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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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에 위치한,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유족에게 인도할 수 없는 제2차 세계 대전 전몰자들의 유해를 안치하고 추모하는 국가 시설이다. 1950년 필리핀에서 송환된 유골을 임시 안치할 묘지 필요성에 따라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1959년 완공되었다. 육각당에는 유골과 함께 쇼와 천황의 골호가 안치되어 있으며, 매년 참배식과 추계 위령제가 열린다. 야스쿠니 신사와는 별개의 시설이며, 미국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방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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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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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위치 | 도쿄도지요다구산반초 |
종류 | 공공 묘지 |
면적 | 16,063 제곱미터 |
묘지 수 | 358,260기 |
안치된 유골 수 | 37만 700위 (2024년 5월 기준) |
개원 | 1959년 3월 28일 |
소유주 | 환경성 |
웹사이트 |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환경성)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 |
시설 | |
주요 시설 | 육각당 쇼와 천황 어제의 비 상황 폐하 어제의 비 앞 건물 휴게소 |
건축 및 디자인 | |
정원 설계 | 다무라 쓰요시 |
하사 골호 의장 | 나이토 하루지 |
납골호 의장 | 산업공예시험소 |
건축 설계 | 다니구치 요시로 |
관리 | |
관리 주체 | 환경성 |
관리 사무소 |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관리 사무소 |
사무소 위치 | 도쿄도 지요다구 산반초 2번지 |
2. 역사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일본국 정부가 제2차 세계 대전(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당시 해외에서 사망한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의 유골 중 신원 불명이거나 유족에게 인계할 수 없는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한 국가 시설이다.[4]
태평양 전쟁 이후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유족마저 잃은 전몰자 유해 처리가 일본 정부의 과제로 떠올랐다. 수습된 유골 중 신원 불명 또는 인수자 없는 유골을 안치할 영구적인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1953년 일본 내각은 "'무명 용사의 묘'에 관한 건"을 각의 결정하여[5] 국가 주도로 묘원 건립을 공식화했다. 1956년 도쿄도 지요다구의 치도리가후치 호반에 부지를 확보하여 공사를 시작, 1959년 3월에 완공하였다.[4] 이 묘원은 일본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특정 종교나 종파에 속하지 않는 비종교적 공공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묘원 내에는 육각당 등의 시설이 있으며[4], 쇼와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골호에 각지에서 수습된 유골의 일부를 담아 전몰자의 상징으로서 육각당에 안치하고 있다.[6] 또한, 납골실과 증설 납골실에는 신원 불명 등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며, 2023년 5월 29일 정부 배례식 기준으로 총 37만 485위의 유골이 봉안되었다.[7][4] 묘원은 황거 외원과 같은 국민공원처럼 국가가 직접 관리하며, 부지의 유지 및 운영은 환경성이[8][9], 묘원 내 증설 납골실은 후생노동성이 관리하고 있다.[10]
매년 후생노동성 주관으로 전몰자를 추도하는 배례식이 거행되며[4], 이 자리에는 황족이나 내각총리대신 등이 참석한다.[11] 특히 매년 종전의 날(8월 15일)에는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2]
이 묘지는 때때로 야스쿠니 신사 논쟁과 관련하여 언급되기도 하지만, 치도리가후치는 야스쿠니 신사와는 다른 목적을 가진다. 치도리가후치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병사들의 실제 유해를 안치하는 공공 시설인 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 전쟁의 신원 불명 병사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령을 모시는 사립 종교 시설이다. 2006년, 자유민주당의 한 지도자는 이 묘지를 확장하여 미국의 알링턴 국립 묘지와 유사하게 모든 전쟁 사망자를 기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1]
2. 1. 건립 배경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해외에서 사망한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혹독한 전장 환경으로 인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해가 많았고, 광범위한 일본 공습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유족마저 사망하여 유골을 인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1950년, 필리핀에서 전사한 4,822구의 유골이 미국군으로부터 송환되었으며[45][46], 1952년부터는 후생성(현 후생노동성) 주도로 유골 수집 사업이 본격화되었다[46]. 수습된 유골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유족에게 인계할 수 없는 유골은 후생성 청사 내에 임시로 안치되었으나, 그 수가 계속 증가하면서[46] 영구적인 안치 시설 마련의 필요성이 커졌다[46].
