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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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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림픽 예술은 1912년부터 1948년까지 올림픽에서 열린 예술 경기로, 스포츠와 예술의 결합을 추구한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의 이상을 반영하여 시작되었다. 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각 등 5개 분야에서 시작하여, 이후 세부 종목이 추가되었으며, 출품작은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아야 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으며, 이후 올림픽에서는 예술 전시회가 문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 장 자코비는 회화 부문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가장 성공적인 예술가로 평가받으며, 알프레드 하요시와 월터 W. 위난스는 스포츠와 예술 모두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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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예술
올림픽 예술 경기
피에르 드 쿠베르탱
피에르 드 쿠베르탱
코드ART
혼성 종목 수14
하계 올림픽
최근 대회

2. 역사

1894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설립과 제1회 근대 올림픽 개최 이후,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예술과 스포츠의 결합을 추구하며 올림픽에 예술 경기를 도입하고자 했다. 1906년 파리 회의를 통해 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각 5개 분야에서 스포츠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 경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술 경기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참가 규모가 작았으나, 1924년 파리 올림픽을 기점으로 점차 중요성이 부각되며 참가자가 늘어났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지만, 참가자의 전문성 문제와 작품 판매 허용 등으로 인해 아마추어리즘 원칙과의 충돌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후 몇 차례의 올림픽을 거치며 예술 경기는 계속되었으나, 참가자 대부분이 전문 예술가라는 점과 예술 작품 평가의 객관성 확보 어려움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참가 규모가 현저히 감소했다.

결국 1949년 IOC 회의에서 아마추어리즘 위배 문제를 지적하는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격렬한 논쟁 끝에 1954년 아테네 총회에서 예술 '경기'를 폐지하고 메달 수여 없는 예술 '전시회'로 대체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예술 경기 부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1]

비록 경쟁 형식의 예술 경기는 사라졌지만, 올림픽 헌장은 문화 행사 개최를 통해 참가자 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하도록 명시하고 있어 올림픽과 예술의 연관성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1912년부터 1948년까지 시행된 예술 경기는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은 독창적인 작품을 대상으로 했으며,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되었으나 모든 메달이 항상 수여된 것은 아니었다. 한 예술가가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복수의 메달을 획득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용, 영화, 사진, 연극 등은 메달 종목으로 채택되지 못했으나, 브레이크댄스2024년 파리 올림픽에 포함되었다.[2]

2. 1. 배경

1894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설립되고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정신과 육체를 함께 단련하고, 국가 간 전쟁 대신 스포츠를 통해 평화적으로 경쟁하는 세상을 꿈꿨다. 고대 올림픽이 신을 기리는 종교적 행사였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통해 신을 표현하고자 했고, 예술 표현 역시 신을 기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전통과 "육체와 정신의 향상"이라는 근대 올림픽의 이념을 바탕으로, 쿠베르탱은 예술과 스포츠를 결합하는 것을 또 다른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올림픽 경기에 예술 경기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1906년 5월, 쿠베르탱 남작은 파리에서 IOC 위원들과 예술가 단체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올림픽에서 5개 분야(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각)의 예술 경기를 정식으로 개최하자는 제안이 IOC에 전달되었다. 출품될 예술 작품은 반드시 스포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처음에는 1908년 하계 올림픽 (원래 이탈리아 로마 개최 예정)에 예술 경기를 포함시키려 했으나, 1906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한 이탈리아의 재정 문제로 올림픽 개최지가 런던으로 변경되었다. 런던 조직위원회는 예술 경기를 계획했지만,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국 취소되었다. 조직위는 예술가들이 작품을 출품하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 2. 초기 올림픽 예술 경기 (1912-1924)

1906년 5월,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파리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들과 예술가 단체 대표자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올림픽에서 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각의 5개 분야 예술 경기를 조직하자는 제안이 나왔으며, 출품작은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1]

본래 1908년 로마 올림픽에서 예술 경기를 개최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조직위원회가 재정 문제로 준비를 중단하고 개최지가 런던으로 변경되었다. 런던 조직위원회 역시 짧은 준비 시간 때문에 예술 경기를 취소했다.[1]

