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네자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네자크는 7세기 경 카피샤를 중심으로 지빈국을 통치했던 훈족 계열의 국가이다. 어원은 아랍어 'nīzak' 또는 팔라비어 'nyčky'에서 유래되었으며, 네자크 훈족의 주화에 등장하는 'nyčky'가 원래 단어에 더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승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네자크 훈족은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이 지략과 용맹함을 갖추고 10여 개국을 다스렸으며 불교를 숭상했다. 1차 동전은 황소 머리 왕관을 쓴 인물과 팔라비 문자가 특징이며, 2차 동전은 알촌 훈족의 양식이 융합된 형태를 보인다. 654년 아랍의 침공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665년 멸망했으며, 이후 튀르크 샤히가 카불과 간다라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즈니주의 역사 - 가즈나 왕조
    가즈나 왕조는 963년 사부크티긴이 건국하여 마흐무드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셀주크 제국의 부상과 내부 분열로 쇠퇴하여 구르 왕조에 의해 멸망했지만,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고 이슬람의 인도 전파에 기여했다.
  • 가즈니주의 역사 - 알촌
    알촌은 4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에서 활동하며, 킹길라, 토라마나, 미히라쿨라 등의 왕들이 통치했고, 인도 중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아울리카라 왕조에게 패배하여 펀자브 지역으로 후퇴한 훈족 계열의 민족이다.
  • 훈족 - 카탈라우눔 전투
    451년 갈리아 카탈라우니아 평원에서 서로마 제국과 훈족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는 서로마 제국 연합군의 승리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유럽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 훈족 - 키다라족
    키다라족은 4세기 후반 인도 북서부에서 독립하여 펀자브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굽타 제국에 굴복하고 에프탈의 침입으로 멸망한 유목 민족이다.
  • 역사적 이란족 - 캄보자
    캄보자는 베다 시대 후기 인도아리아어 문헌에 등장하는 고대 부족 또는 왕국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이란어와 언어적 연관성을 갖고 말 사육 기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역사적 이란족 - 사카
    사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용어로 유라시아 유목민을 지칭하며,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는 카스피해와 흑해 북쪽의 이란계 유목 민족, 고대 그리스에서는 스키타이인을 가리켰고, 현대에는 유라시아 대초원과 타림 분지의 이란 민족을 지칭한다.
네자크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네자크 훈족과 동시대 아시아의 주요 정치집단들, 서기 500년경
네자크 훈족과 동시대 아시아의 주요 정치집단들, 서기 500년경
기본 정보
토착어 이름𐭭𐭩𐭰𐭪𐭩 nycky
통용 명칭네자크 훈족
통화훈족 드라크마
시대고대 후기
수도가즈나
카피사
종교불교
힌두교
공용어팔라비 문자 (문자)
중세 페르시아어 (일반)
현재 국가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정치
정치 체제유목제국
지도자 칭호네자크 샤
마지막 지도자가르-일치
마지막 지도자 재임 기간653년 - 665년
역사
성립484년
멸망665년
이전사산 제국
알촌 훈족
이후튀르크 샤히
준빌
상징
상징 종류네자크 왕의 왕실 황소 머리 왕관
네자크 왕가의 황소머리 왕관
네자크 왕가의 황소머리 왕관

2. 이름

'네자크'라는 단어는 아랍어 *nīzak, 또는 팔라비어 *nyčky로 나타난다.[1] 전자는 네자크 타르칸을 묘사하는 데에만 사용되었고, 후자는 네자크 훈족의 주화에 직접 등장했으므로, 아마도 후자가 조금 더 본래 단어에 가까울 것이다.[1]

이들의 어원은 여전히 논쟁거리인데, 프란츠 그레넷은 중세 페르시아어 *nēzag(창)과의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보았다.[2] 한편 야노스 하르마타는 '네자크'가 *näjs(싸움)에서 변형된 사카어 단어 *näjsuka(투사)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2]

