 유일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간주한 서구 중심주의적 역사관을 뼛속까지 체화한 인물이다.[97]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년). 丸山(마루야마)의 저서 중 처음으로 영역 출판되었다.


일본 정치 사상사에서의 업적도 중요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집필한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는 헤겔[37]과 프란츠 보르케나우[38]의 연구를 일본 근세에 응용하여, “자연” - “인위”의 범주[39]를 사용하여 유교 사상(주자학)에서 오규 소라이·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근대적 사유”가 성장해 온 과정을 그린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의 사상은 민주주의(민권)와 민족주의(국권)가 건전한 형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하며, 특히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후쿠자와 유키치를 높이 평가하여 “후쿠자와 홀릭”임을 자인했다. 일본 학사원에서는 주로 유키치의 연구를 수행했고, 일본 사상사 연구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후쿠자와의 연구에 쏟았다. 마루야마의 후쿠자와 유키치론(『「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등)은 그 이후의 사상사가들에게 현재까지 간과할 수 없는 금자탑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일본의 사상』(이와나미 신서, 1961)의 발행 부수는 2005년 5월 현재, 누계 102만 부이다. 대학교수들로부터 “학생 필독서”라고 평가되는 등,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있다”는 것과 “한다”는 것』은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도 채택되고 있다[40]. 1985년에는 프랑스에서의 첫 번째 일본어 아그레가시옹(교수 자격 시험)의 일불역, 텍스트 분석 시험 문제에도 선정되었다[41].

일찍이 해외에 번역되어 현재도 재판되고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우선, 1963년에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Thought and Behavior in Modern Japanese Politics''가 영역 출판되었고(나중에 중국어 번역도 이루어졌다), 이어 1974년에는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 ''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이 영역되었고, 1996년에 그 불역 ''Essais sur l'histoire de la pensée politique au Japon''이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근대 일본의 지식인』 ''Denken in Japan''이, 2007년에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근대적 사유” 등을 수록한 ''Freiheit und Nation in Japan''이 각각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마루야마론”은 서거 전후부터 매년 수 권의 속도로 계속 간행되고 있다.

마루야마의 세미나에서는 많은 정치학자·사회 사상사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총칭 "마루야마 학파"로 불리며 일본의 정치학을 비약시켰다[42]。일본 정치 사상사 전공 이외에도, 시노하라 하지메, 후쿠다 간이치, 사카모토 요시카즈, 교고쿠 준이치, 미타니 다이치로와 같은 도쿄대학 계열의 정치학자는 많든 적든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공언하고 있다.

협의의 정치학계 외에도 사회 과학자인 고무로 나오키 등은 마루야마로부터 정치학을 배웠고, 작가 쇼지 가오루[43], 이색 관료 아마가이 나오히로[44], 사회민주연합 창설자이자 참의원 의장이 된 에다 사쓰키, 교육학자인 호리오 데루히사 등도 마루야마 세미나 출신이다.

평양에서 첫 군 복무를 했을 때, 마루야마는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을 법한 이등병에게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47] 마루야마는 전후, "사실, 군대에 들어가면 '지방'의 사회적 지위나 가문 따위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귀족 자제가 흙손 상등병에게 뺨을 맞는다. 뭔가, 그런 유사 민주적인 것이 사회적 계급 차이에서 오는 불만의 마취제 역할을 상당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48]"라고 말했지만, 그 영향의 크기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그러한 역설적인 민주적 성격이라는 것을, 좀 더 말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49]"라고도 언급했다.

