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해방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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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1971년 아르헨티나에서 결성된 동성애자 권리 운동 단체이다. 아나키즘적 조직으로, 성소수자 권리, 여성 권리, 노동권 옹호,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지지했다. 페론주의와의 연계 시도와 내부 갈등을 겪었으며, 1974년 후안 페론 사망 이후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FLH는 아르헨티나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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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해방 전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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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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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FLH |
형성 | 1971년 8월 |
창립 장소 |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해산 | 1976년 6월 |
합병 대상 | Nuestro Mundo Safo Eros Bandera Negra |
2. 결성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1971년 8월 결성되었으며, 단일 조직이 아닌 여러 소규모 그룹들의 연합체 형태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누에스트로 문도, 에로스, 알보라다와 같은 그룹 외에도 저명한 작가들로 구성된 프로페시오날레스 등이 참여했다. 이후 레즈비언 그룹인 사포, 기독교 단체인 엠마누엘 등이 합류했으며, 가톨릭, 개신교, 제3세계주의 성향의 종교 단체들도 참여했다. 아나키즘 성향의 반데라 네그라는 에로스에서 분리되어 FLH 내 그룹이 되었다. FLH 내부에서는 지식인 중심의 온건파(프로페시오날레스 등)와 행동주의 중심의 급진파(에로스 등) 사이에 노선 갈등이 존재하기도 했다.
2. 1. 초기 구성원
엑토르 아나비타르테에 따르면,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1971년 8월 호세 비안코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비안코는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집을 누에스트로 문도의 회의 장소로 제공하고 그들의 글을 영어로 번역하여 북아메리카 단체들에게 전달하는 등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스발도 바잔은 그의 저서 Historia de la homosexualidad en Argentina|아르헨티나의 동성애 역사es에서 비안코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실제 모임은 Once (Buenos Aires)|온세es에 위치한 블라스 마타모로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초기 모임에는 누에스트로 문도 회원들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사회 과학을 공부하던 대학생들이 다수 참여했다.FLH의 창립 멤버로는 엑토르 아나비타르테, 블라스 마타모로, 후안 호세 세브렐리, 마누엘 푸이그, 후안 호세 에르난데스 등이 있었다. 이후 학생 단체 에로스를 통해 합류한 네스토르 오스발도 페를롱게르는 빠르게 FLH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3. 구성 및 이념
동성애 해방 전선(Frente de Liberación Homosexual|FLHes)은 결성 직후 초기 지도부를 해임하고, 권위주의를 피하며 가부장제를 연상시키지 않는 아나키즘적이고 비계층적인 조직 구조를 채택했다. FLH 내의 여러 그룹들은 서로 반자율적으로 개별 활동을 했지만, 공동 행동을 조직하고 문서 내용에 합의하기 위해 서로 연락을 유지했다.
FLH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새로운 구성원을 모집하기 위해 개인 주택에서 대규모 정보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조직의 정치적 강령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보라다'라는 인식 그룹에 먼저 가입할 수 있었으며, 이후 FLH를 구성하는 다른 분파 중 하나로 이동할 수 있었다.
모든 그룹은 1972년 5월에 제정된 Puntos Básicos de acuerdo del Frente de Liberación Homosexual|동성애 해방 전선의 기본 합의 사항es에 동의했는데, 이는 당시 동성애에 대한 진보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FLH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FLH는 존속 기간 내내 은밀성을 유지하며 활동했다. 1972년 잡지 파노라마와의 인터뷰에서 구성원 두 명은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는 당시 동성애자들이 직면했던 사회적 박해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3. 1. 이념적 지향
동성애 해방 전선(FLH)의 모든 그룹은 1972년 5월에 제정된 Puntos Básicos de acuerdo del Frente de Liberación Homosexualspa (동성애 해방 전선의 기본 합의 사항)에 동의했다. 이 합의는 당시로서는 동성애에 대한 진보적인 관점을 담고 있었으며, "동성애자들은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법적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들은 조롱당하고 소외당하며, 일부일처의 이성애 사회가 잔혹하게 강요하는 부조리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는 내용과 "이러한 억압은 생식을 유일한 성의 목표로 간주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많은 FLH 분파들은 극좌 성향을 보이며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등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모든 형태의 억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성소수자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 권리, 노동 권리 옹호와도 연대했다. 이러한 포괄적인 시각은 FLH의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FLH의 정치적 분석에 있어 중요한 틀을 제공했으며, 동성애는 가부장제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FLH는 미국의 흑표범당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단체 구성원인 후안 호세 에르난데스는 미국 친구로부터 흑표범당의 간행물을 입수하여 공유했으며, 페페 비앙코가 이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내부적으로 학습하고 참고했다.
