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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츠기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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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와이 츠기노스케는 막부 말기의 나가오카 번의 무사로, 번정 개혁을 주도하고 보신 전쟁에서 무장 중립을 추구한 인물이다. 그는 에도 유학을 통해 학문을 연마하고 군봉행으로 임명되어 번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보신 전쟁 발발 후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나, 오지야 담판 결렬 후 북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실리주의적 면모와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생애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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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츠기노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와이 쓰구노스케
이름가와이 쓰구노스케
일본어 이름河井 継之助
로마자 표기Kawai Tsugunosuke
아키요시 (秋義)
아호소류쿠쓰 (蒼龍窟)
출생과 사망
출생1827년 1월 27일, 일본 에치고 국 나가오카시
사망1868년 10월 1일, 일본 무쓰 국 아이즈
묘소에이료지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가족 관계
아버지가와이 아키노리 (河井秋紀)
어머니사다 (貞)
배우자나기노 가헤에의 여동생 스가 (梛野嘉兵衛の妹・すが)
경력
직업나가오카 번 가로
주군마키노 다다마사
마키노 다다유키
마키노 다다쿠니
기타 정보
가문가몬: "마루니 가타바미 (丸に片喰)"
계명주료인덴겐도기료코지 (忠良院殿賢道義了居士)

2. 카와이가의 가계와 배경

카와이 가문의 선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오미 제제번 혼다씨의 가신이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바라군 가와이 마을 출신의 지자무라이였다는 설이다.[1] 혼다 씨 가신설에 따르면, 제제번 번주의 딸이 초대 에치고 나가오카번 번주 마키노 다다나리의 적자 미츠나리(번주가 되기 전에 사망)에게 시집갈 때, 가와이 세이자에몬(清左衛門)과 타다에몬(忠右衛門) 형제가 나가오카로 함께 왔다. 이때 형 세이자에몬에게는 40석, 동생 타다에몬에게는 25석이 주어졌고, 이들은 그대로 마키노 가문의 새로운 가신이 되었다.[1]

형 세이자에몬의 가계는 그의 소료(가문의 대를 잇는 맏아들)인 기자에몬(喜左衛門)이 근신(近臣) 및 메츠케(감찰관)로 진급하여 오구미(大組, 번의 상급 무사 조직)에 들어갔다. 보신 전쟁 당시 총졸대장(총을 든 병사 부대의 대장)이었던 가와이 헤이키치(平吉)는 이 세이자에몬 가문의 분가에 해당한다.[1]

동생 타다에몬은 처음에 유필(서기) 역할을 맡았고, 이후 군봉행(군사와 재정을 담당하는 직책)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두 차례 가증(봉록 증가)을 받아 오구미에 들어가 100석의 봉록을 받게 되었고, '카와이 킨타유(金太夫) 가문'으로 불렸다.[1]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직계 가문은 이 타다에몬(카와이 킨타유 가문)의 차남 다이에몬 노부카타(代右衛門信方)가 호에이 4년(1707년)에 새로운 영지(新知) 30표(俵) 2인 부치(二人扶持, 2명분의 식량 지원)를 받고 주코쇼(中小姓, 번주를 시중드는 직책)로 발탁되면서 분가한 것이다. 이로써 카와이 가문에는 세이자에몬을 시조로 하는 본가(50석), 타다에몬을 시조로 하는 분가(100석, 나중에 20석 가증), 그리고 노부카타를 시조로 하는 츠기노스케의 가문(120석)이 존재하게 되었다.[1]

츠기노스케의 조상인 노부카타는 처음에는 30표 2인 부치였으나, 이후 간조가시라(勘定頭, 재정 담당관), 니가타 마치부교(町奉行, 도시 행정 책임자)를 역임하며 모노가시라격(物頭格, 부대 지휘관급)이 되었고, 녹고(禄高, 봉록)는 140석까지 올랐다. 이 중 120석의 상속이 인정되어 120석의 가문을 이루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 노부카타가 군봉행이었다는 기록은 번의 공식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1] 3대 당주인 다이에몬 아키츠네(代右衛門秋恒) 역시 노부카타와 비슷한 직책을 역임했다. 츠기노스케의 아버지이자 군봉행을 지낸 4대 다이에몬 아키토키(代右衛門秋紀) 때 어떤 이유로 20석이 줄어 120석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아시다카(足高, 특정 직책에 따라 추가되는 봉록)가 없어진 것이지 가문의 기본 봉록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키토키는 풍류를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승려 료칸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1]

이처럼 노부카타 계열의 카와이 가문은 능력 위주로 평가받는 역방(役方, 민정 및 재정 담당 부서)의 주요 직책을 맡는 중견 가문이었다. 다른 카와이 가문들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서 가문 내에서도 우위를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가문의 배경은 번 내부와 일본 전체의 정세가 불안정하던 시기에 츠기노스케가 게이오 원년(1865년) 군봉행으로 발탁되어 번정 개혁을 주도하고, 이후 여러 중책을 거치며 번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

일부에서는 카와이 가문을 '봉행격(奉行格)'의 가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1] 첫째, 나가오카번가격(家格, 가문의 등급)에는 '봉행격'이라는 등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나가오카번에는 역사학에서 말하는 지방 행정 담당의 마치부교나 군봉행과는 별도로, 가로(家老, 번의 최고 가신)를 보좌하며 번의 정치 전반을 담당하는 '봉행직(奉行職, 고봉행(御奉行))'이 존재했다. 이 봉행직은 때때로 가판(家判, 가로 다음가는 중신)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1]

츠기노스케는 중로(中老, 가로 다음 직책)가 되기 전, 고요닌(公用人, 번의 대외 교섭 담당)·군봉행·마치부교를 겸임한 후 '고봉행격 가판'에 임명되었다. 카와이 가문 사람이 이 '봉행격'에 해당하는 직위에 오른 것은 츠기노스케가 처음이었다.[1] 따라서 카와이 가문 자체를 '봉행급 가문'으로 보는 것 역시 오류이다. 또한 '봉행'과 '봉행격'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말해 '봉행격'은 '봉행과 동등한 격식'을 의미할 뿐, 봉행 본직에 임명된 것은 아니다.[1]

참고로 『나가오카 시사(長岡市史)』에 따르면, 마치부교는 반토(番頭, 번의 군사 조직 책임자 중 하나)가 겸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츠기노스케가 마치부교를 겸임했을 때 이미 반토 직책에도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

3. 성장 과정과 유학

분세이 10년(1827년) 나가오카번 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 검술무예를 익히는 한편 독서를 즐겨 깊이 파고드는 학문 자세를 보였다. 번교인 소토쿠칸에서 유학을 배우며 양명학에 심취했고, 비슷한 뜻을 가진 젊은 번사들과 교류하며 "통당"(桶党)이라 불리기도 했다.