당시 일본에는 국가적인 전몰자 추도 시설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과거 전사한 군인과 군속을 영령으로 모시던 야스쿠니 신사는 내무성, 육군성, 해군성의 관리를 받았으나, 1946년 국가 관리에서 벗어나 일개 종교 법인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새로운 추모 시설 건립 구상은 시데하라 내각 시기부터 "각국의 '무명 전몰자의 묘'와 같은 것을 만들자"[46]는 형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47]. 이 구상은 제3차 요시다 제2차 개조 내각이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에 서명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통치가 끝나갈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46]. 마침내 1953년, 일본 내각은 신원 불명의 전몰자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무명 전몰자의 묘" 건설을 공식 결정하였다[5].
2. 2. 건립 운동과 결정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신원 불명의 전몰자 유골 처리 문제에 직면했다.[46] 1946년 야스쿠니 신사가 국가 관리에서 벗어나 종교 법인이 되면서, 국가적인 전몰자 추도 시설이 부재한 상황이었다.[46] 幣原內閣 시기부터 각국의 '무명 용사의 묘'와 같은 시설 건립 구상이 있었으나[46][47],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 조인과 연합군 점령기 종료가 임박하면서 본격화되었다.[46]이러한 상황에서 1952년 5월 1일, "전일본 무명 전몰자 합장묘 건설회"가 발족하여 묘지 건설 운동이 시작되었다.[28][46][47]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총재를 맡고, 무라카미 요이치(운수대신)가 회장으로 취임했다.[47] 쿠사바 류엔, 이치마다 나오토(일본은행 총재), 이시카와 이치로(경제단체 연합회 회장), 세키 케이조(간사이 경제 연합회 회장) 등이 부회장으로 참여하는 등[47],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여 실질적인 관민 합동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46] 이 단체는 도쿄 분쿄구의 도요시마카 묘지 부근에 외국의 "무명 용사의 묘"와 같이 외국 원수나 사절단이 공식 참배할 수 있는 시설 건립을 목표로 하고 모금 활동을 벌였다.[46][47]
국회에서도 묘지 건설 요구가 높아졌다. 참의원의 야마시타 요시노부(일본사회당)는 전몰자 위령 사업이 초당파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46], 이에 따라 "해외 전몰자 위령 위원회"가 설립되었다.[46] 중의원의 안도 마사즈미가 위원장을 맡았다.[46] 1954년 9월에는 우가키 카즈시게를 명예회장으로, 스나다 시게마사를 회장으로 하는 "전국 유족 등 원호회"도 설립되어 전몰자 위령 현창 활동을 목표로 했다.[46]
후생성(현 후생노동성)은 1952년부터 본격화된 유골 수집 사업으로 인해 늘어나는 신원 불명 유골 안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원 설치를 검토했다.[46] 이 과정에서 일본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 저촉 여부를 신중히 검토했으며, 1953년부터 내각법제국, 문부성과 협의하여 헌법상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46] 같은 해 10월 6일, 후생성은 일본유족회, 일본 종교 연맹, 해외 전몰자 위령 위원회, 전일본 무명 전몰자 합장묘 건설회 등 관련 단체와의 회의에서 국가 주도의 묘원 건설안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46] 11월 12일 전문가 간담회에서도 만장일치의 지지를 확인했다.[46]
이를 바탕으로 1953년 12월 11일, 제5차 요시다 내각은 "'무명 전몰자의 묘'에 관한 건"을 각의 결정했다.[5] 이 결정으로 신원 불명 또는 인수자 없는 유골을 안치하는 묘를 건립하고, 그 유지 및 관리를 국가 책임으로 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46] 이때 '무명 전몰자의 묘'는 가칭이었다. 한편, 전일본 무명 전몰자 합장묘 건설회가 모금한 기금은 각의 결정 시점까지 569만엔에 달했다.[46] 국가가 묘지 건립을 결정함에 따라 이 단체는 사업을 중단하고 모금액 전액을 일본국 정부에 기부했으며, 이는 이후 묘원 조성 비용으로 사용되었다.[46]