3. 2. 내부 갈등
FLH 내부에서는 지성주의를 중시하는 입장과 투쟁주의를 내세우는 입장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다. 이러한 갈등은 특히 프로페시오날레스 그룹과 에로스 그룹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프로페시오날레스 그룹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온건한 성향을 보였으며, 소속 회원들은 저술 활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그룹의 회원이었던 후안 호세 세브렐리는 에로스 그룹이 지나치게 행동에만 집중하여 이론과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방해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4. 페론주의와의 관계
1973년 페론주의가 다시 부상하면서 동성애 해방 전선(FLH) 내부에서는 페론주의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공존했다. 일부 회원들, 특히 네스토르 페를롱게르가 이끌던 에로스(Eros) 그룹 등 젊은 층은 좌파 페론주의와의 연대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과거 후안 페론 정권 하에서 동성애자들이 겪었던 극심한 탄압 때문에 페론주의 자체를 불신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엑토르 호세 캄포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73년 초기에는 잠시 동성애자에 대한 경찰 탄압이 완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FLH는 페론주의 지도부 및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고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로비 활동에 집중하며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좌파 페론주의를 포함한 당시 좌파 진영 전반은 동성애 혐오적인 태도를 보이며 FLH를 배척했다. 결국 1974년, 후안 페론이 다시 집권한 후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이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자 FLH는 페론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4. 1. 페론주의 좌파와의 갈등
1973년 페론주의가 다시 힘을 얻으면서, 동성애 해방 전선(FLH) 내부에서도 일부 회원들은 좌파 페론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네스토르 페를롱게르가 이끌던 에로스(Eros) 그룹을 포함한 젊은 회원들은 페론주의와의 연대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후안 페론의 이전 집권기(제1차, 제2차 정부) 동안 동성애자들이 역사상 가장 많은 체포와 경찰 급습으로 탄압받았던 경험 때문에 페론주의를 불신하는 목소리도 컸다. Triángulo Rosa|핑크 트라이앵글es 소속이었던 후안 호세 세브렐리는 이러한 이유로 FLH가 페론주의와 관계를 맺는 것에 반대하며 탈퇴하기도 했다.1973년 5월 엑토르 호세 캄포라의 대통령 취임식에 FLH는 참여하여, 페론주의 행진곡 가사를 인용한 "Para que reine en el pueblo el amor y la igualdad – Libertad a los presos políticos|사랑과 평등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도록 – 정치범에게 자유를es"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캄포라 취임 후 약 두 달간 동성애자에 대한 경찰 탄압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FLH 내에서 페론주의에 대한 지지세가 강해졌다. 이 시기 FLH는 페론주의 지도부 및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며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로비 활동에 집중했다. 1973년 6월 20일, 페론이 아르헨티나로 귀환했을 때 발생한 에세이사 학살 현장에도 일부 FLH 회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FLH와 에로스 명의의 소책자를 배포하고 페론주의와 페론 지지를 표명하는 현수막을 들었다. 그러나 FLH 전체가 페론주의 지지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에세이사 집회 참석에 대한 내부 합의도 없었다.
