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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십팔제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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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우의 십팔제후왕 분봉은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각지에 제후왕을 봉한 사건이다. 항우는 스스로 서초의 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진나라 멸망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육국의 후예들을 왕으로 봉했다. 이 분봉은 각 제후들의 불만을 야기하여 초한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방은 파촉 지역을, 옛 진나라 장수들은 관중 지역을, 제나라 지역은 여러 제후왕에게 분할되었다. 항우는 분봉을 통해 제후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제후들의 반란을 초래하여 초한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항우의 분봉은 권력 분배의 중요성과 민심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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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십팔제후왕
개요
주요 내용항우진나라 멸망 후 세운 18개의 제후국
역사적 배경
시대적 배경진한교체기
십팔제후왕 목록
옹왕 (雍王)장한 (章邯)
새왕 (塞王)사마흔 (司馬欣)
적왕 (翟王)동예 (董翳)
서초패왕 (西楚霸王)항우 (項羽)
한왕 (漢王)유방 (劉邦)
형양왕 (衡陽王)오예 (吳芮)
임강왕 (臨江王)공오 (共敖)
상산왕 (常山王)장이 (張耳)
대왕 (代王)조헐 (趙歇)
횡산왕 (衡山王)오신 (吳臣)
구강왕 (九江王)경포 (黥布)
은왕 (殷王)사마앙 (司馬卬)
하남왕 (河南王)신양 (申陽)
한왕 (韓王)한성 (韓成)
위왕 (魏王)위표 (魏豹)
제왕 (齊王)전도 (田都)
교동왕 (膠東王)전시 (田市)
제북왕 (濟北王)전문 (田安)
비고
삼진 (三秦)옹 (雍), 새 (塞), 적 (翟)은 옛 진나라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진으로 불림
삼제 (三齊)교동 (膠東), 제 (齊), 제북 (濟北)은 옛 제나라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제으로 불림

2. 항우의 십팔제후왕 분봉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각지에 제후왕을 봉했다. 이를 항우의 십팔제후왕 분봉이라 한다. 항우는 스스로 서초의 왕이 되어 양쯔강 유역 2개 군과 옛 초나라 지역 7개 군을 다스렸고, 도읍은 팽성으로 정했다.

항우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진나라 멸망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기존 육국의 후예들을 왕으로 봉하여 천하를 나누어 통치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봉은 각 제후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초한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왕 유방파군, 촉군, 한중군을 받아 남정에 도읍을 정했다. 구강왕 영포구강군을 영토로, 수춘을 도읍으로 삼았다. 옛 진나라 장수였던 장한, 사마흔, 동예는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봉해져 관중 지역을 다스렸다. 이들은 유방에게 멸망당했다.

서위왕 위표는 허둥군을, 하남왕 신양하남군을, 한왕 한성은 잉촨군을 영토로 받았다. 은왕 사마앙은 허난군을, 상산왕 장이는 옛 조나라 영토를, 대왕 조헐은 다이군, 얀먼군, 윈중군을 다스렸다. 형산왕 오예형산군을, 임강왕 공오는 난군을 영토로 받았다.

연왕 장도는 랴오둥군, 랴오시군, 유베이핑군을, 요동왕 한광은 어양군, 상곡군, 광양군을 다스렸다. 제나라 지역은 교동왕 전부, 제왕 전도, 제북왕 전안에게 분할되었다.

