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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애리조나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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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SS 애리조나 (BB-39)는 1914년 기공되어 1916년 취역한 펜실베이니아급 전함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대서양 및 태평양에서의 활동을 거쳤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현대화 개수를 통해 성능을 향상시켰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했다. 공격으로 1,177명의 승무원이 사망했으며, 현재 잔해는 진주만에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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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애리조나 (1915년)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1920년대의 애리조나
1920년대의 애리조나
함명애리조나
명명 유래애리조나주
건조브루클린 해군 공창
함종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건조 정보
발주1913년 3월 4일
기공1914년 3월 16일
진수1915년 6월 19일
취역1916년 10월 17일
최후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에서 침몰
제적1942년 12월 1일
현재 상태애리조나 기념관으로 보존
제원 (건조 시)
기준 배수량29,158 톤
전체 길이608 피트 ()
전폭97 피트 ()
흘수29 피트 3 인치 () (만재 시)
동력바브콕 앤 윌콕스 보일러 12기
추진4축
4 x 증기 터빈
항속 거리/10 노트
승무원1,087명 (1931년: 1,358명)
무장
주포4기
부포22기
대공포4기
어뢰 발사관21인치 단장 어뢰 발사관 2기
장갑
현측 장갑13.5-8 인치 (343-203 mm)
격벽13-8 인치 (330-203 mm)
사령탑16-14 인치 (406-356 mm)
기타
식별 부호함번: BB-39
비고진주만 공격 시 1,514명 승선, 생존자 337명

2. 건조 및 취역

이스턴 강에서 바라본 ''애리조나'' (1916년)


1913년 3월 4일, 미국 의회는 펜실베이니아급 전함의 두 번째 함선 건조를 승인했다. 선체 번호 BB-39로 지정된 이 전함은 1914년 3월 16일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기공식을 가졌으며, 당시 해군 차관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참석했다.[10] 건조자들은 기공부터 진수까지 10개월 만에 완료하여 세계 기록을 세우려 했으나,[11] 실제로는 약 15개월이 걸렸다.[13]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 함선을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에서 세계 최대이자 가장 강력한 초드레드노트"라고 묘사했다.[12]

1915년 6월 19일, ''애리조나''는 진수되었다. 미국 해군 장관 조세퍼스 대니얼스는 당시 연방에 가장 최근 편입된 애리조나주를 기리기 위해 함선명을 '애리조나'로 명명했다.[14] ''뉴욕 타임스''는 진수식에 존 퍼로이 미첼 뉴욕 시장, 조지 W. P. 헌트 애리조나 주지사 등 고위 군 관계자를 포함하여 약 75,000명이 참석했다고 추정했다.[16] 진수식 당시 인근에는 USS 플로리다, USS 유타, USS 와이오밍, USS 아칸소, USS 뉴욕, USS 텍사스를 포함한 다수의 신형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이 정박해 있었다.[16] 애리조나주 프레스콧 출신 W. W. 로스의 딸, 에스터 로스가 함선 후원자이자 명명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16][15] 최근 애리조나 주에서 통과된 금주법을 기념하여, 주지사는 진수식에서 오하이오산 스파클링 와인 한 병과 루즈벨트 댐에서 가져온 물 한 병, 이렇게 두 병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6] 진수 후 ''애리조나''는 장비 장착을 위해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로 예인되었다.[16]

''애리조나''는 1916년 10월 17일 취역했으며, 초대 함장은 존 D. 맥도널드 대령이 맡았다.[17]

2. 1. 함선 제원

''펜실베이니아''급 전함은 이전 함급인 네바다급 전함보다 훨씬 컸다. ''애리조나''는 전체 길이 약 185.32m, 폭 약 29.57m (수선 기준), 흘수 약 8.84m를 가졌다. 이는 이전 함선보다 약 7.62m 더 길었다. 기준 배수량은 약 29625898.43kg이고, 만재 배수량은 약 32429172.10kg로 이전 함선들보다 약 4064188.00kg 이상 더 많았다. 이 배의 메타센터 높이는 만재 시 약 2.38m였다.[1] 건조 당시 승무원은 장교 56명과 사병 1,031명이었다.[9]

1915년 6월 19일, 진수 중인 ''애리조나''


