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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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투섬은 알래스카주 최서단에 위치한 섬으로, 1742년 러시아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1867년 알래스카 매입으로 미국령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에 점령당했다가 미군의 탈환 작전으로 다시 미국 영토가 되었다. 현재는 무인도이며, 과거 일본군과 미군의 격전지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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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투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원어 이름 | 아탄 |
| 원어 링크 | 알류트어 |
| 러시아어 이름 | Атту (아투) |
![]() | |
| 별명 | (없음) |
| 군도 | 니어 제도, 알류샨 열도 |
| 면적 | 892.8 km² (344.7 sq mi) |
| 길이 | 56 km (35 mi) |
| 폭 | 32 km (20 mi) |
| 최고봉 | 아투 산 |
| 해발고도 | 897.9 m (2946 ft) |
| 국가 | 미국 |
| 주 | 알래스카주 |
| 인구조사 구역 | 알류샨 서부 인구조사 구역 |
| 인구 | 0명 (2011년 기준)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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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 제2차 세계 대전 | 알류샨 열도 전투 |
| 기타 정보 | |
| 관련 정보 | 북태평양 베링해 알류트족 일본 제국 |
2. 역사
애투섬의 원래 이름은 알류트어로 Atan|아탄ale이다.[57] 초기 러시아인들은 Остров Атту|오스트로프 아투rus로 기록했으며,[59] 영국 해군의 제임스 쿡은 1785년에 'Atakou'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섬의 여러 고고학 유적 조사에 따르면, 유럽인과의 접촉 이전에는 약 2,000명에서 5,000명 사이의 알류트족(우난간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58]
알류샨 열도 중 캄차카 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탐험가와 상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한 섬 중 하나였다. 문헌상으로는 1741년 러시아 탐험선이 멀리서 섬을 목격했으며,[59] 1742년 러시아 탐험가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이 섬을 '성 테오도로스 섬'으로 명명한 것이 공식적인 발견으로 여겨진다.[6][59]
1745년, 미하일 네보드치코프가 이끄는 프로미슐렌니키(러시아 모피 교역상 및 사냥꾼 집단)들이 섬에 처음 상륙했다.[59] 이들은 바다수달을 사냥하기 위해 섬에 수년간 머물렀으며,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알류트족과 종종 충돌을 빚었다.[59] 이후 러시아는 이 섬을 유형지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러시아 정교회가 전파되어 섬 주민들은 슬라브식 성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867년 알래스카 매입으로 애투섬은 미국 영토가 되었지만, 미국인들의 관심은 비교적 적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섬에는 주로 알류트족이 치차고프 만 인근 마을에 거주했다. 1941년 3월, 미국 인디언 사무국은 섬에 처음으로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8월 교사 부부인 에타 존스와 찰스 포스터 존스를 파견했다.[62][60] 한편, 1930년대에는 일본 조사선이 섬에 기항하기도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해양 생물 조사가 목적이었으나 군사 정보 수집 임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2]
제2차 세계 대전 중 애투섬은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한때 섬을 점령하고 '아쓰타섬'(熱田島)이라 부르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던 알류트족 원주민들은 전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전후 미국 정부는 섬에 미국 해안경비대의 로란 기지를 건설하여 운영했고, 이 기지에는 약 20명의 인원이 주둔했다.
2010년 8월 미 해안경비대 기지가 철수하면서 애투섬은 현재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2][55] 섬은 해조류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1980년 알래스카 해양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일부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현재 섬으로의 일반인 출입은 규제되고 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중 애투섬은 일본군과 미군의 격전지가 되었다.[46]=== 일본군의 점령과 알류트족의 비극 ===
1942년 6월 7일, 진주만 공습 6개월 후, 일본 제국 육군 북방군 제301 독립 보병대대는 미드웨이 해전의 양동 작전의 일환으로 애투섬에 저항 없이 상륙했다.[3][47][49] 이는 동쪽의 키스카섬 점령 다음 날 이루어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 군대가 미국 영토를 점령한 유일한 두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3][61] 일본군은 애투섬을 '''아쓰타섬'''(熱田島)으로 개칭했는데,[48] 이는 점령 시기가 나고야 아쓰타 신궁의 축제일(6월 5일)과 겹쳤고, 신궁과 관련된 전설적 영웅 야마토타케루의 동방 정벌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48]
점령 당시 섬에는 알류트족 원주민 42명[49](다른 자료에서는 45명[9])과 백인 미국인 2명이 살고 있었다. 백인 부부는 오하이오주 출신의 무선 기술자 찰스 포스터 존스(Charles Foster Jones, 1879-1942)와 뉴저지주 출신의 교사이자 간호사였던 그의 아내 에타 존스(Etta Jones, 1879-1965)였다.[9][63][62] 일본군은 점령 직후 찰스 포스터 존스를 살해했다.[63]
