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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투르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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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 투르크멘은 이라크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민족으로, 20세기 중반까지는 단순히 "터키인"으로 알려졌다. 1958년 군사 쿠데타 이후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는 아나톨리아의 터키인과 구별하기 위한 이라크 정부의 정책이었다. 이들은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 신자이나 시아파 신자도 존재한다. 이라크 투르크멘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온 다양한 튀르크계의 후손으로, "투르크메넬리"로 불리는 북부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키르쿠크를 수도로 여긴다. 이들은 1920년대부터 여러 차례 학살과 차별을 겪었으며, 바트당 정권 하에서는 아랍화 정책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ITF)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튀르키예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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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투르크멘
기본 정보
투르크멘엘리의 기
토착 이름Irak Türkmenleri (이라크 투르크멘레리)
아랍어تركمان العراق (Turkumān al-ʿIrāq)
터키어Irak Türkleri (이라크 튀르클레리)
인구
추정 인구 (2013년 이라크 기획부 추정)300만 명
추정 인구 (2020–21년)400만 명 ~ 500만 명 (또는 이라크 인구의 10%–13%)
거주 지역투르크멘엘리 지역
키르쿠크 주
에르빌 주
니네베 주
살라딘 주
디얄라 주
언어
주요 언어투르크멘어 방언
기타 사용 언어이라크 아랍어
쿠르드어
튀르키예어
종교
주요 종교이슬람 (60%-70% 수니파; 30%-40% 시아파)
소수 종교기독교 (로마 가톨릭)

2. 명칭

이라크 투르크멘 학자인 수피 사아트치(Suphi Saatçi)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전 이라크의 투르크멘은 단순히 "터키인"으로 알려져 있었다.[18] 1958년 7월 14일 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 군사 정부는 공식적으로 "투르크만/투르크멘"이라는 이름을 도입했다.[18] 이라크 정부의 정치적 목표는 이라크 투르크멘을 아나톨리아의 다른 터키인들과 구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리스 정부가 무슬림 소수 민족이라는 이름을 그리스 국경 내에 거주하는 터키인들에게 사용한 것과 같았다.[18]

이라크 터키인들에게 "투르크멘"이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오구즈 투르크족에게 지정되었고, 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여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서쪽으로 이주했기 때문에[18] 국가가 강요한 용어에 대한 저항은 없었다. 이 용어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 (시리아 투르크멘 및 아나톨리아 투르크멘 포함)은 투르크메니스탄투르크멘인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않는다.[19] 오히려 중동에서 "투르크멘"이라는 용어는 종종 특히 아랍 지역이나 시아파가 지배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수니파 터키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19]

"투르크멘"이라는 용어가 현대에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쿠쉬너(David Kushner) 교수는 이라크의 터키인을 포함하여, 구 오스만 제국의 "외부 터키인"을 지칭하는 데 "터키인"이라는 용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11] 이는 이러한 오스만 역사를 공유하지 않은 다른 투르크 민족에게 사용되는 용어와 대조적이다.

2. 1. 민족명

이라크 투르크멘 학자인 수피 사아트치(Suphi Saatçi)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이전 이라크의 투르크멘은 단순히 "터키인"으로 알려져 있었다.[18] 1958년 7월 14일 군사 쿠데타 이후 집권 군사 정부는 공식적으로 "투르크만/투르크멘"이라는 이름을 도입했다.[18] 이라크 정부의 정치적 목표는 이라크 투르크멘을 아나톨리아의 다른 터키인들과 구별하는 것이었다.[18]

이라크 터키인들에게 "투르크멘"이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오구즈 투르크족에게 지정되었고, 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여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서쪽으로 이주했기 때문에[18] 국가가 강요한 용어에 대한 저항은 없었다. 이 용어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은 투르크메니스탄투르크멘인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않는다.[19] 중동에서 "투르크멘"이라는 용어는 종종 특히 아랍 지역이나 시아파가 지배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수니파 터키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19]

"투르크멘"이라는 용어가 현대에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쿠쉬너(David Kushner) 교수는 이라크의 터키인을 포함하여, 구 오스만 제국의 "외부 터키인"을 지칭하는 데 "터키인"이라는 용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11]

2. 2. 문학

오리트 바시킨 교수는 이라크 투르크멘 문학에서 시인들이 "국가로서의 이라크에 충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터키적 정체성을 함께 지켜왔다"고 언급했다.[20] 무스타파 괵카야(1910년 출생)에게 이것은 그의 공동체가 무슬림이며 "나의 아버지는 터키인이고, 조국은 어머니"임을 의미했다.[20] 레시트 알리 다쿠클루(1918년 출생)에게 "이라크의 터키인"의 일부라는 것은 모든 민족과 형제적 관계를 유지하고, 이라크와 연합하며, 터키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20] 보편적이면서 지역적이고, 이라크적이면서 동시에 터키적인 투르크멘 시인들은 그들의 국가에 봉사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문화와 터키성을 소홀히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20]

3. 역사

이라크 투르크멘의 정확한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이 지역에 정착한 여러 가지 가능한 설명과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통치자들이 세운 주둔지에서 이라크에 처음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21][22][23][24]

이라크 투르크멘은 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 통치(1919년)가 끝날 때까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온 다양한 투르크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첫 번째 이주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셀주크 제국 (1037–1194) 시대의 이주, 호라즘 제국의 몽골 파괴 동안 도망친 오구즈족 (카라 코윤루아크 코윤루 참조)의 이주, 그리고 가장 큰 규모의 이주인 오스만 제국 (1535–1919) 시대의 이주가 있었다. 1534년 쉴레이만 1세의 이라크 정복과 1638년 술탄 무라드 4세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주로 아나톨리아 출신의 많은 투르크인들이 이라크에 정착했다. 오늘날 이라크 투르크멘의 많은 수가 오스만 제국 통치 기간 동안 이라크로 유입된 오스만 군인, 상인 및 공무원의 후손으로 여겨진다.[22][23][24][25]

|섬네일|술레이만 1세는 1534년 12월 31일 사파비 왕조를 격파하여 바그다드를, 이후 남부 이라크를 획득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부 이라크를 따라 터키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22]

2014년 8월 30일, 과격파 조직 ISIL에 의해 포위된 (알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이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 공급을 실시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는 미군에 의한 ISIL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145][146] 다음 날 31일에는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에 걸친 포위망이 풀렸다.[147]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며, 1947년 인구 조사에서는 수니파 신자가 약 5만 명, 시아파 신자가 약 4만 2천 명이다.[144] 이라크 국내의 투르크멘인에 의한 정당으로는 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등이 있다.