가에이 3년(1850년) 결혼 후, 1852년에는 에도로 유학하여 사이토 셋도, 사쿠마 쇼잔, 코가 킨이치로 등에게서 학문과 포술 등을 배웠다. 1853년 흑선 내항 당시에는 번주에게 건언서를 제출하여 주목받았고, 잠시 귀번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정 개혁 시도가 좌절되자 사직했다.

안세이 6년(1859년) 다시 유학길에 올라, 경세론을 배우기 위해 비추국 마츠야마번의 야마다 호코쿠를 찾아가 큰 영향을 받았다. 야마다 밑에서 배우는 동안 사가번, 나가사키, 구마모토번 등을 돌며 견문을 넓혔고, 1860년 유학을 마치고 나가오카번으로 돌아왔다.

3. 1. 탄생과 청년기

카와이 츠기노스케 생가터 (현 카와이 츠기노스케 기념관, 니이가타현 나가오카시 나가마치)


츠기노스케의 어머니 사다(왼쪽)와 아내 스가(오른쪽)


츠기노스케 저택 터에 있던 두 그루의 소나무 (메이지 시대 촬영). 호 "소룡굴"의 유래로 여겨진다.


분세이 10년(1827년), 나가오카성 아래 나가마치에서 아버지 다이우에몬 아키노리와 어머니 사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성격이 격렬하고 장난기가 심했으며,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12~13세 무렵, 스승을 두고 검술이나 마술(馬術) 등 무예를 배웠지만, 스승이 가르치는 방식이나 예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항하며 제멋대로 행동하여 스승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파고들며 베껴 적었다고 한다. 이후 번교(藩校)인 소토쿠칸(崇徳館)에서 유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때 도강(都講)이었던 고노 쇼인(高野松陰)의 영향으로 양명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덴포 13년(1842년)에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르고 아키요시(秋義)라는 이름을 얻었다. 노부카타(信方) 계열의 가와이 가문 당주는 원복하면 대대로 '다이우에몬'(大炊右衛門)이라는 통칭을 세습했지만, 그는 원복 후에도 어린 시절 이름인 '츠기노스케'(継之助)를 통칭으로 계속 사용했다. 17세 때, 츠기노스케는 닭을 잡아 왕양명에게 제사를 지내며 나라를 위해 힘쓰고 번(藩)을 지탱하는 뛰어난 신하가 될 것을 맹세했다. 이듬해, 성 아래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츠기노스케의 집도 불에 타, 현재 기념관이 있는 터의 집으로 이사했다.

가에이 3년(1850년)에는 나기노 가헤이(梛野嘉兵衛, 250석 소바요닌)의 여동생 스가(すが)와 결혼했다. 나기노 가문은 안세이(安政) 연간 번정 개혁을 주도한 무라마쓰 주지우에몬(村松忠治右衛門)의 외가이며, 『무감(武鑑)』에도 번주 시종 마키노 다다노리(牧野忠恭)의 부교(奉行)로 나기노 야고자에몬(梛野弥五左衛門)의 이름이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처남인 사노 요소자에몬(佐野与惣左衛門, 『무감』에서 부교로 확인됨)과 마찬가지로 번주 측근 가문과의 결혼이 츠기노스케의 출세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츠기노스케는 청년 시절부터 주로 일본과 중국(송, ) 유학자 및 철학자들의 어록이나 , 시대 주해서 종류의 책을 즐겨 필사했다. 독서 방법에 있어서도 훗날 우노 덴지로(鵜殿団次郎)와 논의할 때, 다독(多讀)을 선호한 우노와 달리 츠기노스케는 정독(精讀)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자세는 이후 유학(遊学) 시절에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야마 료운(小山良運, 130석), 하나와 게이노신(花輪馨之進, 200석, 후일 부교(奉行) 본역), 미마 이치노신(三間市之進, 350석, 후일 부교역 가한(加判)), 미시마 오쿠지로(三島億二郎, 37석, 번교 조교수, 후일 모쿠히쓰카쿠(目付格), 다이칸(代官))와 같은 동년배 젊은 번사들과 밤낮으로 교류하며 뜻을 나누었다. 이들은 주변에서 "통당"(桶党, 물통처럼 빈틈없이 단결했다는 의미)이라 불렸는데, 게이오(慶応) 연간 번정 개혁 시기에는 무라마쓰 주지우에몬(70석, 안세이 번정 개혁 주도자, 후일 부교격, 산조가시라(勘定頭)·군부교(郡奉行) 등 겸임, 츠기노스케 아내의 인척)과 우에다 주베(上田十兵衛, 200석, 후일 군부교·마치부교(町奉行) 겸임) 등과 함께 차례로 요직에 오르며, 츠기노스케를 중심으로 한 개혁 추진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3. 2. 혼인과 유학 생활

1852년(가에이 5년) 가을 무렵, 츠기노스케는 에도로 유학을 떠났다. 에도에는 이미 미시마와 고바야시 토라사부로 등이 사쿠마 쇼잔에게 배우고 있었다. 츠기노스케는 우선 미시마를 통해 코가 킨이치로(차케이)의 소개로 사이토 셋도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같은 시기에 쇼잔의 서당에도 다니며 포술을 배웠다. 유학 중 츠기노스케는 미시마, 고바야시 등과 에도의 거리를 구경하거나 술을 마시는 등 자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당시 오사카의 테키주쿠에 있던 코야마는 고바야시의 편지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전해 듣고 매우 부러워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나가오카의 지인에게 보냈다.