1942년 9월, 일본군은 알류트족 주민들을 본토로 강제 이주시켰다. 알류트족 40명[62]은 9월 17일 아투섬을 출발해 키스카섬을 거쳐 홋카이도 오타루시로 이송되었다.[62] 이들은 일본의 적국 국민 억류 정책에 따라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73] 이미 결핵 등 질병을 앓던 이들이 많았고,[62] 낯선 환경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오타루에서 태어난 5명을 포함한 총 45명 중 20명[73](다른 자료에서는 22명[10][9])이 억류 중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 백인 에타 존스는 요코하마의 반도호텔 등지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8월 석방되었고, 1965년 사망했다.[9][63] 한편, 미국 정부 역시 전쟁 중 알류샨 열도의 다른 지역 알류트족 약 880명을 알래스카 팬핸들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약 75명이 감염병 등으로 사망하기도 했다.[74][75][76]
일본군은 알류트족을 이송시킨 후 잠시 아투섬을 비웠으나, 1942년 10월 29일 홀츠 만에 야네카와 히로시 중령 지휘 하에 다시 기지를 건설했다. 초기 병력 약 500명은 증원을 통해 1943년 3월에는 약 2,300명까지 늘어났다. 이후 미 해군의 해상 봉쇄 작전, 특히 코만도르스키 제도 해전 이후 일본군의 해상 보급은 잠수함으로 제한되었다.[12][50][51][52]
=== 미군의 탈환과 아투 전투 ===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아투섬 탈환 작전(코드명: 랜드크랩 작전, Operation Landcrab)을 개시했다.[53] 5월 12일, 일본군 수비대의 5배에 달하는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나, 상륙정 부족, 험한 해안 지형, 혹독한 날씨와 작동 불능 장비, 그리고 툰드라 지형 때문에 작전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미군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다. 야마사키 야스요(山崎保代) 육군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수비대는 해안 상륙을 저지하는 대신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으로 기록되었다.[53]

치열한 전투 끝에 5월 29일, 야마사키 대령이 이끄는 남은 일본군 병력은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 돌격 중 하나를 감행했다. 이 돌격은 미군 전선을 일시적으로 돌파하고 후방 부대에 충격을 주었으나, 격렬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대본영 발표에서 처음으로 '옥쇄(玉砕)'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전멸 사실을 알렸다.[54]
| 구분 | 일본군 | 미군 |
|---|---|---|
| 전사 | 2,638명 (또는 2,351명 확인[16]) | 549명 (전투 중 사망) |
| 부상 | - | 1,148명 |
| 포로 | 27명[49] (또는 28명[16], 장교 없음) | - |
| 기타 사상자 | - | 2,142명 (심한 동상 1,200명, 질병 614명, 기타 원인 318명) |
| 총 사상자 | 약 2,665명 이상 | 3,929명 |
미군은 5월 30일 섬 점령을 선언했다. 이후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알렉사이 포인트 육군 비행장(Alexai Point Army Airfield)을 건설하고, 1943년 7월 10일부터 이곳을 기지로 삼아 일본이 점령 중이던 쿠릴 열도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이는 둘리틀 공습 이후 일본 본토 영토에 대한 첫 공습이었다.[16][66] 1945년 4월 11일에는 미국 서해안 산불을 노리고 발사된 일본의 풍선폭탄 9개 이상이 아투섬 근처 상공에서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의해 요격되기도 했다.[13]
=== 전후 ===
전쟁이 끝난 후, 오타루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알류트족 주민 25명은 고향 아투섬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마을을 재건하고 유지하기에 충분한 인원이 없다"는 이유로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14][77] 대신 그들은 약 850km 떨어진 아닥섬 등 다른 알류샨 열도 섬으로 이주해야 했다.[79] 이는 냉전 시대에 알류샨 열도 서부를 무인화하려는 미국의 정책적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77]
미국 정부는 아투섬에 미국 해안경비대의 로란 기지를 건설하여 운영했다. 이 기지는 2010년 8월 27일 영구 폐쇄되었고, 마지막 근무자들이 떠나면서 아투섬은 무인도가 되었다.[2][55]
1985년, 아투섬의 전적지와 군사 시설은 미국 국립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7][53][67] 1987년에는 일본 정부가 미 내무부의 승인을 받아 일본군 최후의 격전지였던 엔지니어 힐(Engineer Hill, 일본명: 참새 언덕(雀ヶ丘))에 '북태평양 전몰자 위령비'를 건립했다.[68] 비문에는 "지난 전쟁에서 북태평양 제도 및 해역에서 전몰한 사람들을 기리며 평화를 기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라고 일본어와 영어로 적혀 있다.[68] 이후에도 섬에서는 일본군 유해가 발견되어 수습 작업이 이루어졌다.[17][18][19][20][69][70][71][72]
2012년 6월 7일, 일본군 침공 70주년을 맞아 아투 마을 터에 일본군 포로로 사망한 알류트족 주민들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생존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21]
2. 2.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타루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알류트족 주민들은 고향 아투섬으로 돌아가기를 강하게 원했지만[14], 미국 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격화되자, 알류샨 열도 서쪽 섬들을 군사적 이유로 비워두려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77] 미국 정부는 생존자 수가 섬을 재건하고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지만[79], 이는 원주민의 권익보다는 국가의 군사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결국 생존자들은 아투섬에서 약 850km 떨어진 아토카섬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79]대신 미국 정부는 아투섬 남단 시어도어 포인트(Theodore Point)에 미국 해안 경비대가 운영하는 로란(LORAN)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14] 이 기지에는 약 20명의 해안 경비대원이 주둔했으며, 기지 건설 장비는 홀츠 만(Holtz Bay)에서 바지선과 상륙정을 이용해 기지에서 약 1.6km 동쪽에 있는 벡스터 코브(Baxter Cove)로 운송되었고, 불도저로 벡스터 코브에서 시어도어 포인트까지 도로를 개설했다. 기지는 1954년에 캐스코 코브(Casco Cove)로, 1960년에는 마사커 베이(Massacre Bay)로 이전되었다.
