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모리스 블랑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리스 블랑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로, 190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2003년 사망했다. 그는 문학, 죽음, 그리고 언어에 대한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하며,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죽음과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초기에는 극우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나, 이후 전향하여 문학 비평과 소설 창작에 전념했다. 블랑쇼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프란츠 카프카의 영향을 받아 문학 언어와 작가의 역할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제시했으며, 롤랑 바르트, 자크 데리다 등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 《토마 알 수 없는 자》, 비평서 《문학의 공간》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 롤랑 바르트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이자 기호학자, 사상가인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와 `신화론`으로 이름을 알리고 구조주의와 기호학 연구를 거쳐 포스트구조주의적 시도를 보였으며, '작가의 죽음' 개념을 통해 텍스트 해석의 다의성과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 츠베탄 토도로프
    츠베탄 토도로프는 불가리아 출신의 기호학자, 문학 평론가, 철학자이며, 러시아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를 프랑스에 소개하고 문학 이론과 철학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으며, 루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프란츠 카프카 연구자 - 질 들뢰즈
    질 들뢰즈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로,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차이, 반복, 탈영토화 등의 개념을 통해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쳤으며,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현대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프란츠 카프카 연구자 - 엘리아스 카네티
    엘리아스 카네티는 불가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사회학자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대표작으로는 사회 비판적 소설 『현혹』, 군중 심리 분석 논문 『군중과 권력』, 회고록 3부작 등이 있다.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동문 - 알베르토 후지모리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일본계 페루인 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페루 대통령을 지내며 경제 개혁과 게릴라 척결에 기여했으나,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침해 등으로 논란이 되었고, 실각 후 도피 및 체포, 수감 생활을 거쳐 2024년 사망했다.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동문 - 루이 네엘
    루이 네엘은 프랑스 물리학자이며, 고체 자기적 성질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반강자성 및 페리자성을 발견했으며, 네엘 온도를 정의하고 지구 자기장 연구에 기여했다.
모리스 블랑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모리스 블랑쇼
로마자 표기Maurice Blanchot
출생일1907년 9월 22일
출생지프랑스 손에루아르 드브루즈
사망일2003년 2월 20일
사망지프랑스 이블린 메닐생드니
학력
학사스트라스부르 대학교 (1922년)
석사파리 대학교 (1930년)
철학적 배경
지역서양 철학
시대20세기 철학
학파대륙 철학
미적 경험의 현상학
관심 분야
주요 관심사윤리학
시학
죽음의 철학
언어 철학
문학 비평
정치 철학
주요 사상
주요 사상중성적인 것 (Le neutre)
죽을 권리
두 종류의 죽음
영향
영향을 준 인물앙토냉 아르토
조르주 바타유
프리드리히 횔덜린
마르틴 하이데거
프란츠 카프카
알렉상드르 코제브
로트레아몽 백작
에마뉘엘 레비나스
스테판 말라르메
프리드리히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르키 드 사드
영향을 받은 인물사무엘 베케트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폴 드 만
롤랑 바르트
크리스토퍼 핀스크
레슬리 힐
사라 코프만
피에르 조리스
마리오 코피치
폴 오스터
미셸 푸코
장뤼크 낭시
기타
직업소설가, 문학 비평가

2. 생애

프랑스의 주요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젊은 시절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엠마뉘엘 레비나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고, 이 시기 악시옹 프랑세즈극우 정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특히 『존재와 시간』은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에는 극우 성향의 언론 매체에서 저널리스트이자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며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 점차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문학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그의 사상은 크게 변화했으며, 특히 나치즘홀로코스트의 경험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조르주 바타이유와의 교류를 시작했고, 유대인 친구 레비나스의 가족을 돕는 등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군에게 총살당할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전후 블랑쇼는 집필 활동에 몰두하며 소설과 비평 양면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며 '얼굴 없는 작가'로 남고자 했고, 글쓰기와 존재, 죽음의 문제를 탐구한 『문학 공간』(1955)과 같은 저작을 통해 20세기 프랑스 사상계,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누보 로망 논쟁에 참여하는 등 동시대 문학의 흐름에도 관여했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적 입장에서 사회 문제에 참여했다.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며 군인들의 병역 거부를 지지하는 121인 선언 작성에 참여했으며, 1968년 5월 혁명 때에는 학생 운동을 지지하며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관련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꾸준히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냈고, 2003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07-1930)

모리스 블랑쇼는 1907년 9월 22일 프랑스 손에루아르 드브루즈 근처 캥(Quain)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5][6][7]

