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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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은 중세 시대 고리치아 백작령에서 기원하여, 1500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편입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 점령과 오스트리아 통치를 거쳐, 1861년 자치권을 획득한 공작 백국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의 참전과 이손초 전투로 황폐화되었으며, 1918년 이탈리아에 병합되어 줄리아 변경주에 편입되었다. 1920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완전히 편입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 하에서 슬로베니아 문화 말살 정책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로 분할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이탈리아 지역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자치 지역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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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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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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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
위치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수도 | 고리치아 |
공용어 |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리울리어 독일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역사 | |
존속 기간 | 1754년 ~ 1919년 |
성립 | 1754년 3월 4일 |
소멸 | 생제르맹 조약 체결 (1919년 9월 10일) |
이전 국가 | 고리치아 백국 그라디스카디손초 |
이후 국가 | 이탈리아 |
정치 | |
정부 형태 | 공국 |
통치자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
주요 통치자 | 프란츠 요제프 1세 (1848년 ~ 1916년) 카를 1세 (1916년 ~ 1918년) |
대표 칭호 | Landeshauptmann (주지사) |
주요 대표 | 프란츠 코로나니 폰 크론베르크 (1870년 ~ 1877년) 루이지 파예르 데 몬리바 (1877년 ~ 1883년) 프란츠 코로나니 폰 크론베르크 (1883년 ~ 1899년) 루이지 파예르 데 몬리바 (1899년 ~ 1913년) |
통계 | |
면적 (1910년) | 2,918 km² |
인구 (1910년) | 260,721명 |
현재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
2. 역사
고리치아 백작의 영지는 1500년 마지막 마이날디너 백작 레온하르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획득되었다. 합스부르크의 종주권은 1508/09년 베네치아인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고리치아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내부 오스트리아 영토에 최종적으로 편입되었다. 1647년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그라디스카를 제국 직속 백작령으로 승격시켜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 공작의 후손들에게 부여했다. 에겐베르크 가문이 단절된 후, 그라디스카는 1754년 고리치아와 재통합되어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백국'''을 형성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는 여러 차례 전투의 장이 되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 (1805년)으로 프랑스의 지배가 확립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백국의 서쪽을 상실했다. 퐁텐블로 조약 (1807년)으로 이손초 강 서쪽(우안)의 오스트리아 영토(그라디스카 디손초, 고리치아 서쪽 교외 포함)는 나폴레옹 이탈리아 왕국에 할당되었다.
1809년까지 백국의 나머지 영토는 오스트리아 통치하에 있었으며, 이후 프랑스 제국의 일리리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1813년, 오스트리아 통치가 회복되었다. 백국은 이전 국경 내에서 재건되었으며, 1797년 이전 베네치아 통치하의 몬팔코네와 그라도를 포함했다. 1816년, 백국은 카르니올라, 케른텐 공작령, 트리에스테 제국 자유 도시, 이스트리아 변경백령 및 관련 섬들과 결합되어 일리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1849년, 일리리아 왕국은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 해안 지방이 형성되어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백국,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로 구성되었다. 1861년, 백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치슬라이타니아의 왕령인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공작 백국'''으로 자치권을 획득했다. 백국은 자체적인 지방 의회를 가졌고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지만, 트리에스테의 제국 총독에게 종속되었다.
1915년,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여 참전했다. 백국의 서부 지역은 이손초 전투로 황폐화되었다. 1916년 8월, 고리치아는 이탈리아군에 점령되었지만, 1917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퇴했다. 많은 인구가 민간 수용소에 억류되었고, 백국 영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다.
1918년 봄, 백국에서 두 개의 대중 정치 운동이 등장하여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더 큰 자치를 요구했다. 슬로베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국가와 연합을 요구했고, 프리울리아인들은 서부 지역의 특별 자치를 요구했다. 두 운동은 고리치아 마을을 두고 대립했다. 이탈리아 미회수 지역 운동은 고리치아의 이탈리아 통일을 요구했다. 1918년 10월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체로 임시 기간 동안 어떤 운동도 권위를 확립하지 못했다. 1918년 11월, 백국 영토는 이탈리아 군대에 점령되었고, 이탈리아에 대한 지역 주장에 도전하는 정치 운동은 진압되었다.