한때 섬에는 앵커리지(ANC)와 연결되는 정기 항공편이 운항되기도 했다. 리브 알류샨 항공(RAA)은 1976년에 록히드 L-188 일렉트라 터보프롭 항공기를 이용해 주 2회 아닥 공항이나 셰미야 섬을 경유하는 노선을 운항했다.[15] 당시 아투섬 공항은 미국에서 정기 여객 항공편이 운항되는 가장 서쪽에 있는 공항이었다. 1984년에는 아투섬(과 인근 셰미야섬의 요금 센터)을 포함하는 907 지역 번호의 "392" 교환기가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전화 교환원의 도움 없이 직접 다이얼 통화가 가능한 서비스로 전환된 지역 중 하나였다.
1985년에는 애투섬 전투 지역과 이후 건설된 군사 시설이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다.[16][7][53][66][67] 전투 지역은 현재 알류샨 열도 제2차 세계 대전 국립 기념물의 일부이다.
1987년에는 미국 내무부의 승인을 받아 일본 정부가 아투섬 전투에서 일본군 최후의 백병전이 벌어졌던 엔지니어 힐(Engineer Hill, 일본명 참새 언덕)에 "북태평양 전몰자 위령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지난 전쟁에서 북태평양 제도 및 해역에서 전몰한 사람들을 기리며 평화를 기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68]
1953년 일본 유골 수습단이 전후 최초로 상륙한 이래[64], 1978년에도 일본 정부(후생성 원호국)의 위령 순배단이 방문하여 유골 수습을 진행했다.[64] 2007년 7월에는 섬에서 일본군 병사의 부츠와 발뼈가 발견되었고, 2008년 5월 23일에는 유해 회수팀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던 미국 해안 경비대 하사 리처드 브람(Richard Bram)이 일본군 병사 2명의 유해를 추가로 발견했다.[17][69] 더 많은 유해가 발견되었지만, 추후 발굴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었다.[18][19][20][70][71][72]
2010년 8월 1일, 아투섬의 미국 해안 경비대 로란 기지는 영구적으로 운영을 중단했다. 같은 해 8월 27일 기지가 공식 폐쇄되고 해안 경비대원들이 떠나면서 섬에는 더 이상 주민이 살지 않게 되었다.[2][55] 이로써 아투섬은 "미국 최대의 무인도"가 되었다.[55] 같은 해 NHK는 NHK 스페셜 ‘옥쇄 숨겨진 진실’ 제작을 위해 미국 연방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상륙 및 촬영 허가를 받았다.
2012년 6월 7일, 일본의 아투섬 침공 70주년을 맞아 상원의원 리사 머코우스키와 미국 해안 경비대 소장 토마스 오스테보는 아투 마을, 일본군 포로로 사망한 주민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생존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헌정했다.[21]
2015년에는 조종사이자 세계 일주 비행가인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가 알류샨 열도의 아닥섬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에 연료 보급을 위해 아투섬을 방문했다. 무인도이기 때문에 그는 미리 연료를 섬에 가져다 놓은 후 다시 돌아와 급유해야 했다.[22] 섬에는 쥐가 많아 야간 체류는 권장되지 않았다.[23] 2016년 여름에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국방 시설(Formerly Used Defense Sites) 프로그램의 자금 지원으로 3개월간 섬의 오염된 토양을 제거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완전한 환경 정화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4] 2017년에는 아투섬 서쪽에서 규모 7.8의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다.[25]
3. 지리
알래스카주 최서단이자 미국 최서단 섬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미국 서단"의 정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미국의 극지). 미국 대부분이 속한 서반구에서 180도 경선을 넘어 동반구에 들어와 있다. 서부 알류샨 열도는 UTC-10의 타임존(하와이-알류샨 표준시)에 속하며, 국제 날짜 변경선은 아투섬 서쪽을 지난다.
아투섬은 알래스카 본토에서 약 1800km 떨어져 있다. 알류샨 열도의 연결 속에서 아투섬 서쪽에 있는 섬은 약 335km 떨어진 메드니섬(코만도르스키 제도)이며, 이곳은 러시아 영토이다. 앵커리지에서는 약 2400km, 알래스카주 주도 주노에서는 약 3200km, 뉴욕시에서는 약 7800km 떨어져 있다.
섬의 길이는 동서로 48km, 폭은 남북으로 13km에서 24km이다.[56] 면적은 893km2이며, 미국에서 23번째로 큰 섬이다.
고위도 지역에 위치한 툰드라 지역으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아극해양성 기후(Cfc) 또는 아한대 기후(Dfc)에 속하며, 툰드라 기후(ET)와 인접해 있다. 날씨는 일반적으로 흐리고, 비가 잦으며, 안개가 자주 낀다. 간혹 초속 10미터 이상의 강풍[103]과 눈보라가 몰아치기도 한다. 가장 추울 때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다. 맑은 날은 1년에 단 8일에서 10일 정도에 불과하며[104], 나머지 기간에는 비가 오지 않더라도 안개가 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간 강수량은 990mm에서 1200mm 사이이며(약 99.06cm ~ 약 124.46cm), 가을과 초겨울에 강수량이 가장 많다. 강한 해양의 영향으로 아투섬의 기후는 위도에 비해 매우 온화하여 여름은 대륙성 기후 지역보다 훨씬 서늘하고 겨울은 훨씬 따뜻하다.