다음 해인 1853년(가에이 6년), 츠기노스케는 사이토의 문하를 떠나 코가 킨이치로의 큐케이샤(久敬舎)에 입문하여 기숙했다. 사이토 서당을 떠난 이유는 자신을 향상시킬 만한 책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한편, 쇼잔의 서당에는 계속 다니며 포술을 배웠으나, 츠기노스케는 쇼잔의 인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같은 번 사람에게 "사쿠마 선생님은 훌륭하시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큐케이샤에서는 강의는 거의 듣지 않고,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충정공집』을 필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동료 문인들 사이에서는 "편협하고 완고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같은 해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가 내항하자(흑선 내항), 당시 에도 막부 로주였던 번주 마키노 타다마사는 미시마를 흑선 정찰에 파견하는 한편, 가신들에게 널리 의견을 구했다. 이에 츠기노스케, 미시마, 고바야시는 각각 건언서를 제출했다. 미시마와 고바야시의 건언은 타다마사의 비위를 거슬러 귀번 명령을 받았으나, 츠기노스케의 건언은 번주의 주목을 받아 신지(新知) 30석을 받고 오메츠케(大目付)급 효조카타(評定方) 조역(助役)에 임명되어 귀번 명령을 받았다. 츠기노스케는 『이충정공집』 전권을 필사하고 표제를 써 받은 후 큐케이샤를 떠나 나가오카로 돌아갔다.

귀번 후 번정 쇄신을 시도했으나 가로 등 번 상층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약 2개월 만에 사직했다. 이에 문벌 탄핵 건언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안세이 2년 (1855년)에는 타다마사의 세자 마키노 타다야스의 경사(經史) 강의 요청을 "나는 강론 따위를 하기 위해 학문을 한 것이 아니다. 강론을 할 필요가 있다면 강론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다"라며 거절하여 질책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사격 연습에 몰두하고 미시마와 함께 오우 지방을 여행했다. 안세이 5년 (1858년)에는 가독을 상속받아 외양음미역(外様吟味役)이 되었고, 미야지(宮路) 촌의 분쟁을 해결했다.

안세이 6년(1859년) 정월, 츠기노스케는 다시 에도로 유학하여 코가 킨이치로의 큐케이샤에 들어갔다. 이후 경세제민의 학문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비추 마츠야마번의 야마다 호코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서국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농민 출신인 야마다를 "안고로(安五郞)"라는 통칭으로 부르는 등 다소 거만한 태도를 보였으나, 야마다의 언행일치와 번정 개혁 성과를 직접 보고는 태도를 바꾸어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야마다 밑에서 수양하는 동안 사가번, 나가사키, 구마모토번 등을 방문하여 견문을 넓혔다. 번정으로 바쁜 야마다를 대신하여 미시마 츄슈가 츠기노스케를 상대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만엔 원년(1860년) 3월, 마츠야마를 떠나 에도로 돌아왔고, 잠시 요코하마에 머물다가 나가오카로 귀향했다. 야마다 호코쿠에게서 받은 『왕양명전집』(왕문성공전집)에 담긴 충고는 결국 사쿠마 쇼잔의 경우처럼 지켜지지 못했다.

4. 번정 개혁의 주도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번정 개혁 활동과 그의 정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주요 연구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는 막부 말기 나가오카번의 상황과 카와이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안도 테츠야(安藤哲也), 「막부 말기 정치 주체와 정치 의식 ―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정치사상에 대하여」(幕末期における政治主体と政治意識 ― 河井継之助の政治思想について), 1976년.
  • 오가와 카즈야(小川和也), 「카와이 츠기노스케 출생지를 찾아서 ― 에치고 나가오카번에서의 카와이 가문의 위치」(河井継之助生誕の地を求めて ― 越後長岡藩における河井家の位置), 『역사독본』(歴史読本) 48권 1호, 2003년.
  • 요시다 코헤이(吉田公平), 「스즈키 무인의 「카와이 츠기노스케 언행록」에 대하여」(鈴木無隠の「河井継之助言行録」について), 『동양대학 중국철학문학과 기요』(東洋大学中国哲学文学科紀要) 14호, 2006년.
  • 『나가오카 향토사』(長岡郷土史) 수록 관련 논문 (나가오카 향토사 연구회 편, 제1~44호, 1960~2007년).

4. 1. 에도 유학과 번정 참여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에도 유학과 번정 참여'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4. 2. 군봉행 취임과 개혁 추진

게이오 원년(1865년)에 외양 음미역에 다시 임명되었고, 3개월 후에는 군봉행에 취임했다. 이후 쓰기노스케는 나가오카번의 번정 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후 정봉행을 겸임하고 봉행격 가판으로 승진하면서, 풍기 숙정, 농정 개혁, 관개 공사, 병제 개혁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나가오카 번의 게이오 개혁 참조)

특히 번사들의 지행(知行)이 100석 미만인 자는 늘려주고, 100석 이상인 자는 줄여 문벌을 평균화하는 동시에, 군사 제도를 중앙 집권적으로 개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개혁은 번주의 신임 아래 쓰기노스케가 주도하여 단행했다.

5. 메이지 유신과 무장 중립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웹 애니메이션 막말기관설 이로하코호에로에서는 나가오카번의 가로인 카와이 츠기노스케가 번을 지키기 위해 개틀링포를 손에 넣고 북월 전쟁에서 활약하다 부상으로 사망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해당 작품에서 카와이 츠기노스케 역의 성우는 오오니시 타케하루가 맡았다.

5. 1. 보신 전쟁 발발과 대응

게이오 3년(1867년) 10월,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실시하자 중앙 정국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이에 반막부 세력인 토막파(討幕派)는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하여 막부 폐지를 선언했다. 당시 나가오카 번에서는 번주 마키노 타다요시가 은거하고 마키노 타다쿠니가 새 번주가 되었는데, 대정봉환 소식을 접한 타다쿠니와 쓰기노스케 등은 정세 파악과 번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쓰기노스케는 번주를 대신하여 의정소에 출두해 도쿠가와 가문을 옹호하는 내용의 건의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에드워드 스넬(스넬 형제)
가와이 쓰기노스케가 파브르 브란트에게서 구입한 서적 대금 영수증. 보병전술서나 지리 관련 서적 등을 구입했다.
이듬해인 게이오 4년1월 3일(1월 27일), 교토의 도바・후시미에서 아이즈 번과 구와나 번을 중심으로 한 구 막부군과 신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서 보신 전쟁의 막이 올랐다(도바·후시미 전투).