3. 1. 아랍 통치 하의 이주

오늘날의 이라크에 튀르크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7세기로, 약 2,000~5,000명의 오구즈 튀르크인들이 우바이드-알라 이븐 지야드의 무슬림 군대에 징집되었을 때였다.[26] 그들은 674년 우마이야 왕조가 바스라를 정복하면서 도착했다.[27] 8세기 동안 부하라에서 바스라, 그리고 바그다드까지 더 많은 튀르크계 병사들이 정착했다.[27] 그 후 아바스 왕조 시대에 수천 명의 투르크멘 전사들이 이라크로 들어왔지만, 이라크에 정착한 투르크멘의 수는 많지 않았고, 그 결과, 투르크멘의 첫 번째 물결은 현지 아랍 인구에 동화되었다.[26]

3. 2. 셀주크 시대의 이주

셀주크 제국의 투르크인들은 이라크에 유입된 두 번째 투르크멘이었다.[22] 1055년, 셀주크 왕조의 두 번째 통치자인 투으룰 베이 술탄의 침공으로 이라크에서 대규모 투르크멘 이주가 발생했는데, 그는 메카로 가는 성스러운 길을 복구하려 했다. 이후 150년 동안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이라크 북부의 가장 중요한 경로, 특히 현재 투르크메넬리로 알려진 탈 아파르, 에르빌, 키르쿠크, 만달리에 대규모 투르크멘 공동체를 배치했다. 이들 정착민 중 다수는 셀주크 제국에서 군사 및 행정적 책임을 맡았다.

3. 3. 오스만 제국 시대의 이주

오스만 제국의 지배(1535–1919)는 이라크로의 투르크멘 이주에 있어 세 번째이자 가장 큰 물결이었다.[22] 16세기 전반,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로 영토를 확장하며 숙적 사파비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28] 1534년 쉴레이만 1세 통치 하에 모술이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고, 주요 주(에야레트)가 되었다.[28]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로부터 투르크멘 이주와 북부 이라크 정착을 장려했고, 하나피 이슬람 전파를 위해 종교 학자들을 데려왔다.[28] 충성스러운 투르크멘이 거주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의 안전한 길을 확보했다.[22] 키르쿠크는 "괴크유르트"로 불리며 투르크의 확고한 지배 하에 놓였다.[23]

무라드 4세


1534년 쉴레이만 1세의 이라크 정복과 1638년 무라드 4세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많은 투르크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23] 쉴레이만 1세는 바그다드의 물리적 기반 시설 재건을 시작했고, 카르발라에 댐을 건설하고 주요 물 사업을 시행하도록 명령했다.[28] 1624년 아바스 대제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되었으나, 1638년 무라드 4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가 탈환했다.[28] 1639년 주합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 지배권을 확립하고 군사적 갈등을 종식시켰다. 바그다드 점령 이후 무라드 4세의 군대와 함께 더 많은 투르크인들이 도착했다.

3. 4. 오스만 제국 이후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이라크 투르크멘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행정 및 상업 계층으로서 비교적 문제없는 삶을 누렸기 때문에 터키가 모술 빌라예트를 합병하여 그들이 확장된 국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29] 그러나 오스만 왕조의 붕괴로 인해, 이라크 투르크멘은 제헌 의회 선거에 참여했다.[29] 이 선거의 목적은 영국 정부와의 1922년 조약을 공식화하고 헌법 초안 작성 및 1923년 선거법 통과에 대한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29] 이라크 투르크멘은 선거 과정 참여를 키르쿠크 행정의 터키적 성격 보존과 터키어를 리와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29] 1925년 헌법에서 아랍인, 쿠르드인과 함께 이라크의 구성 민족으로 인정받았지만, 이후 이 지위를 박탈당했다.

미사크-이 밀리(Misak-ı Millî, 국민 서약)는 1920년 터키 국가의 새로운 국경에 대한 제안에 모술 빌라예트를 포함시키려 했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이라크 투르크멘은 1923년, 1946년, 1959년의 학살, 그리고 바트당이 이 공동체를 표적으로 삼은 1980년부터 연이은 정권 하에서 점점 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4. 문화

이라크 투르크멘족은 대부분 무슬림이며,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과 문화적, 언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30]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투르크멘 마을의 이중 언어 표지판(아랍어와 터키어).


투르크멘 마을의 이중 언어 표지판(아랍어와 터키어).


이라크 투르크멘 남자 중학교의 이중 언어 표지판(아랍어 및 터키어)


이중 언어 표지판(아랍어 및 터키어)의 이라크 투르크멘 여자 중학교


; 언어

이라크 투르크멘[31][32] 방언은 튀르크어족의 서부 오구즈어군에 속하며, 종종 "이라크 투르크멘 튀르키예어"[33][34], "이라크 튀르키예어"[35][36][37][38], "이라크 튀르크어"[39][40]라고 불린다. 오스만 튀르크어의 역사적 표준(1534년부터 1920년까지 이라크의 공식 언어이자 공용어였음[41])과 인접한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의 영향을 받았다.[42] 특히, 튀르키예어의 권위 언어인 표준어(즉, 이스탄불) 튀르키예어는 이들의 방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43] 이라크 투르크멘의 구문론은 인접한 이란-튀르크어와 확연히 다르다.[43]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은 또한 키프로스 튀르키예어 및 발칸 튀르키예어와 양상과 관련하여 유사성을 보인다.[44] 이라크 투르크멘의 문어는 현대 튀르키예어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스탄불 튀르키예어를 기반으로 한다.[68]

1930년에는 키르쿠크와 키프리에서 튀르키예어가 소수 언어로 인정받았지만,[76] 1959년에 이라크의 터키인들을 터키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해 "투르크만"과 "투르크만자"라는 이름을 도입했다.[18] 1972년에 이라크 정부는 튀르키예어를 금지했고[45]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학교와 미디어가 금지되었다.[45] 1980년대에는 바트 정권이 이라크 투르크멘들이 공공 장소에서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튀르키예어에 대한 추가 금지가 이루어졌다.[45] 2005년에 이르러서야 투르크멘 방언이 이라크 헌법에 따라 인정받게 되었다.