이 함선은 4개의 파슨스 증기 터빈 세트를 장착했으며, 각 터빈은 12개의 Babcock & Wilcox 보일러에서 공급되는 증기를 사용하여 직렬 구동 방식으로 프로펠러를 구동했다. 프로펠러의 직경은 약 3.66m였다.[2] 이 터빈은 총 34,000shp의 출력을 내도록 설계되었지만, ''애리조나''의 해상 시운전 동안에는 33,376shp만 달성하여 설계 속도인 21kn을 기록했다.[3] 그러나 1924년 9월에 실시된 전속력 시험에서는 21.5kn에 도달했다.[4] 이 함선은 선체가 깨끗한 상태에서 12kn의 속도로 8000nmi를 항해할 수 있는 충분한 연료유를 탑재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4개의 300kW 터보 발전기를 갖추고 있었다.[1]

''애리조나''는 45구경의 14인치 포 12문을 3연장 포탑 4기에 탑재했다.[1] 포탑은 앞에서 뒤로 I번부터 IV번까지 번호가 매겨졌다.[5] 어뢰정에 대한 방어를 위해 함선 측면에 개별적으로 장착된 51구경 약 12.70cm 포 22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 포들은 배치된 위치 때문에 파도에 취약했고, 심한 파도 속에서는 운용하기 어려웠다.[6] 이 배는 대공 방어를 위해 50구경 약 7.62cm 포 4문을 장착할 예정이었으나, 완공 시점에는 2문만 설치되었다. 나머지 2문은 이후 포탑 III번 위에 추가되었다.[7] ''애리조나''는 또한 수중에 약 53.34cm 어뢰 발사관 2문을 탑재했으며, 각 측면에 하나씩 있었고, 총 24발의 어뢰를 실었다.[1]

''펜실베이니아''급의 설계는 ''네바다''급에서 시작된 올 오어 낫싱 원칙을 따랐다. 이는 함선의 가장 중요한 구역만 집중적으로 장갑을 두르는 방식이다. 크루프 강철로 만들어진 수선 장갑 벨트의 두께는 약 34.29cm였고, 함선의 기관 구역과 탄약고만 덮었다. 장갑 벨트의 총 높이는 약 5.33m였으며, 이 중 약 2.68m가 수선 아래에 있었다. 수선에서 약 0.70m 아래 지점부터 벨트는 최소 두께 약 20.32cm로 좁아졌다.[1] 함선 양 끝의 횡 격벽 두께는 약 33.02cm에서 약 20.32cm 사이였다. 포탑 전면은 약 45.72cm 두께였고, 측면은 약 22.86cm에서 약 25.40cm 두께였으며, 포탑 지붕은 약 12.70c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다. 바벳의 장갑 두께는 약 45.72cm에서 약 11.43cm 사이였다. 함교는 약 40.64c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되었고, 지붕은 약 20.32cm 두께였다.[9]

주 갑판은 3장의 강철판으로 구성되어 총 두께가 약 7.62cm였으며, 조타 장치 위의 장갑은 2장의 판으로 약 15.88cm로 증가했다. 그 아래에는 두께가 약 3.81cm에서 약 5.08cm 사이인 파편 갑판이 있었다.[8] 보일러 배기구는 두께가 약 22.86cm에서 약 38.10cm인 원뿔형 만텔로 보호되었다.[9] 약 7.62cm 두께의 어뢰 격벽은 함선 측면에서 약 2.90m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함선에는 완전한 이중 선저가 적용되었다. 1914년 중반에 실시된 시험 결과, 이 방어 시스템은 약 136.08kg의 TNT 폭발을 견딜 수 있음이 밝혀졌다.[8]

