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체임벌린 내각의 유럽 외교 정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체임벌린 내각의 유럽 외교 정책은 1930년대 후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추진한 정책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의 유화 정책을 펼쳤다. 체임벌린은 경제적, 재정적 제약 속에서 재무장을 추진하며,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의 군비 경쟁에서 영국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외교를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다. 주요 사건으로는 안슐루스, 주데텐 위기, 뮌헨 협정 등이 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멸망 이후 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봉쇄 정책으로 전환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맞이했다. 이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긍정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으나, 부정적으로는 히틀러의 팽창을 막지 못한 실패로 평가된다.

2. 평화 추구와 유화 정책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체임벌린은 평화를 추구했다. 당시에는 베르사유 조약아돌프 히틀러의 불만 원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국민에게 불만이 있으면 독재 정권이 생겨나고, 그 불만을 해결하면 독재 정권의 공격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체임벌린은 외교를 통해 나치 독일을 상대하고, 내부 반대를 진압하려 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1934년 6월 30일 "유화 정책"이라고 불렸다.[1]

2. 1.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평화에 대한 열망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그 여파를 목격한 체임벌린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국민에게 불만이 있으면 독재 정권이 생겨나고, 그 불만의 근원을 제거하면 독재 정권의 공격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당시 베르사유 조약아돌프 히틀러의 불만 근원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체임벌린을 비방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유럽 정치라는 구식 학교에서 자란 명예로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체임벌린이 외교 채널을 통해 나치 독일을 상대하고 내부, 특히 처칠의 반대 징후를 진압하려 한 시도는 1934년 6월 30일 "유화 정책"이라고 불렸다.[1]

2. 2.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과 독일의 불만

체임벌린은 독일의 불만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유럽을 만들기 위해 "일반적인 해결"을 추구했다. 1937년 5월, 얄마르 샤흐트 국가 은행 총재와의 회담에서 영국은 독일의 국제 연맹 복귀, 서유럽 불가침 조약, 군비 제한 조약, 중부 및 동유럽의 영토 보전과 주권 독립 존중 등을 요구했다.[19]

체임벌린은 이러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영국의 재무장이 완료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0] 1934년 2월 28일 국방 요구 사항 위원회(DRC) 보고서는 독일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방어해야 할 궁극적인 잠재적 적"으로 규정했다.[21]

체임벌린이 독일에 집중한 이유는 독일의 힘 때문이었으며, 이는 체임벌린의 독일인에 대한 감정과는 무관했다. 체임벌린은 1930년에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체적으로 나는 독일인을 싫어합니다"라고 썼다.[22]

2. 3. 경제 대공황과 영국의 재정적 제약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은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체임벌린 내각의 외교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전 세계에 걸쳐 국방 의무를 다해야 했지만, 경제적, 재정적 기반이 약해 군사력을 충분히 유지하기 어려웠다.[1]

1937년 영국 참모총장은 보고서를 통해 영국이 극동, 지중해, 서유럽 세 지역 중 한 곳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다른 두 지역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커, 동시에 세 지역 모두에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경고했다.[1] 체임벌린 역시 1937년 10월 내각 회의에서 자원 부족으로 인해 3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체임벌린 내각은 잠재적인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3] 체임벌린은 불만이 제한적이고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불만을 해소하여 잠재적 적을 줄이는 방법과, 동맹을 통해 영국의 힘을 강화하는 방법 두 가지를 고려했다.[4] 1937년과 1938년에는 전자를, 1939년과 1940년에는 후자를 더 강조했다.[4]

체임벌린은 왕립 공군을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으로 보고, 재무장관 및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왕립 공군의 예산을 크게 확대했다.[5] 왕립 공군의 예산은 1933년 16780000GBP에서 1939년 157020000GBP로 증가하여, 1937년 영국 육군 예산과 1938년 영국 해군 예산을 넘어섰다.[6]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위축되어 있었고, 공군력 증강에 필요한 공장, 공작 기계, 숙련된 기술자, 자금이 부족했다.[7] 이로 인해 체임벌린은 왕립 해군과 육군을 희생하면서 왕립 공군을 우선시하게 되었다.[7]

1937년,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영국이 프랑스에 대규모 육군을 투입하는 대신 해상 및 공중에서의 전쟁 노력을 제한하는 유화 정책 원칙을 도입했다.[8] 이 원칙에 따라 육군은 대규모 감축을 겪었고, 해군과 특히 공군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무장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1930년대 후반, 군비 지출의 급증은 국제수지 악화, 미국 달러와 금 보유량 감소, 인플레이션 심화, 그리고 정부의 신용도 하락을 초래했다.[9] 국내 자원 부족으로 인해 재무장에 필요한 철, 장비, 항공기, 공작 기계 등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고, 이는 수출 감소로 이어져 불균형을 심화시켰다.[10] 또한, 재무장을 위한 세금 부과는 경제 성장을 저해했고, 막대한 차입은 영국의 신용을 손상시켜 파운드화 가치 하락 압력을 가중시켰다.[10] 1939년, 체임벌린 정부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방비에 사용했다.[11]

노동당은 초기에는 군축 정책을 지지하며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했지만, 1938년 말에는 국방 투표 기권 정책으로 전환했다.[12] 노동당은 체임벌린의 대독 군비 경쟁을 비판하며, 다른 강대국들도 이를 따라 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무장 해제를 촉구하기도 했다.[12] 1930년대 초,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사회 복지 지출보다 군비 지출을 우선시하는 전쟁광으로 비난했다.[13]

3.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과 재무장 노력

체임벌린 내각 초기 외교 정책의 주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국방 약속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재정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1937년 영국 참모총장 보고서는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1] 체임벌린 자신도 1937년 10월 내각에서 자원 부족으로 인한 3면 전쟁 가능성을 우려했다.[2]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잠재적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더 의존해야 했다.[3] 체임벌린은 잠재적 적의 불만을 달래거나 동맹을 형성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1937년과 1938년에는 전자를, 1939년과 1940년에는 후자를 우선시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재무장이 필요했다. 재무장은 영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잠재적 적의 전쟁 선택을 예방하며, 전쟁 발발 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4]

체임벌린은 왕립 공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36년 10월 재무장관 시절, 그는 공군력이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라고 말했다.[5] 총리가 된 후에도 왕립 공군 예산을 크게 확대했다. 왕립 공군 예산은 1933년 16780000GBP에서 1939년 157020000GBP로 증가하여, 1937년 영국 육군 예산과 1938년 영국 해군 예산을 넘어섰다.[6]

대공황으로 가속화된 경제 쇠퇴로 인해, 영국 경제는 충분한 공장, 공작 기계, 숙련된 기술자 및 자금이 부족했다. 해군과 육군을 희생시키면서 왕립 공군을 우선시했다.[7] 1937년,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해상 및 공중전에 집중하는 유화 정책 원칙을 도입했다.[8] 육군은 감축되었고, 해군과 공군은 확장되었다.

