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아우아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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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아우아나코는 현재 볼리비아에 위치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기원전 200~3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1세기 초부터 도시로 성장하여 375년에서 700년경에 안데스 산맥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4제곱킬로미터 면적에 1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 무역과 농축산업 경제를 기반으로 번성했으나, 서기 1000년경에 붕괴되었다.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기후 변화, 사회 내부의 불안정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티아우아나코는 아카파나, 칼라사사야, 푸마 푼쿠 등 독특한 건축물을 남겼으며, 주변 와리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티아우아나코 사회는 관료제 국가였는지, 복잡한 지연·혈연 조직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농업 기술인 스카 코류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고고학적 발굴과 현대적인 개발 문제에도 연관되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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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우아나코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티와나쿠 |
다른 이름 | 티아우아나코 티아우아쿠 |
![]() | |
위치 | 티와나쿠 지방 자치체, 볼리비아 |
유형 | 정착지 |
부분 | 해당 없음 |
길이 | 해당 없음 |
너비 | 해당 없음 |
면적 | 해당 없음 |
높이 | 해당 없음 |
건설 | 기원후 110년경? |
버려짐 | 해당 없음 |
시대 | 해당 없음 |
문화 | 티와나쿠 제국 |
의존 | 해당 없음 |
거주자 | 해당 없음 |
사건 | 해당 없음 |
발굴 | 해당 없음 |
고고학자 | 해당 없음 |
상태 | 폐허 |
소유권 | 해당 없음 |
관리 | 해당 없음 |
공개 접근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비고 | 해당 없음 |
등재 유형 | 문화 |
지역 | 남아메리카 |
유네스코 지정 명칭 | 티와나쿠: 티와나쿠 문화의 정신적, 정치적 중심지 |
유네스코 지정 번호 | 567 |
유네스코 지정 기준 | iii, iv |
유네스코 등재 연도 | 2000년 |
언어 정보 | |
에스파냐어 표기 | Tiahuanaco Tiahuanacu |
2. 유적의 역사
티아우아나코 유적은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종교적 순례지로 여겨졌다. 해발 4000m의 혹독한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식용 재배 식물이 자라기 어려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생산과 국가 수준의 복잡한 사회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오랫동안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조사 결과, 유적 주변에 상당한 주거지가 존재했으며, 당시 도시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식량 생산이 생각만큼 빈곤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2006년 4월 현재, 발굴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는 세계유산 등록 명칭인 티와나쿠(Tiwanak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지에서는 티아우아나코(Tiahuanaco), 티아우아나쿠(Tiahuanacu), 티와나쿠(Tihuanacu)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현지 아이마라어에는 모음이 a, i, u 3개밖에 없으므로 본래의 음은 티와나쿠(Tiwanaku) 또는 티아우나쿠(Tiahunacu)에 가깝다. 이 명칭의 기원은 잉카가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전령에게 "여기 앉아라, 과나코야"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원래 이 지역은 타피 칼라(Taypi Kala, 세계의 중심, 직역하면 돌의 중심) 등으로 불렸다.
과거 일본에서는 "티아와나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티와나크" 표기로 통일되었으며, 이 위키 페이지에서는 세계유산 등록명칭과 현지 촌사무소의 공식 명칭(Municipio de Tiwanaku) 등을 고려하여 "티와나쿠"를 사용한다.
2. 1. 연대 측정 및 유적의 발전
티아우아나코 유적의 연대는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아르투르 포스난스키는 지질 시대 및 고천문학과의 비교를 통해 유적이 11,000~17,000년 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8][9] 1970년대에 카를로스 폰세 상기네스는 가장 오래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유적이 기원전 1580년경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제안했다.[10] 이 연대는 볼리비아의 일부 출판물과 박물관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연구자들은 이 연대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적이 기원전 200~300년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11][12][13] 최근에는 신뢰할 수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에 대한 통계적 평가와 이전 시대의 도자기 양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유적이 서기 110년경(68% 확률로 50~170년)에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14][15]티아우아나코는 서기 1세기 초부터 꾸준히 성장하여, 서기 375년에서 700년경에는 안데스 산맥의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약 4km2의 면적에 1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졌으며, 복잡한 농축산업 경제와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16]
유적은 서기 1000년경에 붕괴된 것으로 보이며, 그 원인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피츠버그 대학교의 엘리엇 아놀드는 붕괴 시기에 이 지역의 건조함이 심해졌다는 증거를 발견했으며, 이는 지역 농업 시스템에 영향을 미쳐 티아우아나코의 붕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은 종교적 순례지였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해발고도 4000m의 혹독한 환경에서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생산이 불가능하고, 국가 수준의 복잡한 사회가 성립할 수 없다고 오랫동안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조사 결과, 유적 주변에 상당한 주거지가 존재했으며, 당시 도시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식량 생산이 생각만큼 빈곤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2006년 4월 현재, 발굴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티와나쿠 유적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티와나쿠 1기부터 5기까지 나뉜다.[51] 유구, 토기,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등을 사용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현재는 다음과 같이 7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52]
기원 | 시대 |
---|---|
기원전 800-200년 | 형성기 중기 또는 치리파 후기 |
기원전 200년-기원후 300년 | 형성기 후기 1 (전반: 티와나쿠 1기 또는 형성기 1A, 후반: 티와나쿠 2기 또는 형성기 1B) |
300-500년 | 형성기 후기 2 또는 티와나쿠 3기 |
500-600년 | 티와나쿠 4기 전반 |
600-800년 | 티와나쿠 4기 후반 |
800-1000년 | 티와나쿠 5기 전반 |
1000-1150년 전후 | 티와나쿠 5기 후반 |
최성기는 티아우아나코 4기에서 5기 전반이다.
