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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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은 1945년 8월 24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한 직후,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우키시마 호가 일본 마이즈루 항 인근에서 침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침몰 원인에 대해 일본 정부는 기뢰 충돌을, 한국에서는 일본군의 고의적인 폭침 의혹을 제기하며 진실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사과 및 배상을 거부했으며, 한국에서는 진상 규명과 추모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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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 |
---|---|
사건 개요 | |
이름 | 浮島丸事件 (우키시마마루 사건) |
공식 명칭 | (공식 명칭 없음) |
발생 위치 |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시모사바카에서 300m 떨어진 마이즈루만 해역 |
발생 날짜 | 1945년 8월 24일 |
발생 시간 | 17시 20분경 |
사건 유형 | 촉뢰, 침몰 |
원인 | |
원인 | 미상 |
피해 | |
사망자 수 | 공식: 549명 (승선자 524명, 승무원 25명) 비공식: 약 5,000명 |
관련 정보 | |
관련 단체 | 유족회 피해자 모임 |
2. 사건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일본은 미군의 기아 작전으로 인해 심각한 해상 봉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군은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11,000여 개의 기뢰를 부설했으며, 여기에는 자기 기뢰, 음향 기뢰 등 다양한 종류가 포함되었다. 일본 해군은 소해 작업을 펼쳤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670척 이상의 함선이 격침되었다. 종전 당시에도 약 6,600개의 기뢰가 남아 있었다.
마이즈루 항은 마이즈루 진수부가 설치된 동해 쪽 주요 군항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격 목표였고, 다수의 기뢰가 부설되어 있었다.
2. 1.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을 당해 일본 본토, 사할린, 남양 군도, 쿠릴 열도 등지로 끌려가 탄광, 광산, 군수 공장, 토목 공사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50]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강제 동원으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강제 이송되어 강제 노역을 하였다.[51][52]2. 2.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조선인 귀환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을 당해 일본 본토 등으로 끌려가 중노동에 투입되었다.[50]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전선이었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항복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겪고 나서야 항복하였다. 결국 일본 제국은 1945년 8월 14일에 항복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하고, 8월 15일 낮 12시에 쇼와 천황이 연합국이 내민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그러나 일본 제국은 전쟁 당시 강제징용 및 강제동원하여 일본 본토에 끌고 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귀국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53] 오히려 이러한 증거를 없애고자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4]
그 당시 대략 200만 명 정도의 재일 조선인들은 고국 조선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일본 본토에서 조선 반도로 가기 위해서는 선박을 타서 귀환해야 했으며, 귀환 항구는 규슈[九州]의 하카타[博多], 모지[門司], 사세보[佐世保], 야마구치[山口] 현의 센자키[仙崎], 교토[京都] 부의 마이즈루[舞鶴], 홋카이도[北海道]의 하코다테[函館] 항구가 전부였다.[55]
3. 우키시마호의 항해