이후 1918년 후백국은 폐지되었고, 이탈리아의 중앙 집권 정책으로 파시스트 이탈리아화가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 점령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저항이 있었으며, 전후에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2. 1.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
마이날디너 가문 출신 레온하르트 백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1500년 고리치아 백작 영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획득되었다.[1] 1500년 직후 고리치아는 스타트홀더(사령관) 버질 폰 그라벤이 관리했다.[1] 합스부르크의 종주권은 1508/09년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고리치아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내부 오스트리아 영토에 최종적으로 편입되었다.[1] 1647년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고리치아의 도시 그라디스카를 제국 직속 백작령으로 승격시켜 추밀 고문관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 공작의 후손들에게 부여했다.[1] 에겐베르크 가문이 단절된 후, 1754년 그라디스카는 고리치아와 재통합되어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백국'''(독일어: ''Grafschaft Görz und Gradisca'', 이탈리아어: ''Contea di Gorizia e Gradisca'')을 형성했다.[1]2. 2. 제1차 세계 대전과 이탈리아 병합
1918년 11월,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임시 행정 구역인 줄리아 변경주에 편입되었다. 1920년 라팔로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후백국의 전체 영토는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전의 합스부르크 정책은 지방 자치를 선호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엄격한 중앙 집권 정책을 시행했다. 고리치아 현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이전 후백국에 비해 자치권이 매우 적었다. 새로운 현의 경계도 부분적으로 변경되었다. 새로운 현에는 평화 조약에 의해 이탈리아에 할당된 이전 오스트리아 카르니올라 공국의 일부 지역(이드리야, 비파바, 슈투르예)이 포함되었다. 반면에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백국에 속했던 카르스트 고원 지역의 대부분은 트리에스테 현에 편입되었고, 체르비냐노 델 프릴리 지역은 우디네 현에 포함되었다.1924년, 고리치아 현은 폐지되었고 그 영토는 프리울리 현에 편입되었으며, 수도는 우디네가 되었지만, 몬팔코네 행정 구역과 그라도는 트리에스테 현의 일부가 되었다. 1927년, 고리치아 현은 거의 동일한 영토로 다시 생성되었지만, 체르비냐노 델 프릴리 지역은 우디네 현에 남아 있었고, 몬팔코네와 그라도 지역은 트리에스테 현의 일부로 남았다.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 수립과 함께, 지역의 폭력적인 파시스트 이탈리아화가 시작되었다. 이 정책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모든 공공 행정이 이탈리아화되었고, 슬로베니아어와 독일어는 이전의 공용어 지위를 잃었다. 둘째, 모든 교육(공립 및 사립)이 이탈리아화되었다. 셋째, 공공 장소에서 슬로베니아어와 독일어의 모든 시각적 사용이 금지되었다. 후자에는 마을 이름 변경, 공공 장소에서 이탈리아어 외 다른 언어 사용 금지, 슬라브식 이름의 자녀 이름 금지, 슬로베니아 성씨 강제 변경 등이 포함되었다. 이 정책에는 정치적 박해와 협박이 동반되었다. 1927년까지, 언론, 출판사, 문화 협회, 슬로베니아 단체가 소유한 금융 및 경제 회사 등 모든 슬로베니아 단체가 불법화되었다. 오직 가톨릭 헤르마고라스 협회만이 종교 서적에 한해 슬로베니아어로 서적을 출판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대부분의 슬로베니아 지식인과 소규모 사업가들은 지역을 떠나야 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정착하거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
1927년부터 1943년까지 고리치아 현은 파시스트 정권의 행정 영토 단위였으며, 정부가 임명한 현장관과 지역 파시스트 계층이 통치했다. 모든 지방 자치는 폐지되었고, 현장관이 임명한 ''포데스타''가 선출된 시장을 대체했다. 정권 밖의 모든 합법적인 정치 활동은 불가능해졌고, 슬로베니아 단체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민 사회 기관이 해체되었다.
