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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카스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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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만주국의 관리였다. 미야기현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헌병으로 복무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등 3명을 살해한 아마카스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첩보 활동을 하고 만주 영화 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붕괴되자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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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카스 마사히코
인물 정보
만주국 시대의 아마카스 마사히코
만주국 시대의 아마카스 마사히코
이름아마카스 마사히코 (甘粕 正彦)
출생일1891년 1월 26일
출생지일본 제국 미야기현
사망일1945년 8월 20일
사망지만주국 신징
사망 원인청산가리 자살
직업군인, 만주국 영화 협회 회장
유죄 판결살인 (3건)
형벌10년 징역형 (강제 노역 부과), 이후 7년 6개월로 감형
배우자아마카스 미네
자녀장녀: 마사코, 장남: 타다오, 차녀: 카즈코
친족아버지: 아마카스 하루히코, 어머니: 시게, 동생: 지로 (미쓰비시 신탁 은행 사장/회장), 사부로 (육군 중좌), 기타 3명, 여동생: 이세코, 기타 2명, 사촌: 아마카스 주타로, 미타 세키스케
묘소다마 령원
군 경력
소속일본 육군
복무 기간1912년 - 1923년
최종 계급육군 대위
출신 학교후쿠시마 사범 부속 초등학교, 쓰 중학교 (현 미에 현립 쓰 고등학교), 나고야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육군 중앙 유년 학교, 육군사관학교
주요 사건
관련 사건아마카스 사건
만주 영화 협회
제대 후만영 이사장

2. 생애

미야기현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군사 학교를 거쳐 191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과 헌병으로 복무했다.

1923년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혼란기에 헌병 대위로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및 오스기의 어린 조카를 살해한 아마카스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군사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여러 차례 감형과 사면을 거쳐 1926년 석방되었다.[1][2][3][4]

석방 후 1927년 육군의 지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으며, 1930년 귀국 후 만주로 건너가 첩보원 도이하라 겐지 밑에서 활동했다. 만주 사변 이후에는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만주국의 괴뢰 통치자로 옹립하는 작전에 관여했으며,[5][6] 만주국 신징(현재의 창춘)에서 경찰 조직 창설을 돕는 등 만주국 체제 구축에 관여했다. 이 시기 그는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고 전해진다.[7][8]

1939년에는 기시 노부스케의 후원으로 만주 영화 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관동군의 전쟁 노력을 선전하는 영화 제작을 주도했다.[9] 그는 독일에서 최신 영화 기술을 도입하고 유명 영화인들을 초빙했으며, 배우 리카란(오타카 요시코)의 경력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특히 1940년 제작한 영화 支那の夜|시나노 요루일본어("중국의 밤")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나, 중국에서는 일본 남성이 중국 여성을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듯한 묘사로 인해 큰 논란과 반감을 샀다.[11][12][13][14][15][16][17][18][19]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붕괴하자 청산가리를 복용하여 자살했다.[20]

2. 1. 초기 생애

메이지 24년(1891년) 1월 26일, 미야기현 센다이시 기타산반초에서 옛 요네자와 번 사무라이 출신이자 당시 미야기현 경부였던 아버지 아마카스 하루키치와 센다이번 사무라이 나이토 요이치로의 딸인 어머니 나이토 시케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22][23] 그의 가문은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의 분전으로 알려진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 아마카스 가게모치의 후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 제도가 개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계급 출신들은 1945년까지 제국 육군해군 장교단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아마카스 하루키치전 요네자와 번 사무라이, 미야기현 경부
어머니나이토 시케센다이번 사무라이 나이토 요이치로의 딸
동생아마카스 지로은행가
동생아마카스 사부로육군 대좌
사촌아마카스 주타로육군 중장
사촌 (부계)미타 이시스케마르크스 경제학자
5촌 조카미타 소스케사회학자 (미타 이시스케의 아들)
6촌 조카미타 류스케만화가 (미타 소스케의 아들)
장남아마카스 타다오미쓰비시 전기 부사장 [22][23]



1897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후쿠시마 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미에현의 쓰 중학교와 나고야의 나고야 육군 지방 유년 학교,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거쳐 1912년 5월 육군사관학교(24기)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보병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다.