티아우아나코 사회는 안데스의 스페인 정복 이전 사회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문화 중 하나였으며, 현재의 페루령 아야쿠초 시를 중심으로 티아우아나코와 동시대에 번성했던 와리 문화와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티아우아나코와 와리는 "정면을 향한 신"이나 "조인"이라고 불리는 모티프의 도상이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도상의 모티프는 푸카라라는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경에 티티카카호 북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2. 2. 와리 문화와의 관계
와리 문화와 티와나쿠 문명은 "남부 안데스 도상 시리즈"라고 불리는 동일한 도상학을 공유했다.[49] 두 문명 간의 관계는 무역 또는 군사적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50]동시대에 현재 페루 공화국에 와리라고 불리는 정치 조직이 존재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과거에는 이 와리가 티아우아나코이드 또는 해안 티아우아나코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티와나쿠와는 다른 정치 조직 및 문화였다고 여겨진다. 그 경계는 대략 모케과 현 부근이었다고 한다. 모케과에는 와리의 지방 유적인 세로 바울과 티와나쿠의 월경지인 오모 유적군이 있다. 이들은 각각 입지 조건이 달라서, 세로 바울은 산 정상에, 오모 유적군은 Río Osmore|오스모레 강|en|Osmore Riveres 근처의 계곡 바닥 주변에 위치한다. 양자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와리와 티아우아나쿠가 공존하는 시대를 안데스 고고학의 편년에서 중기 호라이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3. 쇠퇴
동시대에 현재 페루 공화국에 와리라고 불리는 정치 조직이 존재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과거에는 이 와리가 티아우아나코이드 또는 해안 티아우아나코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티와나쿠와는 다른 정치 조직 및 문화였다고 여겨진다. 그 경계는 대략 모케과 현 부근이었다고 한다. 모케과에는 와리의 지방 유적인 세로 바울과 티와나쿠의 월경지인 오모 유적군이 있다. 이들은 각각 입지 조건이 달라서, 세로 바울은 산 정상에, 오모 유적군은 Río Osmore|오즈모레 강es 근처의 계곡 바닥 주변에 위치한다. 양자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이 와리와 티아우아나쿠가 공존하는 시대를 안데스 고고학의 편년에서 중기 호라이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이 논쟁은 티와나쿠 사회 붕괴라는 문제로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앨런 콜라타는 기후 변화에 따른 건조화로 스카 코류의 생산성이 떨어졌고, 그것이 티와나쿠 사회 붕괴의 방아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68]。이에 대해 클라크 에릭슨은 새로운 환경 결정론으로 반론하고 있다[69]。
콜라타 등의 조사에 참여했던 볼리비아 고고학자 알라바라신 호르단은 티와나쿠 사회가 붕괴된 후에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고랑 밭이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기후 변화에 의한 티와나쿠 붕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콜라타의 제자였던 폴 골드스타인(Paul Goldstein)도, 자신이 조사한 페루의 오모 유적군 및 Río Osmore|오즈모레 강es 주변의 엘니뇨 관련 조사로부터 기후 변화에 따른 건조화가 티와나쿠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에릭슨이 말하는 사회 내부의 불안정이 원인이라는 설에 찬성한다고 말하고 있다[70]。또한, 골드스타인은 콜라타가 말하는 건조화에 의한 농경 시스템의 붕괴가 모케과 계곡에서는 보이지 않았다고도 말하고 있다. 사실, 서기 1300년경에 일어난 대규모 엘니뇨에 의한 홍수는, 모케과 강에 있는 티와나쿠 관련 유적의 포기 시기 이후에 일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에도 티와나쿠 사회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3. 주요 건축물
티아우아나코 유적은 아카파나, 칼라사사야, 푸마푼쿠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건축물은 정교한 석재 가공 기술과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주요 건축물 목록
이름 | 설명 |
---|---|
아카파나 |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자세한 내용은 아카파나 참고) |
칼라사사야 | 직사각형 형태의 유적 중심 부분. 안에 "태양의 문"과 몇몇 석상이 있으며, 무리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칼라사사야 참고) |
반 지하식 사각형 광장 | 벽에서 얼굴이 튀어나와 늘어선 장식이 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석상이 있다. |
푸투니 | 칼라사사야 앞에 있는 반 지하식 광장을 가진 주거지 |
칸타타리타 | 아카파나 피라미드 뒤에 있는 반 지하식 광장을 가진 건축물 |
케리 칼라 | |
달의 문 | ![]() |
푸마푼쿠 |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유적 중심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 (자세한 내용은 푸마푼쿠 참고) |
유적지의 많은 구조물에는 인상적인 문이 있는데, 기념비적인 규모의 문은 인공 언덕, 플랫폼 또는 움푹 들어간 뜰에 설치되어 있다. 한 문에는 지팡이 신 자세의 정면을 향한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남부 안데스 도상학 시리즈라고 불리는 태양의 문 도상학은 여러 석조 조각, 키루, 코담배 통 및 기타 티아우아나코 유물에서 볼 수 있다.[23]
태양의 문 상단에 있는 독특한 조각은 동물과 다른 존재를 묘사한다. 태양의 문과 푸마푼쿠에 있는 다른 문들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건축 예는 독특한 세부 사항을 가지고 있으며 석재 절단에 높은 기술을 보여준다. 이는 기술 도면에 대한 지식을 드러낸다.
현재 유적의 상당수는 1970년대에 무리하게 복원된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유적 중심부의 면적은 4.2km2이며, 과거 인구는 10,500~50,000명[55]으로 추정된다. 최근 연구에서는 면적이 6km2[56]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여 건물 집중 구역과 그 외부를 구분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적은 진북(真北)을 이용한 동서남북에 거의 일치하지만, 약간의 오차가 있다. 아카파나 피라미드와 칼라사사야는 평행하게 세워져 있지 않다. 유적의 석재는 근처 티와나쿠 산맥에서 채석한 사암을 주로 사용하며, 코파카바나 방면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안산암 등도 사용하고 있다. 차차푸마라고 불리는 퓨마 조각상 등 중요한 석상에는 오루로 방면에서 가져온 흑색 현무암이 사용되었다.