2. 1. 분봉의 배경

2. 2. 분봉의 원칙과 실제

2. 3. 제후왕 목록

'''항우 십팔제후왕'''
국명건국군주 성명재위 기간최후의 군주멸망멸망시킨 국가도성영토 범위
서초기원전 206년 2월항우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3년 12월항우기원전 203년 12월유방팽성양지 2군과 초지 7군
기원전 206년 2월유방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2년 2월헌제건안 25년 (220년)남정파군, 촉군, 한중군
(후의)기원전 206년 2월영포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196년 12월영포기원전 196년 12월유방수춘구강군
기원전 206년 2월장한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5년 5월장한기원전 205년 5월유방폐구함양 서쪽. 롱시군, 베이디군, 내사 서부
기원전 206년 2월사마흔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6년 8월사마흔기원전 206년 8월이양함양 동쪽에서 황하까지. 내사 동부
기원전 206년 2월동예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6년 8월동예기원전 206년 8월고노상군
기원전 206년 2월위표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5년 8월위표기원전 205년 8월한신평양허둥군
기원전 206년 2월신양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5년 11월신양기원전 205년 11월유방뤄양하남군
기원전 208년 6월한성기원전 208년 6월 - 기원전 206년 4월정창기원전 205년 11월한왕신양적한의 옛 영토. 잉촨군
기원전 206년 2월사마앙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5년 3월사마앙기원전 205년 3월유방자오거허난군
기원전 206년 2월장이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6년 9월장이기원전 206년 9월진여샹궈조의 옛 영토. 헝산군, 쥐루군, 한단군
기원전 206년 2월조헐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6년 9월진여기원전 205년 10월한신다이군, 얀먼군, 윈중군
(장사)기원전 206년 2월오예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2월기원전 157년형산군
기원전 206년 2월공오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4년 8월기원전 203년 12월유방강릉난군
기원전 206년 2월장도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2년 9월장도기원전 202년 9월랴오둥군, 랴오시군, 유베이핑군
기원전 206년 2월한광한광기원전 206년 7월장도무종어양군, 상곡군, 광양군
기원전 206년 2월전부전부전영지모교동군
기원전 206년 2월전도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6년 4월전도기원전 206년 4월린쯔임치군, 랑야군
제북기원전 206년 2월전안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6년 6월전안기원전 206년 6월박양제북군


3. 분봉의 문제점과 한계

모든 제후왕을 통제하기 어려운 항우는 일부러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분봉한다. 그러나 항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열이 나타났고 결국 분봉 몇개월만에 그 결과 옛 제나라의 즉각적인 반응을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3]