2. 2. 군 경력

미야기현에서 사무라이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바쿠후 시절 요네자와 번 출신이었다.[24] 미에현나고야의 군사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다이쇼 원년(191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사관후보생 제24기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동기로는 기시다 구니오가 있다. 같은 해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처음에는 보병으로 복무했다.[24]

1915년 9월 육군 토야마 학교에 입학했으나, 훈련 중 입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병과 변경을 고민했다. 당시 상관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조언을 받아 1918년 7월 중위 시절 헌병으로 전과하여 헌병 중위가 되었다.[24] 이후 한국으로 파견되어 양주 헌병 분대장을 지냈다.[24]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헌병사령부 부관, 헌병 연습소 학생을 거쳐 1921년 6월 헌병 대위로 진급했다.[24] 이치카와 헌병 분대장으로 임명되어 노다 쟁의 당시 노사 양측을 중재하여 조정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 해 1월에는 시부야 헌병 분대장으로 옮겼고, 1923년 8월부터는 고지마치 헌병 분대장을 겸임했다.[24] 당시 도쿄 헌병대 본부에서 아마카스의 시중을 들었던 인물 중에는 훗날 정치가가 되는 후쿠야 슌이치도 있었다.[24]

1923년 9월 16일,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의 혼란 속에서 아마카스는 헌병대 분대를 지휘하던 중, 유명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그리고 오스기의 여섯 살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를 체포했다. 아마카스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세 사람은 아마카스와 부하들에게 구타당해 살해되었고, 시신은 우물에 유기되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와 어린아이까지 살해된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천 명이 아마카스의 선처를 탄원하는 청원에 서명하기도 했다. 다치바나 무네카즈는 미국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주목받았다. 미국 대사관이 개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사관 관계자는 "미국 시민권자가 외국 법원에서 재판받더라도 해당 국가의 법이 적용되어야 하며, 재판의 공정성과 법 적용의 공정성에만 관심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1]

아마카스를 포함한 군인 5명은 살인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2]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은 아마카스의 행위를 군인의 의무, 즉흥성, 성실성, 순수한 동기 등과 연결하며 오스기와 이토 노에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아마카스가 국가를 보호하려는 충동으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아이의 살해조차 공익을 위해 정당화하려 했다. 법정의 많은 사람들과 방청객들은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며 아마카스를 "고쿠시"(國士, 나라의 인물)라고 외쳤으나 판사는 제지하지 않았다. 군 검찰관조차 아마카스가 과잉 행동을 했을 뿐이라며 그의 애국심이 "눈물을 자아낸다"고 말하며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징역 15년을 구형했다.[3]

그러나 판결은 더욱 관대했다.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공범인 육군 상사 모리 게이지로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세 명은 상부 명령 이행 및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3] 1924년 8월, 아마카스의 형량은 7년 6개월로 감형되었고,[4] 1926년 10월 히로히토의 천황 즉위를 기념하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아마카스는 1927년 7월 육군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체류 중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와 교류하기도 했다. 1930년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곧바로 만주의 무크덴(현재의 선양)으로 건너가 일본 첩보원 도이하라 겐지 밑에서 일했다. 그는 일본군이 관여하던 아편 생산 및 중국 밀수 관리 업무를 맡았다. 만주 사변 이후에는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톈진의 조계지에서 만주로 비밀리에 이동시키는 작전에 관여했다. 이는 푸이를 새로 수립된 만주국의 괴뢰 통치자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1931년 11월, 푸이가 포트 아서(현재의 뤼순)에 도착했을 때, 아마카스는 부두에서 그를 맞이하여 야마토 호텔로 안내하는 기차에 동승했다.[5] 기차 안에서 아마카스는 푸이에게 자신이 아마카스 사건의 주범이며, "천황의 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자랑하면서, 만약 푸이도 "천황의 적"으로 판명된다면 기꺼이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6]

