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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토마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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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토토마리군은 사할린 남부에 위치했던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고대부터 1945년 소련에 점령될 때까지 다양한 역사를 거쳤다. 고대에는 오호츠크 문화와 찰문 문화가 번성했고, 중세에는 안토 씨가 에조(아이누)를 통괄하며 교역의 중심지였다. 에도 시대에는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고, 1915년 군으로 발족하여 모토토마리 촌과 호요리 촌을 관할했다. 1929년에는 시토루 정이 편입되었으며, 1945년 소련에 점령되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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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토마리군
개요
국가대일본제국
지방홋카이도
가라후토청
지청시키카 지청
지리
일본어모토토마리 군 (元泊郡)
로마자 표기Mototomari-gun
행정 구역
시루토루정 (知取町)
모토토마리촌 (元泊村)
호요리촌 (帆寄村)

2. 역사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가라후토의 군, 정, 촌 편제에 관한 건" (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에 따라, 행정 구역으로서 '''모토토마리군'''이 발족하였다. 발족 당시 모토토마리 촌, 호요리 촌이 소속되었고, 도요하라 지청 모토토마리 출장소가 관할하였다. (2촌)[31]

1918년 (다이쇼 7년) - 공통법 (다이쇼 7년 법률 제39호, 다이쇼 7년 4월 17일 시행) 1조 2항에 따라 가라후토가 내지에 포함되었다.

1922년 (다이쇼 11년)


  • 4월 1일 - "가라후토의 지방 제도에 관한 법률" (다이쇼 10년 4월 8일 법률 제47호) 및 그 세칙 "가라후토 정촌제" (다이쇼 11년 1월 23일 칙령 제8호) 동시 시행.
  • 10월 - 관할 지청이 모토토마리 지청으로 변경.


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시행에 따라 모토토마리 촌, 호요리 촌 (2급 촌)이 발족. 신토요군에서 시토루 정 (1급 정)이 발족하여, 본 군에 소속되었다. (1정 2촌)

1942년 (쇼와 17년) 11월 - 관할 지청이 시키카 지청으로 변경.

1943년 (쇼와 18년)

  • 4월 1일 - "가라후토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 (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 폐지로 내지 편입.
  • 6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폐지로 가라후토에서 정촌제가 시행되었다. 2급 촌은 지정 촌이 되었다.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법적으로 가라후토청이 폐지되었다. 같은 날 모토토마리군도 소멸하였다.

2. 1. 고대

고분 시대 4세기 무렵에는 스즈야 문화가, 5세기 무렵부터는 오호츠크 문화가 번성했다. 아스카 시대아베노 히라후와 교전한 숙신은 오호츠크 문화인으로 비정되며, 고대 문헌인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도 관련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찰문 문화의 진출에 따라 오호츠크인은 사할린 남부에서 쫓겨났다.

헤이안 시대 중기 (11세기) 무렵부터 흰꼬리수리의 깃털이나 물개 가죽 등을 얻기 위해 찰문 문화 사람들이 진출했다. 당시 와진 사회에서는 무사 계층이 성장하면서, 화살깃이나 갑옷 등의 재료로 쓰이는 흰꼬리수리 깃털과 해수 가죽의 수요가 높아졌다. 이들은 중요한 교역품으로서 오우 지방의 호족인 아베씨나 오슈 후지와라씨에 의해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이와 함께, 와진 사회로부터 여러 물품들이 유입되면서 찰문 문화에서 아이누 문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아이누는 찰문 문화인의 후예이다.

2. 2. 중세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에조・에미시의 후손을 자칭하는 에조관령・안토 씨가 당자 에조(아이누)를 통괄[1]했다고, 당시의 문헌 『스와 다이묘진 에코토바』에 있다. 중세의 안토 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계승하는 형태로, 도사 미나토를 거점으로 일본해 북부를 중심으로 꽤 광범위하게 활동했다고 한다(『회선식목』). 또한, 육지의 호족인 동시에 안도 수군이라고 불리는 무장 선단을 옹호하고, 에조 사회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종종 쓰가루에서 출병했다고 한다[2]. 1904년에 발견된 호요리 촌의 마군담 토성에서는, 대륙제 무구 외에 와진 사회에서 만들어진 무기 등도 출토[3]되었다. 중세의 사할린에서는 몇 차례 소란이 있었고, 몽골의 사할린 침공(하쿠슈 토성도 참조) 혹은 오에이 19년(1412년)의 "오에이의 에조의 난[4]"의 옛 전장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안토 씨는 오에이 연간에 "북해의 이적 동란"을 평정하고, '''히노모토 장군'''이라고 칭했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자, 안도 수군은 간토 어면선으로서 활동했다. 와산물을 에조 사회에 공급하고, 북방 산품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전국으로 출하했다고 한다(『도사 왕래』)[5][6][7][8]. 또한, 당시의 당자는 홋카이도일본해 측과 북해안 및 사할린 남부 등, 근세에서 말하는 서에조지에 거주하며, 생활 필수품 등을 입수하기 위해 도사 미나토와 와타리토의 영역까지 갔었다(조카 교역도 참조). 분메이 17년(1485년), 당자 에조의 을명이 에조 관령의 대관 다케다 노부히로(마쓰마에 가문의 조상)에게, 동작대와 연을 헌상하고 배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후쿠야마 비부』)[9].