중고한어 단어 '날새(捺塞)'나 '니숙(泥孰)'도 '네자크'의 음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음성적으로 차이가 있다.[3] 교토 대학의 중세 중앙아시아 역사학자인 이나바 미노루는 중국 연대기를 검토한 결과 '니숙(泥孰)'은 여러 튀르크계 부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적인 이름이자 칭호였다고 결론지었다.[4]

3. 영역

네자크 훈족은 동시대 불교 순례자들에 의해 주로 카피샤(이전의 카오(Cao), 중국에서는 가필시(迦畢試)라고 불렸던 계빈국)을 통치했다. 현장이 630년에 카피샤를 방문했을 당시 람파(라그만), 바르누, 나가라하라 등 주변 10개국을 봉신으로 두고 있었다.[1]

네자크 훈은 지빈국(대부분 카피시라고 불렸으며, 이전에는 조(曹)라고 불렸다)을 지배했다.[1] 현장이 630년경 방문했을 때 카피시는 람파, 바르누, 나가라하라, 간다라를 포함한 11개의 종속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탁실라는 최근 카슈미르에게 빼앗겼다.[1]

4. 관련 기록

619년부터 665년까지 계빈국에서 당나라 조정으로 13차례 사절단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10세기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11세기 중국 백과사전인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남아있다.[2] 현장처럼 두 책 모두 지배 왕조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자들은 네자크를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한다.[1]

658년에 작성된 가장 포괄적인 목록에는 계빈국을 수현도호부로 선언하고 형얼(馨孽)에서 시작하여 갈힐지(曷擷支)로 끝나는 12명의 통치자로 구성된 현지 왕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10명의 중간 통치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남아시아 전문 이슬람 역사학자이자 화폐학자인 왈리드 지아드는 12대에 걸친 언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왕조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661년으로, 연대기에는 지빈 왕이 중국 조정으로부터 수현 지역 및 11개 주에 대한 군사 행정관이자 총사령관으로 공식적인 임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여러 문헌들은 계빈국의 옛 왕들이 황소 머리 모양의 관을 썼음을 강조했다. 이 관의 언급은 역사가들이 계빈국과 네자크 훈족의 화폐를 연결할 수 있게 해준다.

4. 1. 순례자들의 기록

자나굽타(554년)와 다르마굽타(7세기 초)는 카피샤를 방문하여 기록을 남긴 불교 순례자들이다.[1] 현장(630년경)은 네자크 훈족에 대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왕이 크샤트리아 출신이며 지략과 용맹함을 갖추었다고 묘사했다. 현장은 우다반다푸라(오늘날 파키스탄 훈트)에서 왕을 만나 가즈니카불로 함께 여행했으며, 카피샤의 풍습, 종교, 정치 상황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1]

4. 2. 중국 문헌

10세기 중국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11세기 중국 백과사전인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619년부터 665년까지 계빈국에서 당나라 조정으로 13차례 사절단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 현장처럼 두 책 모두 지배 왕조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자들은 네자크를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한다.[1]

가장 포괄적인 목록은 658년에 작성되었으며, 계빈국을 수현도호부로 선언하고 형얼(馨孽)에서 시작하여 갈힐지(曷擷支)로 끝나는 12명의 통치자로 구성된 현지 왕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10명의 중간 통치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아시아 전문 이슬람 역사학자이자 화폐학자인 왈리드 지아드는 12대에 걸친 언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왕조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661년으로, 연대기에는 지빈 왕이 중국 조정으로부터 수현 지역 및 11개 주에 대한 군사 행정관이자 총사령관으로 공식적인 임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여러 문헌들은 계빈국의 옛 왕들이 황소 머리 모양의 관을 썼음을 강조했다. 이 관의 언급은 역사가들이 계빈국과 네자크 훈족의 화폐를 연결할 수 있게 해준다.

