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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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하여 일본의 해상 수송로를 봉쇄하기 위해 미국이 실시한 대규모 기뢰 부설 작전이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B-29 폭격기를 동원하여 일본 주요 항구와 해협에 감응 기뢰를 투하했다. 이 작전으로 일본의 해상 교통이 마비되었고, 식량 및 물자 수송이 어려워져 일본 국민들의 기아를 초래했다. 기아 작전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종전 후에도 일본 주변 해역에 남겨진 기뢰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여, 일본은 해상자위대를 통해 지속적인 기뢰 제거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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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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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요 | |
명칭 | 기아 작전 |
부분 | 태평양 전쟁 |
시기 | 1945년 4월 |
장소 | 일본 영해 |
결과 | 일본 수송선단의 대부분 파괴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패배의 요인 일본 수송 능력 저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일본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체스터 니미츠 커티스 르메이 |
지휘관 2 | 오이카와 고시로 |
피해 규모 | |
교전국 1 | 항공기 15대 손실 |
교전국 2 | 선박 670척 침몰 또는 손상 (총 1,250,000톤 이상) |
관련 전투 | |
캠페인 상자 |
2. 배경
1945년 (쇼와 20년) 3월 하순, 오키나와로 연합군의 침공이 임박하면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방면과의 남방 항로는 폐쇄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남겨진 해상 수송로는 대련 등 화북과의 항로와 나진 등 한반도로 향하는 항로 외에 본토 내 항로뿐이었다. 이러한 잔존 항로에서는 본토 결전을 위한 부대·군수 물자의 본토 집결과 국민생활에 필요한 식량 및 석탄 수송이 이루어졌다. 특히, 잡곡 및 소금, 석유 대용의 곡물 유의 수입 (일본 영토, 외지로부터의 이입)이 중요시되었다.[7]
1945년 3월 27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제313 폭격 비행단 소속 160대의 B-29 폭격기를 투입하여 야간에 저고도로 기뢰를 부설했다.[34] 초기에는 자기 기뢰와 음향 기뢰가 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수압 기뢰 등 다양한 종류의 감응 기뢰가 사용되었다.[35] 기뢰 부설은 일본 주요 항구와 해협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간몬 해협, 세토 내해,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 주요 항만이 봉쇄되었다.
연합군은 일본의 해상 수송로에 대한 통상 파괴를 주로 잠수함과 항공기로 실행했다. 특히 미국 해군의 잠수함은 막대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남은 항로가 연안에 한정되면서 잠수함에 의한 공격은 어려워졌다.
이에 체스터 니미츠 원수가 이끄는 미국 해군은 일본 본토 주변 해역에 기뢰를 부설하여 해상 봉쇄를 하는 "기아 작전"을 입안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선박을 파괴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입증되었다.[3] 비용 대비 피해량 측면에서 전략 폭격과 미국의 잠수함 작전을 능가했다.[3] 헨리 H. 아놀드 장군은 이 작전을 해군 작전으로 여겼으나,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게 실행을 지시했다.
미국 육군 항공군의 제20공군 소속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격하여 부설 임무의 주력을 담당하게 되었다. 팔라우 공습 등에서 항공 기뢰 투하가 일정 성과를 거두었지만, 본 작전은 전쟁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공세 기뢰 작전이었다.[8]