1925년까지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독일어철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 한 살 위인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현상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를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블랑쇼는 레비나스에 대해 "서로 말을 놓았던 (''존칭인 vous가 아닌 친칭인 tu로 칭한다는 뜻'') 엠마뉘엘 레비나스, 유일한 친구— 아, 동떨어진 친구—; 말을 놓았던 것은 단지 우리가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 절대 깨지 않으리라 희망하는 약속이다."(<우정을 위하여>)라고 언급하며 깊은 우정을 표현했다. 대학 시절 블랑쇼는 왕당파 극우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에 드나들었으며, 스스로도 극우 사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1928년, 친구 레비나스의 도움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접하고 강독하기 시작했다. 블랑쇼는 이 경험을 "진정한 지적 충격"이자 "최고의 사건"으로 회고하며, 이 책이 자신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을 강조했다.[8] 하이데거 철학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적 여정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929년 파리로 이주하여 고등 교육 자격(DES, 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을 준비했다. 1930년에는 파리 대학교(소르본)에서 "La Conception du Dogmatisme chez les Sceptiques anciens d'après Sextus Empiricus|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따른 고대 회의론자들의 독단주의 개념프랑스어"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M.A.)에 준하는 DES 학위를 취득했다.[8]

2. 2. 극우 저널리스트 시기 (1930-1940)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DES 학위[8]를 취득한 이후, 파리에서 정치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주류 보수 성향의 일간지 ''Journal des débats''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30년대 초반, 블랑쇼는 여러 급진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1933년에는 강한 반독일 성향의 일간지 ''Le rempart''와 폴 레비(Paul Lévy)가 발행하던 반나치 논조의 주간지 ''Aux écoutes''에서 편집자를 맡았다. 1936년과 1937년에는 극우 성향의 월간지 ''Combat''과 민족주의-생디칼리슴 성향의 일간지 ''L'Insurgé''에도 기고했다. 특히 ''L'Insurgé''는 일부 기고자들의 반유대주의 문제로 인해 블랑쇼가 개입한 이후 결국 폐간되었다. 이 시기 블랑쇼는 당시 프랑스 정부와 국제 연맹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들을 다수 발표했으며, 동시에 나치 독일이 유럽 평화에 가하는 위협에 대해 꾸준히 경고했다.

블랑쇼는 특히 극우 성향의 매체 《콩바(''Combat'')》에서 우익 이데올로그로서 활동하며 급진적인 극우 논조의 글을 폈다. 피에르 안드뢰의 저작에 따르면, 블랑쇼는 1930년대에 훗날 친독 파시스트 작가가 되는 피에르 드뤼-라-로셸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부르주아 사회와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경향을 비판했다. 또한 영웅적 행동과 희생을 통해 현 체제를 타파하고 프랑스의 정신적 가치를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현실에 대한 '거부' 정신과 '혁명'의 의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우익 사상과는 차이를 보였다. 서곡 수는 이 점이 나중에 블랑쇼를 우익적 입장에서 전환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그의 초기 문학 작품인 『수수께끼의 남자 토마』 등은 이 시기에 집필되기 시작했다.

2. 3. 전향과 제2차 세계 대전 (1940-1945)

1930년대 후반 무렵 정치 활동에서 점차 손을 뗀 블랑쇼는 문학 활동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6] 1940년 12월, 그는 1930년대에 강력한 반파시스트 글을 썼던 조르주 바타이유를 만났고, 1962년 바타이유가 사망할 때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비공산주의적 좌익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5][6]

나치 독일 점령기 동안 블랑쇼는 파리에 머물렀다. 생계를 위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보수 성향의 일간지 Journal des débats에서 서평가로 활동했다.[5] 그는 이 서평들을 통해 사르트르, 카뮈, 바타이유, 미쇼, 말라르메, 뒤라스와 같은 작가들을 비시 정권 하의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동시에 언어의 모호한 수사적 본질과, 진실 혹은 허위라는 이분법적 개념에 저항하는 문자 언어의 고유한 속성을 탐구하며 훗날 프랑스 비평 사상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5] 그는 장 폴랑(Jean Paulhan)이 제안했던 협력주의 성향의 Nouvelle Revue Française 편집장직을 거절했으며[5], 레지스탕스 활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또한, 파시스트이자 반유대주의 작가이며 나치 부역자였던 로베르 브라실라(Robert Brasillach)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5]

이 시기 블랑쇼의 정치적 '전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가족을 홀로코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숨겨주었으며[6], 전쟁 전부터 나치즘을 비판했던 바타이유의 저서 『내적 체험』 집필 과정에도 참여했다(바타이유의 증언 존재).[6] 이러한 사실들은 전쟁 중 이미 그의 정치적 입장이 우익적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6] 다만, 일각에서는 그가 친독 중립 성향의 비시 정부에서 직책을 맡았다는 보고도 있으며[6], 평론가 피에르 앙드레(Pierre André)는 블랑쇼의 전향을 두고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즘의 대두와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블랑쇼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 전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7] 그는 이후 여러 차례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며 비극에 대한 통한의 심정을 드러냈다.[7]