5. 동전

네자크 훈족은 사산 제국의 동전을 모방하면서도 알촌 훈족의 도상을 추가하고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동전을 주조했다. 이들의 동전은 황소 머리 왕관을 쓴 왕의 초상화가 특징적이며, 팔라비어로 '네자크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 함량이 줄어들고 구리 함량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네자크 훈족의 동전은 1차와 2차로 나뉘는데, 1차 동전은 사산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2차 동전은 알촌 훈족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5. 1. 1차

네자크 훈족은 사산 제국의 주화를 모방하여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지만, 알촌 훈족의 도상을 추가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더했다. 현장이 언급했듯이, 그 결과는 매우 독특했다. 당시 유통되던 네자크 훈족의 동전(드라크마와 오볼)에는 약 4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 동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 함량이 줄고 구리 함량이 높아지는 점진적인 품질 저하를 보였다.[1]

1차 동전에서 등장한 네자크 왕의 초상화. 네자크 훈족의 동전은 1차와 2차로 나뉜다.


동전 앞면 중앙에는 남성 초상화가 있으며, 얼굴 윤곽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이 초상화는 항상 대칭적인 날개가 달린 황소 머리 왕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에프탈에게 포로로 잡힌 사산 황제 페로즈 1세의 일부 동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때로는 물소 머리 왕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황소 머리 왕관은 네자크 훈족을 정의하는 특징이 되었다. 알촌 훈족 동전에서 차용한 날개 모양의 식물 부속기 또한 흉상 바로 아래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그림 속 인물은 팔랑거리는 두 개의 리본과 구슬이 달린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동전 오른쪽에는 '네자크의 왕'이라는 뜻의 팔라비어 구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왕조의 명칭이자 카불가즈니의 동전 발행지 "ā" (𐭠) 또는 "š" (𐭮)를 표기한 것이다.

뒷면은 사산 양식을 채택하여 이 켜진 조로아스터교 제단과 바르솜(조로아스터교 의식에 사용되는 식물 다발을 본뜬 제사 도구)을 든 두 명의 사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앞면 인물 머리 위에는 삼각형, 깃털, 덤불 등 다양한 모양의 불꽃 헤일로 또는 '태양 바퀴'가 있어 사산 동전과 구별된다.

5. 2. 2차: 알촌 훈족과의 동전 양식 융합



토라마나 2세 시기 카불 주변에서 동전 발행지가 발견되면서 네자크 훈족과 알촌 훈족이 만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알촌-네자크 크로스오버(Alchon-Nezak crossover)라고 불리는 구리 동전이 발견되면서 입증되었는데, 이 동전에는 네자크 양식의 동전 초상화와 알촌 탐가, 알촌 양식의 초승달 왕관이 함께 나타나 두 민족의 동전 양식이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크로스오버 동전'은 팔라비어 대신 박트리아어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진 문구(Śri Sāhi)가 나타나는 형태로 발전했다. 간다라의 종교 복합단지인 사크라 지역 주변에서 발견되는 이 동전들은 알촌 훈족의 탐가가 그 의미를 잃고 단순한 기하학적 모티프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네자크 훈족 양식의 초상화 디자인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알촌 훈족이 530년경 인도에서 쫓겨난 후 네자크 훈족에게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이 동전들이 네자크 훈족에 의해 발행되었는지, 아니면 초기 튀르크 샤히 통치자들에 의해 발행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528~532년 사이, 미히라쿨라 휘하의 알촌 훈족은 말와 왕 야소다르만과 굽타 황제 나라심하굽타가 이끄는 인도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카슈미르간다라로 철수해야 했다. 괴블은 수십 년 후, 알촌 훈족이 카이베르 고개를 넘어 서쪽 카불리스탄 지역으로 이동하여 네자크 훈족과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학자들은 알촌-네자크 크로스오버 동전 발행지의 존재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만, 알촌 훈족이 네자크 훈족과 이 지역을 공동 통치했는지, 아니면 네자크 훈족을 제압하고 그 지역을 빼앗았는지는 여전히 추측에 불과하다.[1]

