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4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교황 바오로 4세는 1555년부터 1559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엄격한 종교적 정책을 펼치며 종교 재판을 강화하고, 개신교와 이단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또한, 로마 게토를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격리하고 차별했으며, 족벌주의를 통해 조카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바오로 4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스페인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예술과 지적 활동을 억압하고 금서 목록을 도입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의 통치는 종교적 억압과 차별로 특징지어지며,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를 16세기 최악의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폴리 대교구장 - 교황 인노첸시오 12세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1691년부터 1700년까지 재위하며 족벌주의 금지, 교황청 개혁, 자선 사업, 매관매직 근절 등을 통해 교회 개혁에 힘썼다. - 카라파가 - 교황 인노첸시오 12세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1691년부터 1700년까지 재위하며 족벌주의 금지, 교황청 개혁, 자선 사업, 매관매직 근절 등을 통해 교회 개혁에 힘썼다. - 카라파가 - 알폰소 카라파
알폰소 카라파는 교황 바오로 4세의 조카로서 총애를 받아 고위 성직에 빠르게 올랐으나, 바오로 4세 사후 부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던 16세기 이탈리아의 성직자이자 추기경이다.
교황 바오로 4세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바오로 4세 |
본명 |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 |
로마자 표기 | Giovanni Pietro Carafa |
출생일 | 1476년 6월 28일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카프릴리아 이르피나 |
사망일 | 1559년 8월 18일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서명 | Signature of Pope Paul IV.svg |
문장 | C o a Paulus IV.svg |
좌우명 | "Dominus mihi adjutor"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
경력 | |
직책 | 로마 교황 |
임기 시작 | 1555년 5월 23일 |
임기 종료 | 1559년 8월 18일 |
이전 교황 | 마르첼로 2세 |
다음 교황 | 비오 4세 |
주교 서임 | 1505년 9월 18일 |
주교 서임자 | 카르디날 올리비에로 카라파 |
추기경 임명 | 1536년 12월 22일 |
추기경 임명자 | 바오로 3세 |
이전 직책 | 산 판크라치오 푸오리 레 무라 성당의 추기경 사제 (1536–1655) |
종교 | |
소속 교회 | 가톨릭 교회 |
2. 유년 시절
잔 피에트로 카라파는 나폴리의 명문 귀족 가문인 카라파 가문 출신으로, 아벨리노 인근 카프릴리아이르피나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조반니 안토니오 카라파는 1516년 서플란데른에서 사망했으며, 어머니 비토리아 캄포네스키는 나폴리 귀족인 제4대 몬토리오네이프렌타니 백작 피에트로 랄레 캄포네스키와 포르투갈인 귀족으로 페레이라 가문 출신인 마리아 데 노론하의 딸이었다.[50]
나폴리의 명문가 출신으로 베네벤토에서 태어난 잔 피에트로 카라파는 삼촌인 올리비에로 카라파 추기경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삼촌의 추천으로 교황청에 들어간 그는 삼촌으로부터 키에티 교구(라틴어: Theate)를 물려받아 1505년부터 1524년까지 키에티주교를 지냈다.[29][30][31] 교황 레오 10세 치세에는 잉글랜드 교황 특사(1513년-1514년)와 스페인의 교황 대사(1515년-1520년)를 역임했으며, 1518년부터 1524년까지는 브린디시대주교도 겸했다.[50][2][29] 특히 스페인에서 교황 대사로 활동하며 겪은 스페인 통치 방식은 그에게 강렬한 혐오감을 남겼고, 이는 훗날 신성 로마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이어져 교황으로서 그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50][2][29]
교황 바오로 3세 시절, 가스파로 콘타리니, 레지날드 폴 등과 함께 교회 개혁을 위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32] 카라파가 권력의 중심에 들어선 것은 인문주의적인 교황 시대가 끝나고 스콜라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였던 그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교황 마르첼로 2세가 선종하자[50]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놀랍게도 나폴리 왕국의 명문가 출신이자 당시 79세의 고령이었던 잔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이 선출되었다.[29][30][31] 그의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50] 많은 이들이 그의 선출을 예상하지 못했다.[50] 그는 젊은 시절 스페인 교황 대사로 활동하며 겪었던 냉대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29][30][31]
1555년 콘클라베에서 교황 마르첼로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엄격하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예상 밖의 선출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그의 즉위를 반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교황직을 수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는 자신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교황 바오로 3세를 기리기 위해 교황명을 바오로 4세로 정했다.