쿠베르탱은 포기하지 않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프로그램에 예술 경기를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스웨덴 측은 처음에는 예술과 경쟁을 결합하는 아이디어에 반대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그러나 참가 열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35명의 예술가만이 작품을 출품했다. 그럼에도 5개 부문 모두에서 금메달이 수여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 열린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도 예술 경기는 프로그램에 포함되었으나, 전쟁의 여파 속에서 부차적인 행사로 취급되었다.[1]

반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예술 경기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총 193명의 예술가가 작품을 출품했으며, 이 중에는 3명의 러시아 망명 예술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소련은 올림픽을 "부르주아" 축제로 간주하여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1]

2. 3. 발전과 논란 (1928-1948)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예술 경기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문학, 음악, 건축 부문을 제외하고도 1,100점이 넘는 예술 작품이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전시회가 끝난 뒤 작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모든 참가자가 아마추어여야 한다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규정과 충돌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기존 5개 예술 분야 중 4개 분야가 세분화되면서 행사 수가 늘어났다. 이 대회 문학 부문에서는 폴란드의 시인 카지미에시 비에르진스키(Kazimierz Wierzyński)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공황의 여파와 미국 서부 해안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스포츠 종목 참가율이 이전 대회보다 낮았다. 그러나 예술 경기는 이러한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출품된 작품 수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로스앤젤레스 역사 과학 예술 박물관에서 열린 예술 작품 전시회에는 384,000명 이상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이 대회부터 일본 선수들이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 내에서는 "대일본체육예술협회"(현재의 일본스포츠예술협회)가 작품 공모 및 국내 예선을 담당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술 종목 일본 출품작'''[5][6]
종목세부 부문선수명작품명결과
건축해외 부문고바야시 마사카즈"수영장(진구 수영장)", "야구장(진구 구장)"선외
이시하라 겐지"국제 문화 도시"선외
회화서양화고스기 호안"럭비의 한 구도"[5][7]선외
판화나가나가 요시하루"벌레 씨름"가작
후카자와 소이치"메이지 신궁 야구장 조케이센의 날 [쇼와 6년]"선외
무나카타 시코"워밍업", "경마"선외
가와카미 스미오"야구 대회의 그림"선외
마에카와 지호"럭비"[8]선외
온치 고시로"순간"[9]선외
가네야마 헤이조"얼음 미끄럼"선외
야마구치 스스무"동궁기념을 가진 오다 간오 씨상"선외
가와니시 히데"고시엔 야구 대회 입장식의 그림", "고베 동유원지 축구"선외
회화 기타 출품자에노모토 지카토시, 이케베 쥰, 고즈 고진, 미나미 겐조
조형-히나코 미쓰조"럭비"[10]선외
하세가와 요시키"원반 던지기"[11]선외
기타무라 세이보"The Repose"(복싱)선외
조형 기타 출품자후지이 고스케, 다케이 나오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예술 경기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개최되었다. 일본은 이 대회에도 선수단을 파견했으며, 회화 부문에서 2개의 동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후지타 류지의 유채화 "빙상 하키(아이스하키)"와 스즈키 슈자쿠의 수채화 "고전적 경마"가 각각 동메달을 받았다. 특히 후지타 류지의 작품은 당시 나치에 의해 매입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후에 복각되기도 했다.[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예술 종목 일본 출품작'''[5][12]
종목세부 부문선수명작품명결과
건축-우치다 쇼조"수영장", "구장"선외
기시다 히데토"일본의 골프"(클럽하우스)[13]선외
이시카와 준이치로"야구탑", "야구탑 설계도"선외
회화회화가토 에이조"수영"선외
야마다 신고"낚시"선외
후지타 류지"빙상 하키(아이스하키)"동메달 (유채)[5]
히가시야마 신키치(가이이)"소년 빙주"(스케이트)[5]선외
스즈키 슈자쿠"고전적 경마"동메달 (수채)
다카다 리키조"두 개의 후오르무"선외
나카무라 다쿠지"나기나타"선외
구라타 사부로"드리블 전"[14]선외 (유채)
에비하라 기노스케"파티나쥬"선외
판화이시이 쓰루조"수영", "우중 경쟁"선외
회화 (계속)판화 (계속)이노쿠마 겐이치로"사격"선외
하사마 이노스케"야구"선외
와키타 가즈"올림픽의 경치"선외
가와카미 스미오"촌동 야구희의 그림"선외
무나카타 시코"시민 체조"(체조), "합동 경쟁"(장거리 달리기)[5]선외
야마구치 스스무"철퇴 투"[10]선외
마에카와 지호"지얌프"(멀리뛰기)선외
후카자와 소이치"태클", "씨름"선외
고이소 료헤이"학생 씨름" (2작품)선외
고바야시 아사지"스케이트"[10]선외
사토 게이"스키"선외
조형조소하세가와 요시키"요코즈나 양상"[15], "골프"선외
하세가와 요시키"국기(누르면 눌러라)"[10]선외 가작
이케다 유하치"출발 지점으로"[16]선외
하타 쇼키치"출발"[17][10]선외
히나코 미쓰조"나무 연습자", "유메아케바"선외
공예 (Relief)하세가와 요시키"칸막이"선외
음악작곡에분야"타이완의 무곡"[18]선외 가작
야마다 고사쿠"육군 행진곡"[18]선외
모로이 사부로"올림픽으로부터의 3개의 단편"[18]선외
미사쿠 아키요시"건강한 여름"[18]선외
이토 노보루"스포츠 닛폰"[18]선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예술 경기는 개최되었으나,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예술 경기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된다. 런던 대회에서는 이전 대회들에 비해 출품된 작품 수가 크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마추어리즘 규정과의 충돌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이 되었고, 결국 예술 경기가 폐지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4. 폐지와 유산

