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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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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드리스 1세는 1889년(또는 1890년) 세누시 교단의 중심지인 알자구브에서 태어났으며, 세누시 교단의 지도자이자 리비아의 초대 국왕이었다. 그는 세누시 교단의 지도자가 된 후,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저항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을 지지하며 독립을 모색했다. 1951년 리비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며 석유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1969년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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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리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0년의 이드리스 국왕
1960년의 이드리스 국왕
전체 이름무함마드 이드리스 빈 무함마드 알-마흐디 아스-세누시
출생일1890년 3월 13일
출생지오스만 제국 트리폴리타니아 빌라예트 자그부브
사망일1983년 5월 25일
사망지이집트 카이로
매장지사우디 아라비아 메디나 알-바키 묘지
종교수니 이슬람
통치
왕위 계승리비아의 군주
계승 유형후계자
후계자하산
재위 기간1951년 12월 24일 – 1969년 9월 1일
이전 통치자그 자신 (키레나이카의 아미르)
섭정마흐무드 알-문타시르
무함마드 사키즐리
무스타파 벤 할림
압둘 마지드 쿠바르
무함마드 오스만 사이드
모히에딘 피키니
후세인 마지크
압둘 카디르 알-바드리
압둘 하미드 알-바쿠시
와니스 알-카다피
섭정 유형총리
이전 직위키레나이카의 아미르
통치 기간 (아미르)1949년 3월 1일 – 1951년 12월 24일
다음 직위그 자신 (리비아의 군주)
가문
가문세누시
아버지무함마드 알-마흐디 아스-세누시
어머니아이샤 빈트 무카리브 알-바라사
배우자
배우자아이샤 빈트 무함마드 아스-샤리프 알-사누시 (1896/97 결혼; 1905/07 사망)
사키나 빈트 무함마드 아스-샤리프 알-사누시 (1907 결혼, 1922 이혼)
나피사 빈트 아흐마드 아부 알-카심 알-이사위 (1911 결혼, 1915 이혼)
파티마 엘-샤리프 (1931 결혼)
알리야 하눔 에펜디 (1955 결혼, 1958 이혼)

2. 초기 생애와 세누시 교단

이드리스는 1889년 3월 12일(일부 자료에서는 1890년으로 표기) 세누시 운동의 본부였던 알자구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이드 무하마드 알마흐디 아스세누시였고, 어머니는 그의 세 번째 부인 아이샤 빈트 무카립 알바라사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세누시 교단의 창시자인 사이드 무하마드 이븐 알리 아스세누시의 손자였다. 이드리스의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통해 무함마드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젊은 시절의 이드리스 1세


세누시 교단은 오늘날 리비아 동부인 키레나이카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흥주의 수니파 이슬람 종파였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서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에 맞서기 위해 세누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19세기 말, 세누시 교단은 키레나이카 지역에 사실상의 정부를 수립하여 부족들을 통합하고 하지 순례길과 무역로를 관리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

1916년, 이드리스는 그의 사촌인 사이드 아흐메드 샤리프 에스 세누시가 물러나자 그의 뒤를 이어 세누시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영국은 그를 키레나이카 영토의 새로운 "에미르"로 인정했으며, 이 지위는 1920년 이탈리아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는 또한 1922년 7월 28일 트리폴리타니아의 에미르로 즉위했다.

2. 1. 이탈리아 식민 통치와 저항

리비아의 전통적인 지방 구분 지도. 이드리스는 동부 키레나이카 출신이었다.