길도 없는 허허벌판, 살을 에는 고질적인 바람과 눈보라,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바위 등 황무지나 다름없는 험한 자연 환경 때문에 주민이 거주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환경이며, 사실상 무인도나 다름없다. 물을 구하기 힘들고, 해당 지역을 여행할 때는 방수 기능이 뛰어난 두꺼운 방한복과 방한화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식수 확보에 신경 써야 하며, 위성전화, 나침반이나 GPS 같은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동상, 저체온증, 조난 사고에도 유의해야 한다.
'아투'라는 이름은 이 섬의 우난간어(Unanganale) 이름이다. 섬에 있는 다수의 고고학 유적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접촉 이전 추정 인구는 2,000명에서 5,000명의 우난간족(Aleut)에 이른다.[5] 아투는 알류샨 열도 중 캄차카 반도에 가장 가까운 섬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상인들이 이용한 최초의 섬이었다. 러시아 탐험가 알렉세이 치리코프는 1742년에 이 섬을 성 테오도르라고 불렀다.[6]
4.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애투섬은 서안 해양성 기후(Cfc)에 속하며 툰드라 기후(ET)와 매우 가깝다.[104] 고위도 지역에 위치하지만 알류샨 해류라는 난류의 영향으로 위도에 비해 기후가 온화한 편이다. 그러나 여름에도 낮 최고 기온이 10°C대 초반(화씨 50도대 중반)을 넘지 않을 정도로 서늘하며, 겨울철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은 -3°C 정도이다. 가장 추울 때는 -40°C까지 내려갈 때도 있다.
애투섬의 날씨는 일반적으로 흐리고 비나 눈이 자주 내리며, 안개가 자주 낀다.[103] 맑은 날은 1년에 단 8일에서 10일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 기간은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안개가 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속 10m 이상의 강풍[103]과 눈보라도 고질적이다. 연간 강수량은 약 990mm에서 1245mm 사이이며[104], 가을과 초겨울에 강수량이 가장 많다. 연간 강설량은 약 194cm에 달한다.[104]
이러한 혹독한 기후 조건과 더불어 길도 없는 허허벌판,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눈보라,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바위 등 황무지나 다름없는 험한 자연 환경 때문에 주민이 거주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 물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해당 지역을 여행할 때는 방수 기능이 뛰어난 두꺼운 방한복과 방한화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며, 식수에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위성전화, 나침반이나 GPS 같은 장비를 갖추어야 하고, 동상, 저체온증, 조난 사고에도 유의해야 한다.
5. 인구
애투섬의 인구는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미국 인구 조사국 기록에 따르면, 1880년 애투섬은 'Attoo'라는 이름의 법인 미설정 알류트족 마을로 처음 등장했다.[28][84] 당시 인구는 107명으로, 알류트족 74명, 크리올(러시아인과 원주민 혼혈) 32명, 백인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주로 서쪽의 치차고프 항 근처에 거주했다.[29][85] 1890년 조사에서는 'Attu'로 이름이 변경되어 기록되었고 인구는 101명이었다.[30][86] 이후 1930년 조사까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930년 29명, 1940년 44명으로 기록되었다.[31][87][32][88]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6월,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애투섬을 침공하여 점령했다.[46][4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 군대가 미국 본토를 점령한 첫 사례였다. 일본군은 섬 이름을 '아츠타지마(熱田島)'로 바꾸었다. 점령 당시 섬에 거주하던 40여 명의 알류트족 주민들은[62] 같은 해 9월 일본 본토 홋카이도의 오타루시로 강제 이주되어 억류되었다.[73] 이들은 낯선 환경과 부족한 식량, 그리고 점령 이전부터 퍼져 있던 결핵 등으로 인해[62]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오타루에서 새로 태어난 5명을 포함한 총 45명의 억류자 중 20명이 사망했다.[73]
1943년 5월, 미군이 애투섬 탈환 작전을 개시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섬을 되찾았다( 애투섬 전투 ).[54] 전쟁이 끝난 후, 오타루에서 살아남은 25명의 알류트족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미국 정부는 애투섬 마을을 재건하고 유지하기에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다.[79] 대신 그들은 약 850km 떨어진 아토카섬으로 이주해야 했다.[79]
전후 애투섬에는 미군 기지가 건설되었고, 1980년 인구 조사에서는 마사카 만(Massacre Bay)의 해군 기지 거주자 29명이 기록되었으며, 이곳은 인구 조사 지정 구역(CDP)으로 지정되었다.[33][89] 1990년에는 인구 조사 기록이 없었으나,[34][90] 2000년에는 '애투 해군 기지(Attu Naval Station)' CDP로 재지정되어 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35][91] 2010년 인구 조사에서는 21명이 기록되었는데,[36][92] 이는 같은 해 8월 미국 해안경비대 기지가 폐쇄되고 남은 인원이 섬을 떠나기 직전의 수치였다. 기지 폐쇄 이후 애투섬은 완전히 무인도가 되었다.[55]
| 조사 연도 | 인구 |
|---|---|
| 1880 | 107[28][84] |
| 1890 | 101[30][86] |
| 1930 | 29[31][87] |
| 1940 | 44[32][88] |
| 1980 | 29[33][89] |
| 2000 | 20[35][91] |
| 2010 | 21[36][92] |
| 2017 (추정) | 0[101][26][82] |
6. 교통
현재 애투섬에는 정기 선박이나 항공기 운항편이 없다.[97][99] 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68][98] 이 허가 절차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7] 허가를 받은 후에는 개인적으로 선박이나 세스나와 같은 소형 항공기를 이용하여 방문해야 한다.[98] 2018년 미국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The World) 기사에서는 "섬을 방문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트"라고 언급하기도 했다.[97]
과거 미국 해안경비대가 사용하던 '''카스코 코브 코스트 과르 스테이션 공항'''(IATA: ATU, ICAO: PAAT)이 섬에 위치해 있지만, 활주로가 심하게 노후화되어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은 불가능한 상태이다.[99] 또한, 섬으로 중장비나 작업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워 활주로에 대한 보수 계획은 전무하다.[99]
1976년에는 리브 알류샨 항공이 앵커리지와 애투섬을 잇는 정기 항공편 운항을 계획하기도 했으나[65] 실현되지 못했다.