2. 3. 근세

에도 시대 게이초 8년(1603년) 소야에 설치된 역참이 서에조치에 속하는 모토토마리군 지역을 관할했고, 조쿄 2년(1685년) 이후 소야 장소에 포함되었다. 사할린 아이누들은 일본인 거주지에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군역 내 주민들은 소야에 가서 철기, , 등의 생활 필수품을 구했다. 호레키 2년(1752년)경 시라누시(혼토군고진촌 시라누시)에 배가 파견되기 시작했고, 간세이 2년(1790년) 사할린 남단 시라누시에 마쓰마에 번이 사할린 상장(장소)을 개설했는데, 당시 장소 도급업자는 아베야 무라야마 가였다. 막부도 근무소를 설치했다. 이때 쿠슌코탄(오도마리군오도마리정 난케이)에 교역 거점과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한 운상옥을 두고, 무육 정책인 '''옴샤'''와 노령자 및 병든 자에 대한 생활 부조(간호) 등을 실시했다.[10] 당시 지방 행정의 상세한 내용은 장소 도급제 성립 후의 행정 및 에도 시대의 일본 인구 통계 참조.

장소 도급업자는 간세이 8년부터 오사카 상인 고야마야 곤베에와 번사 이타가키 토요시로, 이듬해 9년부터는 이타가키 토요시로 단독 도급이 되었다. 간세이 12년(1800년) 모토토마리군 영역을 포함하는 가라후토 장소는 마쓰마에 번 직영이 되었고, 번사 다카하시 소시로와 메야 야스지로가 관리하고, 효고 상인 시바야 조타에후가 매입을 담당했다.

18세기 후반, 소욘코탄(승원)과 후누후(반신)의 아이누 오토나가 만주인으로부터 조공 무역을 강요받아 향장(가샨 다)의 칭호를 받았다.[10] 이는 나요로(도마리군 나요시무라)의 총오토나가 무역 상대인 스메렌쿠르 이와 산단인을 살해하고 상품을 빼앗은 것에 기인한다(『북이분계여화』). 산단에 출두하는 것은 수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아이누 오토나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아이누 오토나들은 막번체제 하 향촌제의 역직도 가지면서 산단 도항을 했으며, 사쓰마 번의 부용국이었던 류큐 왕국과 가까운 외교 관계나 무역 형태였다. 분쟁 등이 원인으로 조공을 강요받은 예로 조선 인조가 있으며, 그 경위는 대청 황제 공덕비를 참조.

분카 4년(1807년) 분카 노략질[11][12][13]을 겪으면서, 모토토마리군을 포함한 서(西) 에조치가 마쓰마에 봉행 관할 공의 어료(막부 직할령)가 되었고( ~1821년, 제1차 막부령 시대), 가라후토 장소(場所) 수급인은 시바야 조타유가 되었다. 분카 5년(1808년) 아이즈번이 가라후토 경비를 수행했다. 분카 6년(1809년) 서에조치에서 가라후토가 분립되었고, 이 해부터 경비는 히로사키번으로 교체되었으며, 스하라가 다테 가와 공동으로 북에조치(분카 6년 6월, 가라후토로 개칭) 장소를 수급하게 되었다.[14] 북방 긴장이 해소되면서, 모토토마리군 지역은 분세이 4년(1821년) 마쓰마에번령으로 복귀했다.

; 산탄(山丹) 무역 개혁

마쓰다 덴주로의 개혁[15][16]에서는 산탄 무역을 막부 직영으로 하고 시라누시 회소에서만 진행하며, 지불할 수 없는 빚은 막부가 대납하여 빚에 시달리던 아이누를 구제했다. 그 후, 가혹한 노동 환경이지만 아니와 만 어장 등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아이누 오토나들의 산단 도항도 금지했다.