3. 제1차 세계 대전

뉴욕 해군 사열에서 열 척의 전함을 이끌고 지나가는 ''애리조나''와 해군 장관 조세푸스 다니엘스


''애리조나''는 1917년 4월 3일 조선소를 떠났고,[20] 사흘 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요크강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전함 제8사단에 배정된[20][21] ''애리조나''는 주로 대서양을 건너는 무장 상선 선원들을 위한 사격 훈련선으로 활용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함선에 장착된 5인치 포 중 8문(가장 앞쪽 4문과 가장 뒤쪽 4문)은 상선 무장을 위해 제거되었다. 항해 중 이전에 USS 텍사스였던 ''샌 마르코스''의 잔해 근처를 지날 때는 이 잔해를 14인치 포의 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잠수함 위협 때문에 ''애리조나''가 단독으로 바다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고, 출항 시에는 다른 전함 및 호위함들과 함께 이동했다. 미국은 석탄을 사용하는 전함 4척을 1917년 12월 전함 제9사단으로 편성하여 대서양 건너 영국으로 보냈는데, 이는 영국에서 석탄을 구하기가 석유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리조나''는 이 파견 함대에 포함되지 않았다. ''애리조나'' 승무원들의 생활이 훈련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1918년 7월, ''애리조나''의 보트 경주 팀은 USS 네바다 팀과의 약 4.83km 코스 경기에서 세 배 길이 차이로 승리하며 바텐버그 컵을 차지했다.[22]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투가 끝났다. 일주일 후인 11월 18일, ''애리조나''는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고, 11월 30일에 도착했다.[20] 영국 도싯의 포틀랜드 항구에서 2주간 머무른 후, 프랑스로 항해했다.[23] 1918년 12월 13일, ''애리조나''는 프랑스 브레스트에 도착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탑승한 여객선 SS 조지 워싱턴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9척의 다른 전함과 28척의 구축함이 함께했다.[24] 다음 날, 10척의 전함은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고,[25] 2주가 채 걸리지 않아 12월 26일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에서는 조세푸스 다니엘스 해군 장관이 주관하는 퍼레이드, 축하 행사, 그리고 전체 해군 사열이 열렸다. ''애리조나''는 함대 선두에서 다니엘스 장관에게 19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최근 귀환한 다른 많은 함선들과 함께 ''애리조나''는 이후 몇 주 동안 뉴욕시 근처에 정박하며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26]

4. 전간기

1921년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애리조나''


''애리조나''는 1919년 1월 22일 뉴욕을 떠나 햄프턴 로드를 거쳐 2월 8일 관타나모 만에 도착했다.[20] 카리브해에서는 주로 전투 및 함대 기동 훈련을 실시했으며, 트리니다드포트오브스페인을 방문하기도 했다. 4월에는 2년 연속으로 Battenberg Cup 조정 대회에서 우승했으나, 윌슨 대통령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린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다시 호송하려던 계획은 변경되었다. 대신 ''애리조나''는 파리 강화 조약에서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를 그리스에 할양하기로 한 결정에 따른 그리스와 이탈리아 간의 긴장에 대응하여 터키의 스미르나로 급파되었다.[27]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각각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요 군함(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와 두일리오)을 현지에 배치한 상태였다. ''애리조나''가 도착한 직후 그리스 지상군이 수송선을 타고 도착하여 항구에 상륙(스미르나 상륙)했고, 이로 인해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당시 스미르나에 있던 많은 미국 시민들은 ''애리조나''에 탑승하여 피난처를 찾았다.[28]

위기가 진정되자 ''애리조나''는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6월 15일 미국으로 귀환길에 올랐다. 6월 30일 뉴욕 해군 기지에 입항하여 정비를 받으며 5인치 포 6문을 제거하고 사격 통제 시스템을 현대화했다. 이 작업은 1920년 1월에 완료되었고, 이후 ''애리조나''는 승무원 훈련을 위해 다시 관타나모 만으로 항해했다. 이 기간 동안 ''애리조나''에는 1919년 3월 ''텍사스''에 설치된 것과 유사한 항공기 이륙 플랫폼이 장착되었다. 4월에는 Battenberg Cup을 ''네바다''에게 내주었으며, 6월에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8월에는 전함 제7사단의 기함이 되었다.[29]

1924년의 ''애리조나''와 선박 보충대


1921년 1월, ''애리조나''는 6척의 전함과 18척의 구축함과 함께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되었다. 태평양 함대와 합류한 후 페루로 이동하여 일주일간 머물렀으며, 이후 두 함대는 합동 전투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뉴욕에서 잠시 정비를 받은 후, 제후 V. 체이스 함장의 지휘 아래 다시 페루로 돌아갔고, 이후 1940년까지 새로운 모항이 된 로스앤젤레스의 샌페드로에서 주로 활동했다.[20][30]