; 방언

이라크 투르크멘은 1,200년 이상 이라크로의 다양한 튀르크 이주 물결로 인해 결코 동질적이지 않으며,[70][42] 방언은 지역적 특징에 따라 다를 수 있다.[68] 오스만 튀르크어와 바그다드 함락 (1624년) 이후의 페르시아어가 이 지역의 몇몇 권위있는 언어들이 특히 영향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이 1640년에 이라크를 재점령한 후, 이라크의 튀르크어 변종은 오스만 튀르크어뿐만 아니라 아랍어쿠르드어와 같은 지역의 다른 언어들의 영향을 계속 받았다.[70] 오스만 튀르크어는 행정상의 공식 언어일 뿐만 아니라 공용어였기 때문에 1920년까지 이라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41]

일반적으로, 탈 아파르 (약 70만 명의 화자),[71] 알툰 쿠프리, 투즈 후르마투, 타자 후르마투, 키프리, 바시르 및 아미를리의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은 우르파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방언과의 통일성을 보여준다;[65][62] 한편, 키르쿠크, 에르빌, 도후크, 만달리 및 하나킨의 방언은 아제르바이잔어 타브리즈어 및 아프샤르어 튀르크 방언과 유사성을 보인다.[62] 그러나 키르쿠크 방언은 우르파와 비슷한 특징도 보이며,[63][64] 언어에 관해 질문한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 키르쿠크 주 인구의 21.4%가 모국어를 "튀르크어"로 자가 신고했다.[72]

; 공식 지위

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터키어는 1930년 언어법 5조에 따라 키르쿠크와 키프리에서 공용어로 인정받았다.[76]

1932년 이라크가 국제 연맹에 가입하면서 연맹은 이라크에 소수 민족과 종교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76] 그 결과, 터키어는 쿠르드어와 함께 1932년 이라크 헌법에 따라 공용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이 투르크멘족인 키르쿠크의 리와(liwa)에서는 아랍어와 함께 쿠르드어 또는 터키어가 공용어가 된다."[77]

1959년 군사 정권은 "투르크만"과 "투르크만자"라는 이름을 도입했다.[39] 더 최근에는 2005년 이라크 헌법 4조가 "인구 밀도가 높은 행정 구역"에서 "투르크멘어"를 (시리아어와 함께) 공식적인 소수 언어로 인정했다.[79]

; 터키어 알파벳 채택

1997년 이라크 투르크멘 회의는 원칙 선언을 채택했으며, 3조는 "투르크멘의 공식 표기 언어는 이스탄불 터키어이며, 그 문자는 새로운 로마자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68] 2005년까지 터키어는 이라크 학교에서 아랍 문자를 사용했던 전통적인 투르크멘어를 대체했다.

; 교육

1993년 11월 17일, 에르빌과 키프리에서 최초의 투르크멘 학교 두 곳이 문을 열었다.[80] 2005년,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 지도자들은 학교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투르크멘어 대신 터키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투르크멘어는 아랍 문자를 사용했지만, 터키어는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터키어 알파벳 참조).

바트당 정권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투르크멘인들은 아랍 문자에 익숙하여 터키어에 대한 문해율이 낮았기 때문에, 키르쿠크의 투르크멘 교육국은 터키어 수업을 개설하였다. 니네베의 교육부 투르크멘 담당자는 "유엔 이라크 지원 임무단"에 부모를 위한 터키어 수업 개설을 요청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키르쿠크에 본부를 둔 투르크멘 스카우트 연맹(''Türkmen Izcilik Federasyonu'')이 설립되었다.[81]

; 미디어

위성 텔레비전의 보급과 터키 미디어의 노출은 투르크멘어의 터키어 표준화를 야기했을 수 있으며, 터키 문화와 연관된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언어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이라크 키르쿠크에서 튀르크메넬리 TV 채널이 개국하여 터키어와 아랍어로 프로그램을 방송한다.[82] 2012년 현재, 튀르크메넬리 TV는 이라크키르쿠크바그다드, 그리고 터키 앙카라의 Çankaya 지역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82] 튀르크메넬리 TV는 TRT, TGRT, ATV 등 여러 터키 채널, 그리고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의 주요 방송사인 BRT와 프로그램 및 다큐멘터리 공유 협약을 체결했다.[82]

; 종교

이라크 투르크멘은 주로 무슬림이다.[83] 다수(약 60~70%)는 수니파이지만, 시아파를 따르는 투르크멘도 상당수(약 30%~40%) 존재한다.[83]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크멘은 1923년 건국 이후 터키 공화국에서 시행된 국가-종교 문제에 대한 세속주의적 해석을 내면화하여, 대체로 세속주의적이다.[83]

소수의 이라크 투르크멘은 가톨릭교 신자이며,[7][8][84] 그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85] 1947년 인구 조사에서는 수니파 신자가 약 5만 명, 시아파 신자가 약 4만 2천 명이었다.[144] 투르크멘 성경 협회는 신약 성경을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으로 번역하여 2021년에 2,000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다.[86]

2014년 8월 30일, 과격파 조직 ISIL에 의해 포위된 아미를리/Amirli영어(알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이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 공급을 실시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는 미군에 의한 ISIL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145][146] 다음 날 31일에는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에 걸친 포위망이 풀렸다.[147]

4. 1. 언어



이라크 투르크멘[31][32] 방언은 튀르크어족의 서부 오구즈어군에 속하며, 종종 "이라크 투르크멘 튀르키예어"[33][34], "이라크 튀르키예어"[35][36][37][38], "이라크 튀르크어"[39][40]라고 불린다. 이 방언들은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오스만 튀르크어의 역사적 표준(1534년부터 1920년까지 이라크의 공식 언어이자 공용어였음[41])과 인접한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의 영향을 받았다.[42] 특히, 튀르키예어의 권위 언어인 표준어(즉, 이스탄불) 튀르키예어는 이들의 방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43]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의 구문론은 인접한 이란-튀르크어와 확연히 다르다.[43]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은 또한 키프로스 튀르키예어 및 발칸 튀르키예어와 양상과 관련하여 유사성을 보인다.[44] 이라크 투르크멘의 문어는 현대 튀르키예어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스탄불 튀르키예어를 기반으로 한다.[68]

1930년에는 키르쿠크와 키프리에서 튀르키예어가 소수 언어로 인정받았지만,[76] 혁명 정부가 1959년에 이라크의 터키인들을 터키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해 "투르크만"과 "투르크만자"라는 이름을 도입했다.[18] 그 후, 1972년에 이라크 정부는 튀르키예어를 금지했고[45]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학교와 미디어가 금지되었다.[45] 1980년대에는 바트 정권이 이라크 투르크멘들이 공공 장소에서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튀르키예어에 대한 추가 금지가 이루어졌다.[45] 2005년에 이르러서야 투르크멘 방언이 이라크 헌법에 따라 인정받게 되었다. 그 이후, 이라크 투르크멘은 수많은 튀르키예어 학교를 열었으며 터키로부터의 미디어 노출은 그들의 방언을 표준 튀르키예어로 표준화하고 터키 문화와 연관된 청소년들에게 선호되는 언어로 이끌었다.

