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한기는 18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했으며,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기철학을 발전시켰다. 최한기는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서양의 지동설과 과학 기술을 소개하며 개항론을 주장하는 등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기측체의』, 『성기운화』, 『지구전요』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최한기 - 지구전후도
지구전후도는 최한기가 1834년에 간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세계 지도로, 장정부의 《지구도》를 모방하여 제작되었으며, 전도와 후도로 구성된 소형 절첩장 형식을 갖는다. - 통상 개화론자 - 오경석
오경석은 조선 말기의 역관이자 개화 사상가로, 청나라를 왕래하며 서양 문물을 접하고 개항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김옥균, 유길준 등 개화파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해국도지》 등의 서적을 소개하고 초상 사진을 찍는 등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 통상 개화론자 - 박규수
박규수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북학 사상을 계승하여 개항과 통상을 주장했으며, 개화파 인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한국의 지도 제작자 - 신숙주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세조 즉위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와 국방에 기여했으며, 《해동제국기》, 《동국정운》 등의 저술을 남기고 영의정을 지냈다. - 한국의 지도 제작자 - 김정호
김정호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조선 시대 지리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95016 김정호가 명명되었다.
| 최한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개인 정보 | |
| 이름 | 최한기 |
| 한자 이름 | 崔漢綺 |
| 자 | 운로(芸老)·지로 |
| 호 |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일 | 1803년 10월 26일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개성부 |
| 사망일 | 1879년 6월 21일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 가족 관계 | |
| 국적 | 조선 |
| 자녀 | 최병대(장남) |
| 친인척 | 최윤행(손자) 최윤항(손자) |
| 아버지 | 최광현(양부) 최치현(생부) |
| 학문 | |
| 분야 | 철학, 지리학, 실학 |
| 스승 | 최치현, 한경리, 김헌기, 김정희 |
![]() | |
2. 이력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친아버지 최치현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한경리, 김헌기,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밖에 서경덕의 학문을 사숙하기도 했다. 1825년(순조 25년) 진사 시험에 급제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독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가세가 넉넉한 양부 덕택에 중국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보냈다.
최한기는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친아버지 최치현과 외할아버지 한경리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후 김헌기,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서경덕의 학문을 사숙하기도 했다. 1825년(순조 25년) 진사 시험에 급제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독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양부의 넉넉한 가세 덕택에 중국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입하여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보냈다.[10]
그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하며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역설하였지만 시중에서는 궤변, 허언으로 취급하였다. 일찍이 조선의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한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과학을 접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에까지 두루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에 대해서도 무능력한 자들의 자기 변명, 자기 위안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안빈낙도란 "하등(下等)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자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의 기술을 익히라고 가르쳤다.[10] 1872년(고종 9년) 통정대부 중추부첨지사에 올랐고, 사후 증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에 추증되었다.
3. 생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하며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궤변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조선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한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과학을 접목해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까지 두루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을 무능력한 자들의 자기변명이라 비판하며, 안빈낙도는 하등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 기술을 익히라고 가르쳤다.[10]
1851년(철종 2년) 한성부 송현(솔고개) 근처 남대문방 상동 상정승골(현 남대문로 3가)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냈다. 1858년 인사행정을 논한 서적 인정을 완성하였다.
1863년(철종 14년) 10월, 그는 양명학을 칭송하고, 주자학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1872년(고종 9년) 통정대부 중추부첨지사에 올랐고, 1875년(고종 12년) 2월 6일 오위장과 중추부첨지사에 임명되고 2월 20일 병으로 직임을 맡을 수 없다며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1879년 6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증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에 추증되었다.
3. 1. 생애 초반
최한기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여 글을 읽다가 깊은 뜻을 만나도 스스로 해독할 정도였다.[14] 소년 시절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으며, 김헌기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을 존경하고 사숙하여 그의 영향을 받아 서학(西學)을 수용하였다. 김정희와 박지원의 학문을 접한 그는 이용후생, 실사구시, 실리주의 등의 학문관을 쌓아갔다. 그밖에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에도 관심을 두어 서경덕의 저술들을 탐독하며 사사하였다.
그는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싼 값을 아끼지 않고 구입했고, 다 읽은 뒤에는 헐값으로 팔았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책장수들이 몰려와 그에게 책을 팔려고 했다.[13] 그러나 책에 몰두하여 지내는 동안 경제 형편은 점차 어려워졌다. 1823년(순조 23년) 한성부 회현방 장동에 집을 마련했다가 수개월 후, 한성부 남대문방 남촌 창동(창골)으로 이사하였다.
서울 생활이 궁핍해지자 친지들은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라고 권했다.[15] 그러나 그는 "나의 견문을 넓히고 지려를 열어주는 것은 오직 책 덕택인데, 책을 구하기가 서울보다 편리한 곳이 없다. 기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과문, 누습에 빠져 살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며 거절하였다.[15] 그는 학동들에게 글과 시문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틈틈이 독서를 통해 지식을 보완하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1825년(순조 25년) 생원 시험과 진사 시험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나, 과거 제도의 폐단을 보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전념하였다. 관직을 단념한 그는 한때 각처를 유랑하기도 하였다.