1927년, TIGR로 알려진 최초의 반파시즘 투쟁 단체가 설립되었다. 지역 슬로베니아인(대부분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 민주주의 성향의 젊은이)이 설립한 이 단체는 이탈리아 군 및 행정 요원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는 지역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여러 슬로베니아 문화 및 정치 인사가 투옥, 추방 또는 살해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이즈 브라투즈였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분단
1941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인접한 류블랴나 현에서 이 지역으로 침투하여 저항군과 이탈리아 군대 간의 여러 중요한 충돌이 발생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휴전 이후, 나치 독일은 이 지역을 점령하여 프리드리히 라이너가 이끄는 아드리아 해 작전 지역에 편입시켰다.[1]
1943년 9월,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이 슬로베니아 공산당이 이끄는 슬로베니아 인민 해방 전선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들은 이 지역에 프라냐 파르티잔 병원을 포함한 여러 중요한 기지를 설립했다. 공산당이 이끄는 저항군과 나치 간의 전투가 빈번했다. 곧 독일 당국은 현지 슬로베니아인에 대해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하여 슬로베니아어의 공공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 또한 슬로베니아 홈 가드라고 불리는 반공 협력 민병대가 이 지역에 일부 부대를 설립하도록 허용되었지만, 지역 주민을 모집하는 데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동시에, 저항 운동 내 공산당 세포에 의해 정치적 동기가 부여된 암살이 수행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로마 가톨릭 사제와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반파시스트가 여러 명 있었다.[1]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거의 모든 지역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서부 지역에서는 철수해야 했다. 유고슬라비아 점령 40일 동안, 수천 명의 이탈리아인이 공산당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대부분은 석방되었지만, 수백 명이 포이베 학살에서 사망했다.[1]
2년 동안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으며, 소위 모건 선으로 분리되었다. 이 선의 서쪽 지역 (전체 소차 계곡, 하부 비파바 계곡 및 대부분의 카르스트 고원 포함)은 영국과 미국 군대가 점령했으며, 동쪽은 유고슬라비아 군사 행정 아래에 남았다. 1947년 9월, 이 지역은 마침내 두 국가 사이에 분할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동부 지역의 대부분의 농촌 지역을 차지했고, 서부 저지대와 고리치아의 도시 중심지는 모두 이탈리아에 남겨졌다. 트리에스테와 두이노 사이의 카르스트 지역의 작은 부분은 연합국이 관리하는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의 A 구역에 편입되었다 (1954년에 이탈리아의 일부가 됨).[1]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는 따라서 통일된 역사적 지역으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대부분의 영토는 고리슈카 지역에 포함되었으며, 카르스트 고원은 리토랄-이너 카르니올라 통계 지역에 편입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 사이에 노바 고리차 ("새로운 고리치아")라는 새로운 도시 중심지가 건설되었다. 이탈리아 지역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 자치 지역의 일부가 되었으며, 대부분 고리치아 현에 포함되었다.[1]
3. 지리
이 지역은 줄리안 알프스의 옐로베츠 산에서 발원하여 몬팔코네 인근의 트리에스테만까지 뻗어 있는 소차 강(이손초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북서쪽으로는 프레딜 고개가 케른텐 공국으로 이어졌으며, 북동쪽으로는 망가르트 산, 라조르 산, 트리글라프 산이 카르니올라 공국(상부 카르니올라)과의 경계를 이루었다.
서쪽으로는 카닌 산과 마타유르 산이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고 1815년부터 오스트리아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에 속했으며, 1866년부터 새롭게 설립된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게 된 프리울리 지역과의 경계를 이루었다. 남쪽으로는 트리에스테 황실 자유시와 이스트라 변경백국 영토와 경계를 이루었다.
4. 민족 구성
인구 조사[2] | 민족 구성 | ||||||
---|---|---|---|---|---|---|---|
연도 | 고리치아-그라디스카의 인구 | 슬로베니아인 | % | 이탈리아인 및 프리울리아인 | % | 독일인 | % |
1818 | 144,008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
1857 | 196,279 | 130,748 | 66.6% | 62,975 | 32.1% | 2,320 | 1.2% |
1890 | 222,000 | 145,000 | 65.3% | 73,000 | 32.9% | 3,000 | 1.4% |
1910 | 260,721 | 154,564 | 59.3% | 90,119 | 34.6% | 4,486 | 1.7% |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군의 면적은 2918km2였으며 인구는 260,721명이었다. 이 중 약 20%가 도시 지역(고리치아, 그라디스카, 몬팔코네, 코르몬스, 체르비냐노, 론키, 그라도)에 거주했고, 약 18%는 반도시 지역(포드고라, 아퀼레이아, 스타란차노, 솔칸, 솀페테르, 두이노, 아이드오프시나, 보베츠, 코바리드, 톨민, 세자나, 카날 오브 소치)에 거주했으며, 약 62%는 농촌 지역에 거주했다. 도시 인구 중 약 21%는 슬로베니아인이었고, 약 8%는 독일인이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이탈리아인이었다. 반도시 인구 중 약 90%는 슬로베니아인이었고 10%는 이탈리아인과 프리울리아인이었으며, 농촌 인구 중 30%는 프리울리아인이었고 약 70%는 슬로베니아인이었다.