만주국에서 아마카스는 새로운 수도인 신징(현재의 창춘)에서 민간 경찰 조직 창설을 도왔다. 그는 만주국에서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쳤으며, 미국 역사가 루이즈 영은 그를 고문과 살인을 즐기는 "가학적인" 인물로 묘사했다.[7] 1934년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할 때, 아마카스는 즉위식 기록 영화 제작진을 감독하며 푸이를 보좌했다.[8]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아마카스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비밀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9년, 기시 노부스케의 지원을 받아 만주 영화 협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협회는 관동군만주국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전쟁 노력을 선전하기 위한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9] 아마카스는 영화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독일에서 최신 영화 촬영기와 제작 기술을 도입하고, 아사히나 다카시와 같은 유명 일본 영화인들을 만주국으로 초빙했다. 그의 활동은 오타카 요시코(리카란)의 배우 경력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1940년 아마카스가 제작한 영화 支那の夜|시나노 요루일본어("중국의 밤")는 그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11] 중국에서 자라 중국어에 능통했던 일본 배우 야마구치 요시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반일 감정을 가진 중국 여성 케이 란의 이야기를 다룬다.[12] 젊고 다정한 일본 해군 장교 하세 테츠오가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그의 구애를 거부한다. 그러나 하세가 그녀의 뺨을 때리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13] 이전의 반일 발언을 사과하며 범아시아적 연합 속에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14] 이 영화는 중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중국 여성이 일본 남성에게 뺨을 맞고 나서야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졌다.[15] 일본 역사학자 홋타 에리는 당시 일본의 문화적 맥락에서 천황을 유아적인 백성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로 묘사하고, 군대 내에서 장교가 부하의 뺨을 때리는 행위를 '사랑의 징계'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16] 홋타는 영화 속 뺨 때리는 장면이 일본 내에서는 낭만적인 제스처, 즉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아끼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었지만,[17] 아마카스는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기를 바라는 범아시아주의적 메시지를 투영하려 했다고 분석했다.[19] 야마구치 본인은 1987년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이 굴욕적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이고 감동적이었다고 회상했다.[18]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함락되자, 아마카스는 청산가리(시안화 칼륨)를 복용하여 자살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0]

2. 3. 아마카스 사건

아마카스 사건의 군법회의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같은 해 9월 16일 당시 도쿄 헌병대 고지마치 분대장이었던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그리고 오스기의 조카인 다치바나 무네카즈(당시 6세) 세 명을 헌병대 본부로 연행했다. 이후 이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본부 뒤편의 오래된 우물에 유기하는,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헌병대나 육군 상부의 법적 책임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으며, 아마카스의 부하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든 책임은 아마카스 개인에게 돌아갔고, 그는 1923년 12월 8일 금고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로 아마카스는 정7위의 지위를 잃고[25], 훈6등 및 대례기념장, 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 종군기장을 박탈당했다[26].

군법회의 과정에서 아마카스는 "개인의 판단으로 세 명 모두 살해했다", "아이는 죽이지 않았다. 짚으로 싼 것을 보고 처음 알았다", "아이는 차마 죽일 수 없어 부하에게 명령했다" 등 진술을 여러 차례 번복했다. 또한 공범으로 지목된 병사가 "살해는 헌병 사령관의 지시였다"고 증언하기도 해, 사건의 진상과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후대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아마카스 본인은 요도바시 경찰서 측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처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검사국의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의 동기에 대해서는 군의 의지를 보인 상관의 지시, 정치적 분노, 개인적 동기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참조: 아마카스 사건)

판결 후, 아마카스가 변호사 쓰카자키 나오요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편지 다이쇼 12년 12월 9일