실제로, 이라크 투르크멘 자신들(195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학적 자료들은 그들의 언어를 튀르키예어 방언(터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46][47][48][49][50][51][52][53][54][64], 그들은 이를 'Irak Türkmen Türkçesi', 'Irak Türkçesi', 또는 'Irak Türkmencesi'라고 부른다. 연구에 따르면 이라크 투르크멘어와 우르파 및 디야르바크르 지역 주변의 특정 남동 아나톨리아 방언 간의 유사성이 오랫동안 지적되었으며,[55] 또는 이를 "아나톨리아" 방언[48][56] 또는 "동 아나톨리아" 방언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57] 또한, 이라크 투르크멘어가 아제르바이잔어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언어학자들도 있으며,[58] 키르쿠크 방언을 "거의"[59]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어" 방언으로 간주한다.[34][60][61][62] 그러나 키르쿠크 방언은 우르파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63][64] 알툰 쿠프리, 타자 후르마투, 바시르를 포함한 키르쿠크 주의 다른 지역들은 우르파의 동 아나톨리아 방언과 통일성을 보인다고 한다.[65] 실제로 아미를리, 키프리, 탈 아파르, 투즈 후르마투를 포함하여 투르크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사용되는 방언들은 모두 우르파의 튀르키예어 방언과 유사하다고 한다.[65] 따라서, 이란에서 사용되는 아제르바이잔어와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라크 투르크멘어가 "터키의 튀르키예어와 더 가깝다"고 말하는 언어학자들도 있다.[35]

전통적인 방언 외에도, 이라크 투르크멘 디아스포라는 표준(이스탄불) 튀르키예어로 소통하며,[66] 이라크의 젊은 세대(2019년 18세 미만)는 이스탄불 튀르키예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67] 또한,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과 이스탄불 튀르키예어 간의 이중 언어 현상이 널리 퍼져 있다.[68][69] 대부분의 이라크 투르크멘은 아랍어 및/또는 쿠르드어도 구사할 수 있다.[70][41]

4. 1. 1. 방언

이라크 투르크멘은 1,200년 이상 이라크로의 다양한 튀르크 이주 물결로 인해 결코 동질적이지 않으며,[70][42] 방언은 지역적 특징에 따라 다를 수 있다.[68] 이 지역의 몇몇 권위있는 언어들이 특히 영향력을 미쳤는데, 1534년부터의 오스만 튀르크어와 바그다드 함락 (1624년) 이후의 페르시아어가 그 예이다. 오스만 제국이 1640년에 이라크를 재점령한 후, 이라크의 튀르크어 변종은 오스만 튀르크어뿐만 아니라 아랍어쿠르드어와 같은 지역의 다른 언어들의 영향을 계속 받았다.[70] 오스만 튀르크어는 행정상의 공식 언어일 뿐만 아니라 공용어였기 때문에 1920년까지 이라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41] 실제로, 튀르크어는 이라크 투르크멘 사이에서 권위 언어로 남아 그들의 방언에 심오한 역사적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이라크 투르크멘의 문법은 이란-튀르크어와 크게 다르다.[43]

일반적으로, 탈 아파르 (약 70만 명의 화자),[71] 알툰 쿠프리, 투즈 후르마투, 타자 후르마투, 키프리, 바시르 및 아미를리의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은 우르파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방언과의 통일성을 보여준다;[65][62] 한편, 키르쿠크, 에르빌, 도후크, 만달리 및 하나킨의 방언은 아제르바이잔어 타브리즈어 및 아프샤르어 튀르크 방언과 유사성을 보인다.[62] 그러나 키르쿠크 방언은 우르파와 비슷한 특징도 보이며,[63][64] 언어에 관해 질문한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 키르쿠크 주 인구의 21.4%가 모국어를 "튀르크어"로 자가 신고했다.[72] 특히, 이라크 투르크멘 지식인들 사이에서 터키에 대한 문화적 지향성이 우세하며, 이중 언어 사용 (터키의 튀르크어)은 특히 키르쿠크의 교육받은 계층에서 매우 빈번하다.[41] 또한, 에르빌 방언은 코소보에서 리제, 에르주룸 및 말라티야에 이르는 튀르크 방언과 유사성을 보인다.[73]

이라크 투르크멘은 일반적으로 터키 공화국에 대한 문화적 지향성 때문에 표준 튀르크어에 대한 능동적인 구사력을 가지고 있다.[68] 튀르크 미디어 매체 (특히 위성 TV)가 영향력을 미쳤으며, 튀르크 기관이 지원하는 튀르크어로 가르치는 사립 학교도 많이 있다.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과 표준 튀르크어 (터키의)의 이중 언어 사용은 광범위한 현상이 되었다.[68][69]

2020년, 이라크 투르크멘어에 대한 ISO 639 코드를 부여해 달라는 요청이 SIL에 제출되었지만,[74] 2024년에는 별개의 언어가 되기 위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여 거부되었다.[75]

4. 1. 2. 공식 지위

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터키어는 1930년 언어법 5조에 따라 키르쿠크와 키프리에서 공용어로 인정받았다.[76] 법 6조는 교육 언어를 학생 다수의 모국어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2조와 4조는 이라크 시민들에게 모든 경우에 법원 심리와 판결을 아랍어, 쿠르드어 또는 터키어로 구두 통역받을 권리를 부여했다.[76]

1932년 이라크가 국제 연맹에 가입하면서 연맹은 이라크에 소수 민족과 종교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76] 그 결과, 터키어는 쿠르드어와 함께 1932년 이라크 헌법에 따라 공용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이 투르크멘족인 키르쿠크의 리와(liwa)에서는 아랍어와 함께 쿠르드어 또는 터키어가 공용어가 된다."[77] 1조에 따르면, 어떤 법률, 명령 또는 정부 행위도 1932년 헌법의 조항에 모순될 수 없으며, 미래에도 변경될 수 없었다.[78]

그러나 1959년 군사 정권은 "투르크만"과 "투르크만자"라는 이름을 도입했다.[39] 더 최근에는 2005년 이라크 헌법 4조가 "인구 밀도가 높은 행정 구역"에서 "투르크멘어"를 (시리아어와 함께) 공식적인 소수 언어로 인정했다.[79]

4. 1. 3. 터키어 알파벳 채택

1997년 이라크 투르크멘 회의는 원칙 선언을 채택했으며, 3조는 "투르크멘의 공식 표기 언어는 이스탄불 터키어이며, 그 문자는 새로운 로마자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68] 2005년까지 터키어는 이라크 학교에서 아랍 문자를 사용했던 전통적인 투르크멘어를 대체했다.