방대한 저술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교류하였고, 추사 김정희의 문인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당대의 지리학자 김정호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3. 1. 1. 출생과 가계
혜강 최한기는 1803년(순조 3년) 10월 26일 경기도 개성에서 최치현(崔致鉉)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들이 없던 5촌 당숙 최광현(崔光鉉)의 양자로 들어가 한성부 남대문 근처 창동(倉洞)에서 생활하였다. 생부 최치현은 시집 10권을 남긴 시인이었고, 양아버지이자 5촌 당숙인 최광현은 호가 귀경헌으로, 무관이었지만 서예가이며 1권의 서첩이 전한다. 이규경에 의하면 그의 양아버지 최광현이 서적 수집벽이 있었다 한다. 그의 양부가 중국의 옛 서첩에 벽이 있어, 여러 서첩에서 자체별로 분류하여 손수 모각해 두고도 인쇄해내기가 어려워서 그대로 두었고, 혜강의 대에 와서도 미처 해내지 못했다고 한다.[11]
양아버지 최광현은 서책과 서첩 수집이 취미였으나, 그는 서책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 이우성에 의하면 혜강의 대에 와서도 인쇄해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비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하였다.[11]
최한기는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최항의 방계혈족이며, 최사렴(崔士廉)의 후손이다. 그러나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고, 경기도 개성으로 내려가서 살다가 1800년대 초에 다시 한성부로 이사왔다. 최한기의 8대조 최의정은 음서 제도로 사헌부감찰직을 지냈으며, 증조할아버지 최지숭이 무과에 급제하여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양아버지이자 당숙이었던 최광현 역시 1800년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장과 곤양군수를 역임한 관료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당숙모이자 양어머니인 안동김씨가 태몽을 꾸었다 한다. 최광현이 아들이 없어 부인 안동김씨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꿈에 나타나 사촌동생 최치현의 집 담장 밑에다가 소나무를 심고 있었다. 김씨부인이 어째서 우리 집에 심지 않고 그 집 뜰 가에 심느냐고 하니 남편이 여기에 심어 뿌리가 확고해지면 우리 집에 그림자를 비추어서 그 음덕이 커질 것이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안동김씨 부인은 남편에게 꿈을 말하였고, 그때 최한기가 태어났다. 최광현은 사촌동생 최치현에게 부탁하여 사촌동생의 첫 아들을 양자로 들이게 됐다.
이건창은 최한기의 전기를 쓰면서 그의 집안이 넉넉했다고 기록하였다.[13] 그는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그의 집은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몰락한 양반이되, 자신의 가문이 양반임을 입증할 가문들이 있었고 그 근거로 자신의 집안과 대대손손 혼인관계를 형성한 집안이 몇몇 있다고 한다.
어려서 친아버지 최치현과 외할아버지 한경리로부터 글과 성리학을 배웠다. 그의 외조부인 한경니(Han Kyŏng-ni)는 최혜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개성에서 유명한 유학자였으며, 그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진다.[2][8] 그는 개성 출신 양반이다.
3. 1. 2. 유년 시절
그의 집은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집안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은 집안들을 통해 양반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으며, 친아버지 최치현과 외할아버지 한경리에게서 글과 성리학을 배웠다. 책 읽기와 혼자 사색하기를 즐겼는데, 훗날 회고에 따르면 '매번 기서(奇書)를 얻으면 즐거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건창은 "어려서 남달리 영특하여 글을 읽다가 깊은 뜻을 만나도 문득 스스로 해독했다.[14]"고 전한다.
소년 시절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고, 김헌기에게서도 성리학을 배웠다.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을 사숙하여 서학(西學)을 수용하였다. 김정희와 박지원의 영향으로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여, 직접 경험으로 얻는 것이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험적 이론이나 학설을 배격하고 직접 경험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을 주장하여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
김정희 문하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만났으며, 이용후생, 실사구시, 실리주의 등의 학문관을 쌓았다. 서경덕의 기철학에도 관심을 두어 그의 저술들을 탐독하며 사사하였다.
책을 살 때 비싼 값을 아끼지 않았고, 읽은 뒤에는 헐값으로 팔아 국내 서쾌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책을 사고 팔았다. 북경 서점가의 신간들이 서울에 들어오면 먼저 그의 손에 들어왔다고 한다.[13] 그러나 책에 몰두하여 가세가 기울어 옛집을 팔고 도성 문밖에서 살았다.[11] 1823년(순조 23년) 한성부 회현방 장동에 집을 마련했다가 수개월 후 남대문방 남촌 창동(창골)으로 이사하였다.
서울 생활이 궁핍해지자 친지들은 시골로 돌아가 농사짓기를 권하기도 했다.[15] 그는 책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었고, 학동들에게 글과 시문을 가르치며 독서를 통해 지식을 보완하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최혜강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조선 시대의 도시였다.[1][6] 아버지는 사녕최씨(Saknyeong Choe family)의 최치현(Choe Chihyeon)이었고, 어머니는 청주한씨(Cheongju Han family) 한경니(Han Kyŏng-ni)의 딸이었다.[1][8] 최혜강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삼촌인 혜강 광현(Hyegang Gwanghyeon)에게 입양되었다.[1][8]
관료였던 양아버지이자 삼촌은 그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를 돌보았다.[1] 그의 외조부인 한경니(Han Kyŏng-ni)와 김헌기(Kim Hŏn-gi, 1774–1842)는 최혜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개성에서 유명한 유학자였으며, 그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진다.[2][8]
3. 1. 3. 청년기
1825년(순조 25년)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 제도의 폐단을 보고 관직 출사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 독서에 전념하였다. 이우성에 의하면 그가 중년에 과거를 폐지한 것은 그에게 사환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4] 이후 그는 수많은 책을 읽고, 또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嘗游東南山水, 以廣其胸襟|상유동남산수, 이광기흉금중국어.[14]
관직을 단념한 그는 한때 각처를 유랑하였다.
그런데 방대한 저술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조차 그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교류하였고, 추사 김정희의 문인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당대의 지리학자 김정호와도 친분이 두터웠고, 일찍이 김정호와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기기도 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하여 대대로 벼슬과는 별 인연이 없는 잔반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당숙이자 양아버지인 최광현은 무과에 급제한 관료로, 가산이 넉넉하여 그는 평생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동서양의 많은 서적을 수집하였다. 또, 그는 어려서부터 경학(經學), 사학(史學), 예학(禮學), 수학(數學), 지리(地理) 등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두루 뛰어난 식견을 쌓았다. 스승 김정희의 사후에도 그는 독자적으로 다방면의 서적을 탐독하여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다.