옥중에서 삼가 감사를 드립니다.(중략) 특히 제가 예심에서 말했고 또 선생님께 진실이라고 말씀드렸던 일로, 법정에서 하급자를 위해 주장하지 않고, 변론 도중에 무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변호인의 질문에 부딪혀, 선생님의 논지에 반하는 듯한(게다가 사실이 아닌) 답사를 했던 것은, 선생님께 불만과 불쾌감을 안겨드리고, 또한 변론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생각되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본인인 저로서도,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처럼 진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저의 괴로운 입장입니다. 실제로 추악한 예가 눈앞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이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성정에 반하여, 알고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술하여, 오늘 10년의 고역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셔서 모든 것을 면해주시기를 바랍니다.(후략)



쓰카자키 변호사는 판결 후에도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려 했으나, 아마카스로부터 더 이상의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이 편지를 통해 아마카스가 공판정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음이 드러났으며, 이 편지가 아마카스 본인이 사건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카스는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24년 8월 형량이 7년 6개월로 감형되었고[4], 1926년 10월에는 히로히토 천황 즉위 기념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2. 4. 만주에서의 활동

1927년 7월 육군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1930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만주의 무크덴(봉천)으로 이주하여 남만주철도(만철) 동아경제조사국 봉천 주임이 되었고, 일본 첩보원 도이하라 겐지 밑에서 일하며 일본군의 아편 생산 및 중국 밀수 관리에 관여했다. 또한 봉천관동군 특무기관장 토히하라 켄지 대좌의 지휘 아래 정보 및 모략 공작을 수행했고, 오오카와 슈메이를 통해 우익 단체 다이유호카이에 가입했다. 그는 일부 다이유호카이 회원을 부하로 삼아 아마카스 기관이라는 민간 특무 기관을 설립했으며, 이 시기 마약 거래에 손을 대 재산을 모았다는 설도 있다.

1931년 9월 류탸오호 사건으로 시작된 만주 사변 당시, 아마카스는 하얼빈 출병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봉천에 잠입하여 중국인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여러 곳에 폭탄을 투척하는 공작을 벌였다.[5] 이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만주국의 괴뢰 통치자로 옹립하기 위해, 톈진의 조계지에 있던 푸이를 만주로 비밀리에 빼돌리는 작전에 관여했다. 그는 푸이를 세탁물로 위장시키거나 쿨리로 변장시켜 열차에 태워 탈출시켰다. 1931년 11월, 푸이가 뤼순 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하여 야마토 호텔로 안내한 것도 아마카스였다.[5] 기차 안에서 아마카스는 푸이에게 자신이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타치바나 무네카즈를 "천황의 적"이기 때문에 죽였으며, 만약 푸이가 "천황의 적"으로 판명된다면 기꺼이 그를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6]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후, 아마카스는 푸이 호송의 공로를 인정받아 민정부 경무사장(현재의 경찰청장에 해당)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신징(창춘)으로 개명된 새로운 수도에서 민간 경찰 조직 창설을 도왔다.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아마카스는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며, 미국 역사가 루이즈 영은 그를 고문과 살인을 즐기는 "가학적인" 인물로 묘사했다.[7] 1934년 푸이의 만주국 황제 즉위식에서는 즉위식을 기록하는 영화 제작진의 감독 역할을 맡기도 했다.[8] 또한 만주의 유일한 합법적 정치 단체였던 만주국 협화회가 창설되자 이사가 되었고, 1937년에는 중앙본부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1938년에는 만주국 대표단(수호 경제 사절단)의 부대표로서 유럽을 방문하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의 시작을 알린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에는 중국에 대한 비밀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9년, 기시 노부스케의 지원을 받아 만주 영화 협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9] 만주 영화 협회는 관동군만주국중국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전쟁 노력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주요 선전 수단 중 하나였다. 아마카스는 제작되는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독일로 가서 최신 영화 촬영기와 제작 기술을 습득하고, 아사히나 다카시와 같은 유명 일본 영화 배우, 감독, 지휘자를 만주국으로 초청하여 작품 제작에 참여시켰다. 그의 노력은 리카란으로 더 잘 알려진 오타카 요시코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1940년, 아마카스는 支那の夜|시나노 요루일본어("중국의 밤")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이 영화는 그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가 되었다.[11] 중국에서 자라 중국어에 능통했던 일본 배우 야마구치 요시코가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반일 감정을 가진 중국 여성 케이 란의 이야기를 다룬다.[12] 젊고 다정한 일본 해군 장교 하세 테츠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는 그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도 그의 접근을 거부하다가, 그가 그녀의 뺨을 세게 때린 후에야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13] 사랑을 고백한 후 그녀는 자신의 반일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범아시아적 연합 속에서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14] 이 영화는 중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 여성을 사랑하게 만들려면 뺨을 때리기만 하면 된다는 암시에 굴욕감을 느꼈다.[15] 일본 역사학자 홋타 에리는 이 영화의 문화적 뉘앙스가 중국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을 국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로 묘사하며 국민을 유아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군대 내에서 장교가 부하의 뺨을 때리는 행위는 징벌이 아닌 '사랑의 표현'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16] 홋타는 일본 영웅이 중국 여성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일본에서는 낭만적인 제스처, 즉 그가 그녀를 걱정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17] 야마구치 본인도 1987년 인터뷰에서 이 장면이 굴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며, 매우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말했다.[18] 그러나 홋타는 아마카스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는 범아시아주의적 메시지를 투영하려 했다고 분석했다.[19]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함락되자 아마카스는 청산가리를 복용하여 자살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유서를 작성한 뒤 청산가리 알약을 삼켜 생을 마감했다.[20]