192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애리조나''의 활동은 대부분 일상적인 훈련으로 이루어졌다. 해군 역사가 폴 스틸웰은 이 시기를 "태평양 시대는 매우 비슷하고 반복되는 경향이 많았다"고 평가했으며, 함선의 이동 기록에는 "어뢰 방어 훈련", "전투 훈련 리허설", "사격 연습"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31] 이 시기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1923년부터 시작된 연례 함대 훈련(Fleet Problem)이었다. 이 훈련은 대부분의 현역 함대가 참가하여 대규모 함대 작전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초기 훈련에서는 서쪽에서 파나마 운하를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했고, 1925년 훈련에서는 하와이 제도를 방어하는 시나리오를 연습했다. 이 외에도 카리브해, 중앙 아메리카 근해, 서인도 제도, 하와이 등지에서 함대 훈련이 실시되었다. 1923년 7월 27일, 존 러셀 영 블레이클리 함장의 지휘 아래 시애틀에서 열린 워런 G. 하딩 대통령 주관 해군 검토에 참여했다. 하딩 대통령은 이 행사가 있은 지 불과 일주일 후에 사망했고, ''애리조나''는 8월 3일 태평양 함대와 함께 그의 명복을 비는 예포를 발사했다.[20]

1924년 3월 초, 매들린 블레어라는 여성이 ''애리조나''에 몰래 승선하여 파나마발보아에 도착할 때까지 약 한 달간 숨어 지내다가 4월 12일에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는 뉴욕으로 송환되었고, 당시 함장이었던 퍼시 올름스테드는 함선이 브레머턴 해군 기지에서 정비를 받는 동안 이 사건에 연루된 23명의 수병에 대한 군사재판을 소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했다. 전투 함대 사령관이었던 헨리 A. 와일리 제독은 당시 함선의 모든 장교에게 견책 서한을 발부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제독이자 해군 작전사령관이 되는 알레이 버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소위였던 버크가 속한 분대를 지휘했던 윌리엄 V. 프랫 제독은 이 처벌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으며, 1930년 해군 작전사령관이 된 후 해당 장교들의 기록에서 견책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32]

4. 1. 현대화 개수 (1929-1931)

1930년 6월 노퍽 해군 조선소에서 현대화 작업을 받는 ''애리조나''함


1929년 1월 함대 훈련 IX 이후 4개월 만인 1929년 5월, ''애리조나''함은 노퍽 해군 조선소에서 현대화 개수를 시작했다.[20]

주요 개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마스트 및 사격 통제 장치: 기존의 쌍곡면 구조 케이지 마스트 대신 주포 및 부포의 3단 사격 통제 장치가 장착된 새로운 삼각 마스트가 설치되었다.[20]
  • 함포: 5인치 부포는 12문으로 줄여 한 층 더 높은 곳으로 재배치되었고, 기존 3인치 포를 대체하여 8문의 25구경 5인치 대공포가 새로 장착되었다.[2] 주포 포탑은 포의 최대 고각을 30°로 높이도록 개조되었다.[35]
  • 방어력 강화: 갑판 장갑은 약 4.45cm 두께의 특수 처리 강철을 추가하여 보강되었고,[33] 어뢰 방어를 위해 방뢰 벌지가 장착되었다. 보일러실 측면에도 추가적인 격벽이 설치되었다.[34]
  • 어뢰 발사관 제거: 변화된 해전 양상과 증가된 교전 거리를 고려하여 활용도가 낮아진 수중 어뢰 발사관 2기는 제거되었다. 이를 통해 해당 공간을 분할하여 침수 시 피해 확산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34]
  • 기관 교체: 기존 고압 터빈은 취소된 전함 워싱턴(BB-47)의 더 강력한 기어 터빈으로 교체되었고, 6개의 신형 보일러가 기존 보일러를 대체했다. 이 개수로 함선의 배수량은 약 38258233.74kg으로 증가했지만, 향상된 기관 출력 덕분에 해상 시험에서 35,081shp의 출력으로 20.7kn의 속도를 기록했다.[35]
  • 기타: 갑판의 압축 공기식 캐터펄트는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교체되었다.[33]


이러한 개조 작업으로 인해 승무원 수는 장교 92명과 사병 1,639명으로 늘어났다.[2]