3. 2. 과거 단념과 독서
1841년(헌종 8) 헌종의 외종조부인 조인영이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영입을 제의했지만 거절하였다. 조인영은 헌종 즉위 후 7년 만에 영의정이 되자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평소 최한기는 인맥과 연줄로 사람을 채용하는 조선 사회는 썩고 곪을대로 곪았다고 반복해서 지적했고, 자신을 영입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모두 거절로 화답했다.
조인영은 최한기에게 사람을 시켜 "왜 서울 밖 교외로 옮겨 살지 않는가?"라고 권유했다.[16] 이에 최한기는 "명예를 훔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16]"라며 거절했다.
스승들 중 한 사람인 김정희를 통해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통을 이어받았다. 사조(師祖) 박지원은 노론 내 북학파로서 비주류였지만 박지원의 집안은 노론의 중진들이 있었다. 연을 대면 노론의 중진들로도 이어질 수 있었으나, 노론 주류의 학통을 이수하지 않은 관계로 최한기는 자신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리라 짐작하고 여러 영입을 모두 거절하였다.
조인영은 차선책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17] 그는 혜강에게 과거에 응시할 의사가 없느냐고 타진하였다. 그러나 혜강은 그것마저 뿌리쳤다.[17]
3. 3. 학문 연구 활동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서양에 희고 코가 큰 털북숭이 야만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지원과 박제가는 서양의 야만인에게서도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최한기는 1850년까지 서양의 책들을 한문으로 번역한 청나라의 서적을 읽고는 1850년경에 이르러 서양인들은 절대 야만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양인을 함부로 야만인으로 깔보고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한자로 번역된 중국의 서양 천문학, 지리학 서적 등을 입수, 탐독하고 지구가 둥글며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하였다.
1851년(철종 2년) 한성부 송현(솔고개) 근처 남대문방 상동 상정승골(현 남대문로 3가)로 이사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858년 인사행정을 논한 서적 인정을 완성하였다.
최한기는 서양 과학의 실험적 및 수학적 능숙함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유교 자연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 그의 법칙을 따르는 전능한 신을 인정한 뉴턴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3]
그는 서양 과학의 사실과 이론들을 높이 평가하여 기의 본질을 깨닫는 철학을 구축했다. 그는 서양 과학과 유교 자연철학의 자료들을 사용하여 기학(氣學)(1857)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창안하고 뉴턴의 연구에서 발견한 역학을 수정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2][3][5]
최한기는 서양 과학과 수학의 중국어 번역본을 사용하여 기의 본질 원리를 발전시키고 뉴턴 역학을 대체하기 위해 기륜설(氣輪說)을 제안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저서 중 하나인 기학(氣學) 또는 '기륜의 역학에 관한 기의 연구'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전기와 전자기학적 관점을 이용하여 기륜에 인력과 척력을 부여했다.[2][3]
당시 다른 한국인들에 비해 최한기의 서양 과학에 대한 초기적이고 광범위한 지식은 현대 연구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2][3]
3. 3. 1. 학문, 독서 활동
그는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한경리, 김헌기,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고, 서경덕의 학문을 사숙하기도 했다. 1825년(순조 25년) 진사 시험에 급제했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독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가세가 넉넉한 양부 덕택에 중국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보냈다.[10]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하며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궤변으로 취급받았다. 조선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한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과학을 접목해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까지 두루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을 무능력한 자들의 자기변명이라 비판하며, 안빈낙도는 하등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 기술을 익히라고 가르쳤다.[10]
1834년(순조 34년) 친구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들자 최한기는 여기에 제를 써주었다. 소수의 학자들과 교류하여 그의 행적에 대한 언급은 드물지만, 절친한 친구인 이규경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그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된다. 이규경은 그를 뛰어난 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중국에서 나온 많은 신간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한다.
1836년(헌종 2년) 스승이자 본가의 외할아버지인 한경리의 문집 《기곡잡기》를 영인, 간행하였다.
이규경, 지리학자 김정호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이들은 그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가난과 불우한 환경에 개의치 않고 주로 독서에 전념하였다. 중국의 고서적을 구하고 밤새 읽는 것으로 평생 소일하였다.
그는 기학(氣學)을 제창하였으며, 이와 기 중에 눈에 드러나는 것,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기라 하여 기가 이보다 우위의 입장에 섰음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실증주의적인 견해를 펼쳤다. 그는 "학문이 생활에 있으면 실(實)의 학문이 되고, 생활에 있지 않으면 허(虛)의 학문이 된다"며 실용적 도움이 되는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최한기는 유학자였으며, 주자학적 도덕성을 배척하여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과학을 이해하고 동아시아의 지적 맥락과 통합한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1][2] 그의 주자학적 관점에 대한 도덕성 거부는 윤리적 규범이 자연 법칙에 기반하며, 자연 법칙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그의 이해에 근거한다.[4][9]
최한기는 기(氣)의 개념을 통해 자연, 인간, 사회를 검토하고 설명하고자 했으며, 기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철학자로 종종 언급된다.[1][3][4]
최한기는 과학자가 아닌 유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완벽한 유학 철학을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기의 절대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양 과학을 연구했다.[2][9] 그의 서양 과학 연구는 철학적 발명의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 이상은 아니었다. 19세기 한국의 유학자가 서양 과학을 완전히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는 대신 근대 과학과 기의 철학을 통합하는 이론을 창안하는 데 힘썼다.[2][3][9]
개성 출신 양반으로, 182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수입한 책들을 읽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명남루전서』와 『명남루총서』가 있으며, 그 내용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에서 사회 사상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기측체의』는 경험론적 철학의 대표작이며, 『성기운화』는 "기일원론"을 설파한 것인데, 이선란이 번역한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의 『담천』을 바탕으로 편찬되어 당시 서양 과학의 지식을 도입한 것이다. 『인정』 등 다른 저서에서는 능력에 따른 인재 개발 방법을 주장하는 등의 사회 사상을 전개하였다.