1944년 6월, 블랑쇼는 나치 총살대에 의해 처형될 뻔한 극적인 경험을 했다.[5][7]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글 「나의 죽음의 순간」에 상세히 기록되었다[5]). 당시 총살 집행 병력은 블라소프 군 소속의 러시아인들이었으나, 지휘관은 독일인이었다.[7] 도스토옙스키가 사형 직전 사면받았던 경험에 비견되기도 하는[7] 이 사건은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소설 『백일의 광기』와 마지막 소설이 된 『나의 죽음의 순간』 등에 그 영향이 나타난다.[7]

한편, 1941년에는 그의 첫 소설인 『수수께끼의 사나이 토마』 초판이 출간되었다.[6]

2. 4. 전후 활동과 문학적 성취 (1945-196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블랑쇼는 소설가이자 문학 비평가로서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조르주 바타유가 창간한 잡지 「크리티크」 편집에 참여하며 글쓰기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프란츠 카프카의 에크리튀르에서 발견한 작가의 부재, 죽음의 경험, 무위, 망각과 같은 개념들을 글쓰기 행위 자체와 연결 지었다.

1947년, 블랑쇼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외딴 마을 에즈(Èze)로 이주하여 약 10년간 머물렀다. 이 시기 그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들과 달리 학계를 통한 생계 유지를 피하고 글쓰기에만 의존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는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동시에 그는 점차 외부와의 교류를 줄이고 상대적인 고립 생활을 시작했다. 레비나스와 같은 가까운 친구들과도 수년간 만나지 않았지만, 긴 편지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고립은 평생 그를 괴롭혔던 건강 문제와 더불어, 그의 글쓰기 방식 및 작품 속 인물들의 특징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전후 블랑쇼는 자신의 얼굴 사진조차 공개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만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는 "글을 쓰는 자리에서, 그리고 쓰여진 것에서는 작가는 부재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얼굴 없는 작가", "부재하는 작가"로 불리게 된다.

1955년 블랑쇼는 그의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문학 공간』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며 마르틴 하이데거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글쓰기, 에크리튀르, 죽음, 특히 "비인격적인 죽음", 그리고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문학 공간"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문학 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 책은 블랑쇼를 20세기 프랑스의 주요 사상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의 사상은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후대의 많은 비평가와 사상가,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엿보는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진 "누보 로망 논쟁"에서는 롤랑 바르트 등과 함께 로브-그리예를 적극 옹호하며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지지하고 그 평가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점차 소설과 비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양상을 보였으며, 1962년 발표한 소설 『기대 망각』은 단편들이 이어지는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정치적으로 블랑쇼는 전후 좌파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에밀 졸라나 장 폴 사르트르처럼 지식인이 대중 앞에 나서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의 정치 참여에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했다. 특히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며, 마르그리트 뒤라스, 디오니스 마스콜로 등과 함께 프랑스 군인들의 병역 거부 권리를 옹호하는 "121인 선언" 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선언에는 장-폴 사르트르, 로베르 앙텔므, 알랭 로브-그리예, 마르그리트 뒤라스, 르네 샤르, 앙리 르페브르, 알랭 레네, 시몽 시뇨레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 및 예술가들이 다수 참여했으며, 알제리 전쟁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중요한 반응이었다.

1968년 5월, 블랑쇼는 학생 시위를 지지하며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이는 전후 거의 유일한 공개 활동이었다. 그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과 함께 "작가 학생 행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거리 시위에 참여했으며, 익명의 문건들을 작성하며 혁명에 동참했다. (블랑쇼는 뒤라스의 작가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으며, 뒤라스 역시 소설 『유대인의 집』을 블랑쇼에게 헌정하며 상호 존경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블랑쇼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활발한 집필 활동을 통해 문학 및 사상계에 큰 족적을 남겼고, 동시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생애 후반기에 파시즘에 대한 지적 매력과,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전후 침묵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2. 5. 5월 혁명과 정치 참여 (1968-2003)

전쟁 후 블랑쇼의 정치적 활동은 좌파로 이동했다. 그는 서명자 수를 따서 명명된 중요한 "121인 선언(Manifesto of the 121)"의 주요 저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 선언에는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알랭 로브 그리예(Alain Robbe-Grillet),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르네 샤르(René Char),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알랭 레네(Alain Resnais), 시몽 시뇨레(Simone Signoret) 등 여러 지식인들이 참여했으며, 식민지 알제리 전쟁에서 병역을 거부할 병사들의 권리를 지지했다. 이 선언서는 알제리 전쟁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반응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5월, 블랑쇼는 68 혁명 당시 학생 시위를 지지하며 다시 한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거의 유일한 공개적인 활동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50년 동안 프랑스 문학계에서 현대 문학과 그 전통을 꾸준히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특히 생애 후반기에는 파시즘에 대한 지식인들의 과거 경도 문제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에 대한 하이데거의 전후 침묵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반복적으로 썼다.