1913년 이탈리아 왕립군(Regio Esercito)이 리비아 침공의 일환으로 키레나이카를 침공하자, 세누시 교단은 이에 맞서 싸웠다. 교단 지도자 아흐메드 샤리프 아스-세누시가 사임하면서 그의 사촌인 이드리스가 뒤를 이었다. 이전 지도자 아흐메드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으로 이집트 술탄국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이드리스는 집권 후 이를 중단했다. 대신 영국과 암묵적인 동맹 관계를 맺어 교단의 외교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드리스는 영국을 중재자로 삼아 1916년 7월부터 이탈리아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17년 4월 아크라마 협정 등이 체결되어, 키레나이카 내륙 대부분 지역에 대한 세누시 교단의 통제권이 잠정적으로 인정되었다. 한편, 세누시 교단은 트리폴리타니아 공화국과 관계가 악화되어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에 대한 권리를 이탈리아 왕국에 넘겼지만, 이탈리아는 국내 문제로 인해 리비아에서의 군사 활동을 즉시 재개하기 어려웠다. 1919년 이탈리아는 리비아인에게 이탈리아와의 공동 시민권을 부여하고 각 지방의 자치를 일부 인정하는 ''기본법''(Legge Fondamentale)을 공포했다. 이드리스는 이 협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1920년 알-라즈마 협정을 통해 이드리스는 키레나이카 아미르 칭호를 얻고 일부 오아시스 지역의 자치권을 확보했으며, 이탈리아로부터 재정 지원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에서 요구한 키레나이카 군대 해산은 이행하지 않았고, 1921년 말 세누시 교단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1922년, 내분에 휩싸인 트리폴리타니아의 지도자들은 안정을 위해 이드리스에게 키레나이카 토후국 통치를 트리폴리타니아까지 확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내부 의견도 있었으나, 이드리스는 1922년 11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자, 이드리스는 이탈리아의 군사적 보복을 우려하여 1922년 12월 이집트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드리스의 망명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 재정복을 본격화했으며,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은 키레나이카 주민들을 강제 수용소에 감금하고 가축을 몰살했으며, 1930년과 1931년 사이에는 약 12,000명의 키레나이카인을 처형하는 등 잔혹한 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탈리아 정부는 수만 명의 자국민을 리비아로 이주시켜 농장을 건설하게 하는 "인구 통계적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드리스는 리비아를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기회로 보고 영국을 지지했다. 그는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전후 리비아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병으로 구성된 리비아 아랍 군대 창설에 기여했다. 이 부대는 주로 후방 지원 및 헌병 임무를 수행하며 전쟁에 참여했다. 이탈리아의 패전 이후 리비아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의 군정 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리비아가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독립 운동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세누시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이에 에미르 이드리스는 1922년 12월 이집트 왕국으로 망명했다.[1][2]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재정복하는 과정에서 키레나이카 내륙의 저항 세력을 진압했으며,[3] 가축을 몰살하고 주민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는 등 잔혹한 정책을 펼쳤다. 1930년과 1931년에는 약 12,000명의 키레나이카인이 처형되었고,[4] 수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리비아로 이주하여 농장을 건설하는 "인구 통계적 식민지화" 정책이 시행되었다.[5][6]

1949년에서 1951년까지 사용된 키레나이카 국기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드리스는 조국을 이탈리아의 점령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던 영국을 지지했다.[7] 그는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리비아의 독립을 얻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8]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 대표들은 이드리스가 영국의 전쟁 지원 대가로 독립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9] 이드리스는 리비아인 자원병으로 구성된 5개 보병대대 규모의 리비아 아랍 군대를 창설하여 영국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벵가지 근처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주로 지원 및 헌병 임무에 투입되었다.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대가 패배한 후, 리비아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군사 통제 하에 놓였다. 연합국은 1907년 헤이그 협약에 따라 1949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1946년에는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세누시 교단이 주도하는 국민 회의가 설립되었다. 1947년 이탈리아는 리비아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신탁 통치를 희망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페잔은 프랑스가, 키레나이카는 영국이, 트리폴리타니아는 이탈리아가 각각 10년간 신탁 통치하는 베빈-스포르차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1949년 5월 이 계획이 발표되자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미국, 소련, 아랍 국가들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리비아의 미래 문제는 1948년 9월 유엔 총회로 넘어갔다. 유엔 총회는 베빈-스포르차 계획을 거부하고 리비아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했다. 영국은 1949년 키레나이카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이드리스에게 통치권을 넘겼는데, 이는 키레나이카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의도였다. 프랑스 역시 1950년 2월 페잔에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949년 11월, 유엔 총회는 리비아가 1952년 1월까지 단일 국가로 독립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드리스를 리비아의 국왕으로 추대할 것을 촉구했다. 냉전 시기 남부 지중해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던 영국과 미국은 리비아에 군사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결의안에 동의했다. 트리폴리타니아인들도 유럽 열강의 추가적인 식민 통치를 피하기 위해 이 계획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리비아는 이드리스를 중심으로 한 통일 왕국으로 독립할 수 있는 국제적 승인과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3. 1. 리비아 독립과 국왕 즉위