6. 역사

네자크 훈족은 후나족 또는 시온족으로 불리는 네 개의 후나 국가 중 마지막으로 세워진 왕조이다. 이들은 키다라, 에프탈, 알촌에 이어 등장했다. 사산 제국의 황제 페로즈 1세가 에프탈에게 패배하고 사망할 무렵, 다른 후나족들과 함께 남하하여 자불리스탄 일대를 장악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초기 수도는 오늘날의 바그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28~532년 사이, 미히라쿨라 휘하의 알촌 훈족은 인도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카슈미르간다라로 철수했다. 수십 년 후, 알촌 훈족은 카이베르 고개를 넘어 서쪽의 카불리스탄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네자크 훈족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1] 알촌-네자크 크로스오버(Alchon-Nezak crossover)라고 불리는 구리 동전에는 네자크 양식의 동전 초상화와 알촌 탐가, 알촌 양식의 초승달 왕관 등 두 민족의 동전 양식이 동시에 나타난다.[1]

560년 무렵, 호스로 1세 치하의 사산 제국제1차 돌궐 카간국과 연합하여 에프탈 제국을 멸망시키고 박트리아를 장악하면서 네자크 훈족이 통치하던 자불리스탄 또한 빼앗았을 수도 있다.[1] 그러나 알촌-네자크 훈족은 6세기 말엽에 자불리스탄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654년, 라시둔 칼리파국의 압드 알라흐만 이븐 사무라가 이끄는 6,000명의 아랍 군대가 자불리스탄을 침입하여 루크하즈와 자민다와르를 점령하고, 보스트와 자불리스탄을 정복했다.[3] 661년, 가르일치로 추정되는 네자크 훈족의 통치자는 당나라 안서도호부의 카피사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제1차 피트나로 혼란스러웠던 아랍 이슬람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3]

665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들어서면서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사무라가 다시 동부로 파견되어 자불리스탄을 공격했다. 그는 수개월 간의 포위 끝에 카불을 점령했지만, 곧 축출되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다시 카불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3] 이 무렵, 가르일치로 추정되는 네자크 훈족의 통치자가 전사하면서 왕조는 쇠약해졌다.[3] 이후 튀르크 샤히가 네자크 훈족을 대체하여 카불간다라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3]

6. 1. 기원 및 건국

네자크 훈족은 후나족 또는 시온족으로 불리는 네 개의 후나 국가 중 마지막으로 세워진 왕조이다. 이들은 키다라, 에프탈, 알촌에 이어 등장했다. 네자크인들은 사산 제국의 황제 페로즈 1세가 에프탈에게 패배하고 사망할 무렵, 다른 후나족들과 함께 남하하여 자불리스탄 일대를 장악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초기 수도는 오늘날의 바그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조의 설립자는 정확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구당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몇몇 학자들은 간다라에서 주조된 알촌 훈족의 동전에 네자크 훈족의 상징인 황소 머리 왕관이 가끔 등장한다는 것을 근거로, 두 민족 사이에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었으며, 아마도 네자크 왕조의 설립자는 알촌 왕 킹길라(재위 430~495)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대 중앙아시아를 전문으로 하는 화폐 분석가 클라우스 본드로브크(Klaus Vondrobec)는 이 가설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구와야마 쇼신은, 약 1~2세기 후에 현장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카피사의 통치자들을 두고 '크샤트리야(Kshatriya)'로 기록한 것과, 그들이 주조한 동전에 후나족과 관련된 식별 가능한 특징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가설을 부정했다. 오히려 네자크 훈족이 '훈족/후나족'이 아닌 토착 왕조일 가능성을 제안했다. 이나바는 네자크인들이 본래 토착민들이었지만, 에프탈의 압력을 받아서 훈족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여야 했다고 제안한다.

웨일리드 지아드(Waleed Ziad)와 마티아스 피스터러(Matthias Pistererer)는 네자크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추측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거부한다. '킹길라'는 아마도 존중을 명령하는 뜻의 단어로, 소아시아의 역사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힌두교인도에 정착한 여러 이민족들을 크샤트리야 계급으로 인정한 사례(예를 들어 인도-스키타이, 서사트라프 등)가 있으므로 네자크 훈족의 기원과 정체성을 함부로 단정짓기는 극히 어렵다.