7. 자연
1980년, 애투섬은 알래스카 해양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Alaska Maritime National Wildlife Refuge, AMNWR)의 일부로 지정되어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United States Fish and Wildlife Service)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입도는 규제되고 있다. 2010년에는 미국 해안경비대 기지가 폐쇄되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무인도가 되었다.[55]
애투섬은 지리적으로 북미 다른 지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고립된 환경 덕분에 북미 대륙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많은 조류 종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 경쟁적인 조류 관찰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류 관찰가 존 피첸(John Fitchen)은 이 섬을 "북미 조류 관찰의 성배"(the Holy Grail of North American birdingeng)라고 불렀다.[39][94]
실제로 1998년, 샌디 코미토(Sandy Komito)는 빅 이어(Big year) 도전을 위해 29일간(5월 10일~6월 7일) 이 섬에 머물며 당시 기록적인 745종(이후 748종으로 수정)의 조류를 관찰하기도 했다.[40][95]
그러나 2010년 미국 해안경비대 기지가 폐쇄된 이후 조류 관찰자들의 접근이 크게 제한되었다. 현재 애투섬 방문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아닥 섬에서 출발하여 며칠간 배를 타고 가야만 한다. 이러한 접근성의 어려움은 빅 이어 기록 경신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41]
한편, 섬의 식생과 관련하여, 태평양 전쟁 중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군 병사 중 일부는 8월이 되면 일본의 고산 식물과 유사한 풀과 나무들이 들판에 양탄자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96]
8. 기념물
2017년 기준으로 애투섬에는 총 14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80] 이 중 5개는 일본 또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며, 4개는 아투섬 전투 당시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던 엔지니어 힐(Engineer Hill)에 위치한다.[80]
가장 큰 기념비는 1987년 일본 정부가 미국 내무부의 승인을 받아 엔지니어 힐에 건립한 "북태평양 전몰자의 비" (Peace Memorial)이다.[80][68] 비문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지난 전쟁에서 북태평양 제도 및 해역에서 전몰한 사람들을 기리며 평화를 기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68]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 기념비의 관리 및 순회 업무를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에 위탁하고 있다.[68] 엔지니어 힐에는 이 외에도 오무라 기이치(大村紀二) 중위의 기념비(가족 설치 추정, 2016년 이후 행방 불명), 포트 리처드슨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던 일본군 전사자 235명의 화장을 기념하는 "진혼" 석판, 1978년 당시 홋카이도 지사였던 도가키나이 나오히로(堂垣内尚弘)의 이름과 "진혼" 글자를 새긴 청동 명판 등이 있다.[80]
미군은 전투 직후 전장에 설명판들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애투 마을이 있던 위치를 알리는 것과 일본군 지휘관 야마자키 야스요(山崎保代) 육군 대좌[80]의 용기를 칭찬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80] 이 패널들은 1950년에 콘크리트 기단 위에 청동 명판으로 교체되었다.[80] 야마자키 대좌를 기리는 명판은 그가 전사한 지점(클레브시 패스 기슭)과 엔지니어 힐 두 곳에 있으나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80]
옛 애투 마을 터에는 미군이 만들고 1950년에 갱신한 명판 외에, 1993년 알류트족 단체인 The Aleut Corporation이 세운 일본군에 의한 강제 수용을 기리는 명판이 있다.[80] 이 명판은 2012년 6월 7일, 일본군 침공 70주년을 맞아 리사 머코우스키 상원의원과 미국 해안 경비대 토마스 오스테보 소장에 의해 갱신되었으며, 애투 마을 주민, 일본군 포로로 사망한 주민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생존자들을 기리기 위해 헌정되었다.[21][81]
옛 미국 해안 경비대 기지 부근에도 4개의 기념비가 있다.[80] 1924년 최초의 항공기 세계 일주 비행사 중 한 명인 에릭 넬슨(Eric Nelson) 준장을 기리는 기념비, 애투섬 전투가 "잊혀진 전투(forgotten battle)"로 불리는 것에 자극받아 1981년 미국 해군 군목의 제안으로 세워진 기념비, 1993년 미군 재향군인, 알류트족 생존자, 야마자키 대좌의 아들을 포함한 일본 대표단이 참석한 추도식에서 봉헌된 모든 전사자 추모비, 그리고 애투섬 전투 참전용사 빌 존스(Bill Jones)가 동료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그것이다.[80]
이 외에도 클레브시 패스(Clevesy Pass) 기슭에는 제50공병연대를 기리는 표지판이 있으며,[80] 2013년에는 헨더슨 강(Henderson River) 강변에 애투섬 전투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조 P. 마르티네즈(Joe P. Martínez) 이등병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알류샨 방면 전투, 애투섬 전투, 알류트족 강제 수용, 마르티네즈 이등병에 관한 설명판 4개가 세워졌다.[80]
9. 애투섬 전투 (1943년 5월)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애투섬을 탈환하기 위해 랜드크랩 작전(Operation Landcrab)을 개시하며 섬에 상륙했다.[53] 상륙 초기, 미군은 상륙정 부족, 험준한 해안 지형, 알래스카의 혹독한 날씨와 툰드라 지형으로 인한 장비 오작동 및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작전 수행에 큰 난항을 겪었다.[16]
야마사키 야스요(山崎保代) 육군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수비대는 해안 방어 대신 내륙의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6] 이로 인해 약 2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으로 기록되었다.[53]