1936년 베를린 올림픽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예술 경기는 상당한 관심 속에 개최되었으나, 1948년에는 출품작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결정적으로 1949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회의에서 예술 경기의 운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제출된 보고서는 참가자 대부분이 전문 예술가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아마추어리즘을 중시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보고서는 예술 '경기'를 폐지하고 메달 수여 없이 전시회 형태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고, 이는 IOC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51년 IOC는 논의 끝에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예술 경기를 다시 개최하기로 결정했지만, 헬싱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개최를 거부했다. 결국 헬싱키에서는 예술 경기가 열리지 못하고, 대신 관련 예술 전시회가 개최되었다.[1]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전문 예술가여서 아마추어리즘 원칙과 충돌한다는 점, 예술 작품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워 종종 자의적인 판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는 점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4] 특히 심사의 어려움은 오늘날 올림픽의 피겨 스케이팅이나 아티스틱 수영과 같이 예술성이 중요한 종목에서도 여전히 제기되는 문제이다.[4] 또한, 당시의 운송 기술로는 미술 작품들을 안전하게 운반하고 관리하기 어려웠던 기술적 한계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허용된 작품 판매가 올림픽의 비상업적 순수성을 해친다는 상업성 논란도 폐지에 영향을 미쳤다.[4]

이러한 논의를 거쳐 1954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49차 IOC 총회에서, IOC 위원들은 투표를 통해 향후 올림픽에서는 예술 경기를 완전히 폐지하고 대신 예술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후 예술 경기를 부활시키려는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메달을 놓고 경쟁하는 예술 '경기'는 사라졌지만, 올림픽과 예술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올림픽 헌장은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문화 행사를 기획하여 "참가자 및 올림픽 경기에 참석하는 다른 사람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 상호 이해 및 우정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추구했던 예술과 스포츠의 조화라는 이상이 다른 형태로 계승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술 경기는 올림픽이 초기의 이상적인 '세계적인 축제'에서 점차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경쟁하는 장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4]

3. 세부 종목

1912년부터 1948년까지 열린 올림픽 예술 경기의 세부 종목은 대회마다 조금씩 변화했다. 아래 표는 각 대회별로 개최된 세부 종목을 보여준다.