우키시마 호는 원래 오사카 상선의 여객 화물선이었으나, 일본 해군에 징용되어 군수 물자 및 인력 수송에 사용되었다.[10] 1941년 9월경 포함으로 개조되어 감시선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4월에는 모항을 요코하마 항에서 오미나토 항으로 옮겨 지시마 열도 남부의 장병 본토 수송 등에 종사했다.[10] 종전 당시에는 청함연락선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종전 후, 8월 18일 오미나토에 귀항한 우키시마 호는 소집 해제와 복원을 기대하고 있었다.[10] 그러나 오미나토 경비부의 요청으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부산으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10] 이는 일본에 징용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귀국을 요구하며 소란을 일으킨 것을 배경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인 귀국을 위한 첫 번째 지령을 내리기 13일 전의 일이었다.[10] 당시 오미나토에서는 해군 장교들 사이에 "장교들은 호주 부근으로 쫓겨난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 있었고, 오미나토 경비부는 조선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빨리 조선반도로 귀환시키려 했다.[10]
당시 오미나토 경비부 사령 장관은 도쿄 출장으로 부재중이었고, 주석 참모인 나가타 시게모토 대좌가 책임자였다.[7] 출항을 꺼리는 우키시마 호를 출항시키는 작업은 시미즈 요시하루 기관 참모와 오쿠마 통신 참모가 담당했다.[7] 1977년 NHK 다큐멘터리에서 시미즈 참모는 조선인을 빨리 귀환시켜 주고 싶다는 인도적인 이유를, 우키시마 호 기관장은 함장이 주요 승무원에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7]
8월 19일, 경비부에서 함장에게 출항 명령이 내려졌지만, 대부분의 병사와 하사관들은 이에 반대했다.[17] 함장은 출항 곤란을 전했지만, 두 참모는 천황 명령이라며 병사들을 설득하라고 압박했다.[17] 시미즈 참모는 반대하던 키모토 요이치 상등병조를 설득했고, 총원 집회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자 군도를 뽑아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라, 베어 버리겠다"라고 위협하여 침묵시켰다.[17]
결국 우키시마 호는 8월 22일 오후 10시경, 일본 측 발표에 따르면 3,725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오미나토를 출항하여 부산항으로 향했다.[10] 그러나 승무원 중에는 조선인 승선자가 6천 명 정도였을 것이라는 증언도 있으며, 편승자를 더 태웠다는 추측도 있다.[10] 우키시마 호에는 대포, 고사포, 기총 등의 무기와 탄약류가 그대로 실려 있었고, 패전으로 인해 중요 서류는 불태워졌기 때문에 기뢰 부설 장소를 나타내는 기밀 해도 없이 일반 해도만으로 출항했을 가능성이 높다.[10]
3. 1. 오미나토항 출항과 목적지 변경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정 오미나토 항에서 우키시마 호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10] 그러나 항해 도중 교토부 마이즈루 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하였다.[10]3. 2. 마이즈루항으로의 기항과 의문점
1945년, 미군은 기아 작전을 통해 일본 해상 봉쇄를 목적으로 약 11,000기의 기뢰를 일본 연안에 부설하였다. 이 기뢰들은 선박의 자기, 음향, 수압 변화 등에 반응하는 복합적인 작동 방식을 가졌으며, 소해를 어렵게 하기 위해 첫 번째 반응에는 작동하지 않는 회수 기뢰도 포함되어 있었다.[10] 당시 마이즈루 항은 마이즈루 진수부가 위치한 주요 군항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기뢰가 부설된 공격 목표 중 하나였다.일본 정부는 우키시마 호의 침몰 원인이 기뢰라고 주장하며, 이는 당시 함장이었던 도리우미 함장의 보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10] 그러나, 우키시마 호가 오미나토에서 마이즈루로 갑작스럽게 기항한 것은 충분한 사전 연락 없이 이루어졌고, 마이즈루 항 내 소해정의 지원 없이 항구에 진입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이로 인해 해저에 부설된 기뢰가 작동하여 폭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20]
대부분의 증언에 따르면 2~3회 정도의 폭발이 있었으며, 기뢰 폭발로 인해 선체에 균열이 생겨 침몰에 이르렀다는 추측이 있다.[10] 그러나 기뢰 폭발 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는 증언과, 인양된 선체 일부의 균열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해 있었다는 점은 폭파·자침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김찬정은 그의 저서에서 우키시마 호의 사기가 저하되어 일부 승무원들이 부산행을 거부하는 등 항명 행위가 있었고, 부산 왕복 중 괴롭힘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하사관들이 마이즈루 항 근처에서 배를 폭파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한, 조선인들은 군사 기밀 유지를 위해 몰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우키시마 호가 자폭될 것이라는 소문이 출항 전부터 있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본인 승무원 사망자 25명 중 11명이 기관부에 있었다는 점은 기관부가 의도적인 공격 목표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관장이었던 노자와 타다오 전 소좌는 김찬정과의 인터뷰에서 엔진 등의 중요 부분을 고장 낼 것을 논의했다고 증언했다.