5. 1930년대 활동

1930년대 현대화 이후의 ''애리조나''


현대화 이후 1931년의 ''애리조나''


1931년 3월 19일, ''애리조나''는 현대화 이후 해상 시험을 마치기도 전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태우고 카리브해에서 짧은 휴가를 보냈다. 대통령은 푸에르토리코와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3월 29일 귀환한 ''애리조나''는 메인주 로클랜드에서 해상 시험을 실시했고, 3번 포탑 상단에 또 다른 항공기 사출기를 장착한 후 8월에 자매함 펜실베이니아와 함께 미국 서부 해안으로 이동했다. 1932년 2월, 함선은 합동 대연습 제4호에 참여했는데, 이 훈련에서는 항공모함의 항공기가 7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했다. 1933년 함대 문제 XIV를 마치고 서부 해안으로 돌아온 후, 3월 10일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근처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 함선은 샌 페드로에 정박해 있었다. 함선의 선원들은 구호 활동에 참여하여 음식물을 제공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며, 약탈자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36]

1934년 초, 이 함선과 승무원은 제임스 캐그니가 주연한 워너 브라더스 영화 ''Here Comes the Navy'' 촬영에 참여했으며, 영화에는 함선의 외부와 내부 모습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7월 26일 이른 아침, ''애리조나''는 케이프 플래터리 근처에서 다른 트롤선에 의해 예인되던 어업용 트롤선 ''우마틸라''(Umatilla)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우마틸라''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사망했고, 해군은 사건 조사를 위해 조사 법정을 소집했다. 법정은 함장인 맥길리브레이 밀른 대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권고했다. 군법회의는 함선이 그 해 미국 동부 해안에서 함대 문제에 참여하는 동안 쿠바의 관타나모 만 해군 기지에서 열렸다. 밀른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함선이 서부 해안으로 돌아온 후 몇 달 뒤 조지 바움 대위로 교체되었다. 그동안 사무엘 W. 브라이언트 소장은 9월 4일 전함 사단 2(Battleship Division Two)의 사령관을 맡았고, ''애리조나''는 그의 기함이 되었다.[37]

조지 T. 페팅길 소장은 1935년 3월 4일 브라이언트를 대신했고, 함선은 두 달 후 함대 문제 XVI에 참여했다. ''애리조나''는 함대 문제 XVII 중 1936년 5월에 파나마발보아를 방문했다. 6월 8일, 조지 A. 알렉산더 대위가 바움을 함장으로 대신했고, 15일 후 클로드 C. 블로흐 소장이 페팅길을 대신했다. 7월 24일 사격 훈련 중, 2번 포탑의 포에서 연소 가스가 포탑 내부로 유입되어 승무원 한 명이 화상을 입었다. 포탄 폭발을 막기 위해 포탑의 살수 시스템이 작동되었지만, 방출된 물이 포탑의 전기 배전반으로 흘러 들어가 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 쉽게 진화되었다. 해군의 제한된 예산으로 인해 함선은 연료 절약 조치로 이 기간의 대부분을 항구에서 보냈다. 회계 연도 1936-37년에 함선은 267일 동안 정박해 있었고, 다음 해에는 255일 동안 항구에 머물렀다. 함선은 이후 남은 기간 동안 서부 해안이나 하와이에서 활동했다.[38]

1939년경 ''애리조나'' 갑판의 아이작 C. 키드 대위


1937년 1월 2일, 존 그린슬레이드 소장은 블로흐로부터 전함 사단 2의 사령관직을 인수했고, 4월 13일 기함을 메릴랜드로 옮겼다. 전함 사단 1(Battleship Division One)의 사령관인 매니 H. 사이먼스 소장은 8월 7일 ''애리조나''로 기함을 옮겼다. 그는 11월 8일 아돌푸스 E. 왓슨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알프레드 윈저 브라운 대위는 12월 11일 알렉산더 함장을 대신했다. 함선은 1938년 4월–5월 하와이에서 함대 문제 XIX에 참여했다. 브라운 대위는 9월 7일 잠을 자던 중 사망했고, 아이작 C. 키드 대위가 1938년 9월 17일 함선의 지휘를 맡았다. 같은 날, 체스터 니미츠 소장이 전함 사단 1의 사령관을 맡았다. 니미츠는 1939년 5월 27일 러셀 윌슨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해롤드 C. 트레인 대위는 1940년 2월 5일 함선의 지휘를 맡았다.[39]