종목12202428323648
건축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건축 설계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공예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광고 그래픽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그래픽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극시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기악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노래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도시 계획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독주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독창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명판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문학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부조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서사시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서정시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성악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소묘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수채화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오케스트라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음악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조각0
채색화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판화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합창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style="background:#bbbbbb"|0
회화style="background:#bbbbbb"|0
합계



예술 경기의 규칙은 대회마다 일부 차이가 있었으나, 핵심 원칙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출품된 모든 작품은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아야 했고, 경연대회 전에 발표되지 않은 독창적인 작품이어야 했다. 일반 스포츠 종목처럼 상위 입상자에게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되었지만, 모든 종목에서 메달이 전부 수여되지는 않았으며, 일부 종목에서는 메달 수상자가 전혀 나오지 않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여러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대회에 따라 최대 출품 수가 제한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 예술가가 한 대회에서 여러 개의 상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고대 올림픽이 신을 기리는 종교적 성격을 띠었던 것처럼,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육체와 정신의 향상"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예술 경기를 올림픽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1948년 런던 올림픽까지 총 7번의 대회에서 예술 경기가 정식 종목으로 실시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폴란드의 시인 카지미에시 비에르진스키(Kazimierz Wierzyński)가 문학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영예를 안았다.

과거 무용, 영화, 사진, 연극 등을 예술 경기에 포함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이들 예술 형식은 올림픽 메달 종목으로 채택된 적이 없다. 다만, 브레이크댄스는 2024년 파리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포함되었다.[2]

3. 1. 건축



건축은 1912년부터 1924년까지 올림픽 예술 경기의 한 부문으로 포함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기존의 건축 부문이 '건축 설계'로 명칭이 바뀌고, '도시 계획' 부문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그러나 세부 분야 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일부 작품은 두 부문 모두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건축 부문의 출품작은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올림픽 개최 전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네덜란드의 건축가 얀 빌스(Jan Wils)는 1928년 하계 올림픽 당시 실제로 사용된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의 설계도로 건축 설계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다.

3. 2. 문학

문학 경기는 초기 대회부터 포함되었으며, 시기별로 세부 부문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 1912년, 1920년, 1924년, 그리고 1932년 대회에서는 단일 문학 부문으로 경기가 치러졌다.

1928년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세부 부문이 도입되어, Dramatic works|극시eng, Epic works|서사시eng, Lyric works|서정시eng의 세 분야로 나뉘어 시상이 이루어졌다. 이후 1936년과 1948년 대회에서도 이 세 부문(극시, 서사시, 서정시)으로 나누어 경쟁이 진행되었다.

출품작에는 몇 가지 규정이 있었다. 작품 길이는 20,000단어를 넘지 않아야 했으며, 어떤 언어로든 제출이 가능했다. 다만, 영어프랑스어로 된 번역본이나 요약본을 함께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규정은 대회마다 조금씩 달랐다.

3. 3. 음악

올림픽 예술 경기의 음악 부문은 대회마다 종목 구성이 변화해왔다. 초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1924년 파리 올림픽,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단일 '음악' 종목으로 메달을 수여했다.

이후 종목이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오케스트라, 노래, 독주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오케스트라, 기악, 독창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예술 경기가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합창/관현악, 기악/실내악, 성악 부문으로 조정되었다.

음악 부문의 심사는 주로 제출된 악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실제 연주 없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심사의 어려움과 객관성 문제로 인해 메달 수여가 보류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1924년 음악 부문과 1936년 기악 부문에서는 어떠한 메달도 수여되지 않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음악 부문 수상작이 관중 앞에서 실제로 연주된 유일한 대회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음악 부문에서 메달을 획득한 유명 음악가로는 1932년에 V nový život|프노비 지보트cs('조국을 향하여')라는 행진곡으로 은메달을 수상한 체코의 작곡가 요세프 수크와, 1948년 합창 및 관현악 부문에서 Divertimento for Solo Flute and Strings|디베르티멘토 포 솔로 플루트 앤 스트링스영어('알버타를 위한 디베르티멘토')로 은메달을 받은 캐나다의 작곡가 존 와인즈웨이그가 있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 경기는 객관적인 채점의 어려움, 프로 예술가들의 참가로 인한 아마추어리즘 논란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4] 결국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1952년 헬싱키 올림픽부터 예술 경기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채점의 객관성 문제는 오늘날에도 피겨 스케이팅이나 아티스틱 수영과 같이 예술적 요소가 평가되는 스포츠 종목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4]

3. 4. 회화



1912년부터 1924년까지 올림픽 예술 경기의 회화 부문은 단일 부문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드로잉, 그래픽 아트, 회화의 세 가지 하위 부문으로 나누어졌다.