3. 주교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모든 성직록을 포기하고, 가에타노 티에네와 함께 테아티노회를 창설하여 초대 총장을 맡으며 수도 생활에 들어갔다. 테아티노회라는 이름은 그의 교구였던 키에티의 라틴어 명칭 '테아테'(Theate)에서 유래했다.[50][2] 그러나 1527년 로마 약탈이 일어나자 테아티노회는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로 피신해야 했다.[50][2] 카라파는 베네치아에서도 1532년 클레멘스 7세에게 교회 개혁에 관한 의견서를 보내는 등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이후 개혁 성향의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로 다시 소환되어, 가스파로 콘타리니, 레지날드 폴 등과 함께 교회 개혁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50][2]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저한 신봉자였던 카라파가 권력의 중심에 복귀한 것은 인문주의 교황 시대의 종식과 스콜라 철학의 부활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50][2]
1536년 12월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1542년에는 로마 이단 심문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의 이단 심문소를 재편성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고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 매우 엄격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이단이라면, 비록 자신의 아버지라도 화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33][34]
카라파의 강경 노선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태도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마르틴 루터 등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를 모색했던 온건파 가스파로 콘타리니와 달리, 카라파는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교회 개혁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콘타리니는 설득을, 카라파는 탄압을 중시하며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콘타리니가 필리프 멜란히톤, 마르틴 부처 등 프로테스탄트 측과 타협안을 도출하자 카라파는 격노했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와 루터 모두 타협안을 거부하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는 실패했고, 가톨릭 교회는 카라파의 강경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35][36] 카라파는 1545년부터 시작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온건파로 간주되던 레지날드 폴을 루터파라고 비난했으며, 1549년 바오로 3세 사후 콘클라베에서는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폴을 다시 공격하여 낙선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35][36]
카라파는 1549년부터 1555년까지 나폴리 대주교를 역임했고, 1553년에는 율리오 3세에 의해 수석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37]
4. 추기경
1536년 12월, 그는 산 판크라치오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나폴리 대교구장이 되었다.[5][52]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의 화해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탈리아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카라파는 교황 바오로 3세를 설득하여 스페인 종교재판을 모델로 한 로마 종교재판소를 설립하도록 했다. 1542년 관련 교황 칙서가 반포되었고, 카라파는 종교재판관(대심문관) 중 한 명이 되어 이단 척결에 앞장섰다.[6] 그는 "설령 이단자가 내 아버지라 해도 나는 그를 화형시키기 위해 장작더미를 모으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52][33][34]
카라파의 강경 노선은 개신교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마르틴 루터 등 개신교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모색했던 온건파 콘타리니와 달리, 처음부터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주장했다. 두 사람은 가톨릭 교회의 기강 확립과 쇄신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콘타리니는 설득을, 카라파는 탄압을 중시하는 등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콘타리니가 필리프 멜란히톤, 마르틴 부처 등 개신교 측과 타협안을 도출하자 카라파는 격노했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와 루터 모두 타협안을 거부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는 무산되었고, 가톨릭 교회는 카라파의 강경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콘타리니는 이듬해인 1542년에 사망했다.)[35][36]
1545년부터 시작된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해서도 카라파는 콘타리니와 비슷한 온건파로 간주되던 레지날드 폴을 루터파라고 비난했다. 폴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계속되어, 1549년 바오로 3세 사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폴을 다시 루터파로 몰아 낙선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5][36]
그는 1549년부터 1555년까지 나폴리 대주교를 지냈고, 1553년에는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수석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37][38]
5. 교황 선출