만주국 시대의 아마카스. 정치가·요인들에게 보급된 협화복을 착용하고 있다.

2. 5. 만주 영화 협회 이사장

1939년, 기시 노부스케(당시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차장)와 무토 도미오(총무청 홍보처장)의 추천으로 만주 영화 협회(滿洲映畵協會, 이하 만영)의 이사장에 취임했다.[9] 만영은 관동군만주국중국 국민당 정부에 대한 전쟁 노력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주요 선전 기관 중 하나였다.[9] 그의 임명 소식에 신징(현재의 창춘)의 일본인 사회에서는 "만영이 우익군국주의자에게 장악되었다", "군부의 독재 인사"라는 비판적인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기시 노부스케가 아마카스에게 보답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당시 만영은 제작 영화의 낮은 인기와 노사 분쟁으로 경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아마카스 사건 당시의 의연금 등으로 상당한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실제로는 만주 특무기관에서의 아편 거래 자금으로 추정됨) 아마카스의 자금 지원을 기대하고 만영 측에서 적극적으로 영입을 추진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아마카스는 만영 이사장으로서 경영 혁신에 힘썼다.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했지만, 해고된 직원들의 재취업 알선에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만영 소속 일본인과 만주인 직원들의 급여를 대폭 인상하고 동등한 대우를 보장했으며, 여배우를 술자리에 동석시키는 관행을 금지하는 등 사원 복지 향상에 신경을 썼다. 이러한 조치들 덕분에 만영 내부에서 그의 평판은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활동하여, 독일을 방문해 당시 최신의 영화 촬영 기술과 장비를 도입했으며, 이는 훗날 일본 도에이 영화사의 기술적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아사히나 다카시가 지휘하는 하얼빈 교향악단의 발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군 관료 출신으로 예술적 감각은 부족하여 영화 제작 현장에서 감독 등에게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라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영에서 제작하는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오타카 요시코(리카란)와 같은 배우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1940년에는 야마구치 요시코 주연의 영화 《시나노 요루》(支那の夜|시나노 요루일본어)를 제작했다.[11] 이 영화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반일 감정을 가진 중국 여성 케이 란(야마구치 요시코 분)이 일본 해군 장교 하세 테츠오에게 뺨을 맞은 후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2][13][14] 《시나노 요루》는 그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지만,[11] 중국에서는 여주인공이 일본인 남성에게 뺨을 맞고 복종하는 듯한 묘사 때문에 큰 논란과 함께 굴욕적이라는 반감을 샀다.[15] 일본 역사학자 홋타 에리는 당시 일본 군대 내에서 상관이 부하의 뺨을 때리는 행위가 '사랑의 징계'로 여겨졌던 문화적 맥락을 지적하며, 영화 속 뺨 때리는 장면이 일본 관객에게는 낭만적인 제스처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으나,[16][17] 중국 관객에게는 굴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연 배우 야마구치 자신은 해당 장면을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회상했지만,[18] 홋타는 아마카스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이 주도하는 범아시아주의를 선전하고, 나아가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서 일본의 우위를 암시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19]