전투는 1943년 5월 29일 일본군 잔존 병력의 대규모 만세 돌격과 이어진 백병전 끝에 일본군의 거의 전멸로 막을 내렸다.[54] 미군은 5월 30일 섬 점령을 공식 선언했으며,[54]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9. 1. 개요
애투섬은 원래 알류트족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1942년 6월,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의 양동 작전으로 키스카섬과 함께 애투섬을 점령하고 '''아쓰타섬(熱田島)'''으로 개칭했다.[46][4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본토가 추축국 군대에 의해 점령된 첫 사례였다.[3]
점령 당시 섬에 거주하던 알류트족 원주민 45명 중 41명은 홋카이도 오타루 근처의 포로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들 중 22명이 수감 중 사망했다.[10][9] 또한, 섬에 있던 미국인 민간 기술자 찰스 포스터 존스는 일본군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아내 에타 존스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요코하마 등지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종전 후 석방되었다.[9] 전쟁 전 미 당국은 다른 알류샨 열도의 알류트족 약 880명을 알래스카 팬핸들로 대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도 약 75명이 감염병 등으로 사망했다.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애투섬 탈환을 위한 상륙 작전(랜드클럽 작전)을 개시했다. 야마사키 야스요(山崎保代)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 수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약 2주간의 전투 끝에 5월 29일 만세 돌격을 감행한 후 거의 전멸했다. 이 아투 전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유일한 제2차 세계 대전 지상전으로 기록되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2,351명 이상이 전사하고 28명만이 포로로 잡혔으며[54], 미군은 약 549명이 전사하고 1,148명이 부상당했으며, 동상 및 질병 등으로 인한 비전투 사상자도 1,800여 명에 달했다.
전투 후 애투섬은 미군의 군사 기지가 되었고, 미국 육군 항공대는 이곳을 기지로 삼아 일본 본토의 쿠릴 열도 등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16] 종전 후에도 미국 정부는 강제 이주되었던 알류트족 생존자들의 섬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
애투섬의 전적지는 1985년 미국 국립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53][7][8] 미군은 섬에 애투 기지를 운용했으나, 2010년 8월 기지가 폐쇄되면서 애투섬은 현재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미국 최대의 무인도"가 되었다.[55] 섬은 해조류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1980년 알래스카 해양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일부로 지정되어 자연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은 규제되고 있다.
9.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섬의 주요 주민은 알류트족이었으며, 치차고프 항 주변 마을에 거주했다.[62] 1931년 일본인 민속학자 곤도 노부오키(近藤信興)가 아투섬을 조사했을 때, 메이지 시대에 '요시모토(吉本)'라는 일본인이 살았으며, 일부 섬 주민은 간단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 노래를 알았다고 기록했다.[62] 섬 주민들이 일본인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주장과 반감을 가졌다는 기록이 공존한다.[62] 일본은 1930년대 농림성 조사선 백봉(白鳳)丸을 알류샨 해역에 파견했으며, 아투섬에도 기항했는데, 표면적으로는 바다사자 회유 조사와 밀렵 단속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미군 군사력 등 정보 수집 임무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62] 1941년 3월, 미국 인디언 사무국은 아투섬에 처음으로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고, 교사로 임명된 에타 존스와 남편 찰스 포스터 존스는 같은 해 8월 섬으로 이주했다.[62][60]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의 양동 작전(AL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 제국 해군 제5함대와 육군 소부대가 키스카섬 점령 다음 날 아투섬에 상륙하여 점령했다.[3][46][4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 군대가 미국 본토 영토를 점령한 첫 사례이자, 전쟁 중 미국 영토에 대한 유일한 두 곳의 침략지 중 하나였다.[3] 일본 제국은 아투섬을 '''아쓰타섬'''(熱田島)으로 개칭했다.[48]
점령 당시 마을에는 알류트 원주민 45명과 백인 미국인 2명, 즉 무선 기술자 찰스 포스터 존스(1879~1942)와 그의 아내이자 교사인 에타 존스(1879~1965)가 살고 있었다.[9] 침략 직후 찰스 존스는 일본군에게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알류트족 41명과 에타 존스는 홋카이도 오타루 근처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9] 수감 중 알류트족 22명이 사망했으며,[10][9] 에타 존스는 이후 요코하마 등지의 수용소를 거쳐 1945년 8월 석방되었다.[9] 미국 정부는 이들이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11]
일본 북방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은 키스카와 아투 침략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알류샨 열도를 통한 일본 본토 공격 저지, 미국과 소련 간의 잠재적 협력 방해, 향후 공격 작전을 위한 공군 기지 확보.[12]