3. 3. 2. 지동설과 우주, 물리론 소개
1857년 최한기는 《지구전요》를 저술하여 중국에 소개된 서양천문학, 지리학 및 서양 사정을 대략적으로 소개하였다. 홍대용이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하였다가 터무니없는 소리로 취급당한 이후, 최한기에 의해 다시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견해가 시중에 확산되었다. 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주장했고, 세계 각국의 사정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비교적 설득력을 얻었다.[10]
1858년 중국에서 번역된 윌리엄 허셜(W. Herschel)의 천문학 서적을 1860년 초에 입수하여 탐독한 뒤, 1867년 허셜의 책에서 요점을 발췌하고 자신의 의견을 간략하게 첨가한 《성가운화》를 펴냈다. 이를 통해 그는 서양의 천문학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1836년에는 《추축론》과 《신기통》을 저술하여 서양의 물리학을 소개하였다. 《추축론》과 《신기통》은 그의 생전에 《기측제의》라는 제목으로 묶여 재간행되었으며, 조선에 서양의 근대 물리학을 처음 소개한 저서 중 하나이다. 그는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입수하여 탐독하기도 했다.
최한기는 뉴턴 역학이 유사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중력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했다.[1][2][3] 그는 뉴턴 역학이 수학에 치우쳐 기의 본질을 간과했으며, 당시 서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와 이론은 기륜의 메커니즘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3]
3. 4. 생애 후반
최한기는 교육을 과학기술 발전은 물론 문화적 계몽을 위해서도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는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교육이 어느 특권 계층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서민과 여성에게까지도 널리 교육의 혜택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리학 이외에도 수학, 물리, 상술, 천문학, 역학, 의학을 비롯한 실용적인 학문 교육과 농업, 공업, 상업, 방직 등을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중국의 서적을 통해 서양에 기계 기술이 존재함을 알고 조선에도 기계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다.
1863년(철종 14년) 10월, 그는 양명학을 칭송하고, 주자학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사물의 진실을 분별하려면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성리학자였던 간재 전우는 그를 성토하는 시를 지었다.
그는 소수 문벌 가문이 독점하다시피 한 과거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현실문제를 지적하며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으며, 외국과의 대등한 교류를 역설하는 등 실학파 학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뒤이어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선구가 되었다. 당시 조선 학계에서는 최한기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기존의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과는 달리 기가 이보다 우월하다는 그의 견해는 기성 학계의 심한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의 배타성과 폐쇄성, 편협성을 비판하고 경험, 실증 위주의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문, 지리, 농학, 의학, 수학 등 인문학 지식 전반에 박학하여 1천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현재는 15종 80여 권이 현전한다. 저서로는 《농정회요》, 《육해법》, 《청구도제》, 《만국경위지구도》, 《추측록》, 《강관론》, 《신기통》, 《기측체의》, 《감평》, 《의상리수》, 《심기도설》, 《소차유찬》, 《습산진벌》, 《우주책》, 《지구전요》, 《기학》, 《인정》, 《명남루집》 등이 있다. 특히 그는 《기측체의》와 《인정》에서 사람의 기질과 성향, 용인법 등을 논하였다.
3. 4. 1. 통상 개항, 개방론
1863년 고종 즉위 직후부터 최한기는 서구 자본주의의 존재를 접하고, 통상개방론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개화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양이론을 주장하는 노론 주류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개항론을 굽히지 않았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무역, 문물을 개방하고 북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다시 발표하였다. 그의 견해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 소수 인사들만이 호응, 동조하였고 흥선대원군은 그를 불쾌히 여겼다.[10]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은 최한기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 뒤 직접 찾아왔다. 정기원은 국가가 위기를 당했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기원은 최한기에게 서신을 보내기 전에 흥선대원군에게 보고하고, 흥선대원군에게 최한기의 자문을 받으라는 허락까지 받았다는 내용의 편지도 보냈다. 당시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독서와 문하생 양성에 전념하던 그에게 정기원이 도움을 청하였고, 그는 서구의 병사들이 화포와 화승총보다도 작고 견고한 총포류를 사용하는 점과 대병력을 이끌고 올 수도 있으니 그 점도 대비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자문에 화답할 것을 약속했고, 강화도의 군영에 가서 자문에 응하는 것보다는 한성부에 있으면서 책을 참고하며 수시로 전시의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자세하게 대응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그는 또 자신의 이러한 의견이 대원군에게도 반드시 전달되기를 희망하였다.[10]
3. 4. 2. 최후
1875년(고종 12년) 2월 6일 오위장과 중추부첨지사에 임명되고 2월 20일 병으로 직임을 맡을 수 없다며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한편 개항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1876년(고종 13년) 아들 최병대에게 척사상소를 올리게 했다. 아들 최병대가 척사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게 되자 오히려 그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며 격려하였다. 1879년 6월 21일에 사망하였다. 한때 그가 1877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1875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18]
만년에 이르러 그는 가난과 궁핍으로 고생하였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는 양반도 돈을 벌어야 된다는 자신의 말처럼 글과 서화, 작품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버는 돈의 대부분을 책을 사서 읽는데 투자하여 궁핍은 계속되었다. 책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동류 사회에서는 실패한 남성으로 보지는 않았다.[18] 1872년(고종 9년) 아들 최병대(崔柄大)가 고종의 시종이 되자 시종관의 70세 이상된 부친에 대한 특별 은전으로, 1872년 7월 12일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187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 17년 후, 그는 '''대사헌 성균 제주'''의 추증을 받았다. 그는 서울 녹분리(현재의 녹번동)에 매장되었으나, 나중에 그의 선조들이 묻힌 개성으로 이장되었다.[1]
3. 5. 사후
1892년(고종 29년) 1월 학행으로 특별히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의금부동지사 성균관제주에 증으로 추증되었다.[1] 그의 사상은 생전에는 배척당하거나 비판, 논란의 대상이 되다가 중국 등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어 그가 집필한 저서들이 중국에서 간행·소개되었다. 그의 학문은 1910년(융희 4년) 조선 멸망 후부터 조명되기 시작, 20세기에 들어와 그에 대한 연구서가 발표되기 시작되었다.