만주 시절 아마카스는 "만주의 밤의 제왕"으로 불리며 막후에서 만주국을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격과 거침없는 언행 때문에 관동군 수뇌부에게 미움을 받았고, 아마카스 사건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은사인 도조 히데키를 제외한 군 간부들에게는 오히려 냉대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영향력은 주로 일본인 관료나 육군사관학교 동기 등 개인적인 인맥에 기반했으며, 활동 자금의 상당 부분은 만영에서 나왔다고 한다(네기시 간이치 증언).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이 붕괴하자 아마카스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청산가리를 마셔 자살했다.[20]

2. 6. 죽음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만주국이 함락 위기에 처하자 아마카스는 자살을 결심했다. 8월 8일 소련은 일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했으며, 다음 날인 9일 만주를 침공했다. 소련군이 만주국의 수도 신징(창춘)으로 다가오자,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이 발표된 다음 날인 8월 16일, 아마카스는 만주 영화 협회(만영) 사원들을 모두 불러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중국인 사원들에게 만영의 미래를 맡긴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사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신의 소지품을 유품으로 나눠주었으며, 사내 예금을 전액 인출하여 간부와 평사원 구별 없이 1인당 5천씩 퇴직금으로 지급했다.

만영 문서과장 타오카 미노루에 따르면, 아마카스는 8월 12일 이미 패전을 예상하고 간부들과 함께 일반 사원 및 가족 1천여 명을 강당에 모아 영화 감상 중 폭약으로 집단 살해한 뒤 간부들과 함께 자살할 계획을 세웠다.[32] 실제로 사원들에게는 가장 좋은 옷(가능하면 흰옷)을 입고 모이라는 통지가 전달되었으며, 일부는 집단 자결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다.[33][34] 그러나 이 계획은 만주국 총무청 차장 후루우미가 만류하여 취소되었다.[32]

아마카스의 부하들은 그의 자살을 막기 위해 총기나 칼 등을 압수하고 감시했지만, 8월 20일 이른 아침, 아마카스는 감시를 피해 숨겨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당시 현장에는 영화감독 우치다 토무, 만담가 사카노 히로시, 아카가와 코이치(아카가와 지로의 아버지) 등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결용 청산가리를 나눠주었다는 증언도 있다.[33] 당시 신문 보도로 인해 한때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퍼지기도 했다.[35]

만영 스태프들은 아마카스를 간호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신징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그를 따르던 3천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했으며, 장례 행렬은 1km가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신징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1946년 4월 화장되어 유골로 수습되었고, 이후 가족들이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도 후추시의 다마 영원에 안치되었다.

아마카스는 재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미망인 미네는 두 자녀와 함께 빈손으로 친정으로 돌아가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전후 학제 개혁으로 신설된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미네의 친오빠 핫토리 미노루는 공산당 활동가였으나, 성격이 강했던 미네는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딸 와코는 신용조합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와세다 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어머니는 "좌경하면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와코는 다소 진보적인 성향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고 전해진다. 미네는 전후 힘든 생활 속에 50대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미쓰비시 전기에 입사한 아들 타다오가 부임지인 나가사키로 모셔와 함께 살다가 1970년 3월 사망했다.[29]

