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덴표 역병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덴표 역병은 735년부터 737년까지 일본에서 유행한 천연두로, 당시 일본 인구의 상당수를 사망하게 하고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서 온 어부가 감염원으로 추정되며, 일본 정부는 세금 감면과 구휼 정책을 시행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역병은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쇼무 천황의 불교 귀의와 대규모 불사, 대외 관계의 변화, 10세기 이후 천연두의 풍토병화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천연두 - 접종
    접종은 미생물이나 백신을 인체에 주입하는 행위를 지칭하며, 면역 체계를 자극하여 질병을 예방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 천연두 - 도날드 헨더슨
    도널드 헨더슨은 천연두 박멸을 이끈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 보건 전문가이며, 세계 보건 기구에서 천연두 근절 캠페인을 지휘하여 1977년 천연두를 인류가 근절한 최초의 질병으로 만들었다.
덴표 역병
개요
명칭
공식 명칭덴표의 역병 대유행 (天平の疫病大流行)
로마자 표기Tenpyō no ekibyō dairyūkō
설명덴표 시대의 역병 대유행
상세 정보
발생 시기735년 ~ 737년
특징일본 전역에 걸쳐 발생한 주요 천연두 유행
영향막대한 인명 피해 (약 100만 명 사망)
사회, 경제적 혼란
참고 자료
참고 문헌Regi Sam, "TRACKING THE CHRONOLOGY OF EPIDEMICS AND PANDEMICS" (2022)
유네스코, "실크로드를 따른 질병 확산: 천연두"(en.unesco.org)
요시카와 신지, "천황의 역사 2: 쇼무 천황과 불교 도시 헤이조쿄" (2018)

2. 기원

8세기일본 조정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전염병 발생 시 이를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고, 이는 공식령으로 규정되었다.[42][3][19] 이러한 기록 관행 덕분에 735년에서 737년 사이에 일본을 강타한 천연두 유행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속일본기』 등의 사료에 남을 수 있었으며, 후대의 연구가 가능해졌다.[4][20]

덴표 역병은 735년(덴표 7년) 8월경,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3][6] 감염 경로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반도에 좌초했다가 병을 얻어 귀국한 어부가 지역 사회에 병을 퍼뜨렸을 것으로 추정된다.[43][7]

2. 1. 발생

역병이 발생하기 수십 년 전부터 일본 조정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전염병 발생 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42][3] 8세기 초에는 공식령으로 이를 규정하여,[19] 735년에서 737년 사이의 천연두 유행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속일본기』 등의 사료에 남을 수 있었다.[20] 당시 천연두는 완두창(えんとうそう|엔토소일본어)이나 두창(もがさ|모가사일본어) 등으로 불렸다.[18]

천연두 유행은 735년(덴표 7년) 8월경,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 관할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3][6][21] 감염 경로에 대해서는 한반도에 좌초했다가 병을 얻어 돌아온 어부가 지역 사회에 병을 퍼뜨렸다는 설이 있다.[43][7] 후대의 역사서 『속고사담』(13세기) 등에는 이 어부가 신라에서 감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윌리엄 웨인 패리스[20]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편, 발생 지역의 특성상 견신라사견당사가 감염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8]

735년 8월, 다자이후는 관내의 천연두 대유행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해당 연도 세금 일부(조)의 면제를 요청하여 허가받았다.[26] 병은 그해 규슈 북부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다음 해인 736년(덴표 8년)까지 유행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규슈에서는 많은 농민이 사망하거나 농지를 버리고 떠나 농업 생산량이 크게 줄었으며, 결국 기근으로까지 이어졌다.[44][45][8][9][22][23]

736년 2월, 쇼무 천황은 새로운 견신라사를 임명했고, 4월 아베노 쓰구마로를 대사로 하는 사절단이 수도 나라(헤이조쿄)를 출발했다.[22] 규슈 북부를 통과하던 사절단 일행 중 일부가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망하면서, 신라로의 임무 수행은 차질을 빚었다.[46][10] 수행원 유키야쿠노 미쓰라(雪宅満)는 신라 도착 전 이키섬에서 병사했고,[24][26] 대사 아베노 쓰구마로 역시 귀국 도중 쓰시마에서 병사했다.[25][24] 살아남은 사절단이 수도로 귀환하면서 바이러스가 일본 본토로 유입되었고, 이는 일본 동부와 나라 지역으로 병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6][10][26]