오사카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쓰기노스케 등은 구 막부군이 패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로 몰래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에도로 돌아왔다. 번주 일행을 먼저 나가오카로 돌려보낸 쓰기노스케는 에도 번저를 처분하고 가보 등 값나가는 물건들을 모두 팔아치웠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당시 가격이 폭락한 을 사들여 에조치(현 홋카이도)의 개항장인 하코다테로 운반해 되팔고, 니가타와의 환율 차익을 이용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여 군자금을 불렸다. 동시에 파브르 브란트 상회(C.&J.FAVRE BRANDT), 스넬 형제 등 외국 상인들로부터 암스트롱 포, 개틀링 건, 엔필드 소총, 스나이더 소총, 샤프스 소총 (군용 카빈)과 같은 최신 서양식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배편으로 나가오카로 보냈다. 특히 개틀링 건은 당시 일본 전체에 3문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최신 기관총이었는데, 그중 2문을 나가오카 번이 보유하게 되었다.[3][4][5][6][7][8][9]

5. 2. 오지야 담판과 북월 전쟁

신정부군이 무쓰아이즈번을 정벌하기 위해 나가오카번 영지에 가까운 오지야로 진군해오자, 나가오카 번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세습가로 수좌인 이나가키 헤이스케나 선법가(세습 가로 다음가는 중신 가문) 마키 구라노스케 등 상급 가신들은 신정부군에 항복하고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와이 츠기노스케는 항복론자들의 거점이었던 번교 소토쿠칸을 감시하게 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이후 번 내의 항전과 항복 논쟁을 잠재우고, 미국의 먼로 독트린에서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중립 노선을 주장하며 신정부군과의 담판에 나섰다. 그는 구 막부군과 신정부군 사이의 조정을 제안하고자 했다[10]

1868년 5월 2일(6월 21일), 신정부군 감찰이었던 도사번 출신의 이와무라 세이이치로는 오와리번의 중개로 오지야의 지가은사에서 츠기노스케와 회담했다[11]。 이 자리에서 츠기노스케는 신정부군을 비판하며 나가오카 영내로 들어오는 것과 전투를 거부한다고 통보했으나, 담판은 결국 결렬되었다.



나가오카번은 공식적인 영지 규모(표고)는 7만 4천 석의 작은 번이었지만, 실제 수확량(내부고)은 약 14만 석에 달하는 중견 번이었다. 번 내부의 의견이 완전히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신정부군에 항복을 주장했던 세습 가로 수좌 이나가키 시게미쓰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번을 떠났다. 세습 가로 차좌인 야마모토 요시미치나 착좌가(가로 다음 서열) 산마 씨 등은 시종일관 츠기노스케에게 협력했다. 선법 삼가(마키 씨, 노세 씨, 히키타 씨)는 개전 전에는 항복을 주장했지만, 일단 전쟁이 결정되자 번의 명령에 따랐다[13]。 이러한 상급 가신들의 움직임과 번주의 절대적인 신뢰 아래, 츠기노스케는 명실상부하게 개전의 모든 권한을 쥐게 되었다. 개전 당시 그의 직책은 가로 상석 겸 군사 총독이었다.

북월 전쟁에서 나가오카번 병사들은 근대적인 훈련을 받았고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츠기노스케의 뛰어난 용병술 덕분에 전쟁 초기에는 신정부군의 대군과 대등하게 싸웠다. 그러나 절대적인 병력 수에서 열세였던 나가오카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하여, 5월 19일(7월 8일)에는 결국 나가오카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가오카성 함락 직후, 번이 명령한 인부 동원을 철회하고 쌀을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는 대규모 세상 바로잡기 잇키(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5월 20일(7월 9일) 현재의 쓰바메시인 요시다 촌과 오타 촌에서 시작된 봉기는 마키 촌 등 영내 전역으로 퍼져나가 한때 7천 명 규모에 달했다. 나가오카번은 신정부군과 싸우던 부대 일부를 보내 6월 26일(8월 14일)까지 봉기를 모두 진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가오카번의 병력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부 동원도 어려워져 츠기노스케의 나가오카성 탈환 계획은 크게 지연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정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사실상 츠기노스케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신정부군의 무기보다는 영지 내 백성들의 봉기로 인한 국력 손실과 작전 기회의 상실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처형되어 나가오카 지역에서 츠기노스케에 대한 평가가 나빠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니가타현사' 통사편 6).

이후 6월 2일(7월 21일), 이마정 전투에서 승리하며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7월 24일(9월 10일) 저녁, 적의 허를 찌르는 핫초오키 도누마 기습 작전을 감행하여 다음 날(9월 11일) 나가오카성을 극적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야마 슈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 기습 작전 중 신마치구치에서 가와이 츠기노스케는 왼쪽 무릎에 유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나가오카 향토사'에서는 신마치구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 (牀, 평상)에 걸터앉아 있다가 신정부군 병사에게 저격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휘관인 츠기노스케가 부상을 당하자 나가오카번 병사들의 지휘 체계와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또한 육로로 진군하던 요네자와번 병력도 도중에 적에게 막혀 합류가 늦어졌다. 이로 인해 기습으로 혼란에 빠진 신정부군을 요네자와번과 함께 맹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려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성을 빼앗겨 잠시 후퇴했던 신정부군은 즉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나가오카번에는 더 이상 이 공격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결국 4일 뒤인 7월 29일(9월 15일) 나가오카성은 다시 함락되었다. 츠기노스케 등은 아이즈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보신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북월 전쟁은 신정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이후 전세는 아이즈 전쟁으로 옮겨갔다.

훗날 이시하라 간지는 육군대학교에서 츠기노스케의 전술을 연구하여 졸업 논문을 쓰기도 했다.

