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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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군은 동아시아에서 군 지휘관을 의미하는 용어로,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역할을 지녔다. 중국에서는 춘추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전국 시대에 다양한 직책으로 발전했으며, 한나라 시대에는 군주를 능가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 국가와 일본은 중국 왕조로부터 장군호를 받아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고려 시대에는 상장군이 최고위 무관직이었고, 조선 시대에는 오위 체제 하에 장군이 존재했다. 현대에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의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국가 지도자를 지칭하는 경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 동아시아의 장군
2. 1. 중국
춘추 시대 진나라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군 지휘관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1][4][2] 전국 시대에는 각국에서 장군을 임명했으며, 상장군, 대장군, 비장군 등 다양한 직책이 등장했다.[3][8][9][10][11][12] 이 시기의 장군은 군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5][6][7]
전한 최초의 장군은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에 유방이 한왕으로 임명한 대장군 한신이다.[13] 초한전쟁 동안 한나라 군대를 총지휘한 것은 유방 자신이었다. 유방의 경쟁 상대였던 초의 항우는 별동 부대 지휘를 위해 다양한 장군을 임명했다. 고조 4년(기원전 203년) 제나라의 거기장군 화무상은 수식어가 붙은 장군의 첫 사례이다.[15]
유방의 통일 이후, 고조 시대에는 내외 전쟁에 대장군, 상장군 또는 그냥 장군을 임명했다. 태위가 장군보다 높은 직책으로 전시 지휘를 맡기도 했다. 이때, 장군·대장군 외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장군이 나타났다. 거기장군은 고조 5년(기원전 202년) 관영이 처음 임명되었고,[16] 문제 즉위 직후(기원전 180년) 송창이 위장군으로 임명되면서[17] 종류가 늘어났다. 전한의 장군은 군주의 명령도 미치지 않는 강력한 통제권을 가졌고, 군대 내에서 독단적인 사형 집행과[18] 부하 임명권을 가졌다.[19]
오초칠국의 난에서는 태위 주아부가 총지휘를 맡아 36명의 장군을 이끌었다. 흉노와의 전쟁이 계속된 무제 시대에는 장군 수가 늘었고,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은 큰 공을 세웠다. 무제 이후 외척 등이 평시에 대장군이 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상설직은 아니었다. 황제가 어리면 장군의 군권이 정변 방어에 도움이 되었지만, 황제가 직접 통치하면 장군 임명을 꺼렸다. 전한 말기에는 상설직에 가까워졌다. 전한 시대에는 지방 반란 지도자들이 장군을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장군의 군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20]
후한에서는 장군 간의 등급이 정해져 대장군이 삼공에 필적하는 최고위직이었다. 그 아래에 표기장군, 위장군, 거기장군이 있었고, 임시직인 잡호장군이 있었다.
전한 무제 이후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 등 고위직인 중호장군(重號將軍)과 역할, 공적을 나타내는 잡호장군이 등장했다. 중호장군은 장군부를 열어 정치에 관여했다. 삼국 시대 이후에는 사정장군(四征將軍)·사진장군(四鎭將軍)·사안장군(四安將軍)·사평장군(四平將軍)이 중호장군에 추가되었다.[21] 상위 칭호, 좌측 칭호일수록 격이 높았다.[21]
품계 | 장군호 |
---|---|
1품 | 대장군 |
2품 | 표기·거기·위, 여러 대장군 |
3품 | 사정(정동·정남·정서·정북) 사진(진동·진남·진서·진북) 중군·진군·무군 사안(안동·안남·안서·안북) 사평(평동·평남·평서·평북) 전·좌·우·후 정로·챔피언·보국·용양 |
4품 | 좌위·우위·효기·유격 좌군·우군·전군·후군 녕삭 건위·진위·분위·양위·광위 건무·진무·분무·양무·광무 |
5품 | 적사·강노 응양·절충·경차·양렬·녕원·재관·복파·릉강 |
3세기에서 7세기까지 중국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군주에게 왕호와 함께 장군호를 요구하며 경쟁했다.[22] 고구려, 백제, 왜 등은 중국 왕조로부터 장군호를 받아 자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국명 | 장군호의 상승 |
---|---|
고구려 | (남조 수여) 정동장군 → 정동대장군 → 차기대장군 → 무군(동)대장군 → 영동장군 (북조 수여) 정동장군 → 차기대장군 → 안동장군 → 표기대장군 → 대장군 |
백제 | 진동장군 → 진동대장군 |
왜 | 안동장군 → 안동대장군 → 진동대장군 → 정동대장군 |
가야 | 보국장군 |
토욕혼 | 정서장군 |
4세기에서 6세기, 중국 주변 국가들은 군주 교체 시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군주에게 부여되는 "왕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관할 영역, 장군호" 등을 갱신하고, 신하들을 위한 장군 칭호도 요청했다. 이를 통해 국내를 통치하려 했다.[22] 중국 왕조는 칭호 승급을 꺼려 선대 군주의 칭호를 답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2]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비고 |