이후 올림픽 대회마다 회화 관련 부문은 계속 변화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회화, 판화, 그리고 수채화와 드로잉을 합친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판화 부문이 없어지고, 대신 그래픽 아트와 광고 그래픽 부문이 신설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술 경기가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응용미술공예, 조각/에칭, 그리고 유화/수채화의 세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장 자코비는 올림픽 예술 경기 역사상 유일하게 금메달 2개를 획득한 예술가이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 회화 부문에서 ''축구 연구 (Étude de Sport)''로 금메달을 땄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드로잉 부문에서 ''럭비 (Rugby)'' 작품으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회화 부문을 포함한 예술 경기는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1952년 헬싱키 올림픽부터 폐지되었다. 작품 운송의 어려움, 객관적인 채점 기준의 부재로 인한 자의적 판정 논란, 참가자 대부분이 프로 예술가였다는 점, 작품 판매가 아마추어 정신에 어긋난다는 비판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4]. 특히 채점의 공정성 문제는 오늘날 올림픽의 피겨 스케이팅이나 아티스틱 수영과 같은 예술적 요소가 중요한 종목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근대 올림픽이 점차 순수한 스포츠 경쟁의 장으로 변화하면서 예술 경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3. 5. 조각

조각 부문은 초기 올림픽 예술 경기의 주요 분야 중 하나였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1924년 파리 올림픽까지는 단일 종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는 변화가 생겨, 기존의 단일 조각 부문이 세분화되었다. 이때부터 조각상 부문과 부조, 메달 부문으로 나뉘어 별도의 경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부조와 메달 부문이 각각 독립적인 부문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세분화되었다. 조각 관련 부문은 1948년 런던 올림픽까지 개최되었다.

4. 주요 참가 선수

올림픽 예술 경기 메달리스트 중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예술가는 드물지만, 여러 대회에 걸쳐 꾸준히 성과를 낸 선수들이 있다.

스위스의 예술가 알렉스 디겔만은 세 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포스터 ''Arosa I Placard''로 금메달을 땄으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응용 미술 및 공예 부문에서 상업용 포스터로 은메달과 동메달을 모두 수상했다. 덴마크의 작가 요제프 페테르센 역시 1924년 파리 올림픽,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48년 런던 올림픽 세 차례에 걸쳐 문학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한편, 1948년 런던 올림픽 조각 및 에칭 대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영국의 존 코플리는 당시 73세로, 이는 역대 최고령 올림픽 메달리스트 기록이다. 이는 예술 경기를 제외한 다른 종목의 최고령 메달리스트인 스웨덴의 사격 선수 오스카 스완(72세)보다도 많은 나이였다.

4. 1. 2관왕: 장 자코비

메달 획득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룩셈부르크의 화가 장 자코비가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1924년 하계 올림픽에서 자신의 그림 ''Étude de Sport''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드로잉 작품 ''럭비''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그는 올림픽 예술 부문에서 두 차례나 정상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4. 2. 스포츠와 예술 모두에서 메달 획득: 알프레드 하요시, 월터 W. 위난스

