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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도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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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아도코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계승자들"을 의미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물려받은 장군, 친척, 친구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약 40년간의 디아도코이 전쟁을 통해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고, 그 결과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 등으로 분열되었다. 주요 디아도코이로는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등이 있다. 이러한 디아도코이들의 분열과 헬레니즘 왕국의 성립은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으며, 이후 로마의 부상으로 헬레니즘 왕국은 쇠퇴하게 된다.

2. 용어의 기원과 의미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는 고대 그리스어로 "계승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을 물려받은 장군, 친척, 친구들을 가리킨다.[10] 이들은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약 40년간 디아도코이 전쟁을 벌였다.

19세기 그리스 세계사 역사가들에 의해 이 용어가 도입되었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알렉산드로스 사후부터 "디아도코이 전쟁"이 끝나는 기원전 278년경까지를 "디아도코이 시대"로 정의했으며,[13] "디아도코이 전쟁 시대"라고도 불렀다.

드로이젠의 "헬레니즘 시대"와 "디아도코이 시대"는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여러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그 개념이 더욱 확고해졌다.[18] 디아도코이라는 용어는 "디아도코이 연대기"나 디아도코이 왕국과 같이 형용사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19]

2. 1. 고대 그리스어 어원

diadochosgrc[3]는 '계승하다'라는 뜻의 동사 ''diadechesthai''[4]에서 파생된 명사(또는 형용사)이다. ''diadechesthai''는 '사이, 넘어서'를 뜻하는 ''dia-''와 '받다'를 뜻하는 ''dechesthai''가 합쳐진 단어이다.[5] 이 단어들은 원시 인도유럽어 *dek-('받다'라는 뜻)에서 직접 유래했으며, 명사 형태는 o-등급 *dok-에서 왔다.[6] 영어에서 이와 관련된 중요한 단어로는 '받아들여진 가르침'을 뜻하는 교리(dogma), '받아들여질 만한'을 뜻하는 품위(decent), '받아들여진 것에 반하는 것'을 뜻하는 역설(paradox) 등이 있다. 접두사 ''dia-''는 사회적 기대를 더하여 의미를 약간 바꾼다. ''디아도코이''는 지휘권이나 다른 직책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계승자를 의미한다.

3. 역사적 배경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는 고대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현대 학자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분할 통치한 장군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디아도코이 시대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부터 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까지 약 40년간 지속된 혼란기로, 이 시기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다(이른바 디아도코이 전쟁).[10]

19세기의 그리스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시대를 연구하면서 '디아도코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이 시기를 "디아도코이 시대"(''Diadochenzeit'')로 정의하고, 기원전 220년경까지 지속된 "에피고니 시대"(''Epigonenzeit'')와 구분했다.[13] 에피고니는 '디아도코이의 아들들'로, 디아도코이 통치자들의 2세대였다.[14]

조지 그로트와 같은 일부 역사가는 드로이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지만,[11] 드로이젠의 "헬레니즘 시대"와 "디아도코이 시대" 개념은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은 드로이젠의 개념을 더욱 확고히 했다.[18]

기원전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는 힘을 합쳐 안티고노스 1세를 제거했다. 이후 이들은 각각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 지역을 차지하며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3.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0일에 사망했을 때, 그는 많은 독립적인 영토로 구성된 거대한 제국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그의 고향인 마케도니아와 그가 정복한 그리스 도시 국가, 동쪽의 박트리아인도 일부까지 뻗어 있었다. 제국은 현재의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고 아케메네스 제국이 과거에 중앙 아시아에서 소유했던 일부 영토를 제외한 대부분을 포함했다.[10]

헤타이로이(ἑταῖροι|헤타이로이grc)는 친위 기병대로, 고대 마케도니아 군에 유연성을 더했다. 헤타이로이는 알렉산드로스가 필요에 따라 임명할 수 있는 고정된 계급이 없는 장군들로 구성된 특별 기병대 부대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귀족 출신이었고, 많은 이들이 알렉산드로스와 친족 관계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군대 내의 유사한 유연한 구조는 연합 부대의 구성을 용이하게 했다.