---|---|---|---|---|
421년 | 왜찬 | 안동장군[23] | ||
438년 | 왜진 | 안동대장군 | 안동장군[24] | |
〃 | 왜수이(왕족) | 평서장군[25] | ||
〃 | (왜수이를 포함한 신하 13명에게) | 평서장군·정로장군·관군장군·보국장군 등[25] | ||
443년 | 왜제 | 안동장군[26] | ||
451년 | 왜제 | 안동대장군 | (승격되지 않음)[27] | |
462년 | 왜흥(세자) | 안동장군[28] | ||
478년 | 왜무 | 안동대장군 | 안동대장군[29] | |
479년 | 왜무 | 진동대장군[30] | 제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1] | |
502년 | 왜무 | 정동대장군[32] | 양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2]。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비고 |
---|---|---|---|---|
372년 | 여구 | 진동장군[33] | ||
416년 | 여영 | 진동장군[34] | ||
421년 | 여영 | 진동대장군[35] | ||
457년 | 여경 | 진동대장군[36] | ||
458년 | 여기(왕족) | 행관군장군 | 관군장군[37] | |
〃 | 여곤(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운(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도(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여예(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목금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작(왕족)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류(왕족)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미귀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우서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38] | |
〃 | 여루(왕족)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25] | |
502년 | 여대 | 정동대장군[32] | 양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2]。 | |
521년 | 여륭 | 녕동대장군 | ||
524년 | 여명 | 수동대장군 | ||
570년 | 여창 | 차기대장군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장군호(북조제정) | 비고 |
---|---|---|---|---|---|
413년 | 고련 | 정동장군[39] | 동진으로부터。 | ||
417년 | 고련 | 정동대장군[35] | 송으로부터。 | ||
435년 | 고련 | 정동장군[40] | 북위로부터。 | ||
463년 | 고거련 | 차기대장군[41] | 송으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 | 북위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02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32] | 양으로부터。 | ||
508년 | 고라운 | 무군(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20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 | 북위로부터、사후 추증。 | ||
520년 | 고흥안 |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20년 | 고흥안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50년 | 고평성 | 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제로부터 | ||
560년 | 고양성 | 영호동이교위 | 북제에 의함。 | ||
562년 | 고양성 | 녕동장군 | 진에 의함。 | ||
577년 | 고양성 | 대장군 | 북주에 의함。 | ||
581년 | 고양성 | 대장군 | 수에 의함。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제정) | 비고 | |
---|---|---|---|---|---|
648년 | 김춘추 | 좌무위장군 | 당에 의함。김춘추의 아들。 | ||
674년 | 김인문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제。 | ||
675년 | 김법민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김인문의 형。 | ||
687년 | 김이홍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무주에 의함。 | ||
702년 | 김흥광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13년 | 김흥광 |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군 | 당에 의함。 | ||
이후의 역대 왕은 장군호를 받지 않음。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제정) | 비고 | |
---|---|---|---|---|---|
692년 | 대조영 | 좌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19년 | 대문예 | 좌효위장군 | 당에 의함。왕제。당에 망명。 | ||
737년 | 대흠무 | 좌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94년 | 대숭린 | 우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대숭린의 시대에 군주의 칭호가 "군왕"에서 "국왕"으로 진전되었고, 이에 따라 부수되는 관직, 작위, 도독직 등 도 격상되었으며, 이후의 역대 "국왕"은 "장군" 호 에 대신하여 문관직을 수여받게 되었다. | |||||
"가수"는, 수봉 측이 희망하는 칭호, "제정"은 중국 측이 실제로 수여한 칭호.