알프레드 하요시는 스포츠와 예술 경기 모두에서 메달을 획득한 두 명의 올림픽 선수 중 한 명이다


스포츠와 예술 경기 모두에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영국에 거주한 미국인 월터 W. 위난스는 1908년 하계 올림픽에서 러닝 디어(더블 샷) 경기에서 사격 선수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12년에는 러닝 디어 단체전에서 또 다른 사격 메달(이번에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자신의 조각품 ''An American trotter''로 조각 부문 금메달을 획득한 상태였다. 두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또 다른 올림픽 선수는 헝가리의 알프레드 하요시이다. 그는 수영 선수로서 189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28년 후, 그는 데죄 라우버와 공동 설계한 자신의 경기장 디자인으로 건축 부문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4. 3. IOC 위원장: 피에르 드 쿠베르탱, 에이버리 브런디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 중에서도 올림픽 예술 경기에 직접 참여한 사례가 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이자 IOC 위원장이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예술 경연에 참가했다. 그는 "조르주 호호드와 마르탱 에슈바흐"(Georges Hohrod et Martin Eschbachfra)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스포츠 예찬''(Ode au Sportfra)이라는 시를 문학 부문에 출품하였고, 이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훗날 IOC 위원장(1952년~1972년)을 지낸 에이버리 브런디지 역시 올림픽과 인연이 깊다. 그는 1912년 올림픽에 육상 선수로 직접 참가했으며, 이후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예술 경연 문학 부문에 작품을 출품했다. 특히 1932년에는 출품작으로 명예상(Honorable Mention)을 받기도 했다.

5. 대한민국의 참가

올림픽 예술 경기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1948년 런던 올림픽까지 총 7번의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실시되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일제강점기였으며,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예술 경기에는 일본 선수단이 참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일본은 "대일본체육예술협회"를 통해 참가자를 선발했으며, 해당 기록에는 다수의 일본인 참가자와 작품이 명시되어 있다.[5]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서는 해당 대회 예술 경기에 조선 출신 선수가 개인 자격 또는 일본 선수단 소속으로 참가했다는 명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5. 1.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두 차례에 걸쳐 예술 종목에 참가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대일본체육예술협회"(현재의 일본스포츠예술협회)가 일반 스포츠의 국내 경기 단체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며 작품 공모 및 국내 예선을 담당했다.[5][6]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는 총 41명의 일본 선수가 46개의 작품을 출품했다. 분야별로는 회화(일본화, 서양화, 판화) 33점, 조형 10점, 건축 3점이었다. 주요 참가자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출품작'''
분야세부 분야참가자작품명비고
건축해외 부문고바야시 마사카즈"수영장(진구 수영장)", "야구장(진구 구장)"입선 외
이시하라 겐지"국제 문화 도시"입선 외
회화서양화고스기 호안"럭비의 한 구도"[5][7]입선 외
판화나가나가 요시하루"벌레 씨름"가작
후카자와 소이치"메이지 신궁 야구장 조케이센의 날 [쇼와 6년]"입선 외
무나카타 시코"워밍업", "경마"입선 외
가와카미 스미오"야구 대회의 그림"입선 외
마에카와 지호"럭비" [8]입선 외
온치 고시로"순간" [9]입선 외
가네야마 헤이조"얼음 미끄럼"입선 외
야마구치 스스무"동궁기념을 가진 오다 간오 씨상"입선 외
가와니시 히데"고시엔 야구 대회 입장식의 그림", "고베 동유원지 축구"입선 외
기타 출품자에노모토 지카토시
이케베 쥰
고즈 고진
미나미 겐조
조형-히나코 미쓰조"럭비"입선 외 (오이타 현립 미술관 소장)[10]
하세가와 요시키"원반 던지기"[11]입선 외
기타무라 세이보"The Repose"(복싱)입선 외
기타 출품자후지이 고스케
다케이 나오야


5. 2.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일본에서 총 68명의 선수가 84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분야별로는 회화(일본화, 서양화, 판화 포함) 63점, 조형(공예 2점 포함) 11점, 건축 5점, 음악 5점이었다.[5][12]

  • '''건축 종목'''
  • * 우치다 쇼조: "수영장", "구장" (선외)
  • * 기시다 히데토: "일본의 골프"(클럽하우스)[13] (선외)
  • * 이시카와 준이치로: "야구탑", "야구탑 설계도" (선외)

  • '''회화 종목'''
  • * 회화 부문
  • ** 가토 에이조: "수영" (선외)
  • ** 야마다 신고: "낚시" (선외)

* 후지타 류지: "빙상 하키(아이스하키)" - 유채 부문 동메달** 수상. 작품은 나치에 의해 매입된 후 행방불명되었으나, 후에 복각되었다.[5]

  • ** 히가시야마 신키치(가이이): "소년 빙주"(스케이트)[5] (선외)

* 스즈키 슈자쿠: "고전적 경마" - 수채 부문 동메달** 수상.