1942년 9월 말, 아투 주둔 일본군은 키스카로 이동했으나, 10월 29일 야네카와 히로시 중령 지휘 하에 홀츠 만에 기지를 재건설했다. 초기 병력은 약 500명이었으나 증원을 통해 1943년 3월에는 약 2,300명까지 늘어났다. 이후 찰스 맥모리스 소장이 이끄는 미국 해군의 보급선 차단 노력과 코만도르스키 제도 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은 수상함을 통한 보급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이용하게 되었다.[12]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아투섬 탈환을 위한 랜드크랩 작전(Operation Landcrab)을 개시하여 5월 12일 상륙했다.[53] 그러나 상륙정 부족, 부적절한 해안 지형, 혹독한 날씨로 인한 장비 오작동, 툰드라 지형에서의 차량 운행 불가, 보급 문제 등으로 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다.[16] 야마사키 야스요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수비대는 해안 상륙을 저지하는 대신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16] 이로 인해 아투 전투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으로 전개되었으며, 아투섬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 되었다.[53] 미군의 총 사상자는 3,929명에 달했다.[16]
5월 29일, 야마사키 대령이 이끄는 마지막 남은 일본군은 만세 돌격을 감행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자이 돌격 중 하나로, 미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 부대까지 도달했으나, 격렬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다.[54] 전투 결과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
| 구분 | 전사/사망 | 부상 | 기타 사상 | 포로 |
|---|---|---|---|---|
| 일본군 | 2,638명[16] (2,351명 확인, 추가 수백 명 매장 추정[16]) | - | - | 27~28명[16] |
| 미군 | 549명 (전투 중 사망)[16] (총 약 600명 전사 추정[16]) | 1,148명[16] | 1,200명 (심한 동상), 614명 (질병), 318명 (기타 원인)[16] | - |
전투 후 미군은 대학살 만 근처에 "네이비 타운(Navy Town)"을 건설했다.[16]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알렉사이 포인트 육군 비행장을 건설하고 1943년 7월 10일부터 이를 기지로 삼아 일본이 점령 중이던 쿠릴 열도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이는 1942년 둘리틀 공습 이후 일본 본토에 대한 첫 공습이었다.[16] 1945년 4월 11일에는 미국 서해안에 산불을 일으키려던 일본의 풍선폭탄 9개 이상이 아투 근처 상공에서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의해 요격되기도 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미국 정부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알류트족 생존자들의 아투섬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55] 미군은 이곳에 공군 기지인 애투 기지를 설치하고 약 20명의 인원을 주둔시켰다. 1985년에는 아투 전장과 미군 비행장이 미국 국립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7][53] 2010년 8월, 미국 해안경비대 기지가 철수하면서 아투섬은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55] 현재는 1980년에 지정된 알래스카 해양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일부로서 입도가 규제되고 있다.[55]
9. 3. 전투 경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애투섬은 일본군과 미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의 양동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군은 키스카섬에 이어 애투섬에 저항 없이 상륙하여 점령하고 '''아쓰타섬'''(熱田島)으로 개칭했다.[3][46][47][49]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 군대가 미국 영토를 점령한 첫 사례 중 하나였다.[61]일본 북방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에 따르면, 키스카와 아투 점령은 알류샨 열도를 통한 미군의 공세 방지, 소련 참전 시 미-소 연결 차단, 향후 작전을 위한 공군 기지 확보를 목표로 했다.[12] 일본군은 1942년 9월 말 잠시 병력을 키스카로 옮겼다가 10월 29일 야네카와 히로시 중령 지휘 하에 홀츠 만에 기지를 재건설했다.[12] 초기 병력은 약 500명이었으나 증원을 통해 1943년 3월에는 약 2,300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찰스 "삭" 맥모리스 소장이 이끄는 미국 해군의 봉쇄 작전, 특히 코만도르스키 제도 해전 이후 일본은 수상함을 통한 보급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이용하게 되어 증원이 사실상 중단되었다.[12][50][51][52]
1943년 5월 11일, 미군은 애투섬 탈환을 위한 랜드크랩 작전(Operation Landcrab)을 개시했다.[53] 그러나 상륙 초기부터 상륙정 부족, 상륙에 부적합한 해변 지형, 혹독한 기후로 인한 장비 오작동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53] 많은 미군 병사들이 필수 물자 부족과 추위 때문에 동상 등 심각한 한랭 부상을 입었으며, 툰드라 지형은 차량 운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야마사키 야스요(山崎保代) 육군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수비대는 해안 방어 대신 내륙 고지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미군의 공격을 기다렸다.[53] 이로 인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 사상자는 총 3,929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 전사 549명, 부상 1,148명, 심각한 한랭 부상 1,200명, 질병 614명, 그리고 일본군의 부비트랩이나 아군 오사 등 기타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가 318명이었다. 일본군은 대학살 계곡(Massacre Valley)에서 큰 타격을 입고 방어선이 무너졌다.
1943년 5월 29일, 야마사키 대좌가 이끄는 남은 일본군 병력은 태평양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만세 돌격 중 하나를 감행했다. 이 돌격은 미군 전선을 뚫고 후방 부대까지 위협할 정도로 격렬했으나, 이어진 백병전 끝에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다.[54] 미군은 일본군 시신 2,351구를 확인했으며, 포격 등으로 매장된 수를 고려하면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포로는 단 28명이었고 장교는 없었다. 5월 30일, 미군은 섬 점령을 공식 선언했다.[54] 일본의 대본영 발표에서는 이 전투 결과를 처음으로 '옥쇄'라고 표현했다.