3. 1. 아카파나 (Akapana)
아카파나는 너비 257m, 최대 너비 197m, 높이 16.5m의 "반 안데스 십자" 모양 구조물이다. 중앙에는 움푹 들어간 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구조물 중앙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깊은 약탈자의 발굴로 인해 거의 파괴되었다. 약탈자들이 발굴한 자재는 아카파나 동쪽에 버려졌다. 서쪽에는 계단이 있다. 이 구조물의 북동쪽과 남동쪽 모퉁이에는 주거 단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아카파나는 개조된 언덕에서 개발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21세기 연구에 따르면, 아카파나는 크고 작은 돌 블록을 혼합하여 마감한, 완전히 인공적인 흙 언덕임이 밝혀졌다. 아카파나를 구성하는 흙은 유적지를 둘러싼 "해자"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인다.[17] 아카파나에서 가장 큰 안산암으로 만들어진 돌 블록은 무게가 65.7톤으로 추정된다.[18] 퓨마와 인간 머리 모양을 한 텐온 석재 블록이 상부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다.[17]
아카파나 이스트는 초기 티아우아나코 동쪽에 세워졌다. 이후에는 의식 중심지와 도시 지역의 경계로 여겨졌다. 두껍고 잘 정돈된 모래와 점토 바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건물 그룹이 지어졌다. 미적인 목적으로 보이는 다른 지역에는 황토와 적토가 사용되었다. 모든 생활 쓰레기를 깨끗하게 치워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17]
3. 2. 칼라사사야 (Kalasasaya)
칼라사사야는 약 91.44m 높이의 큰 안뜰로, 높은 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카파나 북쪽과 반 지하 사원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안뜰 안에서 탐험가들은 태양의 문을 발견했다. 20세기 후반부터 연구자들은 이것이 태양의 문의 원래 위치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0]안뜰 근처에는 반 지하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북남 축이 아닌 동서 축을 가진 정사각형의 움푹 들어간 안뜰이다.[20] 벽은 다양한 스타일의 텐온 머리로 덮여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구조물이 다른 목적으로 재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21] 반 지하 사원의 벽은 사암 기둥과 소형 애쉴러 조적 블록으로 만들어졌다.[21][22] 칼라사야에서 가장 큰 석재 블록은 26.95ton으로 추정된다.[18]
3. 3. 푸마푼쿠 (Puma Punku)
푸마푼쿠는 티아우아나코 유적의 일부로, 거석 블록으로 마감된 T자형 계단식 흙 플랫폼 언덕이다. 북남 축을 따라 167.36m, 동서 축을 따라 116.7m 너비이며 높이는 5m이다. 북동쪽과 남동쪽 모서리에는 각각 20미터 폭의 돌출부가 북쪽과 남쪽으로 27.6미터 뻗어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안마당과 벽이 없는 안마당, 에스플러네이드가 이 구조물과 관련되어 있다.[18]푸마푼쿠의 두드러진 특징은 "''플라타포르마 리티카''"라고 불리는 큰 석재 테라스이다. 이 테라스는 6.75 x 38.72미터 크기이며 큰 석재 블록으로 포장되어 있고, 티아우아나코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장 큰 석재 블록(무게 131 미터톤 추정)을 포함하고 있다.[18][19] 푸마푼쿠에서 발견된 두 번째로 큰 석재 블록은 85 미터톤으로 추정된다.[18][19]
푸마푼쿠 유적지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절석이 흩어져 있다. 석재 작업의 복잡성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고대 외계인의 개입이 있었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태양의 문과 푸마푼쿠에 있는 다른 문들은 완성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클램프용 소켓이 있는 챔브란으로 알려진 일반적인 움푹 들어간 프레임의 일부가 빠져 있어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건축 예는 독특한 세부 사항을 가지고 있으며 석재 절단에 높은 기술을 보여준다. 이는 기술 도면에 대한 지식을 드러낸다. 요소의 규칙성은 비례 시스템의 일부임을 시사한다.[24]
3. 4. 기타 건축물
티아우아나코에서 연구자들이 발굴한 구조물에는 테라스형 플랫폼 마운드 아카파나, 아카파나 동쪽, 푸마푼쿠 계단형 플랫폼, 칼라사야, 칸타탈리타, 케리 칼라, 푸투니 인클로저, 반 지하 사원이 있다.아카파나는 너비 257m, 최대 너비 197m, 높이 16.5m의 "반 안데스 십자" 모양의 구조물이다. 중앙에는 움푹 들어간 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약탈로 인해 거의 파괴되었다. 원래 아카파나는 개조된 언덕에서 개발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21세기 연구에 따르면 완전히 인공적인 흙 언덕임이 밝혀졌다.[17] 아카파나 내에서 가장 큰 안산암으로 만들어진 돌 블록은 무게가 65.7ton으로 추정된다.[18]
아카파나 이스트는 초기 티아우아나코의 동쪽에 세워졌으며, 나중에는 의식 중심지와 도시 지역의 경계로 여겨졌다.
푸마푼쿠는 아카파나와 같이 동서 축을 따라 건설된 인공 플랫폼이다. 거석 블록으로 마감된 T자형, 계단식 흙 플랫폼 언덕이다. 북남 축을 따라 167.36m, 동서 축을 따라 116.7m 너비이며 높이는 5m이다. 푸마푼쿠의 두드러진 특징은 큰 석재 테라스인데, 크기는 6.75 x 38.72미터이며 큰 석재 블록으로 포장되어 있다. "''플라타포르마 리티카''"라고 불리며 티아우아나코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장 큰 석재 블록을 포함하고 있다.[18][19] 폰세 산기네스에 따르면, 이 블록의 무게는 131ton으로 추정된다.[18] 푸마푼쿠에서 발견된 두 번째로 큰 석재 블록은 85ton으로 추정된다.[18][19]
칼라사야는 높이 300피트가 넘는 큰 안뜰로 높은 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카파나 북쪽과 반 지하 사원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안뜰 안에서 탐험가들은 태양의 문을 발견했다.
안뜰 근처에는 반 지하 사원이 있다. 북남 축이 아닌 동서 축을 가진 정사각형의 움푹 들어간 안뜰이다.[20] 벽은 다양한 스타일의 텐온 머리로 덮여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구조물이 다른 목적으로 재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21] 칼라사야에서 가장 큰 석재 블록은 26.95ton으로 추정된다.[18]
유적지의 많은 구조물에는 인상적인 문이 있는데, 기념비적인 규모의 문은 인공 언덕, 플랫폼 또는 움푹 들어간 뜰에 설치되어 있다. 한 문에는 지팡이 신 자세의 정면을 향한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남부 안데스 도상학 시리즈라고 불리는 태양의 문 도상학은 여러 석조 조각, 키루, 코담배 통 및 기타 티아우아나코 유물에서 볼 수 있다.[23]
태양의 문 상단에 있는 독특한 조각은 동물과 다른 존재를 묘사한다.
태양의 문과 푸마푼쿠에 있는 다른 문들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건축 예는 독특한 세부 사항을 가지고 있으며 석재 절단에 높은 기술을 보여준다. 이는 기술 도면에 대한 지식을 드러낸다.
티아우아나코의 건축 건설 기술에 대한 많은 이론이 제안되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직업적 틈새가 개발되었고 사람들은 특정 기술을 전문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도자기, 보석, 섬유 분야에서 일하는 장인이 증가했다. 나중에 잉카와 마찬가지로 티아우아나코는 상업적 또는 시장 제도가 거의 없었다. 대신, 문화는 엘리트 재분배에 의존했다.[25] 즉, 국가의 엘리트가 본질적으로 모든 경제적 산출물을 통제했지만 각 평민에게 그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직업의 분리는 국가 내의 계층적 분화가 수반되었다.[26]
일부 학자는 티아우아나코의 엘리트가 해자로 둘러싸인 네 벽 안에 살았다고 믿는다. 평민들은 가장 신성한 신전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의식적인 목적으로만 이 구조물에 들어갔을 수 있다.[3]
현재 유적의 상당수가 1970년대에 무리하게 복원된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유적 중심부의 면적은 4.2km2이며, 유적 중심부의 과거 인구는 10,500~50,000명[55]으로 추정된다. 또한, 최근 연구에서는 면적이 6km2[56]로 추정된다. 또한, 주변에는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여 건물 집중 구역과 그 외부를 구분하고 있었다고 한다. 티와나쿠 유적은 주로 다음과 같은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 중심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설명 |
---|---|
아카파나 |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
칼라사사야 | 직사각형 형태의 유적 중심 부분. 안에 "태양의 문"과 몇몇 석상이 있다. 무리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
반 지하식 사각형 광장 | 얼굴이 벽에서 튀어나와 늘어선 장식이 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석상이 서 있다. |
푸투니 | 칼라사사야 앞에 있는 반 지하식 광장을 가진 주거지 |
칸타타리타 | 아카파나 피라미드 뒤에 있는 반 지하식 광장을 가진 건축물 |
케리 칼라 | |
달의 문 | |
푸마 푼쿠 |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유적 중심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 |
유적은 진북(真北)을 이용한 동서남북에 거의 일치하지만, 약간의 오차가 있다. 또한, 아카파나 피라미드와 칼라사사야는 평행하게 세워져 있지 않다. 유적의 석재는 근처 티와나쿠 산맥에서 채석한 사암을 다수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 코파카바나 방면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안산암 등도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다. 또한, 차차푸마라고 불리는 퓨마 조각상 등 중요한 석상에는 오루로 방면에서 가져온 흑색 현무암이 사용되었다.
