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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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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다 아키라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평론가로,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중퇴했다. 그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재구성한 『구조와 힘』을 발표하여 뉴 아카데미즘의 선구자로 불렸으며, 『도주론』을 통해 "파라노에서 스키조로"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교토대학 경제연구소 준교수를 사임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교토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ICA 교토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비평 활동과 저술, 편집, 예술제 감수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천황제, 표현의 자유, 다문화주의 등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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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아키라
기본 정보
인물 정보
관련 인물
소속
참고 자료

2. 생애 및 학력

효고현 고베시 출신으로, 부모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1979년 교토대학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81년 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중퇴했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를 거쳐, 1989년부터 동 경제연구소 조교수(助教授)를 지냈다. 2008년부터 교토조형예술대학 학장, 이후 동 대학원 학술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5]

아사다 아키라의 학력 및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75년로쿠쇼 고등학교(洛星高等学校) 졸업
1979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학부(経済学部) 졸업
1981년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경제학연구과(大学院経済学研究科) 박사과정 중퇴
1981년교토대학(京都大学) 인문과학연구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조교(助手)
1989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연구소(京都大学経済研究所) 조교수(助教授)
2007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연구소(京都大学経済研究所) 준교수(准教授)
2008년교토조형예술대학(京都造形芸術大学) 교수, 동 대학 대학원장
2020년교토예술대학(京都芸術大学) 교수, 부속기관 ICA교토소장



'''겸임'''


  • 킨키대학(近畿大学) 국제인문학연구소(国際人文学研究所) 객원교수(客員教授)
  • 방송대학(放送大学) 대학원 객원교수(大学院客員教授)


건축가 아사다 다카시(浅田孝)와 도호쿠 대학(東邦大学) 총장 아사다 토시오(浅田敏雄)는 그의 삼촌이다.

2. 1. 초기 생애

효고현 고베시 출신이다. 부모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1979년 교토대학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81년 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중퇴했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를 거쳐, 1989년부터 동 경제연구소 조교수(助教授)가 되었다. 2008년부터 교토조형예술대학 학장, 이후 동 대학원 학술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5]

아사다 아키라의 학력 및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75년로쿠쇼 고등학교(洛星高等学校) 졸업
1979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학부(経済学部) 졸업
1981년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경제학연구과(大学院経済学研究科) 박사과정 중퇴
1981년교토대학(京都大学) 인문과학연구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조교(助手)
1989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연구소(京都大学経済研究所) 조교수(助教授)
2007년교토대학(京都大学) 경제연구소(京都大学経済研究所) 준교수(准教授)
2008년교토조형예술대학(京都造形芸術大学) 교수, 동 대학 대학원장
2020년교토예술대학(京都芸術大学) 교수, 부속기관 ICA교토소장



'''겸임'''


  • 킨키대학(近畿大学) 국제인문학연구소(国際人文学研究所) 객원교수(客員教授)
  • 방송대학(放送大学) 대학원 객원교수(大学院客員教授)


건축가 아사다 다카시(浅田孝)와 도호쿠 대학(東邦大学) 총장 아사다 토시오(浅田敏雄)는 그의 삼촌이다.

2. 2. 학력


  • 1975년: 로쿠쇼 고등학교 졸업
  • 1979년: 교토대학경제학부 졸업
  • 1981년: 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박사 과정 중퇴
  • 킨키대학 국제인문학연구소 객원교수
  • 방송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3. 학문적 경력

아사다 아키라는 경제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했지만, 1980년대 이후 철학, 사상, 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3년 『구조와 힘』을 발표하여 뉴 아카데미즘의 선구자로 주목받았고, 1984년 『도주론』에서 제시한 "파라노에서 스키조로"라는 개념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도주론』 이후, 아사다는 대담, 짧은 에세이 재구성, 총서 편집, 예술제·영화제 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9] 그의 스승인 모리 타케시는 아사다의 본령을 "편집" 행위에 있다고 평가한다.[13] 아사다의 소개와 평가를 통해 많은 사상가와 아티스트들이 주목받게 되었다.[14]

경제학 분야에서는, 경제사상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경제학 관련 저술 활동이 거의 없으며, 현재는 경제학자를 "폐업"했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기시모토 다카아키는 아사다의 전문 분야인 이론경제학 역량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6][17]