아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미 대륙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으로 기록되었다.[53] 아투섬에서의 패배 이후 일본 해군은 키스카섬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개월 뒤 철수했다. 미군은 아투섬 탈환 후 알렉사이 포인트 육군 비행장을 건설하여 1943년 7월 10일부터 일본이 점령 중이던 쿠릴 열도에 대한 공습 기지로 활용했다.[16][66] 이는 둘리틀 공습 이후 처음으로 일본 본토(당시 일본 영토 기준)를 타격한 공습이었다.[16] 1945년 4월 11일에는 미국 서해안을 노린 일본의 풍선폭탄 9개 이상이 아투섬 근처에서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 의해 요격되기도 했다.[13]
9. 4. 결과 및 영향
아투섬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에게 큰 인명 피해를 남겼다. 특히 미군은 혹독한 알래스카의 기후와 지형, 그리고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 구분 | 미군[7] | 일본군 |
|---|---|---|
| 전사 | 549명 | 2,351명 이상 (매장 확인)[7] / 2,638명 (다른 기록)[7] |
| 부상 | 1,148명 | - |
| 기타 사상 (한랭 부상, 질병, 사고 등) | 2,132명 | - |
| 총 사상자 | 3,929명 | - |
| 포로 | - | 28명[7] (다른 기록 27명[7]) |
1943년 5월 29일, 야마사키 야스요 대령이 이끈 일본군 수비대 잔존 병력은 미군 진지를 향해 최후의 만세 돌격을 감행했으나, 격렬한 백병전 끝에 거의 전멸했다. 미군 매장반은 일본군 시신 2,351구를 확인했으며, 전투 중 포격으로 사망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은 장교 없이 28명에 불과했다.[7]
일본의 대본영은 5월 30일 아투섬 수비대의 전멸을 공식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옥쇄(玉砕)'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패배를 미화하고 죽음을 강요하는 선전 용어로서,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의 무모한 저항과 희생을 상징하게 되었다.
애투섬 탈환은 미국이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군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애투섬에서의 참패 이후 전략적 가치가 낮아진 키스카섬에서도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로써 일본군의 알류샨 열도 점령은 종식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미국에게 더욱 유리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전투 이후 미군은 애투섬에 알렉사이 포인트 육군 비행장을 건설했다.[66] 1943년 7월 10일부터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이곳을 기지로 삼아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쿠릴 열도 등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16][66] 이는 둘리틀 공습 이후 처음으로 일본 본토 및 점령지에 대한 직접적인 공습이 이루어진 사례였다.[66]
한편, 일본군 점령 당시 홋카이도 오타루시 근처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던 알류트족 원주민들은 전쟁 중 열악한 환경 속에서 22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10][9]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생존자들은 고향인 애투섬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섬을 군사 기지로 활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알류트족은 삶의 터전을 영구히 잃게 되었다.[11]
전후 미군은 애투섬에 애투 기지를 설치하고 운영했으나, 냉전 종식 이후 전략적 가치가 감소하면서 2010년 8월 기지를 완전히 철수했다. 현재 애투섬에는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10. 한국과의 관계
애투섬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무대였다는 점에서 한국사와 간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1942년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연계된 양동 작전의 일환으로 키스카섬과 함께 애투섬을 점령하고 '아쓰타섬(熱田島)'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변경했다.[12] 이는 당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한국의 상황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군은 애투섬 점령 과정에서 섬의 원주민이었던 알류트족에게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했다. 1942년 6월 일본군 침략 당시, 애투 마을에는 알류트 원주민 45명과 미국인 2명(찰스 포스터 존스와 그의 아내 에타 존스)이 거주하고 있었다.[9] 일본군은 침략 직후 찰스 존스를 살해했으며, 살아남은 알류트족 41명과 에타 존스를 포로로 잡아 각각 홋카이도 오타루 근처와 요코하마 등지의 수용소로 보냈다. 열악한 수용소 환경 속에서 알류트족 포로 중 22명이 사망했다.[10][9] 이러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한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 동원, 인권 유린과 같은 고통의 역사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1943년 5월 11일, 미국은 애투섬을 되찾기 위한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알류샨 열도 전투의 일부인 아투 전투는 혹독한 기상 조건과 험준한 지형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미군은 상륙과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많은 병사들이 동상 등 추위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야마사키 야스요 대령이 지휘하는 일본군 방어군은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전투의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
| 구분 | 미군 | 일본군 |
|---|---|---|
| 전사 | 약 600명 | 2,638명 (미군 집계 2,351명 확인, 추가 추정) |
| 부상 | 1,200명 | - |
| 기타 사상자 | 약 2,100명 (동상, 질병, 사고 등) | - |
| 포로 | - | 27명 (장교 없음) |
전투 막바지인 5월 29일,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 잔존 병력은 야마사키 대령의 지휘 아래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인 만세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은 미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 부대까지 위협했으나, 격렬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다.
미국의 애투섬 탈환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애투섬에는 미국 육군 항공대의 비행장이 건설되어 쿠릴 열도 등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 기지로 활용되었다.[16]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의 패망을 앞당겨 한국의 해방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애투섬에는 미군 기지(애투 기지)가 설치되어 냉전 시기 소련을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이 미군 기지는 2010년 8월에 철수하였고, 이후 애투섬에는 주민이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애투섬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격동기를 거치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패망, 그리고 전후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 재편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비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애투섬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와 분단을 경험한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시사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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