하지만 재무장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1930년대 후반 군비 지출 증가는 국제 수지, 미국 달러와 금 보유량, 인플레이션, 정부 신용도를 위협했다.[9] 국내 자원 부족으로 철, 장비, 항공기 등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지만, 수출용 공장 수가 줄어 불균형을 초래했다.[10] 재무장을 위한 세금 부과는 경제 성장을 저해했고, 차입은 파운드화에 압력을 가했다.[10] 1939년, 정부 수입의 절반 이상이 국방비에 투자되었다.[11]

체임벌린의 재무장 정책은 노동당의 반대에 직면했다. 노동당은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했지만, 국방 투표 기권으로 정책을 전환했다.[12] 노동당은 체임벌린의 군비 경쟁을 비난했고, 일부 의원들은 영국의 무장 해제를 촉구했다.[12] 1930년대 초,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사회 복지보다 군비를 우선시하는 전쟁광으로 비난했다.[13]

3. 1. 유화 정책의 전개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와 그 여파를 직접 경험한 체임벌린은 다른 많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국민들의 불만이 독재 정권을 탄생시키고, 이러한 불만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면 독재 정권의 공격성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은 베르사유 조약아돌프 히틀러의 불만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정치적인 반대자들조차 체임벌린이 유럽 정치라는 구식 학교에서 성장한 명예로운 인물임을 인정했다. 체임벌린은 외교적 경로를 통해 나치 독일과 협상하고, 내부, 특히 처칠의 반대 움직임을 억누르려고 노력했으며, 1934년 6월 30일 이러한 자신의 정책을 "유화 정책"이라고 명명했다.

체임벌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동시에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산업 기반 시설과 재정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 중 한쪽을 다른 쪽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일본은 비타협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은 나머지 추축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37년 6월에 작성된 편지에서 체임벌린은 "우리가 독일과 관계를 개선할 수만 있다면, 나는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14] 1938년 1월, 그는 일기에 "처음부터 나는 베를린과 로마, 두 폭풍의 중심지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해 왔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결국 동시에 두 명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으로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라고 기록했다.[14]

체임벌린은 잠재적 적국에 대한 승리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잠재적 동맹국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영국 최고 군사 전문가들은 소련 붉은 군대의 전투 능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15] 1930년대 중반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중립법은 전쟁 발발 시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했다.[16] 1937년 10월, 체임벌린은 미국을 국제 분쟁에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워싱턴 D.C.에 파견된 영국 대표단에게 양국 간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미국과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17]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영국 대표단에게 미국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전제 조건을 수용할 것을 명령했다.[18] 프랑스는 에릭 핍스 영국 대사의 매우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잠재적 동맹국으로서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다.

'''독일'''

체임벌린의 초기 외교 정책 목표 중 하나는 독일의 동의를 얻어 그가 생각하는 모든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평화로운 유럽을 보장하기 위한 "일반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1937년 5월, 런던을 방문한 얄마르 샤흐트 국가 은행 총재와의 회담에서 영국은 독일 측에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담은 문서를 제시했다.

  • 독일의 국제 연맹 복귀
  • 서유럽에 대한 불가침 조약
  • 군비 제한 조약
  • "모든 중부 및 동유럽의 영토 보전과 주권 독립을 존중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부 및 동부 유럽 정부를 만족시킬 조약 형식 또는 기타 방식의 독일이 할 수 있는 조치."[19]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해결책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되어야 했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그러한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영국의 재무장을 완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20] 1934년 2월 28일, 체임벌린이 재무장관으로서 작성에 참여했던 국방 요구 사항 위원회(DRC, Defense Requirements Committee) 보고서는 독일을 "우리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방어해야 할 궁극적인 잠재적 적"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독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21]

독일에 집중한 이유는 독일의 힘에 대한 평가 때문이었다. 이는 체임벌린이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독일에 대한 감정은 1930년에 그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대체로 나는 독일인을 싫어한다"고 썼다.[22]

체임벌린 정부의 첫 번째 외교 정책 위기는 1937년 12월 일본이 중국 양쯔강에서 영국 포함 HMS 레이디버드를 공격하여 손상시키고, 주중 영국 대사 휴 크내치불-휴게센 경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해 부상을 입힌 사건이었다.[24] 일본 항공기는 또한 양쯔강에서 미국 포함 USS 파나이를 격침시켰다. 체임벌린은 파나이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을 중립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원했고,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에게 미국이 그렇게 한다면 영국은 8~9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 해군 기지에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미국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이 공격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면 봉쇄로 위협하겠다고 위협했다.[24][25] 그러나 미국이 체임벌린의 제안을 거부하고 파나이호 격침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체임벌린은 대규모 전쟁 발발 시 미국의 지원 가능성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26] 그는 여동생 힐다 체임벌린(Hilda Chamberla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일종의 합동(또는 적어도 '병렬') 해군 작전을 수행하려는 관점에서 그들[미국인]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나게 느리고 수많은 기회를 놓쳤다. ... 나는 일본군이 미국인 한두 명을 때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물론 작은 d-v-l은 그러기에는 너무 교활하므로 우리는 결국 혼자 행동해야 할 수도 있으며 너무 늦기 전에 양키가 합류하기를 바란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27]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동의한 것은 극동 지역에서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비상 조치로 1938년 1월 런던에서 비밀 해군 회담을 개최하는 것뿐이었다.[28]