카를 5세는 카라파의 교황 선출에 명백히 반대했지만, 카라파는 이를 받아들였다.[50] 일각에서는 황제의 반대가 오히려 그가 교황직을 수락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2] 1555년 5월 23일에 선출된 그는 자신을 추기경으로 임명해 준 교황 바오로 3세를 기리기 위해 교황명을 '바오로 4세'로 정했다. 1555년 5월 26일 수석 부제에 의해 교황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8일에는 라테라노 대성전을 공식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카라파의 교황 선출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적 교황들의 시대가 끝나고, 스콜라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따르는 엄격하고 강경한 노선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는 교황청이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6. 교황
교황 즉위 후, 그의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외세, 특히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간섭으로부터 교황령의 독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친스페인 성향의 콜론나 가문과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7]
그러나 그의 통치 방식은 족벌주의로 얼룩졌다. 그는 조카인 카를로 카라파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정치 고문으로 삼았으며, 카를로의 형 조반니 카라파는 팔리아노 공작과 교황군 사령관에, 또 다른 조카 안토니오 카라파는 몬테벨로 후작과 교황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이들 카라파 가문 인사들은 로마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며, 결국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여러 추문이 불거지자 1559년 교황은 이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고 로마에서 추방했다.[58][15]
종교개혁으로 개신교 세력이 확산되자 바오로 4세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모든 가톨릭 군주들에게 개신교 군주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통치를 불법으로 취급할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드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는 1555년 교황 칙서 Ilius, per quem Reges regnantlat를 통해 펠리페 2세와 메리 1세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군주로 인정했지만,[54][10] 메리 1세 사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그녀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영국 종교개혁 당시 몰수된 수도원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며 갈등을 빚었다.[50][2] 또한, 가톨릭 내 온건파였던 레지널드 폴 추기경을 불신하고 이단 혐의로 조사하기도 했다.[11]
교회 내부적으로도 엄격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는 자유주의 성향의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을 개신교 신자로 의심하여 체포하고 투옥했다.[55] 또한 이단이나 비가톨릭 신자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교황 칙서 《Cum ex apostolatus officio》를 발표했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lat)는 교리를 강조하며, 검사성성(종교재판소)을 통해 가톨릭 내 개혁 세력이나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다.[55] 종교재판은 그의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훗날 교황 비오 5세가 되는 미켈레 기슬리에리를 대심문관으로 임명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이어갔다.[57][14]
예수회와도 갈등을 빚었다. 그는 예수회의 규칙에 개입하여 성무일과 낭송을 의무화하고 총장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이는 교황 사후 예수회에 의해 원래대로 복구되었다.[44]
6. 1. 반유대주의 정책
1555년 7월 17일, 바오로 4세는 교회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교황 칙서 중 하나인 Cum nimis absurdum|쿰 니미스 압수르둠la(불합리하므로)을 발표했다.[13] 이 칙서는 로마 시내에 유대인 게토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교황은 유대인이 이미 많이 거주하던 산탄젤로 구역을 게토 지역으로 지정하고,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벽으로 분리하도록 지시했다. 게토는 해 질 녘마다 잠그는 단 하나의 문을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었다. 유대인들은 게토 건설에 필요한 모든 설계 및 건설 비용(약 300 스쿠디)을 직접 부담해야 했다.[56][13]
이 칙서는 여러 방식으로 유대인들의 삶을 제약했다. 도시마다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하나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고, 로마에서는 7개 이상의 회당이 파괴되었다. 모든 유대인은 게토 밖을 나설 때 눈에 띄는 노란색 유대인 모자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으며, 음식과 헌 옷을 제외한 물품 거래는 금지되었다.[56][13]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대하도록 권장되었고,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저항할 경우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며, 종종 폭도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13] 바오로 4세의 5년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57][14]
바오로 4세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그의 사후에도 300년 이상 지속되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가 세운 로마 게토는 1870년 교황령이 해체되면서 폐지되었고, 게토를 둘러싼 벽은 1888년에 철거되었다.[13]
또한, 바오로 4세는 마라노(강제로 개종한 유대인 및 그 후손)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전 교황들 치하에서 로마와 안코나 등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했던 마라노들은 바오로 4세의 반종교개혁 정책 아래 보호를 잃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1556년 봄, 안코나에서 25명의 마라노가 화형에 처해지는 비극이 발생했다.[18][19]
6. 2. 스페인과의 갈등
