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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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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휘는 1577년에 태어나 1644년에 사망한 조선의 문신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임진왜란 전후 사관,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시대에는 좌승지,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지지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사면된 후 외교 활동을 주로 담당하며,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 교섭을 이끌었다. 최종적으로는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장주집》이 있다.

2. 생애

2. 1. 초기 활동

1577년(선조 11년) 의정부영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으로 증 좌찬성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증 의정부영의정 윤변(尹忭)이다. 윤근수는 그의 숙부였고, 윤방, 윤흔은 그의 형이며, 윤훤은 그의 동생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후 1595년 춘추관기사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이 되었다.

2. 1. 1. 임진왜란 전후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후 1595년 춘추관기사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병조정랑으로 승진되고 이어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사서(司書), 사헌부장령(掌令), 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다시 사헌부장령, 시강원 필선을 역임하는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00년 장악원정(掌樂院正),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장령 조응문(趙應文)을 탄핵하고 북방 경비를 탄탄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정유재란 종전 후에도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군대의 철군 문제를 교섭, 타결시켰다. 이어 의인왕후의 장지 문제 선정에 참여하고 명나라의 전몰 장병 위문을 주관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 윤두수가 이홍로의 탄핵으로 홍원군으로 유배되자, 이홍로의 친지들과 친하게 지냈던 그는 이후 이홍로와 관련된 사람들과 절교하였다.

2. 2.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2. 2. 1. 광해군 조정에 참여

1609년(광해군 1년) 좌승지가 되고,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10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호패(號牌) 사용으로 민심이 혼란함을 들어 호패제에 대한 무마책과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겨울 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2월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11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고, 영녕전 이안청 영건청(永寧殿移安廳營建廳) 건립에 참여한 공로로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161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지역 유림들의 조목의 월천서원 배향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형 윤흔의 첩 서씨의 남동생 서양갑과 관련, 연좌되어 벼슬에서 쫓겨났고, 서양갑에게 군관 직위와 월급을 준 일이 문제되어 양사의 공격을 당하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인목대비 폐모론 때는 불참하였다.

2. 2. 2. 외교 활동

광해군명나라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칠 때, 강홍립 등과 함께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적극 지지하였다.

1618년(광해군 11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으나 다시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기간 중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움직임을 수시로 장계를 올려 조선 조정에 보고하였고, 염초(焰硝)를 구해서 조선조정으로 보냈다.

2. 2. 3. 인조반정 전후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환관과 결탁하여 인사권을 주무르고, 요동을 정벌하려 할 때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서인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예조참판에서 파면되고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4월 임피(臨陂)로 이배된 뒤 다시 아산 등지로 유배지가 이배되었다.

반정 초반 같은 서인 당원임에도 버림받았으나 반정 공신인 훈신들의 특별 사면 건의로 1625년 사면되었다. 그러나 계속 서인 간관들은 그를 처벌하거나 문외출송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사면된 후 1626년 용양위부호군이 되고, 그해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광해군 조정에 참여한 일로 탄핵 상소와 비난이 계속되었다. (이는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이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했는지를 보여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좌윤을 거쳐 1628년 행 부호군이 되고 찬획사에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취소되었다. 1628년 8월에는 그해의 별시과거의 시험관의 한사람으로 참관하였다. 1629년 성주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뒤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32년 행 호군, 1633년 부총관 등을 거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2. 3. 생애 후반

2. 3. 1. 외교 활동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주전론과 주화론이 나뉠 때는 주화론에 동조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1639년(인조 17년) 3월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환국할 때 가마를 타고 천천히 가서 맞이하는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인조는 이를 무마시켰으나 계속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원배되었다가, 유배지로 가던길에 석방되어 되돌아왔다.

2. 3. 2. 최후

1644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죽은 뒤 아들 윤면지(尹勉之)의 공훈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3. 저서


  • 《장주집》

4. 가족

증조부는 윤희림(尹希琳)이고, 조부는 윤변(尹忭)이다. 조모는 이씨와 현씨가 있는데, 현씨는 아버지 윤두수, 숙부 윤근수의 생모이다. 숙부 윤근수(尹根壽)의 부인은 조씨로 조안국(趙安國)의 딸이며, 슬하에 윤환(尹晥, 1556년 - ?), 윤질(尹晊), 윤명(尹㫥), 윤유(尹曘), 윤환(尹㬇), 윤민(尹旼) 등의 사촌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윤두수(尹斗壽)이고, 어머니는 황씨이다. 형님으로 윤방(尹昉)과 윤흔(尹昕, ?-?)이 있다. 윤방(尹昉)의 아들, 즉 조카는 윤신지(尹新之)와 윤이지(尹履之)이다. 윤흔(尹昕)의 아들은 윤취지(尹就之)이다. 동생으로는 윤훤(尹暄, 1573~1627)이 있고, 이복동생으로 윤오(尹旿)와 윤간(尹旰)이 있다. 부인은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아들 윤면지(尹勉之)를 두었고, 손자는 윤계(尹堦)이다. 외할아버지는 황대용(黃大用)이고, 장인은 이기명(李耆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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