2. 1. 1. 춘추전국시대
춘추 시대 진나라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군 지휘관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1][4][2] 전국 시대에는 각국에서 장군을 임명했으며, 상장군, 대장군, 비장군 등 다양한 직책이 등장했다.[3][8][9][10][11][12] 이 시기의 장군은 군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5][6][7]2. 1. 2. 전한
전한 최초의 장군은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왕이 된 직후에 임명한 대장군 한신이다.[13] 한신은 별군을 이끌고 조나라로 진출했으나, 고조 3년(기원전 204년) 6월에 패주해 온 유방에게 인수를 빼앗기고 해임되었다.[14] 한신은 다시 조나라의 상국이 되어 제나라를 정복하고, 이윽고 제왕이 되었기에 한나라의 장군이 아니게 되었다. 한군을 총지휘한 것은 유방 자신이었으며, 초한 전쟁 동안 다른 장군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유방과 적대 관계에 있던 초(서초)의 항우는 별동군 지휘에 다양한 장군을 임명했다. 당시에는 패권을 다투는 한나라와 초나라 외에도 왕이 있었고, 장군을 임명했다. 그중 한 명인 고조 4년(기원전 203년)의 제나라 거기장군이었던 화무상도 있었는데, 이는 수식어를 붙인 장군의 첫 사례이다.[15]
천하 평정 후, 고조 시대에는 대장군, 상장군, 또는 장군을 내외 전쟁에서 임명했다. 또한, 태위가 장군보다 상위 직책으로 전시 지휘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때, 장군·대장군이라는 명칭 외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인 장군이 나타났다. 이러한 장군의 시작이 거기장군이며, 전한에서는 고조 5년(기원전 202년)에 관영이 처음 임명되었다.[16] 이어서 문제가 즉위 직후(기원전 180년)에 송창을 위장군으로 임명했고[17], 점점 종류가 늘어갔다.
전한의 장군은, 군주의 명령도 미치지 않는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군대 내에서 독단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18] 또한, 부하를 스스로 임명하는 독자적인 인사권도 있었다.[19]
오초칠국의 난에서 한나라는 대장군을 임명했으나, 전체 지휘는 태위 주아부가 맡았고, 36명의 장군을 이끌고 싸웠다. 이 전쟁에서 한나라 외의 여러 나라도 자국의 장군을 임명했다. 흉노와의 전쟁이 계속된 무제 시대에는 장군의 수가 늘어났으며, 최대 공적을 세운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은 죽을 때까지 장군직에서 해임되지 않았다.
무제 이후에는, 외척 등의 중신이 평시에 대장군이 되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완전한 상설직이 되지는 않았다. 황제가 어리고 스스로 군사적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에는, 장군의 군권이 정변에 대한 방어가 된다. 황제가 직접 통치에 나서면, 그 군권을 위태롭게 여겨, 장군을 임명하려 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단명한 황제가 이어진 전한 말기에는 상설직에 가까워졌다.