  • ** 다카다 리키조: "두 개의 후오르무" (선외)
  • ** 나카무라 다쿠지: "나기나타" (선외)
  • ** 구라타 사부로: "드리블 전"[14] - 유채 부문 선외 (다마신 지역 문화 재단 소장)
  • ** 에비하라 기노스케: "파티나쥬" (선외)
  • * 판화 부문
  • ** 이시이 쓰루조: "수영", "우중 경쟁" (선외)
  • ** 이노쿠마 겐이치로: "사격" (선외)
  • ** 하사마 이노스케: "야구" (선외)
  • ** 와키타 가즈: "올림픽의 경치" (선외)
  • ** 가와카미 스미오: "촌동 야구희의 그림" (선외)
  • ** 무나카타 시코: "시민 체조"(체조), "합동 경쟁"(장거리 달리기)[5] (선외)
  • ** 야마구치 스스무: "철퇴 투"[10] (선외, 스자카 판화 미술관 소장)
  • ** 마에카와 지호: "지얌프"(멀리뛰기) (선외)
  • ** 후카자와 소이치: "태클", "씨름" (선외)
  • ** 고이소 료헤이: "학생 씨름" (2작품, 선외)
  • ** 고바야시 아사지: "스케이트"[10] (선외, 스자카 판화 미술관 소장)
  • ** 사토 게이: "스키" (선외)

  • '''조형 종목'''
  • * 조소 부문
  • ** 하세가와 요시키: "요코즈나 양상"[15] (선외), "국기(누르면 눌러라)[10]" (가작), "골프" (선외)
  • ** 이케다 유하치: "출발 지점으로"[16] (선외)
  • ** 하타 쇼키치: "출발"[17] (선외, 지치부노미야 기념 스포츠 박물관 소장)[10]
  • ** 히나코 미쓰조: "나무 연습자", "유메아케바" (선외)
  • * 공예(Relief) 부문
  • ** 하세가와 요시키: "칸막이" (선외)

  • '''음악 종목 (작곡)'''
  • * 에분야: "타이완의 무곡"[18] (선외 가작)
  • * 야마다 고사쿠: "육군 행진곡"[18] (선외)
  • * 모로이 사부로: "올림픽으로부터의 3개의 단편"[18] (선외)
  • * 미사쿠 아키요시: "건강한 여름"[18] (선외)
  • * 이토 노보루: "스포츠 닛폰"[18] (선외)

6. 올림픽 예술 경기의 유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이후에는 올림픽 정신에 따라 경기가 아닌 문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예술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올림픽 헌장에도 규정되어 있다.

6. 1. 1964년 도쿄 올림픽 예술 전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이후에는 올림픽 정신에 따라 경기가 아닌 문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예술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올림픽 헌장에도 규정되어 있다.

1964년에 개최된 올림픽 도쿄 대회에서는 "예술 전시"로 다음과 같은 부문의 기획이 이루어졌다.

  • A 미술 부문: 고미술, 근대 미술, 사진, 스포츠 우편 엽서
  • B 예능 부문: 가부키, 인형 조루리, 아악, 노가쿠, 고전 무용·방악, 민속 예능


이러한 일본 고유의 예술 외에도 현대 미술, 연극, 클래식 음악 등의 분야의 기획이 "협찬 예술 전시"로 실시되었다[19]。이 중 클래식 음악에 해당하는 NHK 교향악단 연주회는 다음과 같다[20]

날짜장소지휘자프로그램
1964년 10월 10일도쿄 문화 회관이와키 히로유키베토벤: 서곡 레오노레 제3번, 마유즈미 도시로: 음악의 탄생, 브람스: 교향곡 제2번
1964년 10월 15일도쿄 문화 회관와카스기 히로시라모: 발레 모음곡 카스토르와 폴룩스에서, 이리노 요시로: 교향곡 제2번,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1964년 10월 19일도쿄 문화 회관이와키 히로유키다케미츠 도루: 아치 제2부 텍스처, 스트라빈스키: 발레 모음곡 불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1964년 10월 23일도쿄 문화 회관토야마 유조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미요시 아키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파야: 발레 모음곡 삼각모자 제2부


7. 역대 메달 집계

1952년, 예술 경연 메달은 공식적인 국가 메달 집계에서 제외되었다.[3]

아래는 1912년부터 1948년까지 올림픽 예술 경연에 참가하여 메달을 획득한 국가들의 메달 집계이다.