아사다 아키라의 학문적 경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내용
1975년로쿠쇼 고등학교(洛星高等学校) 졸업
1979년교토대학경제학부 졸업
1981년교토대학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박사과정 중퇴
1981년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
1989년교토대학 경제연구소 조교수
2007년교토대학 경제연구소 준교수
2008년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 동 대학 대학원장
2020년교토예술대학 교수, 부속기관 ICA 교토 소장


3. 1. 초기 경력 (1981-1989)

1957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1979년 교토대학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81년 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중퇴했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를 거쳐, 1989년부터 동 경제연구소 조교수(助教授)가 되었다.[5]

; 『구조와 힘』

1983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 시절,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일관된 관점에서 재구성한 『구조와 힘』을 발표했다. 이 책은 사상서로서는 이례적으로 15만 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9], 같은 시기에 『티베트의 모차르트』를 발표한 나카자와 신이치 등과 함께, 소위 "뉴 아카데미즘"의 선구자로서 일반 미디어를 무대로 폭넓은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6]

당시 일본에서는 롤랑 바르트푸코, 레비스트로스 등의 프랑스 현대 사상이 활발하게 소개되었지만, 사상가별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을 사상사 전체에 위치시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9]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사다가 『구조와 힘』에서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나,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한 라캉파 정신분석 사상 등 여러 흐름을 조망하고 재구성했기 때문에[7], 이 책은 프랑스 현대 사상에 대한 "지식의 지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8][9]

; 『도주론』

1984년에는 일반 잡지 등에 기고했던 에세이를 모은 『도주론』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들뢰즈가타리, 그리고 마르크스 등의 사상을 기존처럼 정면에서 일점 집중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관점을 상호 이동하면서 텍스트에 대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0] 아사다는 이러한 대조를 특정한 가치관이나 입장·관점에 고집하는 편집증(偏執狂)형과 사물에 고집하지 않는 분열증(統合失調症)형으로 이분했는데[10], 이것은 "파라노에서 스키조로"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당시 유행어가 되었고[9], 제1회 신어·유행어 대상에서 신어 부문 동상을 수상했다.[11]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잡지 『GS』에서 활동한 후, 1990년대에는 가타야마 기요시와 함께 사상지 『비평공간』의 편집 위원[12]을 역임했으며, 『계간사조』, 『InterCommunication』, 『Any』 등의 사상지 편집에 참여했다.

3. 2. 교토대학 경제연구소 (1989-2008)

1989년부터 교토 대학 경제연구소 조교수로 재직했다.[5] 2008년, 교토 대학 경제연구소 준교수를 사임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 학장에 취임했다.[https://web.archive.org/web/20080511121959/http://www.yomiuri.co.jp/book/news/20080430bk07.htm][http://www.kyoto-art.ac.jp/graduate/about/gpresident.html]

2008년까지 20년간 교토 대학 경제연구소에서 조교수(준교수)로 근무했지만, 교수로 승진하지 못했다. 결국, 『주간문춘2008년 3월 27일호 "19년간 '조교수' 끝에 아사다 아키라가 교토대를 뛰쳐나갔다" 기사는, "학내에서 '무능한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겠지만(웃음), 이 이상의 출세, 즉 교수가 되는 것은 없다고 단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80년대 중반 이후, 대담집이나 예술 비평을 제외하면 거의 저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로서의 업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

3. 3. 교토조형예술대학/교토예술대학 (2008-현재)

2008년 교토대학 경제연구소 준교수를 사임하고, 교토조형예술대학 학장에 취임했다.[5] 이후 동 대학원 학술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2020년 교토조형예술대학이 교토예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함에 따라, 교토예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부속기관 ICA 교토 소장에 취임하면서, "단순한 저널리즘적인 정보도, 학술적인 논고도 아닌, 글로벌한 아트 신의 구체적인 현실에 접근하고, 또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해주시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했다.[15]

연도내용
2008년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 동 대학 대학원장
2020년교토예술대학 교수, 부속기관 ICA 교토 소장


3. 4. 겸임


  • 킨키대학교 국제인문학연구소 객원교수
  • 방송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

4. 주요 저작 및 사상

아사다 아키라는 1983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 시절, 『구조와 힘』을 발표하며 뉴 아카데미즘의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이 책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일관된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프랑스 현대 사상의 "지식의 지도"로 평가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9][6][8]