5. 3. 최후

에이료지 묘지에 있는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묘


나가오카성 전투 중 왼쪽 무릎에 유탄을 맞아 중상을 입은 츠기노스케는 더 이상 혼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즈로 피신하며 야소리 고개를 넘을 때, 그는 "'''야소리 고개는 무능한 무사가 넘는 고개'''"라는 자조적인 구절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고개를 넘어 아이즈 번 영내의 타다미 마을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츠기노스케는 타다미 번 의사의 의뢰로 아이즈 와카마츠에서 치료차 방문한 마츠모토 료준의 진찰을 받았다. 마츠모토가 가져온 쇠고기를 전부 먹어 보일 정도로 기력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때 이미 상처는 파상풍으로 악화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14]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츠기노스케는 하나와 등 측근들에게 앞으로는 요네자와번이 아닌 데와의 쇼나이 번과 행동을 함께할 것, 번주 세자 에이키치를 프랑스망명시킬 것(결국 실현되지 않음) 등 후일을 부탁했다. 또한 토야마 슈조에게는 무사로 삼으려 했으나, 곧 신분 제도가 없어질 시대가 올 것이므로 상인이 되라고 조언했다. 토야마는 훗날 이 말에 따라 상인이 되어 일본 경제 발전에 기여한 유력 실업가로 성장했다.

츠기노스케는 마츠모토의 권유에 따라 아이즈 와카마츠로 가기 위해 타다미 마을을 떠나 8월 12일 (9월 27일) 시오자와 마을(현 후쿠시마현 타다미정)에 도착했으나 상태는 계속 불안정했다. 8월 15일 (9월 30일) 밤, 그는 종복 마츠조를 불러 위로의 말을 전하며 자신의 화장 준비를 명령했다. 다음 날인 16일 (10월 1일) 정오쯤 담소를 나눈 후 잠이 들었다가 그대로 위독해져, 같은 날 오후 8시경 시오자와 마을 의사 야자와 소에키의 집에서 사망했다. 향년 41세였다. 츠기노스케가 숨을 거둔 야자와 가는 1961년 타다미강 전원 개발로 인한 건설로 수몰 지역에 포함되어, 현재는 후쿠시마현 타다미정의 카와이 츠기노스케 기념관 내로 이전되었다.

츠기노스케의 장례는 아이즈 성 아래 켄푸쿠지(建福寺)에서 치러졌다. 유골은 신정부군이 아이즈 성 아래를 점령했을 때 묘가 파헤쳐질 것을 우려한 마츠조에 의해 아이즈의 한 소나무 아래(현 아이즈와카마쓰시 켄푸쿠지 앞 오다야마 중턱)에 임시로 매장되었다. 실제로 신정부군은 켄푸쿠지에 세워진 츠기노스케의 가묘에서 유골을 찾으려 했으나, 내용물이 모래와 돌뿐이어서 츠기노스케가 아직 살아있다고 의심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현재 이 자리에는 "카와이 츠기노스케 일시 매장지"로서 묘비("고 나가오카 번 총독 카와이 츠기노스케 군 매골 유적" 비)가 남아 있으며, 린자이종 묘신지파 켄푸쿠지가 관리하고 있다. 또한, 타다미정 시오자와의 이오지(医王寺)에도 마을 사람들이 화장 후 남은 가는 뼈를 묻은 묘가 있다.

보신 전쟁 후, 마츠조는 유골을 수습하여 나가오카의 카와이 가문으로 보냈고, 유골은 현재 카와이 가문의 묘가 있는 에이료지에 다시 매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츠기노스케의 묘비는 그의 번정 개혁에 반발하거나 나가오카를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원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쓰러지는 수난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전쟁 책임자로서 츠기노스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그를 칭찬하는 평가와 함께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전쟁 주도자였던 츠기노스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카와이 가문은 사형 대신 가문 단절 처분을 받았다. 번주 마키노 타다야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모리 겐조(츠기노스케의 양녀 사위)에게 새로운 영지 100석을 주어 츠기노스케의 가족을 부양하도록 했다.

메이지 16년 (1883년) 카와이 가문은 재흥을 허락받아 모리 겐조의 아들 시게키를 양자로 맞이했다.

카와이 츠기노스케 기념관은 타다미에서는 댐 수몰에 따른 이전과 함께 1973년에 개관했지만, 나가오카에서는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6년에야 개관했다. 나가오카 기념관 관장을 맡은 향토사학자 이나가와 아키오는, 츠기노스케를 비판적으로 보던 자신을 관장으로 임명한 데에는 츠기노스케에 대한 비판적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려는 당시 시장의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2]

6. 평가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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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츠기노스케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청람색의 날카로운 눈을 가졌고 목소리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저한 실리주의자로, 무사의 필수 덕목인 검술조차 실전에서의 유용성을 중시하여 형식이나 유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서에 있어서는 달라서, 마음에 드는 책은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며 베껴 쓸 정도였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뛰어나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를 일찍부터 예견했으며, 번의 명령을 어겨 여러 차례 질책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카와이 가문은 본래 가로(家老)가 될 수 없는 신분이었으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번의 중신들의 평범함을 지적하며 자신이 가로가 될 수밖에 없다고 공언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카리야 무인은 코가 서당 시절 츠기노스케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츠기노스케의 허벅지에 큰 종기가 생겨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힘든 내색 없이 학업에 정진했다. 쉬면서 치료하라는 권유에 츠기노스케는 "인생에는 괴로운 일도 기쁜 일도 있는 법이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충효나 국가 경영 같은 큰일을 이룰 수 없다. 괴로움을 견디는 힘은 평소에 단련해야 하는 것이지, 막상 닥쳤을 때만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기는 내 의지의 강약을 시험할 좋은 기회이며, 학문을 통해 힘을 얻었는지 시험하는 계기다"라고 답했다고 한다.[16]

실리적인 면모와 별개로 호탕한 성격도 지녔다. 유곽 금지령을 시행했을 때, 과거 유곽의 단골이었던 그를 두고 사람들이 "카와이(可愛い, 귀엽다)하다고 오늘 아침까지 생각했는데, 이제는 애정도 다 식었네(츠기노스케, 次之助와 발음이 비슷한 突き放す - 츠키하나스, 매정하게 뿌리치다)"라는 내용의 교카(狂歌, 풍자시)를 지어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진총(塵蹤)』이라는 제목의 여행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북월 전쟁 중에는 그의 강경한 태도가 드러나는 일화도 있다. 나가오카 성 함락(게이오 4년 5월 19일) 후 열린 첫 오우에츠 열번 동맹 군사 회의(5월 22일, 23일)에서, 츠기노스케는 나가오카 성 함락 당시 무라마츠 번의 소극적인 태도를 이틀에 걸쳐 집요하게 질책했다. 이에 격분한 무라마츠 번 대표 타나카 카게요가 회의장에서 자결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다행히 목숨은 건졌다).[17] 이 자리에 있던 요네자와 번의 아마카스 츠구나리는 당시 카와이의 태도에 대해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말이 매우 격렬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18]