2. 3. 부지 선정과 완공
1953년 12월 11일, 일본 정부는 "전몰자 유골 중, 신원 불명이거나 인계할 유족이 없는 유골을 국가가 건설하는 '무명 전몰자의 묘'(가칭)에 안치하고, 국가의 책임 하에 유지 관리한다"는 방침을 각의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 배경에는 같은 해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절한 사건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의 결정 이후 시설의 명칭, 성격, 부지 등을 둘러싸고 각계에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당초 전일본 무명 전몰자 합장묘 건설회는 도요시마오카 묘지 주변을 목표로 했으나[46][47], 각의 결정 이후 다양한 후보지가 검토되었다[46]. 구체적으로는 도쿄도 지요다구의 기타노마루 숲 공원, 황거 니주바시 앞 구스노키 마사시게상 주변, 구 육군 항공 본부 부지, 재일본 영국 대사관 앞의 띠 모양 부지, 야스쿠니 신사 경내, 도쿄도 분쿄구 고코쿠지의 육군 묘지 부근, 도쿄도 다마시의 사쿠라가오카 세키세키 기념비 주변, 사이타마현 이루마군 오고세정의 오고세 묘원 등이 거론되었다[46].
이 중 야스쿠니 신사 경내 설치안은 야스쿠니 신사 숭경회 대표 등으로부터 제안되었지만[48], 신사 경내에 묘를 두는 경우가 드물고 부지가 좁다는 점[46], 다른 종교 단체들이 각자의 의식을 거행하기에 신사 경내가 아닌 편이 좋다는 지적[46],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 법인 부지 내에 국가 시설을 설치하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46][48]. 사이타마현 지사 등이 제안한[46] 오고세 묘원 설치안은 "녹음이 우거진 언덕으로, 간토 전역을 굽어보며 동쪽으로는 쓰쿠바산을 바라보는 경치가 좋은 곳"[46]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부근에 물이 부족하고 교외에 위치한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46].
여러 단체의 의견을 듣고 관계 기관 및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1956년 11월, 지요다구 치도리가후치에 위치한 궁내청 관리지(옛 가야노미야 저택 터)가 최종 부지로 결정되었다. 1958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9년 3월 28일에 완공되었다. 준공 당일에는 후생성 주최로 준공식 및 추도식이 열렸으며, 이 자리에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가 참석하고 내각총리대신 등이 참례했다.
한편, 2001년에는 묘원을 관할하는 지요다구가 해당 시설을 묘지, 매장 등에 관한 법률상의 '묘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법적으로는 '창고' 또는 '보관고'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3. 시설 및 설비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일본국 정부가 설치한 전몰자위령시설이다.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당시 국외에서 사망한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의 유골 중 신원 불명이거나 인계받을 유족이 없는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4] 1953년 각의 결정 「『무명 전몰자의 묘』에 관한 건」에 따라[5], 1959년 3월에 창건되었다[4].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특정 종교종파에 속하지 않는 비종교 시설로 운영된다.
도쿄도 지요다구 치도리가후치 호반에 자리 잡고 있으며[4], 주요 시설로는 육각당 등이 있다. 육각당 중앙에는 쇼와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골호가 안치되어 있는데, 각 전장에서 수습된 유골의 일부를 담아 모든 전몰자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6]. 묘원 내 납골실과 증설 납골실에는 2023년 5월 29일 기준으로 총 37만 485위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7][4].