5. 문화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은 슬라브족, 게르만족, 라틴족이 함께 거주하며 정부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존중하는 다문화 환경을 누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세네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1]
19세기 후반, 고리치아는 슬로베니아, 프리울리아,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슬로베니아 문화는 1860년대 이후 백국 내 슬로베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독일어를 대체하며 교육 및 행정의 주요 언어로 자리 잡았고, 다른 지역과 달리 슬로베니아 문화에 대한 동화 압력이 없어 크게 번성했다.
19세기 동안 고리치아는 프리울리아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중요하고 활발한 중심지였다. 많은 고서들이 재출판되었고, 새로운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프리울리아 문화를 장려하는 여러 정치 및 문화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우디네 등 다른 도시에서는 프리울리아어가 농민들의 언어로 여겨져 상류층이 베네토어를 사용한 것과 달리, 고리치아에서는 귀족들조차도 일반적으로 프리울리아어를 사용했다.[1]
고리치아는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 문화의 유일한 주요 중심지였다. 17세기부터 이탈리아어는 독일어 다음으로 중요한 문화 언어로 자리 잡았고, 18세기와 19세기 초에는 지역 전체에서 번성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슬로베니아 민족 각성과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이탈리아 왕국 통일로 인해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독일어 사용 공동체는 인구의 작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고리치아 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고등 문화와의 연결성 덕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지역 귀족들은 독일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여러 귀족 가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며 예술과 문학에 기여했다. 또한 독일어는 민족 집단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어 역할을 했다.
1850년대부터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는 중부 유럽 엘리트의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고리치아, 그라도, 아퀼레이아, 두이노, 아우리시나, 모스트나소치와 같은 마을들은 오스트리아 리비에라의 중요한 관광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독일 문화권 인물들이 방문하여 지역 독일 문화에 기여했다.[1]
5. 1. 슬로베니아 문화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은 19세기 후반 슬로베니아 문화의 주요 중심지로 떠올랐다. 1860년대 초, 슬로베니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슬로베니아어가 독일어를 대신하여 교육 및 행정의 주요 언어가 되었다. 슈타이어 공작령, 케른텐 공작령, 카르니올라와는 달리, 고리치아-그라디스카 대부분 지역에서는 슬로베니아 문화에 대한 압력이 없었기 때문에 슬로베니아 문화가 번성할 수 있었다.

1890년대부터 고리치아의 국립 김나지움은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교육 센터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 슬로베니아 예술, 과학 및 정치 분야의 여러 저명한 인물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3년, 김나지움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를 가르치는 언어로 하여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고리치아 김나지움의 슬로베니아어 부서는 슬로베니아어를 주요 교육 언어로 하는 최초의 공립 고등학교가 되었다.
고리치아-그라디스카 백국의 저명한 슬로베니아 문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인물 |
---|---|
시인 | 시몬 그레고르치치, 알로이즈 그라드니크, 요자 로브렌치치 |
작가 | 율리우스 쿠기 |
신학자 | 안톤 마흐니치 |
작곡가 | 스탄코 프렘르 |
역사가 | 시몬 루타르 |
화가 | 요제프 토민츠, 사샤 샨텔 |
건축가 | 막스 파비아니 |
언어학자 | 카렐 슈트레켈 |
문학사학자 | 아우구스트 지곤 |
고리치아-그라디스카 출신의 다른 저명한 슬로베니아인으로는 정치인 카렐 라브리치와 안톤 그레고르치치, 제독 안톤 하우스, 로마 가톨릭 주교 프란치셰크 보르기아 세데지, 경제학자 밀코 브레지갈, 선구적인 조종사 에드바르드 루시얀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이 지역으로 정착한 저명한 슬로베니아인으로는 정치인이자 작가인 헨리크 투마, 역사가 프란츠 코스, 언어학자 스타니슬라프 슈크라베츠, 법학자, 역사가, 정치인 보구밀 보시냐크 등이 있었다.