당시 미국 해군이 개발한 기뢰는 Mk25 기뢰 등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센서에 반응하여 폭발하는 감응 기뢰였다. 기폭 방식의 차이에 따라 시한 자기 기폭식 M4 및 M11, 자기·음향·수압의 각종 기폭 방식의 호환성을 가진 M9, 자기·수압 병용의 A6 등으로 분류되었으며, 여러 번의 반응이 없으면 폭발하지 않는 기구를 가진 것도 있어 이러한 각종 감응 기뢰가 혼합 사용되었다. 수심 약 27 m까지의 해역에는 1000파운드급 Mk26 기뢰·Mk36 기뢰, 그보다 깊은 수심 약 46 m까지의 해역에는 2000파운드급 Mk25 기뢰가 사용되었다.[6]
이에 맞서는 일본 해군은 이식 소해구 및 오식 소해구 등으로 자기 기뢰에 대해서는 일정한 소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음향 기뢰의 일부도 발음탄으로 처리가 가능했지만, 수압 기뢰 및 저주파 음향 기뢰에 대해서는 유효한 소해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9] 해저 소해구를 끌어 기뢰를 걸어 굴리고, 수압의 변화로 우연히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정도였으며, 이것조차 해저가 평탄한 모래 지형인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11]
3. 작전
당시 미국 해군이 개발한 기뢰는 Mk25 기뢰 등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센서에 반응하여 폭발하는 감응 기뢰였다. 기폭 방식에 따라 시한 자기 기폭식, 자기·음향·수압의 각종 기폭 방식의 호환성을 가진 기뢰, 자기·수압 병용 기뢰 등으로 분류되었으며, 여러 번의 반응이 없으면 폭발하지 않는 기구를 가진 것도 있어 이러한 각종 감응 기뢰가 혼합 사용되었다. 수심 약 27m까지의 해역에는 약 453.59kg급 Mk26 기뢰·Mk36 기뢰, 그보다 깊은 수심 약 46m까지의 해역에는 약 907.18kg급 Mk25 기뢰가 사용되었다.[6]
3. 1. 작전 경과
1945년 3월 27일, 제1기 작전으로 간몬 해협 주변 및 세토 내해 서부에 기뢰 투하가 시작되었다. 제1기 작전은 오키나와 전투와 연동된 것으로, 구레 군항과 우지나 항에서 일본군의 구원 부대가 오키나와로 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11] 27일 밤에 자기 기뢰를 중심으로 약 1350개가 투하되었다. 일본 측은 간몬 해협을 2일간 통항 금지하고 소해 작업을 실시했지만, 미국군은 30일 밤에도 450개를 추가로 투하했다. 그 후 4월 12일까지 제1기 작전이 계속되어 총 246기의 B-29가 총 203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12] 이 기뢰로 인해 4월 6일까지 8척의 500총 톤급 이상 배가 침몰했고,[13] 5월 2일까지는 침몰 19척, 손상 39척에 달했다.[14]
일본 해군은 간몬 해협·쓰시마 해협의 통상 보호를 주임무로 하는 제7함대를 신설하여 소해 작업을 실시하는 동시에, 사에키 해군 항공대의 일부를 B-29 요격에 투입했다. 일본 육군도 고즈키 비행장에 방공 전투기 부대를 배치하고, 오사카시 주변에서 고사포 부대를 이주시켰다. 하지만 야간 B-29 요격은 레이더가 부족한 일본군에게는 어려웠고, 기뢰 투하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16]
5월 3일부터 12일까지 제2기 작전이 실시되었다. 공격 목표는 간몬 해협 외에도 도쿄항, 오사카항, 고베항, 나고야항 등 태평양기슭·세토 내해의 주요 항만이었다. 제2기 작전에서는 1422개의 기뢰가 사용되었으며, 그 중 약 절반을 차지하는 수압 기뢰의 투입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12] 간몬 해협은 대형 선박의 통항이 불가능해졌고, 오사카항·고베항도 사용 불능이 되었다. 소형 선박도 안전하지 않아, 간몬 해협 통과 시 평균 1/3이 침몰했다.[17] 간몬 해협의 1일 교통량은 3월에는 40척이었지만, 5월 말에는 2 - 4척으로 급감했다.[6]
5월 13일부터 6월 6일까지 제3기 작전에서는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동해 측 여러 항만이 표적이 되었다. 간몬 해협에 대한 공격도 계속되었고, 15차례 투하가 있었다. 1313개의 기뢰가 부설되었고, 극소수나마 소해 불가능한 저주파 음향 기뢰까지 사용되었다.[12] 제2기 및 제3기 작전의 영향으로 기뢰에 의한 일본 상선의 피해는 격증하여, 5월 기뢰에 의한 침몰 상선은 66척 (약 11만 총 톤)으로 잠수함이나 항공기에 의한 손해를 넘어섰다. 손상 선박도 31척 (약 10만 6천 총 톤)에 달했다.[18]
6월 7일부터는 오키나와를 기지로 하는 해군기 PB4Y-2도 참가한 제4기 작전이 시작되어, 유사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육군기에 의해 3542개,[12] 해군기에 의해 186개의 기뢰가 부설되었다.[19] 일본군은 5월 21일에 육해군 기술 운용 위원회에 기뢰 전문 부회를 설치하여 신형 감응 기뢰 소해 기술 개발에 힘썼지만, 유효한 수단을 찾지 못했다.[20]
