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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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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주는 1905년에 태어나 1985년에 사망한 인물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고 해방 후에는 기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식산은행 근무, 삼일상회 설립, 신간회 활동 등을 했으며, 경상북도 도회 평의원을 역임하며 창씨개명, 군용기 헌납, 징병제 독려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 해방 후에는 전남방직 불하, 대한해운공사 사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가족들은 이에 대한 반박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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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190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용주
한자 이름金龍周
출생일1905년 7월 29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사망일1985년 1월 26일
사망지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와이키키
국적대한민국
본관김해(金海)
직업기업가, 외교관, 정치인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 → 천주교(세례명:바오로)
배우자방연숙(삼취 부인)
강정순(이혼 초배)
강신팔(사별 계배)
자녀4남 1녀
학력
학력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 졸업
경력
경력대한해운공사 사장
전남방직 사장
민주당 원내총무
민주당 참의원
전남방직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
마산대학교 초빙교수
포항수산초급대학 특임강사
정치 활동
의원 선수1
정당무소속

2. 생애

김용주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1923년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하며 독서회와 노동야학을 조직하는 등 민족 운동에 참여했으나, 1937년 조선총독부경상북도 도회 평의원에 당선된 이후 창씨개명을 하고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등에 가입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는 전남방직을 불하받아 기업 경영에 주력하여 대한해운공사한국경영자총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5년 하와이주에서 별세했다.

2. 1. 초기 생애와 민족 운동

1905년 7월 29일 경상남도 함양군 함안면 신관에서 아버지 김재두(金載斗)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용주는 성종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의 형 김기손(金驥孫)의 후손이다. 15대조 김부영(金富榮)은 연산군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그 가족이 야반도주하여 전라북도 임실에서 숨어 살았다. 그 뒤 연산군이 폐위되고 복권되어 다시 서울에 올라갔으나 이미 집도 없어지고 더 이상 살 수 없어 재산을 정리해서 다시 전라도 장수에 내려와 살았다. 선조들이 장수에서도 상당 기간을 살았고, 선산까지 마련했으나 고조부 김달문(金達文)이 명당 묫자리를 두고 부안 김씨였던 고을 원님 집안과 다투었다. 선산 묘소에서 밀장이 발견됐고, 시비 끝에 주먹다짐이 있었는데 그만 상대편 사람이 죽고 말았다. 더 이상 장수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또다시 야반도주를 해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경상남도 함양이었다.

1923년 20살 무렵 영일군 포항읍에 정착하여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을 조직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삼일상회(三一商會)를 설립했다.

1926년 5월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됐다.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 정치부 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1936년 3월 포항 영흥학교를 인수하여 민족교육을 하였으며 단군묘 건립을 주장했다.

2. 2. 일제강점기 활동과 친일 논란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13도 도청의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경상북도 도회 평의원에 당선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용주는 가네다 류슈(金田龍周)로 창씨개명하고 대표적인 조선인 친일단체였던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대구국체명징관 건립’에 1000JPY을 헌납했고 황국신민화를 위한 ‘대구신사 건립’에 2000JPY을 헌납했다. 다시 미국영국을 격멸할 군용기 5대를 헌납하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는 내용을 사사히신문(朝日新聞)에 광고를 하였다.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하여 징병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며 친일행적을 하였다.

2. 3. 해방 이후 기업 경영 활동

해방 이후 김용주는 적산기업 중 하나인 전남방직을 불하받아 갑부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 대한해운공사 초대 사장을 역임했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2. 4. 사망

1985년 1월 26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와이키키의 KAL호텔에서 현지시간 기준 오후 8시 30분에 별세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1985년 1월 27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3. 학력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4. 논란

김용주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논란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김용주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1] 주요 논란으로는 친일 행적, 징병제 찬양 및 전쟁 동원 선동, 일제 패망 당시 '살해 대상 1호' 주장, 야학의 성과, 비행기 헌납운동, '변절자' 주장, 매일신보의 신빙성, 친일인명사전 등재 논란 등이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부친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한겨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4][5]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충무공 유적 보전 성금이나 재만피란동포 위호금품을 낸 '김용주'는 포항에서 활동했던 김용주와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있다.[1]

4. 1. 주요 논란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들은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이 모두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부인하고 있다.[1]

4. 1. 1. 친일 행적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들은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이 모두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일절 부인하고 있다.[1]

김용주가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에 검거되었고, 신간회 활동,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도회의원으로서 총독부에 맞선 발언 등을 했다는 수십 건의 근거가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1]

4. 1. 2. 징병제 실시 찬양 및 전쟁 동원 선동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은 1940년 경북도의회 재선 이후 '전국에 단군묘 건립' 주장을 내세우다 고초를 겪는 등 민족운동을 이어갔다고 주장한다.[1]

4. 1. 3. 일제 패망 당시 ‘살해 대상 1호’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은 그가 반일 행적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고 주장한다. 조선 계엄령 발포 시 지역 내 주요 조선인 8명의 총살 지시가 일본국 사령부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2015년 8월 출간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도 등장한다.[1]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에 대해 김용주가 전해 들은 얘기를 본인 회고록과 평전에 인용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일축한다.[1]