메이지 유신 이후 나가오카 부흥에 힘쓴 쌀 백 섬 고사로 유명한 코바야시 토라사부로는 츠기노스케의 친척이다. 코바야시의 온건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츠기노스케가 호전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는 편지에서 삿초(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강압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이렇게 된 이상 개전도 어쩔 수 없다"고 마지못해 개전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그가 반드시 호전적이지만은 않았으며, 북월 전쟁 개전 역시 번의 자립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성격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츠기노스케에 대해서는 나가오카 시민들 사이에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북월 전쟁에서 양손과 다리를 잃었지만 용감히 싸웠다", "전쟁 중 번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자신의 식량을 모두 나눠주었다" 등 긍정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다다미를 짊어지게 해 총알받이로 삼았다"는 비판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들은 사료로 검증되지 않아 후대에 지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츠기노스케에 대한 당대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인물평가
야마다 호코쿠"나가오카 번에서는 카와이를 제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무 호쾌하다. 북쪽 지방 관리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16]
가쓰 가이슈"꽤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카와이 같은 인물은 드물다."[21]
사이고 다카모리"얻기 어려운 인물이다. 불행히 시대를 잘못 만나 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쓰러졌지만, 만약 오늘날까지 살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었을 것이다. 실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이다."[21]
카와이 야스코 (여동생)"오빠는 속요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나가오카 진구의 봉오도리(盆踊り)를 즐겼다."[21] "불을 이상할 정도로 무서워했다. 불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남에게서 난 불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에게서 난 불은 돌이킬 수 없다고 늘 자신과 가족에게 경고했다."[21]
쓰치다 고헤이"이상한 말을 하는 녀석이지만,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카와이만큼 훌륭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 그의 바둑과 장기 두는 모습을 보고 인물됨을 알았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결국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이 유쾌했다."[16]
카리야 무인"글씨는 서툴렀지만 기개가 있었다. 학원에서는 카와이는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새긴다고 평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읽은 것은 반드시 베껴 썼다. 주로 송나라, 명나라 시대의 어록과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주자학 서적을 읽었으며, 역사나 시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학원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16]
오노 우츄"엄격한 인상과 성품을 지녔지만, 변설이 상쾌하고 기백이 넘쳤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호걸의 풍모를 보였으며, 진실로 호걸이었다."[16]
키가와 마쓰조"남편께서는 평소에 엄격한 분이십니다."[21]
토야마 슈조"오늘날 메이지 원훈이라 불리는 원로들을 여럿 만났지만, 카와이 씨처럼 예리하고 위엄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21]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가차 없이 시비를 가렸기에 모두 그의 엄격함에 힘들어했지만, 훌륭한 선행에 대해서는 훌륭하다, 정말 잘했다고 격찬하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기에, 그의 엄한 꾸짖음에 분개했던 사람조차 감격하여 목숨을 바칠 정도로 마음으로 복종하게 만들었다. 낮은 녹봉에서 시작하여 번의 정치를 책임지게 되었고, 7만 4천 석의 작은 번으로 수만의 서군에 맞서 반년이나 버틴 것만 봐도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21]
사카가와 간베에"카와이 군과 이야기할 때는 숨 돌릴 틈이 없다. 그처럼 빨리 이치를 파악하고 이야기에 파고드는 사람은 드물다. 실로 근대의 호걸이다."[21]
혼마 무쓰코"눈동자가 둥글고 날카로웠고, 키도 그다지 크지 않아서, 중육 중신이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눈동자만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21]
야스다 마사히데"성격이 강직하고 진취적이며 재략이 뛰어나다. 자신감이 매우 강하고 호기로우며 언변이 명확하다. 인물평을 좋아하며 과단성이 있다. 세간의 평판이나 이해득실에 개의치 않고 목표를 향해 맹렬히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실로 북월(北越) 지역에 다시 없을 뛰어난 인물이다. 아깝게도 자신을 너무 믿고 완고하며 포용력이 부족했고, 명예와 이익에 대한 욕심이 많아 결국 그 희생양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1]
오하시 이치조"무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한 천고의 한이다. 만약 그가 오늘날 조정에 있었다면, 지금의 내각 대신들 중 누가 그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는가."[21]
후쿠시마 스미카즈"카와이 씨는 프랑스 사정을 연구했으며, 특히 병기에 대해 매우 열심히 조사했다."[21]
오하시 사헤이"성격이 호탕하고 활달하며 일찍부터 준마와 같은 기상이 있었다. 체격은 보통이었고 피부는 검었으며, 눈썹은 빼어나고 눈빛은 사람을 쏘아보는 듯 빛났다. 한번 호통치면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목소리가 맑고 변설에 능했으며, 질타하며 변론할 때는 논리가 샘솟고 위엄이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우리 에치고에서는 우에스기 겐신 이후의 인물이라 할 만하다."[21]
센자카 다카마사(북월 전쟁 부상 당시)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오른발에 포탄이 맞아 무릎 아래가 힘줄만 남고 다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도 엄청난 기백으로 농담하며 쉬고 있다고 했다. ... 그 당시 의술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절단이라도 했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 ... 생각지도 못하게 눈물이 넘쳤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목소리를 높여 위로했다."[22]



종합적으로 볼 때, 카와이 츠기노스케는 뛰어난 통찰력과 실리적인 사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개혁가이자 지도자였다. 그의 군사적 식견과 용병술은 당대 인물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강경한 성격과 행동은 때로 갈등을 유발했으며(무라마츠 번 대표 자결 시도 사건), 북월 전쟁을 이끌면서 나가오카 번과 그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점은 비판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야스다 마사히데의 평가 참고). 비록 그의 무장 중립을 통한 번의 자립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개혁 정신과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7. 카와이 츠기노스케를 다룬 작품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극적인 삶과 보신 전쟁에서의 역할은 후대의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다양한 서적,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이 제작되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특히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개』는 카와이 츠기노스케를 널리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여러 매체를 통해 각색되었다.