4. 석재 가공 기술
티와나쿠 유적의 석재는 두부처럼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경우가 많으며, 그 면은 놀랍도록 평평하다. 이러한 석재 절단 및 가공 방법과 사용된 도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둥근 자갈 등의 망치를 사용하여 석재 표면을 잘게 두드려 평평하게 하는 기술(敲製, 敲打 페킹)이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이 기술은 오얀따이땀보 유적 등 잉카 시대에도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티와나쿠 유적의 일부 건축물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가공 흔적(석재 표면의 敲打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석재 표면을 어떤 매개물로 연마한 것으로 보이는 기술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敲打 흔적과는 전혀 다른 깨끗하게 연마된 표면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가공 기술의 구분 사용이 석재마다, 혹은 유적마다 구분되었는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티와나쿠 유적의 파괴와 풍화가 진행되어, 폐기 후 9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상세한 조사 및 분석은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사암은 풍화가 심하여, 돌 표면이 층상으로 벗겨지기 때문에 원래 석재 표면 상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칼라사야의 잘못된 복원은 건축물별 또는 장소별 석재 가공 기술 차이에 대한 분석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당시 유적이 어떤 상태였는지, 어떻게 기능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적에서 떼어낸 돌은 마을 교회 건설에 사용되었으며, 마을 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벤치도 유적에서 옮겨온 석재로 만들어졌다. 또한, 마을 일반 주택에서도 유적에서 가져온 석재가 자주 발견된다. 멀리 라하와 라파스의 교회에까지 유적에서 떼어낸 석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24]
5. 티와나쿠의 사회와 문화
티와나쿠 유적이 있는 지역에는 현재 아이마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아이마라족과 티와나쿠 문화를 담당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티와나쿠 사회를 담당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이마라족 설, 푸키나어족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
최근 바이러스학이나 분자유전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티와나쿠 시대의 인골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도 이 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일본 아이치현 암센터 연구소 연구팀은 1995년부터 1998년에 걸쳐 '남미 원주민의 인류 유전학적 연구'를 진행했다.[72]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출토된 미라 (티와나쿠 시대)에서 인간헤모글로빈 β 사슬유전자와 HTLV-I 유전자를 추출, 미라는 일본인의 바이러스와 동일한 유형임을 확인했다. 또한 미라 뼈 조직에서 채취한 미토콘드리아유전자의 염기 서열 분석 결과, 현존하는 원주민과 미라가 유사한 분포 양식을 보였다.
종합연구대학원대학 연구팀은 남미 원주민과 티와나쿠 시대 미라 골 표본에 대해 DNA 분석을 진행, 현존 원주민 집단 간 염기 서열 편차는 크지만, 미라 사이에는 격차가 작음을 확인했다. 미라의 경우 남페루군과 북칠레군으로 나뉜다[73]。
칠레 아타카마 사막 출토 표본(티와나쿠 시대) DNA는 현재 아이마라 원주민과 계통적으로 가장 가깝고, 페루의 티와나쿠 관련 인골은 현존하는 케추아에 가깝다. 칠레 출토 티와나쿠 관련 인골은 칠레 출토 잉카 관련 인골 샘플 DNA와 가깝다.
칠레 연구자 프란시스코 로트해머는 볼리비아 티와나쿠 유적 출토 샘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아이마라는 아타카마 사막 출토 미라 DNA에 가깝고, 티와나쿠는 아마존 지역 원주민 DNA에 가깝다고 발표했다. 티와나쿠 인골 DNA는 아이마라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며, 오히려 케추아에 가깝다[74]。 다만, 표본 수가 적다는 문제점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아타카마 사막 인골이 볼리비아 티와나쿠 민족 집단과 같은 계통인지 의문이 남지만, DNA 연구는 중요한 결과이다.
고고학적 유물 양식과 분포, 바이러스학과 유전학 연구 결과는 티와나쿠가 단일 민족이 아닌, 여러 민족 집단에 의한 정치 체제였다는 모델을 뒷받침한다. 다만, 유전적·형질적 형태와 문화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5. 1. 사회 구조
티와나쿠 사회 구조에 대한 고고학적 데이터는 매우 부족하여, 고차원적인 해석이 어려운 상황이다. 일반 주거지 발굴 조사에서 티와나쿠 사회 내 계층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금박, 금속 제품, 정제된 토기 등)가 발견되었지만, 경작지 관리 형태나 생산물 흡수 등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적 규모의 차이는 계층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연구자마다 다르다.[72] 콜라타는 통합적인 사회를, 알바라신 호르단은 중층화된 사회를 주장한다.고대 "제국"이나 "국가" 개념에 대한 연구자 간의 불일치, 그리고 티와나쿠 문화에서 국가를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창고, 왕도, 왕묘 등)가 거의 없다는 점은 티와나쿠가 "국가" 수준의 복잡한 사회였는지 논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73]
현재 티와나쿠 유적 지역에는 아이마라족이 살고 있지만, 이들과 티와나쿠 문화를 담당했던 사람들 간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티와나쿠 사회를 담당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이마라족 설, 푸키나어족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
최근 바이러스학 및 분자유전학 연구가 진전되면서 티와나쿠 시대 인골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연구진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출토된 미라에서 인간 헤모글로빈 β 사슬 유전자와 HTLV-I 유전자를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미라의 바이러스가 일본인의 바이러스와 동일한 유형임을 밝혀냈다.[74] 또한 미라의 뼈 조직에서 채취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 서열 분석 결과, 현존하는 원주민과 미라가 유사한 분포 양식을 보였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 칠레 아타카마 사막 출토 표본(티와나쿠 시대) DNA는 현재 아이마라 원주민과 계통적으로 가장 가깝고, 페루의 티와나쿠 관련 인골 DNA는 현존하는 케추아에 가깝다는 결과가 나왔다. 칠레 연구자 프란시스코 로트해머는 볼리비아 티와나쿠 유적 출토 인골 DNA가 아마존 열대 우림 지역 원주민 DNA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만, 이러한 연구들은 표본 수가 적다는 문제점이 있다.