4. 1. 4.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및 야학의 성과

김용주는 1933년 포항 영흥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직을 맡고 훈육에도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1]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동아일보 1936년 2월 8일 자 기사에 ‘최경성 교장 등이 진력하였으나 (학교) 경영난은 최후 결정에 달하였다는데…’라는 내용이 있어 운영 시기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 또한, 일본어를 가르친 야학을 애국 야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1]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 금지, 신문 폐간 등 민족 말살 정책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1]

4. 1. 5. 비행기 헌납운동

1944년 7월 아사히신문은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광고를 냈는데, 광고주 명단에 김용주의 이름이 있었다.[1] 1942년 2월 매일신보에 따르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에서 군용기 헌납을 위해 270000JPY을 모금했다.[1]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일제 말기인 1940년대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동원 기사나 광고가 많이 나왔으며, 놋수저 하나까지 징발되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1]

4. 1. 6. '변절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들은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행적이 모두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1926년 3·1 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 설립, 1938년 강제 면화 재배 정책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 등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구국 활동을 했다고 부인하고 있다.[1] 1940년 1월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용주는 영흥학교에 사재 20000KRW을 기부하는 등 민족운동을 유추할 만한 증거들도 나온다.[1]

4. 1. 7. 당시 매일신보의 신빙성

김용주의 가족들은 매일신보에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 기고, 허위사실 수록에 대한 증언이 많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1] 반면, 민족문제연구소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자매지였다고 해서 사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인사 1006명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도 매일신보를 주요 사료로 삼았다는 입장이다.[1]

4. 1. 8.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논박

김무성은 민족문제연구소가 10년 동안 300만여 건을 검토했다던 친일인명사전에 김용주를 등재하지 않다가, 김무성이 여당 대표가 되자 태도를 바꿨다고 비판했다.[1]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 첫 출간 당시 자료 부족으로 해외 및 지방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전면 조사를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김용주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등재를 보류했으며, 발간될 개정판에는 누락되었던 인사들이 다수 등재될 것이라고 답변했다.[1]

4. 1. 9. 한겨레와의 소송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부친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한겨레를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과 반론보도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4] 이는 한겨레가 2015년 8월 1일치 토요판에 '김용주 아들 김무성'(온라인 제목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2][3]을 실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재판장 이흥권)는 2016년 10월 김무성 의원이 한겨레를 상대로 낸 반론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법원은 김무성 전 의원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한겨레가 반론보도를 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5]

4. 2. 동명이인

김용주가 1931년 6월 동아일보에 '충무공 유적 보전을 위한 성금 일급 시전을 냈다'라는 기사가 있다. 또한 같은 해 11월 재만피란동포 위호금품(만주 동포를 위한 성금 모금)으로 일금 삼십 전을 냈다는 기사도 있다. 그러나 충무공 성금을 낸 이는 '마산 거주 김용주'로, 재만피란동포 위호금품을 낸 이는 '경성부 애우수소양소년회 김용주'로 표기되어 있어, 포항에서 활동했던 김용주와는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있다.[1]

5. 저서


  • 풍설 70년

6.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김재두(金載斗)1857년1919년
어머니경주 김씨(慶州金氏)1871년1963년
김용택(金龍宅)1887년?백부 김영두(金英斗)에게 입양
누나김복동(金福童)1901년?
동생김용성(金龍成)1909년1978년신한제분 회장
배우자강신팔(姜幸八)1908년1990년
장녀김문희(金文姬)1928년 10월 13일용문학원 재단 이사장
사위현영원(玄永源)1927년 1월 10일2006년 11월 24일
외손녀현일선(玄逸善)류승지(柳承志)에게 출가, 홈텍스타일코리아 회장
외손녀현정은(玄貞恩)현대그룹 회장, 前 현대그룹 회장 정몽헌(鄭夢憲)에게 출가
외손녀현승혜(玄昇惠)
외손녀현지선(玄知善)
장남김창성(金昌星)1932년 11월 19일2020년 10월 14일전방 명예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고문
며느리오덕주(吳德珠)1934년서울가톨릭전국여성연합회 회장, 전 무임소장관 오위영의 딸
차남김한성(金漢星)1948년전 동해제강 대표
며느리오숙혜(吳淑惠)1948년전 법무부장관 오탁근의 딸
배우자방연숙(方延淑)1926년 9월 25일2013년 10월 29일
삼남김무성(金武星)1951년 9월 20일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며느리최양옥(崔洋玉)1956년국회의원 최치환의 딸
손녀김현진(金賢珍)1981년
손녀김현경(金賢炅)1983년수원대 미대 디자인학부 조교수
손자김종민(金鍾民)1988년 9월 12일배우, 예명: 고윤
사남김남곤(金南坤)1953년삼동산업 이사
며느리이미숙(李美淑)1961년


참조

[1] 뉴스 민족문제연구소측 “황국신민 되겠다던 기사 있다” 김무성 대표측 “단군묘 주장해 고초 겪었다”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5-11-07
[2] 저널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5-08-01
[3] 저널 김무성의 집안…적산기업 불하 받아 전남방직 만들어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5-08-01
[4] 저널 아버지 김용주의 발언이 가장 길고 고약했더라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5-11-29
[5] 저널 법원 “한겨레, 김무성 부친 친일행적 반론보도 필요 없다”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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