지휘 구조 조정을 위한 참모 회의는 알렉산드로스 군대에서 거의 매일 열렸다. 그들은 헤타이로이들 사이에서 단기간이라도 중요하고 강력한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모든 가능성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헤타이로이는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사라졌고, 즉시 디아도코이로 대체되었다. 디아도코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았지만, 이제 어디에 서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헤타이로이에게는 명확한 계급이나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디아도코이에게도 계급이 없었다. 그들은 임명을 기대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없었기에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10]

3.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후계 문제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명확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은 제국 내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10][11][12][13][14][15][16][17][18][19]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도시 국가들,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인도 일부까지 뻗어 있었으며,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광대한 영토를 포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친위 기병대인 헤타이로이(ἑταῖροι|헤타이로이grc)를 통해 군대를 유연하게 운영했다. 헤타이로이는 고정된 계급 없이 알렉산드로스가 필요에 따라 임명하는 장군들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이러한 유연한 구조는 아케메네스 제국 군대 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 연합 부대 구성을 용이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 군대에서는 참모 회의가 거의 매일 열렸고, 헤타이로이들은 이를 통해 지휘권을 얻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이러한 기대는 중단되었고, 헤타이로이는 디아도코이로 대체되었다. 디아도코이들은 자신의 위치는 알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없었기에 스스로 지위를 만들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휘하 장군들과 관리들은 제국의 미래를 놓고 갈등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페르디카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임종 직전에 인장 반지를 넘겨주어, 이후 알렉산드로스 4세의 정식 후견인이 되어 제국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제국의 정점에 군림했다.
  • '''안티파트로스''': 필리포스 2세 시대부터 섬긴 장군으로, 트리파라디소스 회의 때 섭정으로서 회의를 주도했다.
  • '''크라테로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보병 및 해군 지휘관이었으며, 베테랑 부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환하던 중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왕가 보호자로 확정되었으나, 왕가가 바빌론에 있었기 때문에 섭정 페르디카스가 이 책임을 맡았다.

4.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3년 ~ 기원전 275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0일에 사망한 후, 그의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사후,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장군들과 친척들 사이의 치열한 다툼디아도코이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약 40년간 계속되었다.[10]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도시 국가, 동쪽의 박트리아인도 일부까지 뻗어 있었으며,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광대한 영토를 포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친위 기병대인 헤타이로이를 통해 유연한 지휘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바빌론 분할을 통해 제국이 분할되었다.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강화하려 하자,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라미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갈등으로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에서 안티파트로스가 새로운 섭정이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안티파트로스 사후, 폴리페르콘이 섭정이 되었으나 카산드로스가 반발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를 처형하고 알렉산드로스 4세록사네를 장악하여 마케도니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은 안티고노스 1세를 패배시키고 전사시켰다.[10] 이 전투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디아도코이들은 각자의 왕국을 세웠다.

4. 1. 바빌론 분할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기원전 323년의 바빌론 조약) 이후 마케도니아 제국의 사트라프 분할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불분명해지자, 그의 장군들은 곧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록사네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유력한 경쟁 후보였다. 멜레아게르와 보병은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했고, 반면 페르디카스와 기병대는 록사네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지지했다.[19]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 아리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로 즉위했다. 만약 록사네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공동 통치하기로 하였다. 페르디카스는 섭정으로, 멜레아게르는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록사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았으나, 페르디카스는 멜레아게르와 다른 보병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19]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궁정의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바빌론 분할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분배하고 각 지역을 담당할 사트라프를 임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라오메돈은 시리아페니키아를, 필로타스는 킬리키아를, 피톤메디아를, 안티고노스프리지아, 리키아팜필리아를, 아산데르는 카리아를, 메난드로스는 리디아를, 리시마코스트라키아를, 레오나토스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를,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르메니아를 받았다. 마케도니아와 나머지 그리스는 안티파트로스크라테로스가 공동으로 통치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전 비서인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는 카파도키아파플라고니아를 받게 되었다.[19]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영토 분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탁실레스와 포루스는 인도에서 그들의 왕국을 다스렸고, 알렉산드로스의 장인 옥시아르테스간다라를, 시비르티우스는 아라코시아게드로시아를, 스타사노르는 아리아와 드란기아나를, 필리포스는 박트리아소그디아를, 프라타페르네스는 파르티아히르카니아를, 페우케스타스는 페르시스를, 텔레폴레모스는 카르마니아를, 아트로파테스는 북부 메디아를, 아르콘은 바빌로니아를, 아르케실라우스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다.[19]

4. 2. 주요 디아도코이 간의 갈등

페르디카스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인장 반지를 받아 제국 섭정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반발을 샀다.[10] 이후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등이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며, 이들 간의 복잡한 동맹과 전쟁이 이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이복형제 아리다이오스록사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왕위에 올랐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이집트로 옮긴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등을 빚다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10]