일본군은 동중국해 경유 모지 - 화북 항로를 6월에 폐쇄하고, 동해 측 항만을 거점으로 한반도와의 항로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7월 9일부터의 제5기 작전에서는 미국군이 일본 완전 봉쇄를 목표로 이오 섬 비행장을 귀환 중계 기지로 활용, 행동 반경을 늘렸기 때문에 한반도까지 공격이 미치게 되었다.[12] 마이즈루항, 니가타항, 후나카와항, 부산항 등이 기뢰 투하를 받았고, 특히 만주로부터의 식량 반출 거점이었던 나진에 420개가 집중 투하되었다.[21] 총 3746개의 기뢰가 사용되었다.[14]
4. 결과
기아 작전으로 일본 상선 30만 톤이 침몰하고, 40만 톤이 손상되었으며, 미군의 손실은 B-29 폭격기 15대에 불과했다.[18][12] 일본의 주요 항만과 해협이 봉쇄되어 해상 교통이 마비되었다. 특히 오사카항과 고베항의 봉쇄는 일본의 하역 능력과 조선 능력을 크게 저하시켰다.[22] 고베의 경우 3월에는 320,000톤의 수송선이 오갔지만, 기아 작전 이후 7월에는 44,000톤으로 수송량이 85% 감소했다.[36]
구분 | 3월 수송량 | 7월 수송량 | 감소율 |
---|---|---|---|
고베 | 320,000톤 | 44,000톤 | 85% |
한반도와 일본 본토 간의 동해 항로가 차단되어 만주국으로부터의 식량 수송이 어려워져 일본 국민들은 기아 상태에 놓였다.[24] 이는 일본 정부가 폭동 발생을 우려할 정도였다.[24]
기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선박을 파괴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입증되었으며,[35] 일본군 각 부대가 입은 피해는 미국 전략 폭격작전과 잠수함 전역 때보다 더 컸다.[35]
5. 전후 영향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은 종전했지만, 기아 작전으로 투하된 기뢰 약 6,600개가 일본 주변 해역에 잔존하여, 전후에도 일본의 해운에 영향을 미쳤다. 우키시마마루 사건(1945년 8월 24일), 무로토마루 침몰 사고(같은 해 10월 7일), 여왕마루 침몰 사고(1948년 1월 28일) 등 민간 선박이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9] 1950년까지 기뢰에 접촉한 선박은 118척(소해 함정 포함)이었고, 그 중 55척이 침몰했다.[25]
제2복원성과 해상보안청은 구 일본 해군 함정을 이용하여 다무라 큐조 전 해군 대좌의 지휘 하에 소해 활동(항로 개척 업무)을 계속했다.[26] 1952년까지 투입된 병력은 함정 360척, 인원 1만 9,000명에 달했다.[27] 일본 해군이 방어용으로 부설했던 기뢰 약 55,000개의 처리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일본의 소해 부대는 1949년 5월 23일 소해선 "MS-27"(구 제154호 초계특무정)의 침몰을 포함하여 총 30척이 손실을 입었고, 1952년까지 순직자 78명, 부상자 200명 이상이 발생했다.[28]
일본 해상보안청의 소해 경험은 한국 전쟁 발발 후 특별 소해대가 유엔군 지휘 하에 한반도 연안에서 기뢰 제거 작업을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19]
미군으로부터 일본 당국에 기뢰는 1950년 8월까지 기능이 정지될 것이라는 구두 설명이 있었지만, 자기 기뢰에는 시한식 자멸 장치가 없어 사고는 계속되었다. 1972년 5월 26일에는 니가타항에서 준설선 해린마루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 2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하는 등 피해가 이어졌다. 1972년 당시에도 부설 해역의 7%가 미처리 상태였고, 해저 토양 속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 기뢰 5,062개가 미확인 상태였다.
21세기에도 해상자위대는 자위대법 84조의 2에 의거하여 기뢰 처리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4개의 기뢰를 처리했으며,[31] 2006년에는 소해 완료된 해역이 약 99%에 달했다.[33]
6. 평가
기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을 효과적으로 봉쇄한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비용 대비 피해량 측면에서 기아 작전은 미국의 전략 폭격과 잠수함 작전을 능가했다.[3]
일부 미국 분석가들은 전쟁 초기에 더 광범위한 공중 기뢰 부설 작전을 시작했다면 일본을 더 빨리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 일본의 기뢰 제거 작전 사령관 역시 기아 작전이 더 일찍 시작되었다면 일본의 패배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언급했다.[5]
1946년 7월 미국 전략 폭격 조사 보고서는 미국 잠수함의 효과적인 대선박 공격 노력을 육상 및 항공모함 기반의 공군력과 결합하여 상선에 더 강력한 타격을 가하고, 전쟁 초기에 더 광범위한 공중 기뢰 부설 작전을 시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일본을 굶주리게 하여 전쟁을 더 일찍 종식시켰을 것이라고 평가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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