이듬해인 1984년에는 에세이집 『도주론』을 발표, "파라노에서 스키조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유행시키며 신어 부문 동상을 수상했다.[9][11] 그는 이 책에서 들뢰즈가타리, 마르크스 등의 사상을 다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강조했다.[10]

이후 아사다는 대담, 에세이, 총서 편집, 예술제 감수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9] 2012년부터는 웹 미디어 [https://realkyoto.jp/ REALKYOTO]에서 평론을 발표했고, 2020년부터는 [https://icakyoto.art/ ICA교토] 소장으로 활동하며 글로벌 아트 신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15]

4. 1. 『구조와 힘』 (1983)

1983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 시절,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일관된 관점에서 재구성한 『구조와 힘』을 발표했다. 이 책은 사상서로서는 이례적으로 15만 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9], 같은 시기에 『티베트의 모차르트』를 발표한 나카자와 신이치 등과 함께, 소위 "뉴 아카데미즘"의 선구자로서 일반 미디어를 무대로 폭넓은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6]

당시 일본에서는 롤랑 바르트, 푸코, 레비스트로스 등의 프랑스 현대 사상이 활발하게 소개되었지만, 사상가별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을 사상사 전체에 위치시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9]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사다는 『구조와 힘』에서 데리다의 해체 철학,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한 라캉파 정신분석 사상 등 여러 흐름을 조망하고 재구성하여[7], 프랑스 현대 사상에 대한 "지식의 지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8][9]

4. 2. 『도주론』 (1984)

1984년, 아사다 아키라는 일반 잡지 등에 기고했던 에세이를 모아 『도주론』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아사다는 들뢰즈와 가타리, 마르크스 등의 사상을 기존처럼 정면에서 일점 집중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관점을 상호 이동하면서 텍스트를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0] 아사다는 이러한 대조를 특정한 가치관이나 입장·관점에 고집하는 편집증(偏執狂)형과 사물에 고집하지 않는 분열증(統合失調症)형으로 이분했는데,[10] 이는 "파라노에서 스키조로"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행어가 되었고,[9] 제1회 신어·유행어 대상에서 신어 부문 동상을 수상했다.[11]

4. 3. 기타 활동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잡지 『GS』에서 활동했고, 1990년대에는 가타야마 기요시와 함께 사상지 『비평공간』의 편집 위원[12]을 역임했으며, 『계간사조』, 『InterCommunication』, 『Any』 등의 사상지 편집에 참여했다.

『도주론』 이후 아사다의 저술은 대담·짧은 에세이 등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고, 총서 편집이나 예술제·영화제 감수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9]. 수학자 모리 타케시는 아사다의 본령이 일견 무관계한 것을 관련짓고, 전체 속에 위치시켜 새롭게 조명하는 넓은 의미의 "편집" 행위에 있다고 지적한다.[13] 또한 아사다의 소개·평가를 계기로 많은 사상가와 아티스트가 주목받게 되었다.[14]

2012년부터 웹 미디어 [https://realkyoto.jp/ REALKYOTO]에서 평론을 발표했다. 2020년 말 해당 미디어는 업데이트를 중단하고, [https://icakyoto.art/ ICA교토] 사이트 내 웹 매거진 REALKYOTO FOLUM으로 이전했으며, 아사다는 ICA교토 소장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단순한 저널리즘적인 정보도, 학술적인 논고도 아닌, 글로벌한 아트 신의 구체적인 현실에 접근하고, 또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해주시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15]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문학이 성립할 여지가 사라져, 문학 세계에서도 시장 논리를 우선하는 라이트 노벨, 휴대폰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이 주류가 되어 문학이 "황량한 황야"에 놓였다고 언급했다.[22] 또한 "망명 지식인이 구현하는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 20세기 인문학의 최대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을 21세기에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모티브가 된다"고 말했다.[23]

2000년대 정보 환경,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간단히 검색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사물로서의 지식에 직접적이고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한 장소, 그러한 만남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가 큰 문제다"라고 말했다.[22]

소칼 사건에서 나타난 프랑스 현대 사상 유행의 현학성 문제에 대해, 알랭 소칼 등의 논증은 대상 논자를 본질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비판 근거인 과학주의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응답하면서도, 소칼 사건의 교훈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현학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24]