1983년, 블랑쇼는 『말할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fra)』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장-뤼크 낭시(Jean-Luc Nancy)가 공동체에 대해 비종교적, 비실용적, 비정치적인 해석을 통해 접근하려 시도한 저서 『비활동적 공동체(The Inoperative Communityeng)』(1986)[9]를 쓰는 데 영감을 주었다.

그는 2003년 2월 20일 프랑스 이블린주 르 메닐 생 드니(Le Mesnil-Saint-Denis)에서 사망했다.

3. 사상

모리스 블랑쇼는 말라르메카프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도구적 언어가 아닌 본질로서의 문학 언어, 작가가 소멸하고 "말에 주도권을 넘기는" 순수 작품에 대한 말라르메의 사상은 블랑쇼의 창작과 사상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프카의 글쓰기와 죽음, 비인격적인 것 사이의 관계, "나"에서 "그"로의 이행을 통한 문학적 경험에 대한 기록 역시 블랑쇼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을 바탕으로 블랑쇼는 친구 및 다른 문학가, 사상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소설과 비평 모두에서 독자적인 사유를 펼쳐나갔다.

그의 소설은 초기작 『수수께끼의 남자 토마』(Thomas l'Obscur프랑스어), 『아미나다브』(Aminadab프랑스어), 『지고자』(Le Très-Haut프랑스어) 등에서는 장 지로두와 카프카의 영향 아래 기존 리얼리즘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사형 선고』(La Sentence프랑스어)를 거치며 작품은 더욱 간결해지고 등장인물의 익명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말년작 『나의 죽음의 순간』(Instant de ma mort프랑스어)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다루었다.

문학 사상 면에서는 말라르메, 카프카 외에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리드리히 횔덜린, 알베르 카뮈, 허먼 멜빌 등 다양한 작가 비평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문학 활동을 일상적 '활동'과 대비되는 '무위'(désœuvrement프랑스어)로 파악했으며, 작가가 이 무위 속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비인격적인 것 속을 탐색하며 '문학 공간'을 방황하는 것이 글쓰기라고 보았다. 이는 오르페우스 신화에 비유되기도 한다. 블랑쇼의 이러한 사유는 신비 신학 및 유대 사상과도 공명하며, 롤랑 바르트와 함께 현대 사상에서 에크리튀르 문제를 전면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랑쇼의 사유는 문학 이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 탐구했으며, 나치즘에 연루되었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비판을 지속했다. 또한 『우애』(L'amitié프랑스어)나 『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프랑스어) 등을 통해 우정과 공동체 문제를 깊이 사유했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다니엘 벤사이드나 자크 데리다 등에 의해 주목받았다. 말년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과 유대 사상에 대한 경도를 보였다.

블랑쇼의 사상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는 젊은 시절 블랑쇼처럼 되고 싶었다고 회고했으며, 질 들뢰즈는 블랑쇼가 "죽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자크 데리다 역시 문체와 사상 면에서 블랑쇼의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철학자 다나베 간타로나 친구였던 에마뉘엘 레비나스 역시 블랑쇼의 사상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3. 1. 글쓰기와 문학

블랑쇼의 작품은 죽음의 철학을 탐구하지만, 인본주의적 관점을 넘어 역설, 불가능성, 무의미함, 그리고 죽음의 개념적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누메논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끊임없이 "문학의 문제"에 천착하며, 글쓰기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문학이 질문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10]

블랑쇼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첼란의 시적 방법론, 프란츠 카프카의 에크리튀르, 그리고 헤겔 변증법의 부정 개념에 영향을 받아, 일상 경험과 구별되는 문학 언어 이론을 정립했다. 그에게 문학 언어는 사물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도구적 언어가 아닌 본질적인 언어이며, 현실주의는 현실 묘사가 아니라 글쓰기 행위 자체의 특성에서 발생하는 역설에 관한 문학을 의미한다. 이는 말라르메가 "나는 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어떤 형태에도 무관심하게 하는 망각 너머에… 모든 꽃다발에 없는 하나가 … 나타난다."[11]고 쓴 것처럼, 언어가 물리적 현실을 넘어서 개념적 현실을 창조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일상 언어가 추상적 개념을 위해 사물의 물리적 현실을 넘어선다면, 문학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언어를 실용성에서 해방시킨다. 이를 통해 언어가 물리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부재하는 관념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블랑쇼는 문학이 이러한 '부재의 현존'에 매료되어 있으며, 단어의 음향과 리듬을 통해 언어 자체의 물질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고 보았다.