4. 2. 교육

1993년 11월 17일, 에르빌과 키프리에서 최초의 투르크멘 학교 두 곳이 문을 열었다.[80] 2005년,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 지도자들은 학교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투르크멘어 대신 터키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투르크멘어는 아랍 문자를 사용했지만, 터키어는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터키어 알파벳 참조). 터키어로의 전환은 다른 민족 집단과 구별되는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바트당 정권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투르크멘인들은 아랍 문자에 익숙하여 터키어에 대한 문해율이 낮았기 때문에, 키르쿠크의 투르크멘 교육국은 터키어 수업을 개설하였다. 니네베의 교육부 투르크멘 담당자는 "유엔 이라크 지원 임무단"에 부모를 위한 터키어 수업 개설을 요청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키르쿠크에 본부를 둔 투르크멘 스카우트 연맹(''Türkmen Izcilik Federasyonu'')이 설립되었다.[81]

4. 3. 미디어

위성 텔레비전의 보급과 터키 미디어의 노출은 투르크멘어의 터키어 표준화를 야기했을 수 있으며, 터키 문화와 연관된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언어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이라크 키르쿠크에서 튀르크메넬리 TV 채널이 개국하여 터키어와 아랍어로 프로그램을 방송한다.[82] 2012년 현재, 튀르크메넬리 TV는 이라크키르쿠크바그다드, 그리고 터키 앙카라의 Çankaya 지역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82] 튀르크메넬리 TV는 TRT, TGRT, ATV 등 여러 터키 채널, 그리고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의 주요 방송사인 BRT와 프로그램 및 다큐멘터리 공유 협약을 체결했다.[82]

4. 4. 종교

이라크 투르크멘은 주로 무슬림이다.[83] 다수(약 60~70%)는 수니파이지만, 시아파를 따르는 투르크멘도 상당수(약 30%~40%) 존재한다.[83]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크멘은 1923년 건국 이후 터키 공화국에서 시행된 국가-종교 문제에 대한 세속주의적 해석을 내면화하여, 대체로 세속주의적이다.[83] 투르크멘은 주로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고등 교육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어 이라크 정치 문화에 내재된 종교적, 부족적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83]

소수의 이라크 투르크멘은 가톨릭교 신자이며,[7][8][84] 그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85] 1947년 인구 조사에서는 수니파 신자가 약 5만 명, 시아파 신자가 약 4만 2천 명이었다.[144] 투르크멘 성경 협회는 신약 성경을 이라크 투르크멘 방언으로 번역하여 2021년에 2,000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다.[86]

2014년 8월 30일, 과격파 조직 ISIL에 의해 포위된 아미를리/Amirli영어(알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이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 공급을 실시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는 미군에 의한 ISIL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145][146] 다음 날 31일에는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에 걸친 포위망이 풀렸다.[147]

5. 인구 통계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며, 1947년 인구 조사에서는 수니파 신자가 약 5만 명, 시아파 신자가 약 4만 2천 명이다.[144] 이라크 국내의 투르크멘인에 의한 정당으로는 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등이 있다.

2014년 8월 30일, 과격파 조직 ISIL에 의해 포위된 (알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이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 공급을 실시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는 미군에 의한 ISIL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145][146] 다음 날 31일에는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에 걸친 포위망이 풀렸다.[147]

키르쿠크의 이라크 투르크멘족


메수트 예겐에 따르면, 영국 외무부의 문서에서는 투르크멘족이 1919년 에르빌 시에서 다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89][90] 1957년 이라크 인구 조사(이후 인구 조사가 바트당 정권의 아랍화 정책을 반영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구 조사로 인정됨[91])에 따르면 총 인구 630만 명 중 56만 7천 명의 투르크족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9%를 차지했다.[92][93][94][95] 이는 아랍인과 쿠르드족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수치였다.[96]

그러나 비민주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들의 수는 항상 과소 평가되었으며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57년 인구 조사에서 이라크 정부는 처음에는 이라크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8년 혁명 이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인구가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수정된 수치인 56만 7천 명이 발표되었다.[97] 스콧 테일러는 그 결과의 정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57년 파이살 2세 왕, 즉 영국의 지원을 받는 군주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전체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멘족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투르크족으로부터 빼앗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스만 제국의 모든 잔재를 근절하거나 줄이기 위한 의도적인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압둘 카림 카심이 1958년 성공적인 7월 14일 혁명을 일으켜 23세의 파이살 2세 왕을 살해하고 영국인을 추방하며 이라크를 공화국으로 선포한 후 다른 숫자가 발표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8년의 두 번째 인구 조사에 따르면 투르크멘족의 등록 인원은 56만 7천 명으로,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증가했다.[98]

1967년, 1977년, 1987년 및 1997년에 실시된 후속 인구 조사는 이라크의 다양한 정권에 의한 조작 혐의로 인해 신뢰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99] 19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 22,017,983명 중 60만 명의[24][100]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있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2.7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인구 조사는 시민들에게 아랍인 또는 쿠르드족의 두 민족 중 하나에 속한다고 표시하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많은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식별하게 만들었다(쿠르드족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서 바람직한 민족 집단이 아니었음).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실제 수가 왜곡되었다.[99]

2004년 스코트 테일러는 이라크 투르크멘 인구가 이라크 전체 인구 2,500만 명 중 2,080,000명(8.32%)을 차지한다고 주장했으며,[98] 패트릭 클로슨은 이라크 투르크멘이 전체 인구의 약 9%를 차지한다고 언급했다.[88] 또한 유럽 소수 민족 연맹과 같은 국제 기구는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가 300만 명 또는 이라크 인구의 9~13%라고 밝혔다.[102][103] 이라크 투르크멘은 자신들의 전체 인구가 300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104] 컬럼비아 대학교의 걸프/2000 프로젝트에 따르면 2015년 이라크 전체 인구의 2.7%로 추산된다.[105]

알툰 쿠프리(Altınköprütr)의 기념비에 있는 투르크메넬리(Türkmenelitr) 지도.


이라크 투르크멘 청년이 투르크메넬리 스카프를 들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이라크 투르크멘 여성.


이라크 투르크멘은 주로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며, 이 지역을 "투르크메넬리"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이라크 중부의 북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있으며, 이라크 투르크멘은 키르쿠크를 수도로 여긴다.[87] 투르크메넬리 지역은 남쪽의 아랍 정착 지역과 북쪽의 쿠르드 지역 사이에 위치한다.[103]

리암 앤더슨과 가레스 스탠스필드는 투르크메넬리를 "터키, 시리아와의 이라크 국경에서 시작하여 이란 국경까지 대각선으로 뻗어있는 광대한 영토"로 묘사한다.[103] 투르크멘 소식통에 따르면, "투르크메넬리"의 영어식 표현인 "Turcomania"는 1785년 윌리엄 거스리가 발행한 지역 지도에 나타나지만, 20세기 말까지 투르크메넬리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다.

이라크 투르크멘은 알툰 쿠프리, 바드라, 바쿠바, 디얄라, 에르빌, 하나킨, 키프리, 키르쿠크, 키질리바트, 멘델리, 모술, 살라딘, 산카르, 텔 아파르, 투즈 후르마투 등 여러 주요 도시와 이 도시들과 관련된 작은 구역을 투르크메넬리의 일부로 간주한다.[103]

195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투르크멘은 키르쿠크시의 주민 다수를 차지했으며, 40%가 모국어를 "터키어"라고 밝혔다. 두 번째로 큰 이라크 투르크멘 도시는 텔 아파르로, 주민의 95%를 차지한다. 한때 디얄라 주의 키프리와 같은 주로 투르크멘 도시였던 곳은 쿠르드화 및 아랍화되었다.