1991년 5월 25일5월 26일 도쿄 대학 5월제에서 열린 도쿄도 청년의 집 사건 재판 보고 및 강연회에서 아사다는 "일본은 부권적 중심에 의한 질서화보다 모성적 완충제 보호 아래 서로 의지하는 유사 동성애자 사회이며, 남자가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동성애자 배제는 명백히 보이지 않지만, 더 잔혹한 형태를 취한다"고 말했다. 또한 "성적 소수자와 다수자의 이항 대립 토대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했다.[26]

2019년 국제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내 기획전 "표현의 자유전・그 후"가 항의를 받아 전시를 중단한 문제[27][28][29][30]에 대해, "공권력을 가진 사람이 전람회를 할 때 개별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 입을 대는 것은 검열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또한 "세계 지배적 조류는 다문화주의다.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가운데 타인을 존중하고 상처 입지 않도록 하자는 태도는 일단 옳지만,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표현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 지식인대중의 역린을 건드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31]

같은 해 8월 정치가 타나카 야스오와의 대담에서 미중 정상회담 및 G20 오사카 정상회의 관련 기사에서는 "아베 신조 정권은 천황 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이웃 나라(한반도)를 식민지화하면 100년이 지나도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32]

2000년대에 전경화된 "규율(규율・훈련)" 시스템이 기능 부전에 빠져 생겨나는 "아이들의 자본주의" 문화를 "스키조 키즈" 형태로 긍정・평가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유아적 퇴행 상품화"는 "최악"이며 "현재 이런 논의는 질 들뢰즈가 경고하는 '통제(감시)' 시스템 보완물일 뿐, 근대주의 핵심에 있던 아이라는 것의 가능성 중심을 결정적으로 벗어나고 있다"고 부정했다. "아이의 가능성 중심"에 칸트의 가능성 중심을 담당하는 "조화될 수 없는 힘의 다발"을 구현하는 아르튀르 랭보를 들며, "타율성도 자율성도 없는 흩어진 신체 부위 다발이 생정치적 통제 시스템 속에 부유하는 안이한 디스토피아 이미지가 지배적이고, 부분적으로 현실화되는 현재,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비전을 칸트, 랭보, 폴 세잔에 준거하고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작업을 힌트로 찾아나가는 것은 '현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며, "포스트모던 또는 포스트히스토리컬 상황에서 겉도는 우리도, 그렇기에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을 목표해야 한다고 말했다.[33]

"고등학교 때 연극과 학생회를 매우 싫어해서, 지금도 히라타 오리자나 오카다 토시키 같은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고 발언했으며, 연극에 대해 퍼포먼스로서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큰 소리로 울거나 소리 지르는 "고등학교 연극"적인 연극은 싫어한다고 말했다.[34]

1999년 구사마 야요이 전람회 "구사마 야요이: 뉴욕/도쿄"와 아라키 노부요시 전람회 "센티멘탈한 사진, 인생"이 동시에 개최되었던 도쿄도 현대 미술관 방문 경험을 이야기한 "구사마 야요이의 승리"('파(波)' 1999년 7월호, 이와나미 쇼텐)에서, "한마디로 "진짜"와 "가짜", 프리드리히 니체 말로 하면 "강자"와 "약자"일까"라며 구사마를 평가하고 아라키를 혹평했다. 아라키 사진을 "젖은 감상에 젖은 더러운 사진", "거기에는 그런 감상적 이야기에 매달려야만 살 수 있는 약한 "나", 자신을 상품으로 해 약자 무리 환심을 사려는 사악한 "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구사마를 "센티멘트는 그것을 느끼는 자아를 전제로 한다. 구사마 야요이는 자아가 병과 죽음의 투쟁이 전개되는 비인격적 장소로 변한다. 처절하고 화려한 투쟁 기록은 가슴을 울리는 절실함을 가지면서, 작가 병력을 전혀 모르는 자도 압도한다. 작품 하나하나는 젖은 감상에서 멀리 떨어져 당당히 우뚝 서, 작품 자체로 보는 이 감각을 전율시킨다. 그렇기에 예술이라 불릴 만하다"고 극찬하며, "만신창이로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에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한다"고 맺었다.[35]

그 외 아라키 노부요시에 대해 강연에서 "정말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길바닥에서 죽으면 좋겠다"고 말했다.[36]

5. 비평 및 논쟁

아사다 아키라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쟁적인 발언과 비평을 해왔다.