737년(덴표 9년)에는 천연두가 전국적으로 대유행했다.[26] 6월에는 수도의 관인 다수가 감염되어 조정이 정무를 중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며,[18] 7월에는 야마토국, 이즈국, 와카사국, 이가국, 스루가국, 나가토국 등 여러 지역에서 잇따라 대유행을 보고했다.[27] 이에 일본 정부는 737년 8월, 세금 면제 조치를 규슈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했다.[47][11][27] 천연두 유행은 738년(덴표 10년) 1월경에 이르러서야 거의 종식되었다.[18]

3. 피해

735년부터 737년까지 이어진 천연두 유행은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재정 보고서 및 『쇼소인 문서』의 쇼제이초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체 인구의 약 25%에서 35%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2][28] 이는 약 100만 명에서 15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음을 의미하며,[18] 일부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이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12]

이 역병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737년에는 당시 국정을 주도하던 후지와라 씨족의 네 형제, 즉 후지와라노 무치마로(680–737), 후지와라노 후사사키(681–737), 후지와라노 우마카이(694–737), 후지와라노 마로(695–737)가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11][18] 역사학자 요시카와 신지에 따르면, 당시 4위 이상의 고위 관료 33명 중 11명(33%)이 사망했으며, 5위 이상 관료 중에서도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 보충을 위한 서작(敍爵, 종5위하 이상 승진)이 급증한 점을 고려할 때 약 40~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9] 후지와라 4형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계에 큰 공백을 만들었고, 이는 경쟁자였던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쇼무 천황의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11]

인명 피해 외에도 역병은 일본 전역에 심각한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건설업과 농업 분야에서 그 영향이 컸다.[13] 벼농사는 큰 타격을 입어[13]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고, 이는 결국 기근으로 이어졌다.[8][9][22][23] 또한, 역병을 피해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인구 이동이 발생하고 사회 질서에도 혼란이 가중되었다.[13]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응하여 일본 조정은 736년 규슈 지역의 세금을 면제한 데 이어, 737년 8월에는 세금 면제 조치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야 했다.[11][27]

4. 대책

도다이지의 다이부츠덴


덴표 역병의 확산에 대응하여 당시 일본 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우선 광범위한 인구 이동을 막고 농촌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전국적으로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취했다.[49][14] 또한, 역병 유행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는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새로이 토지를 경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사유지 소유를 허용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49][14]

한편, 쇼무 천황은 이 비극적인 역병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불교의 힘을 빌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50][51][7][15] 이를 위해 거대한 사찰인 도다이지와 그 안에 안치될 다이부츠덴(대불전)의 건립을 지시하였으며, 일본 각 지역에 고쿠분지(국분사)와 불상 등 관련 종교 시설을 짓는 데 막대한 국가 재정을 투입하며 불교를 공식적으로 지원했다.[50][51][7][15] 특히 도다이지 대불을 주조하는 데에는 국고의 대부분이 소요되어 나라가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52][16]

이와 더불어 태정관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대응책으로, 덴표 9년(737년) 6월 26일자로 역병의 구체적인 치료법과 환자 간호 방법, 금지해야 할 음식 등 상세한 내용을 담은 7개 조항의 지침을 마련하였다.[1] 이 지침은 류취부선초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해도, 동선도, 북륙도, 산인도, 산요도, 남해도 등 전국의 (國)에 하달되어 국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1] 또한 식량이 부족한 백성에게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구휼미를 지급하도록 하는 조치도 포함되었다.[1]

