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제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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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제시는 조선 시대에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지어진 시를 의미한다. 권근은 1396년 명나라에 파견되어 9월 15일, 22일, 10월 27일에 각각 시를 지었고, 명나라 황제는 이에 대한 답으로 어제시를 하사했다. 권근의 응제시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정, 조선의 역사와 지리, 명나라 체류 중의 행적을 담고 있으며, 특히 권람이 주석을 더한 《응제시주》에는 단군신화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응제시》는 1402년에 간행되었으며, 권람의 《응제시주》는 1462년에 간행되어 권씨 가문의 가보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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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제시주 | |
---|---|
응제시주 | |
유형 | 보물 |
응제시주 (지정 번호 1090) | |
소재 국가 | 대한민국 |
지정 번호 | 1090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비봉길 2-2, 삼성출판박물관 (구기동) |
제작 시기 | 조선 시대 |
비고 | 1991년 9월 30일 지정 |
응제시주 (지정 번호 1090-1) | |
소재 국가 | 대한민국 |
지정 번호 | 1090-1 |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개인 소장 (하택선) |
제작 시기 | 조선 시대 |
비고 | 2005년 7월 5일 지정 |
2. 응제시(應製詩)의 성립 배경
《응제시주》에 실린 응제시는 1396년(태조 5년) 발생한 소위 표전문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조선이 보낸 표전문의 일부 글귀가 불손하다며 문제를 삼았고, 이를 작성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표전문 윤색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건너가 황제의 의혹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권근은 명나라에서 황제가 직접 내린 시제(詩題)에 따라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응제시'이다.
2. 1. 표전문 사건
1396년(조선 태조 5)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의 글귀 중 일부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명나라 황제가 문제 삼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표전문 사건(表箋文事件)이라고 부른다. 명나라 황제는 표전문을 작성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소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표전문 문장의 윤색(潤色)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가서 조선의 입장을 해명하고 의혹을 해소했다.2. 2. 권근의 명나라 파견
1396년(태조 5년), 명나라는 조선이 보낸 표전문(表箋文)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작성자인 정도전을 소환하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위 '표전문 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표전문 윤색(潤色)에 참여했던 권근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1396년 명나라로 향하여 황제의 의혹을 해명하고자 했다.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황제의 의혹을 푸는 한편, 황제가 직접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시를 짓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응제시(應製詩)이다. 권근은 1396년 9월 15일에 8수, 9월 22일에 10수, 10월 27일에 6수, 총 24수의 시를 지어 바쳤다. 시의 내용은 주로 명나라에 오기까지의 여정, 조선의 역사와 지리, 명나라 황제의 후대에 대한 감사함 등이었다. 명나라 황제는 권근의 시에 만족하여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 3수를 하사하기도 했다.
권근이 지은 응제시는 명나라 황제의 마음을 만족시켜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비록 시의 내용이 당시 절대적 우위에 있던 명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사대주의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정도전 소환 문제 등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고 조선의 국익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황제를 칭송하는 가운데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통성과 역사적 독자성을 강조하여 민족 주체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 역시 높이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권근 개인의 문명(文名)을 국내외에 떨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 응제시의 내용 및 구성
《응제시주》는 권근이 1396년 명나라에서 지은 24수의 응제시(應製詩)와 이에 화답한 명나라 황제의 어제시(御製詩) 3수로 구성되어 있다. 권근의 응제시는 표전문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첫 번째로 1396년 9월 15일에는 <왕경작고(王京作古)> 등 8수를 지었는데, 이는 주로 조선에서 명나라 수도까지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의 감회를 다룬 내용이다. 두 번째로 9월 22일에는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를 지었으며, 조선의 역사(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고대 국가)와 지리(금강산, 대동강 등)를 주제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10월 27일에는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 6수를 지어 명나라에 머물면서 경험한 연회 등에서의 감흥을 노래했다.