전한 시대에는 많은 지방 반란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중에는 장군을 자칭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 원래 장군은 왕이나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므로, 먼저 황제 또는 왕을 자칭하는 자가 나오고, 그 자가 부하를 장군으로 임명하는 것이 순리이나, 왕이나 황제 없이 장군을 자칭하는 것이다. 장군이 가진 군권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20]
2. 1. 3. 후한
후한에서는 장군 간의 등급이 정해졌으며, 최상급인 대장군은 삼공에 필적하는 중직이었다. 그 아래에 표기장군, 위장군, 거기장군이 있었고, 그 아래에 상장군, 복파장군 등 임시로 임명되는 잡호장군이 있었다.2. 1. 4. 장군호의 서열
전한의 무제 이후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과 같은 높은 지위를 가진 중호장군(重號將軍)과 역할이나 군사적 공적을 나타내는 칭호를 붙인 잡호장군이 나타났다. 중호장군은 장군부를 개부하여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한대에는 대·표기·거기·위·사방(전·좌·우·후)뿐이었지만, 삼국 시대 이후에는 사정장군(四征將軍)·사진장군(四鎭將軍)·사안장군(四安將軍)·사평장군(四平將軍)이 중호장군에 더해졌다.[21]상단의 칭호일수록, 또한 좌측의 칭호일수록 격이 높다[21]。
품계 | 장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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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품 | 대장군 |
2품 | 표기·거기·위, 여러 대장군 |
3품 | 사정(정동·정남·정서·정북) 사진(진동·진남·진서·진북) 중군·진군·무군 사안(안동·안남·안서·안북) 사평(평동·평남·평서·평북) 전·좌·우·후 정로·챔피언·보국·용양 |
4품 | 좌위·우위·효기·유격 좌군·우군·전군·후군 녕삭 건위·진위·분위·양위·광위 건무·진무·분무·양무·광무 |
5품 | 적사·강노 응양·절충·경차·양렬·녕원·재관·복파·릉강 |
2. 1. 5. 동아시아 각국의 장군호
3세기에서 7세기까지 중국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군주에게 왕호와 함께 장군호를 요구하며 경쟁했다.[22] 고구려, 백제, 왜(일본) 등은 중국 왕조로부터 장군호를 받아 자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국명 | 장군호의 상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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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남조 수여) 정동장군 → 정동대장군 → 차기대장군 → 무군(동)대장군 → 영동장군 (북조 수여) 정동장군 → 차기대장군 → 안동장군 → 표기대장군 → 대장군 |
백제 | 진동장군 → 진동대장군 |
왜 | 안동장군 → 안동대장군 → 진동대장군 → 정동대장군 |
가야 | 보국장군 |
토욕혼 | 정서장군 |
4세기에서 6세기, 중국 주변 국가들은 군주 교체 시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군주에게 부여되는 "왕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관할 영역, 장군호" 등을 갱신하고, 신하들을 위한 장군 칭호도 요청했다. 이를 통해 국내를 통치하려 했다.[22] 중국 왕조는 칭호 승급을 꺼려 선대 군주의 칭호를 답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2]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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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년 | 왜찬 | 안동장군[23] | ||
438년 | 왜진 | 안동대장군 | 안동장군[24] | |
〃 | 왜수이(왕족) | 평서장군[25] | ||
〃 | (왜수이를 포함한 신하 13명에게) | 평서장군·정로장군·관군장군·보국장군 등[25] | ||
443년 | 왜제 | 안동장군[26] | ||
451년 | 왜제 | 안동대장군 | (승격되지 않음)[27] | |
462년 | 왜흥(세자) | 안동장군[28] | ||
478년 | 왜무 | 안동대장군 | 안동대장군[29] | |
479년 | 왜무 | 진동대장군[30] | 제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1] | |
502년 | 왜무 | 정동대장군[32] | 양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2]。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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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년 | 여구 | 진동장군[33] | ||
416년 | 여영 | 진동장군[34] | ||
421년 | 여영 | 진동대장군[35] | ||
457년 | 여경 | 진동대장군[36] | ||
458년 | 여기(왕족) | 행관군장군 | 관군장군[37] | |
〃 | 여곤(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운(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도(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여예(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목금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작(왕족)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류(왕족)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미귀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우서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38] | |
〃 | 여루(왕족)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25] | |
502년 | 여대 | 정동대장군[32] | 양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2]。 | |
521년 | 여륭 | 녕동대장군 | ||
524년 | 여명 | 수동대장군 | ||
570년 | 여창 | 차기대장군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장군호(북조제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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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년 | 고련 | 정동장군[39] | 동진으로부터。 | ||