이드리스 국왕과 당시 미국의 부통령 리처드 닉슨(1957년 3월)


이드리스 1세는 오스만 제국키레나이카(리비아 동부)에서 오랫동안 사누시 교단을 이끌어 온 사누시 가문 출신이다. 1911년 이탈리아-터키 전쟁 이후 리비아는 이탈리아식민지가 되었다. 사누시 교단은 이탈리아의 지배에 저항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에 맞서 연합국 편에 서서 싸웠다. 1943년 이탈리아가 패전한 후 리비아는 영국프랑스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 이 기간 동안 무함마드 이드리스는 종주국 아래에서 키레나이카 지방의 자치권만을 인정받는 제한적인 지위에 있었다.

국제 연합(UN)의 결의에 따라 키레나이카, 트리폴리타니아, 페잔의 3개 주로 구성된 연합 왕국(리비아 연합 왕국)이 수립되었다. 1951년 12월 24일, 이드리스는 벵가지의 알-마나르 궁전에서 리비아 연합 왕국의 수립을 공식 선포하고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리비아의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대부분이 아랍인이었으나 베르베르인, 테부인, 세파르디 유대인, 그리스인, 터키인, 이탈리아인 등 소수 민족도 거주하고 있었다.

새롭게 독립한 리비아는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1951년 당시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국가 기반 시설의 상당 부분이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무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실업률은 매우 높았다. 또한 영아 사망률이 40%에 달했고, 국민의 94%가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 상태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전체 국토의 1%에 불과했고, 목축업에 사용될 수 있는 땅도 3~4% 정도였다.

왕국은 연방제 형태로 수립되었는데, 이는 인구가 적은 키레나이카와 페잔 지역이 리비아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트리폴리타니아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반면,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에서는 단일 국가 체제를 선호했는데, 이는 중앙 정부가 국익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고, 연방제가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주는 각각 자체적인 입법 기관을 가졌으며, 페잔 주는 선출직으로만 구성된 반면,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는 선출직과 임명직이 혼합된 형태였다. 이러한 헌법적 구조는 중앙 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각 주의 자치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역대 총리들은 국가 차원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각 주의 이해관계가 달라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 사이에는 지속적인 불신이 존재했다. 벵가지와 트리폴리가 공동 수도로 지정되어 국회는 두 도시를 번갈아 오갔으며, 이드리스 국왕이 바이다로 이주하면서 이곳이 사실상의 여름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리비아는 세 개의 주로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주 간의 공통된 목표 의식은 부족한 상태였다.

4. 리비아 국왕 (1951-1969)

1951년 12월 24일, 이드리스는 벵가지의 알-마나르 궁전에서 리비아 연합 왕국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당시 신생 리비아는 인구 약 100만 명으로, 대부분 아랍인이었으나 베르베르인, 테부족, 세파르디 유대인, 그리스인, 터키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소수 민족도 거주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리비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1951년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국가 기반 시설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 무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업률은 매우 높았으며, 영아 사망률은 40%, 문맹률은 94%에 달하는 등 사회 지표 또한 열악했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전체 국토의 1%에 불과했고, 목축업에 사용되는 땅도 3~4% 정도였다. 국가는 키레나이카, 페잔, 트리폴리타니아 세 개의 주로 통합되었으나, 각 지역은 역사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공동의 목표를 거의 공유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왕국은 연방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이는 인구가 적은 키레나이카와 페잔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트리폴리타니아에 의해 정치적으로 지배당할 것을 우려하여 강력히 주장한 결과였다. 반면, 트리폴리타니아 주민들은 국익 증진과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중앙집권적인 단일 국가 체제를 선호했으며, 연방제가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세 주는 각기 다른 구성 방식의 입법 기관을 가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중앙 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각 주의 자치권만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역대 총리들은 통일된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은 지속되었다. 벵가지트리폴리가 공동 수도로 지정되어 국회가 두 도시를 오갔으며, 이드리스 국왕이 머무는 바이다 역시 사실상의 여름 수도 역할을 했다.