''애리조나''는 1940년 4월–5월 하와이에서 마지막 함대 문제인 함대 문제 XXI에 참가했다. 이 훈련을 마친 후, 미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진주만을 기지로 하여 하와이 해역에 잔류하게 되었다.[40]

6.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당시 ''애리조나''


전방 탄약고 폭발로 ''애리조나''가 침몰하는 기본적인 모습


1941년 12월 7일 오전 8시(현지 시간) 직전, 6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일본 항공기들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애리조나''호에서는 오전 7시 55분경 공습 경보가 울렸고, 곧 전투 배치에 들어갔다. 오전 8시 직후, 일본 해군의 나카지마 B5N2 "Kate" 뇌격기 10대가 41cm 철갑탄을 개조한 797kg 폭탄을 탑재하고 ''애리조나''호를 공격했다.[45]

일본 항공기는 ''애리조나''호에 총 4발의 폭탄을 명중시켰고, 3발은 함선 가까이에 떨어졌다.[47] 좌현 선수 근처에 떨어진 폭탄 때문에 일부에서는 어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조사 결과 어뢰로 인한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마지막 폭탄은 오전 8시 6분, 2번 포탑 근처에 명중했다. 이 폭탄은 장갑 갑판을 관통하여 함선 전방의 탄약고를 유폭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폭탄 명중 약 7초 후, 전방 탄약고가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다. 이 폭발로 전방 포탑과 함교가 약 약 7.62m 에서 약 9.14m 아래로 무너져 내렸고, 돛대와 굴뚝도 앞으로 쓰러지면서 함체는 사실상 두 동강 났다.[49] 폭발로 인한 격렬한 화재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파편은 인근 포드 섬까지 날아갔다. 이 폭발로 인해 당시 함선에 타고 있던 1,512명의 승무원 중 아이작 C. 키드 제독과 함장 프랭클린 밴 발켄버그 대령을 포함한 1,177명이 전사했다. 이는 진주만 공격 전체 사망자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이다.[20]

탄약고 폭발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폭탄이 예포용 흑색 화약 탄약고 근처에서 폭발하여 흑색 화약이 먼저 점화되고, 이어서 주포용 무연 화약 탄약고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51] 다른 하나는 폭탄이 장갑 갑판을 뚫고 주포용 무연 화약 탄약고 내부에서 직접 폭발했다는 것이다.[52] 하지만 폭발로 인해 선체가 심하게 파괴되어 물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느 가설이 맞는지 명확히 밝혀내기는 어렵다.[49][53]

''애리조나''는 공격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심각하여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1942년 12월 1일 공식적으로 해군에서 제적되었다. ''애리조나''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공로로 전투 별장 1개를 받았다.[20]

6. 1. 진주만 공격과 한국의 관점

공습 후 전함 열. 침몰한 애리조나에서는 중유가 유출되었고, 공습 당시 옆에 있던 베스탈과 네바다는 이동했다.


1941년 12월 7일(일본 시간 12월 8일), 일본 해군의 기동 부대에서 발진한 함상기에 의해 진주만 공격이 실행되었다. 당시 태평양 함대의 주력함들은 포드 섬에 두 줄로 나란히 정박해 있었는데, 이는 "전함 열" 등으로 불렸다. 애리조나함은 전함 테네시와 웨스트 버지니아의 뒤, 작업함 베스탈의 우현 측, 전함 네바다의 앞에 위치해 있었다.

이날 애리조나함은 제1전함전대의 기함이었으며, 아이작 C. 키드 소장이 장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오전 7시 55분경 공습 경보가 발령되었고, 함은 즉시 총원 배치되었다. 전함 열의 바깥쪽은 97식 함상 공격기의 어뢰 공격을 받았고, 안쪽 (포드 섬 쪽)의 전함은 97식 함공의 수평 폭격에 노출되었다. 수평 폭격대가 투하한 것은 나가토급 전함의 주포탄을 개조한 99식 80번 5호 폭탄(800kg)이었다. 제1차 공격대의 수평 폭격대는 아카기(15기), 가가(14기), 소류(10기), 히류(10기)의 97식 함공 49기였다.