문화 5년(1808년) 간조 린조는 사할린 검분을 위해 사할린을 건너와 모토토마리군 지역도 답사했다.[17][18][19] 린조는 북 지토라 반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가시호에 들렀다.

막부 말기 안세이 원년(1854년) 6월, 푸신야쿠 간조 테츠지로가 히가시우라 타라이카(多来加)까지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아이누는 타라이카(시스카군타라이카 마을 다라이카)까지 거주하고 있지만, 공의의 무육, 즉 회소(운상옥)에서 행해지는 옴샤에서의 역예조 임명, 주변 역예조로부터의 칙서 전달(법 적용) 및 주민의 종문인별개장(호적) 작성, 어장 등에서의 취업, 어구미 지급(간호) 등, 사할린 동해안 아이누 거주지에서는 후누후(모토토마리 촌 반신)까지, 어떤 형태로든 무육이나 간호, 지금으로 말하면 "일본의 통치"가 미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20] 후누후보다 북쪽에 사는 자는 풍속이 약간 달라서, "타라이카인" 또는 "다라이카 아이누"라고 기술하는 문헌도 존재한다.

고카 3년(1846년)과 안세이 4년(1857년) 두 차례에 걸쳐 마쓰우라 다케시로도 방문했다. 타케시로는 대개 오토마리 국경선 전신에 해당하는 길을 따라 여행하며, 모토토마리군 지역에서는 막리로서 방문한 안세이 4년, 왕복은 모토토마리 촌 후누후(반신)와 가시호(가시호), 복로는 호요 촌 마쿤코탄(마군담)에 숙박했다. 이 조사 시점에서는 러시아인은 미도달·비혼주이다.

『스즈키 시게히사 마쓰우라 타케시로 가라사토 일기』(가에이 7년(1854년) 간행)에 고카 3년 당시 상황 일부가 쓰여 있다.

  • 호요 촌
  • *톳소(돌조)에 도달


북예이 여지(안세이 3년, 1856년 상황)

  • 호요 촌
  • *치카헤로시나이(근포) - 아이누 집 2채
  • *마쿤코탄(마군담) - 연어, 송어, 산천어 많고, 후누후에서 이우우노의 아들 킨로카리를 데려와 출가
  • 모토토마리 촌
  • *후누후(반신) - 민가 4채, 청어와 물개 많음. 여기까지 토마리(쿠슌코탄, 오토마리군오토마리정 남계정)에 속함.
  • 타라이카 - 약간 풍속이 다르며, 입고 있는 옷도 삼단의 헌 옷, 도도의 가죽으로 지붕을 이음
  • *가시호(가시보) - 강의 서안에 민가 3채.
  • *호로나이보(포내보) - 가리비소라화석

2. 4. 대정봉환 이후

1868년(게이오 4년) 4월 12일, 하코다테 재판소(윤4월 24일에 하코다테부로 개칭)의 관할[27][28]이 되었다. 1869년(메이지 2년) 북에조지를 가라후토주(국)로 개칭[29]하였고, 같은 해 개척사 직할령이 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가라후토 개척사령을 거쳐, 1871년(메이지 4년) 홋카이도 개척사와 재통합되어 개척사 직할령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8월 29일 폐번치현이 이루어졌다. 이때 문명개화기의 사상으로는, 신불분리령, 임신호적 편제, 산발탈도령, 평민 성씨 필칭 의무령 공포 등이 있다. 아이누는 백성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가라후토-치시마 교환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지만, 동 조약 제6관에 따라 일본인의 어업권이 인정되었으며[30], 러시아령 시대의 모토토마리 군역 연안은 동해안 어구(나카시레토코곶부터 기타시레토코곶까지)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2. 5. 일본령 복귀 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일본령에 복귀하였다.[21] 러일 전쟁1905년 7월 사할린 전투에서 일본군 제13사단이 점령하고, 8월 1일 군정을 실시하였다.[21] 8월 28일에는 내무성 산하 사할린 민정서 코르사코프 지소 관할이 되었다가, 9월 4일 사할린 민정서 관할이 되면서 도요하라에 지소, 오치아이에 출장소를 개설하였다.[21]

1907년 3월 14일 내무성 산하 사할린청이 발족하면서 블라디미로프카 지청 시스카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21] 1908년 4월 시키카 지청 관할이 되었다가, 1909년 10월 시키카 지청 모토토마리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21] 같은 해 사할린청령으로 '부락 총대 규정'을 제정하여 주요 취락에 촌장에 해당하는 총대를 두고 행정 사무를 수행하게 하였다.[21] 1913년 6월 도요하라 지청 모토토마리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21]