항우의 분봉의 주요 문제점들과 그결과 분열되는 과정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초나라 지역 -
  • * 항우는 초회왕 미심과 심각한 갈등이 있었는데 이미 과거에도 항우의 학살로 갈등을 빚다가 거록대전 직전에는 초회왕이 임명한 사령관 송의도 살해하고, 함양에 입성한 뒤에는 초회왕의 지시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제후왕들을 임명해 갈등은 극에 달한다. 거기에 항우는 초희왕이 다스리던 수도 팽성을 차지하기 초의제라는 명목상 직책을 내린 뒤 벽오지였던 침성으로 사실상 추방시켜 버렸고(팽성은 항우의 서초국의 수도로 사용한다) 그 직후 항우는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를 내려 추방당한 초의제를 침성에서 살해한다. 그리고 항우의 의제살해는 항우세력에게는 항량이 초의제를 통해 확보한 내부결속의 상실을 항우 적대세력에게는 천자살해라는 명분을 주게 된다.
  • * 항우의 부하중 영포오예만 제후왕에 임명되었는데 항우의 부하들은 영지를 받지못한것에 큰 불만을 품게된다. 거기에 항우의 의제 살해까지 겹치면서 항우의 부하들의 불신은 매우 극심해졌다. 특히 초의제 살해에 직접 참여했던 영포오예의 불신이 깊어져 구강왕 영포의 경우 항우가 전영, 유방등과 싸울때도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에는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항우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형산왕 오예영포의 반란으로 영포의 가족들이 연좌되어 죽을 때 영포에게 시집보낸 오예의 딸도 죽었고 오예 자신도 항우에게 형산왕 영지를 박탈당하자 영포를 따라 유방에게 귀순해버린다.
  • 진나라 지역 (=관중 지역)
  • * 진나라가 전국시대에 다스리던 관중지역은 전 중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지역으로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지역이다. 이때문에 후대의 여러 군벌들은 물론 당시 유방과 심지어 항우 본인까지도 노리던 지역이었는데 유방과 내분을 벌이고 암살까지 시도하면서 노리던 관중지역을 갑자기 항우는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팽성으로 가버린다. 당연히 항우의 참모들은 관중의 중요성을 설득하면서 항우가 관중을 차지할 것을 권유했지만 항우는 고향땅에 가서 자랑해야한다는 시시한 이유를 들며(금의환양/衣錦還鄉중국어, 초인목후이관/沐猴而冠중국어) 초의제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서초지역으로 돌아가버린다. 여기에는 항우가 저질렀던 신안과 함양 등 관중에서 저지른 학살과 함양에서 저지른 약탈과 도굴 진왕 영자영의 처형 등으로 관중주민들의 반감을 사 관중지역을 통제할 수 없었을거라는 추측도 있다.
  • * 패공 유방은 가장 먼저 진나라 본토에 들어가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3세황제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따라서 유방이 실질적으로 옛 진나라 지역을 다스릴 제후왕으로 적합한 인물이었고 명분적으로도 초회왕이 과거에 함양을 점령하면 관중의 왕으로 임명한다고 했으며 초희왕은 항우가 분봉할 때도 유방을 관중의 왕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항우는 자신의 숙적인 유방이 관중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으며 항우는 유방을 견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우선 초희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유방의 봉지로 관중에서 극히 일부지역 거기에 최악의 격오지로 손꼽혀 정치범 흉악범들을 유배보내던 파촉지역을 봉지로 내려준 뒤 거록대전 이후 항복했던 진나라의 항장인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고 이 삼진의 왕들에게 유방을 감시 견재하도록 지시한다. 거기에 더불어 유방의 10만 군대를 해산시켜 3만명만 대리고 갈 수 있게 하는 등 항우는 유방을 견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항우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우선 자기 숙부이지 유방의 사돈이었던 항백의 설득에 파촉에서 관중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한중땅을 넘겨주었고 거기에 관중 주민들은 진나라에 학살등 악행을 저지른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매우 싫어했으며 무엇보다 삼진의 왕들은 부하들이 전부 신안대학살에서 죽어 관중과 유방을 통제할 군대자체가 없었다. 결국 함양에서 해산하고 영지로 들어간지 4달만에 한왕 유방은 한중에서 다시나와서 관중을 공격했고 삼진의 왕들은 속수무책으로 패배하다가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유방에게 항복한다. 옹왕 장한은 수도 패구에 들어가서 농성하지만 관중의 주민들은 항우가 신안과 함양 등지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도굴에 항우와 삼진왕들을 증오하고 있었고 반대로 유방은 관중에서 보여준 온건한 태도와 영자영에 대한 관용, 진나라 악법의 폐지 등으로 관중주민들의 민심을 샀으며 특히 항우에게 저항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장한이 관중 중심부에서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 대전으로 유방이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은 큰 동요없이 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한다.
  • 제나라 지역 - (작성중)
  • 조나라 지역 -
  • 위나라 지역 - 원래 위나라는 진승·오광의 난 시기에 전국시대 위나라의 왕족이던 형 위구가 위나라를 재건했고 사망하자 위구의 동생 위표가 그 뒤를 이어 위나라의 왕이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표도 항우의 군대에 참여해 공을 세웠으나 항우는 분봉과정에서 위나라의 양나라땅을 자신의 서초에 합병시키고 남은 위나라 땅마저 반으로 나눠 사마앙에게 줘서 은나라 왕으로 임명한 뒤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넘겨준다. 이에 위표는 크게 불만을 가졌는지 1년뒤 한왕 유방이 항우를 공격하기 위해 동진할 때 싸우지도 않고 바로 항복하여 유방 편에 투항해버린다.
  • 연나라 지역
  • 한나라 지역 - 항우는 한나라왕 한성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지만 영지로 부임시키지 않고 사실상 억류해버린다. 그렇게 끌려다니던 한성은 얼마지나지 않아 항우가 팽성에서 왕작위를 빼앗고 살해해 버렸고 그 뒤 한나라의 왕위는 한나라랑 아무런 연관이 없던 부하장수 정창을 임명한다 이런 조치에 살해한 한성의 조카였던 한(왕조)신을 포함한 장량 등 한나라 세력들은 완전히 유방측으로 돌아서버린다.