고고학적 유물 양식과 분포, 그리고 바이러스학과 유전학 연구 결과는 티와나쿠가 단일 민족 집단이 아닌 여러 민족 집단에 의한 정치 체제였다는 모델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유전적·형질적 형태와 문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5. 2. 종교와 우주관
많은 안데스 문화권에서 산은 숭배받으며[27] 신성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티아우아나코 유적지는 푸카라와 추키 카와라는 두 개의 신성한 산 사이의 계곡에 위치해 있었다. 고대 시대에 이곳에서는 신과 영혼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28] 이곳은 안데스 민족을 공유된 상징과 순례지로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된 숭배와 의식의 장소였다.티아우아나코는 일반 대중과 엘리트 모두를 위한 콜럼버스 이전 종교 의식의 중심지였다. 예를 들어, 인신공양은 행운을 대가로 신을 달래기 위해 여러 콜럼버스 이전 문명에서 사용되었다. 티아우아나코의 아카파나 발굴에서는 인간과 낙타과의 희생적 헌납의 유물이 발견되었다.[29] 연구자들은 아카파나가 천문 관측소로도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아카파나는 킴사차타 봉우리에 맞춰 건설되어 남극에서 은하수의 회전을 볼 수 있게 했다.[30] 칼라사사야와 같은 다른 구조물들은 춘분, 하지, 동지에 해돋이를 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기념물의 상징적 및 기능적 가치는 추측만 할 수 있지만, 티아우아나코 사람들은 태양, 달, 은하수 및 기타 천체의 위치를 연구하고 해석하여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31]
아이마라족의 전설은 티아우아나코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데, 이는 아마도 그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티아우아나코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활용하고 천문학에 대한 이해를 건축 계획의 기준으로 삼았다. 티아우아나코에서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는 산과 티티카카 호수이다.[32] 티티카카 호수의 수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변동했다. 호수의 영적인 중요성과 위치는 티아우아나코의 종교적 중요성에 기여했다. 티아우아나코의 세계관에서 티티카카 호수는 그들의 우주적 신념의 영적 발상지이다.[33] 잉카 신화에 따르면 티티카카 호수는 태양, 달, 사람, 그리고 우주를 창조한 비라코차의 발상지이다. 티아우아나코의 칼라사사야에는 태양의 문이라고 알려진 거석 위에 새겨진, 창 던지개[34]와 코담배를 들고 있는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비라코차의 표현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 인물이 비라코차처럼 창조와 파괴의 전설과 관련된, 아이마라족이 "투누우파"라고 부르는 신을 나타낼 가능성도 있다.
티아우아나코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아이마라족은 여러 다른 안데스 문명의 우주론과 유사한 복잡한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 개의 공간, 즉 상부 세계인 아라파차, 중간 또는 내부 세계인 아카파차, 하부 세계인 만카하오아차의 존재를 믿는다.[35] 종종 우주와 은하수와 연관된 상부 세계는 천상의 존재가 사는 곳으로 여겨진다. 중간 세계는 모든 생물이 있는 곳이며, 하부 세계는 생명 자체가 반전된 곳이다.[36]

5. 3. 농업 기술: 스카 코류 (Sukakollu)
티아우아나코에서 식량 생산에 사용된 주요 농업 기술은 스카 코류(아이마라어: Sukakollu, 케추아어: Waru Waru, 스페인어: Camellones, 영어: Raised field)라고 불리는 도랑을 갖춘 융기 밭 농경 방식이었다. 1980년대부터 이 농경법의 복원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일반적인 천수 농경보다 생산성이 높고 냉해에 강하다는 점이 주목받았다.[60]스카 코류는 밭을 수로용 도랑으로 둘러싸고 이랑 부분을 높인 형태이다. 1980년대 후반, 티아우아나코 시대의 생업 기술로서 유망했던 이 농경 기술의 복원 실험이 볼리비아에서 진행되었다. 페루령 티티카카 호 북부 연안 등에서도 유사한 실험이 진행되어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스카 코류는 일반적인 천수 농경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75]

단기적으로는 이러한 복원 실험이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현지에서 행해지는 천수 농경에 비해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훨씬 높았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3배 이상의 생산성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냉해에도 매우 강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스카 코류를 현대 개발 문제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외국 비정부 기구(NGO) 등의 원조를 받아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75]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1996년까지 페루령의 실험을 포함하여 모두 포기되었고, 현재는 유적 주변에 실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원인으로는 해마다 생산성이 감소하여 농민들의 관심이 줄어든 점, 노동력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고 공동 노동이 아니면 운영이 불가능한 점, 일부 지역에서는 물이 부족한 점,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노동력의 과소 이용 문제 등이 꼽힌다.[75]
한 번 포기되었던 응용 실험은 소규모로 2000년경부터 부활했다. 현재까지 Programa de SukaKollu(PROSUKO)라는 단체에 의해 2008년까지 응용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농민들의 자립적 경영 및 생산물의 시장 경제 편입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복원 실험은 티아우아나코 옆의 아추타 그란데 공동체와 카타리 분지에 있는 와크랴니 공동체, 푸에르토 페레스, 바탈라스 지역 주변 공동체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지역들은 지하 수위가 높고 하천 연안 혹은 습지대이기 때문에 물 공급이 풍부하여 티아우아나코 시대에도 스카 코류가 이용되었다.[75]
장기적인 실험 실패로 인해 2000년 이후 스카 코류의 생산성에 대해 문화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 실험에서는 연작 장애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지식 부족으로 같은 토양에서 감자를 연작했기 때문에 시스트선충(''Nematoda'')이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안데스에서는 윤작·휴한 시스템이 채용되고 있으며, 괴경류(감자)를 계속 재배하는 일은 없다. 이는 토양 지력 회복보다는 기생충 등에 의한 연작 장애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76]
이러한 측면에서 실제로는 스카 코류에 지금까지 알려진 정도의 생산력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단위 면적당 총 생산량을 계산하더라도 매년 같은 토지에서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토지 집약적인 기술이 되며,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토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 토지는 물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토지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76]
스카 코류의 확산에도 제약이 있었다. 티티카카 호 연안의 표면 조사 결과, 스카 코류는 티티카카 호 연안의 습지대나 거기에서 뻗어 나가는 하천가 일부, 수원 지대 등에만 확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천수 농경이 티와나쿠 시대에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중심적인 기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티와나쿠 계곡 하류 유역에서는 테라스(계단식 밭)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코차라고 불리는 연못 농경도 존재했다.[76]
스카 코류와 같은 도랑을 둘러싼 융기 밭 농경은 파푸아뉴기니나 멕시코 등 세계적으로 습지대에 적합한 경작 기술이다. 볼리비아 내에서도 아마존 지역의 습지대 모호스 등에서 많이 보인다. 도랑의 역할은 급수보다는 배수로 생각된다. 그러나 티와나쿠 계곡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이 부족하기 쉽다. 단기적인 실험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수원도 장기적 또는 영구적인 이용이 되면 물 부족을 일으킨다.[75]
티와나쿠 계곡 전체 면적은 약 560~575km2이지만, 스카 코류에 이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면적은 약 60km2 정도이다. 카타리 분지에서는 조사된 총 면적 102km2 중 스카 코류가 70km2에 확산되어 있었다. 페루령 티티카카 호 서안의 조사에서도 확인 가능한 스카 코류의 확산은 조사 지역 전체의 28.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64],[77]
스카 코류 운영의 효율성에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높지만 노동력 투입이 천수 농경의 4배 가까이 필요하여 노동자 1인당 보상이 극단적으로 낮아진다는 데이터도 있다.[78]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스카 코류에서의 단위 면적당 최대 생산량은 일반 경작지에 비해 높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노동 투입량만 억제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트랙터를 도입하거나 화학 비료를 사용하거나, 번식력이 강한 씨감자를 구매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5. 4. 유물
티아우아나코 유적의 석재는 직사각형으로 잘려 있고, 그 면은 매우 평평하다. 석재 가공 방법과 사용된 도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둥근 자갈 등을 망치로 사용해 석재 표면을 잘게 두드려 평평하게 만드는 기술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잉카 시대에도 사용된 기술이다.[1] 석재 표면을 연마한 흔적도 발견되는데, 이는 두드리는 방식과는 다른 기술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1]티아우아나코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는 케로라고 불리는 컵 모양의 토기와 향로이다. 케로는 산화 소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렌지색 바탕에 갈색, 적색, 흑색 등으로 낙타과 동물, 맹금류, 기하학적 문양 등을 그린 것이 많다.[1] 흑색 마연의 케로도 존재하며, 사람 얼굴을 본뜨거나 각선으로 도상을 그린 것도 있다.[1] 향로는 동물을 본떠 만든 것이 많으며, 콘도르, 퓨마, 재규어, 라마 등을 형상화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1] 이 외에도 일상생활에 사용된 항아리, 옹기, 미니어처 토기 등도 많이 발견된다.