전후 블랑쇼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며 창작과 사색을 심화했다. 1946년 바타유가 창간한 잡지 「크리티크」 편집에 참여하며 '쓰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했다. 그는 말라르메카프카의 글쓰기에서 발견한 작가의 부재, 죽음의 경험, 무위, 망각 등을 쓰는 행위 자체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사유의 결과로, 그는 "쓰는 자리에서, 그리고 쓰여진 것에서는 작가는 부재한다"는 입장을 스스로 실천하며 얼굴 없는 작가, 부재하는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5년 발표된 『문학 공간』(L'espace littéraire프랑스어)은 그의 문학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블랑쇼는 마르틴 하이데거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글쓰기(에크리튀르), 죽음(특히 비인격적인 죽음), 그리고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잠입하고 방황하는 장소로서의 문학 공간을 논했다. 이는 문학 비평과 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엿보는 사람』을 둘러싼 "누보 로망 논쟁"에서는 바르트 등과 함께 로브-그리예를 옹호하며 20세기 후반 문학의 새로운 흐름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소설은 초기작 『어두운 토마스』(Thomas l'Obscur프랑스어, 르시 형식)[12], 『아미나답』(Aminadab프랑스어), 『지극히 높으신 분』(Le Très-Haut프랑스어) 등에서는 장 지로두와 카프카의 영향 아래 기존 리얼리즘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사형 선고』(Death Sentence프랑스어)를 거치며 전통적 리얼리즘에서 더욱 멀어지고 작품은 간결해졌으며, 등장인물의 이름이 모호해지는 특징이 강해졌다. 『기대 망각』(L'attente, l'oubli프랑스어, 1962년)에서는 이야기가 단편화되고 이름 없는 남녀의 대화 형식으로 나아갔다. 말년의 『나의 죽음의 순간』(Instant de ma mort프랑스어, 1994년)에서는 자신의 총살당할 뻔한 경험을 간결하고 성찰적인 문체로 다루었다. 그의 주요 이론서로는 『불의 작업』(The Work of Fire프랑스어), 『문학의 공간』(The Space of Literature프랑스어), 『무한한 대화』(The Infinite Conversation프랑스어), 『재난의 서술』(The Writing of the Disaster프랑스어) 등이 있다.

블랑쇼는 문학 활동을 일상적 '활동'과 대비되는 '무위'(désœuvrement프랑스어)로 파악했다. 작가는 이 무위 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대면하고, 비인격적인 것 속을 잠행하며 '문학 공간'을 방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글쓰기 행위라고 보았다. 그는 이 과정을 오르페우스의 저승 여행에 비유했다. 또한 죽음을 "〈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을 능력을 잃고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 논했다. 그는 나치즘에 연루되었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지속했으며, 『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프랑스어) 등에서는 68년 5월의 경험과 레비나스의 타자론 등을 결합하여 공동체 문제를 사유했다.

블랑쇼의 사상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는 젊은 시절 "나는 블랑쇼가 되고 싶어 했다"고 회고했으며, 질 들뢰즈는 블랑쇼가 "죽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칭찬했다. 자크 데리다 역시 문체와 사상 면에서 블랑쇼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여러 저작에서 그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일본의 철학자 다나베 간타로 역시 말년에 블랑쇼의 『문학 공간』을 정독했으며, 친구였던 레비나스는 블랑쇼에 관한 논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3. 2. 죽음과 불가능성

블랑쇼의 작품은 죽음의 철학을 탐구하지만, 이는 인본주의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역설, 불가능성, 무의미함, 그리고 죽음의 개념적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누메논에 대한 고찰을 통해 죽음에 접근한다.[10] 블랑쇼에게 죽음은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다.[13]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첼란의 시적 방법론, 그리고 헤겔 변증법의 부정 개념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학 언어 이론을 세웠다. 블랑쇼에게 문학 언어는 일상 경험과 구별되며,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글쓰기 행위 자체의 역설을 다루는 것이다. 문학은 언어가 물리적 사물 대신 그것에 대한 생각, 즉 부재를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하게 하며, 단어의 소리와 리듬을 통해 언어의 물질성을 드러낸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와 문학과 죽음이 모두 익명의 수동성으로 경험된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며, 이러한 경험 상태를 "중립"(le neutre|르 뇌트르프랑스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죽음과의 진정한 관계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달리, 블랑쇼는 죽음의 개념적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며 이와의 관계 맺기를 부정했다. 그는 이후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 개념에 영향을 받아, 다자인의 "절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하이데거적 죽음관을 전복시키고, 죽음을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규정했다.[13]

블랑쇼는 죽음에 대해 “죽음에서는, <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을 능력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타유 등과 함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 논한 초기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나치즘의 대두와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블랑쇼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 말기 독일군에게 총살당할 뻔했다가 살아남은 개인적 경험 역시 그의 삶과 글쓰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소설 『백일의 광기』나 『나의 죽음의 순간』 등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블랑쇼의 독창적인 죽음 사유에 대해 질 들뢰즈는 “블랑쇼야말로 죽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3. 3. 문학 공간

블랑쇼는 1955년 『문학 공간』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문학가와 작품을 논하며 마르틴 하이데거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응용하여, 쓰는 행위(에크리튀르), 죽음, 특히 "비인격적인 죽음", 그리고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잠입하고 방황하는 장소로서의 "문학 공간"에 대해 논했다.[10]

블랑쇼에게 문학 활동은 일상의 활동적인 "활동"에서 벗어난 "무위(무위)"였다. 작가는 이 무위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고, 죽음 앞에서 자신을 계속 지배하며 나타나는 비인격적인 것의 한가운데를 탐색하며 바로 "문학 공간"을 방황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글쓰기 행위를 말라르메를 통해 접한 오르페우스의 저승 여행에 비유했다. 이러한 사상은 말라르메, 카프카, 신비 신학, 유대 사상 등과의 공명 속에서 형성되었다.