또 천자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편 그와 동시에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략함으로써 초한전쟁의 막이 오른다.[3]

3. 1. 초나라 지역

항우는 초회왕 미심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미 과거에도 항우의 학살로 갈등을 빚다가 거록대전 직전에는 초회왕이 임명한 사령관 송의를 살해했고, 함양에 입성한 뒤에는 초회왕의 지시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제후왕들을 임명해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항우는 초회왕이 다스리던 수도 팽성을 차지하기 위해 초의제라는 명목상 직책을 내린 뒤 벽오지였던 침성으로 사실상 추방시켰고(팽성은 항우의 서초국의 수도로 사용한다) 그 직후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를 내려 추방당한 초의제를 침성에서 살해한다.[3]

항우의 의제 살해는 항우 세력에게는 항량이 초의제를 통해 확보한 내부 결속의 상실을, 항우 적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3] 특히 초의제 살해에 직접 참여했던 영포와 오예의 불신이 깊어져 구강왕 영포는 항우가 전영, 유방 등과 싸울 때도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에는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항우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형산왕 오예도 영포의 반란으로 영포의 가족들이 연좌되어 죽을 때 영포에게 시집보낸 오예의 딸도 죽었고 오예 자신도 항우에게 형산왕 영지를 박탈당하자 영포를 따라 유방에게 귀순해버린다.[3]

천자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략함으로써 초한전쟁의 막이 올랐다.[3]

3. 1. 1. 초의제 살해와 그 영향

항우는 초회왕 미심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미 과거에도 항우의 학살로 갈등을 빚다가 거록대전 직전에는 초회왕이 임명한 사령관 송의를 살해했고, 함양에 입성한 뒤에는 초회왕의 지시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제후왕들을 임명해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항우는 초회왕이 다스리던 수도 팽성을 차지하기 위해 초의제라는 명목상 직책을 내린 뒤 벽오지였던 침성으로 사실상 추방시켰고(팽성은 항우의 서초국의 수도로 사용한다) 그 직후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를 내려 추방당한 초의제를 침성에서 살해한다.[3]

항우의 의제 살해는 항우 세력에게는 항량이 초의제를 통해 확보한 내부 결속의 상실을, 항우 적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3] 특히 초의제 살해에 직접 참여했던 영포와 오예의 불신이 깊어져 구강왕 영포는 항우가 전영, 유방 등과 싸울 때도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에는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항우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형산왕 오예도 영포의 반란으로 영포의 가족들이 연좌되어 죽을 때 영포에게 시집보낸 오예의 딸도 죽었고 오예 자신도 항우에게 형산왕 영지를 박탈당하자 영포를 따라 유방에게 귀순해버린다.[3]

천자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략함으로써 초한전쟁의 막이 올랐다.[3]

3. 2. 진나라(관중) 지역

진나라가 전국시대에 다스리던 관중지역은 전 중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지역으로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지역이다. 이때문에 후대의 여러 군벌들은 물론 당시 유방과 심지어 항우 본인까지도 노리던 지역이었는데 유방과 내분을 벌이고 암살까지 시도하면서 노리던 관중지역을 갑자기 항우는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팽성으로 가버린다. 당연히 항우의 참모들은 관중의 중요성을 설득하면서 항우가 관중을 차지할 것을 권유했지만 항우는 고향땅에 가서 자랑해야한다는 시시한 이유를 들며(금의환양/衣錦還鄉중국어, 초인목후이관/沐猴而冠중국어) 초의제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서초지역으로 돌아가버린다. 여기에는 항우가 저질렀던 신안과 함양 등 관중에서 저지른 학살과 함양에서 저지른 약탈과 도굴 진왕 영자영의 처형 등으로 관중주민들의 반감을 사 관중지역을 통제할 수 없었을거라는 추측도 있다.[3]
패공 유방은 가장 먼저 진나라 본토에 들어가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3세황제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따라서 유방이 실질적으로 옛 진나라 지역을 다스릴 제후왕으로 적합한 인물이었고 명분적으로도 초회왕이 과거에 함양을 점령하면 관중의 왕으로 임명한다고 했으며 초희왕은 항우가 분봉할 때도 유방을 관중의 왕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항우는 자신의 숙적인 유방이 관중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으며 항우는 유방을 견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우선 초희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유방의 봉지로 관중에서 극히 일부지역 거기에 최악의 격오지로 손꼽혀 정치범 흉악범들을 유배보내던 파촉지역을 봉지로 내려준 뒤 거록대전 이후 항복했던 진나라의 항장인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고 이 삼진의 왕들에게 유방을 감시 견재하도록 지시한다. 거기에 더불어 유방의 10만 군대를 해산시켜 3만명만 대리고 갈 수 있게 하는 등 항우는 유방을 견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항우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우선 자기 숙부이지 유방의 사돈이었던 항백의 설득에 파촉에서 관중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한중땅을 넘겨주었고 거기에 관중 주민들은 진나라에 학살등 악행을 저지른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매우 싫어했으며 무엇보다 삼진의 왕들은 부하들이 전부 신안대학살에서 죽어 관중과 유방을 통제할 군대자체가 없었다. 결국 함양에서 해산하고 영지로 들어간지 4달만에 한왕 유방은 한중에서 다시나와서 관중을 공격했고 삼진의 왕들은 속수무책으로 패배하다가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는 유방에게 항복한다. 옹왕 장한은 수도 패구에 들어가서 농성하지만 관중의 주민들은 항우가 신안과 함양 등지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도굴에 항우와 삼진왕들을 증오하고 있었고 반대로 유방은 관중에서 보여준 온건한 태도와 영자영에 대한 관용, 진나라 악법의 폐지 등으로 관중주민들의 민심을 샀으며 특히 항우에게 저항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장한이 관중 중심부에서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 대전으로 유방이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은 큰 동요없이 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한다.[3]