아프리카의 이전 독일 식민지 반환을 위한 제국 식민지 동맹(Reichskolonialbund)의 강력한 선동으로 인해, 체임벌린은 1937년에 식민지 문제가 독일의 가장 중요한 불만이라고 판단했다. 1938년 1월, 체임벌린은 외교 정책 위원회에 식민지 문제를 "최선"으로 해결할 계획이라고 알렸지만, "식민지 문제에 대한 조사는 일반적인 해결의 일부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29] 체임벌린은 광대한 중앙아프리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유럽의 모든 주요 강대국으로 구성된 국제 체제를 제안했다.[30] 제안된 아프리카 행정부에 참여하는 대가로, 히틀러는 독일 국경을 변경하기 위해 결코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이 계획은 1938년 3월 3일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 네빌 헨더슨(Nevile Henderson)이 체임벌린의 제안을 히틀러에게 전달했을 때 시작되었지만, 히틀러는 독일이 아프리카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협상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는 이전 식민지의 일방적 반환을 위해 10년 이상 기다릴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31] 독일의 불만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책"을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의도되었던 체임벌린의 아프리카 계획을 히틀러가 거부하면서, 체임벌린의 질서 있는 회담 계획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32]

1938년 3월, 스페인에서 이탈리아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영국-이탈리아 회담이 재개되었다.[33] 1938년 4월 16일 로마에서 부활절 협정이 체결되어 양국 간의 모든 분쟁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33] 그러나 무솔리니가 약속을 어기고 더 많은 군대를 스페인에 파병하면서 부활절 협정의 실효성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했다.[33]

스페인에 대한 이탈리아의 개입을 줄여 이탈리아를 독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체임벌린 내각은 1937년 스페인 내전 불개입 위원회의 권한을 점차적으로 약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좌파 후안 네그린을 배척했다.[34]

1938년 여름, 영국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폭동의 구실로 이용하려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Ewald von Kleist-Schmenzin)과 같은 독일 반나치 반대 세력으로부터 여러 통의 전보를 받았다. 체임벌린은 대체로 이러한 제안에 무관심했고 영국의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 역사가 거하드 와인버그는 1938년 여름 세 차례의 런던 방문이 야당의 세 명의 다른 메신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각각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지하는 영국의 확고한 입장은 나치 정권을 전복시키는 폭동을 유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메신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이들은 분명하게 잘 조직되지 않은 그룹의 비전을 제시했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체임벌린이 확증되지 않은 집단의 말에 전쟁과 평화라는 중대한 문제를 맡겼다고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48]

3. 2. 제한적 재무장과 그 한계

체임벌린 내각 초기, 전 세계적인 국방 약속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재정적 기반 부족은 외교 정책의 주요 문제였다. 1937년 영국 참모총장 보고서는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동시에 상대할 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지적했다.[1] 체임벌린 자신도 1937년 10월 내각에서 자원 부족으로 인한 3면 전쟁 가능성을 우려했다.[2]

전 세계 국방 약속을 모두 충족시킬 군사력을 확보하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부족했고, 이는 잠재적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더 의존해야 함을 의미했다.[3] 체임벌린은 잠재적 적의 불만을 달래거나 동맹을 형성하여 영국의 힘을 높이는 두 가지 선택지 중, 1937년과 1938년에는 전자를, 1939년과 1940년에는 후자를 우선시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재무장이 필요했다. 재무장은 영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잠재적 적의 전쟁 선택을 예방하며, 전쟁 발발 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4]

체임벌린은 왕립 공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36년 10월 재무장관 시절, 그는 공군력이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라고 말했다.[5] 총리가 된 후에도 왕립 공군 예산을 크게 확대했다. 왕립 공군 예산은 1933년 16780000GBP에서 1939년 157020000GBP로 증가하여, 1937년 영국 육군 예산과 1938년 영국 해군 예산을 넘어섰다.[6]

대공황으로 가속화된 장기간의 경제 쇠퇴로 인해, 영국 경제는 더 많은 공군을 위해 필요한 공장, 공작 기계, 숙련된 기술자 및 자금이 부족했다. 동시에 두 대양에서의 전쟁을 치룰 수 있는 해군과 유럽 강대국과 싸울 수 있는 육군의 필요성 때문에, 체임벌린은 해군과 육군을 희생시키면서 왕립 공군을 우선시했다.[7]

1937년, 체임벌린은 영국이 프랑스에 대규모 육군을 투입하는 대신 해상 및 공중에서의 전쟁 노력에 집중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수를 피할 것이라는 유화 정책 원칙을 도입했다.[8] 이 원칙에 따라 육군은 대규모 감축을 겪었고, 해군과 특히 공군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무장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1930년대 후반 군비 지출 증가는 국제 수지, 미국 달러와 금 보유량, 인플레이션, 그리고 정부의 신용도를 위협했다.[9] 국내 자원 부족으로 철, 장비, 항공기 및 공작 기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지만, 군비 지출 증가로 수출용 공장 수가 줄어들어 불균형을 초래했다.[10] 또한 재무장을 위한 세금 부과는 경제 성장을 저해했고, 막대한 차입은 영국의 신용을 손상시켜 파운드화에 압력을 가했다.[10] 1939년까지 체임벌린 정부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방비에 투자했다.[11]

체임벌린의 재무장 정책은 초기에는 군축을 선호했던 노동당의 반대에 직면했다. 노동당은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했지만, 국방 투표 기권으로 정책을 전환했다.[12] 노동당은 체임벌린이 독일과 군비 경쟁을 벌이는 것을 비난했고, 일부 의원들은 다른 강대국들도 따라 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무장 해제를 촉구했다.[12] 1930년대 초,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사회 복지 지출보다 군비 지출을 우선시하는 전쟁광으로 비난했다.[13]

4. 주요 외교적 사건과 위기

체임벌린 내각 시기에는 여러 중요한 외교적 사건과 위기가 발생했다.