『문학 공간』은 문학에 대한 사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비평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이를 통해 블랑쇼는 현대 사상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사상가로 알려지게 되었고, 롤랑 바르트를 비롯한 많은 비평가와 사상가,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와 함께 현대 사상에서 에크리튀르 문제를 전면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사상은 블랑쇼 자신이 전후 1946년 크리티크지 협력 이후 점차 얼굴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고 텍스트만을 제시하며 "얼굴 없는 작가", "부재하는 작가"로 불리게 된 실천과도 연결된다. 이는 "쓰는 자리에서, 그리고 쓰여진 것에서는 작가는 부재한다"는 그의 사상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구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3. 4. 타자성과 윤리

블랑쇼는 하이데거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문학과 죽음 모두 익명의 수동성 속에서 경험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경험을 "중립"(le neutre프랑스어)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와 달리 블랑쇼는 죽음의 개념적 파악 가능성을 부정하며, 따라서 죽음과의 진정한 관계 맺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후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에 영향을 받았다. 레비나스와 유사하게, 블랑쇼는 현존재의 "절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죽음을 파악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오히려 죽음을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재규정했다.[13] 이는 죽음 앞에서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가능성을 강조한 하이데거와 달리, 죽음이 가져오는 주체의 소멸과 절대적 수동성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블랑쇼는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 논하며, 죽음 앞에서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능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는 타자와의 관계, 공동체 문제로 이어진다. 블랑쇼는 『우애』(L'amitié프랑스어)나 『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프랑스어)와 같은 저작을 통해 우정, 공동체, 공동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전개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실존 문제를 넘어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그리고 전통적인 주체 개념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나치에 부역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내재적 비판을 제기하며 윤리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았다.

3. 5. 정치와 공동체

1930년대 후반 무렵, 블랑쇼는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문학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41년 『수수께끼의 사나이 토마』 초판을 출판한 해에는 조르주 바타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를 비롯한 비공산주의적 좌익 인사들과 교류했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와도 친분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블랑쇼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친독 중립 성향의 비시 정부에서 직책을 맡았다는 보고가 있는 반면,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친족을 유대인 학살로부터 숨겨주었고, 나치의 프리드리히 니체 남용을 비판하고 정신분석 이론을 통해 나치즘의 정치적 역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바타이유의 저서 『내적 체험』 집필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바타이유 본인의 증언)도 알려져 있다.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을 보호하고 나치즘에 비판적이던 바타이유와 협력했다는 점은 전쟁 중 이미 그의 정치적 태도가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향에 대해 피에르 안드레와 같은 인물은 블랑쇼를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전향 후 블랑쇼의 입장을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우익적 입장에서 좌익적 입장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극우 시대 블랑쇼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다룬 제프리 메일먼의 연구도 있지만, 블랑쇼의 "전향" 이후 정치적 태도는 비교적 일관성을 보였다.

나치즘의 대두와 침략,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블랑쇼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특히 홀로코스트는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이 대학살에 대해 언급했다. 이러한 통한의 심정은 『묻는 지식인』이라는 글 말미에서 르네 샤를의 단편을 인용하며 드러난다. 또한 전쟁 말기, 독일군(지휘관은 독일인이었으나 병사들은 블라소프군 출신 러시아인이었다)에게 총살당할 뻔하다가 살아남은 경험은 그의 삶과 저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 사면된 경험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소설 『백일의 광기』와 마지막 소설 『나의 죽음의 순간』에 반영되었다.

블랑쇼는 문학 활동 외에도 정치 및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이어갔다. 그는 죽음에 대해 “죽음에서는, 〈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을 능력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타유 등과 함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 논하기도 했다. 『우애(L'amitiéfra)』 등에서 우애의 문제를 다루었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fra)』에서는 공동체와 공동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펼쳤다. 또한 현대 사상에서 주체 비판 이후의 방향을 모색한 평론집 『주체의 뒤를 누가 올 것인가?(Qui vient après la subjectivité?fra)』에도 참여했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니엘 벤사이드는 『우애』에서 블랑쇼가 칼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과거의 많은 주석이나 테제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fra)』에서 블랑쇼가 제기한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말년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과 유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더욱 심화시켰다. 미셸 푸코가 『자기 돌봄(Le souci de soifra)』 등에서 고대 그리스를 다룬 것에 대해, 히브리어를 통해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4. 주요 저작

모리스 블랑쇼는 소설가이자 철학자, 문학 비평가로서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 활동은 크게 허구적 서사를 다루는 소설과 문학 및 철학적 사유를 탐구하는 철학 및 비평 분야로 나뉜다.