이 묘지는 황거 외원 등 국민공원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직접 관리하며, 부지 및 시설의 유지 관리는 환경성이[8][9], 증설 납골실의 관리는 후생노동성이 담당하고 있다[10]. 매년 후생노동성 주관으로 전몰자 위령 배례식이 거행되며[4], 황족이나 내각총리대신 등이 참석한다[11]. 특히 매년 종전의 날에는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이다[12].
때때로 야스쿠니 신사 논쟁과 관련하여 언급되기도 하지만, 치도리가후치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실제 유해를 안치하는 공공 시설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위해 사망한 모든 이를 포괄적으로 기리는 사립 시설인 야스쿠니 신사와는 그 성격과 목적이 다르다.
3. 1. 부지
도쿄도 지요다구 산반초 2번지에 위치하며, 부지 면적은 16063m2이다.[13] 이곳은 국가가 유지 관리하는 전몰자 납골 시설이자 공원 성격을 지닌 묘지 공원이다.[13]황거 외원 등 국민 공원과 함께 "국민 공원 등"으로 총칭되며, 유지 관리는 환경성 자연 환경국 총무과 소관이다.[8][14][15] 실질적인 관리는 환경성 산하의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관리 사무소가 담당하며,[16][17] 공익 재단법인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가 청소 등 유지 관리에 협력하고 있다.[18][19]
묘원의 정원은 타무라 고우가 설계했다.[20] 묘원 내에는 전일본 무명 전몰자 합장묘 건설회가 국민 모금과 관계 기관 지원으로 마련한 약 4000그루의 수목이 식수되어 있다.[21] 국가 전몰자 묘원으로서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주로 상록수가 심어졌고, 느티나무 등 낙엽수가 일부 섞여 있으며,[3][22] 화목은 절제되어 있다.[21]
일반 참배는 연중 가능하며,[23][24] 공개 시간은 4월부터 9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월부터 3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25][26]
3. 2. 육각당
육각당(六角堂)은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내부에 위치한 납골당으로, 위에서 보았을 때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27]. 이곳에는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국외에서 사망한 군인, 군속, 민간인의 유골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인수할 유족이 없는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4]. 육각당을 포함한 묘원 내 건물 설계는 타니구치 요시로가 맡았다[20].육각당 중앙에는 고대 호족의 무덤 양식을 본뜬 도관(陶棺)이 설치되어 있다[22][27]. 이 도관은 규슈 내화 벽돌에서 제작했으며[28],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주요 전장이었던 지역에서 가져온 돌을 원료로 사용하여 고온에서 구워 만들었다[27]. 무게가 5ton에 달하는 이 도관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크기의 도자기 제품이다[27].
도관 내부에는 쇼와 천황이 하사한 골호(骨壺)가 안치되어 있다[6][22][27]. 이 골호는 나이토 하루지가 디자인하고[20], 나이토를 포함한 도쿄 예술대학 교원 7명이 제작했다[28]. 차호(茶壺) 형태의 금동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27], 표면은 금박으로 마감되었다[6]. 모든 전몰자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각 전장에서 수습된 유골 일부를 이 골호에 담아 도관 안에 안치하고 있다[6][22][27].
육각당 중앙부 지하에는 납골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주요 전역별로 다음과 같이 6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27].
이 납골실에는 유족에게 인도하지 못한 제2차 세계 대전 전몰자의 유골이 주철로 만든 납골호에 담겨 안치되어 있다[27]. 납골호는 공업 기술원 산하 산업 공예 시험소에서 디자인하고[20], 로시 제작소에서 제조했다[28].
2013년 5월 기준으로 총 35만 8,260위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었다[3]. 유골 수습이 계속됨에 따라 기존 납골실의 수용 능력에 한계가 생겨, 1991년과 2000년에 육각당 뒤편에 납골실이 추가로 증설되었다[27]. 이후 수습된 유골은 증설된 납골실에 안치되고 있다[27]. 다만 증설 납골실 지상부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어, 일부 방문객이 비닐시트를 깔고 꽃구경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국회에서 시설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29].