1937년, 체임벌린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스페인 내전으로 독일과 가까워진 이탈리아를 다시 영국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1937년 1월 신사 협정을 활용하고자 했다.[23] 1937년 여름에는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와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23] 그러나 이탈리아 잠수함의 중립 선박 공격으로 회담은 중단되었다.[23] 1937년 9월 니옹 회담에서는 이탈리아의 "해적 행위"를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해군이 지중해를 순찰하기로 합의했다.[23] 1938년 부활절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의 추가 파병으로 협정 이행은 불투명해졌다.[33] 1938년 11월, 영국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인정했지만, 이탈리아의 프랑스 영토 요구로 다시 위기가 발생했다.[70]

1938년 3월, 독일은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체임벌린 정부는 이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묵인했다.[45]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를 둘러싸고 또 다른 위기가 발생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계 주민의 자결권을 주장하며 이 지역을 합병하려 했다.[35] 체임벌린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협상했고, 1938년 9월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겨주었다. 뮌헨으로 직접 날아가 협상에 참여한 체임벌린은 9월 30일 영국으로 돌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언하며 환영을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체임벌린은 자치령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치령들은 영국을 위해 참전하기보다는 중립을 지킬 가능성이 높았다.[45] 특히 캐나다와 남아프리카는 유럽 전쟁을 피하려 했고, 체임벌린을 비판하기도 했다.[46] 체임벌린은 자치령의 지원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45] 또한, 독일 공군의 폭격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도 체임벌린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43]

4. 1.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 노력

체임벌린은 잠재적인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1937년 1월 신사 협정을 활용하여 이탈리아를 다시 영국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23] 그는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이탈리아와 독일이 결속되었다고 보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스페인에서 군대를 철수하면 이탈리아가 반독일적이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스트레사 전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23]

1937년 여름, 체임벌린은 조셉 볼 경과 아드리안 딩글리를 통해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와 접촉하여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우회로를 모색했다.[23] 그러나 1937년 8월 이탈리아 잠수함이 중립 선박을 공격하면서 회담은 중단되었다.[23]

1937년 9월 니옹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이탈리아의 공격을 완곡하게 표현한 "해적 행위"를 진압하기 위해 지중해를 순찰하기로 합의했다.[23] 이탈리아 해군도 순찰에 참여하여 스페인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에 대한 자체 "해적" 잠수함 공격에 맞서 티레니아해를 순찰했다.[23]

1938년 3월, 스페인에서 이탈리아군을 철수하기 위한 영국-이탈리아 회담이 재개되었다.[33] 1938년 4월 16일 부활절 협정이 체결되어 양국 간의 모든 분쟁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33] 그러나 무솔리니가 약속과 달리 더 많은 군대를 스페인에 파견하면서 부활절 협정의 전망은 불투명해졌다.[33]

체임벌린 내각은 스페인에 대한 이탈리아의 개입을 줄이고 이탈리아를 독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1937년 스페인 내전 불개입 위원회의 권한을 서서히 해체시켰다.[34]

1938년 11월 2일, 체임벌린은 이탈리아가 스페인에서 10,000명의 군대를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활절 협정을 발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70] 11월 16일 부활절 협정이 발효되었고 영국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인정했다.[70] 그러나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가 프랑스 일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이탈리아 위기가 발생했고, 체임벌린의 로마 방문 계획은 무산될 뻔했다.[70]

4. 2. 안슐루스와 오스트리아 병합

오스트리아 나치는 1934년에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를 암살했고,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45] 독일의 목적을 알게 된 체임벌린 정부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38년 3월 안슐루스를 묵인했다.[45]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동안 체임벌린의 정책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요인은 자치령들의 태도였다. 1922년 차낙 위기 이후 런던에서는 영국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중립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은 자치령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었다.[45] 뉴질랜드를 부분적으로 제외하고 모든 자치령, 특히 캐나다와 남아프리카는 자신들과 연관되지 않다고 생각되는 유럽에서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전적으로 양보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은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전쟁 위험으로 간주되는 일을 벌인 체임벌린을 비판했다.[46] 자치령의 태도는 영국이 제국 전체의 지원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는커녕 싸울 수도 없다고 믿었던 체임벌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45]

4. 3. 주데텐 위기와 뮌헨 협정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주데텐란트 지역은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1938년 두 번째 위기가 발생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자결권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1938년 10월 1일에 코드명 녹색 상황이라는 침략 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35]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 문제를 놓고 전쟁을 피하는 것을 선호했고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보호 의무가 없었지만, 1924년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동맹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자동으로 프랑스-독일 전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가오는 위기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체임벌린은 프라하에 독일에게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베를린에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중 전략을 따랐다.[37]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당신[히틀러]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당신이 주데텐 독일인들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체코인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그들을 내버려두겠다고 보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38]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에 대한 체임벌린의 행동은 독일의 폭격이 영국 도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군사 전문가들이 조장하고 지지한 매우 과장된 두려움의 영향을 받았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1938년 9월 자신의 일기에 "우리는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으며 그 [체임벌린]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 우리는 독일의 공격에 노출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자멸한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멸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두려움을 공유했다.[43]

1938년 8월, 독일이 예비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는 정보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이 9월로 예정되어 있다는 정보가 독일군 내 반전 인사들로부터 유출되었다.[49]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1938년 9월 5일 조국의 헌법 개편을 위한 제4차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콘라트 헨라인1938년 4월 칼스배드 연설에서 제시한 주데텐란트 자치 요구 대부분을 승인하여 독일군의 침략 구실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다.[50] 헨라인의 지지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경찰과 일련의 폭력적인 충돌을 벌이는 방식으로 제4차 계획 제안에 즉각 대응했고, 9월 중순 대규모 충돌 이후 특정 주데텐란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51] 위협적인 상황에 대응하여 8월 말 체임벌린은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나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는 합의를 도출하는 Z계획을 고안해냈다.[52]

베르히테스가덴베르그호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류하도록 허용하라는 히틀러의 공개 요구에 동의하도록 프라하에 압력을 가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체임벌린이 권한을 부여받을 때까지 군사 행동을 연기하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받아냈다.[57]

프랑스-영국의 극심한 압박 속에서 베네시는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58]

1938년 9월 22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히틀러와의 정상회담에서 체임벌린이 주데텐란트 이전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영국 대표단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자신이 제시한 바로 그 계획을 히틀러가 거부하게 된 것에 불쾌해 했다.[62]