7. 1. 서적

이마이즈미 도쿠지로가 저술한 『카와이 쓰기노스케 전』(河井継之助伝일본어)은 카와이 쓰기노스케에 관해 편찬된 유일한 간행 전기 자료이다. 초판은 메이지 43년(1910년) 하쿠분칸에서 나왔고, 쇼와 6년(1931년) 메구로 서점에서 증보 개정판이, 쇼와 55년(1980년)과 헤이세이 8년(1996년)에는 조잔사에서 증보판의 재판이 간행되었다. 현재 출간된 카와이 쓰기노스케 관련 서적들은 대부분 이 책을 바탕으로 쓰였다.

저자인 이마이즈미 도쿠지로는 마키노 가문의 가신 후손이자 신문 기자, 향토 사학자로 활동하며 각지에서 수집한 사료와 관계자 인터뷰를 토대로 이 책을 구성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카와이 쓰기노스케가 남긴 편지 등의 사료나 다른 인물들의 관련 사료 인용이고, 다른 하나는 카와이 쓰기노스케의 가족, 관계자, 또는 그 자녀들의 증언이다. 사료학적으로 볼 때, 『카와이 쓰기노스케 전』은 2차 사료 또는 2급 사료로 분류된다.

책에 인용된 사료 중에는 『추고 석지』(追考昔誌일본어), 『추억초』(追憶草일본어)처럼 원본이나 사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의 수기", "미마 마사히로 자서전"처럼 출처나 원본이 불분명한 자료도 존재한다. 후자의 경우, 저자가 편의상 붙인 제목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보신 전쟁 전후에 대해 기록된 현존 인용 사료들은 대부분 후대에 남겨진 메모, 당시 사료, 기억에 의존해 편찬된 것이거나 회상록 형태이다. 따라서 『카와이 쓰기노스케 전』의 인용 사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료를 통해 교차 검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코모로 소동(小諸騒動일본어)에 관한 서술은, 유신 혼란기에 잠시 코모로 번 상석 가로를 지낸 마키노 하야노스케 나리키요(牧野隼之助成聖일본어)의 아들 세이코(精子일본어)로부터 들은 내용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마키노 하야노스케와 사이가 좋지 않았거나 반대파였던 본가 마키노 하치로자에몬 나리미치(牧野八郎左衛門成美일본어), 마키 요닌 노리미치(真木要人則道일본어), 오오타 우츄타 이치도(太田宇忠太一道일본어), 전 번주 부인 쿠스노키(楠일본어) 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지적도 있다(카토 세이이치 저 『마키노 가신단』 등). 또한 코모로 번 중신의 지행(知行일본어)이나 가록(家禄일본어) 인용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코모로 소동 자체는 학술적으로 일부 다루어졌지만, 이 소동에서 카와이 쓰기노스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코모로 번 측 문서나 사료에서 구체적인 활동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관계자들의 증언 역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증언이므로 증언자의 주관적 판단, 감정, 기억 오류 등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사료학적 관점에서 증언을 다룰 때도 신중함이 요구된다. 본문에 인용된 카와이 쓰기노스케의 편지 역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카와이 쓰기노스케나 막말 나가오카 번에 관한 1차 사료(특히 번정 관련 사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카와이 쓰기노스케 전』은 그의 인물상이나 당시 나가오카 번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아래는 카와이 쓰기노스케를 다룬 주요 저서 목록이다. 막말 시기 나가오카 번 관련 저서나 비즈니스 잡지 기사 등은 제외했으며, 동일 저자가 여러 권의 관련 저서를 쓴 경우 대표적인 한 권만 포함했다.

저자서명출판사출판 연도
토가와 잔카『소년독본 제3편 카와이 쓰기노스케』하쿠분칸1899년
이노우에 이치지『호쿠에츠 보신 전쟁과 카와이 쓰기노스케』이데아 서원1928년
카무라 미노루『카와이 쓰기노스케』 (인물 연구 총간 제17)킨케이 학원1933년
호시야마 미츠구『카와이 쓰기노스케』 (위인 총서)산쿄 서원1942년
야스오카 마사히로『영웅과 학문 카와이 쓰기노스케와 그 학풍』 (사우선서 제12)메이토쿠 출판사1957년
시바 료타로『고개』신초샤1968년
안도 히데오 (편)『카와이 쓰기노스케의 모든 것』신진물왕래사1981년
미도리카와 겐조『카와이 쓰기노스케 여문』노지마 출판1984년
안도 히데오 (저), 요코무라 카츠히로 (사진)『카와이 쓰기노스케 사진집』신진물왕래사1986년
나카지마 킨야『애증 카와이 쓰기노스케』코분샤1986년
안도 히데오『카와이 쓰기노스케의 생애』신진물왕래사1987년
이케나미 쇼타로『무사(남자)의 문장』신진물왕래사1990년
이시하라 카즈마사『양지의 사람 카와이 쓰기노스케 의에 살고 의에 죽으리』일본경제평론사1993년
아라이 키미오『일본을 만든 선각자들 ― 이이 나오스케, 오구리 타다스미, 카와이 쓰기노스케』종합법령1994년
도몬 후유지『소설 카와이 쓰기노스케 무장 중립의 꿈은 영원히』도요게이자이 신보사1994년
가쿠 마야『호쿠에츠의 용 카와이 쓰기노스케』카도카와 쇼텐1995년
(편집부)『카와이 쓰기노스케 사쵸에 도전한 남자』 (『역사독본』 제40권 제7호, 시리즈 인물 검증 7)신진물왕래사1995년
칸 소이치로『호쿠에츠 창룡전 ― 카와이 쓰기노스케의 생애』일본도서 간행회1997년
타케다 토키오『소설 막말 수송대 시말 ― 비분강개한 영장 카와이 쓰기노스케』신풍사1997년
호시 료이치『카와이 쓰기노스케』세이미 문고1997년
토가와 준『역사 현장에서 알 수 있는 카와이 쓰기노스케의 진실』도요게이자이 신보사1998년
이나가와 아키오『카와이 쓰기노스케 입신은 효의 끝이라고 아뢰옵니다』코분샤1999년
시바 고『카와이 쓰기노스케 신념을 관철한 막말의 준걸』PHP 문고・PHP 연구소1999년
안도 테츠야『카와이 쓰기노스케 관리로 산 남자』니가타 닛포 사업사2000년
오오타 오사무『카와이 쓰기노스케와 메이지 유신』니가타 닛포 사업사2003년
하야사카 시게조『원념의 계보 카와이 쓰기노스케,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리고 다나카 카쿠에이』슈에이샤2003년
야마자키 무네야『용호 회담 보신, 나가오카 전쟁의 반성을 말하다』2004년
이노우에 다이스케 (작화)『그때 역사가 움직였다 코믹판 지사들의 막말편』 중 「호쿠에츠의 창룡“메이지”에 굴하지 않고 - 카와이 쓰기노스케 지방 자립을 위한 투쟁」홈사2009년