권근이 총 24수의 시를 모두 지어 바치자, 명나라 황제는 이에 대한 답으로 직접 지은 어제시 3수를 권근에게 내려 주었다. 권근의 응제시는 기본적으로 황제의 명에 따라 명나라와 황제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그 속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적 독자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3. 1. 권근의 응제시
권근이 13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 태조의 명으로 지은 24수의 시를 말한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보낸 표문의 글귀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표전문 사건), 글의 윤색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명나라로 가 해명하는 과정에서 이 시들을 짓게 되었다. 명 태조는 권근에게 시제를 내주었고, 권근은 세 차례에 걸쳐 총 24수의 시를 지어 바쳤다. 이에 명 태조는 어제시(御製詩) 3수를 지어 권근에게 내려주었다.권근의 응제시는 다음과 같이 세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 1396년 9월 15일 (8수): <왕경작고(王京作古)> 등 8수. 주로 조선에서 명나라 수도까지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의 감회를 다루었다.
- 1396년 9월 22일 (10수):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 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조선의 역사와 금강산, 대동강 등 지리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 1396년 10월 27일 (6수):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 6수. 명나라에 머물면서 경험한 연회 등에서의 감흥을 노래했다.
응제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지어졌기에, 명나라와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6수는 명나라의 후한 대접과 번화한 문물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대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처한 외교적 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권근의 응제시는 명 태조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표전문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키려는 외교적 노력이 담긴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명나라를 칭송하는 가운데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역사, 문화의 독자성을 표현하려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 시들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권근 개인의 문학적 명성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 1. 1. 9월 15일 (8수)
1396년 9월 15일, 권근은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8수의 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주로 조선에서 명나라 수도까지 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으며, 대표적인 시로는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 <도경서경(道經西京)>, <도압록(渡鴨綠)> 등이 있다.이 시들은 명나라로 가는 길의 과정과 권근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표전문 사건으로 인해 문책을 받으러 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정 곳곳에서 태조 이성계의 성덕을 기리고 그 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았다. 또한 고려의 멸망, 조선 건국과 사대 관계, 사행길에 거쳐온 서경, 압록강, 요동, 바닷길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3. 1. 2. 9월 22일 (10수)
1396년 9월 22일, 권근은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두 번째로 10수의 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주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시고개벽동이주 始古開闢東夷主>를 비롯하여 진한, 마한, 변한, 신라, 탐라 등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읊은 것과, 금강산, 대동강과 같은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와 명승지를 노래한 것이 있다.명나라 황제가 이러한 주제를 제시한 것은 권근의 역사 인식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권근은 시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고대 국가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의식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는 당시 조선이 처한 외교적 상황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시들은 조선 역사의 유구함과 고유한 문화를 담아내려는 시도로도 평가받는다. 단순히 중국을 칭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의 역사와 자연을 소재로 삼아 조선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는 사대주의적 한계 속에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완전히 놓지 않으려 했던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1. 3. 10월 27일 (6수)
권근이 1396년 10월 27일에 지은 마지막 6수의 시는 명나라에 머무르는 동안의 경험과 행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시들은 주로 명 태조가 베풀어 준 연회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노래를 듣거나 광대놀이를 보고 술에 취하는 등 연회에서의 흥취와 관련된 주제가 많았다.시의 주제 설정 자체가 명나라의 환대와 문물에 대한 칭송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시의 내용 역시 이러한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권근은 시를 통해 명나라의 후한 대접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고, 발전된 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 이는 표전문 사건으로 인해 경색되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풀고, 조선의 국익을 도모하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내용상 사대적인 측면이 있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입장을 고려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3. 2. 명 황제의 어제시
권근은 1396년 표전문 사건의 책임을 지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는 명나라 홍무제가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총 24수의 응제시를 3차례에 걸쳐 지어 바쳤다. 이후 홍무제는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 3수를 권근에게 내려 주었다.4. 응제시주(應製詩註)의 내용
《응제시주》는 권근이 지은 응제시(應製詩)와 그에 대한 주석을 모아 엮은 1책의 목판본이다.