1987년 쓰지모토 기요미와의 대담에서 천황제에 대해 "종전(終戰) 때 제대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라고 말하며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8] 1988년 쇼와 천황 병상 당시 황궁 앞에서 토하자(土下座)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토인(土人)'의 나라에 있는 걸까 하고 섬뜩"하다고 발언하여 보수파의 항의를 받았다.[19][20][21]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원호가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정부와 매스컴이 선동하는 '봉축 분위기' 속에서 역사 기억 상실증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21]

2008년에는 교토대학교 경제연구소에서 조교수(준교수)로 20년간 근무했지만, 교수 승진에 실패하고 퇴직했다. 『주간문춘』은 이를 두고 "학내에서 '무능한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겠지만, ... 교수가 되는 것은 없다고 단념했는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보도했다.[16] 기시모토 다카아키는 아사다가 문부성의 권위주의적 암기식 교육을 옹호한 것에 대해 "아사다 아키라의 수준이 낮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비판하며, 이론경제학 분야에서도 학자로서 뛰어나지 않다고 지적했다.[17]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문학이 쇠퇴하고 라이트 노벨, 휴대폰 소설 등이 주류가 된 것에 대해 문학이 "황량한 황야"에 놓였다고 언급했다.[22] 정보 및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해서는, 지식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22] 소칼 사건에 대해서는 알랭 소칼 등의 비판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불필요한 현학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1991년 도쿄도 청년의 집 사건 관련 강연에서는 일본 사회를 모성적 완충제(오브라트) 보호 아래 서로 의지하는 유사 동성애자 사회로 규정하고, 성적 소수자와 다수자의 이항 대립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했다.[25][26]

2019년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전시 중단 문제에 대해서는, 공권력 개입을 검열에 가깝다고 비판하고, 지식인대중의 역린을 건드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31] 같은 해 다나카 야스오와의 대담에서는 아베 신조 정권이 천황 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이웃 나라(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면 100년이 지나도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32]

질 들뢰즈가 경고하는 '통제' 시스템을 비판하며, 칸트의 "조화될 수 없는 힘의 다발"을 구현하는 존재로 아르튀르 랭보를 들며,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도 "아이가 되는 것"을 목표해야 한다고 말했다.[33] 히라타 오리자나 오카다 토시키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없다고 발언하며, "고등학교 연극"적인 연극을 싫어한다고 말했다.[34]

1999년 구사마 야요이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회를 비교하며, 구사마를 "진짜", "강자"로 극찬하고 아라키를 "가짜", "약자"로 혹평했다. 아라키의 사진을 "젖은 감상에 젖은 더러운 사진"이라고 비판하고, 구사마의 작품을 "젖은 감상으로부터 한없이 먼 곳에서 당당하게 우뚝 서 있으며, 단지 작품 그 자체로서 보는 자의 감각을 전율하게 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35] 아라키 노부요시에 대해 "정말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길바닥에서 죽으면 좋겠다"고 욕하기도 했다.[36]

5. 1. 경제학자로서의 평가

경제학부 및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출신으로, 원래는 경제학자를 자칭하며 전공은 경제학이었다. 그 외에도 경제사상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경제학 관련 업적은 물론 경제학 관련 저술 활동이 전무하며, 현재는 경제학자를 "폐업"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시모토 다카아키는 아사다가 "학생들의 학력이 최근 10년 사이에 극적으로 떨어졌다. 문부성은 권위주의적인 암기식 교육을 유지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최근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낮다는 것보다 오히려 아사다 아키라(浅田彰)의 수준이 낮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사다 아키라는 전문 분야라는 이론경제학 분야에서조차 학자로서 전혀 뛰어나지 않습니다."[16] "재미없는 전문 분야 밖의 일을 말하는 아사다 아키라"[17]라고 비판하며, 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업적이나 저서를 하나도 남기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2008년까지 20년간 교토대학교 경제연구소에서 조교수(준교수)로 근무했지만, 교수로 승진하지 못했다. 결국, 『주간문춘2008년3월 27일호 "19년간 '조교수' 끝에 아사다 아키라가 교토대를 뛰쳐나갔다" 기사는, "학내에서 '무능한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겠지만(웃음), 이 이상의 출세, 즉 교수가 되는 것은 없다고 단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80년대 중반 이후, 대담집이나 예술 비평을 제외하면 거의 저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로서의 업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도했다.