7. 2. 드라마

과거 카와이 츠기노스케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

  • 화신
  • 1977년 1월 2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방송된 NHK 대하드라마. 시바 료타로의 소설 『화신』, 『세상에 사는 나날』, 『열한 번째 지사』, 『고개』, 『다테의 흑선』 다섯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오무라 마스지로이지만, 츠기노스케는 준 주역급으로 등장하며 후반부 이야기에 비중 있게 나온다. 츠기노스케를 연기한 배우 다카하시 히데키의 인기에 힘입어 '카와이 츠기노스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마지막 사무라이 카와이 츠기노스케
  • 1999년 12월 30일에 방송된 TV 아사히 제작 2시간 연말 스페셜 드라마. '시마다 신스케의 2000년에 갈! 스페셜 막말을 질주한 경이로운 오레류 샐러리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역사 위인을 소재로 한 교양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배우 아베 히로시가 츠기노스케 역을 맡았다.
  • 카와이 츠기노스케 ~달려나간 창룡~
  • 2005년 12월 27일에 방송된 쇼치쿠와 니혼 TV가 공동 제작한 2시간 30분 분량의 연말 대형 시대극이다. 원작 정보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소설 『고개』의 내용을 따른다.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츠기노스케 역을 연기했으며, 이는 그의 18대 칸자부로 습명 기념 작품이기도 하다.
  • 철과 보리와 붉은 벽돌 ~카와이 츠기노스케와 토야마 슈조 뜻의 릴레이~
  • 2010년 9월 13일에 방송된 UX(니가타 TV21) 제작 스페셜 프로그램. 카와이 츠기노스케의 뜻을 이은 제자 토야마 슈조가 간사이 재계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을 그린 역사 다큐멘터리이다. 재현 드라마 촬영은 츠기노스케가 최후를 맞이한 땅인 후쿠시마현 타다미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카와이 츠기노스케 기념관에 보존된 '카와이 츠기노스케 종언의 방'이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다. 츠기노스케 역은 일반 공모를 통해 선발된 미야무라 타츠야(니가타시 거주)가 연기했다.
  • 나가오카 성을 탈환하라
  • 2015년 2월 28일에 방송된 UX(니가타 TV21) 제작 스페셜 프로그램. 호쿠에츠 전쟁 초기 신정부군의 기습으로 나가오카 성이 함락된 후, 나가오카 번이 카모에 집결한 아이즈, 요네자와 등 오우에쓰 열번 동맹 여러 번의 힘을 모아 성을 탈환하는 과정을 다룬다. 카모에서 열린 작전 회의('카모 군의')에서 츠기노스케가 아이즈, 요네자와 같은 대번들을 제어하고 소번인 나가오카 번이 주도권을 잡는 등 기상천외한 역할을 한 것이 츠기노스케이다. 호쿠에츠 전쟁의 발단이 된 '오치야 담판', '카모 군의', 패주하는 나가오카 번사와 가족들이 넘었던 '야소리 고개'의 세 국면을 중심으로 드라마 재현과 함께, 하야시 오사무와 카와이 츠기노스케 기념관(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소재) 관장 이나가와 아키오의 토크를 통해 각 장면의 의미와 호쿠에츠 전쟁의 실체를 조명한다.

7. 3. 영화

7. 4. 애니메이션


  • 막말기관설 이로하니호헤토: 2006년 10월 6일부터 2007년 4월 6일까지 인터넷 동영상 배포 사이트 GyaO에서 공개된 총 26화의 일본 웹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에서 카와이 츠기노스케는 나가오카 번의 가로로 등장하며, 성우는 오오니시 켄세이가 맡았다. 작중에서는 번을 지키기 위해 "암흑 경매"에서 개틀링포를 낙찰받고, 호쿠에쓰 전쟁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참조

[1] 웹사이트 つぎのすけかつぐのすけか http://tsuginosuke.n[...] 2018-11-10
[2] 뉴스 【みちものがたり】八十里越(新潟、福島県)30年かけて未完成の国道/開戦責任者か、最後の侍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9-11-09
[3] 서적 河井継之助の生涯
[4] 웹사이트 展示品紹介 http://tsuginosuke.n[...] 2018-09-03
[5] 웹사이트 河井継之助 http://www.yae-motto[...] 2018-09-03
[6] 뉴스 河井継之助 北越戦争で長岡城奪還 信念貫く武士道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4-30
[7] 서적 長岡歴史事典
[8] 문서 鈴木総之丞日記
[9] 서적 歴史への招待14
[10] 문서
[11] 웹사이트 反薩長の英雄「河井継之助」を知っていますか https://toyokeizai.n[...] 2017-10-17
[12] 웹사이트 新潟県立図書館「越後佐渡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越後国上杉景勝家督争合戦』 http://www.pref-lib.[...]
[13] 문서
[14] 문서
[15] 웹사이트 ながおかネット・ミュージアム 河井継之助書 http://www.e-net.cit[...]
[16] 서적 河井継之助 金雞学院 1933
[17] 서적 越後村松藩の戊辰戦争 2019-01
[18] 문서
[19] 웹사이트 ながおかネット・ミュージアム 塵壺のはなし http://www.e-net.cit[...]
[20] 웹사이트 『塵壷』河井継之助手記、和同会雑誌部校訂、昭和13年発行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21] 서적 河井継之助傳 目黒書店 1931
[22] 서적 史談会速記録 合本19 原書房 1971-1976
[23] 뉴스 役所広司主演映画『峠 最後のサムライ』公開日が6月17日に決定 新ポスタービジュアルも https://realsound.jp[...] blueprint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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