교황 바오로 4세는 1527년 로마 약탈에 대한 복수심과 스페인에서 교황 대사로 활동하던 시절 느꼈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29][30][31] 그는 교황이 된 후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60] 당시 스페인은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를 통치하며 이탈리아 반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오로 4세는 이탈리아 전쟁 중 프랑스가 스페인과 5년 휴전(1556년 2월)을 맺은 것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게 휴전을 깨고 스페인령 나폴리 왕국을 침공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프랑스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프랑스와의 동맹을 지지하던 조카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의 설득에 넘어가[60][58][15], 펠리페 2세의 나폴리 왕국 통치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63]
이에 펠리페 2세는 1556년 9월 1일, 나폴리 부왕인 알바 공작 휘하의 12,000명 군대를 동원하여 교황령을 선제 침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교황은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북쪽에서 오던 프랑스군은 1557년 8월 치비텔라 델 트론토에서 스페인군에게 패배하고 철수했다.[8][64] 교황군 역시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였고, 1557년 9월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로마 외곽까지 진격해오자[65] 과거 로마 약탈의 악몽이 재현될 것을 우려한 교황 바오로 4세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1557년 9월 12일, 교황은 스페인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며 카베 평화 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에 따라 교황령은 중립을 선언해야 했다.[65] 알바 공작은 로마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켰다.[65]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이 평화 조약이 교황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비판했다.[9] 이 전쟁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 3. 기타 정책
바오로 4세는 엄격하고 정통적이며 금욕적이고 독재적인 자세를 취했다.[55] 레오폴트 폰 랑케에 따르면, 엄격한 금욕과 르네상스 이전 생활의 복원에 대한 열망이 그의 시대를 특징짓는 경향이었다.[16]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la)는 가톨릭 교리를 재천명했다.[55] 수도원을 떠난 수사들은 교황령에서 추방되었고,[16] 명예직만 차지하고 실무는 다른 이에게 맡기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16]
모든 구걸 행위는 금지되었으며, 이전에는 성직자들이 행했던 미사를 위한 구호금 모금 행위도 중단되었다.[16] 바오로 4세는 교황청의 주요 직책 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교황청 개혁을 단행했으며,[58][15]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관직을 배분했다.[15] 경제면에서는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였고,[59][16] 사람들의 불만사항을 접수하기 위해 자신만이 열쇠를 가진 투고함을 설치하기도 했다.[59][16]
그는 스피리투아리(Spirituali)라는 가톨릭 단체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검사성성(종교재판소)을 동원했다.[55] 바오로 4세 치하에서 종교재판은 계속 강화되었으며, 교회 쇄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안전할 수 없었다.[55] 그는 미켈레 기슬리에리(훗날의 교황 비오 5세)를 대심문관으로 임명했는데, 기슬리에리가 코모에서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할 당시 그의 억압이 너무 심해 도시 전체에 봉기가 일어나 본인이 피신해야 했을 정도였음에도 임명을 강행했다.[57][14]
1555년 7월 17일, 바오로 4세는 교황 칙서 《불합리하므로》(Cum Nimis Absurdumla)를 발표하여 로마 시내에 유대인 게토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56] 유대인들은 옛적부터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리오네 산탄젤로 구역에 지정된 게토에 격리되었으며, 사방이 벽으로 막히고 해질녘이면 닫히는 문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통할 수 있었다.[13] 게토 건설에 필요한 모든 설계와 건설 비용(약 300 스쿠디)은 유대인들이 직접 부담해야 했다.[13] 이 칙서는 다른 방식으로도 유대인들을 통제했는데, 도시 하나당 한 채 이상의 시나고그를 갖는 것이 금지되었고(로마의 경우 일곱 채 이상 파괴됨), 모든 유대인은 게토 밖을 외출할 때 특유의 노란 모자를 쓰도록 강요당했으며, 음식과 헌 옷을 제외한 물품 거래가 금지되었다.[56][13]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유대인들을 2등 시민으로 대하도록 권장되었고, 유대인이 저항하면 중벌에 처해졌다.[13] 바오로 4세의 5년 재위 기간 말엽에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었으며,[57][14] 그가 세운 게토는 1870년 교황령의 해체로 폐지될 때까지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또한 안코나 등지의 마라노(강제 개종한 유대인 및 그 후손)에 대한 이전 교황들의 보호 정책을 철회하고 탄압하여, 1556년 봄에는 25명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18][19]
바오로 4세가 재위하는 동안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다. 교황으로서 그가 한 첫 번째 활동 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연금을 삭감하고, 시스티나 경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의 누드화에 덧칠하여 가리도록 지시한 것이다(이는 무화과 잎 캠페인의 시작이 되었다).[17] 또한 점차 성장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위협을 엄중 단속하기 위해, 당시 독립적인 무역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금서 목록을 도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에 따라 라틴어 성경의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번역본을 포함해 개신교 신자가 쓴 모든 책은 금지되었다.[17]