이후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안티파트로스가 새로운 섭정이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폴리페르콘이 섭정이 되었으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를 처형하고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록사네를 장악하여 마케도니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4. 3. 이프소스 전투 (기원전 301년)

기원전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4명의 장군은 연합하여 마케도니아를 장악한 안티고노스 1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결국 안티고노스는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10] 이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을 종결지었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 통치자), 리시마코스(트라키아 통치자), 셀레우코스 1세(바빌로니아 및 페르시아 통치자)의 연합군과 맞붙었다. 안티고노스는 전사했지만,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왕조를 이어갔다.

5. 주요 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광대한 제국을 이끌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들과 주요 인물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는데, 이들을 '디아도코이'라고 부른다. 디아도코이는 후계자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아기오스 아타나시오스에 있는 4세기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의 그림, 무기 및 갑옷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폴리페르콘이 섭정으로 지명되자 이에 반발하여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와 연합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5. 1. 페르디카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그의 장군들은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페르디카스는 기병대의 지지를 받아 록사네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주장한 반면, 멜레아게르와 보병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했다.[10] 타협 결과 아리다이오스는 필리포스 3세로 즉위했고, 록사네의 아이가 아들이면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섭정으로, 멜레아게르는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0] 그러나 페르디카스는 멜레아게르와 다른 보병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10]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궁정의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바빌론 분할에서 제국의 일부를 담당할 사트라프를 임명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임종 직전에 인장 반지를 넘겨준 인물로, 이후 알렉산드로스 4세의 정식 후견인이 되어 제국 섭정으로서 실질적으로 제국의 정점에 군림했다.[10]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훔쳐 이집트로 옮기면서 전쟁이 발발했다.[10] 에우메네스가 소아시아에서 크라테로스가 전사한 전투에서 반란군을 물리쳤지만, 페르디카스는 이집트 침공 중 자신의 장군인 셀레우코스, 안티게네스, 페이톤에게 살해당했다.[10]

5. 2. 안티파트로스

필리포스 2세 시대부터 섬긴 장군이다. 트리파라디소스 회의 때 섭정으로서 회의를 주도했다.[10]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떠났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부재한 동안 마케도니아의 섭정이자 그리스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323년,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그의 베테랑 병사들을 마케도니아로 데려와 안티파트로스의 자리를 맡도록 명령받았고, 안티파트로스는 신병들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인해 이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바빌론 분할에서 제국을 나누기 위해 모였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의 장군으로 확정되었고, 제국의 섭정 및 왕실 보호자 역할은 각각 페르디카스와 크라테로스에게 주어졌다. 이 세 사람은 함께 제국의 최고 통치 집단을 형성했다.

5. 3. 안티고노스 1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휘하 장군들은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른바 디아도코이 전쟁이 약 40년간 계속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일을 목표로 한 가장 강력한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이었다. 기원전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는 연합하여 안티고노스에게 대항했고, 결국 안티고노스는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10] 그의 자손들은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조를 세웠다.

5. 4. 프톨레마이오스 1세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 때 측근 호위병으로 종군했다. 이후 이집트를 차지하고 파라오로 즉위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했다.[19]

5. 5. 셀레우코스 1세

셀레우코스 1세는 안티고노스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리시마코스 등과 연합했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했다.[19]

5. 6. 리시마코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트라키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다.[10] 셀레우코스 1세는 안티고노스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리시마코스 등과 연합하였다.[10]

5. 7. 에우메네스

에우메네스카르디아 출신의 그리스인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비서였다. 바빌론 분할에서 카파도키아파플라고니아를 받았다.[10] 이후 제국의 장악권을 두고 안티고노스 등과 다투었다.[10]

5. 8. 카산드로스



카산드로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로, 폴리페르콘이 섭정으로 지명되자 이에 반발하여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와 연합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카산드로스에게 밀려 에피루스로 피신했다. 에피루스에서 올림피아스와 연합하여 다시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으나, 결국 카산드로스에게 패배하고 올림피아스는 처형되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어린 왕 알렉산드로스 4세, 그리고 그의 어머니 록사네를 장악했다.[10]

6. 헬레니즘 왕국의 성립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여러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는 힘을 합쳐 안티고노스 1세를 제거하고, 각각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 지역을 다스렸다.[10]