3. 2. 1. 삼진 분할과 유방 견제

항우는 진나라가 다스리던 관중 지역을 셋으로 나누어 통제하기 어려운 지역 기반을 만들었다. 이 지역은 진나라의 통일 기반이 된, 중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곳이었다. 유방과 항우 모두 이 지역을 원했지만, 항우는 고향 자랑을 이유로(금의환양/衣錦還鄉중국어, 초인목후이관/沐猴而冠중국어)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으로 가버렸다.[3] 이는 항우가 관중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로 인한 민심 이반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패공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아, 실질적, 명분적으로 옛 진나라 지역을 다스릴 적합한 인물이었다. 초회왕도 유방을 관중의 왕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유방의 봉지를 파촉으로 정하고,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여 유방을 감시, 견제하게 했다. 또한 유방의 군대를 10만에서 3만으로 줄였다. 그러나 항우는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을 유방에게 넘겨주고, 관중 주민들은 항우와 삼진 왕들을 싫어했으며, 삼진 왕들은 군대가 없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유방은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공격했고, 사마흔과 동예는 항복했다. 장한은 1년 넘게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유방을 지지하여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이는 항우의 학살과 약탈에 대한 증오와 유방의 온건한 태도, 진나라 악법 폐지 등에 대한 지지 때문이었다.

3. 2. 2. 관중 민심 이반

항우는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에서 대학살과 약탈, 도굴을 저질렀고, 진왕 영자영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관중 주민들은 항우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3] 이러한 민심 이반은 항우가 관중 지역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반면 유방은 함양 점령 후 영자영에게 관용을 베풀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는 등 온건한 정책을 펼쳤다.[3] 이러한 유방의 민심 수습 노력은 관중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항우에게 저항하는 명분을 제공하여, 장한이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 대전으로 유방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은 유방을 적극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3]

3. 3. 제나라 지역

항우는 제나라 지역을 분봉하면서, 일부러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3] 제나라 지역은 항우의 분봉 직후, 즉각적인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큰 분열이 나타났다.[3]

한왕 유방삼진을 공격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3]

3. 4. 조나라, 위나라, 연나라, 한나라 지역

항우는 제후왕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분봉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봉은 항우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심각한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분봉 몇 개월 만에 옛 제나라 지역을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3]

  • 위나라 지역: 진승·오광의 난 시기에 전국시대 위나라 왕족이었던 형 위구가 위나라를 재건했고, 위구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위표가 왕위를 이었다. 위표는 항우의 군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항우는 분봉 과정에서 위나라의 양나라 땅을 자신의 서초에 합병시키고 남은 위나라 땅마저 반으로 나누어 사마앙을 은나라 왕으로 임명하고,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넘겨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위표는 1년 뒤 한왕 유방이 항우를 공격하기 위해 동진할 때 싸우지도 않고 바로 항복하여 유방 편에 투항했다.[3]
  • 조나라, 연나라 지역: (주어진 source에 해당 내용 없음)
  • 한나라 지역: 항우는 한나라 왕 한성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지만, 영지로 부임시키지 않고 사실상 억류했다. 팽성에서 왕작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한 한성의 조카 (한)신과 장량을 포함한 한나라 세력들은 이로 인해 완전히 유방 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3]