=== 주요 개념 ===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 정치 사상 연구에서 "세(勢, 이키호히)"가 "유덕(有徳)"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충성과 이단(忠誠と異端)』에 수록된 "역사 의식의 '고층(古層)'"에서 그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응요 천황(雄略天皇)이 "천황이심위사(天皇以心為師). 오살인중(誤殺人衆). 천하비방언(天下誹謗言), 대악천황야(大悪天皇也)"라고 기록된 반면, "시시(是時), 백성함언(百姓咸言), 유덕천황야(有徳天皇也)"라고도 기록된 것을 지적했다. 마루야마는 "대악(はなはだあしくま, 대단히 악하다)"이라는 형용사가 일반적인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문맥상 명확하다고 보았다. 그는 "유덕천황"이나 "지덕천황(至徳天皇)"이라는 칭호가 중국 고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규범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해석했다. 중국 정사(正史)에서 인물 묘사에 "대악"이면서 동시에 "유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일본서기』 편찬자에게 (광의의) 유교적 규범 관념이 이미 알려져 있고, 실제로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키호히(いきほひ)=덕(徳)이라는 용법"이 "일본의 가치 의식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 비판 ===

마루야마는 영향력이 큰 만큼 다양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비판에 대응하여 논란을 만들진 않았다. 마루야마는 비판을 묵살하여 결과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있다.[61]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서양 근대 부르주아지 시민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근대주의자, 시민파 학자라는 비판을 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마루야마 류의 진보적 문화인들이 대학에 안주하며 대중에게서 유리되었다고 했다. 그는 마루야마를 '고공비행적 사고'上空飛行的思考의 소유자라 불렀다.[62] 요시모토의 마루야마 비판은 신좌파와 전공투 학생들에게 이어져 도쿄대 투쟁에서 권위주의자, 귀족주의자로 비판받았다.[63] 일본공산당은 마루야마가 공산당의 반전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므로 공산당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방관자의 사상이라며 규탄했다.

마루야마가 공산당은 반전 운동을 했다지만 실제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그래서 공산당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일본공산당은 방관자의 사상이라며 규탄했다.

제자인 마쓰시타 게이이치같은 이들이 안보투쟁이후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고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다고 주장했지만 마루야마는 그런 정치참여는 파트타임일 뿐이라고 말했다. 전공투 리더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마루야마의 일기를 읽은 뒤, 자신을 두고 한 얘기같다고, 도쿄대 전공투 운동에서 방관자 역할로 일관한 마루야마는 이론과 실천에 이중잣대가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했다.[101]

보수파는 마루야마의 논의가 서구엔 있고 일본엔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결여이론'이라고 비판한다.[102] 또한 마루야마의 일본 파시즘론은 초국가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103] 다니자와 에이이치는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어디에도 일본 파시즘의 개념 규정이 나오지 않으며, 일본 국민을 두 유형으로 나누어 파시즘의 사회적 기반으로 단정하고 경멸했다고 비판하며, 마루야마를 차별 의식의 화신으로 규정했다.[64] 우메하라 다케시는 사상적 전통이 일본에서는 형성되지 않았다고 정의하는 마루야마에게 묘법연화경 같은 고전을 읽거나 일본의 미술, 문학, 풍속을 조사하지 않고 그렇게 단정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70]

사상사 연구자 하시카와 분조는 마루야마에게 영향받아 쓴 논문「쇼와 초국가주의의 여러 모습」에서 마루야마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한다.[66] 제자인 후지타 쇼조는 『천황제 국가의 지배 원리』를 썼다. 제자인 와타나베 히로시는 동아시아 왕권론이라는 관점으로 일본정치사상사를 다시 쓰고있다. 고야스 노부쿠니는 『사건으로서의 「소라이학」』에서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을 담론론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다른 저서 『일본 근대사상 비판』에서 고층론이 에도 시대 암흑관·메이지 유신 찬양이 되어 버려 근대 비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가리베 다다시는 『「유신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고층」론을 비판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강상중, 요네타니 마스후미, 사카이 나오키 등이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국민주의나 민족주의로 치우친 면을 비판한다.[67] 사이토 준이치, 가사이 히로타카 등은 마루야마의 60년대 이후에는 다원주의와 시민사회 옹호가 더 드러난다고 지적했다.[68]