이드리스 국왕은 명목상 입헌 군주제의 군주였지만, 실제 통치 방식은 권위주의적이었다. 저널리스트 조나단 베어만은 그를 "독재적인 세속 권력을 가진 정신적 지도자"로 평가하며, 당시 리비아를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군주 독재" 체제였다고 분석했다. 헌법은 이드리스에게 상당한 개인적 권력을 부여했으며, 그는 왕실의 디반(궁정 내각)을 통해 연방 정부와 협의하여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등 정치 시스템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적으로 이드리스는 겸손하고 독실한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리비아 통화에 자신의 초상화를 넣는 것을 거부했으며, 트리폴리 이드리스 공항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딴 어떤 공공 시설 명명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의 정권은 국내 불안정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모든 정치 정당의 활동을 금지했으며, 1952년부터는 선거 후보자를 모두 정부가 지명하는 방식으로 선거 제도를 운영했다. 이는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먼 통치 방식이었다.

1954년, 당시 총리였던 무스타파 벤 할림은 연방제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이드리스의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연방제를 폐지하고 단일 국가로 전환하며 이드리스를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드리스 역시 이 제안에 긍정적이었으나, 키레나이카 지역 부족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계획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1963년 4월 26일, 이드리스 국왕은 결국 리비아의 연방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단일 국가 체제를 선포했다. 이 조치로 각 주의 입법 의회와 사법 제도가 모두 폐지되었으며, 모든 세금 및 석유 수입은 중앙 정부로 직접 귀속되었다. 국호 역시 "리비아 연합 왕국"에서 "리비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이 개혁은 국가의 경제 및 행정 계획을 중앙 집중화하여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이드리스 국왕 개인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개혁은 기존에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던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역사가 디르크 반데발레는 이 연방제 폐지를 "군주제의 재임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드리스는 점차 국가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를 줄여나갔다.

한편, 후계 문제와 관련하여 1955년, 이드리스는 남자 후계자를 얻기 위해 첫 부인인 파티마 엘-샤리프 여왕의 동의를 얻어 부유한 베두인 족장의 딸인 알리야 압델 람룬과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이후 두 부인 모두 아들을 낳았다.[5]

4. 1. 외교 정책과 석유 이권



이드리스 1세 국왕 치하에서 리비아는 냉전 시대에 서방 진영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구 종주국인 영국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방의 전문 지식과 원조를 받았다. 1959년 말까지 미국으로부터 1억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아, 당시 1인당 미국 원조 수혜 규모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다. 이러한 지원은 상호주의적 방식으로 제공되었으며, 그 대가로 리비아는 미국과 영국에 휠러스 공군 기지와 알-아뎀 공군 기지 사용을 허용했다.

1950년대에 여러 외국 회사들이 리비아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했으며, 리비아 정부는 이 과정을 규제하기 위해 1953년 광물법과 1955년 석유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기업들은 리비아 석유 산업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가 이끄는 옥시덴탈 페트롤리움(Occidental Petroleum)이나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등 미국과 영국의 석유 기업들이 국내에서 석유를 채굴할 때 이드리스 국왕은 후견인 역할을 하며 서방 국가에 안정적인 석유 공급에 협력했다. 1955년 석유법은 소규모 석유 회사가 대기업과 함께 시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으며, 각 양허권은 낮은 가입비를 가졌고 임대료는 시추 8년차 이후에야 크게 증가했다. 이는 경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특정 회사가 국가 석유 운영에 지나치게 중요해지는 것을 막았지만, 회사가 가능한 한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많은 석유를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1959년 리비아에서 대규모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면서, 리비아 경제는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이는 이드리스가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 리비아의 유전은 유럽의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했고, 1967년에는 서유럽 시장에 공급되는 석유의 1/3을 차지했다. 몇 년 안에 리비아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석유 생산은 리비아 경제에 엄청난 부양책을 제공하여, 1951년 25USD~35USD였던 1인당 연간 소득이 1969년에는 2000USD로 급증했다. 1961년까지 석유 산업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 리비아 정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석유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자 리비아 국가는 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62년 리비아는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에 가입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석유부를 신설하고(1963년) 리비아 국영 석유 회사(LIPETCO)를 설립(1968년)했으며, 향후 모든 석유 개발 양허 계약은 LIPETCO와의 합작 투자가 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를 만나는 이드리스 국왕