천자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략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3]

4. 분봉의 결과와 초한전쟁

항우는 모든 제후왕을 통제하기 어려웠기에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분봉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분봉 몇 개월 만에 옛 제나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3]

항우의 분봉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초나라 지역에서는 항우와 의제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항우는 의제를 명목상의 직책인 초의제로 추대하고 벽지로 추방한 뒤,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하여 살해했다. 이는 항우 세력에게는 내부 결속력 상실을, 반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또한, 영포오예를 제외한 항우의 부하들은 영지를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고, 의제 살해는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구강왕 영포는 팽성대전 직후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고, 형산왕 오예 역시 영포의 반란으로 딸이 죽고 영지를 박탈당하자 유방에게 귀순했다.

진나라 지역(관중)은 전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나, 항우는 금의환양, 초인목후이관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기며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중을 포기했다. 패공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고 파촉 지역으로 유방을 유배보냈다. 그러나 항우는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 땅을 유방에게 넘겨주었고, 관중 주민들은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증오했으며, 삼진의 왕들은 군대가 없어 관중과 유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유방은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공격했고, 사마흔동예는 항복했다. 장한은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위나라 지역에서는 위표가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고 유방에게 투항했다. 항우는 위표의 영지를 축소하고 사마앙을 은왕으로 임명했으나, 위표는 유방에게 투항하여 항우에게 등을 돌렸다.

한나라 지역에서는 항우가 한성을 억류하고 살해한 뒤,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한신과 장량 등 한나라 세력이 유방 측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제후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의제와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동시에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격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3]

4. 1. 제후들의 반란과 유방의 세력 확장

항우는 모든 제후왕을 통제하기 어려웠기에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분봉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분봉 몇 개월 만에 옛 제나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3]

항우의 분봉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초나라 지역에서는 항우와 의제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항우는 의제를 명목상의 직책인 초의제로 추대하고 벽지로 추방한 뒤,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하여 살해했다.[3] 이는 항우 세력에게는 내부 결속력 상실을, 반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또한, 영포오예를 제외한 항우의 부하들은 영지를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고, 의제 살해는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구강왕 영포는 팽성대전 직후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고, 형산왕 오예 역시 영포의 반란으로 딸이 죽고 영지를 박탈당하자 유방에게 귀순했다.

진나라 지역(관중)은 전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나, 항우는 금의환양, 초인목후이관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기며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중을 포기했다.[3] 패공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고 파촉 지역으로 유방을 유배보냈다. 그러나 항우는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 땅을 유방에게 넘겨주었고, 관중 주민들은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증오했으며, 삼진의 왕들은 군대가 없어 관중과 유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유방은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공격했고, 사마흔동예는 항복했다. 장한은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위나라 지역에서는 위표가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고 유방에게 투항했다.[3] 항우는 위표의 영지를 축소하고 사마앙을 은왕으로 임명했으나, 위표는 유방에게 투항하여 항우에게 등을 돌렸다.

한나라 지역에서는 항우가 한성을 억류하고 살해한 뒤,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3] 이는 한신과 장량 등 한나라 세력이 유방 측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제후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의제와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동시에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격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3]

4. 2. 항우의 패배와 한나라의 승리

항우는 18제후왕을 분봉하면서 의도적으로 제후 왕국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봉은 오히려 항우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대규모 반란을 초래했다.[3] 항우의 분봉 직후, 옛 제나라 지역에서 즉각적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는 초한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3]