발굴된 인골에서는 의도적으로 머리 형태를 변형시킨 두개골 변형 흔적이 발견된다.[1] 이는 티와나쿠의 월경지인 모케구아에서도 발견되며, 티아우아나코에서 직접 이주해 왔다는 증거 중 하나로 여겨진다.
청동 제품으로는 핀, 장식품, 유적 수로의 돌을 연결하는 꺾쇠 등이 출토되었다.[1] 이들은 비소를 혼합한 비소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티티카카 호 연안 지역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이다.
새로운 석조·석기 박물관에는 라파스 야외 박물관에 있던 거대한 베넷 석상이 전시되어 있다.[1] 이 외에도 티아우아나코 시대의 석조 조각과 석기류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석조 조각은 사암, 안산암, 현무암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석기는 규암, 사암, 챠트, 흑요석 등이 사용되었다.[1]
6. 고고학적 발굴과 보존
티아우아나코는 쇠퇴 직후부터 약탈과 아마추어 발굴로 인해 훼손되어, 고고학자들은 흩어지고 파괴된 자료를 바탕으로 유적을 해석해야 했다. 이러한 파괴는 스페인 정복 시대와 식민지 시대,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계속되었다. 건물과 철도 건설을 위한 채석, 군인들의 사격 연습 등도 유적 훼손의 원인이었다.[24]
현대 유적지에는 서 있는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 공공 시설과 비(非)주거용 기초만 남아 있으며, 재건된 벽도 부실하다. 유적 시대 전반에 걸쳐 특정 건물들의 용도가 변경되면서 오늘날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24]
19세기 중반부터 티아우아나코에 대한 소규모 연구가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 에프라임 조지 스콰이어가 유적을 방문하여 지도와 스케치를 출판했다. 1876년에는 독일 지질학자 알폰스 슈튜벨이 9일 동안 머물면서 유적 지도를 만들고, 조각품과 건축 특징에 대한 스케치와 종이 인쇄물을 제작했다. 1892년에는 엔지니어 게오르크 폰 그룸브코우가 주요 사진 자료를 담은 책을 출판했으며, 고고학자 막스 우헤의 해설과 함께 유적에 대한 최초의 심층적인 과학적 보고서가 되었다. 폰 그룸브코우는 1876년 말과 1877년 초에 티아우아나코를 처음 방문했는데, 이는 프랑스 모험가 테오도르 베르의 탐험에 사진가로 동행한 것이었다. 이 탐험은 미국 사업가 헨리 메이그스가 자금을 지원했으며, 베르는 발견한 유물을 스미소니언 협회와 아메리카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르의 탐험은 지역 주민들의 폭력적인 적대 행위로 중단되었지만, 폰 그룸브코우의 초기 사진은 남아 있다.[37]
1960년대에 볼리비아 정부는 유적 복원과 일부 재건을 시작했다. 칼라사사야의 벽은 거의 전부 재건되었으나, 증거에 충분히 기반하지 않았고, 티아우아나코에 존재했던 것만큼 높은 품질의 석조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다.[1] 초기 방문객들은 칼라사사야를 영국의 스톤헨지에 비유하기도 했다.[38] 에프라임 스콰이어는 이를 "아메리카의 스톤헨지"라고 불렀다.[39] 현재 칼라사사야에 있는 태양의 문은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1]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 시카고 대학교 인류학자 앨런 콜라타와 그의 볼리비아 측 연구원 오스왈도 리베라가 현대적이고 학술적으로 타당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수행했다. 그들은 수카 콜루스를 재발견하고, 문명의 성장과 영향력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측정했으며, 티아우아나코 문명의 붕괴가 가뭄에 기인한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폴 골드스타인과 같은 고고학자들은 티아우아나쿠 제국이 알티플라노 지역을 넘어 페루의 모케구아 계곡까지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모 정착지에서의 발굴은 사원과 테라스형 언덕과 같은 티아우아나쿠의 특징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20] 오모 유적과 티아우아나코의 주요 유적 사이의 매장지에서 발견된 유사한 유형의 두개골 변형 증거 또한 이 주장에 사용되고 있다.[41]
오늘날 티아우아나코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볼리비아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최근 볼리비아 고고학부(DINAR)는 테라스형 플랫폼 언덕 아카파나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가 운영하는 푸마푼쿠-아카파나 고고학 프로젝트(PAPA)는 테라스형 플랫폼 언덕 주변 지역에서 발굴을 진행해 왔으며, 해당 지역에 대한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과거 몇 년 동안, 하버드 대학교 여름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제공된 고고학 현장 학교가 기념비적 중심부 외부의 주거 지역에서 수행되었으나, 지역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42] 이 논란에는 민족주의적,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44] 하버드 현장 학교는 2004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종료되었다.