7. 죽음
1559년 5월부터 교황 바오로 4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해 7월 잠시 회복하여 일반 알현을 받고 종교재판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단식과 여름 더위로 인해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다. 8월 17일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다음 날인 8월 18일 병상에서 추기경들을 모아 ‘정의롭고 거룩한’ 후임자를 선출하고 가톨릭교회의 힘을 기반으로 종교재판을 유지할 것을 당부했다. 같은 날 오후 5시에 선종하였다.[66][21]
바오로 4세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불만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했다. 그가 선종하기도 전에 캄피돌리오 광장에 모인 군중은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67][22] 몇 달 전 광장에 세워진 바오로 4세의 동상에는 그가 유대인들에게 쓰도록 강요했던 것과 비슷한 노란색 모자가 씌워졌고, 시민들의 모의 재판 끝에 목이 잘려 파괴된 후 테베레강에 던져졌다.[68][22][23]
이후 군중은 로마 시내 교도소 세 곳을 습격해 400명 이상의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종교재판의 중심지인 검사성성 청사에 난입했다. 그들은 이단심문관 톰마소 스코티를 살해하고 72명의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청사 곳곳을 파괴하고 종교재판 관련 공문서들을 불태웠다.[66][21]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당일 또는 다음날 군중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을 습격하려 했으나, 몇몇 지방 귀족들의 중재로 성당과 그 안의 사람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69][24] 폭동 3일째에는 로마의 모든 성당과 건물에서 카라파 가문의 문장이 제거되었다.[68][23]
바오로 4세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현대 역사학자들 역시 그의 치세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의 정책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목표보다는 스페인이나 유대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에 기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 속에서 그의 적대적인 태도는 개신교가 북유럽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오히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왕조인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또한 그의 금욕적인 성격은 당시의 예술과 지적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종종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회칠해 덮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복고적인 태도는 많은 이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바오로 4세를 ‘16세기 최악의 교황’이라고 혹평하였다.[57][14]
선종 후 4~5시간 뒤, 바오로 4세의 시신은 사도 궁전의 파올리나 경당에 안치되었다. 8월 19일 아침에는 죽은 자를 위한 성무일도가 봉헌되었고, 추기경들과 많은 조문객이 그의 발에 입맞추며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성 베드로 대성전의 의전사제들은 관례적인 금품을 받기 전까지는 시신을 대성전에 안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 성체 경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쳤다. 바오로 4세의 시신은 같은 날 오후 6시 30분에 시스티나 경당으로 옮겨졌다.[68][23]
바오로 4세의 조카인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은 8월 19일 늦게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폭도들이 교황의 시신을 훼손할 것을 우려하여, 그날 밤 10시에 별다른 예식 없이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거룩한 얼굴 경당 옆에 시신을 안장했다. 바오로 4세의 유해는 1566년 10월까지 그곳에 있다가,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의 카라파 경당으로 이장되었다. 이 경당은 바오로 4세의 삼촌이자 조언자였던 올리비에로 카라파 추기경이 세운 곳으로, 피로 리고리오가 그의 무덤을 제작했다.[68][23]
8. 평가
교황 바오로 4세의 통치는 강력한 국수주의와 엄격한 종교적 신념에 기반했지만, 동시에 외교적 실패와 내부적 억압으로 점철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교황령의 일부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외세,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에 강경하게 맞섰다.[7] 이는 1551년-1559년 이탈리아 전쟁 중 스페인의 선제 침공으로 이어졌고, 교황군은 패배하여 치비텔라 델 트론토에서 프랑스 지원군이 철수한 후[8] 카베-팔레스트리나 평화 조약(1557년 9월 12일)을 통해 교황령의 중립을 선언해야 했다.[9]
초기에는 추기경 조카인 카를로 카라파 등 친족들을 수석 정치 고문이나 교황군 사령관으로 중용했으나, 이들의 부패와 전횡, 그리고 스페인과의 전쟁 패배 이후 1559년에는 공개적으로 이들을 숙청하고 로마에서 추방하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15] 이는 그의 엄격한 성품과 교회 개혁 의지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통치 초기의 족벌주의적 행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바오로 4세는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 정통성을 수호하는 데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강력히 내세우며, 성무성성을 사용하여 이단으로 간주되는 세력, 심지어 영적주의자와 같은 가톨릭 내부 그룹까지 억압했다.[12] 종교 재판소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을 박해했으며, 미래의 교황 비오 5세가 되는 미켈레 기슬리에리를 최고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했다.[14] 자유주의적 성향의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을 프로테스탄트로 의심하여 투옥했고[12], 이단이나 비가톨릭교도가 교황이 될 수 없도록 하는 교황 칙서 ''Cum ex apostolatus officio''를 발표했다.