1960년 초부터 박종홍, 정성철, 김철앙, 이우성 등에 의해 그의 학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 초에 그의 일대기가 영재 이건창의 저서 중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영재 이건창의 미발간 필사본인 명미당유고 제 10권[19] 중에 혜강최공전이 실려 있었다. 이건창의 미간행 저서를 찾던 중에 발견된 최한기의 일대기는 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었다. 1979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그의 저서 기측체의, 인정(人政) 등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999년 3월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는 187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 17년 후, 그는 '''대사헌 성균 제주'''의 추증을 받았다.[1] 그는 서울 녹분리(현재의 녹번동)에 매장되었으나, 나중에 그의 선조들이 묻힌 개성으로 이장되었다.[1]
4. 사상과 신념
최한기는 개성 출신의 양반으로, 김정희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25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하며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궤변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을 접목하여 독창적인 기철학을 발전시켰고,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까지 적용하려 했다.
그는 안빈낙도를 하등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 비판하며, 상업, 의술, 수공업 기술을 익히라고 가르쳤다.[10]
최한기는 기(氣) 개념으로 자연, 인간,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으며,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기철학자로 언급된다.[1][3][4] 그는 서양 과학의 실험적, 수학적 능력을 인정했지만, 유교 자연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뉴턴 역학을 비판하기도 했다.[1][2][3] 그는 서양 과학과 유교 자연철학 자료를 사용하여 기학(氣學, 1857)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창안하고, 뉴턴 역학을 수정하는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2][3][5]
최한기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유기(唯氣) 입장을 취하며 "이는 무형(無形)하고 기는 유적(有跡)한 것이어서 그 적(跡)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적, 능동적 노력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제도와 풍속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사대적·복고적 태도를 반대하였다.[10]
4. 1. 가난 무능론
최한기는 가난을 무능력한 자들의 자기 변명이라며 조소하였다. 그는 안빈낙도 혹은 염빈(廉貧)이란 전통적 구호를 저주했는데, 그보다 훨씬 앞서 인간 삶의 향상(복지후생)을 말하고,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것이다.[10]그는 “안빈낙도란 하등(下等)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자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 기술을 익히라고 가르쳤다.[10]
4. 2. 실사구시 정신
1825년(순조 25년) 진사 시험에 급제하였으나,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독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가 살던 19세기 실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나 이용후생(利用厚生) 대신 금석(金石)·고증학을 중심으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조가 주류를 이루던 때였다. 그는 실제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 실제적으로 이익을 줄 수 있는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라 역설하였다. 그의 철학 사상은 이러한 실사구시의 실증 정신을 이어받고 이루어진 것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마지막 결실이라 할 수 있다.[10]4. 3. 경험론
그는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주장하였으며, 선현의 말씀만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배타적, 폐쇄적, 보수적 입장을 비판했다. 최한기는 "경험을 통해서 정답을 얻어내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10] 그에 의하면 사물에 대한 정확한 답은 인식을 통해서 얻어지며, 외부 사물과 인간의 감각 기관이 접촉할 때 비로소 경험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는 경험에 의하지 않은 선험적인 지식은 본래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그는 성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선현의 말씀 역시 선현들이 직접 접하고 체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환경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변화한 사회와 환경에 대한 연구, 탐구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철저한 경험주의적인 과학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을 전개하였다. 또, 교도주의적(敎導主義的)인 방법론을 주장하였고, 교육사상에 있어서도 글공부 외에 직업교육을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4. 4. 영입 제의 거절
조인영은 장차 유일(遺逸)을 천거하려 할 때 혜강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서울에 살고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아 사람을 시켜 혜강에게 서울을 떠나 교기지외로 이사할 것을 제의했다.[16] 그 이유는 도시가 아닌 산림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6] 혜강이 도시에서 일반 세속 시민들과 섞여 살면 아무리 학덕이 있는 선비라도 산림으로서의 위상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6]조선 후기부터 집권층은 산림양덕지사로서 일대의 명성과 권위가 있는 인물을 유일로 천거하여 자기 정권의 존현숭유의 명분을 꾸미는 수법을 취해왔다. 유일로 받들려면 반드시 산림에 있는 유학자라야 했다. 한번 유일로 천거된 사람은 어떠한 관직이 주어지더라도 '산림'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지니고 국왕으로부터 빈사지례의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16] 그러나 최한기는 억지로 관직을 얻기 위해 도성에서 먼 곳으로 이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며 반문하였다.