일부 이라크 투르크멘은 투르크메넬리 지역 밖에도 거주한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특히 아다미야와 라게바 하툰 지역에 상당한 공동체가 거주하고 있다.[106] 에르빌의 투르크멘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며, 주로 시내의 타치, 마레케, 쓰리 탁 지역과 요새 주변에 거주한다.[10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이라크 투르크멘 시위.


대부분의 이라크 투르크멘족은 터키로 이주하며, 그 다음으로 독일, 덴마크, 스웨덴으로 이주한다.[108][109][110] 또한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그리스, 네덜란드, 영국에도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가 살고 있다.[108][109][110]

수피 사아트치 교수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약 1,00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캐나다에, 2,000명이 덴마크에, 4,000명이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111] 유럽 난민 위기 (2014–19) 이후 유럽 내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캐나다에 기반을 둔 캐나다 이라크 투르크멘 문화 협회와 같이, 이라크 투르크멘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많이 설립되어 있다.[112]

시카고의 투르크멘 공동체는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이후에 형성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북부 지역과 교외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장 노동자나 택시 운전사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의 모스크에 다닌다. 그들은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시카고 외부에 있는 형제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113]

이라크 투르크멘 전통 의상을 입고 투르크멘 깃발을 든 남성

5. 1. 인구



메수트 예겐에 따르면, 영국 외무부의 문서에서는 투르크멘족이 1919년 에르빌 시에서 다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89][90] 1957년 이라크 인구 조사(이후 인구 조사가 바트당 정권의 아랍화 정책을 반영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구 조사로 인정됨[91])에 따르면 총 인구 630만 명 중 56만 7천 명의 투르크족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9%를 차지했다.[92][93][94][95] 이는 아랍인과 쿠르드족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수치였다.[96]

그러나 비민주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들의 수는 항상 과소 평가되었으며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57년 인구 조사에서 이라크 정부는 처음에는 이라크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8년 혁명 이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인구가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수정된 수치인 56만 7천 명이 발표되었다.[97] 스콧 테일러는 그 결과의 정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1957년 파이살 2세 왕, 즉 영국의 지원을 받는 군주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전체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멘족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투르크족으로부터 빼앗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스만 제국의 모든 잔재를 근절하거나 줄이기 위한 의도적인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압둘 카림 카심이 1958년 성공적인 7월 14일 혁명을 일으켜 23세의 파이살 2세 왕을 살해하고 영국인을 추방하며 이라크를 공화국으로 선포한 후 다른 숫자가 발표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8년의 두 번째 인구 조사에 따르면 투르크멘족의 등록 인원은 56만 7천 명으로,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증가했다.[98]

1967년, 1977년, 1987년 및 1997년에 실시된 후속 인구 조사는 이라크의 다양한 정권에 의한 조작 혐의로 인해 신뢰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99] 19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 22,017,983명 중 60만 명의[24][100]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있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2.7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인구 조사는 시민들에게 아랍인 또는 쿠르드족의 두 민족 중 하나에 속한다고 표시하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많은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식별하게 만들었다(쿠르드족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서 바람직한 민족 집단이 아니었음).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실제 수가 왜곡되었다.[99]

5. 1. 1. 과거 인구 조사 및 논란



메수트 예겐에 따르면, 영국 외무부의 문서에서는 투르크멘족이 1919년 에르빌 시에서 다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89][90] 1957년 이라크 인구 조사(이후 인구 조사가 바트당 정권의 아랍화 정책을 반영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구 조사로 인정됨[91])에 따르면 총 인구 630만 명 중 56만 7천 명의 투르크족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9%를 차지했다.[92][93][94][95] 이는 아랍인과 쿠르드족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수치였다.[96]

그러나 비민주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들의 수는 항상 과소 평가되었으며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57년 인구 조사에서 이라크 정부는 처음에는 이라크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8년 혁명 이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인구가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수정된 수치인 56만 7천 명이 발표되었다.[97] 스콧 테일러는 그 결과의 정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57년 파이살 2세 왕, 즉 영국의 지원을 받는 군주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전체에 13만 6,800명의 투르크멘족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투르크족으로부터 빼앗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스만 제국의 모든 잔재를 근절하거나 줄이기 위한 의도적인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압둘 카림 카심이 1958년 성공적인 7월 14일 혁명을 일으켜 23세의 파이살 2세 왕을 살해하고 영국인을 추방하며 이라크를 공화국으로 선포한 후 다른 숫자가 발표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8년의 두 번째 인구 조사에 따르면 투르크멘족의 등록 인원은 56만 7천 명으로, 전년도 총 인구보다 400% 이상 증가했다.[98]

1967년, 1977년, 1987년 및 1997년에 실시된 후속 인구 조사는 이라크의 다양한 정권에 의한 조작 혐의로 인해 신뢰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99] 19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 22,017,983명 중 60만 명의[24][100]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있었으며, 이는 전체 이라크 인구의 2.7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인구 조사는 시민들에게 아랍인 또는 쿠르드족의 두 민족 중 하나에 속한다고 표시하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많은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식별하게 만들었다(쿠르드족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서 바람직한 민족 집단이 아니었음). 따라서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실제 수가 왜곡되었다.[99]

5. 1. 2. 기타 추정치

2004년 스코트 테일러는 이라크 투르크멘 인구가 이라크 전체 인구 2,500만 명 중 2,080,000명(8.32%)을 차지한다고 주장했으며,[98] 패트릭 클로슨은 이라크 투르크멘이 전체 인구의 약 9%를 차지한다고 언급했다.[88] 또한 유럽 소수 민족 연맹과 같은 국제 기구는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가 300만 명 또는 이라크 인구의 9~13%라고 밝혔다.[102][103] 이라크 투르크멘은 자신들의 전체 인구가 300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104] 컬럼비아 대학교의 걸프/2000 프로젝트에 따르면 2015년 이라크 전체 인구의 2.7%로 추산된다.[105]

5. 2. 거주 지역



이라크 투르크멘은 주로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며, 이 지역을 "투르크메넬리"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이라크 중부의 북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있으며, 이라크 투르크멘은 키르쿠크를 수도로 여긴다.[87] 투르크메넬리 지역은 남쪽의 아랍 정착 지역과 북쪽의 쿠르드 지역 사이에 위치한다.[103]

리암 앤더슨과 가레스 스탠스필드는 투르크메넬리를 "터키, 시리아와의 이라크 국경에서 시작하여 이란 국경까지 대각선으로 뻗어있는 광대한 영토"로 묘사한다.[103] 투르크멘 소식통에 따르면, "투르크메넬리"의 영어식 표현인 "Turcomania"는 1785년 윌리엄 거스리가 발행한 지역 지도에 나타나지만, 20세기 말까지 투르크메넬리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다.