잉글랜드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노력을 지원하기는커녕, 메리의 고문이자 과거 동료였던 레지널드 폴 추기경을 숨겨진 프로테스탄트로 의심하고 종교 재판 절차를 개시하여, 교황 자신이 잉글랜드 가톨릭 복원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11] 또한 수도원 해산 시 몰수된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여 영국인들의 반감을 샀고, 메리 사후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을 거부했다.[2]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교황 역사상 가장 어두운 측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555년 7월 17일 발표된 교황 칙서 ''Cum nimis absurdum''은 로마에 유대인들을 위한 로마 게토의 창설을 명령하고,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유대인 모자 착용을 강제하며 도시당 하나의 유대교 회당만 허용하고, 직업 선택과 경제 활동(음식, 헌 옷 거래 제외)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 심각한 차별 조치를 담고 있었다.[13] 이로 인해 로마의 유대인 인구는 그의 5년 임기 동안 절반으로 줄었으며[14], 그가 만든 게토는 1870년까지 존속하며 오랜 기간 유대인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교황령 내 안코나 등지에서 이전 교황들 치하에서 번성했던 마라노(강제 개종한 유대인)들 역시 보호를 철회당하고 박해를 받아 1556년에는 25명이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18][19]
또한 바오로 4세는 금서 목록을 도입하여 프로테스탄트 저작물과 이탈리아어 및 독일어 성경 번역본 등의 출판 및 유통을 금지했으며[17],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최후의 심판'의 나체 표현을 문제 삼아 수정을 지시하는 등(미켈란젤로는 이를 무시)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엄격한 검열을 시행했다.
반면, 교회 내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는 주요 관직 거래를 근절하고 능력 위주로 관직을 임명했으며[15], 수도원을 떠난 수도사들을 추방하고 모든 형태의 구걸 행위(심지어 미사를 위한 구제금 모금 포함)를 금지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16] 재정 개혁을 통해 세금을 감면하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도 했다.[16]
종합적으로 볼 때, 바오로 4세는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과 정통성 수호를 추진했지만, 그 방식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비타협적이었으며, 특히 소수 집단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현대적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그의 통치는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 운동에서 강경 노선을 대표하는 사례로, 후대에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참조
[1]
웹사이트
Pope Paul IV (1555-1559)
http://www.gcatholic[...]
2022-05-12
[2]
간행물
Pope Paul IV
[3]
간행물
Paul (popes)
[4]
웹사이트
Handbook for Rome and the Campagna
https://books.google[...]
[5]
웹사이트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8-14
[6]
서적
"Reformation : Europe's house divided, 1490-1700"
2003
[7]
서적
Encyclopedia of Women in the Renaissance
[8]
서적
Philip II
Routledge
2013
[9]
서적
Pius IV and the Fall of The Carafa: Nepotism and Papal Authority in Counter-Reformation Rome
OUP Oxford
2013
[10]
웹사이트
Crown of Ireland Act 1542
http://www.heraldica[...]
2012-11-01
[11]
웹사이트
England's Catholic Reformation
https://www.gresham.[...]
2020-09-23
[12]
서적
The Renaissance
https://archive.org/[...]