5. 2. 천황제 비판

1987년 쓰지모토 기요미와 황실에 관한 대화를 하면서 천황제에 대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전(終戰) 때 제대로 책임 추궁이 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18]

1988년 쇼와 천황이 병상에 눕자 많은 사람들이 황궁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서명했다. 아사다 아키라는 그 광경에 대해 기타 잇키의 천황론을 언급하면서 "매일 뉴스에서 황궁 앞에서 토하자(土下座)하는 무리들을 보여주니, 나는 도대체 어떤 '토인(土人)'의 나라에 있는 걸까 하고 섬뜩할 뿐이다"라고 발언하여[19][20] 보수파를 중심으로 항의를 받았다.[21]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원호가 바뀐 것에 대해서는, 이때의 일을 되돌아보면서 "정부와 매스컴이 선동하는 '봉축 분위기' 속에서 역사 기억 상실증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소논문을 발표했다.[21]

5. 3. 기타 논쟁


  •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문학의 입지가 좁아지고, 라이트 노벨, 휴대폰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주류가 되면서 문학이 "황량한 황야"에 놓였다고 언급했다.[22] 또한 20세기 인문학의 최대 가능성이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서 구현되었으며, 이를 21세기에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23]
  • 2000년대 정보 및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검색과 조작의 편리함과는 별개로, 사물로서의 지식과 직접적이고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2]
  • 소칼 사건에서 나타난 프랑스 현대 사상 유행의 현학성 문제에 대해, 알랭 소칼 등의 비판이 대상 논자들을 본질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과학주의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소칼 사건의 교훈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현학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 1991년, 도쿄도 청년의 집 사건 관련 도쿄 대학 5월제 강연에서, 일본 사회를 모성적 완충제(오브라트) 보호 아래 서로 의지하는 유사 동성애자 사회로 규정하고, 남성의 정체성 미확립으로 인해 동성애자 배제가 더 잔혹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한 성적 소수자와 다수자의 이항 대립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했다.[25][26]
  • 2019년,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 전시 중단 문제에 대해, 공권력의 개입을 검열에 가깝다고 비판하고, 다문화주의 존중 태도는 옳지만 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표현은 의미가 없으며, 지식인대중의 역린을 건드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31]
  • 같은 해 8월 정치가 다나카 야스오와의 대담에서 아베 신조 정권이 천황 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이웃 나라(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면 100년이 지나도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는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32]
  • "아이들의 자본주의" 문화를 "정신분열증" 형태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유아적 퇴행의 상품화"는 "최악"이며, 이는 질 들뢰즈가 경고하는 '통제' 시스템의 보완물일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답했다. 칸트의 가능성의 중심을 담당하는 "조화될 수 없는 힘의 다발"을 구현하는 존재로 아르튀르 랭보를 들며,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도 "아이가 되는 것"을 목표해야 한다고 말했다.[33]
  • 고등학교 시절 연극과 학생회를 싫어했으며, 히라타 오리자나 오카다 토시키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없다고 발언했다. 정념을 폭발시키는 "고등학교 연극"적인 연극을 싫어한다고 말했다.[34]
  • 1999년 구사마 야요이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회를 비교하며, 구사마를 "진짜", "강자"로 극찬하고 아라키를 "가짜", "약자"로 혹평했다. 아라키의 사진을 "젖은 감상에 젖은 더러운 사진"이라고 비판하고, 구사마의 작품을 "젖은 감상으로부터 한없이 먼 곳에서 당당하게 우뚝 서 있으며, 단지 작품 그 자체로서 보는 자의 감각을 전율하게 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35] 아라키 노부요시에 대해 "정말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길바닥에서 죽으면 좋겠다"고 욕하기도 했다.[36]

6. 저서


  • 構造と力─記号論を超えて일본어 (구조와 힘─기호론을 넘어서), 경초서방, 1983년
  • * 2023년 中公文庫중국어에서 문고판으로 발행
  • 逃走論일본어 (도주론), 축마서방, 1984년
  • ヘルメスの音楽일본어 (헤르메스의 음악), 축마서방, 1985년
  • 「歴史の終わり」を超えて일본어 ("역사의 끝"을 넘어서), 중공문고, 1999년
  • 映画の世紀末일본어 (영화의 세기말), 신초샤, 2000년
  • ダブル バイン드를 넘어서일본어, 남상사, 1985년
  • 「역사의 종말」과 세기말의 세계일본어, 쇼가쿠칸, 1994년
  • 포사이스 1999일본어, NTT출판, 1999년
  • 20세기 문화의 임계일본어, 청토사, 2000년