5. 2. 프리울리아 문화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은 슬라브족, 게르만족, 라틴족이 함께 거주하며 정부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존중하는 다문화 환경을 누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세네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1]프리울리아 문학도 참조
19세기 동안 고리치아는 프리울리아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중요하고 활발한 중심지였다. 19세기 내내 많은 고서들이 재출판되었고, 새로운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프리울리아 문화를 장려하는 여러 정치 및 문화 단체들이 이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우디네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상류층이 프리울리아어가 농민들의 언어로 여겨졌기 때문에 베네토어를 사용한것과 달리, 귀족들조차도 일반적으로 이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 덕분이기도 하다.[1]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백국은 프리울리아어 사용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구 조사가 이루어진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프리울리아어에도 중요했다. 1857년, 공식 오스트리아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백국에는 48,841명의 프리울리아인, 130,748명의 슬로베니아인, 15,134명의 이탈리아인, 2,150명의 독일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에 병합된 직후인 1921년에 실시된 두 번째 인구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1]
19세기 내내 대부분의 교육받은 프리울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문화에 끌렸다. 뚜렷한 프리울리아 정체성이 존재했지만 약했고 잘 표현되지 않았다. 19세기에 고리치아-그라디스카 출신의 가장 저명한 프리울리아 시인 중 한 명인 카를로 파베티는 열렬한 이탈리아 통일주의자이기도 했다. 루이지 파이두티와 같은 보수 지도자이자 정치 작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문화적 틀 내에서 프리울리아 문화의 자율적 발전을 선호했다. 1890년에서 1918년 사이에 자치 운동은 농촌 지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미미했다.[1]
5. 3. 이탈리아 문화
19세기 동안, 고리치아는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 문화의 유일한 주요 중심지였다. 17세기에 이탈리아어는 독일어 다음으로 이 도시의 두 번째 문화 언어가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이탈리아 문화는 이 지역 전체에서 번성했다. 이탈리아어는 많은 귀족 가문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와 독일 부르주아 가문에서도 교육과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니콜로 파카시, 요제프 토민츠, 프란츠 카우치그, 가리발디 장군 이그나치오 프란체스코 스코드니크, 막스 파비아니, 율리우스 쿠기와 같은 여러 유명 예술가들이 주로 이탈리아 문화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19세기 후반에 슬로베니아 민족 각성이 나타나면서 이 지역의 이탈리아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전에 이탈리아 문화 환경에서 자녀를 교육하던 대부분의 가문들이 슬로베니아어로 전환했다. 이탈리아 문화적 영향력이 감소한 또 다른 이유는 1866년 롬바르디아-베네치아가 이탈리아 왕국과 통일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고, 고리치아-그라디스카와 북부 이탈리아 간의 자유로운 문화 교류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어는 이 지역에서 이전의 공용어 지위를 잃었다. 고리치아는 이탈리아 문화의 유일한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이 도시의 이탈리아어 사용 인구 비율은 꾸준히 감소하여 1910년에는 50% 미만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명한 언어학자 그라치아디오 이사야 아스콜리와 철학자 카를로 미켈슈테터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고리치아의 이탈리아어 사용 환경에서 등장했는데, 이들은 모두 유대인 혈통이었다. 작곡가 로돌포 리피저와 화가 이탈리코 브라스, 비토리오 볼라피오 또한 이 공동체 출신이었다. 다른 작은 이탈리아 문화 중심지는 베네치아어 방언이 사용되던 그라도와 몬팔코네였다. 시인 비아조 마린은 이 지역 이탈리아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5. 4. 독일 문화
독일어 사용 공동체는 인구의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주로 고리치아 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시내 중심부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인들이 이 지역에서 독일 문화의 중요성을 증대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독일어는 이 지역 고등 문화의 대다수가 독일 문화권과 연결되어 있던 이전 세기에 얻은 위신을 누렸다. 대부분의 지역 귀족들은 다중 언어 구사자였지만, 서로 독일어를 주로 사용했다. 여러 중요한 귀족 가문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으며, 예술과 문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가문에는 투른 운트 탁시스, 란티에리, 아템스 페첸슈타인, 빈디슈그레츠, 코로니니 크론베르크, 슈트라솔도가 포함되었다. 게다가 독일어는 단일 민족 집단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어'' 역할을 했다. 1913년까지 대부분의 고등 교육은 독일어로만 제공되었다.[1]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의 독일어 사용 공동체의 가장 저명한 인물로는 화학자 요하네스 크리스티안 브루니히와 탐험가이자 자연 과학자 카를 폰 셰르처가 있었다.[1]
1850년대에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는 또한 중부 유럽 엘리트의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고리치아, 그라도, 아퀼레이아, 두이노, 아우리시나, 모스트나소치와 같은 마을들은 오스트리아 리비에라의 중요한 관광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 문화권에 속하는 많은 저명한 인물들이 이 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지역 독일 문화의 생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여기에는 민족지학자이자 언어학자 카를 폰 체르니히, 이 지역을 방문하여 유명한 ''두이노 비가''를 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저명한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포함된다.[1]
6. 종교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의 주민 대다수는 로마 가톨릭교 신자였다. 고리치아는 오스트리아에서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는데, 괴르츠 대주교의 주교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구의 세 법적 후계자 중 하나였다(그 외에 베네치아 총대주교구와 우디네 대교구가 있다). 따라서 고리치아는 류블랴나 대교구, 트리에스테 교구, 포레치-풀라 교구, 크르크 교구를 포함하는 교구의 중심지였다.