응제시는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발생한 표전문 사건과 관련이 깊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보낸 표문과 전문의 글귀 중 일부 표현이 불손하다며 문제를 삼았고, 글을 지은 정도전 등을 명나라로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글의 윤색(潤色)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가서 사건의 해명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권근은 명나라 황제가 직접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총 24수의 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응제시이다. 이에 명 황제도 친히 지은 시인 어제시(御製詩) 3수를 권근에게 내려주며 화답했다.
권근의 응제시는 표면적으로 명나라 황제와 중국의 문물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명나라에 대한 칭송 속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적 독자성을 은연중에 드러내어 민족의 주체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응제시는 권근 개인의 문학적 명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 1. 권람의 주석
권근이 지은 응제시(應製詩)는 1396년(조선 태조 5년) 명나라에서 지어 올린 24수의 시를 말한다.[1] 당시 조선이 명에 보낸 표전(表箋)의 문구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명 태조 홍무제가 글을 지은 정도전 등을 소환하려 한 표전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글의 윤색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가 의혹을 해명했다.[1]이 과정에서 명 황제가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권근은 세 차례에 걸쳐 총 24수의 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를 응제시라고 부른다.[1]
- 1차 (1396년 9월 15일, 8수): <왕경작고(王京作古)>,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 <도경서경(道經西京)>, <도압록(渡鴨綠)> 등 조선에서 명나라 수도까지 오는 여정과 관련된 시가 대부분이다. 명나라로 오게 된 경위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면서도, 곳곳에서 조선 태조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1]
- 2차 (1396년 9월 22일, 10수):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조선의 고대 국가 역사와 <금강산>, <대동강> 등 산천과 지리에 관한 시이다. 명 황제가 권근의 역사 인식을 알아보고자 한 의도가 엿보이며, 권근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를 간략히 읊으면서도 중국과의 관계성을 부각했다.[1]
- 3차 (1396년 10월 27일, 6수):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겪은 일을 읊은 시이다. 주로 연회에서 노래를 듣거나, 광대놀이를 보거나, 술에 취했던 경험 등을 다루며, 사면을 받고 후대를 받는 것에 대한 감사와 명나라의 번화한 문물에 대한 찬양이 주된 내용이다.[1]
권근의 응제시는 명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사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당시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고 조선의 국익을 도모했으며, 권근 개인의 문명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1] 특히 중국과 명 황제의 덕을 찬양하는 가운데서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적 독자성을 강조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1]
4. 2. 단군신화 수록
《응제시주》는 권근이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지은 시와 그 주석을 모은 책이지만, 특히 권람이 주석을 달면서 인용한 단군신화가 자세히 실려 있어 주목받는다. 이는 조선 초기에 전승되던 《고기》를 바탕으로 기술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응제시주》에 실린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지만, 일부 차이점을 보여 당시 단군신화의 다양한 전승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중국에 보내는 성격의 글에 민족의 시조 신화를 담았다는 점에서, 사대적 외교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기도 한다.4. 2. 1. 권근의 주
《응제시주》에는 단군신화가 자세히 실려 있어 주목받는다. 권근은 조선 초기까지 전해 내려오던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일부 내용은 차이가 있다. 권근이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요임금 원년 무진이다.
4. 2. 2. 권람의 주
《응제시주》에는 권람이 주석을 달면서 인용한 단군신화가 자세히 실려 있어 주목받는다. 권람은 조선 초기까지 전해지던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술했는데, 이는 《삼국유사》 기록과 대부분 일치하지만 일부 차이점도 보인다.《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는 서자 환웅이 있었다. 환웅은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아버지로부터 천부인 3개와 무리 3천 명을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가 바로 환웅 천왕이다.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들과 함께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사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뛰쳐나갔으나 곰은 금기를 지켜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웅녀)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이름 지었다. 단군은 중국 신화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고조선)이라 하였다.
단군은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부루를 낳았는데, 그는 훗날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중국 신화의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아 맹약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 참석하게 했다.
단군은 하나라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가 신이 된 지 164년 후인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왕으로 봉해졌다고 《고기》는 전한다.