일본 정부가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침몰 선체가 오랫동안 방치된 채 유해 회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4. 침몰과 피해
1945년 8월 24일,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우키시마 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했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4. 1. 침몰 원인에 대한 논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8월 22일, 우키시마마루호는 한국인들을 태우고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중, 8월 24일 갑자기 방향을 교토부 마이즈루항으로 틀어 항해하던 중 폭발하여 침몰했다.공식 발표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망자가 5,000명이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
우키시마 호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연합군이 일본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충돌하여 침몰하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이 강제 징용등 전쟁 범죄에 관련된 조선인들의 증인 제거를 위해 고의로 폭침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59]
한일기본조약에서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에 대한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제2조 1항을 근거로 모든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4. 1. 1. 기뢰설 (일본 정부 주장)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 호가 마이즈루 항 주변에 연합군이 부설한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입장이다.[7][10][21][25][26][27][36]1945년, 미국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는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기아 작전을 실시, 일본 해안에 약 11,00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7] 마이즈루 진수부가 있던 마이즈루 항은 동해쪽 주요 군항이었으므로, 자기 기뢰와 음향 기뢰를 이용한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7]
4. 1. 2. 폭침설 (한국 측 주장)
한국에서는 일본군이 강제 징용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우키시마호를 고의로 폭침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59] 무쓰시에 거주하는 교사 그룹이 오미나토 항을 중심으로 생존자들을 인터뷰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러한 의혹이 제기되었다.[28]4. 2. 희생자 수와 불확실성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항복을 선언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8월 22일 밤 10시, 우키시마마루호는 한국인 7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8월 24일, 배는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부 마이즈루항으로 기항하던 중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10]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고 당시 한국인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총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존재한다.
5. 사건 이후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은 일본에서 발생한 큰 해난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룬 사전이나 연표가 적어 역사 속에 묻힐 위기에 처했다. 우키시마 마루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는 1990년부터 주요 출판사에 사건 게재를 요청했다. 그 결과, 이와나미 서점의 『근대 일본 종합 연표』(1991년 2월 간행)와 치쿠마 서방의 『연표 일본 역사』 제6권(1992년 1월 간행 예정)에 사건이 게재되었다.[29]
5. 1. 일본 정부의 은폐 의혹과 자료 제출 거부
대한민국 정부는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일본 정부에 여러 차례 자료와 정보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자료 또한 침몰 당시 같이 소실되었다고 답변했다.[60]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을 낳았다.5. 2. 일본 법원의 판결과 한계
우키시마호 사건의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법원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29] 이는 일본 사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5. 3. 진상 규명 노력과 과제
대한민국 정부는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일본 정부에 여러 차례 자료와 정보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자료 또한 침몰 당시 같이 소실되었다는 답변만 반복했다.[60]그러던 중 2014년 일본의 한 프리랜서 기자의 요청으로 일본 외무성에 보존되어 있던 우키시마 호 탑승자가 8천여 명이 넘었다는 공식 문서가 공개되었다.[61] 2019년에는 우키시마 호 출항 전 일본 승조원들이 조선인 때문에 생명을 바칠 수 없다며 위험 구역 항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일본 해군 참모장이 의무 수행을 강요했다는 내용의 연합군 조사 보고서가 공개되기도 했다.[62]
1992년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인정하여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엔 (한화 3000만 원)의 위로금 지급을 판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 요청을 기각했고,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이 판결마저 번복되어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2024년 현재까지도 사건의 진상 조사나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및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편,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은 역사 속에 묻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사건을 다룬 사전이나 연표가 적었기 때문에, 우키시마 마루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가 1990년부터 주요 출판사에 게재를 요청했다. 그 결과, 이와나미 서점의 『근대 일본 종합 연표』(1991년 2월 간행)와 치쿠마 서방의 『연표 일본 역사』 제6권(1992년 1월 간행 예정)에 사건이 게재되었다.[29]