이 시기는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정의한 "헬레니즘 시대"에 해당한다. 드로이젠은 알렉산드로스 사후부터 기원전 278년경까지를 "디아도코이 시대", 기원전 220년경까지를 "에피고니 시대"로 구분했다. 에피고니는 디아도코이의 아들들, 즉 2세대 통치자들을 의미한다.[13][14]

조지 그로트는 드로이젠의 헬레니즘 개념을 비판하며, 알렉산더가 동방에 헬레니즘을 심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15] 그는 "후계자"라는 전통적인 용어를 선호했지만, 드로이젠의 견해가 점차 주류가 되어 오늘날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치하에서 건국 초기 80년 동안 권력과 위신의 정점에 도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와 도전을 헤쳐나갔다.[10]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기원전 221–203년)의 통치는 역사가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쇠퇴의 시작으로 여겨지지만, 왕국은 이후 200년 동안 더 존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은 점차 이집트 전통을 받아들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자주 행했던 근친 왕실 결혼이 그 예이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기원전 204–180년)가 명령한 로제타석에는 이집트 상형 문자, 콥트어, 그리스어의 세 가지 언어로 칙령이 쓰여져 있어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세계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10]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이 이집트 사회에 그리스의 영향을 통합하려 한 것은 왕국의 존속 기간 동안 많은 농민 반란과 봉기를 초래했다.

6. 2.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셀레우코스 제국은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이었던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의 동방 영토를 차지하며 시작되었다.[10] 셀레우코스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나, 점차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걸었다.

6. 3.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1세의 후손들이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며, 그리스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7. 헬레니즘 시대와 그 의의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이다. 19세기 그리스 역사가들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헬레니즘 시대'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디아도코이 시대를 알렉산드로스 사후부터 기원전 278년경까지로 정의했다.[13]

드로이젠은 디아도코이 시대를 "디아도코이 전쟁 시대"(''Zeit der Diadochenkämpfe'')라고도 불렀으며, 이 시기를 거쳐 기원전 220년경까지는 디아도코이의 아들들인 에피고니(Epigonen)의 시대가 이어졌다고 보았다.[14]

조지 그로트는 드로이젠의 헬레니즘 개념에 비판적이었지만,[15] 드로이젠의 '헬레니즘 시대'와 '디아도코이 시대' 구분은 오늘날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디아도코이들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분할하여 각자의 왕국을 세우고 헬레니즘 문화를 확산시켰다. 이들의 등장은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7. 1. 헬레니즘 문화의 확산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분할 통치한 후계자들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이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헬레니즘 왕국을 세웠고,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발전시켰다.[10] 헬레니즘 문화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집트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로마 제국과 서양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한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무세이온(Μουσεῖον)과 도서관을 건립하여 학문 연구를 장려했다.[11] 로제타석에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칙령이 이집트 상형 문자, 콥트어, 그리스어 세 가지 언어로 쓰여져 있어, 이집트의 세계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 사회에 그리스의 영향을 통합하려 한 것은 왕국 존속 기간 동안 많은 농민 반란과 봉기를 초래했다.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헬레니즘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한 새로운 지식, 과학 연구의 중심지가 헬레니즘 세계에 등장하였다.[12]

7. 2. 헬레니즘 왕국의 쇠퇴와 로마의 부상

헬레니즘 시대에 안티고노스 왕국로마 공화국에 멸망했고,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에 의해 페르시아에서 쫓겨났으며, 로마에 의해 소아시아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10] 셀레우코스 왕국의 잔존 세력은 시리아에서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1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의 속국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더 오래 존속했으나, 이집트는 결국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병합되었다.[10]

참조

[1] 간행물 cite LPD
[2] 문서 Chisholm 1911
[3] encyclopedia διάδοχος https://www.perseus.[...] Perseus Digital Library
[4] encyclopedia διαδέχομαι https://www.perseus.[...] Perseus Digital Library
[5] encyclopedia δέχομαι https://www.perseus.[...] Perseus Digital Library
[6] encyclopedia δέχομαι Carl Winter
[7] 문서 Alexander
[8] 문서 Alexander
[9] 문서 Alexander
[10] 서적
[11] 서적
[12] book Geschichte Alexanders des Grossen https://archive.org/[...] Friedrich Perthes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book Philip II and Alexander the Great: Father and Son, Lives and Afterlives Oxford University Press
[19] encyclopedia Diadochi and Successor Kingdoms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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