5. 인용 자료
권람의 《응제시주》는 수많은 책들을 참고하여 주석에 인용하였다.
5. 1. 조선 자료
권람의 《응제시주》는 수많은 책들을 참고하여 주석에 인용하였다. 그중 조선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기》(古記)
- 《도선기》(道詵記)
-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 《동명왕편》(東明王篇)
- 《제왕운기》(帝王韻紀)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고려사》(高麗史)
5. 2. 중국 자료
(내용 없음)6. 편찬 및 간행본
《응제시주》(應製詩註)는 권근(權近)이 1396년(조선 태조 5)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응제시》(應製詩) 24수와 이에 대한 주석을 합하여 편찬한 책으로, 1책의 목판본으로 전해진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가 표전문(表箋文)의 문구를 문제 삼아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었는데(소위 표전문 사건), 글의 윤색(潤色)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명나라로 가 의혹을 해명하였다.
명나라에서 권근은 명 태조가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3차례에 걸쳐 총 24수의 시, 즉 《응제시》를 지어 바쳤다. 이에 명 태조는 만족하여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 3수를 권근에게 내려주기도 하였다. 이후 이 《응제시》에 주석을 더하여 《응제시주》가 간행되었다.
6. 1. 《응제시》 간행
《응제시》는 일반적으로 임금의 명령에 따라 지은 시를 의미하지만, 권근(權近)의 《응제시》는 1396년(조선 태조 5) 명나라 황제 앞에서 직접 지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적 문제였던 표전문 사건(表箋文事件)과 관련이 깊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는 조선에서 보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의 문구가 불손하다며 문제를 삼았고, 해당 글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명나라로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표문의 윤색(潤色)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가서 사건의 해명을 맡게 되었다.권근은 명나라에 도착한 후, 명 태조가 직접 내준 시제(詩題)에 따라 총 24수의 시를 3차례에 걸쳐 지어 바쳤다. 이것이 바로 《응제시》이다.
- 1차 (1396년 9월 15일, 8수): 명나라 수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주로 다루었다.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 <도경서경(道經西京)>, <도압록(渡鴨綠)>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들에는 명나라로 향하는 과정에서의 감회와 함께, 조선 태조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2차 (1396년 9월 22일, 10수):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시제를 다루었다. <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고대 국가의 역사와 <금강산>, <대동강> 등 조선의 명승지를 노래했다. 이를 통해 조선 역사의 독자성과 유구함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 3차 (1396년 10월 27일, 6수):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겪었던 일들을 시로 표현했다. 명 태조가 베풀어 준 연회에 참석하여 노래를 듣거나 광대놀이를 본 경험, 술에 취했던 감흥 등을 읊으며 명나라의 후대에 감사하고 번화한 문물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권근의 《응제시》에 대해 명 태조는 만족감을 표하며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 3수를 권근에게 내려주었다.
《응제시》는 내용상 명나라 황제와 중국 문물을 찬양하는 등 사대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키려 했다는 점, 그리고 중국에 대한 칭송 속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 시들은 권근 개인의 문학적 명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 2. 《응제시주》 간행
《응제시주》는 1책의 목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7.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응제시주》는 권근이 1396년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갔을 때, 명 태조의 명으로 지은 24수의 시를 모은 책이다. 이 시들은 명나라 황제와 중국 문물을 칭송하는 내용이 많아 사대주의적 아첨 문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처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응제시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권근은 시를 통해 명 태조의 마음을 만족시켜 표전문 사건으로 인한 외교적 위기를 해결하고,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조선의 국익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명나라를 상대로 거둔 외교적 성과로 평가된다.