히틀러는 프라하와 베를린 사이의 협상도 없고 양도를 감독할 국제 위원회도 없이 주데텐란트를 1938년 9월 28일까지 독일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독일은 폴란드와 헝가리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모든 주장이 만족될 때까지 전쟁을 선택지로서 포기하지 않았다.[63]

핼리팩스 외무장관이 이끄는 대부분의 내각은 고데스베르크 각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독일의 요구는 1938년 9월 25일에 공식적으로 거부되었다.[65]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공격은 1938년 10월 1일로 계획되었지만 9월 27일에서 28일 사이에 히틀러는 마음을 바꾸어 뮌헨에서 개최될 회의에 무솔리니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9월 30일에는 히틀러,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참석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런던은 이미 분쟁 지역의 양도안에 동의했기 때문에 뮌헨 협정의 대부분은 주데텐란트의 양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문제에 대한 토론이었으며 히틀러의 비교적 사소한 양보가 특징이었다. 이전은 10월에 10일 동안 이루어지며 국제 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되며 독일은 헝가리와 폴란드의 청구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67] 회의가 끝날 무렵,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영국-독일 우호 선언문에 서명하도록 했고, 체임벌린은 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히틀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68]

체임벌린은 협상을 위해 뮌헨으로 날아갔고 1938년 9월 30일 영국으로 돌아와 환대를 받았다. 런던 서부의 헤스턴 비행장에서 그는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 연설을 하고 군중에게 영독 선언문을 흔들었다.

5. 봉쇄 정책으로의 전환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39년 1월 말, 영국 정부는 히틀러가 시작한 반영국 선전 캠페인과 Z 계획으로 인한 전쟁해군 건조량 증가에 대한 정보, 그리고 "네덜란드 전쟁 공포"로 인해 공황에 빠졌다. 해외방첩청 사령관 빌헬름 카나리스가 심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짓 정보는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영국 도시에 폭격을 가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87]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는 프랑스가 독일의 공세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고, 이에 영국은 프랑스를 위해 "대륙적 약속"을 해야 했다.[88]

체임벌린은 프랑스와 참모 회담을 명령하고, 독일이 저지대로 이동하면 즉각 전쟁을 선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군대 규모를 확대하고 징병제를 고려했다.[88] 1939년 2월 6일, 체임벌린은 하원에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영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알렸다.[89] 프랑스 외에도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대한 보장을 발표하여 히틀러의 서유럽 침략을 막으려 했다.[90] 1939년 2월, 영국군 규모를 늘리고 향토군을 26개 사단으로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1939년 4월에는 징병제가 시행되었다.[85] 이는 "유화 정책"의 종식을 의미했으며, 영국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증가시켰다.

1939년 3월 15일,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체임벌린의 정책 전환을 가져왔고, "봉쇄" 전략이 채택되었다. 3월 17일, 버밍엄 연설에서 영국은 독일의 지배 노력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91]

1939년 3월 중순, 루마니아 장관은 루마니아가 독일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독일의 공격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은 석유 확보를 위해 루마니아를 중요하게 여겼고, 영국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5. 1. 폴란드 독립 보장

1939년 3월 중순, 체임벌린 정부는 "틸레아 사건"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전쟁 공포"로 인해 흔들렸다. 런던 주재 루마니아 장관 비오렐 틸레아는 자신의 나라가 독일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임박했다고 영국 정부에 보고했고, 이로 인해 동유럽에 대한 약속을 회피하려는 영국의 정책이 유보되었다.[93]

독일은 천연 석유 공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루마니아와 루마니아의 석유를 독일의 손아귀에 넣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의 봉쇄 능력은 전쟁을 억제하거나 승리하기 위한 영국의 중요한 카드였다.[95] 1939년 3월 31일, 폴란드에 대한 독립 보장은 폴란드를 서방과 결속시키고, 폴란드 외무부 장관 유제프 벡(오해로 친독일로 여겨짐)이 폴란드가 루마니아를 보호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96]

6. 유화 정책에 대한 평가와 비판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체임벌린은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국민의 불만이 독재 정권을 야기하고, 그 불만의 근원을 제거하면 독재 정권의 공격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베르사유 조약아돌프 히틀러의 불만 원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체임벌린은 외교 채널을 통해 나치 독일을 상대하려 했다. 1934년 6월 30일, 체임벌린은 이러한 정책을 "유화 정책"이라고 불렀다.[1]

체임벌린은 전 세계적인 국방 약속을 유지하기에는 경제적, 재정적 기반이 불충분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37년 영국 참모총장은 보고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극동이나 지중해에서 비상사태에 걱정 없이 직면할 수 없습니다... (중략) 잠재적인 적의 수를 줄이거나 잠재적인 동맹의 지원을 얻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또는 국제적 조치의 중요성을 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밝혔다.[1] 체임벌린 자신도 1937년 10월 내각에 자원 부족과 3면 전쟁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잠재적인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3] 그는 불만이 제한적이고 정당하다고 이해되는 한 불만을 달래거나, 다른 국가와 동맹을 형성하여 영국의 힘을 높이는 두 가지 선택지를 고려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전자를, 1939년과 1940년에는 후자를 우선시했다. 체임벌린의 전략에는 재무장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영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잠재적 적의 전쟁 선택을 예방하며, 전쟁 발발 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4]

체임벌린은 왕립 공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36년 10월 재무장관이었던 체임벌린은 내각에 "공군력은 우리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라고 말했다.[5] 그는 왕립 공군의 예산을 크게 확대하여 1933년 1,678만 파운드에서 1939년 1억 5,702만 파운드로 늘렸고, 이는 1937년 영국 육군 예산과 1938년 영국 해군 예산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6] 그러나 대공황으로 가속화된 장기간의 경제 쇠퇴로 인해 영국 경제는 위축되었고, 이는 왕립 공군 확장에 필요한 공장, 공작 기계, 숙련된 기술자 및 자금 부족으로 이어졌다. 체임벌린은 왕립 해군과 육군을 희생시키면서 왕립 공군을 우선시해야 했다.[7]