항우의 분봉 정책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 초나라 지역: 항우는 초 의제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항우는 과거 학살 사건으로 의제와 갈등을 빚었고, 거록대전 직전에는 의제가 임명한 사령관 송의를 살해했다. 함양 입성 후에는 의제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후왕들을 임명하여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항우는 의제가 다스리던 수도 팽성을 차지하기 위해 의제를 명목상 직책인 '의제'로 추방하고, 자신의 서초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영포, 오예, 공오를 시켜 의제를 살해했다.[3] 의제의 죽음은 항우 세력에게는 내부 결속의 상실을, 반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항우의 부하들 중 영포와 오예만이 제후왕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영지를 받지 못한 다른 부하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의제 살해까지 겹치면서 부하들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의제 살해에 가담한 영포와 오예의 불신이 깊어져, 구강왕 영포는 항우가 전영, 유방 등과 싸울 때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형산왕 오예 또한 영포의 반란으로 딸이 죽고 영지를 박탈당하자 유방에게 귀순했다.[3]
  • 진나라(관중) 지역: 관중은 전국에서 가장 경제력이 발달한 지역으로, 진나라 통일의 기반이었다. 유방과 항우 모두 이 지역을 원했지만, 항우는 쉽게 포기하고 팽성으로 돌아갔다. 항우의 참모들은 관중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 자랑하고 싶다는 이유로('금의환양', '초인목후이관' 고사성어) 의제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서초 지역으로 돌아갔다. 항우가 관중에서 저지른 학살, 약탈, 도굴, 진왕 영자영 처형 등으로 관중 주민들의 반감을 사 통제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3]

패공 유방은 가장 먼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유방은 실질적으로 옛 진나라 지역을 다스릴 적합한 인물이었고, 초회왕도 함양 점령 시 관중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 지역을 봉지로 주고, 장한,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왕, 새왕, 적왕으로 임명하여 유방을 감시하게 했다. 유방의 군대를 10만에서 3만으로 줄이는 등 견제했지만,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 땅을 넘겨주고, 관중 주민들이 항우와 삼진 왕들을 싫어했으며, 삼진 왕들은 신안대학살로 군대가 없어 통제력이 부족했다. 결국 유방은 관중을 공격했고, 삼진 왕들은 패배했다.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는 항복했고, 옹왕 장한은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항우의 학살과 약탈을 증오하고 유방의 온건한 태도와 진나라 악법 폐지 등을 지지하여 유방을 도왔다. 장한이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대전으로 유방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은 유방을 지지하며 군대를 지원했다.[3]

  • 위나라 지역: 항우는 위표가 다스리던 위나라의 양나라 땅을 자신의 서초에 합병시키고, 남은 위나라 땅을 반으로 나눠 사마앙에게 은나라 왕으로 임명하고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주었다. 위표는 불만을 품고 1년 뒤 유방이 동진할 때 항복하여 유방 편에 섰다.[3]
  • 한나라 지역: 항우는 한나라 왕 한성을 억류하고 팽성에서 살해한 뒤, 부하 장수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에 한나라 세력들은 유방 측으로 돌아섰다.[3]


이처럼, 천자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이 파촉에서 나와 삼진을 공략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3]

5. 역사적 평가와 교훈

항우는 모든 제후왕을 통제하기 어려워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분봉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더 큰 분열을 초래했고, 결국 분봉 몇 개월 만에 옛 제나라 지역을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3]

항우의 분봉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분열로 이어졌다.


  • 초나라 지역: 항우는 초회왕 미심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과거 학살 문제와 거록대전 직전 사령관 송의 살해, 함양 입성 후 초회왕의 지시 무시 등으로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항우는 초의제를 명목상 직책으로 추방하고 수도 팽성을 차지했으며, 이후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해 의제를 살해했다. 이는 항우 세력에게는 내부 결속 상실을, 적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항우의 부하 중 영포오예만 제후왕에 임명되어 부하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의제 살해는 부하들의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구강왕 영포항우전영, 유방 등과 싸울 때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형산왕 오예영포의 반란으로 가족이 연좌되어 죽고 영지를 박탈당하자 영포를 따라 유방에게 귀순했다.
  • 진나라(관중) 지역: 진나라관중 지역은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유방항우 모두 노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갑자기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으로 가버렸다. 참모들은 관중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항우는 고향 자랑을 이유로 의제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무리수를 두며 서초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는 항우신안, 함양 등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등으로 관중 주민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패공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아 실질적인 통치자로 적합했고, 초회왕의 약속과 지시도 있었지만, 항우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 지역을 봉지로 내리고, 장한, 사마흔, 동예를 왕으로 임명해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 땅을 넘겨주고, 관중 주민들은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싫어했으며, 삼진의 왕들은 군대가 없었다. 결국 유방관중을 공격했고, 사마흔동예는 항복했다. 장한은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유방을 지지했고, 장한이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대전으로 유방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 위나라 지역: 항우위표가 다스리던 위나라의 양나라 땅을 서초에 합병시키고, 남은 위나라 땅을 사마앙에게 주어 은나라 왕으로 임명하고,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넘겨주었다. 위표는 이에 불만을 품고 유방 편에 투항했다.
  • 한나라 지역: 항우는 한성을 억류하고 살해한 뒤,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에 장량 등 한나라 세력들은 유방 측으로 돌아섰다.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삼진을 공략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항우는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진나라 지역(관중)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도굴, 영자영 처형 등으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3] 의제를 살해한 사건은 항우 세력의 내부 결속을 약화시키고, 적대 세력에게는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3] 이러한 항우의 행보는 결국 민심 이반으로 이어져, 초한전쟁에서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항우의 몰락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은 오래 유지될 수 없으며,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만 민심을 얻고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5. 1. 권력 분배의 중요성