3. 3. 증설 납골실
묘원 내에는 기존 납골실 외에 증설된 납골실이 있으며, 이는 후생노동성에서 관리하고 있다[10]. 기존 납골실과 증설 납골실에는 합쳐서 약 35만 8000여 위 이상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4]. 2023년 5월 29일 정부 배례식을 기준으로 묘원에 납골된 총 유골 수는 37만 485위이다[7].3. 4. 표석 및 석비
묘원의 두 입구에는 각각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30]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글씨는 묘원 창건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쓴 것이다[30]. 표석 뒷면에는 "쇼와 34년 3월 28일 건립 후생성"[30]이라고 적혀 있으며, 이는 당시 후생대신이었던 사카타 미치타의 글씨이다[30].묘원 안에는 쇼와 천황의 어제가 새겨진 석비("쇼와 천황 어제의 비")가 건립되어 있다[6][22][27]. 이 석비에는 묘원 창건 시 쇼와 천황이 내린 어제가 담겨 있다[6][22][27]. 비문은 다카마쓰노미야 비 기쿠코가 썼다[22][27]. 이 석비는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가 건립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고, 이후 국가에 기증되었다[6].
또한, 상황의 어제가 새겨진 석비("현 상왕 폐하 어제의 비")도 세워져 있다[22][27]. 이 석비에는 종전 60주년이 되던 해의 가회시에서 당시 천황이었던 아키히토가 읊은 어제가 새겨져 있다[22][27]. 비문은 다카마도노미야 비 히사코의 글씨이며[22][27], 2005년에 준공되었다[22][27].
4. 행사
매년 후생노동성에 의해 전몰자를 위령하는 배례식이 거행되고 있으며[4], 황족이나 내각총리대신 등이 참석한다[11]. 또한, 매년 종전의 날에는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12]. 주요 행사로는 후생노동성이 주최하는 참배식과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가 주최하는 추계 위령제 등이 있다.
4. 1. 참배식
매년 5월이 되면, 후생노동성이 주최하는 "참배식"이 거행된다.[4] 이 참배식에서는 최근 1년 동안 전몰자 유골 귀환단 등이 새로 수습한 유골 중, 신원 불명이거나 인계받을 사람이 없는 유골을 후생노동대신이 직접 납골한다.[31]참배식에는 황족이나 내각총리대신 등이 참례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32][33][34][35][36][37] 그 외에도 외무대신, 환경대신, 방위대신 등 관계 국무대신, 관계국에서 일본에 파견된 특명전권대사, 중의원후생노동위원장, 참의원 후생노동위원장, 각 정당 대표자, 도도부현 지사 대표자, 일본유족회회장, 유족 대표,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 회장 등이 참례하여 헌화 등을 한다.[31]
육각당의 제단에는 천황, 황후로부터 하사된 큰 화환이 장식되며, 황궁경찰본부 음악대 등이 국가 등의 연주를 담당한다.[11]
4. 2. 추계 위령제
매년 가을,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가 주최하는 추계 위령제가 열린다.[38] 이 위령제에는 황족과 국무대신 등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이다.[38] 또한, 관계국에서 파견된 특명전권대사와 유족 대표 등 약 1000명이 참석하여 헌화 등을 한다.[38]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를 대표하는 부대들도 참례하여 부대 참배를 진행한다.[38] 그 외에도 차를 바치는 헌다 의식, 쇼와 천황과 현 천황이 지은 시(어제, 御製)를 봉송하는 행사 등이 열린다.[38] 육상자위대 중앙음악대는 국가 등의 연주를 담당한다.[38]4. 3. 기타 행사
참배식 및 추계 위령제 외에도, 연중 다양한 단체의 위령 행사가 진행된다.구 일본 육군과 육상자위대 및 항공자위대 관계자로 구성된 '계행사'는 이곳에서 매달 참배를 하고 있다.[39] 마찬가지로 구 일본 해군 및 해상자위대 관계자로 구성된 '수교회' 역시 매달 참배를 이어가고 있다.[39] 또한, 방위대학교 학생들은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캠퍼스에서 밤새 걸어와 이곳 등을 참배하는 '도쿄 행진'이라는 행사를 자율적으로 진행하는 전통이 있다.[40]
이 시설은 특정 종교나 종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신토·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단체들도 행사를 열 수 있다. 다만, 묘원 내에서 행사를 진행하려면 환경대신의 허가가 필요하다.