1937년,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영국이 프랑스에 대규모 육군을 투입하는 대신 해상 및 공중에서의 전쟁 노력을 제한하는 유화 정책 원칙을 도입했다.[8] 이에 따라 육군은 대규모 감축을 겪었고, 해군과 특히 공군은 대규모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무장은 영국 경제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1930년대 후반 군비 지출의 급증은 국제 수지, 미국 달러와 금 보유량, 인플레이션, 그리고 정부의 신용도를 위협했다.[9] 국내 자원 부족으로 인해 재무장에 필요한 철, 장비, 항공기 및 공작 기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지만, 군비 지출 증가는 수출용 공장 수를 줄여 불균형을 초래했다.[10] 또한 재무장을 위한 세금 부과는 경제 성장을 저해했고, 막대한 차입은 영국의 신용을 손상시켜 파운드화에 압력을 가했다.[10] 1939년까지 체임벌린 정부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방비에 투자했다.[11]

노동당은 처음에는 군축 정책을 선호했으나, 1938년 말에는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했다. 노동당은 체임벌린이 독일과 군비 경쟁을 벌이는 것을 비난하고, 일부 의원들은 영국의 무장 해제를 촉구하기도 했다.[12] 1930년대 초,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사회 복지 지출보다 군비 지출을 우선시하는 전쟁광으로 비난했다.[13]

체임벌린은 이탈리아를 독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노력했다. 1937년 1월 신사 협정을 활용하려 했고, 베니토 무솔리니스페인 내전에서 군대를 철수하면 이탈리아가 반독일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23] 그러나 1937년 8월 이탈리아 잠수함의 중립 선박 공격으로 회담이 중단되었다.[23] 이후 니옹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지중해 순찰에 합의했고, 이탈리아 해군도 참여했다.[23]

1937년 12월, 일본이 중국 양쯔강에서 영국 포격함 HMS 레이디버드를 공격하고 주중 영국 대사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일본 항공기는 미국 포함 USS 파나이를 침몰시켰다.[24] 체임벌린은 파나이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을 중립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으나, 미국의 거부로 좌절되었다.[26]

1938년 여름, 영국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이용하려는 독일 반나치 세력으로부터 여러 전보를 받았으나, 체임벌린은 무관심했고 지원을 거부했다.[48]

1938년 11월 2일, 체임벌린은 이탈리아가 스페인에서 10,000명의 군대를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활절 협정을 발효하려 했다.[70] 11월 16일 부활절 협정이 발효되었고 영국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인정했다.[70] 그러나 1938년 11월 30일, 이탈리아가 프랑스 일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이탈리아 위기가 발생했고, 체임벌린의 로마 방문 계획은 무산되었다.[70]

1938~1939년 겨울, 체임벌린의 독일에 대한 태도는 강경해졌다. 이는 히틀러의 반영국 선전 캠페인과 독일 군비 중단 정보 때문이었다.[71]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개인적인 패배로 간주한 히틀러가 영-독 해군 협정을 파기할 계획이라는 정보에 우려했다.[72] 또한, 독일 반대측이 전달한 히틀러의 비밀 연설 보고서는 그가 영국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기 위한 새로운 선전 문구를 썼다고 불평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73]

체임벌린은 발칸 반도를 독일의 경제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1938~1939년 겨울 영국의 "경제 공세"를 명령했다.[74] 1938년 11월, 영미 무역 협정이 체결되면서 양국 간 경제 협력이 증대되었고, 이는 정치적 협력으로 이어질 의도였다.[76]

1938년 말, 영국은 중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유도했다.[77] 당시 영국 외무부는 친중국적이었고, 일본의 중국 정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78] 체임벌린 정부는 일본의 야망이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로 확장될 것을 우려하는 도미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80]

1938년 12월, 체임벌린은 독일 통신사 특파원들에게 "야망이 지배욕으로 이어진다면 야망은 무익하다"라고 경고했다.[84] 1938년 말, 참모장은 영국의 방공망이 독일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질 것이라고 보고했다.[85]

유화 정책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인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엇갈린 평가'에 이미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6. 1. 긍정적 평가

나치 세력의 부상에 대처하는 데 있어 영국 정부가 거듭 실패한 것은 체임벌린의 책임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징병제를 시작하고 이미 공군력을 축적한 상태였으며, 대공황 시기의 암울한 재정 상황 속에서 체임벌린은 전쟁을 혐오했고, 히틀러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롯된 정치적 의지와 비전의 실패였고, 체임벌린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69]

평화 유지 정책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만약 하원이 더 강경한 총리를 원했다면 윈스턴 처칠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도 폴란드 침공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면이 있었다. 많은 평론가와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의 정책 자체보다는 정책 수행 방식과 위험 회피 실패를 문제 삼았다. 그의 동시대인들 중 다수는 그를 완고하고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는 외교 정책에 대해 의견이 다른 내각 장관들의 견해를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제지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동료들이 많았음에도 오랫동안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체임벌린은 여러 가지 이유로 평화를 열정적으로 믿었으며, 유럽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영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히틀러 역시 이성적인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이 이러한 견해를 고수하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유화 정책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어떤 조치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는지, 무력 충돌이 더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결과가 더 좋았을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할 의사가 없었고, 다른 효과적인 동맹국도 없었다. 이탈리아강철 조약에 가입했고, 소비에트 연방불가침 조약에 서명했으며, 미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중립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은 70년 이상 학계, 정치인, 외교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독일이 너무 강해지도록 허용했다는 비난부터, 독일이 이미 너무 강해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전쟁을 연기하는 것이 영국의 최선의 이익이었다는 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사가 앤드류 로버츠는 2019년에 "사실 그들(체임벌린 내각)이 적어도 시도한 것은 옳았다는 것이 오늘날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라고 주장했다.[69]

6. 2. 부정적 평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체임벌린은 평화를 추구했지만, 히틀러의 팽창 야욕을 간과하고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당시 베르사유 조약이 히틀러의 불만 원인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체임벌린은 외교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1]

체임벌린은 전 세계적인 국방 약속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재정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잠재적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의존했다.[3] 그는 왕립 공군을 중요시하여 예산을 크게 확대했지만, 이는 대공황으로 위축된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6]

노동당은 초기에는 군축 정책을 선호했으나, 이후 국방 예산 증액에 반대하며 체임벌린의 정책을 비판했다.[12]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지만, 정책 수행 방식과 히틀러를 제대로 제지하지 못한 점은 비판받는다. 많은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본성을 오판하고 유화 정책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추구했다고 평가한다.[69]