이라크 투르크멘은 알툰 쿠프리, 바드라, 바쿠바, 디얄라, 에르빌, 하나킨, 키프리, 키르쿠크, 키질리바트, 멘델리, 모술, 살라딘, 산카르, 텔 아파르, 투즈 후르마투 등 여러 주요 도시와 이 도시들과 관련된 작은 구역을 투르크메넬리의 일부로 간주한다.[103]

195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투르크멘은 키르쿠크시의 주민 다수를 차지했으며, 40%가 모국어를 "터키어"라고 밝혔다. 두 번째로 큰 이라크 투르크멘 도시는 텔 아파르로, 주민의 95%를 차지한다. 한때 디얄라 주의 키프리와 같은 주로 투르크멘 도시였던 곳은 쿠르드화 및 아랍화되었다.

일부 이라크 투르크멘은 투르크메넬리 지역 밖에도 거주한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특히 아다미야와 라게바 하툰 지역에 상당한 공동체가 거주하고 있다.[106] 에르빌의 투르크멘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며, 주로 시내의 타치, 마레케, 쓰리 탁 지역과 요새 주변에 거주한다.[107]

5. 3. 디아스포라

대부분의 이라크 투르크멘족은 터키로 이주하며, 그 다음으로 독일, 덴마크, 스웨덴으로 이주한다.[108][109][110] 또한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그리스, 네덜란드, 영국에도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가 살고 있다.[108][109][110]

수피 사아트치 교수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약 1,00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족이 캐나다에, 2,000명이 덴마크에, 4,000명이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111] 유럽 난민 위기 (2014–19) 이후 유럽 내 이라크 투르크멘족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캐나다에 기반을 둔 캐나다 이라크 투르크멘 문화 협회와 같이, 이라크 투르크멘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많이 설립되어 있다.[112]

시카고의 투르크멘 공동체는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이후에 형성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북부 지역과 교외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장 노동자나 택시 운전사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의 모스크에 다닌다. 그들은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시카고 외부에 있는 형제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113]

6. 탄압

이라크 투르크멘의 지위는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상업 계층에서 점차 인종 차별을 받는 소수 민족으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이라크 투르크멘은 1959년 키르쿠크 학살과 같은 여러 차례의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또한 바트당 정권 하에서 이라크 투르크멘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어 1979년 여러 지도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이라크 투르크멘 공동체는 국가의 아랍화 정책과, 고향에서 강제로 몰아내려는 쿠르드족의 쿠르드화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박해와 추방에서 공포와 인종 청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억압과 동화 정책으로 고통받았다. 1925년 헌법에서 구성 단체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투르크멘은 이후 이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따라서 문화적 권리를 점차 빼앗기고 활동가들은 추방되었다.

2014년 8월 30일, 과격파 조직 ISIL에 의해 포위된 아미를리/Amirlitr(알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이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 공급을 실시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는 미군에 의한 ISIL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다.[145][146] 다음 날 31일에는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에 걸친 포위망이 풀렸다.[147]

6. 1. 학살

이라크 투르크멘 묘지


1924년, 이라크 투르크멘은 오스만 제국의 불충한 잔재이자, 터키 공화국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 민족주의와 연관된 존재로 여겨졌다. 키르쿠크의 이라크 투르크멘은 파이살 1세를 지지하지 않아 이라크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었다. 5월 4일, 영국 정부가 징집한, 주로 아시리아인으로 구성된 이라크 레비스 군인과 투르크멘 상인 간의 다툼이 키르쿠크 시장에서 투르크멘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200명의 투르크멘이 아시리아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1946년 7월 12일, 키르쿠크 가부르바으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약 2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 민간인이 이라크 경찰관에 의해 살해되었다.[114][115]

1959년 키르쿠크 학살은 이라크 정부가 키르쿠크에서 주로 이라크 공산당원인 쿠르드족이 이라크 투르크멘을 공격하도록 허용하면서 발생했다., 1959년 7월 쿠르드족인 마루프 바르진지가 키르쿠크 시장으로 임명된 후, 7월 14일 혁명 기념 행사 이후 긴장이 고조되었고, 도시 내의 적대감은 쿠르드족과 이라크 투르크멘 사이에서 급격히 양극화되었다. 1959년 7월 14일, 이라크 투르크멘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로 약 2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이 사망했다. 1959년 7월 15일, 이라크군 제4여단의 쿠르드족 군인들이 이라크 투르크멘 주거 지역에 박격포를 발사하여 120채의 가옥을 파괴했다., 7월 17일 바그다드에서 온 군부대가 질서를 회복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지칭하며 31명에서 79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이 사망하고 약 130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

1991년 3월 28일, 걸프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군은 투르크멘 마을 알툰 쿠프리에서 135명 이상의 투르크멘 민간인을 살해했다.[116][117]

6. 1. 1. 1924년 키르쿠크 학살

1924년, 이라크 투르크멘은 오스만 제국의 불충한 잔재로 여겨졌으며, 터키 공화국에서 부상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새로운 터키 민족주의 이념과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키르쿠크 지역에 거주하는 이라크 투르크멘은 특히 파이살 1세의 이라크 왕위 등극을 지지하지 않아 이라크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5월 4일, 이러한 긴장은 이라크 레비스 군인들 간의 폭력으로 번졌다.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정부가 징집한 군대로 주로 아시리아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아시리아인 병사와 투르크멘 상인 간의 다툼 이후 키르쿠크 시장에서 투르크멘과 충돌했다. 이어진 난투극에서 200명의 투르크멘이 아시리아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6. 1. 2. 1946년 가부르바으 학살

1946년 7월 12일, 키르쿠크의 가부르바으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약 2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 민간인이 이라크 경찰관에 의해 살해되었다.[114][115]

6. 1. 3. 1959년 키르쿠크 학살

1959년 키르쿠크 학살은 이라크 정부가 키르쿠크에서 주로 이라크 공산당원인 쿠르드족이 이라크 투르크멘을 공격하도록 허용하면서 발생했다., 1959년 7월 쿠르드족인 마루프 바르진지가 키르쿠크 시장으로 임명된 후, 7월 14일 혁명 기념 행사 이후 긴장이 고조되었고, 도시 내의 적대감은 쿠르드족과 이라크 투르크멘 사이에서 급격히 양극화되었다. 1959년 7월 14일, 이라크 투르크멘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약 20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이 사망했다. 또한, 1959년 7월 15일, 이라크군 제4여단의 쿠르드족 군인들이 이라크 투르크멘 주거 지역에 박격포를 발사하여 120채의 가옥을 파괴했다., 7월 17일 바그다드에서 온 군부대가 질서를 회복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지칭하며 31명에서 79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이 사망하고 약 130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

6. 1. 4. 1991년 알툰 쿠프리 학살

1991년 3월 28일, 걸프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군은 투르크멘 마을 알툰 쿠프리에서 135명 이상의 투르크멘 민간인을 살해했다.[116][117]

6. 2. 아랍화

1980년 사담 후세인 정부는 소수 민족에 대한 동화 정책을 채택했다. 정부의 이주 계획으로 수천 명의 이라크 투르크멘이 이라크 북부의 전통적인 고향에서 이주하여 아랍인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해당 지역을 아랍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라크 투르크멘 마을과 도시가 아랍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파괴되었고, 이들에게는 무료 토지와 재정적 인센티브가 약속되었다.