'''공저'''

저자제목출판사출판년도
사와 타카미츠 외科学的方法이란 무엇인가일본어중앙공론사 (중공신서)1986년
시마다 마사히코천사가 지나간다일본어신초샤1988년
카타야마 긴토비평 공간일본어오타출판1990년대~2000년대
오카자키 겐지로・마츠우라 토시오모더니즘의 하드 코어 현대미술 비평의 지평일본어오타출판1995년
마츠우라 토시키고다르(ゴダール)의 초상일본어돗토모 벤리 슈판부1997년
다나카 야스오우국바담일본어겐토샤1999년
카타야마 긴토 외마르크스의 현재일본어돗토모 벤리 슈판부1999년
다나카 야스오신・우국바담 고베에서 나가노로일본어쇼가쿠칸2000년
사와 타카미츠부유한 빈민의 나라 「풍요」란 무엇인가일본어다이아몬드사2001년
시호다 이누히코・오노 히로유키파졸리니(パゾリーニ)・르네상스일본어돗토모 벤리 슈판부2001년
다나카 야스오우국바담 리턴즈 나가노가 움직인다, 일본이 움직인다일본어다이아몬드사2002년
카타야마 긴토 외필독서 150일본어오타출판2002년
와타나베 모리아키・와타나베 타모츠표상문화연구 문화와 예술표상일본어방송대학교육진흥회2002년
다나카 야스오「일본 해산」 속편・우국바담일본어다이아몬드사2005년



'''번역'''


  • Mary Douglas|메리 더글러스영어, Baron Isherwood|배런 이샤우드영어 공저, 의례로서의 소비 재와 소비의 경제인류학일본어, 신요샤, 1984년


'''연재'''

  • 우국바담일본어 소토코토(2008년 1월호-)

7. 공저 및 기타 저작


  • 構造と力─記号論を超えて|구조와 힘─기호론을 넘어서일본어 (영어: Structure and Power—Beyond Semiotics), 일본 勁草書房, 1983년
  • 逃走論|도주론일본어, 일본 筑摩書房, 1984년
  • ヘルメスの音楽|헤르메스의 음악일본어 (영어: The Music of Hermes), 일본 筑摩書房, 1985년
  • 「歴史の終わり」を超えて|「역사의 끝」을 넘어서일본어 (영어: Beyond "The End of History"), 일본 中央公論新社, 1999년
  • 映画の世紀末|영화의 세기말일본어 (영어: The End of Cinema's Century), 일본 新潮社, 2000년


'''공저'''

제목공저자출판사출판년도
科学的方法とは何か|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일본어사와 타카미츠 외中央公論社 (中央公論新社 신서)1986년
天使が過ぎる|천사가 지나간다일본어시마다 마사히코新潮社1988년
批評空間|비평공간일본어片山 吟都太田出版1990년대~2000년대
モダニズムのハード・コア 現代美術批評の地平|모더니즘의 하드 코어 현대미술 비평의 지평일본어岡崎 乾二郎, 松浦 寿夫太田出版1995년
ゴダールの肖像|고다르의 초상일본어松浦 寿夫読書人便利集板部1997년
憂国放談|우국바담일본어田中 康夫幻冬舎1999년
マルクスの現在|마르크스의 현재일본어片山 吟都 외読書人便利集板部1999년
新・憂国放談 神戸から長野へ|신・우국바담 고베에서 나가노로일본어田中 康夫小学館2000년
豊かな貧民の国 「豊かさ」とは何か|부유한 빈민의 나라 「풍요」란 무엇인가일본어사와 타카미츠ダイヤモンド社2001년
パゾリーニ・ルネサンス|파졸리니・르네상스일본어四方田 犬彦, 大野 裕之読書人便利集板部2001년
憂国放談リターンズ 長野が動く、日本が動く|우국바담 리턴즈 나가노가 움직인다, 일본이 움직인다일본어田中 康夫ダイヤモンド社2002년
必読書150|필독서 150일본어片山 吟都 외太田出版2002년
表象文化研究 文化と芸術表象|표상문화연구 문화와 예술표상일본어渡辺 守章, 渡辺 坦放送大学教育振興会2002년
「日本解散」 続・憂国放談|「일본 해산」 속편・우국바담일본어田中 康夫ダイヤモンド社2005년