하지만 좌파 페론주의와 혁명적 좌파 진영 전반은 동성애 혐오적 시각 때문에 FLH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동성애를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낳은 반혁명적 산물로 여겼으며, 혁명이 성공하면 문맹이나 실업 문제처럼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여러 좌파 단체들은 캄포라 취임식이나 페론 귀환 행사에서 FLH 대열과 거리를 두는 등 노골적으로 소외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훗날 안토니오 카피에로는 2009년 인터뷰에서 당시 정의당 내에서 동성애자들이 환영받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또한 FLH 활동가들은 캄포라의 정치 고문들로부터 "캄포라가 집권하면 동성애자들을 재활 수용소에서 전환 치료를 통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1973년 7월, FLH 회원들은 잡지 《아시》와의 인터뷰에서 좌파 페론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우파 페론주의자였던 호르헤 오신데 대령은 이 인터뷰를 빌미 삼아, 좌파 페론주의 단체인 페론주의 청년회와 몬토네로스가 실제로는 마약 중독자이자 동성애자들이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이며 이들을 음해하려 했다. 이에 몬토네로스와 페론주의 청년회는 동성애 혐오적인 방식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시위에서 자신들이 남성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용어인 'putos|푸토스es'나 마약 중독자를 뜻하는 속어인 'faloperos|팔로페로스es'가 아니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1974년, 후안 페론은 다시 집권한 지 4개월 만에 과거 성적 문제 단속을 담당했던 이른바 '도덕 여단'을 부활시켰다.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과 탄압은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고, 극우 테러 조직인 아르헨티나 반공주의 동맹(AAA)이 활동을 시작하는 등 사회 분위기가 급격히 경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4년 말, FLH는 페론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5. 매체
1972년 8월, 동성애 해방 전선(Frente de Liberación Homosexual, 이하 FLH)에 대한 첫 번째 인터뷰가 잡지 파노라마에 Homosexualidad, las voces clandestinas|동성애, 은밀한 목소리es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인터뷰는 당시 박해를 피해 얼굴을 스키 마스크로 가린 두 명의 FLH 대원과 진행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두 활동가는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던 정치적 탄압을 비판하고,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유사과학적 정보들을 반박했다. 또한 FLH가 다른 좌익 단체들과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들은 남성 우월주의를 "가정의 파시즘"(El Machismo es el fascismo de entrecasa|es)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노라마''는 FLH를 선정적으로 다루며 당시 아르헨티나의 게릴라 단체들과의 유사성을 부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2년 9월, FLH는 벽에 "레즈비언이여,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Lesbiana no estás sola|es)라는 문구를 낙서하던 단원들이 경찰관들에게 공격당한 사건에 대해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FLH는 경찰의 폭력적인 행위를 규탄했으며, 크로니카와 라 오피니온 등 여러 언론 매체가 이 내용을 보도하며 사건이 알려졌다.
1973년 7월, FLH 단원들은 잡지 ''아시''(Así|es)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는 "아르헨티나 동성애자의 두려움과 욕망"(Temores y deseos del homosexual argentino|es)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인터뷰를 통해 FLH는 자신들이 페론주의 좌파와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같은 해 9월, ''아시'' 잡지 1면에는 FLH가 정의당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FLH가 마지막으로 매체에 등장한 것은 1976년 2월 11일 자 크로니카에 실린 "이상한 시위: 동성애자들이 박해를 당했다고 호소한다"(Extraña protesta: Homosexuales se quejan de persecución|es)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끝으로 FLH는 거세지는 정치적 탄압 속에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6. 출판물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고자 했다. 1972년,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활용하여 공공장소에 색종이 전단을 배포하는 프로파간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전단들은 눈길을 끄는 모양으로 잘려 있었고, 주먹을 치켜든 그림과 함께 "당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 시스템이 우리를 차별한다"(El mismo sistema que te oprime y explota es el que nos discrimina a nosotroses)와 같은 슬로건이 담겨 있었다. 캠페인의 목표는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을 아르헨티나의 전반적인 정치적 억압과 연결하여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얻는 것이었다. FLH가 제작한 현수막, 전단 등은 1973년 5월 엑토르 호세 캄포라 취임식에서 사용된 현수막처럼 통일되지 않은 대문자 스타일을 사용하는 특징을 보였다.
FLH는 언론 매체를 통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1972년 8월, 잡지 파노라마는 FLH 구성원 두 명과의 인터뷰를 Homosexualidad, las voces clandestinas|동성애, 은밀한 목소리es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인터뷰에 응한 구성원들은 박해를 피해 얼굴을 스키 마스크로 가렸으며, 당시의 정치적 탄압을 비판하고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반박하며 다른 좌익 단체와의 연대 의사를 밝혔다. 같은 해 9월에는 "레즈비언,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낙서하던 중 경찰의 공격을 받은 사건에 대해 보도 자료를 발표하여 경찰 폭력을 규탄했다. 이 성명은 크로니카와 라 오피니온 등 여러 언론에 실렸다. 1973년 7월에는 잡지 Así|아시es와 인터뷰하여 FLH가 페론주의 좌파와 관련이 있음을 밝혔고, 같은 해 9월호 표지에서는 정의당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또한 FLH는 자체적으로 신문인 Homosexuales|오모섹수알레스es와 잡지 Somos|소모스es를 발행하여 조직의 입장을 알리고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의 소통을 도모했다.