6. 2. 알촌 훈족과 사산 제국과의 조우



528~532년 사이, 미히라쿨라 휘하의 알촌 훈족은 인도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카슈미르간다라로 철수해야 했다. 수십 년 후, 알촌 훈족은 카이베르 고개를 넘어 서쪽의 카불리스탄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네자크 훈족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1] 이는 알촌-네자크 크로스오버(Alchon-Nezak crossover)라고 불리는 구리 동전이 발견되면서 입증되었는데, 이 동전에는 네자크 양식의 동전 초상화와 알촌 탐가, 알촌 양식의 초승달 왕관 등 두 민족의 동전 양식이 동시에 나타난다.[1] 학자들은 알촌-네자크 크로스오버 동전 발행지의 존재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만, 알촌 훈족이 네자크 훈족과 그 지역을 공동으로 통치했는지, 아니면 네자크 훈족을 제압하고 그 지역을 빼앗았는지는 여전히 추측에 불과하다.

560년 무렵, 호스로 1세 치하의 사산 제국제1차 돌궐 카간국과 연합하여 에프탈 제국을 멸망시키고 박트리아를 장악했다. 이때 사산 제국은 네자크 훈족이 통치하던 자불리스탄 또한 빼앗았을 수도 있는데, 이는 호르미즈드 4세(재위 578~590년)의 통치 기간 동안 칸다하르 지역에서 사산식 동전 발행지가 건설된 것이 확인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1] 그러나 알촌-네자크 훈족은 6세기 말엽에 자불리스탄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6. 3. 쇠퇴: 라시둔과 우마이야 침공

654년, 라시둔 칼리파국의 압드 알라흐만 이븐 사무라가 이끄는 6,000명의 아랍 군대가 자불리스탄을 침입하여 루크하즈와 자민다와르를 점령하고, 보스트와 자불리스탄을 정복했다.[3] 이로 인해 네자크 훈족은 큰 영토적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61년, 가르일치로 추정되는 네자크 훈족의 통치자가 당나라 안서도호부의 카피사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제1차 피트나로 혼란스러웠던 아랍 이슬람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3]

665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들어서면서 압드 알 라흐만 이븐 사무라가 다시 동부로 파견되어 자불리스탄을 공격했다. 그는 수개월 간의 포위 끝에 카불을 점령했지만, 곧 축출되었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다시 카불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3] 이 무렵, 가르일치로 추정되는 네자크 훈족의 통치자가 전사하면서 왕조는 쇠약해졌다.[3]

이후 튀르크 샤히가 네자크 훈족을 대체하여 카불간다라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3] 8세기에 이 지역을 방문한 신라의 승려 혜초는 튀르크 샤히의 첫 번째 통치자(알 비루니에 의해 바르하 테긴으로 알려짐)가 본래 네자크 왕을 섬기던 장군이었다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했다.[3][4]

7. 종교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네자크 훈족 통치 시기 불교가 지배적이었으며, 수도 카피샤에는 100개 이상의 불교 수도원이 있었다.[1] 네자크 왕은 매년 5.5m 높이의 불상을 제작하고 법회를 열어 백성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1]

그러나 힌두교 역시 널리 퍼져 있었으며, 수많은 힌두 사원과 비불교 수행자들이 존재했다.[1] 현장은 '수나천'을 숭배하는 종파와 토착 종파 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1]

8. 네자크 타르칸

토하리스탄 서부의 일부 통치자들은 '네자크 타르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타르칸은 ''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 유목민 통치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칭호였다.[1] 이들 중 한 명은 709~710년 사이에 아랍 장군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대항하는 반란을 주도했으며, 심지어 튀르크 샤히에게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1] 역사학자들은 '네자크 타르칸'과 네자크 훈족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한다.[2]

참조

[1] 웹사이트 대당서역기 https://kabc.dongguk[...]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현장
[2] 웹사이트 구당서 http://contents.nahf[...]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
[3] 웹사이트 왕오천축국전 https://kabc.dongguk[...]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4] 블로그 락이망우 https://blog.naver.c[...] 네이버 블로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