[13]
서적
The Papacy, the Jews, and the Holocaust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4]
서적
Absolute Monarchs
Random House
[15]
웹사이트
'John, Eric. The Popes, Hawthorne Books, New York'
https://www.saint-mi[...]
2016-02-19
[16]
웹사이트
'Wines, Roger. Leopold von Ranke: The Secret of World History, (1981)'
https://www.umass.ed[...]
2016-02-19
[17]
웹사이트
Remaking the world {{!}} Christian History Magazine
https://christianhis[...]
2023-05-10
[18]
학술지
Ancora sui giudaizzanti portoghesi di Ancona (1556)
https://books.google[...]
[19]
서적
After expulsion: 1492 and the making of Sephardic Jewry
New York University Press
[20]
웹사이트
Pius IV (1555-1559)
https://cardinals.fi[...]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2022-03-10
[21]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22]
서적
Theater of Acculturation: The Roman Ghetto in the 16th Centu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1
[23]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24]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25]
문서
Claudio Rendina, I papi, p. 646
[26]
뉴스
Prophecies of Future Popes
https://books.google[...]
1899-06
[27]
서적
Revenge Tragedy and the Drama of Commemoration in Reforming England
https://books.google[...]
Ashgate
2008
[28]
학술지
Reading the Anabaptists: Anabaptist Historiography and Luther Blissett's 'Q'
https://uwaterloo.ca[...]
2006-Winter
[29]
문서
スチュアート、P229。
[30]
문서
バンソン、P153。
[31]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2002年)、P1625。
[32]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2002年)、P1109、P1625 - P1626、シャステル、P25、P393、プロスペリ、P18、石鍋、P164。
[33]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2002年)、P1626。
[34]
문서
バンソン、P153 - P154。
[35]
문서
石鍋、P172。
[36]
문서
モンタネッリ、P297 - P301、P317、プロスペリ、P79
[37]
문서
バンソン、P154
[38]
문서
モンタネッリ、P321 - P322、石鍋、P171 - P172
[39]
문서
スチュアート、P229 - P230、プロスペリ、P82、石鍋、P173
[40]
문서
スチュアート、P230
[41]
문서
モンタネッリ、P322 - P327、シャステル、P369 - P370、石鍋、P173 - P174
[42]
문서
モンタネッリ、P327
[43]
문서
プロスペリ、P115、P140 - P141
[44]
문서
モンタネッリ、P307 - P308、バンガート、P53 - P55
[45]
문서
モンタネッリ、P327 - P328、P341、シャステル、P369、プロスペリ、P82、石鍋、P172 - P173
[46]
문서
モンタネッリ、P378、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2009年)、P105、プロスペリ、P173 - P174
[47]
문서
石鍋、P174
[48]
문서
モンタネッリ、P329 - P330、スチュアート、P230 - P231、バンソン、P154 - P155、プロスペリ、P82 - P83
[49]
문서
バンソン、P155 - P156、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2009年)、P152
[50]
웹사이트
Pope Paul IV
https://en.wikisourc[...]
[51]
웹사이트
Pope Paul IV
https://archive.org/[...]
[52]
서적
Reformation in Europe
2005
[53]
서적
Encyclopedia of Women in the Renaissance
[54]
웹인용
Crown of Ireland Act 1542
http://www.heraldica[...]
2003-07-25
[55]
서적
The Renaissance
https://archive.org/[...]
[56]
서적
The Papacy, the Jews, and the Holocaust
https://archive.org/[...]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57]
서적
Absolute Monarchs
https://archive.org/[...]
Random House
[58]
웹인용
John, Eric. The Popes, Hawthorne Books, New York
https://www.saint-mi[...]
2017-08-21
[59]
웹인용
Wines, Roger. Leopold von Ranke: The Secret of World History, (1981)
https://www.umass.ed[...]
2017-08-22
[60]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01
[61]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62]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63]
문서
Letter from the Duque of Alba to Paul IV
https://iarchive.org[...]
[64]
백과사전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알바
두산백과
[65]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도서출판 마티
[66]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67]
서적
Theater of Acculturation: The Roman Ghetto in the 16th Centu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1
[68]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69]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Volume IV: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