8시 5분, 800kg 폭탄 1발이 4번 주포탑의 왼쪽 갑판에 명중했다. 옆의 베스탈에도 800kg 폭탄이 명중하여, 2척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8시 6분, 1번 포탑과 2번 포탑 사이의 우현 갑판에 800kg 폭탄 1발이 명중하여, 탄약고가 폭발하여, 함의 앞부분이 대파되었다. 키드 소장과 프랭클린 밴 발켄버그 함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생존자 중 최선임인 사무엘 G. 푸콰 중좌가 총원 퇴거를 명령했다.

애리조나의 폭발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잔해와 파편이 주변 함정과 포드 섬에 다수 쏟아졌다. 애리조나의 좌현 측에 정박해 있던 베스탈에서는 캐신 영 함장을 비롯한 일부 승무원이 폭풍에 의해 바다로 날아가, 헤엄쳐서 베스탈로 돌아왔다. 해당 함은 예인선 호가의 도움을 받아 불타는 애리조나에서 떨어졌지만, 오전 9시 45분에 침몰을 피하기 위해 좌초되었다. 제1차 공습에서 손해가 경미했던 네바다도, 이동하는 과정에서 해중에서 애리조나 승무원 수 명을 구조했다.

후의 전문가들은 폭탄이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대신, 함재기사출기에 사용된 흑색 화약에 먼저 점화되고, 이어서 포탄무연 화약에 유폭되었다고 생각되었다. 1944년의 BUSHIP 보고서에서는 흑색 화약고의 해치가 가연재료와 함께 열린 채로 있었을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애리조나의 수평 장갑은 단 76mm 밖에 되지 않아, 250kg - 500kg 폭탄으로도 쉽게 관통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오늘날에는 수평 폭격으로 투하된 폭탄에 의해 함 전방의 탄약고가 유폭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일본 측의 대본영 발표에서는, 항공 폭격과 함께 동시에 행해진 특수 잠항정 갑표적의 어뢰 공격이 애리조나형 전함의 격침에 관여했다는 논조도 있었으나, 확실한 전과는 없었다.

애리조나에서는 사관, 모두 영웅적인 행동이 다수 보였다. 함의 데미지 컨트롤 담당 사관이었던 푸콰 중좌는 침착하게 화재에 대처하고, 생존자의 구출을 시도하여, 후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함하여 전사한 최초의 미국군장관이 된 아이작 C. 키드소장, 그리고 함교에서 전투 지시를 하고 있던 함장 발켄버그 대령도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75]. 함장을 기념하여, 1척의 플레처급 구축함이 '밴 발켄버그'로 명명되었다.

함 전방의 손상은 심각하여, 수리는 단념되었다. 애리조나의 일부 무장은, 입거 수리 중에 손상된 자매함 펜실베이니아에 전용되어, 재이용되었다.

침몰한 애리조나의 후부 3번, 4번 포탑은 무사했기 때문에, 육상으로 인양되어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관되어, 오아후 섬 요새의 요새포로서 오아후 섬 남서단과 동해안에 설치되었다. 남서단의 포대는 애리조나 포대, 동해안의 포대는 펜실베이니아 포대로 명명되었다. 지하 설치식으로 개조하기 위한 공사는 난항을 겪었고, 완성된 것은 1945년 8월이었으며, 그대로 한 번도 교전하지 않고 1947년부터 1948년에 걸쳐 해체되었다.

7. 전후 처리 및 기념

침몰 후 ''애리조나''의 보이는 상부 구조


''애리조나''는 진주만 공격 이후 탄약고 폭발로 인한 심각한 손상으로 해상 구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1941년 12월 29일 "일반(임시 사용 중지)" 상태로 분류되었고, 1942년 12월 1일 미 해군 선박 등록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적되었다.[60][55]