6. 3. 엇갈린 평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결과와 그 여파를 경험한 체임벌린은 다른 많은 유럽인들처럼 평화를 추구했다. 국민의 불만이 독재 정권을 낳고, 불만의 근원을 없애면 독재 정권의 공격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아돌프 히틀러 불만의 주된 원인이라는 생각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다. 체임벌린은 외교를 통해 나치 독일을 상대하고, 내부의 반대, 특히 윈스턴 처칠의 반대를 억누르려 했으며, 1934년 6월 30일 이러한 정책을 "유화 정책"이라고 불렀다.[69]

나치 세력의 팽창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계속된 실패는 체임벌린의 책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대공황 시기의 어려운 재정 상황, 전쟁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 그리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히틀러 사이에서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정치적 의지와 비전 부족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평화 유지를 위한 정책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만약 하원이 더 강경한 총리를 원했다면 윈스턴 처칠이 적임자였을 것이다. 전쟁 발발 후에도 폴란드 침공이 전면전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했다. 많은 평론가와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의 정책 자체보다는 정책 수행 방식과 위험 회피 실패를 비판한다. 그는 완고하고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외교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각료들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평가는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든 후에도 오랫동안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체임벌린은 여러 이유로 평화를 열렬히 믿었고, 유럽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영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의 지도자는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히틀러도 이성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체임벌린이 이러한 견해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고수하며 유화 정책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어떤 조치가 전쟁을 막을 수 있었는지, 무력 충돌이 더 일찍 시작되었다면 결과가 더 좋았을지는 불분명하다. 프랑스는 군사 개입 의사가 없었고, 다른 효과적인 동맹국도 없었다. 이탈리아강철 조약에 가입했고, 소련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으며, 미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중립국이었다.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은 70년 이상 학계, 정치인, 외교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독일이 너무 강해지도록 허용했다는 비판부터, 독일이 이미 너무 강해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전쟁을 연기하는 것이 영국의 최선의 이익이었다는 판단까지 다양하다.

역사가 앤드류 로버츠는 2019년에 "사실 그들이 적어도 시도한 것은 옳았다는 것이 오늘날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라고 주장했다.[69]

7. 유화 정책의 교훈과 현대적 의미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 정책은 잠재적 적국의 침략 의지를 꺾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전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현대 국제 관계에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특히, 한국의 안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체임벌린은 독일의 불만을 해소하여 평화로운 유럽을 만들고자 했다. 1937년 5월, 얄마르 샤흐트 국가 은행 총재와의 회담에서 영국은 독일의 국제 연맹 복귀, 서유럽 불가침 조약, 군비 제한 조약, 중부 및 동유럽의 영토 보전과 주권 독립 존중 등을 요구했다.[19] 그러나 영국이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하기 위해, 체임벌린은 회담 전 영국의 재무장을 완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0]

체임벌린이 독일에 집중한 이유는 1934년 국방 요구 사항 위원회(DRC) 보고서가 독일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방어가 맞서야 할 궁극적인 잠재적 적"으로 지칭했기 때문이다.[21] 그러나 체임벌린은 개인적으로 독일인을 싫어했다.[22]

소련 붉은 군대의 전투 능력에 대한 의구심[15]과 미국의 중립법 통과[16]는 체임벌린이 잠재적 동맹에 대해 비관적인 평가를 하게 했다. 그는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을 통해 국제 분쟁에 개입시키려 했지만, 회담 전부터 미국 측 전제 조건을 수락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절박했다.[17][18] 프랑스는 에릭 핍스 영국 대사 파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잠재적 동맹국에서 제외되었다.

7. 1. 힘의 균형과 억지력의 중요성

체임벌린 내각 초기, 네빌 체임벌린의 외교 정책은 전 세계적인 국방 약속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재정적 기반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1937년 영국 참모총장 보고서는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동시에 대항하여 영토, 무역, 핵심 이익을 보호할 만큼 강력한 방어군을 갖추기 어렵다고 지적했다.[1] 체임벌린 자신도 1937년 10월 내각에 자원 부족으로 인한 3면 전쟁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잠재적인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 외교에 더 의존해야 했다.[3] 그는 불만이 제한적이고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한 불만을 달래는 것과, 동맹을 통해 영국의 힘을 높이는 두 가지 선택지를 고려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전자를, 1939년과 1940년에는 후자를 우선시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재무장이 필요했다. 이는 영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하고, 잠재적 적의 전쟁 선택을 예방하며, 전쟁 발발 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4]

체임벌린은 왕립 공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36년 10월, 그는 공군력이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라고 말했다.[5] 그는 왕립 공군의 예산을 크게 확대하여, 1939년에는 1933년의 16780000GBP에서 157020000GBP로 증가시켰다. 이는 1937년 영국 육군 예산과 1938년 영국 해군 예산을 능가하는 수치였다.[6]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쇠퇴로 인해, 체임벌린은 왕립 해군과 육군을 희생시키면서 왕립 공군을 우선시했다.[7]

1937년, 체임벌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유화 정책 원칙을 도입했다. 이 원칙에 따라 육군은 감축되었고, 해군과 공군은 확장되었다.[8]

그러나 재무장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1930년대 후반 군비 지출 증가는 국제 수지, 미국 달러와 금 보유량, 인플레이션, 정부 신용도를 위협했다.[9] 국내 자원 부족으로 철, 장비, 항공기 등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고, 이는 수출 감소로 이어져 불균형을 초래했다.[10] 세금은 경제 성장을 저해했고, 차입은 영국의 신용을 손상시켜 파운드화에 압력을 가했다.[10] 1939년, 체임벌린 정부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국방비에 투자했다.[11]

체임벌린의 재무장 정책은 초기에는 군축을 선호했던 노동당의 반대에 직면했다. 노동당은 체임벌린이 독일과 군비 경쟁을 벌이는 것을 비난했고, 일부 의원들은 영국의 무장 해제를 촉구했다.[12]