4. 1. 태정관 지침

류취부선초라는 문서 모음집에는 덴표 9년(737년) 6월 26일자 태정관부(太政官符)가 1통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지침을 담고 있다.[1] 이 지침은 "역병 치료법 및 금지해야 할 음식 등 7개 조항"이라는 제목으로 동해도, 동선도, 북륙도, 산인도, 산요도, 남해도 등지의 (國)들에 전달되었다.[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역병의 명칭 및 증상: 당시 역병은 적반창(赤斑瘡)이라 불렸다. 초기 증상은 학질(오한과 고열 동반)과 비슷했으며, 발열 후 3~6일 사이에 발진이 나타나고 3~4일간 창(瘡)이 생겼다. 환자는 심한 고열과 갈증을 호소했으나 찬물 섭취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발진이 가라앉으면 열은 내렸지만, 설사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았고 심하면 하혈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기침, 구토, 토혈, 코피 등의 증상이 병발할 수 있었으며, 특히 설사는 가장 시급히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강조되었다.[1]
  • 환자 간호: 환자의 배와 허리는 베나 솜으로 감싸 항상 따뜻하게 유지해야 하며, 차갑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환자를 맨땅이 아닌 반드시 침구 위에 눕히도록 지시했다.[1]
  • 식이 요법:
  • 권장 음식: 중탕, 죽, 전반(煎飯), 조(糟) 등의 유동식은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환자가 원하는 대로 제공하도록 했다. 식욕이 없더라도 억지로라도 식사를 시키도록 권장했으며, 입이나 혀가 거칠어졌을 경우 구운 해송이나 소금을 자주 입에 머금게 하는 것이 좋다고 언급되었다.[1]
  • 금지 음식: 생선, 찬 고기, 과일, 생채소, 생수, 얼음은 절대 금지되었다.[1]
  • 설사 시 대처: 설사를 할 경우 삶은 부추를 많이 먹게 하고, 혈변이나 유상변(乳狀便)이 나오면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섞어 삶아 하루 수 차례 마시게 했다. 설사가 멎지 않으면 횟수를 늘리되, 반드시 절구로 곱게 빻은 가루를 사용하도록 했다.[1]
  • 회복 후 관리: 병이 회복된 후에도 20일 동안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이 기간에는 금지되었던 음식(생선, 찬 고기, 과일, 생채소, 생수) 섭취는 물론, 목욕, 방사(房事), 비바람 속에 외출하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이를 어기면 곽란(霍亂, 콜레라와 유사한 급성 위장병)으로 설사가 재발하는 세발(洗鉢) 또는 노발(労発) 상태가 될 수 있으며, 이 경우 편작과 같은 명의라도 손쓰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20일이 지나면 생선이나 고기는 잘 구워서 먹을 수 있었고, 건포(말린 전복), 견어(말린 숭어), 건육 등도 허용되었다. 단, 고등어, 꽁치, 은어는 말린 것이라도 금지되었으며, 소(유제품), 꿀, 시(豉, 메주나 된장류) 등은 섭취해도 좋다고 하였다.[1]
  • 약물 사용: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환약이나 산약(散藥)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열이 내리지 않을 경우에만 인삼탕을 약간 마시도록 권고했다.[1]


태정관은 이 지침을 국사(國司)를 통해 전국의 백성에게 널리 알리도록 했으며, 각 국아(國衙)에서 문서를 필사하여 인접 지역으로 신속히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역병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한 백성에게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을 지급하고 그 사용량을 보고하도록 하는 구휼 조치도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태정관에서 발행한 정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관인이 찍혀 있었다.[1]

5. 여파

덴표 역병 대유행은 당시 일본 사회에 정치, 경제,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남겼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후지와라 사형제가 역병으로 모두 사망하면서[27] 그들의 정적이던 다치바나 모로에가 국정을 주도하게 되는 등 정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회경제적으로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농업 생산성 저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농민에게 새로 개간한 토지의 사유를 영구히 인정하는 견전영년사재법이 743년에 공포되어 농업 생산성 회복을 도모했다.[18][30] 또한, 인구 이동을 막고 농촌 공동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감면 등의 조치도 시행되었다.[14]

당시 재해나 역병은 위정자의 부덕함 때문에 발생한다는 천인상관설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쇼무 천황은 역병 유행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고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였다.[31][32] 그는 불교의 힘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고자 도다이지와 그 안의 거대한 노사나불상(나라 대불) 건립을 명했으며, 전국 각지에 국분사를 세우도록 하는 등 대규모 불사를 일으켰다.[7][15]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어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으나[16][33], 749년 무쓰국에서 황금이 발견되어 헌상되면서 재정 위기를 넘기고 불사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역병 피해 복구 사업의 재원으로도 활용되었다.[35]

한편, 역병의 전파 경로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신라와의 관계 등 대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38] 덴표 역병 이후에도 천연두는 일본에서 수 세기 동안 유행했지만, 점차 풍토병으로 자리 잡으면서 735년~737년과 같은 파괴적인 피해는 줄어들게 되었다.[17][39]

5. 1. 사회경제적 영향



세금 면제 외에도, 당시 일본 지배층은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광범위한 인구 이동을 막고 농촌 공동체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역병 유행이 끝난 몇 년 후에는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자 농지를 경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사유지 소유를 인정하는 견전영년사재법을 시행했다. 이는 역병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목표로 한 사회 복구책의 성격이 강했다.[14][18][30]