침몰 후, 인양 가능한 상부 구조는 1942년에 선박 해체되었으며, 주무장은 이후 1년 반에 걸쳐 구조되었다.[56] 후방 주포탑 2기는 제거되어 미국 육군 해안 포병대에 이관되었다. 이 포탑들은 오아후 섬 서해안 카헤 포인트의 '배터리 애리조나'와 모카푸 반도의 '배터리 펜실베이니아'로 재설치될 예정이었으나, 배터리 애리조나는 완공되지 못했고 배터리 펜실베이니아는 1945년 8월 V-J 데이에 훈련 사격을 한 것이 유일한 사용 기록이다.[57] 전방 포탑 2기 중 2번 포탑의 포는 구조되어 정비 후 1944년 가을 ''네바다''에 설치되었고, ''네바다''는 이 포를 사용하여 오키나와이오지마 공격에 참여했다.[58][59]

''애리조나''의 잔해는 제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사한 승무원들을 추모하는 상징으로서 진주만에 남게 되었다. 1950년 3월 7일, 아서 W. 래드퍼드 제독의 지시로 잔해 위에 미국 국기 게양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아이젠하워케네디 행정부를 거치며 잔해 위에 애리조나 기념관 건립이 결정되어 1962년 5월 30일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애리조나''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공로로 1개의 종군 성장을 수여받았다.

7. 1. USS 애리조나 기념관

USS ''애리조나'' 기념관의 항공 사진. 침몰한 선체와 유출되는 기름을 볼 수 있다.


''애리조나''의 잔해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사망한 승무원들을 기리기 위해 진주만에 남아 있다. 1941년 12월 29일 '일반(임시 사용 중지)' 상태가 되었고 1942년 12월 1일 미 해군 선박 등록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적되었으나[60], 그 잔해는 중요한 역사적 상징물로 남아 있다.

1950년 3월 7일, 당시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아치볼드 W. 래드퍼드 제독은 ''애리조나''의 잔해 위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는 행사를 시작했다.[61] 이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침몰한 ''애리조나'' 함체 위에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되었고, 1962년 5월 30일 국립 기념물로 공식 지정되었다.

기념관은 침몰한 선체를 가로지르는 형태로 세워졌으며, 내부에는 진주만 공격 당시 전사한 ''애리조나'' 승무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벽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공격의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애리조나''의 상부 구조와 주포탑 4기 중 3기는 철거되었지만, 포탑 중 하나의 바베트(포탑의 원형 지지 구조물)는 여전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65]

기념관은 국립공원관리청이 관리하지만, 선체 자체의 소유권은 미국 해군이 계속 보유하고 있다.[60] ''애리조나''는 현역으로 정식 취역한 해군 군함처럼 미국 국기를 영구적으로 게양할 권리를 유지한다.[65]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애리조나''는 USS 컨스티튜션처럼 영구적으로 현역 상태인 것은 아니다.[65])

이 국가 기념물은 1966년 10월 15일 국립 사적지 목록에 행정적으로 등재되었으며, 함선 자체는 1989년 5월 5일 국가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62]

침몰 이후 ''애리조나''의 선체에서는 계속해서 기름이 유출되고 있으며, 하루에 약 2.3qt의 기름이 계속해서 항구로 흘러나오고 있다.[66] 이는 종종 '애리조나의 눈물(Tears of the Arizona)'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4년, 미 해군과 국립공원관리청은 전쟁 묘지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선체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컴퓨터 매핑을 실시했으며,[67] 항구의 추가적인 환경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기름 유출을 줄일 수 있는 비침투적인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68]

진주만 공격 당시 생존했던 ''애리조나'' 승무원들은 사망 후 자신의 유해를 함선 내부에 안치하여 전사한 동료들과 함께 잠들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다른 시기에 함선에서 복무했던 참전용사들은 유해를 함선 위 바다에 뿌릴 수 있었다.[63] ''애리조나''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루 콘터는 2024년 4월 1일,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4][77]

해상자위대 함정은 진주만을 통과할 때 ''애리조나'' 기념관에 경례를 표하는 것이 관례이다. 기념관 근처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했던 잠수함 USS 보핀 역시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다.

8. 유산

USS 애리조나의 침몰은 일본 제국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인한 가장 상징적인 비극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 공격은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확전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침몰한 애리조나 함의 선체 위에 세워진 USS 애리조나 기념관은 진주만 공격 당시 함선과 함께 운명을 다한 1,177명의 승조원들을 비롯한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국가적인 성소이다. 이곳은 단순한 추모 시설을 넘어,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애리조나 함과 그곳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전쟁 반대와 평화 추구의 필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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