미즈타니 산코는 마루야마의 논의가 미국을 비판하고 북한과 소련에 경도되어있었다며 외교음치, 정치적축농증에 걸렸다고 평했다.[65] 오쓰카 히사오가 가지야마 치카라와 공역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개정하며 오쓰카 단독번역으로 적으려하자 이를 베버 연구자인 안도 히데하루가 비판했으며 카지야마 치카라도 단독번역판을 새로 내려고 했다. 이때 마루야마가 압력을 가해 이를 방해했다는 폭로가 있다.[71] 시무라 고로는 마루야마의 한학과 음악에 대한 저작에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한국 전쟁 남침설을 40년 이상이나 알 수 없다며 계속 부정한 것을 지적했다. 마루야마는 저널리스트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72]

3. 1. 주요 개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 정치 사상 연구에서 "세(勢, 이키호히)"가 "유덕(有徳)"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충성과 이단(忠誠と異端)』에 수록된 "역사 의식의 '고층(古層)'"에서 그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응요 천황(雄略天皇)이 "천황이심위사(天皇以心為師). 오살인중(誤殺人衆). 천하비방언(天下誹謗言), 대악천황야(大悪天皇也)"라고 기록된 반면, "시시(是時), 백성함언(百姓咸言), 유덕천황야(有徳天皇也)"라고도 기록된 것을 지적했다. 마루야마는 "대악(はなはだあしくまします, 대단히 악하다)"이라는 형용사가 일반적인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문맥상 명확하다고 보았다. 그는 "유덕천황"이나 "지덕천황(至徳天皇)"이라는 칭호가 중국 고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규범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해석했다. 중국 정사(正史)에서 인물 묘사에 "대악"이면서 동시에 "유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일본서기』 편찬자에게 (광의의) 유교적 규범 관념이 이미 알려져 있고, 실제로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키호히(いきほひ)=덕(徳)이라는 용법"이 "일본의 가치 의식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3. 2. 비판

마루야마는 영향력이 큰 만큼 다양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비판에 대응하여 논란을 만들진 않았다. 마루야마는 비판을 묵살하여 결과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있다.[61]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서양 근대 부르주아지 시민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근대주의자, 시민파 학자라는 비판을 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마루야마 류의 진보적 문화인들이 대학에 안주하며 대중에게서 유리되었다고 했다. 그는 마루야마를 '고공비행적 사고'上空飛行的思考의 소유자라 불렀다.[62] 요시모토의 마루야마 비판은 신좌파와 전공투 학생들에게 이어져 도쿄대 투쟁에서 권위주의자, 귀족주의자로 비판받았다.[63] 일본공산당은 마루야마가 공산당의 반전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므로 공산당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방관자의 사상이라며 규탄했다.

마루야마가 공산당은 반전 운동을 했다지만 실제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그래서 공산당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일본공산당은 방관자의 사상이라며 규탄했다.

제자인 마쓰시타 게이이치같은 이들이 안보투쟁이후 사회 운동이 활발해졌고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다고 주장했지만 마루야마는 그런 정치참여는 파트타임일 뿐이라고 말했다. 전공투 리더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마루야마의 일기를 읽은 뒤, 자신을 두고 한 얘기같다고, 도쿄대 전공투 운동에서 방관자 역할로 일관한 마루야마는 이론과 실천에 이중잣대가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했다.[101]

보수파는 마루야마의 논의가 서구엔 있고 일본엔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결여이론'이라고 비판한다.[102] 또한 마루야마의 일본 파시즘론은 초국가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103] 타니자와 에이이치는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어디에도 일본 파시즘의 개념 규정이 나오지 않으며, 일본 국민을 두 유형으로 나누어 파시즘의 사회적 기반으로 단정하고 경멸했다고 비판하며, 마루야마를 차별 의식의 화신으로 규정했다.[64] 우메하라 타케시는 사상적 전통이 일본에서는 형성되지 않았다고 정의하는 마루야마에게 묘법연화경 같은 고전을 읽거나 일본의 미술, 문학, 풍속을 조사하지 않고 그렇게 단정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70]