2. 6. 군 발족 이후 연혁

1915년 (다이쇼 4년) 6월 26일 - "가라후토의 군, 정, 촌 편제에 관한 건" (다이쇼 4년 칙령 제101호) 시행에 따라, 행정 구역으로서 '''모토토마리군'''이 발족하였다. 발족 당시 모토토마리 촌, 호요리 촌이 소속되었고, 도요하라 지청 모토토마리 출장소가 관할하였다. (2촌)[31]

1918년 (다이쇼 7년) - 공통법 (다이쇼 7년 법률 제39호, 다이쇼 7년 4월 17일 시행) 1조 2항에 따라 가라후토가 내지에 포함된다고 규정되어, 종전까지 기본적으로 국내법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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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쇼와 4년) 7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시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1정 2촌)

  • '''모토토마리 촌''', '''호요리 촌''' (2급 촌) 발족.
  • 신토요군에서 '''시토루 정''' (1급 정)이 발족하여, 본 군에 소속.

1942년 (쇼와 17년) 11월 - 관할 지청이 시키카 지청으로 변경.

1943년 (쇼와 18년)

  • 4월 1일 - "가라후토에 시행하는 법률의 특례에 관한 건" (다이쇼 9년 칙령 제124호) 폐지로 내지 편입.
  • 6월 1일 - 가라후토 정촌제 폐지로 가라후토에서 정촌제가 시행되었다. 2급 촌은 지정 촌이 되었다.

1945년 (쇼와 20년) 8월 22일 -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1949년 (쇼와 24년) 6월 1일 - 국가 행정 조직법 시행으로 법적으로 가라후토청이 폐지되었다. 같은 날 모토토마리군도 소멸하였다.

3. 행정 구역

1915년(다이쇼 4년) 행정 구역 발족 당시 군역은 호요리 촌, 모토도마리 촌의 2개 촌 구역에 해당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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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道南十二館の謎
[3] 서적
[4] 서적 エゾの歴史
[5] 서적 エゾの歴史
[6] 서적 道南十二館の謎
[7] 웹사이트 函館市史 通説編1 通説編第1巻 第3編 古代・中世・近世 第1章 安東氏及び蠣崎氏 第3節 中世期の商品流通 https://adeac.jp/hak[...]
[8] 웹사이트 五所川原市の地域経済循環分析 https://www.chisou.g[...]
[9] 웹사이트 松前町「松前の文化財」 - 松前家伝 銅雀台瓦硯 http://www.town.m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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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稚内史 第二章 ロシアの乱暴と山崎半蔵の宗谷警備 https://www.city.w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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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간행물 北蝦夷地紀行の食文化考 北夷談について https://doi.org/10.2[...]
[17] 웹사이트 稚内史 第三章 松田伝十郎と間宮林蔵の樺太踏査 https://www.city.wak[...]
[18] 간행물 北蝦夷地紀行の食文化考 北夷分界余話について https://doi.org/10.2[...]
[19] 간행물 北蝦夷地紀行の食文化考 東韃地方紀行および北蝦夷餘誌について https://doi.org/10.2[...]
[20] 웹사이트 「北海道」・「沖縄」の植民地化とその国際法の論理 - アジアにおける「先住民族」形成の一時例 - http://www.meijigaku[...]
[21] 문서 敦賀屋文書(鳥井家文書)
[22] 서적 新潟県北洋漁業発展誌
[23] 서적 新北海道史
[24] 문서 目賀田帯万が[[安政]]3年4年(1856・57)頃のカラフト沿岸を写生した「延叙歴検真図」の再写図
[25] 간행물 「日露和親条約」がカラフト島を両国の 雑居地としたとする説は正しいか? http://id.nii.ac.jp/[...] 東北学院大学東北文化研究所
[26] 웹사이트 平成18年度 秋田県公文書館企画展 秋田藩の海防警備 https://www.pref.aki[...]
[27] 간행물 明治初年の樺太 日露雑居をめぐる諸問題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スラブ研究センター
[28] 웹사이트 第十七回資料紹介展 徳島県人の北海道移住 徳島県立文書館 https://library.toku[...]
[29] 웹사이트 近世蝦夷地の地名 https://www.ff-ainu.[...]
[30] 간행물 橋立出身 忠谷・田端家の函館に於ける商業活動 https://sitereports.[...] 市立函館博物館
[31] 간행물 法律第39号 19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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