최한기는 당시 유일로 천거된 노론계 유자들이 산림이라는 형식적 예우를 받으면서 집권층의 어용학자 노릇이나 하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은 당시 집권층과 당색이 같지 않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산림'이 아닌 산림의 아류인 '남대(南臺)'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17]
4. 5. 인재 등용론
그는 인재 등용에 있어 그 사람의 재주와 재능만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벌이나 학벌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최한기는 인사·행정에 관한 책 人政|인정중국어에서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20]그는 또한 講官論|강관론중국어에서 경연관의 자질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21]“경연관을 뽑아 쓰거나 내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학문이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 정치와 교육의 수준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결부된다. 그러므로 큰일을 하려는 군주는 먼저 경연관을 잘 뽑아야 한다. (중략) 그러나 경연관이 직책을 수행함에도 우열이 없지 않다. 기색이 온화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조리가 분명하고 왕에 대한 충성과 사랑이 넘치는 자가 으뜸이다. 능란한 말솜씨로 변론에 힘쓰고 이전의 언설을 갖다 붙여서 담론을 즐기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 자가 그 다음이다. 지나치게 자중하여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능과 덕을 숨기는 것만 일삼는 자가 그 다음이다.[21]”라며 어떤 인재를 경연관으로 등용하느냐에 따라 학문의 융성과 쇠퇴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4. 6. 기에 대한 관점
최한기는 기(氣, Qi)의 개념을 통해 자연, 인간, 사회를 검토하고 설명하고자 했으며, 기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철학자로 종종 언급된다.[1][3][4]최한기는 유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유학 철학을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쳤고, 기의 절대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양 과학을 연구했다.[2][9] 19세기 한국의 유학자가 서양 과학을 완전히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는 근대 과학과 기의 철학을 통합하는 이론을 창안하는 데 힘썼다.[2][3][9]
최한기는 서양 과학의 실험적 및 수학적 능숙함을 받아들였지만, 유교 자연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유사과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중력의 기원에 대한 설명 부족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비판했다.[1][2][3] 그는 천문학과 천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뉴턴 역학을 읽고 해석하며 찬반 논리를 제시했다.[2] 또한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 그의 법칙을 따르는 전능한 신을 인정한 뉴턴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3]
그는 서양 과학의 사실과 이론들을 높이 평가하여 기의 본질을 깨닫는 철학을 구축했다. 그는 서양 과학과 유교 자연철학의 자료들을 사용하여 기학(氣學, 1857)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창안하고 뉴턴의 연구에서 발견한 역학을 수정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2][3][5]
최한기는 서양 과학과 수학의 중국어 번역본을 사용하여 기의 본질 원리를 발전시키고 뉴턴 역학을 대체하기 위해 기륜설(氣輪說)을 제안했다. 그는 뉴턴 역학이 수학에 더 기울어져 기의 본질을 간과했으며, 당시 서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와 이론은 기륜의 메커니즘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3]
서양 과학이 수학적 기술 면에서 발전했지만, 최한기의 견해에 따르면 역학의 가장 필요한 목표는 기륜의 상호 작용에 기반한 현상의 인과 메커니즘이었다.[2][3]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기학(氣學) 또는 '기륜의 역학에 관한 기의 연구'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전기와 전자기학적 관점을 이용하여 기륜에 인력과 척력을 부여했다.[2][3]
당시 다른 한국인들에 비해 최한기의 서양 과학에 대한 초기적이고 광범위한 지식은 현대 연구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2][3]
4. 7. 기우위론과 실증주의
그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유기(唯氣)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형(無形)하고 기는 유적(有跡)한 것이어서 그 적(跡)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기론의 입장으로부터 그는 공허한 명목(名目)에 얽매이지 않고 알찬 내실(內實)에 착안하는 일종의 유명론(唯名論)의 사상을 싹트게 했다. 즉 그는 "눈(目)이라는 이름과 귀(耳)라는 이름을 서로 바꾼다면 눈을 귀라고 부르고 귀를 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는 바뀌는 법이 없다. 귀로 본다고 하며 눈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야 무슨 해(害)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으니, 이 유명론적 사상이 모든 명분론(名分論) 내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리주의(實利主義)·실용주의 나아가 실증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도 유명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만일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면, 종을 치기 전에 치면 소리가 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선천적인 이성(仁義禮智)의 능력을 부인한다. 이와 같이 경험에 의한 지식 그리고 어디까지나 실용성이 있는 지식의 확충을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을 힘쓰는 자가 결국 이기고 허문(虛文)을 숭상하는 자가 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서양은 서로를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로를 위하여 통상의 길까지 터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그의 기(氣)의 형이상학의 귀결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경험론자다운 기의 형이상학이 있다. 그 형이상학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으니 '대기운화(大氣運化)'론과 '통민운화(統民運化)'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우주·자연에 관한 이론이며 후자는 인간사에 관한 이론이다. 대기운화론이란 우주 자체가 기의 운동 변화로 자연의 이법(理法)을 구현하여 간다는 것이며, 통민운화론이란 기수(氣數)에 의하여 인간 또는 인류의 흥망 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운화'와 '통민운화'는 궁극에 가서 잘 조화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한다. 결국 '통민운화'가 '대기운화'에 조화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흥망 성쇠를 결정짓는 기수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수 극복의 사상 속에 바로 그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예나 지금이 같다 하더라도 예를 버리고 지금을 택하겠다"고 그는 주장했다. 경험 지식의 확충, 실리·실용을 위한 문호 개방 및 통상론이 모두 이 진보주의적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겠다.