2009년 아카파나에 대한 정부 지원 복원 작업은 유네스코의 불만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복원은 연구자들이 이를 적절하다고 확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랫폼 언덕에 흙벽돌을 씌우는 것으로 구성되었다.[45][46]
2013년, 해양 고고학자들은 티티카카 호수의 코아 암초를 탐사하면서 고대 의식 유적지를 발견하고 호수 바닥에서 라피스 라줄리와 도자기 조각상, 향 버너, 의식용 메달과 같은 유물을 인양했다.[47] 이 유물들은 티아우아나쿠 문화의 의식의 화려함을 보여준다.[47]
2016년에 드론을 사용하여 유적의 지형도를 작성했을 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구조물"이 드러났다. 이 구조물은 411헥타르에 걸쳐 있었으며, 석조 사원과 거대한 규모의 원형 또는 사각형 구조물 약 100개로, 이는 아마도 주거 단위였을 것이다.[48]
마을에는 부속 박물관이 최근 정비되어, 여기서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나 석상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라파스에도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여기에도 티와나코를 비롯한 볼리비아 내에서 출토된 유물을 볼 수 있다. 티와나코 마을의 박물관에서는 토기와 석기, 석조 조각, 인골, 청동 제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티아우아나코 유적에서는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시카고 대학교 고고학자 앨런 콜라타 등에 의해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콜라타 등의 프로젝트는 일단락되었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제자였으며 현재는 캐나다 맥길 대학교의 고고학자들에 의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 조사는 티아우아나코 유적을 둘러싼 철망 밖의 유적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하 레이더를 이용한 조사 등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4년부터 볼리비아 국립 시멘트 회사 Sociedad Boliviana de Cemento S.A.의 출자로 Unidad Nacional de Arqueologia(UNAR: 볼리비아 고고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9년경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이것은 티아우아나코 유적을 관광지로서 대대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유적의 기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발굴의 중심은 아카파나 피라미드이며, 일부에서는 계단과 돌문 등이 복원되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건축가이자 인류학자인 알렉세이 브라니치(Alexei Vranich)가 볼리비아 고고국에 보관되어 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유적 사진, 그리고 일부 발굴 조사에 근거하여 칼라사사야, 아카파나, 푸마 푼쿠의 복원에 힘쓰고 있다. 거기서부터 티아우아나코의 건축군이 가지고 있었을 의미의 재구성에 힘쓰고 있으며, 지하 레이더를 이용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7. 현대의 티와나쿠: 응용 고고학과 개발 문제
1960년대 볼리비아 정부는 티아우아나코 유적 복원 및 재건을 시작했다. 칼라사사야 벽은 거의 전부 재건되었으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고 원래의 높은 석조 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1] 초기 방문객들은 칼라사사야를 스톤헨지에 비유하기도 했다.[38][39] 현재 태양의 문은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1]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 시카고 대학교의 앨런 콜라타와 오스왈도 리베라는 현대적이고 학술적인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수행했다. 이들은 수카 콜루스를 재발견하고, 티아우아나코 문명의 연대를 측정했으며, 가뭄으로 인한 문명 붕괴 증거를 발견했다.
폴 골드스타인은 티아우아나쿠 제국이 페루 모케구아 계곡까지 확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오모 정착지 발굴 결과, 사원과 테라스형 언덕 등 티아우아나쿠 특징적인 건축 양식이 발견되었다.[20] 오모 유적과 티아우아나코 주요 유적 사이 매장지에서 발견된 유사한 두개골 변형 증거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41]
오늘날 티아우아나코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볼리비아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최근 볼리비아 고고학부(DINAR)는 아카파나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푸마푼쿠-아카파나 고고학 프로젝트(PAPA)를 통해 테라스형 언덕 주변 지역 발굴 및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를 수행했다.
과거 하버드 대학교 여름 학교 프로그램으로 기념비적 중심부 외부 주거 지역에서 고고학 현장 학교가 운영되었으나, 훈련받지 않은 학생팀 작업 허용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42] 이 논란은 민족주의적, 정치적 함의를 포함했다.[44] 하버드 현장 학교는 2007년에 종료되었다.
2009년 아카파나 복원 작업은 유네스코의 불만으로 중단되었다. 복원은 연구자들이 적절하다고 확정하지 않았음에도 흙벽돌을 사용했다.[45][46]
2013년, 해양 고고학자들은 티티카카 호수 코아 암초에서 고대 의식 유적지를 발견하고 라피스 라줄리, 도자기 조각상, 향 버너, 의식용 메달 등 유물을 인양했다.[47]
2016년 드론을 이용한 지형도 작성 결과, 석조 사원과 거대한 원형 또는 사각형 구조물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구조물"이 드러났다.[48]
최근 조사에 의해 유적 주변에 상당한 주거지가 존재했으며, 당시 도시적 양상을 띠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식량 생산 역시 빈곤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2006년 4월 현재, 발굴 및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며, 점차 유적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티와나쿠 연구에서 중요한 연구는 현대 개발 문제와 연결되는 응용 고고학적 시도이다. 티아우아나코와 현재 마을의 연결은 유적 관광 사업뿐만 아니라 스카 코류 복원 실험과 그 응용에서도 나타난다.
1980년대 후반, 티아우아나코 시대 농경 기술 복원 실험이 볼리비아에서 진행되었다. 스카 코류는 일반 천수 농경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시사되었다. 복원된 밭은 밭을 수로용 도랑으로 둘러싸고 이랑 부분을 높인 형태로, 아이마라어로 스카 코류, 케추아어로 waru waru(와루 와루), 스페인어로 camellones(카메료네스), 영어로 raised field(레이즈드 필드)라고 불린다. 복원 실험은 티아우아나코 주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높은 생산성이 주목받아 현대 농업 생산 증진 프로젝트에 응용되었다.
단기적으로는 실험이 성공하여 천수 농경보다 3배 이상 생산성이 높은 지역도 있었고, 냉해에 강하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실패하여 1996년까지 모두 포기되었다. 원인은 생산성 감소, 과도한 노동력 필요, 물 부족, 노동력 과소 이용 문제 등이었다.[75]
한 번 포기되었던 응용 실험은 2000년경부터 소규모로 부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Programa de SukaKollu(PROSUKO)는 농민들의 자립적 경영과 생산물의 시장 경제 편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 복원 실험은 티아우아나코 옆 아추타 그란데 공동체와 와크랴니 공동체, 푸에르토 페레스, 바탈라스 지역 주변 공동체 등에서 볼 수 있다.
스카 코류의 최대 생산량은 일반 경작지에 비해 높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노동 투입량만 억제할 수 있다면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트랙터 도입, 화학 비료 사용, 번식력이 강한 씨감자 구매 등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이 이용되는 사회 환경 정비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75] 시장 경제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현금 수입을 촉진하여 농민들의 과소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64]
8. 티와나쿠와 관련된 논쟁
티와나쿠는 종종 제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발굴된 인골에서는 의도적으로 머리 형태를 변형시킨 두개골 변형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티와나쿠의 월경지인 모케구아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다른 고고학 유물과 함께 티와나쿠에서 직접 이주해 왔다는 증거 중 하나로 여겨진다.