한편, 당시에는 재해나 역병 같은 재앙이 위정자의 자질 문제로 발생한다는 천인상관설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쇼무 천황은 역병 유행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고 불교에 더욱 귀의하여, 거대한 사찰인 도다이지와 그 안의 노사나불상 (나라 대불) 건립을 명했다. 또한 전국의 국분사 (国分寺|こくぶんじ일본어)와 불상 건설에도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다.[7][15][31][32] 하지만 대불을 주조하는 데 드는 비용만으로도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를 정도였다.[16][33]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749년(덴표 21년) 무쓰국에서 황금이 발견되어 헌상되면서 크게 완화되었다. 이 황금 발견은 노사나불상의 도금 작업 완료나 4자 연호(덴표간보)로의 개원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34], 실제로는 도금 작업 이후에도 국고로 편입되어 역병으로 인한 재정적 타격을 메우고, 연못, 수로, 경작지 개발 등 사회 복구 사업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다.[35] 이러한 노력 덕분에 770년경에는 인구가 역병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8세기 말에는 약 540만~590만 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36] 또한 무쓰국의 황금은 견당사 파견이나 다자이후에서의 국제 무역 결제 수단으로도 사용되어, 후대에 일본이 '황금의 나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35]

덴표 역병은 일본인의 대외 관계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사카에바라 토와오는 당시 기록을 비교하며 견신라사를 통해 일본에서 신라로 역병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지만[37], 당시 사람들은 오히려 신라에서 역병이 유입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후대의 기록에도 반영되어 통설처럼 굳어졌다. 가와우치 하루토는 견신라사 파견 이전에 이미 역병 관련 기록이 있다는 점을 들어 신라 유입설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덴표 시대의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헤이안 시대에 들어 '외부(이국)에서 오는 역귀나 역신이 역병을 가져온다'는 관념으로 발전하여 외세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38]

덴표 역병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수 세기 동안 천연두가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그러나 10세기 무렵에는 천연두가 일본 내 풍토병으로 자리 잡으면서, 735년~737년과 같은 대규모의 치명적인 피해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17][39]

5. 2. 정치적 영향



덴표 역병의 유행은 당시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후지와라 사형제가 역병으로 잇따라 사망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그들의 정적이던 다치바나 모로에가 새롭게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27] 다치바나 모로에 정권 하에서는 공경 7명을 각 씨족에서 한 명씩 임명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정치 운영 방식이 나타났다.

당시 사회에는 재해나 역병이 위정자의 부덕함 때문에 발생한다는 천인상관설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쇼무 천황은 역병 유행에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고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적 위기를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거대한 사찰인 도다이지와 그 노사나불상(나라 대불)의 건립을 지시했으며, 일본 전역에 국분사(国分寺|こくぶんじ일본어)를 세우도록 명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7][15][31][32] 특히 노사나불상을 주조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국가 재정이 파탄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6][33]

역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들도 시행되었다.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에게 토지 사유를 인정하는 견전영년사재법이 공포되었으며[18][30], 귀족들은 세금 면제와 같은 조치를 통해 농촌 공동체 활성화를 꾀했다.[14]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어려움은 계속되었으나, 749년(덴표 21년) 무쓰국에서 황금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 황금은 노사나불상 도금 작업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병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회복하고 연못, 수로, 경작지 개발 등 사회 복구 사업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다.[35]

한편, 역병의 원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대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견신라사를 통해 신라에서 역병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37], 다른 학자들은 견신라사 파견 이전에 이미 역병 기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신라 유입설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신라에서 역병이 들어왔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후대에 외국을 역병을 가져오는 부정한 존재로 여기는 관념으로 이어져 헤이안 시대 이후 일본 왕권의 배타적인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8]

5. 3. 종교적 영향



당시 재해나 역병과 같은 이변은 천인상관설에 따라 위정자의 자질 문제, 즉 위정자의 부덕함 때문에 일어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31] 이러한 배경 속에서 쇼무 천황은 천연두 대유행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고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7][15][31][32]

이에 쇼무 천황은 불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대폭 강화하여 거대한 사찰인 도다이지와 그 안의 노사나불상 (나라 대불) 건립을 명했다.[7][15][31][32] 또한 전국 각지에 국분사 건립과 불상 제작 등 관련 종교 건축 사업에도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다.[7][15]

특히 대불을 주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국가 재정을 거의 파탄시킬 정도였다고 전해진다.[16][33]

5. 4. 대외 관계

일본과 아시아 본토, 특히 한반도를 통한 교류와 무역 증가는 천연두를 포함한 전염병 발생 빈도와 심각성을 높이는 배경이 되었다.[5]