일본 측은 오랫동안 『우키시마마루 사망자 명부』의 존재를 숨겨오다가 1954년에 처음 공개했다. 이 명부는 오미나토 해군 시설부장 명의로 작성되었으며, 일본 당국은 이 명부를 근거로 조선인 사망자 수를 524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찬정은 이 명부가 사고 발생 8일 만에 급하게 작성되었고, 책임 회피를 위해 가볍게 처리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가족이 몰살된 경우나 징용된 남성 단신 조선인 노동자 등은 사망 신고를 할 사람이 없어 명부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10]
6. 추모와 기억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은 희생자 수 면에서 전후 두 번째로 큰 해난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룬 사전이나 연표가 적어 역사 속에 묻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29] 이를 우려한 우키시마마루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는 1990년부터 주요 출판사에 사건 게재를 요청했고, 그 결과 이와나미 서점과 치쿠마 서방 등에서 간행하는 연표에 사건이 기록되기 시작했다.[29]
한편, 우키시마 호 사건 외에도 1945년 10월 7일 고베시 우오자키 해역에서 무로토마루 (355명[34]), 10월 13일 고베항 해역에서 화성환 (175명), 10월 14일 이키섬 카츠모토 해역에서 슈마루 (541명), 1948년 1월 28일 세토 내해 우시지마 해역에서 여왕환 (304명)이 침몰하는 등, 전후 38년 동안 139척의 상선이 기뢰에 의해 침몰했다. 우키시마 호 이후에도 대형 선박 5척에서만 1,924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6. 1. 한국과 일본의 추모비 건립
대한민국 부산 수미르 공원과 일본 마이즈루시 시모사바가에는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설치되었다.[57][58]6. 2. 기억과 화해를 위한 노력
적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두 번째 해난사고 참사였음에도 이를 다룬 사전이나 연표가 적다는 점에 주목하여,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을 우려한 우키시마 마루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가 1990년부터 주요 출판사에 게재를 요청했다. 그 전까지는 헤이본샤의 『대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었으나, 이와나미 서점이 1991년 2월에 간행한 『근대 일본 종합 연표』에 게재되었다. 치쿠마 서방도 1992년 1월 간행 예정인 『연표 일본 역사』 제6권에 게재하기로 결정했다[29]。사건 관계자 및 위령제 관계자의 사망이 잇따르면서 사건이 잊혀질 것이 우려되자, 오랫동안 사건을 알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우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76년 당시 마이즈루 시장이었던 사야 야스시를 회장으로 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정당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사건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기념물을 제작하는 방침으로, 제작비는 기부금과 보조금으로 충당했다. 마이즈루 시의 중학교 미술 교사들이 조각상 제작을 맡았으며, 설치 장소는 사건 현장의 해면을 바로 앞에 둔 장소가 선택되었다. 1978년 사건 당일인 8월 24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41]。
7. 관련 작품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을 다룬 영화, 다큐멘터리, 연극 등이 제작되어 사건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 영화: 아시안 블루(Asian Blue)(히로미치 호리카와일본어 감독, 1995년작), 《살아있는 령혼들(Souls Protest)》(김춘송한국어 감독,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작)
- 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서다》 3회 (KBS한국어), 《일요스페셜 우키시마호는 부산을 향하지 않았다》 3회 (KBS한국어), 《우키시마호》 (김진홍한국어 감독, 2019년 작)
- 시사교양: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부산행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SBS한국어, 2024년 1월 25일)
1995년 '평안 건도 1200년 영화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한 『에이지언 블루 우키시마마루 사콘』은 조선어 '사콘(사건)'을 소재로 한다.[42] 1993년 교토 영화 애호가 그룹이 교토 건도 1200년 기념 영화 제작을 기획,[43] 교토 출신 영화 프로듀서 이토 마사아키에게 의뢰하여 아이디어·시나리오를 공모했다.[44] 이토가 낸 안이 채택되어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는데, 건도 1200년의 다음 해가 전후 50년이라는 점을 중시했다고 한다.[20] 이토는 마이즈루만에 침몰하여 돛대만 보이는 우키시마마루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45] 제작에는 칸파가 모금되었으며, 아오모리의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조사하는 그룹도 협력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소재로 한 반전 영화로,[42] 2000년 한국, 2005년 중국에서도 상영되었다. 영화 음악은 '마리오네트'가 담당했다.[46]
정복근의 희곡 『짐(荷)』은 2012년 사카테 요지 연출로 도쿄 연극 앙상블이 상연했다.[47]
7. 1. 영화
히로미치 호리카와일본어 감독의 영화 《아시안 블루(Asian Blue)》 (1995년작)는 '평안 건도 1200년 영화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하였다. '사콘'은 조선어로 '사건'을 의미한다.[42] 1993년경부터 교토의 영화 애호가 그룹이 교토 건도 1200년 기념 기획으로 영화 제작을 기획,[43] 교토 출신 영화 프로듀서 이토 마사아키에게 의뢰하여 아이디어·시나리오를 공모했다.[44] 다수의 응모가 있었고, 이토 자신도 여러 안을 내놓았으며, 그중 이토가 낸 안 중 하나가 채택되어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44] 건도 1200년의 다음 해가 전후 50년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이 소재를 선택했다고 한다.[20] 이토는 마이즈루만에 침몰하여 돛대만 보이는 우키시마마루를 예전에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45] 제작에는 칸파가 모금되었으며, 아오모리의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그룹도 협력하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소재로 한 반전 영화이다.[42] 완성 후 교토 외에도 여러 곳에서 자주 상영되었으며, 2000년 8월에는 한국에서, 2005년 3월에는 중국에서도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마리오네트'가 담당했으며, 앨범으로 제작되어 시판되고 있다.[46]김춘송한국어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Souls Protest)》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작)