417년 | 고련 | 정동대장군[35] | 송으로부터。 | ||
435년 | 고련 | 정동장군[40] | 북위로부터。 | ||
463년 | 고거련 | 차기대장군[41] | 송으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 | 북위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02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32] | 양으로부터。 | ||
508년 | 고라운 | 무군(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20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 | 북위로부터、사후 추증。 | ||
520년 | 고흥안 |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20년 | 고흥안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50년 | 고평성 | 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제로부터 | ||
560년 | 고양성 | 영호동이교위 | 북제에 의함。 | ||
562년 | 고양성 | 녕동장군 | 진에 의함。 | ||
577년 | 고양성 | 대장군 | 북주에 의함。 | ||
581년 | 고양성 | 대장군 | 수에 의함。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제정)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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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 | 김춘추 | 좌무위장군 | 당에 의함。김춘추의 아들。 | ||
674년 | 김인문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제。 | ||
675년 | 김법민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김인문의 형。 | ||
687년 | 김이홍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무주에 의함。 | ||
702년 | 김흥광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13년 | 김흥광 |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군 | 당에 의함。 | ||
이후의 역대 왕은 장군호를 받지 않음。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제정)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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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년 | 대조영 | 좌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19년 | 대문예 | 좌효위장군 | 당에 의함。왕제。당에 망명。 | ||
737년 | 대흠무 | 좌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94년 | 대숭린 | 우효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대숭린의 시대에 군주의 칭호가 "군왕"에서 "국왕"으로 진전되었고, 이에 따라 부수되는 관직, 작위, 도독직 등 도 격상되었으며, 이후의 역대 "국왕"은 "장군" 호 에 대신하여 문관직을 수여받게 되었다. | |||||
"가수"는, 수봉 측이 희망하는 칭호, "제정"은 중국 측이 실제로 수여한 칭호.
2. 2. 일본
일본에서는 일본서기에 기술된 시대부터 사용되었다.[42] 중국의 남북조 시대 사서에는 왜의 오왕이 남조의 황제로부터 안동대장군 등의 장군호를 받거나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군을 일본어로 훈독할 경우 "이쿠사노카미"이다.일본의 율령제에서는 군방령 24조에 장군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장수가 출정할 때 병사 1만 명 이상이면 장군 1명, 부장군 2명을 두었다. 또한 3군마다 대장군 1명을 두도록 하였으나, 실제 임명은 이 병력수에 근거하지 않았고, 특히 대장군 아래에 여러 장군을 두는 형태는 한 번도 취해지지 않았다.[42] 장군은 원칙적으로 임시 임명이며, 임명된 상황은 동쪽의 에미시에 대한 원정, 남서쪽의 하야토나 외국에 대한 원정, 천황의 행행 호위, 도읍에 온 외국 사절이나 에미시·하야토의 영접의 네 가지였다. 각 장군은 각각 다른 칭호를 붙였으며, 단순한 "장군"만의 관명은 없었다. 예를 들어, 에미시와의 전투에서는 무츠 진토 장군·정에치고에미시장군·정적장군·정동장군·정벌대장군 등, 하야토와의 전투에서는 토비적장군·정준인 지절도대장군, 외국에는 정신라대장군 등, 행행과 영접에서는 좌장군·우장군·어전 기병장군·어후 기병장군·기병대장군 등이었다. 유일하게 상설된 것이 진수장군(후에 진수부장군)으로, 에미시에 대한 방비를 맡았다.
상설된 무관에는 근위부·병위부가 있으며, 특히 현관인 근위대장은 "장군"이라고 불렸다[42].당명에는 "친위대장군·우림대장군·천우대장군·당아대장군"이 있었다. 또한 병위부의 차관인 병위좌의 당명도 "무위장군"이다[42]。
동국에 무가 정권을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우근위대장을 사임한 후 "대장군"의 지위를 원했다.[42]요리토모의 요청을 받은 조정은 선례를 조사하여 1192년에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했다. 요리토모의 계승자인 가마쿠라 막부 쇼군은 대대로 세이이타이쇼군의 직에 있었고, 다른 쇼군 직은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쇼군은 세이이타이쇼군의 약칭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쇼군은 무사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고, 어소라고 존칭되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진수부 쇼군이 부활한다. 남조측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자신의 아들인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무쓰노카미 · 진수부 쇼군에 임명됨에 따라, 삼위 이상의 쇼군은 진수대장군으로 하도록 주청했다. 이로 인해 아키이에는 진수대장군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남조 측의 세력 쇠퇴에 따라 무로마치 시대에는 세이이타이쇼군인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존재만이 남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쇼군을 가리켜 구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가마쿠라 구보 등의 호칭도 파생되었다.