1912년 ~ 1948년 올림픽 예술 경연 메달 집계
순위국가합계
1독일 (GER)77923
2이탈리아 (ITA)57214
3프랑스 (FRA)54514
4미국 (USA)4509
5영국 (GBR)3519
6오스트리아 (AUT)3339
7폴란드 (POL)3238
8핀란드 (FIN)3115
9스위스 (SUI)2417
10벨기에 (BEL)2158
11네덜란드 (NED)2136
12룩셈부르크 (LUX)2103
13스웨덴 (SWE)2024
14헝가리 (HUN)1214
15그리스 (GRE)1001
16덴마크 (DEN)0549
17아일랜드 (IRL)0123
17체코슬로바키아 (TCH)0123
19캐나다 (CAN)0112
19남아프리카 연방 (RSA)0112
21노르웨이 (NOR)0101
22일본 (JPN)0022
23모나코 (MON)0011


8. 올림픽별 메달리스트


  • 스톡홀름 1912 (5개 부문)
  • 안트베르펜 1920 (5개 부문)
  • 파리 1924 (5개 부문)
  • 암스테르담 1928 (13개 부문)
  • 로스앤젤레스 1932 (9개 부문)
  • 베를린 1936 (15개 부문)
  • 런던 1948 (14개 부문)


올림픽 예술 종목은 스톡홀름 1912부터 런던 1948까지 총 7번의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실시되었다. 암스테르담 1928의 우승자 중 한 명은 폴란드의 시인 카지미에시 비에르진스키(Kazimierz Wierzyński|카지미에시 비에르진스키pol)였다.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la84found[...] 2012-07-01
[2] 웹사이트 Breakdancing, surfing among four sports to win Paris 2024 Olympics spots https://www.france24[...] 2020-12-07
[3] 웹사이트 ABC TV's The Art Of explores the surprising history of art competitions at the Olympics https://www.abc.net.[...] 2024-07-31
[4] 웹사이트 オリンピックを振り返る:アートで競う「芸術の祭典」 https://olympics.com[...] Olympics.com 2023-12-13
[5] 웹사이트 ミューズとオリンピックの美術【オリンピック・パラリンピックのレガシー】 https://www.ssf.or.j[...]
[6] 웹사이트 Art Competitions at the 1932 Summer Olympics https://www.olympedi[...] 2022-08-07
[7] 웹사이트 年譜 https://www.khmoan.j[...]
[8] 웹사이트 前川千帆 https://gakaogikubo.[...]
[9] 웹사이트 恩地孝四郎年譜 https://www.multi-rh[...]
[10] 웹사이트 【インタビュー】2020東京オリンピックは芸術の祭典?! https://www.nichibun[...]
[11] 웹사이트 長谷川義起 https://www.tobunken[...]
[12] 웹사이트 オリンピツク芸術競技参加 https://www.tobunken[...]
[13] 웹사이트 1936年ベルリンオリンピック芸術競技に出品された日本のクラブハウス建築 https://design-photo[...] 2021-05-06
[14] 웹사이트 所蔵品展 お気に入りをさがして https://tamashin.sak[...]
[15] 웹사이트 芸術競技 http://www.sportsart[...]
[16] 웹사이트 池田勇八 https://www.tobunken[...]
[17] 웹사이트 学習院女子大学が11月23日まで展覧会「ゴールするランナーたち オリンピックと芸術」を開催中 -- 最終日には有森裕子氏のトークショーも https://digitalpr.jp[...] 2021-04-25
[18] 간행물 日本近代音楽館レクチャーコンサートシリーズVIII「オリンピックと音楽」プログラムパンフレット 2019-12-14
[19] 웹사이트 柴田葵「東京オリンピック芸術展示にみる対外文化戦略」 http://aoishibata.la[...] 2020-11-07
[20] 간행물 オリンピック東京大会協賛芸術展示 NHK交響楽団特別演奏会」プログラム
[2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Olympic Movement http://books.googl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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