또한, 중국과 명 태조를 찬양하는 가운데에서도 조선 건국의 정통성과 합리성, 삼한과 신라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 금강산과 대동강 같은 아름다운 자연 등을 언급하며 조선의 독자성과 민족 주체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응제시주》는 사대주의라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작품이다. 더불어 이 시들은 권근 개인의 문학적 명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7. 1. 외교적 측면
《응제시주》는 권근의 중요한 외교적 활동의 산물이다. 1396년(태조 5년) 발생한 표전문 사건은 명나라 태조가 조선에서 보낸 표문의 문구를 문제 삼아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려 한 사건이었다. 표문 윤색에 참여했던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나라로 가 직접 해명에 나섰다. 이는 조선 초기의 대명 관계에서 발생한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명 태조의 요구에 따라 총 24수의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바쳤다. 이 시들은 표면적으로 명나라 황제와 중국의 문물을 칭송하고 사대의 예를 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명 태조가 베푼 연회나 하사품에 감사하는 내용 등은 사대주의적 아첨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응제시는 단순한 사대 문학으로만 평가하기 어렵다. 권근은 시 속에서 중국을 칭송하는 가운데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삼한, 신라 등 유구한 역사, 그리고 금강산, 대동강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며 조선의 독자성과 민족 주체성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이는 절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명나라를 상대로 조선의 입장을 표현한 외교적 시도로 평가된다.
결과적으로 권근의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응제시는 명 태조를 만족시켜 표전문 사건으로 인한 의혹을 해소하고, 권근 자신의 안전은 물론 조선의 국익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강력한 압박 속에서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고 국가적 위기를 넘겼다는 점에서, 《응제시주》는 단순한 시 모음집을 넘어 조선 초기 외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국익을 우선시하면서도 강대국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관리하려 했던 권근의 외교적 역량을 보여준다.
7. 2. 역사적 측면
《응제시주》는 권근이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지은 시 모음이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시의 내용 중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부분이 주목할 만하다. 1396년 9월 22일에 지어진 10수의 시는 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한국 고대 국가의 역사와 금강산, 대동강 등 주요 지리를 다루고 있다. 이는 당시 조선 지식인이 가졌던 역사 및 지리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무엇보다 《응제시주》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단군신화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근은 당시까지 전해 내려오던 《고기》라는 역사서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술했다. 이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군신화 기록 중 하나인 《삼국유사》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지만, 일부 차이점을 보여 비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는 조선 초기에도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인식하고 그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 고대사 및 신화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명나라 황제 앞에서 지은 시라는 한계 속에서도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유구함을 담아내려 한 시도로 평가받을 수 있다.
7. 3. 문학적 측면
권근의 응제시는 원칙적으로 임금, 특히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지어진 시를 말하며, 1396년 세 차례에 걸쳐 총 24수가 지어졌다. 각 차수별 시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차 (9월 15일, 8수): 조선에서 명나라 수도까지 오는 여정과 관련된 시가 대부분이다.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 <도경서경(道經西京)>, <도압록(渡鴨綠)> 등이 이에 해당하며, 명나라로 오는 과정과 그간의 심정을 표현하면서도 조선 태조의 성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2차 (9월 22일, 10수):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내용이다. <진한>, <마한>, <변한>, <신라> 등 고대 국가의 흥망과 <금강산>, <대동강> 등 명승지를 읊었다. 이를 통해 명나라 황제는 권근의 역사 의식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근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면서도 중국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 3차 (10월 27일, 6수):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겪었던 일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사면받고 후대를 받는 감격과 연회에서의 흥취 등을 노래했다. 시제 자체가 황제에 대한 칭송을 유도하는 성격이 강했으며, 시의 내용 역시 명나라의 후한 대접에 감사하고 번화한 문물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권근의 응제시는 명나라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칭송하는 내용이 많아 사대주의적 아첨 문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명나라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해야 했던 권근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응제시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첫째, 명나라 태조의 마음을 만족시켜 정도전의 표전문 문제로 악화된 양국 관계를 완화하고 조선의 국익을 지키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당시의 엄중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둘째, 중국과 명나라 태조의 덕을 찬양하면서도 그 속에서 조선 개국의 정통성과 합리성을 강조하고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내어 민족 주체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아첨을 넘어선 외교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권근의 응제시는 사대주의라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외교적 마찰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 국가적 공헌도가 높은 작품이다. 또한 이 시를 통해 권근 개인의 문명(文名)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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