에도 시대의 쇼군은 정이대장군인 에도 막부 쇼군뿐이었다. 외교적 호칭으로 대외적으로는 "일본 국왕", "일본국 대군"을 칭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867년 (게이오 3년)에 에도 막부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행하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에 의해 정이대장군의 직을 폐지했다. 그 후,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법친왕이 정벌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단기간에 폐지되었다. 서양어에서 차용된 ''shogun''은, 특히 일본의 정이대장군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도 막부는 Tokugawa shogunate영어라고 호칭된다.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근대 군제가 시행되자, 장교는 장, 좌, 위 3등으로 대별되었고, 그 최상위인 장에는 대장, 중장, 소장의 3계급이 설치되었다. 이 직책에 있던 군인을 때로는 장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미우라 고로를 가리키는 '관수 장군', 하야시 센주로를 가리키는 '월경 장군' 등이 있다. 또한 외국에 있는 해당 계급의 군인에 대해서도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예가 나타났다. 자위대에서는 막료장·장·장보의 장관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장군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2. 3. 한국
2. 3. 1. 고대
4세기~6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 남조로부터 장군 칭호를 받아 통치에 활용했다.[22] 각 국가는 군주 교체 시마다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주에게 주어지는 왕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관할 영역, 장군호 등을 갱신하고, 신하들을 위한 장군 칭호와 막부(=장군부) 소속 문관 칭호를 요청하여 국내 통치에 활용했다.[22]중국 왕조에 보낸 국서에는 군주와 신하에게 수여를 희망하는 칭호가 열거되어 제시되었다. 중국 왕조는 칭호 등급을 올리는 것을 꺼려 선대 군주의 칭호를 답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왕조가 인근 국가 군주와 신하의 칭호를 인정하는 것을 "제정"이라고 칭한다.[22]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장군호(북조제정) | 비고 |
---|---|---|---|---|---|
413년 | 고련 | 정동장군[39] | 동진으로부터。 | ||
417년 | 고련 | 정동대장군[35] | 송으로부터。 | ||
435년 | 고련 | 정동장군[40] | 북위로부터。 | ||
463년 | 고거련 | 차기대장군[41] | 송으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 | 북위로부터。 | ||
492년 | 고라운 | 정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02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32] | 양으로부터。 | ||
508년 | 고라운 | 무군(동)대장군 | 양으로부터。 | ||
520년 | 고라운 | 차기대장군 | 북위로부터、사후 추증。 | ||
520년 | 고흥안 |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20년 | 고흥안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영호동이교위 | 북위로부터 | ||
534년 | 고보연 | 녕동장군 | 양으로부터 | ||
550년 | 고평성 | 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 | 북제로부터 | ||
560년 | 고양성 | 영호동이교위 | 북제에 의함。 | ||
562년 | 고양성 | 녕동장군 | 진에 의함。 | ||
577년 | 고양성 | 대장군 | 북주에 의함。 | ||
581년 | 고양성 | 대장군 | 수에 의함。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남조제정) | 비고 |
---|---|---|---|---|
372년 | 여구 | 진동장군[33] | ||
416년 | 여영 | 진동장군[34] | ||
421년 | 여영 | 진동대장군[35] | ||
457년 | 여경 | 진동대장군[36] | ||
458년 | 여기(왕족) | 행관군장군 | 관군장군[37] | |
〃 | 여곤(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운(왕족) | 행정로장군 | 정로장군[37] | |
〃 | 여도(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여예(왕족) | 행보국장군 | 보국장군[37] | |
〃 | 목금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작(왕족) | 행룡양장군 | 룡양장군[38] | |
〃 | 여류(왕족)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미귀 | 행녕삭장군 | 녕삭장군[38] | |
〃 | 우서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38] | |
〃 | 여루(왕족) | 행건무장군 | 건무장군[25] | |
502년 | 여대 | 정동대장군[32] | 양에 의한 일방적인 승작의 가능성[32]。 | |
521년 | 여륭 | 녕동대장군 | ||
524년 | 여명 | 수동대장군 | ||
570년 | 여창 | 차기대장군 | ||
서기 | 왕명(신하명) | 장군호(가수) | 장군호(제정) | 비고 | |
---|---|---|---|---|---|
648년 | 김춘추 | 좌무위장군 | 당에 의함。김춘추의 아들。 | ||
674년 | 김인문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제。 | ||
675년 | 김법민 | 우효위원외대장군 | 당에 의함。왕。김인문의 형。 | ||
687년 | 김이홍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무주에 의함。 | ||
702년 | 김흥광 |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 당에 의함。 | ||
713년 | 김흥광 |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군 | 당에 의함。 | ||
이후의 역대 왕은 장군호를 받지 않음。 | |||||
"가수"는, 수봉 측이 희망하는 칭호, "제정"은 중국 측이 실제로 수여한 칭호.