야코프 미시아 추기경, 프란치셰크 보르기아 세데지 주교, 신학자 안톤 마흐니치와 요십 스레브르니치, 프란체스코회 수사이자 언어학자인 스타니슬라브 슈크라베츠를 포함한 여러 중요한 종교 인물들이 고리치아에서 살고 일했다. 이 지역에는 스베타 고라("거룩한 산")와 바르바나, 코스타녜비차 수도원을 포함한 많은 중요한 로마 가톨릭교 성당이 있었다. 고리치아 대교구에 포함되지 않은 곳은 카르스트 고원의 남서부(세자나 주변) 일부로, 이곳은 트리에스테 교구에 속했다.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에는 비 라틴 가톨릭 또는 비 가톨릭 종교 신자가 약 1,400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0.5%에 불과했다. 이들 중 약 750명은 다양한 개신교 종교(대부분 루터교)에 속했고, 약 340명은 유대교 신자였으며, 약 180명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고, 약 130명은 그리스 가톨릭 신자였다.
7. 행정 구역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은 5개의 행정 구역(''크라이제'')으로 나뉘었고, 이 구역은 다시 사법 구역으로 세분되었다. 고리치아 시는 별도의 행정 구역 지위를 가졌다.
- 고리치아 시 (Gorizia città|고리치아 치타it, Gorica mesto|고리차 메스토sl, Görz Stadt|괴르츠 슈타트de)
- 고리치아 교외 (Gorizia Campagna|고리치아 캄파냐it, Gorica-dežela|고리차 데젤라sl, Görz Land|괴르츠 란트de)
- 그라디스카디손초 (Gradišče ob Soči|그라디슈체 오브 소치sl, Gradisca|그라디스카de)
- 몬팔코네 (Tržič|트르지치sl, Neumarktl|노이마르크틀de)
- 세자나 (이탈리아어 및 독일어: ''Sesana'')
- 톨민 (Tolmino|톨미노it, Tolmein|톨마인de)
고리치아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행정 구역 | 하위 사법 구역 |
---|---|
고리치아 | 칸알 오브 소치 (Canale d'Isonzo|카날레 디손초it, Kanalburg|카날부르크de), 아이다우시치나 (Aidussina|아이두시나it, Haidenschaft|하이덴샤프트de) |
그라디스카디손초 | 그라디스카디손초, 코르몬스 (Krmin|크르민sl) |
몬팔코네 | 몬팔코네 (Tržič|트르지치sl), 체르비냐노 (Çarvignan|차르비냔fur, Červinjan|체르빈잔sl) |
세자나 | 세자나, 코멘 (이탈리아어 및 독일어: Comeno) |
톨민 | 톨민, 코바리드 (Caporetto|카포레토it, Karfreit|카르프라이트de), 보베츠 (Plezzo|플레초it, Flitsch|플리치de), 체르크노 (Circhina|치르키나it, Kirchheim|키르히하임de) |
참조
[1]
웹사이트
Küstenland mit Görz, Istrien und Triest als Kronländer
https://deutsche-sch[...]
2017-07-07
[2]
서적
Pregled politične zgodovine Slovencev na Goriškem
Goriški muzej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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