사상사 연구자 하시카와 분조는 마루야마에게 영향받아 쓴 논문「쇼와 초국가주의의 여러 모습」에서 마루야마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한다.[66] 제자인 후지타 쇼조는 『천황제 국가의 지배 원리』를 썼다. 제자인 와타나베 히로시는 동아시아 왕권론이라는 관점으로 일본정치사상사를 다시 쓰고있다. 코야스 노리쿠니는 『사건으로서의 「소라이학」』에서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을 담론론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다른 저서 『일본 근대사상 비판』에서 고층론이 에도 시대 암흑관·메이지 유신 찬양이 되어 버려 근대 비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카리베 나오시는 『「유신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고층」론을 비판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강상중, 요네타니 마스후미, 사카이 나오키 등이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국민주의나 민족주의로 치우친 면을 비판한다.[67] 사이토 준이치, 가사이 히로타카 등은 마루야마의 60년대 이후에는 다원주의와 시민사회 옹호가 더 드러난다고 지적했다.[68]

미즈타니 산코는 마루야마의 논의가 미국을 비판하고 북한과 소련에 경도되어있었다며 외교음치, 정치적축농증에 걸렸다고 평했다.[65] 오쓰카 히사오가 카지야마 치카라와 공역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개정하며 오쓰카 단독번역으로 적으려하자 이를 베버 연구자인 안도 히데하루가 비판했으며 카지야마 치카라도 단독번역판을 새로 내려고 했다. 이때 마루야마가 압력을 가해 이를 방해했다는 폭로가 있다.[71] 시무라 고로는 마루야마의 한학과 음악에 대한 저작에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한국전쟁 남침설을 40년 이상이나 알 수 없다며 계속 부정한 것을 지적했다. 마루야마는 저널리스트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72]

4. 저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 등이 있다.


  • 『일본정치사상사연구』(東京大学出版会, 1952년, 개정판 1983년)는 헤겔[114]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 등의[115] 연구를 일본 근세에 응용하여, 오규 소라이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근대적 사유형성과정을 자연과 작위라는 틀을[116] 통해 묘사했다.
  • * ''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영어, trans. by Mikiso Hane,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1989)
  • * ''Essais sur l’histoire de la pensée politique au Japon''프랑스어, trad. par Jacques Joly (Les Belles Lettres, 2018)
  •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未來社 〈상・하〉 1956-57년, 증보판 전1권, 1964년, 신장판 2006년)
  • * ''Thought and Behaviour in Modern Japanese Politics''영어, edited by Ivan Morris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 『일본의 사상』(岩波新書 청판, 1961년, 개정판 2018년)은 2005년 5월까지 102만부가 팔렸고 대학생 필독서라고 평가받았다. 일부 텍스트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1985년에는 프랑스의 일본어 교수자격시험의 문제로도 등장했다.[117]
  • 『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みすず書房, 1976년, 신장판 2018년)은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岩波新書 황판(상중하), 1986년)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높게 평가하여 그의 팬을 자처했다.
  • 『충성과 반역――변혁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筑摩書房, 1992년/치쿠마 학예문고, 1998년, 가와사키 오사무 해설)


그 외 저서로는 『정치의 세계』(御茶の水書房, 1952년), 『후위의 위치에서――추보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미라이샤, 1982년), 『마루야마 마나오 전중 비망록』(일본도서센터, 1997년), 『자기내 대화――3권의 노트에서』(미스즈 서방, 199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 他六篇』(마츠자와 히로아키 편, 이와나미 분코, 2001년) 등이 있다.

또한, 『마루야마 마사오 전집』(전16권 별권1, 이와나미 쇼텐, 1995~1997년, 증보신판 2015년), 『마루야마 마사오 강의록』(전7권, 도쿄대학출판회, 1998~2000년), 『마루야마 마사오 서간집』(전5권, 미스즈 쇼보, 2003~2004년) 등이 출간되었다.