735년(덴표 7년) 규슈 북부 다자이후에서 시작된 천연두 유행의 감염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역사서에는 한 어부가 "야만인의 배"로부터 병을 옮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20] 더 후대인 13세기의 역사서 『속고사담』은 이 "야만인"을 신라 사람이라 특정하며, 규슈 어부가 표류하여 한반도에 좌초했을 때 감염되었다고 적고 있으나, 역사학자 윌리엄 웨인 패리스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20] 일본 연구자 중 사카키바라 도시에오와 카와우치 하루히토 역시 이 설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역병 발생 지역을 고려할 때 견신라사 혹은 견당사가 감염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존재한다.[18]

736년(덴표 8년) 쇼무 천황은 아베노 쓰구마로를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견신라사를 임명하여 파견했다.[22] 그러나 사절단은 규슈 북부를 지나는 도중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수행원 유키야쿠노 미쓰라는 신라 도착 전 이키섬에서 병사했으며[24][26], 대사 아베노 쓰구마로 역시 신라에서 귀국하던 중 쓰시마에서 병사했다.[25][24] 생존자들이 수도 헤이조쿄로 돌아오면서 바이러스가 일본 본토로 유입되어, 737년(덴표 9년)에는 천연두가 전국적인 대유행으로 번졌다.[26]

일본사 연구자 사카에바라 토와오는 일본과 신라의 역병 기록을 비교하며, 오히려 견신라사를 통해 일본에서 신라로 역병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인들은 역병이 신라에서 유입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속고사담』과 같은 후대 기록을 통해 통설처럼 굳어졌다. 가와우치 하루토는 견신라사 파견 이전에 이미 역병 관련 기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신라 유입설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덴표 시대의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헤이안 시대 이후 "외부(이국)에서 오는 역귀·역신이 일본에 역병을 가져온다"는 관념으로 발전했으며, 외국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러한 생각이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왕권의 배타성을 강화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분석한다.[38]

6. 대중문화

2017년에 발표된 사와다 토코의 역사 소설 『화정』(火定)은 737년의 천연두 대유행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작이 되었다.

참조

[1] 논문 TRACKING THE CHRONOLOGY OF EPIDEMICS AND PANDEMICS https://www.research[...] 2022-02
[2] 웹사이트 The Spread of Disease along the Silk Roads: Smallpox https://en.unesco.or[...] 2023-10-12
[3]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 논문 Smallpox in Japan https://www.jstor.or[...] 1910
[5] 웹사이트 History of Smallpox {{!}} Smallpox {{!}} CDC https://www.cdc.gov/[...] 2021-02-21
[6]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Greatest Killer: Smallpox in Histor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9]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0]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1]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2]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3] 웹사이트 Diseases of the Premodern Period in Japan https://www.mitchmed[...] 2018-11-10
[14]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5]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6] 뉴스 The capital delights of Nara https://www.japantim[...] 2006-05-26
[17]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8] 서적 天皇の歴史2 聖武天皇と仏都平城京 講談社
[19]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1]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2]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3]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4] 서적 萬葉集釋注 8 集英社
[25] 간행물 『続日本紀』天平9年正月27日条
[26]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7]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8]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9] 서적 律令体制史研究 岩波書店
[30]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31] 서적 The Greatest Killer: Smallpox in Hist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2]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33] 뉴스 The capital delights of Nara https://www.japantim[...] 2006-05-26
[34] 서적 律令体制史研究 岩波書店
[35] 서적 律令体制史研究 岩波書店
[36] 서적 律令体制史研究 岩波書店
[37] 서적 遣新羅使と疫瘡 塙書房
[38] 서적 平安期異域穢土認識出現の史的前提 八木書店
[39]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40] 웹사이트 直木賞候補作『火定』~時は天平、天然痘流行を食い止める医師たちを描く歴史小説 https://shuchi.php.c[...] PHPビジネスオンライン 衆知 2017-12-20
[41] 웹사이트 芥川・直木賞が決まる 受賞者、喜びの記者会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18-01-16
[42]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3]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44]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5] 서적 Epidemics and Mortality in Early Moder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46]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7]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8] 웹인용 Diseases of the Premodern Period in Japan https://www.mitchmed[...] 2018-11-10
[49]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50] 서적 The Greatest Killer: Smallpox in Histor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1]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52] 뉴스 The capital delights of Nara https://www.japantim[...] 2006-05-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