3. 유산 및 평가

아마카스 마사히코에 대한 평가는 그의 복잡한 행적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난다. 모리시게 히사야나 무토 토미오 등 일부 주변 인물들은 그가 만주국 건설과 같은 거대한 목표에 사리사욕 없이 헌신했으며[19][20], 야마구치 요시코(이샹란)의 계약을 파기해 주거나 권력자에게 굴하지 않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만주영화협회 이사장으로서의 활동은 일부 문화계 인사들에게 긍정적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카스 사건과 같은 잔혹한 행위의 주모자였으며, 히스테릭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또한 뚜렷하게 존재한다. 그의 관료주의적인 면모 역시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에,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마지막 황제[21]를 비롯한 여러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대중문화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꾸준히 다루어지고 있다.

3. 1. 부정적 평가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일반적으로 히스테릭하고 신경질적이며 관료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수이자 배우였던 야마구치 요시코(이샹란)는 아마카스가 평소에는 과묵하고 엄격했지만 세심하고 상냥한 면도 있었으며, 유머 감각과 장난기 있는 모습도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쳤으며, 특히 술에 취하면 냄비 요리에 담배 꽁초가 들어간 재떨이를 넣는 등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돌발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3. 2. 긍정적 평가

모리시게 히사야는 아마카스에 대해 "만주라는 새로운 나라에, 우리 젊은이들과 함께 정열을 기울여 함께 꿈을 꿨다. 빌딩을 짓자느니, 돈을 벌자느니 하는 쩨쩨한 꿈이 아니었다. 하나의 나라를 훌륭하게 키워 나가자 하는, 큰 꿈에 취한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무토 토미오는 "아마카스는 사리사욕을 생각하지 않았고, 거기에 생명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 그와 사귄 사람은 아마카스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 부러운 마음마저 가졌다. 또한, 거기에 매료된 사람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야마구치 요시코(이샹란)는 만주영화협회(만영)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아마카스가 "마음은 안다"며 계약서를 파기해 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아마카스를 "후련한 느낌의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묵하고 엄격해서 주변에서 두려워했지만, 사실은 세심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유머를 이해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면도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때도 종종 있었다. 술에 취하면 냄비 요리에 담배 꽁초가 들어간 재떨이를 넣거나, 주변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갑자기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에게는 강직한 성격을 보여, 일본 본토에서 온 영화사 중역들이 접대 자리에서 "너희 쪽 여배우를 안게 해 달라"고 요구하자, "여배우는 작부가 아닙니다!"라고 단호하게 대응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호의적인 증언이 있는 반면, 히스테릭하고 신경질적이며 관료적이라는 평가도 존재했다.

1921년 6월, 헌병 대위로 승진하여 지바현 이치카와 헌병 분대장이 된 직후 노다 쟁의가 발생했다. 아마카스는 노다정으로 출장을 가 십수일간 머물며 회사 측과 노동자 측 대표를 요릿집으로 불러 대화를 주선하여 조정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자리를 뜨면서 계산하려 했으나 이미 회사 측에서 지불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반환하게 하고 자신의 돈으로 지불했다. 부하들에게도 돈을 잘 썼던 그는 이때부터 "돈을 잘 쓰는 남자"로 알려졌다.

3. 3. 대중문화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등장인물로 다루어졌다.

  •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아마카스 역을 연기했으며, 영화에서는 그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21]
  • 아라마타 히로시의 역사 판타지 소설 《제도 이야기》에서는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인물로 등장한다.
  • 이안 부루마의 2008년 소설 《차이나 러버》에도 등장인물로 나온다.
  •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2016년 소설 《더 데드》에서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아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 목록이다.