5. 명칭
해자의 명칭으로서의 "치도리가후치"는 작은 글자 "ヶ"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묘원의 공식 명칭인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큰 "ケ"로 표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환경성 설치법 등 관련 법령에서는 모두 큰 "ケ"를 사용하여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8][14][15][17][41]으로 표기하고 있다.
묘원의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환경성 하부 기관인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관리 사무소"의 명칭 역시, 환경성 조직 규칙 등 법령에 따라 큰 "ケ"를 사용하여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관리 사무소"[16][42]로 표기한다. 이에 따라 환경성의 공식 사이트 등에서도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13]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묘원의 유지 봉찬을 담당하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봉사회의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작은 글자 "ヶ"와 큰 "ケ"가 혼용되는 등[43], 작은 글자 "ヶ"를 사용한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표기도 종종 발견된다. 명판이나 표지 등에서도 작은 글자 "ヶ"가 사용된 사례가 있다.
한편, 과거에는 '淵' 대신 속자인 '渕'[44]을 사용하여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기시 노부스케가 쓴 표석에도 '渕' 자를 사용한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30]이라고 적혀 있다.
6. 논란 및 쟁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그 성격상 야스쿠니 신사 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A급 전범 합사 문제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는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하거나 그 의미를 희석하려는 정치적 움직임 속에서 치도리가후치 묘원이 거론되곤 한다. 일례로 2006년 자유민주당 내에서 묘원을 확장하여 모든 전쟁 사망자를 기리는 국립 시설로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는데[1],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논란을 낳았다. 이러한 논의는 묘원의 본래 설립 취지와 성격, 그리고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맞물려 복합적인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
6. 1. 야스쿠니 신사와의 관계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때때로 야스쿠니 신사 논쟁과 관련하여 언급되기도 하지만, 두 시설은 그 목적과 성격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은 일본국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공공 시설로[8][9],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당시 국외에서 사망한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유족에게 인계할 수 없는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1959년에 설립되었다[4][5]. 이곳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특정 종교나 종파에 속하지 않는 비종교적 시설로 운영되며[4], 실제 유골을 안치한다는 점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구별된다. 2023년 5월 기준으로 총 37만 485위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7].
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을 추모한다는 명분을 가진 사립 신토 시설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태평양 전쟁을 이끈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어, 대한민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는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2006년 자유민주당의 한 지도자는 치도리가후치 묘원을 확장하여 미국의 알링턴 국립 묘지처럼 모든 전쟁 사망자를 기리는 시설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1].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인한 국내외적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치도리가후치 묘원이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시설이지만, 본질적으로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과 관련된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7. 교통
- 도쿄 메트로 도자이선, 한조몬선, 도에이 신주쿠선 구단시타역 2번 출구에서 치도리가후치 녹도를 따라 도보로 약 12분 걸린다.
- 도쿄 메트로 한조몬선 한조몬역 5번 출구에서는 도보로 약 10분 거리이다.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묘원 앞 도로는 일방통행이므로 차량 이용 시 주의해야 한다.
8. 기타
대규모 행사가 열릴 때를 제외하면 조용한 분위기이며, 위령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육각당의 헌화대에서는 국화를 100JPY에 구입할 수 있다. 누구나 이용 가능한 무료 휴게소, 음료 자동 판매기,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가져온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 일부 단체가 청소 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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