바트 정권은 키르쿠크시가 역사적으로 이라크 아랍 도시였으며 문화적 성향을 확고히 유지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아랍화의 첫 번째 물결은 이라크 중부와 남부에서 아랍인 가족들이 키르쿠크로 이주하여 확장되는 석유 산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라크 투르크멘이 적극적으로 쫓겨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아랍인 거주지가 도시에 세워졌고 아랍인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도시의 전반적인 인구 균형이 변화했다.

여러 대통령령과 국가 안보 및 정보 기관의 지침은 바트 정권 동안 동화 과정에서 이라크 투르크멘이 특별한 관심 대상이었음을 나타낸다. 1980년 5월 6일 이라크 군사 정보국은 지침 1559호를 발표하여 키르쿠크의 이라크 투르크멘 공무원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1981년 10월 30일, 혁명 지휘 위원회는 법령 1391호를 발표하여 키르쿠크의 이라크 투르크멘 추방을 승인했다.

이러한 아랍화 정책의 주요 피해자인 이라크 투르크멘은 토지 몰수와 직업 차별을 겪었고, 따라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등록했다. 민족 청소는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에서 이라크 투르크멘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바트주의 정책의 한 요소였다. 키르쿠크와 같은 도시에 남아있는 이라크 투르크멘은 지속적인 동화 정책의 대상이 되었고, 투르크계 지명의 학교, 동네, 마을, 거리, 시장, 심지어 모스크까지 바트당이나 아랍 영웅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대에 키르쿠크의 많은 이라크 투르크멘 마을과 동네가 철거되기도 했다.

6. 3. 투르크멘-쿠르드족 긴장과 쿠르드화

터키어로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이라크 투르크멘 여성: Kerkük'ü hiçbir güç Kürtleştiremez ("어떤 세력도 키르쿠크를 쿠르드화할 수 없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투르크멘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기는 땅에 대한 ''사실상'' 주권을 주장했다. 이라크 투르크멘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유산으로서 이 지역의 정당한 상속자로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따라서, 쿠르디스탄 지역과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투르크멘을 근절하거나 동화시키려는 전략을 통해 그들의 생존을 위협했다고 주장된다. 1991년 쿠르디스탄 지역의 형성은 쿠르드족과 이라크 투르크멘 사이에 높은 적대감을 조성했고, 그 결과 일부 이라크 투르크멘은 쿠르드화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리암 앤더슨은 말한다. 이라크 투르크멘의 가장 큰 밀집 지역은 에르빌의 사실상 수도에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중요한 행정 및 경제적 지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그들은 점점 더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1996년 이후 마수드 바르자니의 쿠르디스탄 민주당(KDP)이 통치하는 도시의 권력자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앤더슨과 스탠스필드에 따르면, 1990년대에 쿠르드족과 이라크 투르크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KDP와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PUK)이 이 지역의 정치적 패권자로 제도화되었고, 이라크 투르크멘의 관점에서 그들을 권력의 자리에서 소외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쿠르디스탄 정체성으로 통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앙카라의 지원을 받아 1995년 4월 24일 투르크멘 정당들의 새로운 정치 전선인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ITF)이 결성되었다.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과 KDP의 관계는 10년이 지나면서 긴장되었고 악화되었다.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과 관련된 이라크 투르크멘들은 쿠르드 보안군에 의한 괴롭힘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2000년 3월, 휴먼 라이츠 워치는 KDP의 보안군이 에르빌에 있는 ITF 사무실을 공격하여 두 명의 경비원을 살해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두 정당 간의 오랜 분쟁 이후의 일이었다. 2002년, KDP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추가적인 제도화를 지지하는 이라크 투르크멘 정치 조직인 투르크멘 국민 협회를 만들었다. 이는 친 ITF 이라크 투르크멘들이 이라크 투르크멘의 반대를 "매수"하고 앙카라와의 유대를 끊으려는 의도적인 시도로 여겨졌다. KDP가 이라크 투르크멘의 "진정한 목소리"로 홍보한 투르크멘 국민 협회는 친 쿠르디스탄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라크 투르크멘의 유일한 대표 목소리로서 ITF를 효과적으로 약화시켰다. 2003년부터 투르크멘이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도시인 키르쿠크에서 쿠르드족과 투르크멘 간에 폭동이 발생했다.[118]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KRG와 페쉬메르가는 "키르쿠크를 불법적으로 감시하고, 투르크멘과 아랍인을 납치하여 고문했다."[118] 2003년에서 2006년 사이에 탈 아파르에서 1,350명의 투르크멘이 주로 종파 폭력과 전쟁으로 사망했으며 수천 채의 가옥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어 4,685가구가 이재민이 되었다.[118]

6. 4. IS 통치 하의 집단 학살

이라크 투르크멘 집단 학살 문서를 참고하라.

7. 정치

2005년 1월, 이라크 과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10~12명의 투르크멘계 인사가 선출되었다.[119][120] 이들 중에는 이라크 연합 명단에서 5명,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ITF)에서 3명, 쿠르디스탄 민주 애국 연합에서 2~4명이 포함되었다. 2005년 12월 선거에서는 5~7명의 투르크멘 후보가 대표 위원회에 선출되었는데, ITF 지도자 사아데딘 아르케지를 포함하여 ITF에서 1명, 이라크 연합에서 2~4명, 이라크 협약 전선에서 1명, 쿠르디스탄 연합에서 1명이 포함되었다.[120][121]

이라크 투르크멘은 북부 이라크와 쿠르디스탄 지역의 미래 지위를 둘러싼 논쟁에서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이라크 연방주의, 특히 키르쿠크의 쿠르디스탄 지역 정부로의 병합 제안에 반대하는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과 같은 정치 조직에 자금을 지원했다.[122]

그러나 키르쿠크를 둘러싼 쿠르드족과의 긴장은 점차 완화되었고, 2006년 1월 30일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쿠르드족이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을 위해 작성 중인 새 헌법에서 투르크멘이 다수인 지역에 자치를 부여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123]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2003년 이후 쿠르디스탄 민주당(KDP)과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PUK)에 의한 쿠르드화 정책(비쿠르드족의 이주 강요)은 심각한 민족 간 문제를 야기했다.

2014년 8월 30일, ISIL에 포위된 아미를리의 시아파 투르크멘인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으로 인도적 지원 물품을 공급했다. 또한 아미를리 주변에서 미군이 ISIL을 공습했고,[145][146] 다음 날 ISIL이 철수하여 2개월 이상 지속된 포위망이 풀렸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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