'''번역'''


  • 메리 더글러스, 배런 이샤우드 공저, 儀礼としての消費 財と消費の経済人類学|의례로서의 소비 재와 소비의 경제인류학일본어, 新曜社, 1984년

8. 번역

메리 더글러스(メアリー・ダグラス), 배런 이셔우드(バロン・イシャウッド)의 『의례로서의 소비 재와 소비의 경제인류학』을 신요샤에서 1984년에 번역 출간하였다.

참조

[1] 간행물 Library News
[2] 웹사이트 あいちトリエンナーレ2019 対談:ホー・ツーニェン×浅田彰《旅館アポリア》をめぐって http://realkyoto.jp/[...]
[3] 웹사이트 https://book.asahi.c[...]
[4] 웹사이트 教員紹介|大学案内|京都造形芸術大学 http://www.kyoto-art[...] 2019-10-04
[5]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6] 서적 日本人名大辞典 講談社 2001
[7] 서적 構造と力―記号論を超えて 勁草書房 1983
[8] 논문 浅田彰 ─ 「知」への切断と介入 2005
[9] 백과사전 日本大百科全書 小学館 2018
[10] 서적 逃走論 ─ スキゾ・キッズの冒険 ちくま文庫 1986
[11] 웹사이트 第1回新語・流行語大賞 https://www.jiyu.co.[...] ユーキャン
[12] 웹사이트 浅田彰aabiblio @ ウィキ https://w.atwiki.jp/[...]
[13] 서적 世話噺数理巷談 平凡社 1985
[14] 문서
[15] 웹사이트 DIRECTOR’S MESSAGE|STAFF|ABOUT|ICA京都 https://icakyoto.art[...] 2022-03-11
[16] 서적 超「20世紀論」上 アスキー 2000-09
[17] 서적 私の「戦争論」 ぶんか社 1999-08
[18] 서적 清美するで!! 新人類が船(ピースボート)を出す! 第三書館 1987
[19] 잡지 文学界 1989-02
[20] 문서
[21] 웹사이트 昭和の終わり、平成の終わり http://realkyoto.jp/[...] 2019-09-02
[22] 논문 2007
[23] 잡지 InterCommunication 2006-09
[24] 웹사이트 浅田彰「『山形道場』の迷妄に渇!」 http://www.kojinkara[...]
[25] 웹사이트 府中青年の家裁判を振り返る――弁護団の立場から https://www.chuo-u.a[...] 中央大学 2018-05-12
[26] 뉴스 大学祭で同性愛差別の論議(取材ファイル) 朝日新聞 1991-06-05
[27] 위키 あいちトリエンナーレ
[28] 웹사이트 74%が反対「慰安婦少女像」の芸術祭展示問題アンケート結果発表 https://bunshun.jp/a[...] 2019-10-01
[29] 웹사이트 昭和天皇の御真影を使った作品 津田大介氏の過去の発言に注目集まる https://news.livedoo[...] 2019-10-01
[30] 웹사이트 「天皇が燃えたりしてるんですか?」という質問に津田大介芸術監督が笑顔で反応する動画が拡散中 和田政宗議員もツイート https://www.excite.c[...] 2019-10-01
[31] 웹사이트 「誰も傷つけない表現に意味ない」 浅田彰氏、複雑化する自主規制に警鐘 「不自由展」問題 https://mainichi.jp/[...] 2019-10-01
[32] 웹사이트 憂国呆談 season 2 volume 110 sotokoto online(ソトコトオンライン) https://sotokoto-onl[...] 2019-08-05
[33] 논문 「現在」を考える:こどもたちに語るモダン/ポストモダン 2006
[34] 웹사이트 「ダムタイプ|アクション+リフレクション」関連プログラム 浅田彰×坂本龍一×高谷史郎 スペシャルトーク(記録) https://www.mot-art-[...] 2022-06-22
[35] 웹사이트 アーカイブ https://web.archive.[...] 2022-06-22
[36] Youtube メイプルソープ再考 Reconsider Mapplethorpe https://www.youtube.[...] 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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