2. 3. 2. 고려
고려 시대에는 2군 6위 체제 하에서 상장군이 최고위 무관직이었다. 응양군, 용호군 등 각 군과 위에 상장군이 배치되었다. 충용4위에도 상장군이 배치되었다.2. 3. 3. 조선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군사제도를 이어받아 오위(五衛) 체제 하에서 각 위에 장군을 두었으나, 실질적인 군 통수권은 왕에게 집중되었다.2. 3. 4.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준장을 장성급 장교(장군)로 분류하며, 군을 지휘하는 주요 직책을 맡는다. 특히, 대장은 합동참모의장, 각 군 참모총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등 군 최고위 직책을 맡는다.3. 현대 군대에서의 장군
현대 군대에서 장군은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의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국가별로 계급 체계는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준장(Brigadier General), 소장(Major General), 중장(Lieutenant General), 대장(General)의 계급이 존재하며, 원수는 장군보다 상위 계급이다. 미국군의 경우, 준장에서 대장까지, 그리고 원수까지 모두 ''General''로 통칭한다. 예를 들어 더글러스 맥아더는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였지만, 영어로는 ''General MacArthur''로 불리며, 이를 번역하면 "맥아더 장군"이 된다.
일본에서는 ''General''의 번역어로 '장군'을 사용하며, "패튼 장군", 아이크 장군"과 같이 텔레비전 작품 제목으로도 사용된다. 해군의 경우, 제독(Admiral)이라는 호칭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육군 등과 같은 계급을 사용하기 때문에 해군 장성급 장교에게도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에무라 히코노조의 별명은 "선원 장군"이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준장을 장성급 장교로 분류하며, 이들을 '장군'으로 통칭한다.
4. 국가 지도자의 경칭으로서의 장군
국제적으로 군사 정권이나 일당 독재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가 정권 장악 당시의 계급을 의도적으로 칭하거나 국민들 사이에 유포하는 예가 있다. 또는 정권 획득 후에 군인으로서의 경력 유무에 관계없이 장군의 계급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 등도 "'''장군'''"이라고 불렸다. 김정일은 "'''장군님'''" (장군님/장군님한국어)이라고도 불리지만, 한반도 (북한·한국)에서는 상사나 상위자에게는 직함 아래에 "님" (님/님한국어)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 한국어로는 사장님, 부장님, 선생님 등의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도 그 연장선상에서 "장군님"이라고 불리고 있을 뿐이며, 일본어로 그대로 장군님으로 하는 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생존 인물로는 북한의 김정은이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이 중 후세인과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직업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지 않다.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관으로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벌였지만, 계급은 없었다. 또한 김일성의 계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김정일과 김정은은 공화국 원수 (김정일은 사후 대원수 추증)이며, 장관이 아닌 군사적 지도자라는 의미로 장군이라고 칭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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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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鎌倉右大将家と征夷大将軍・補考
https://cir.nii.ac.j[...]
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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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2) 대외무역 > (1) 원과의 무역 > 다. 사무역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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