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서다》 3회
다큐멘터리 《일요스페셜 우키시마호는 부산을 향하지 않았다》 3회
다큐멘터리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9893 우키시마호]》 (김진홍한국어 감독, 2019년 작)
시사교양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부산행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 (SBS, 2024년 1월 25일)
7. 2. 다큐멘터리
- 堀川弘通|히로미치 호리카와일본어 감독의 영화 《아시안 블루(Asian Blue)》 (1995년작)
- 김춘송한국어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Souls Protest)》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작)
- KBS 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서다》 3회
- KBS 일요스페셜 《우키시마호는 부산을 향하지 않았다》 3회
- 김진홍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 (2019년작)
- SBS 시사교양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부산행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 (2024년 1월 25일)
1995년에는 '평안 건도 1200년 영화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한 『에이지언 블루 우키시마마루 사콘』(エイジアンブルー 浮島丸サコン일본어)이 있다. '사콘'은 조선어로 '사건'을 의미한다[42]. 1993년경부터 교토의 영화 애호가 그룹이 교토 건도 1200년 기념 기획으로 영화 제작을 기획[43], 교토 출신 영화 프로듀서 이토 마사아키에게 의뢰하여 아이디어·시나리오를 공모했다[44]. 다수의 응모가 있었고, 이토 자신도 여러 안을 내놓았으며, 그중 이토가 낸 안 중 하나가 채택되어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44]. 건도 1200년의 다음 해가 전후 50년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이 소재를 선택했다고 한다[20]. 이토는 마이즈루만에 침몰하여 돛대만 보이는 우키시마마루를 예전에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45]. 제작에는 칸파가 모금되었으며, 아오모리의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그룹도 협력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소재로 한 반전 영화이다[42]. 완성 후 교토 외에도 여러 곳에서 자주 상영되었으며, 2000년 8월에는 한국에서, 2005년 3월에는 중국에서도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마리오네트'가 담당했으며, 앨범으로 제작되어 시판되고 있다[46].
정복근의 희곡 『짐(荷)』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坂手洋二|사카테 요지일본어의 연출로 2012년 2~3월에 도쿄 연극 앙상블이 상연했다[47].
7. 3. 시사교양
- 영화 《아시안 블루(Asian Blue)》 (1995년작)
-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Souls Protest)》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작)
- 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서다》 3회 (KBS)
- 다큐멘터리 《일요스페셜 우키시마호는 부산을 향하지 않았다》 3회 (KBS)
- 다큐멘터리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9893 우키시마호]》 (2019년 작)
- 시사교양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부산행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 (SBS, 2024년 1월 25일)
영화로는 1995년에 '평안 건도 1200년 영화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한 『에이지언 블루 우키시마마루 사콘』이 있다. '사콘'은 조선어로 '사건'을 의미한다[42].1993년경부터 교토의 영화 애호가 그룹이 교토 건도 1200년 기념 기획으로 영화 제작을 기획[43], 교토 출신 영화 프로듀서 이토 마사아키에게 의뢰하여 아이디어·시나리오를 공모했다[44]。 다수의 응모가 있었고, 이토 자신도 여러 안을 내놓았으며, 그중 이토가 낸 안 중 하나가 채택되어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44]。 건도 1200년의 다음 해가 전후 50년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이 소재를 선택했다고 한다[20]。 이토는 마이즈루만에 침몰하여 돛대만 보이는 우키시마마루를 예전에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45]。 제작에 있어서는 칸파가 모금되었으며, 아오모리의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그룹도 협력하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소재로 한 반전 영화이다[42]。 완성 후 교토 외에도 여러 곳에서 자주 상영되었으며, 2000년 8월에는 한국에서, 2005년 3월에는 중국에서도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마리오네트'가 담당했으며, 앨범으로 제작되어 시판되고 있다[46]。
연극으로는 정복근의 희곡 『짐(荷)』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사카테 요지의 연출로 2012년 2~3월에 도쿄 연극 앙상블이 상연했다[47]。
7. 4. 연극
정복근의 희곡 『짐(荷)』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사카테 요지 연출로 2012년 2~3월에 도쿄 연극 앙상블이 상연했다.[4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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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の史実を次世代に 7月25日、舞鶴で追悼のつど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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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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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72年 犠牲者の無念忘れない 追悼集会に250人 舞鶴/京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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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社
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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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우키시마호’ 희생자 집단매장지 첫 확인…“발굴·송환 시급”"
https://news.kbs.co.[...]