FLH의 마지막 공식 활동으로 기록된 것은 1976년 2월 11일 자 크로니카 신문에 실린 Extraña protesta: Homosexuales se quejan de persecución|이상한 항의: 동성애자, 박해에 불만을 제기하다es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통해 박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이후, FLH는 심화되는 정치적 탄압 속에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6. 1. 오모섹수알레스 (Homosexuales)
1973년 9월,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동성애자들'이라는 뜻의 신문 Homosexualeses를 5,000부 발행했다. 이 신문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으며, 정부 관료들과 활동가들에게 배포되었고 일부 신문 가판대에서도 판매되었다. 또한 일부 국제 단체에도 발송되었다. 신문의 기사들은 FLH와의 협력에 관심 있는 정치 세력에게 호소하고,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동성애 혐오적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되었다.신문은 FLH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전문가들이 작성한 두 편의 기사가 실렸는데, 하나는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동성애 역사를 다루며 당시에는 동성애가 억압받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다른 하나는 마초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했다. 특정 섹션에서는 킨제이 보고서를 논하며 동성애가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주장했다. 이 외에도 후안 페론의 귀국 당시 에세이사에서 배포되었던 전단의 복사본, 아르헨티나 내무부에 반동성애 규정 폐지를 요구하는 성명서, 그리고 북미 단체들에 관한 세 편의 기사가 포함되었다. 그중 하나는 가톨릭 동성애자 단체가 작성한 것으로, 일반적인 비판으로부터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면서도 교회 내 진보적인 세력에게 호소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나머지 두 편은 모두 흑인 단체들이 작성한 것으로, 흑표당의 편지와,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혁명가들을 비판하는 흑인 동성애자 단체의 전단 내용이 실렸다.
6. 2. 소모스 (Somos)
동성애 해방 전선(FLH)은 1973년 12월부터 1976년 1월까지 Somos|소모스es("우리는"이라는 뜻)라는 제목의 잡지를 500부 발행했다. 소모스는 노동자 사회당 사무실에서 비밀리에 등사 방식으로 인쇄되었다. 초기에는 분기별 50페이지 분량으로 발행되었으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1975년 12월과 1976년 1월에 발행된 마지막 두 호는 분량이 줄어들었다.이전에 FLH가 발행했던 출판물과는 달리, 소모스는 동성애자를 주요 독자층으로 삼았다. 또한 글만 실었던 이전과 달리 삽화를 포함하여 시각적인 요소를 더했다.
소모스의 창간호에는 성적 자유가 보장되고 서로 착취하지 않는 유토피아적인 사회에 대한 열망을 담은 메시지가 실렸다.
: 한때 우리들 중 몇몇은 어떠한 장소를 꿈꾸었다. 그 장소란 개방적이고 넓은 장소였다. 그곳에는 자유라고 불리는 길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착취하는 대신 서로를 사랑하였다. 아무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원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 아무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모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메시지 외에도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비판과 당시 쿠바에서의 동성애자 처우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비판적 내용을 다루었다. 또한 아르헨티나 여성 연합과 같이 FLH와 연대하는 외부 단체의 목소리도 함께 실었다. 잡지에는 외국의 동성애 단체 소식이나 역사적 사건들, 예를 들어 195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의 대대적인 동성애자 단속이나 중세 시대 소도미법으로 기소된 사례 등이 소개되었다. 한편, FLH와 소모스는 다른 많은 동성애 운동 단체들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통념을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관점을 견지했다.
1974년에 발행된 3호에서는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강조하는 주장이 실렸다.
: 다른 억압받는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은 일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질병이나 열등감이나 이상(異常)으로부터 자유로운, 다른 누구와도 같은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상태를 생각하며 동성애적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느끼도록 만든 엄청난 수치심과 죄책감을 털어버려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증명하여야 한다.
잡지에는 성병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섹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모스는 초기 저널리즘적 성격에서 벗어나 문화적인 내용을 더 많이 다루기 시작했다. 체포나 감옥에서의 경험을 다룬 1인칭 시점의 이야기, 시, 예술 작품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커뮤니티 내부에서 사용되는 은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4호에서는 구강 성교나 항문 성교를 지칭하는 hacer el frufrú|아세르 엘 프루프루es(바스락거리기)나 tirar del fideo|티라르 델 피데오es(국수 먹기) 같은 수백 가지의 속어를 소개하기도 했다.
소모스의 마지막 호인 6호는 1976년 1월에 발행되었다. 줄어든 페이지 수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탄압 속에서 FLH가 겪고 있던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FLH는 사실상 해산 수순을 밟게 된다.
7. 해체
1974년 후안 페론이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우익 준군사 조직의 동성애자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면서 동성애 해방 전선(FLH)의 회원 수는 약 100명에서 12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호세 로페스 레가는 동성애자들을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활동 증가는 "국제 마르크스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FLH는 더욱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3월,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될 1978년 FIFA 월드컵을 준비한다는 명목 아래 경찰은 "거리에서 동성애자들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 정권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FLH는 1976년 6월 결국 해체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 많은 회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 실종,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유럽이나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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