그러나 이러한 서방 국가에 대한 의존은 아랍 세계 전역에서 증가하는 아랍 민족주의아랍 사회주의 정서와 대립하게 만들었다. ''라디오 카이로''가 홍보하는 아랍 민족주의 정서는 특히 트리폴리타니아에서 호응을 얻었다. 1967년 7월,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에 대한 서방의 이스라엘 지원에 항의하는 반서방 폭동이 트리폴리벵가지에서 발생했다. 리비아 전역의 많은 석유 노동자들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아랍 군대와 연대하여 파업을 벌였다.

한편, 석유 수입 증가는 만연한 부패와 편애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많은 고위급 부패 스캔들이 이드리스 정부의 최고위층에 영향을 미쳤으며, 1960년 6월 이드리스는 이러한 부패를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며 뇌물 수수와 친족주의가 "국가의 존립 자체와 국내외에서의 좋은 평판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4. 2. 1969년 쿠데타와 망명

1969년 9월 1일, 이드리스 1세가 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머무는 동안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군 장교 그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이드리스 1세의 친서방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 쿠데타 세력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이로 인해 이드리스 1세는 폐위되었다.[6] 이 사건으로 이드리스 1세의 양위 계획과 다음 날로 예정되었던 후계자 승계는 무산되었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이드리스 1세는 터키에서 왕비와 함께 배를 타고 그리스의 카메나 부르라로 이동한 뒤, 인접국인 이집트로 망명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1971년 11월, 리비아 인민 법원은 궐석 재판을 통해 이드리스 1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정권은 이드리스 1세의 통치를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시대에 뒤떨어지고 민족주의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드리스 1세는 망명지인 이집트 카이로도키 구역에 있는 병원에서 1983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그의 유해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디나의 알 바키 묘지에 안장되었다.

5. 사망과 유산

반데왈레에 따르면, 이드리스 1세의 통치는 리비아 국민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심각한 탈정치화 상태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21세기 초 리비아에서도 여전히 나타났다. 그는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나 초기 연구자들에게 통일된 리비아를 실제로 통치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석유 산업 관련 정책 역시 기술관료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이는 이드리스 1세의 정책과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보였다.

이드리스 1세는 망명 중에 사망했고 대부분의 리비아인들은 그의 통치 이후에 태어났지만,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카다피에 반대하는 많은 시위대는, 특히 키레나이카 지역을 중심으로, 이드리스 1세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했다. 왕정 시대에 사용되었던 삼색기는 혁명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리비아 과도 국가 위원회에 의해 공식 리비아의 국기로 다시 채택되었다.[8]

이드리스 1세 사후 카다피 정권에 대한 리비아 국민의 불만이 커지면서 2011년 리비아 내전이 발발했다. 이때 리비아 국민 의회는 왕국 시대의 국기를 사용했으며, 2011년 8월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며 사실상 리비아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게 되었다.

6. 사진

참조

[1] 서적 A modern history of the Islamic world I.B.Tauris 2002
[2] 웹사이트 Idris I {{!}} Libya, Biography, & History https://www.britanni[...] 2021-09-12
[3] 서적 Libya in the Arab Spring: The Constitutional Discourse since the Fall of Gaddafi Springer 2016
[4] 서적 Internet View of the Arabic World CreateSpace 2009-11-29
[5] 뉴스 Daily Mirror 1955-09-23
[6] 뉴스 Bloodless coup in Libya http://news.bbc.co.u[...] BBC News 1969-09-01
[7] 뉴스 KING IDRIS, OUSTED IN '69 BY QADDAFI, DIES IN CAIRO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83-05-26
[8] 뉴스 The liberated east: Building a new Libya http://www.economist[...] 2011-02-26
[9] 뉴스 '총상으로 사망'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는 누구… https://www.hankyung[...] 한국경제신문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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