韓国放送公社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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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半島出身の労働者など犠牲「浮島丸」関連名簿を韓国に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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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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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がミステリー化した元凶、日本政府が「ない」と言い続けた乗船者の名簿が見つかった 79年後に開示された資料が語る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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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の乗船者名簿、政府が保有 遺族訴訟では「不存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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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 乗船名簿を韓国に/終戦直後 朝鮮人が犠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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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爆沈の79年後、岸田首相の訪韓前日に初めて返ってきた乗船者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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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ラム】沈没78年、いまだ戻ってこれない浮島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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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国の地を踏めなかった浮島丸8000人の鎮魂…釜山港「歴史公園」が候補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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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は自爆? 調査団のもとに”状況証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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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強制連行 東北各地で実態調査始ま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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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摩も「浮島丸」掲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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試写室 ドキュメント94「検証浮島丸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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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刻も早く遺骨を遺族のもとへ/東京・祐天寺で朝鮮人戦争犠牲者追悼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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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森)むつで浮島丸追悼集会 亡くなった500人に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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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争遺産を訪ねて 70年の記憶 (7・完)大湊空襲 艦隊乗組員129人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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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人遺族ら逆転敗訴 浮島丸訴訟で大阪高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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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人被害者側の敗訴確定 浮島丸訴訟で最高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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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で賠償拒否方針 半世紀前の政府内部文書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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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日本政府の新資料発見〉当初から賠償回避を方針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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蓄音機(49年目の航跡 浮島丸を追って)
199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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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を問う市民の映画に(記者ノ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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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刻刻 浮島丸事件から5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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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演劇アンサンブル公演 第2回日韓演劇フェスティバル 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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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 下北からの報告 ⑥下北の地域文化研究所 本州最北端で文化育む 文化誌創刊、幅広い特集テーマ 生徒との約束果たす 教員時代の地域調査が原点【舞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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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 舞鶴市民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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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 郷土史家ら、新たな証言集め続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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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일제말기 강제동원의 유형과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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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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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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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역사는 한반도 전체의 고통이었다
https://www.hani.co.[...]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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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여명의 원혼은 어디로...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https://www.sisaj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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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귀환 (在日朝鮮人 歸還)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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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浮島號爆沈韓國犧牲者追慕協會) -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s://busan.grandc[...]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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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홈 < 기사본문
http://www.adinews.c[...]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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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마이즈루가 지켜 온 우키시마호 역사… 이젠 우리 정부 나서야['8000원혼' 우키시마호의 비극]
https://www.busan.co[...]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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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Vol.01] 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https://www.i815.or.[...]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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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승선명부 없다더니"..日, 기시다 방한 앞두고 제공"
https://news.ikbc.co[...]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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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폭침 우키시마호에 8천 명 탔다' 日 외무성 문서 공개
http://www.busan.com[...]
부산일보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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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단독] 발굴, 우키시마호 고의 폭침 정황…“日 승무원 출발 전 항의시위”"
http://news.kbs.co.k[...]
KBS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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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외교부, 1945년 침몰 '우키시마' 호 승선자 명부 일부 입수
https://www.kocis.go[...]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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