최한기는 기(氣, Qi)의 개념을 통해 자연, 인간, 사회를 검토하고 설명하고자 했으며, 기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철학자로 종종 언급된다.[1][3][4]
최한기는 서양 과학의 실험적 및 수학적 능숙함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유교 자연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유교 철학자로서 궁극적인 실체라고 믿었던 기(氣)의 유사과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중력의 기원에 대한 설명 부족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비판했다.[1][2][3] 최한기의 천문학과 천체에 대한 관심은 그가 뉴턴 역학을 읽고 해석하며 찬반 논리를 제시하도록 이끌었다.[2] 그는 또한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 그의 법칙을 따르는 전능한 신을 인정한 뉴턴의 주장을 믿기를 거부했다.[3]
그는 서양 과학의 사실과 이론들을 높이 평가하여 기의 본질을 깨닫는 철학을 구축했다. 그는 서양 과학과 유교 자연철학의 자료들을 사용하여 기학(氣學)(1857)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창안하고 뉴턴의 연구에서 발견한 역학을 수정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2][3][5]
최한기는 서양 과학과 수학의 중국어 번역본을 사용하여 기의 본질 원리를 발전시키고 뉴턴 역학을 대체하기 위해 기륜설(氣輪說)을 제안했다. 그는 뉴턴 역학이 수학에 더 기울어져 기의 본질을 간과했으며, 당시 서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와 이론은 기륜의 메커니즘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3]
서양 과학이 수학적 기술 면에서 상당히 발전했지만, 최한기의 견해에 따르면 역학의 가장 필요한 목표는 기륜의 상호 작용에 기반한 현상의 인과 메커니즘이었다.[2][3]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저서 중 하나인 기학(氣學) 또는 '기륜의 역학에 관한 기의 연구'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전기와 전자기학적 관점을 이용하여 기륜에 인력과 척력을 부여했다.[2][3]
4. 8. 기와 빛의 굴절론
최한기는 이 세상이 온갖 형태의 기로 가득 찬 것으로 보았고, 소리는 그것이 진동하여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떤 물체에 부딪쳐서 기와 소리는 모두 반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소리와 기의 파동을 성훈이라고 명명하여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소리와 기뿐만 아니라 냄새와 색깔에도 이와 비슷한 파동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빛의 굴절 현상에 대해서도 렌즈 이외의 다른 예를 들어 설명했다.4. 9. 최한기와 서양과학
최한기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조선에 소개하며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궤변이나 허황된 소리로 여겨졌다.[10] 그는 조선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했던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을 접목해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 영역까지 확장하려 했다.[10]최한기는 교육이 과학기술 발전과 문화적 계몽에 중요하다고 보았다.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며 교육이 특권층의 독점이나 출세, 부의 상속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서민과 여성에게도 교육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리학 외에도 수학, 물리, 상술, 천문학, 역학, 의학 등 실용적인 학문과 농업, 공업, 상업, 방직 기술 교육을 강조하고, 중국 서적을 통해 서양의 기계 기술을 조선에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강화진무사 정기원은 최한기에게 자문을 구했다. 정기원은 흥선대원군의 허락을 받고 최한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최한기는 서양 군대가 화포와 화승총보다 작고 견고한 총포를 사용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올 수 있음을 지적하며 대비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한성부에서 책을 참고하며 상황 보고를 받고 자세히 대응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고, 자신의 의견이 대원군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최한기는 동서양 과학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서양의 발전된 사상과 과학을 조선에 맞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쇄국은 조선의 침체와 무발전의 원인이라 지적하며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기독교 사상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 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북경인화당에서 출판된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동양 형이상학과 서양 과학 기술을 융합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신기통>과 <추측론>을 합쳐 엮은 것으로, 활자가 호화롭고 체제가 고상하게 편집되었다. 《심기도설(心器圖說)》에서는 과학 서적을 바탕으로 기구 개량에 힘썼고,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자전과 공전을 소개했지만, 주로 중국에 소개된 책을 편집한 것이었다. 그는 옛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각자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한기는 유학자였지만 주자학적 도덕성을 배척하여 고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 과학을 이해하고 동아시아 지적 맥락과 통합한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1][2] 그는 윤리 규범이 자연 법칙에 기반하며, 자연 법칙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4][9]
최한기는 기(氣, Qi) 개념으로 자연,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 했으며, 기 개념으로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기철학자로 언급된다.[1][3][4]
최한기는 과학자가 아닌 유학자로 성장하여 유학 철학 확립에 평생을 바쳤고, 기의 절대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양 과학을 연구했다.[2][9] 그의 서양 과학 연구는 철학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세기 한국 유학자가 서양 과학을 완전히 수용, 이해하기는 어려웠기에, 그는 근대 과학과 기 철학을 통합하는 이론을 창안했다.[2][3][9]
최한기는 서양 과학의 실험적, 수학적 능력을 인정했지만, 유교 자연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교 철학자로서 궁극적 실체인 기(氣)에 대한 유사과학적 이해 부족과 중력 기원에 대한 설명 부족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비판했다.[1][2][3] 최한기는 천문학과 천체에 대한 관심으로 뉴턴 역학을 해석하고 찬반 논리를 제시했다.[2] 그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 그의 법칙을 따르는 전능한 신을 인정한 뉴턴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3]
그는 서양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높이 평가하여 기의 본질을 깨닫는 철학을 구축했다. 서양 과학과 유교 자연철학 자료를 사용하여 기학(氣學, 1857)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창안하고, 뉴턴 역학을 수정하는 새로운 역학을 제안했다.[2][3][5]
최한기는 서양 과학과 수학의 중국어 번역본을 사용하여 기의 본질 원리를 발전시키고, 뉴턴 역학을 대체하는 기륜설(氣輪說)을 제안했다. 그는 뉴턴 역학이 수학에 치우쳐 기의 본질을 간과했으며, 당시 서구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이론은 기륜 메커니즘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3]