주요 소설 작품으로는 초기작인 《어둠 속의 토마》(Thomas l'obscur, 1941/1950)를 비롯하여 《사형 선고》(L'Arrêt de mort, 1948), 《지고자》(Le Très-Haut, 1948), 《마지막 사람》(Le Dernier Homme, 1957),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1962) 등이 있다. 이 소설들은 언어의 한계, 죽음, 부재, 익명성 등 블랑쇼 특유의 주제 의식을 심도 있게 다룬다.

철학 및 비평 분야에서는 《문학 공간》(L'espace littéraire, 1955), 《다가올 책》(Le livre à venir, 1959), 《끝없는 대화》(L'entretien infini, 1969), 《재난의 글쓰기》(L'écriture du désastre, 1980) 등이 대표적이다. 이 저작들을 통해 블랑쇼는 문학의 본질, 글쓰기의 의미, 작가의 조건 등을 탐구하며 독자적인 문학 이론과 철학적 사유를 펼쳐 보였다. 특히 카프카, 말라르메, 릴케, 레비나스 등 여러 작가와 사상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블랑쇼의 저작들은 난해하다는 평가도 받지만, 현대 문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4. 1. 소설


  • Thomas l'Obscur|토마 롭스퀴르프랑스어 (1941년) - 한국어 번역 제목: '토마 알 수 없는 자', '어둠 속의 토마스', '어둠 속의 토마'. 1950년 신판에서 대폭 개정됨.
  • Aminadab|아미나다브프랑스어 (1942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아미나다브', '아미나답'.
  • L'Arrêt de mort|라레 드 모르프랑스어 (1948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죽음의 선고', '사형 선고'.
  • Le Très-Haut|르 트레오프랑스어 (1949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지극히 높은 자', '지극히 높으신 분', '지고자'.
  • Au moment voulu|오 모망 불뤼프랑스어 (1951년) - 한국어 번역 제목: '바라는 순간에'.
  • Le ressassement éternel|르 르사스망 에테르넬프랑스어 (1951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영원한 되풀이'.
  • 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슬뤼 키 느 마콩파녜 파프랑스어 (1953년) - 한국어 번역 제목: '나를 동반하지 않은 자', '나를 따라오지 않던 자'.
  • Le Dernier homme|르 데르니에 옴므프랑스어 (1957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최후의 남자', '마지막 사람'.
  • L'Attente, l'oubli|라탕트 루블리프랑스어 (1962년) - 한국어 번역 제목: '기다림 망각', '기다림, 망각', '기대, 망각'.
  • Le Pas au-delà|르 파 오들라프랑스어 (1973년) - 한국어 번역 제목: '저 너머로의 발걸음', '저편으로의 한 걸음'.
  • La Folie du jour|라 폴리 뒤 주르프랑스어 (1973년) - 한국어 번역 제목: '대낮의 광기', '낮의 광기'.
  • L'Instant de ma mort|랭스탕 드 마 모르프랑스어 (1994년) - 단편. 한국어 번역 제목: '나의 죽음의 순간'.

4. 2. 철학 및 비평

블랑쇼의 철학 및 비평 활동은 그의 문학 작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주로 문학 이론, 철학적 사유, 정치적 논평 등을 다룬다. 그의 주요 비평 및 에세이 저작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원제한국어 번역 제목
1942Comment la littérature est-elle possible ?fra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1943Faux pasfra잘못된 발걸음
1949La Part du feufra불의 몫
1949Lautréamont et Sadefra로트레아몽과 사드
1955L'Espace littérairefra문학의 공간
1958La Bête de Lascauxfra라스코의 야수
1959Le Livre à venirfra다가올 책
1969L'Entretien infinifra무한한 대화
1971L'Amitiéfra우정
1973Le Pas au-delàfra넘어서지 않는 걸음 / 저편으로의 한 걸음
1980L'Ecriture du désastrefra재앙의 글쓰기 / 재난의 에크리튀르
1981De Kafka à Kafkafra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983La Communauté inavouablefra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말할 수 없는 공동체
1984Le dernier à parlerfra마지막으로 말하는 사람
1986Michel Foucault tel que je l'imaginefra미셸 푸코: 내가 상상하는 그대로
1987Joë Bousquetfra
1992/2002Une voix venue d'ailleursfra다른 곳에서 온 목소리
1996Pour l'amitiéfra우정을 위하여
1996Les intellectuels en questionfra문제시되는 지식인
1999Henri Michaux ou le refus de l'enfermementfra앙리 미쇼 또는 폐쇄의 거부
2003Ecrits politiques (1958-1993)fra정치 평론 1953-1993 / 정치론집 1958~1993
2007Chroniques littéraires du "Journal des Débats"fra
2009Lettres à Vadim Kozovoï (1976-1998)fra
2010La Condition critique. Articles, 1945-1998fra



블랑쇼의 주요 영어 번역가들 중 다수는 산문 스타일리스트이자 시인으로서 명성을 쌓았는데, 잘 알려진 인물로는 리디아 데이비스, 폴 오스터, 피에르 조리스가 있다.