항우는 모든 제후왕을 통제하기 어려워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분봉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더 큰 분열을 초래했고, 결국 분봉 몇 개월 만에 옛 제나라 지역을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났다.[3]

항우의 분봉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분열로 이어졌다.

  • 초나라 지역: 항우는 초회왕 미심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과거 학살 문제와 거록대전 직전 사령관 송의 살해, 함양 입성 후 초회왕의 지시 무시 등으로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항우는 초의제를 명목상 직책으로 추방하고 수도 팽성을 차지했으며, 이후 영포, 오예, 공오에게 지시해 의제를 살해했다. 이는 항우 세력에게는 내부 결속 상실을, 적대 세력에게는 천자 살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 항우의 부하 중 영포오예만 제후왕에 임명되어 부하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의제 살해는 부하들의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구강왕 영포항우전영, 유방 등과 싸울 때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팽성대전 직후 유방의 회유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형산왕 오예영포의 반란으로 가족이 연좌되어 죽고 영지를 박탈당하자 영포를 따라 유방에게 귀순했다.
  • 진나라(관중) 지역: 진나라관중 지역은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유방항우 모두 노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갑자기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으로 가버렸다. 참모들은 관중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항우는 고향 자랑을 이유로 의제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무리수를 두며 서초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는 항우신안, 함양 등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등으로 관중 주민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패공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영자영의 항복을 받아 실질적인 통치자로 적합했고, 초회왕의 약속과 지시도 있었지만, 항우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 지역을 봉지로 내리고, 장한, 사마흔, 동예를 왕으로 임명해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 땅을 넘겨주고, 관중 주민들은 항우와 삼진의 왕들을 싫어했으며, 삼진의 왕들은 군대가 없었다. 결국 유방관중을 공격했고, 사마흔동예는 항복했다. 장한은 농성했지만, 관중 주민들은 유방을 지지했고, 장한이 1년 넘게 농성하고 팽성대전으로 유방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관중유방을 지지하며 한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 위나라 지역: 항우위표가 다스리던 위나라의 양나라 땅을 서초에 합병시키고, 남은 위나라 땅을 사마앙에게 주어 은나라 왕으로 임명하고, 위표에게는 서위 지역만 넘겨주었다. 위표는 이에 불만을 품고 유방 편에 투항했다.
  • 한나라 지역: 항우는 한성을 억류하고 살해한 뒤,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에 장량 등 한나라 세력들은 유방 측으로 돌아섰다.


의제와 한왕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삼진을 공략하면서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5. 2. 민심의 중요성

항우는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진나라 지역(관중)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 도굴, 영자영 처형 등으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3] 의제를 살해한 사건은 항우 세력의 내부 결속을 약화시키고, 적대 세력에게는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3] 이러한 항우의 행보는 결국 민심 이반으로 이어져, 초한전쟁에서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항우의 몰락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은 오래 유지될 수 없으며,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만 민심을 얻고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서적 中华五千年大事记 台南大孚书局 1982
[2] 문서 흔히 상산(常山)이라 하는 것은 한문제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다.
[3] 저널 項羽의 18諸侯王 分封의 性格에 관하여 19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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