5.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참조

[1]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2021-12-07
[2] 뉴스 Obituary: Masao Maruyama https://www.independ[...] 1996-08-23
[3] 서적 State and Intellectual in Imperial Japan: The Public Man in Crisis California University Press
[4] 서적 op. cit.
[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9]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Maruyama Masao and the Fate of Liberalism in Twentieth-Century Japan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House of Japan
[11] 학술지 Approaching the unsynthesizable in international politics: Giving substance to security discourses through basso ostinato? http://curve.coventr[...] 2016-07-13
[12] 웹사이트 http://www.editions-[...]
[13] 웹사이트 1993 Award for Distinguished Contributions to Asian Studies http://www.aasianst.[...]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AAS)
[14] 학술지 シンポジウム「丸山思想史学の地平」について http://ajih.jp/backn[...] 日本思想史学会
[15] 서적 丸山眞男集 別巻 岩波書店 1997-03-13
[16]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みすず書房
[17] 웹사이트 「知の巨人たち」 第3回 民主主義を求めて~政治学者 丸山眞男~(2014年7月19日放送) https://cgi2.nhk.or.[...] 日本放送協会|NHK 2019-07-08
[18] 서적 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 岩波新書
[19] 서적 丸山眞男 岩波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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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丸山眞男集 別巻
[22] 서적 丸山眞男 岩波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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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학술지 病床における丸山眞男─その生と死のはざまで
[25] 서적 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 岩波新書
[26] 서적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
[27] 서적 丸山眞男集 別巻
[28] 서적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 未来社 1956-12-15
[29] 간행물 先生の学問的姿勢について憶う
[30] 서적 出身県別 現代人物事典 西日本版 サン・データ・システム
[31] 서적 丸山眞男集 別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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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적 弔辞 劇的な人生を送る言葉 文藝春秋
[34] 웹사이트 流動性と多様性 ─ 丸山眞男の家族 https://www.ritsumei[...]
[35]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https://jahis.law.na[...]
[36] pdf 結婚 https://www.twcu.ac.[...] 東京女子大学
[37] 書籍 歴史哲学
[38] 書籍 封建的世界像から近代的世界像へ みすず書房
[39] 텍스트 ゲマインシャフトとゲゼルシャフト
[40] 웹사이트 平成20年度改訂版 東京書籍「現代文1」(現文031) http://ten.tokyo-sho[...] 2016-12-00
[41] 書籍 丸山眞男の世界 みすず書房
[42] 웹사이트 丸山眞男 https://kotobank.jp/[...] 2018-07-04
[43] 소설 赤頭巾ちゃん気をつけて
[44] 텍스트 坂の下の沼
[45] 書籍 自己内対語 みすず書房
[46] 書籍 聞き書 南原繁回想録 東京大学出版会
[47] 書籍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2008-00-00
[48] 잡지 思想の科学 1949-10-00
[49] 書籍 マックス・ウェーバーの例会にて 中央公論新社 2008-00-00
[50] 뉴스 左翼キャスター・コメンテーター 進歩的文化人の後裔は限りなく軽い http://ironna.jp/art[...] irronna(産経新聞)