7. 2. 한국에 대한 시사점

체임벌린 내각의 유럽 외교 정책, 특히 독일과의 유화 정책은 오늘날 한국의 대북 관계 및 주변국 외교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북한과의 관계: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은 히틀러의 팽창 야욕을 막지 못하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이 사례는 북한의 핵 개발과 지속적인 도발에 대한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교훈을 준다. 유화 정책만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단호한 제재와 압박을 병행해야 한다.
주변국과의 외교:체임벌린은 잠재적 동맹국이었던 소련(현 러시아)미국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소홀히 했다. 이는 주변국과의 협력 중요성을 간과한 결과였다. 한국은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긴밀한 공조가 필수적이다.
결론:체임벌린의 유화 정책 실패는 북한 핵 문제와 주변국 외교라는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유화 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단호함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참조

[1] 간행물 "The British Military Establishment and the Policy of Appeasement" George Allen & Unwin 1983
[2]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0
[3] 간행물 "Appeasement" Routledge 1999
[4] 간행물 "Guilty Man" Edward Arnold 1997
[5] 서적 'Neville Chamberlain' Arnold 2001
[6] 서적 'Appeasement & Rearmament' Rowman & Littlefield Inc 2006
[7] 간행물 "Appeasement" Routledge 1999
[8] 서적 'Neville Chamberlain and Appeasement' Associated University Press 2000
[8] 간행물 "The Continental Commitment In British Strategy in the 1930s" George Allen & Unwin 1983
[9] 서적 'Simon'
[10] 간행물 "Appeasement" Routledge 1999
[11]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1989
[12]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12] 간행물 "Reflections on Munich After Sixty Years" Frank Cass 1999
[13] 간행물 "Reflections on Munich After Sixty Years" Frank Cass 1999
[14] 간행물 "Neville Chamberlain, The British Official Mind and the Munich Crisis" Frank Cass 1999
[15] 간행물 "British Perceptions of Soviet Military Capability, 1935–39" George Allen & Unwin 1983
[16]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17] 간행물 "The Ambiguities of Appeasement: Great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1937-9" George Allen 1983
[18] 간행물 "The Ambiguities of Appeasement: Great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1937-9" George Allen 1983
[19]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20]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21] 서적 'Dilemmas of Appeasement'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22] 서적 'Neville Chamberlain and Appeasement' Associated University Press 2000
[23] 간행물 "The Anglo-Italian Gentlemen's Agreement of January 1937 and Its Aftermath" George Allen 1983
[24]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25] 서적 'Chamberlain and Roosevelt'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8
[26] 서적 'Chamberlain and Roosevelt'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8
[27] 서적 'Chamberlain and Roosevelt'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8
[28] 서적 'Chamberlain and Roosevelt'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8
[29] 서적 'Appeasement and Germany\'s Last Bid for Colonies' Macmillan Press 1988
[30] 서적 'Appeasement and Germany\'s Last Bid for Colonies' Macmillan Press 1988
[31] 서적 'Appeasement and Germany\'s Last Bid for Colonies' Macmillan Press 1988
[32]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Press 1989
[33] 간행물 "The Anglo-Italian Gentlemen's Agreement of January 1937 and Its Aftermath" George Allen 1983
[34] 뉴스 "Peace and Pirates" https://archive.toda[...] Time 1937-09-27
[35] 서적 'Arms, Autarky and Aggression' Edward Arnold 1972
[36] 서적 The Road To War Macmillan 1989
[37] 논문 Neville Chamberlain, The British Official Mind and the Munich Crisis Frank Cass 1999
[38] 서적 Munich Hamish Hamilton 1988
[39]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1980
[40] 서적 Neville Chamberlain Edward Arnold 2001
[41] 서적 British Politics and Foreign Policy in the Age of Appeasemen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42] 문서
[43] 문서
[44] 서적 Road To War Macmillan 1989
[45] 논문 Reflections on Munich After Sixty Years Frank Cass 1999
[46] 논문 The British Dominions and the Munich Crisis Frank Cass 1999
[47] 문서
[48]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1980
[49] 서적 Munich
[50] 서적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51] 서적 Munich
[51]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52] 서적
[52] 서적 The Road To War
[53] 논문 Neville Chamberlain, The British Official Mind and the Munich Crisis
[54] 논문 Chapter 11 Plan Z and Munich
[5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56] 문서
[57] 서적 Diplomacy of Illusion
[58] 문서
[59] 서적 Diplomacy of Illusion
[60]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the Third Reich Batsford 1973
[61]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62] 서적 Diplomacy of Illusion Weidenfeld and Nicolson 1972
[63]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64] 논문 'We Must Hope for the Best and Prepare for the Worse' Arnold 1997
[65] 서적 Diplomacy of Illusion Weidenfeld and Nicolson 1972
[6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66] 논문 Germany and the Munich Crisis: A Mutilated Victory? Frank Cass 1999
[67] 서적 Munich Hamish Hamilton 1988
[68] 서적 Munich Hamish Hamilton 1988
[69] 뉴스 "'Appeasement' Review: What Were They Thinking? Britain's establishment coalesced around appeasement and bared its teeth at those who dared to oppose it" https://www.wsj.com/[...] The Wall Street Journal 2019-11-01
[70] 논문 The Anglo-Italian Gentlemen's Agreement of January 1937 and Its Aftermath George Allen 1983
[71] 서적 How War Came Heinemann 1989
[72] 서적 How War Came Heinemann 1989
[73]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74]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7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76] 간행물 "The United States, Appeasement and the Open" George Allen 1983
[77]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78]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79]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80]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81]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82]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83] 서적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1
[84] 서적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Macmillan Press 1998
[85] 서적 Foreign Policy and Preparation for War Clardeon Press 1990
[86] 서적 Simon Aurum Press 1992
[87] 서적 How War Came Heinemann 1989
[88] 서적 How War Came Heinemann 1989
[89] 서적 France and the Nazi Threat Enigma Books 2004
[90] 간행물 "Once more onto the Breach: Britain's Guarantee to Poland, March 1939" 1996
[91] 서적 How War Came Heinemann 1989
[92]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93] 서적 How War Came 1989
[94] 서적 How War Came
[95]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1937–1939 1980
[96] 간행물 "Once more onto the Breach: Britain's Guarantee to Poland, March 1939" 199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