'''영화'''

  • 대학살 (고모리 시로 감독, 1960년): 누마타 요이치가 연기했다. 비디오 발매 당시 제목은 『폭압 관동 대지진과 군부』였다.
  • 마지막 황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년): 사카모토 류이치가 연기했으며, 사실과 달리 애꾸눈으로 등장한다.
  • 슈투름 운트 드랑크 (야마다 이사오 감독, 2014년): 아사카타 모리오가 연기했다. 공식 웹사이트


'''텔레비전 드라마'''

  • 현울림이 멈추지 않아 (1984년): 사토 케이가 연기했다.
  • 사요나라 리코란 (1989년): 가타오카 쓰루타로가 연기했다.
  • 눈물을 머금고 미소지어라 메이지의 아들 시마다 세이지로 (1995년): 시이나 킷페이가 연기했다.
  • 유전의 왕비·마지막 황제 (2003년): 다케나카 나오토가 연기했다.
  • 리코란 (2007년): 나카무라 시도가 연기했다.
  • 남장 미인 ~가와시마 요시코의 생애~ (2008년): 나카무라 토오루가 연기했다.
  • 바람아 폭풍아 (2022년): 오토오 타쿠마가 연기했다.


'''소설'''

'''만화'''

  • 무지개색 트로츠키 (야스히코 요시카즈)
  • 용-RON- (무라카미 모토카)
  • 북신전기 (오오츠카 에이지 원작, 모리 미카 그림)
  • 나라가 불탄다 (모토미야 히로시): 작중 주인공 혼다 유스케의 아내의 생명을 구한 은인으로 그려진다.
  • 풍운아 외전 마츠키치전 (미나모토 타로)


'''게임'''

  • 소슈전신기숙학원 팔명진

참조

[1] 뉴스 Amakasu Incident Embassy https://www.newspape[...] 1923-12-12
[2] 서적 The Japan Financial and Economic Monthly https://books.google[...] Liberal news agency 1924
[3] 간행물 Pure Spirits: Imperial Japanese Justice and Right-Wing Terrorists, 1878–1936 https://www.academia[...] 2018
[4]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2000
[5] 서적 The Last Emperor Futura 1987
[6] 서적 The Last Emperor Futura 1987
[7] 서적 Japan's Total Empire: Manchuria and the Culture of Wartime Imperial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8] 서적 The Last Emperor Futura 1987
[9] 서적 Japan/American Film Wars
[10] 서적 Japan's Total Empire
[11]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2]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3]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4]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5]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6]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7]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8]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19] 서적 Pan-Asianism and Japan's War 1931–1945 Palgrave 2007
[20] 서적 The Last Emperor Futura 1987
[21] 웹사이트 Internet Movie Database http://imdb.com/titl[...]
[22] 뉴스 甘粕忠男氏死去(元三菱電機副社長) https://www.jiji.com[...] 時事通信 2021-12
[23] 뉴스 甘粕忠男さん死去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7-08-09
[24]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25] 간행물 官報』1924年6月12日「彙報・官庁事項」 https://dl.ndl.go.jp[...]
[26] 간행물 官報 1924年12月10日 二七六頁 https://dl.ndl.go.jp[...]
[27] 뉴스 近親にも知らせず、既に仮出獄 時事新報 1926-10-17
[28] 뉴스 出所後の甘粕大尉と初めて会見 東京朝日新聞 1926-11-02
[29] 서적 畸人巡礼怪人礼賛 毎日新聞社 2010-07-25
[30] 서적 甘粕正彦先生の年譜 1965
[31] 웹사이트 松竹大谷図書館ニュースレター https://www.shochiku[...] 松竹大谷図書館 https://www.shochiku.co.jp/shochiku-otani-toshokan/
[32] 뉴스 甘粕元大尉は青酸自殺 1954-02-12
[33] 서적 私の「昭和の戦争」 (株)アスコム 2007-05-11
[34] 웹사이트 (2ページ目)元満映社員(97)が語る満鉄物語 「自殺した甘粕さんは卑怯」 https://dot.asahi.co[...] 株式会社 朝日新聞出版 2024-09-18
[35] 뉴스 敗戦直後に満洲で自殺 毎日新聞(東京) 1945-12-19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3-02-21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3-22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1-05-11
[39] 간행물 叙任及辞令二 官報 1936-03-30
[40] 간행물 辞令二 官報 1940-12-13
[4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4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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