5. 영향

모리스 블랑쇼는 그의 문학 활동 초기부터 말라르메카프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사물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적 언어가 아닌, 본질적인 언어로서 문학을 바라본 말라르메의 관점과, 순수한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사라지고 "말에 주도권을 넘긴다"는 그의 사상은 블랑쇼의 창작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카프카 역시 죽음, 비인격적인 것, 글쓰기의 관계, 그리고 '나'에서 '그'로의 이행을 통한 문학적 경험 등에 대한 기록을 통해 블랑쇼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을 바탕으로 블랑쇼는 동시대 다른 작가 및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소설과 비평 양면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1955년 발표된 『문학 공간』(L'espace littéraire프랑스어)은 블랑쇼가 현대 사상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글쓰기(에크리튀르), 죽음, 비인격성, 그리고 작가가 머무는 "문학 공간"에 대해 탐구했다. 이는 문학 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롤랑 바르트를 포함한 수많은 비평가와 사상가,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르트의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서술의 영도프랑스어』와 함께 블랑쇼의 사상은 현대 사상에서 에크리튀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같은 해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엿보는 사람』을 둘러싼 "누보 로망 논쟁"에서 롤랑 바르트 등과 함께 로브-그리예를 옹호하며 20세기 후반 문학의 새로운 흐름과 평가 확립에도 기여했다.

블랑쇼의 영향력은 문학 이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단순히 '나'의 소멸이 아니라 '나'가 죽을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로 보았으며, 바타유 등과 함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 논한 최초의 세대 중 하나이다. 나치에 협력했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이어갔으며, 『L'amitié|우애프랑스어』에서의 우정, 『La communauté inavouable|밝힐 수 없는 공동체프랑스어』에서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는 낭시 등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으며, 이에 대한 그의 논의는 벤사이드나 데리다(『Spectres de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프랑스어』) 등에게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미셸 푸코는 젊은 시절 "블랑쇼가 되고 싶어 했다"고 회고하며 『Penser l'extérieur|밖의 사유프랑스어』 등에서 그를 비중 있게 다루었고, 질 들뢰즈는 "블랑쇼야말로 죽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자크 데리다 역시 문체와 사상 면에서 블랑쇼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Rester|체류프랑스어』, 『Limites|경계프랑스어』 등 여러 저작에서 블랑쇼를 논했다. 그의 영향은 프랑스를 넘어 일본의 철학자 다나베 간타로에게까지 미쳤으며, 오랜 친구였던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블랑쇼에 관한 중요한 논고를 남기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블랑쇼는 에밀 졸라장 폴 사르트르처럼 대중 앞에 나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비판적이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디오니스 마스콜로 등과 함께 프랑스 군인의 명령 불복종을 지지하는 "121인 선언"에 서명했다. 1968년 5월 혁명 때에는 뒤라스 등과 "작가 학생 행동 위원회"를 조직하여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익명의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공동체에 대한 그의 사유와 연결되며, 특히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쓰인 『La communauté inavouable|밝힐 수 없는 공동체프랑스어』에서 5월 혁명의 경험과 레비나스의 타자론 등이 함께 논의된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2003년 사망 직후 발표된 이라크 전쟁 반대 성명 "Not in our name"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The Actuality of Adorno: Critical Essays on Adorno and the Postmodern SUNY Press
[2] 서적 The Station Hill Blanchot Reader: Fiction and Literary Essays Station Hill Press, Inc.
[3] 논문 Killing Oneself, Killing the Father: On Deleuze's Suicide in Comparison with Blanchot's Notion of Death
[4] 웹사이트 Maurice Blanchot (1907–2003) https://iep.utm.edu/[...] 2023-12-24
[5] 서적 Encyclopedia of Postmodernism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8-01
[6] 서적 Maruice Blanchot: Political Writings 1953–1993 Fordham University Press
[7] 뉴스 Obituary: Maurice Blanchot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03-03-01
[8] 서적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Key Themes and Thinkers Blackwell Publishing
[9] 웹사이트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désavouée https://lectures.rev[...]
[10] 서적 The Work of Fire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Selected Poetry and Prose New Directions
[12] 문서 The Song of the Sirens
[13] 서적 The Writing of the Disaster University of Nebraska
[14] 문서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블랑쇼의 저서에 나오는 그의 삶에 대한 일언반구. 갈리마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