[51] 뉴스 新聞と9条 朝日新聞 2016-02-15
[52] 텍스트 私の1960年代
[53] 書籍 吉本隆明全著作集 続 10 思想論Ⅱ
[54] 논문 「正統と異端」研究会報告原稿(二) https://twcu.repo.ni[...] 東京女子大学比較文化研究所附置丸山眞男記念比較思想研究センター報告 2017-00-00
[55] 잡지 時は武蔵野の上をも 青土社 1994-01-00
[56] 書籍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 2002-00-00
[57] 書籍 丸山眞男座談
[58] 書籍 丸山真男集別巻 年譜・著作目録 岩波書店
[59] 웹사이트 dilettante :en:wikt:dilettante
[60] 書籍 丸山眞男 音楽の対話 文春新書
[61] 書籍 丸山眞男の時代 中公新書
[62] 書籍 柳田国男論・丸山真男論 ちくま学芸文庫
[63] 書籍 丸山眞男の時代, 革新幻想の戦後史, 革命的な、あまりに革命的な
[64] 書籍 悪魔の思想―「進歩的文化人」という名の国賊12人 クレスト社 1996-02-00
[65] 書籍 丸山真男 ちくま新書
[66] 書籍 橋川文三著作集 5 筑摩書房
[67] 書籍 丸山真男を読む 状況出版 1997-00-00
[68] 잡지 丸山眞男における多元化のエートス, ナショナル・デモクラシーと主体性 思想 1998-01-00, 1999-02-00
[69] 書籍 日本思想史研究 中国思想展開の考察 研文出版 2015-00-00
[70] 書籍 美と宗教の発見 筑摩書房 1969-00-00
[71] 서적 学問とは何か ミネルヴァ書房
[72] 서적 「丸山眞男という人」、鳥のように http://www.chikumash[...] 筑摩書房
[73] 간행물 4巻目(2018年6月に刊)と、5巻目は研究討議「正統と異端(一・二)」中田喜万、河野有理解説 2018-06
[74] 기타 1983年1月に山の上ホテルで行った。『丸山眞男座談9』に再録。 1983-01
[75] 서적 『丸山眞男集 別巻』 岩波書店 1997-03-13
[76] 서적 自己内対語 みすず書房
[77]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みすず書房
[78] 서적 聞き書 南原繁回想録 東京大学出版会 1956-02
[79] 웹인용 「知の巨人たち」 第3回 民主主義を求めて~政治学者 丸山眞男~(2014年7月19日放送) https://cgi2.nhk.or.[...] 日本放送協会(NHK) 2019-07-08
[80] 기타 1940년 동경제국대학의 조교로 근무하던 중 국가학회잡지에 기고를 시작해, 1944년까지 쓴 세 편의 논문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다. 1940-1944
[81] 서적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82] 간행물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1949-10
[83] 간행물 学歴・階級・軍隊 中央公論新社
[84] 기타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45頁。
[85] 서적 丸山眞男――リベラリストの肖像 岩波新書
[86] 서적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
[87] 기타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47頁。
[88] 서적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 未来社 1956-12-15
[89] 간행물 先生の学問的姿勢について憶う 1996-10
[90] 뉴스 新聞と9条 朝日新聞 2016-02-15
[91] 기타 私の1960年代
[92] 서적 収拾の論理
[93] 기타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70頁。
[94] 기타 『丸山眞男集 別巻』前掲書、85頁。
[95] 서적 弔辞 劇的な人生を送る言葉 文藝春秋
[96] 서적 丸山眞男 音楽の対話 文春新書
[97] 웹사이트 아름다운 나라는 없다 http://www.kyosu.net[...] 교수신문 2006-10-31
[98] 서적 丸山眞男の時代 中公新書
[99] 서적 批評とは何か/丸山真男について 三交社
[100] 서적 革命的な、あまりに革命的な
[101] 기타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102] 서적 近代日本の精神構造
[103] 서적 일본의 내셔널리즘
[104] 서적 悪魔の思想―「進歩的文化人」という名の国賊12人 クレスト社 1996-02
[105] 서적 美と宗教の発見 筑摩書房
[106] 서적 橋川文三著作集 5 筑摩書房
[107] 서적 丸山真男を読む 状況出版 1997
[108] 논문 丸山眞男における多元化のエートス 1998-01
[109] 서적 丸山真男 ちくま新書
[110] 서적 学問とは何か ミネルヴァ書房
[111] 서적 「丸山眞男という人」、鳥のように http://www.chikumash[...] 筑摩書房 2010
[112] 소설 赤頭巾ちゃん気をつけて
[113] 뉴스 坂の下の沼
[114] 서적 歴史哲学
[115] 서적 封建的世界像から近代的世界像へ みすず書房
[116] 웹사이트 # 텐니스의 개념 설명으로 웹사이트로 분류 共同体#ゲマインシャフトとゲゼルシャフト
[117] 서적 丸山眞男の世界 みすず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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