서양 과학이 수학적 기술 면에서 발전했지만, 최한기는 역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기륜 상호작용에 기반한 현상의 인과 메커니즘이라고 보았다.[2][3] 그의 저서 기학(氣學, '기륜 역학에 관한 기의 연구')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전기, 전자기학적 관점을 이용하여 기륜에 인력과 척력을 부여했다.[2][3]
당시 다른 한국인들에 비해 최한기의 서양 과학에 대한 초기 지식과 폭넓은 이해는 현대 연구자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2][3]
4. 10. 역사 발전론
그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적, 능동적 노력에 의해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부조리를 개선할 의지가 없다면 발전할 수가 없다고 봤다. 또한 제도와 풍속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당연히 달라지며,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사대적·복고적 태도를 반대하였다.[10] 그는 도덕적 선악의 기준은 일부 학자들의 이념, 이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백성들이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여 민권사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농간을 부려서 민심을 조작, 현혹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10]그는 봉건적 왕권을 인정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예속에 반대하고 대의제를 지향할 것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외국과의 문물 교류를 통해 서구의 좋은 것은 우리도 받아들이고 섭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
4. 11. 문장론
최한기는 문장력, 필력, 글 쓰는 능력 역시 일종의 타고난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문장은 신기(神氣)에서 나온다"라고 하였다.[1] 한편 이 신기는 경험을 통해서도 획득된다고 보았다. 신기는 지각하고 경험하는 활동의 주체로 본 것이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현실 자체의 생동하는 모습을 표현 방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 문학이라는 것이다.[1]5. 저서
1830년에서 1867년까지 번역하거나 지은 책이 무려 1천여 권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책은 20여 종 120여 권이다. 이들은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 3책으로 영인본이 나와 있다.[10]
최한기는 유교, 사회개혁, 농업, 천문학, 수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천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20세기에 복원되었고, 197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다.[2][8] 성균관대학교 출판부는 2002년에 『최한기 저술 확장본』이라는 5권짜리 사진 복제본을 출판하기도 하였다.[2]
그의 저술은 전통적인 유교 철학과 서양 과학을 기반으로 하였다. 『성기운화』는 『담천』(談天|담천중국어)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최한기가 현대 천문학과 뉴턴 역학에 대해 다룬 주요 저술이다.[2]
1836년에 출판된 『추측록』에서 최한기는 기(氣)의 물리적 실체를 뒷받침하는 많은 관찰 및 실험적 증거들을 제시하였고, 1857년에 출간된 『기학』, 1860년의 『운화측험』, 1867년의 『성기운화』 등의 저서에서 기가 끊임없이 활동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2][5]
『지구전요』에서 최한기는 지구 표면의 약 5분의 2가 육지이고 나머지 5분의 3은 바다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신의 세계 지리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 육지를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대륙으로 나누었다.[1]
그리고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로 바다를 나누었다.[1]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신기천험』은 처음에는 의학 서적으로 쓰여졌지만, 56가지의 자연 원소를 설명하고 있다. 최한기는 이 책에서 힘 사이의 인력과 척력, 기체의 활용, 황산, 질산, 염산과 같은 원소의 정의와 기능 등을 설명하였다.[8]
;최한기의 저술 목록
| 발간년도 | 저서 |
|---|---|
| 1834–1842 | 『농정회요』[2] |
| 1834 | 『육해법』[2] |
| 1835 | 『의상이수』[2] |
| 1836 | 『추측록』[2][8] |
| 1836 | 『기측체의』 |
| 1836 | 『강관론』 |
| 1836 | 『신기통』 |
| 1839 | 『감평』 |
| 1839 | 『의상리수』 |
| 1842 | 『심기도설』[2] |
| 1850 | 『습산진벌』[2] |
| 1857 | 『기학』[2][3][5] |
| 1857 | 『지구전요』[1][2][8] |
| 1860 | 『인정』 |
| 1860 | 『운화측험』[2] |
| 1866 | 『신기천험』[2][8] |
| 1867 | 『성기운화』[2][3][8] |
| 『명남루집』 | |
| 『소차유찬』 | |
| 『청구도제』 | |
| 『횡결』 | |
| 『승순사무』 | |
| 『향약추인』 | |
| 『재교』 |
참조
[1]
논문
The Modernity of Nineteenth-Century Korean Confucianism: A Focus on Perceptions of World Geography in Choe Hangi's Jigujeonyo
https://rks.accesson[...]
2010-09-01
[2]
논문
A Korean Reading of Newtonian Mechanics in the Nineteenth Century
http://www.jstor.org[...]
[3]
논문
A Comparison of Korean and Japanese Scholars' Attitudes toward Newtonian Science
https://harg.kasi.re[...]
2010-03-01
[4]
논문
Hyegang's Sin-gi: Emphasis on Chucheuk
https://www.kci.go.k[...]
2005-01-01
[5]
서적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22-10-18
[6]
웹사이트
Ground-breaking Ceremony for Hyegang Hall, a New Laboratory Building
http://human.ajou.ac[...]
2021-07-01
[7]
웹사이트
A Comparison of Korean and Japanese Scholars' Attitudes toward Newtonian Science
http://www.kci.go.kr[...]
[8]
서적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n History: Excursions, Innovations, and Issues
https://books.google[...]
Jain Publishing Company
2005-10-18
[9]
웹사이트
Korean Philosophy |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10]
뉴스
300년전에 박제가는 경제민주화의 허구를 보았다
http://www.dailian.c[...]
데일리안
2015-06-21
[11]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2]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3]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4]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5]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6]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7]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18]
웹인용
‘남자’ 노릇하는 다양한 방법
http://legacy.www.ha[...]
2015-05-11
[19]
서적
실시학사산고:한국학의 저변
창작과 비평사
1995-01-01
[20]
뉴스
[책과 삶] 등 굽은 정승·애꾸눈의 화가…고정관념을 깬 장애의 역사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1-11-25
[21]
뉴스
[책과 삶] 조선 왕들에게 ‘권력의 공공성’을 일깨우다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1-08-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