8. 1. 티와나쿠 사회의 성격
티와나쿠 사회가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종 제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최근에는 티와나쿠 사회를 "관료제를 갖춘 국가"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57]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관료제가 সত্যিই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는 반론도 많다.[58] 다른 견해로는, 티와나쿠 사회가 "복잡하게 얽힌 지연·혈연 조직(아이류)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고 보기도 한다.[59]
이러한 논쟁은 아이마라어로 스카 코류(케추아어로는 와르 와르[60])라고 불리는, 도랑이 있는 밭을 조사하고 해석하면서 시작되었다. 티티카카 호 주변의 고고학 연구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넓은 의미에서 국가가 생산물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까지 포함)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티와나쿠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스카 코류가 주목받았다. 1980년대 초부터는 버려진 이 농경 방식을 복원하는 실험이 이루어졌고,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높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융기 밭 농법을 티와나쿠 정부가 직접 관리했는지, 아니면 지역 농민들이 알아서 관리했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앨런 콜라타는 티와나쿠가 스카 코류를 직접 관리했다고 주장한다.[61] 티와나쿠 유적 옆 카타리 분지에 있는 융기 밭과, 20km 길이의 인공 수로 시설은 티와나쿠 정부에서 기술자를 파견해 만들었다는 것이다.[62] 카타리 분지와 티와나쿠 계곡의 수리 시설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을 증거로 들었다.[62] 또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융기 밭의 흙 속이나 밭을 덮은 흙에서 발견된 탄화물(달팽이 껍질 등)이 대부분 티와나쿠 시대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63][64]
반면, 클라크 에릭슨은 융기 밭과 수리 시설을 국가가 관리했다는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페루에서의 실험 결과, 몇 가족만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65] 융기 밭과 수리 시설은 지역 주민들이 관리했다고 주장하며, 콜라타의 생산력 및 대규모 토목 공사 중심 이론을 비판했다.[66] 에릭슨은 열 루미네선스법으로 융기 밭의 사용 시기를 조사했는데, 융기 밭과 연결된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해 융기 밭이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200년 사이, 그리고 티와나쿠 붕괴 이후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콜라타는 밭의 이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콜라타의 조사팀에 참여했던 볼리비아 고고학자 알바라신-호르단은 티와나쿠 계곡 하류에서 유적 분포 조사를 실시했고, 스페인인이 기록한 아이류(지연·혈연적 집단)에 대한 문서를 이용해 유적 분포를 해석했다. 그는 티와나쿠 사회가 아이류가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사회이며, 스카 코류와 수리 시설은 아이류가 관리했다고 주장한다.[67]
하지만 양쪽 모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경작지 관리 형태는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밝히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반 주거지 발굴 조사 결과, 티와나쿠 사회에도 계층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적 중심부 근처나 특정 주거지에서는 금박, 금속 제품, 정교한 토기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티와나쿠 계곡 전체와 카타리 분지에 있는 여러 유적은 규모가 상당히 달라 계층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콜라타는 티와나쿠 중앙과 그에 이어진 2차, 3차 중심지를 상정하며 통합적인 사회를, 알바라신 호르단은 규모가 다른 아이류가 겹겹이 쌓인 모습으로 해석하는 등, 계층 해석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결국 문제는 고대 "제국",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학자들 간의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티와나쿠 문화에서는 물자를 모아두는 창고, 권위를 전달하는 "왕도", 권력자의 무덤 등 국가를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티와나쿠가 "국가" 수준의 복잡한 사회였는지조차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8. 2. 스카 코류의 효율성
아이마라어로 스카 코류(Suka Kollu, 케추아어로 와르 와르[60])는 도랑을 갖춘 융기 밭 농경을 말하며, 1980년대 초부터 복원 실험이 시작되어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높다는 점이 주목받았다.[60] 이 융기 밭 농법이 티와나쿠 정체에 의해 직접 관리되었는지, 아니면 지역 농민들에 의해 관리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경까지 이어졌다.앨런 콜라타는 티와나쿠에 의한 스카 코류의 직접적인 관리 운영을 주장하며,[61] 티와나쿠 유적이 있는 티와나쿠 계곡 옆 카타리 분지에 펼쳐진 융기 밭과 길이 20km 정도의 수리 시설이 티와나쿠 정체의 중앙에서 파견된 기술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62] 또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융기 밭이 티와나쿠 시대에 이용되었음을 보였다.[63]
반면 클라크 에릭슨은 국가에 의한 관리는 필요 없었으며,[65] 융기 밭이나 수리 시설 등은 지역민에 의해 관리 운영되었다고 주장했다.[65] 그는 열 루미네선스법으로 융기 밭의 이용 연대를 조사하여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200년 사이, 그리고 티와나쿠 붕괴 후의 시기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볼리비아 고고학자 알바라신-호르단은 스페인인이 기록한 아이류 (지연·혈연적 집단)에 관한 기록 문서를 이용하여 티와나쿠 사회가 복잡하게 중층화된 아이류였다고 주장하며, 스카 코류와 수리 시설이 아이류에 의해 관리되었다고 말했다.[67]
그러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논의는 수렴되었다. 현재 이 논쟁은 티와나쿠 사회 붕괴 문제로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앨런 콜라타는 기후 변화에 따른 건조화가 스카 코류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티와나쿠 사회 붕괴의 방아쇠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68] 클라크 에릭슨은 새로운 환경 결정론으로 반론하고 있다.[69]
최근에는 스카 코류의 생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스카 코류 농경이 가진 효율성과 생산성의 높이도 의문시되기 시작했다.[71] Swartley는 스카 코류라는 경작 기술 자체가 고고학자에 의해 발명된 선주민의 지혜라고 주장하며, 티와나쿠 시대에 어떤 사회 환경에서 이용되었는지는 실제로 알 수 없다고 한다. Bandy는 스카 코류의 효율성이 일반적인 천수 농경보다 나쁘다고 주장하며, 연작 장애 문제까지 고려하면 결코 효율적인 경작법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스카 코류 복원 실험이 볼리비아에서 진행되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났다.[75] 원인은 생산성 감소, 과도한 노동력 필요, 물 부족, 노동력 과소 이용 문제 등이었다.[75]
한 번 포기되었던 응용 실험은 2000년경부터 소규모로 부활하여 현재까지 Programa de SukaKollu(PROSUKO)라는 단체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과거의 실험에서는 고고학자들의 연작 장애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시스트선충(''Nematoda'')이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76] 안데스에서는 윤작·휴한 시스템이 채용되어 괴경류(감자)를 계속 재배하는 일은 없다.
스카 코류는 티티카카 호 연안의 습지대나 하천가 일부, 수원 지대 등에만 확산되었으며, 천수 농경이 티와나쿠 시대에도 중심적인 기술이었다. 티와나쿠 계곡 하류 유역에는 테라스(계단식 밭)와 코차라고 불리는 연못 농경도 존재했다.
스카 코류는 습지대에 적합한 경작 기술이며, 티와나쿠 계곡은 물이 부족하기 쉬워 장기적인 이용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스카 코류의 운영에는 노동력 투입이 천수 농경의 4배 가까이 필요하여 노동자 1인당 보상이 낮아지는 문제도 제기되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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