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라트비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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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계 라트비아인은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과 그 후손을 의미한다. 러시아인들은 고대부터 라트비아 지역과 관계를 맺었으며, 리보니아 시대와 러시아 제국 통치 시대를 거치며 라트비아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독립 라트비아 시대에는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았으며, 소비에트 시기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1990년 독립 이후 시민권 문제와 러시아어 사용 문제로 갈등을 겪었지만,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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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계 라트비아인 | |
|---|---|
| 기본 정보 | |
![]() | |
| 현지어 | Latvijas krievi (라트비아어) Русские в Латвии (러시아어) |
| 위치 | 리가, 다우가프필스, 레제크네 |
| 인구 통계 | |
| 총 인구 (2024년) | 437,587명 |
| 총 인구 (2017년) | 495,528명 |
| 언어 | |
| 사용 언어 | 러시아어, 라트비아어 |
| 종교 | |
| 주요 종교 | 동방 정교회 (라트비아 정교회) |
| 소수 종교 | 고의식파 |
| 관련 집단 | |
| 관련 민족 | (정보 없음) |
| 추가 정보 | |
| 출처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Republic of Latvia |
| 통계 출처 | Central Statistical Bureau of Latvia |
2. 고대 라트비아
고대 라트비아 지역은 초기 동슬라브족과 교류했으며,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동부 라트비아의 예르시카 공국과 코크네세 공국은 폴라츠크 공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2. 1. 어원
라트비아어에서 "러시아인"을 뜻하는 Krievija|크리비야lv와 "러시아"를 뜻하는 Krievzeme|크리야제메lv는 초기 동슬라브족의 부족 연합 중 하나였던 크리비치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현재의 동부 라트비아 지역에 있던 예르시카 공국과 코크네세 공국은 폴라츠크 공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2. 2. 초기 관계
라트비아어로 "러시아인"을 뜻하는 크리비야(Krievija|lv)와 "러시아"를 뜻하는 크리야제메(Krievzeme|lv)는 초기 동슬라브족의 부족 연합 중 하나인 크리비치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동부 라트비아의 예르시카 공국과 코크네세 공국은 폴라츠크 공국에 조공을 바쳤다.3. 리보니아 시대
리보니아 시대에 현재 라트비아 영토의 일부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 의해 점령되어 테라 마리아나(리보니아)에 통합되었다.
3. 1.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코크네세는 1208년에, 예르시카는 1209년에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점령되었으며, 이후 두 지역 모두 테라 마리아나 (리보니아)에 편입되었다.3. 2. 초기 무역
코크네세는 1208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예르시카는 1209년에 점령되었고, 이후 두 지역 모두 테라 마리아나(리보니아)에 통합되었다.이후에도 동슬라브족은 주로 상인으로서 도시에 남아 있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을 비롯한 현재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교역 관계를 유지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상인들은 리가가 회원으로 있던 한자 동맹 및 리가 상인 길드를 통해 교역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독일 상인이 주도하는 한자 동맹 내에서 러시아 상인들의 활동은 제한적이었고, 노브고로드가 리보니아와 교역하는 것을 막는 경제 봉쇄 조치도 있었다.
1392년 뉘보르 협정이 체결되면서 상황이 바뀌어 독일과 러시아 상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와의 교역은 다음 세기에 걸쳐 리보니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481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리보니아 남동부의 뒤나부르크성을 점령했다. 리보니아 전쟁 중에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가 라트비아 동부의 여러 성과 마을을 점령했으며, 일부 지역은 4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러시아의 고의식파 신자들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던 라트갈레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17세기 중반, 러시아의 알렉시스 1세가 일으킨 러시아-스웨덴 전쟁 동안 러시아는 라트갈레 동부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뒤나부르크를 보리소글롭스크로 개명하며 1656년부터 1667년까지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 하지만 이후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이 지역을 폴란드에 넘겨주어야 했다.
3. 3. 지역 권력 투쟁
코크네세는 1208년에, 예르시카는 1209년에 각각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점령당했으며, 이후 두 지역 모두 테라 마리아나(리보니아)에 통합되었다.[1][2] 이후에도 동슬라브족은 주로 도시 상인으로서 라트비아 지역에 존재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을 비롯한 현재의 러시아 지역과의 무역 관계도 유지되었다.[1]노브고로드 공화국 상인들은 리가가 회원 도시였던 한자 동맹 및 리가 상인 길드를 통해 무역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독일 상인들이 주도하는 한자 동맹 내에서 러시아 상인들의 활동은 제한적이었고, 노브고로드가 리보니아와 교역하는 것을 막는 경제 봉쇄 조치도 있었다.[1] 이러한 상황은 1392년 뉘보르그 협정이 체결되면서 변화했는데, 이 협정으로 독일과 러시아 상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었다. 이후 러시아와의 무역은 리보니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481년, 이반 3세는 북서부 러시아에 대한 리보니아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리보니아 남동부의 뒤나부르크성을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1][2] 리보니아 전쟁 중에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 (이반 뇌제)가 라트비아 동부의 여러 성과 마을을 점령했으며, 일부 지역은 4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1][2]
17세기 후반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러시아의 고의식파(구교도) 신자들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던 라트갈레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2]
17세기 중반, 알렉세이 1세가 일으킨 러시아-스웨덴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는 라트갈레 동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뒤나부르크의 이름을 Борисоглебск|보리소글레프스크ru로 바꾸고 1656년부터 1667년까지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1][2] 그러나 전쟁 후 체결된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점령했던 지역을 다시 폴란드에 넘겨주어야 했다.[1][2]
4. 러시아 제국 통치 시대
1710년 대북방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리가를 점령하면서 표트르 1세의 스웨덴령 리보니아 정복이 완료되었다. 이후 라트비아를 통한 러시아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러시아 상인들이 라트비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은 제1차 폴란드 분할(1772년)로 라트갈레 지역을, 1795년에는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을 병합하여 현재 라트비아 영토 대부분을 확보했다.
러시아 자본은 발트해 연안 무역에 투자되었고, 이는 러시아 소유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발달로 인해 러시아 노동자들이 라트비아로 유입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보다 사회적, 종교적으로 덜 억압적인 환경과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찾아 러시아 농민들의 이주도 이어졌다.[24] 비록 러시아 귀족들도 진출했지만, 행정 통제는 여전히 발트 독일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4. 1. 통합 과정
동슬라브족은 주로 도시 상인으로 라트비아 지역에 존재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 및 현재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 상인들은 리가가 회원이었던 한자 동맹 및 리가 상인 길드를 통해 무역을 했으나, 독일 상인들이 주도하는 동맹 내에서 러시아 상인의 입지는 제한적이었고, 때로는 노브고로드의 리보니아 무역을 막는 경제 봉쇄도 있었다. 1392년 뉘보르그 협정으로 독일과 러시아 상인 간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무역은 리보니아 발전에 기여했다.1481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리보니아 남동부의 뒤나부르크성을 점령했다. 리보니아 전쟁(1558년-1583년) 중에는 러시아 차르 이반 4세가 라트비아 동부의 여러 성과 마을을 점령하여 일부 지역을 4년간 통치하기도 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러시아의 고의식파 신자들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였던 라트갈레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17세기 러시아의 알렉시스 1세가 일으킨 러시아-스웨덴 전쟁 중 러시아는 라트갈레 동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뒤나부르크를 보리소글롭스크로 개명하며 1656년부터 1667년까지 11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 반환해야 했다.
대북방 전쟁 중인 1710년, 셰레메테프 백작이 리가를 점령하면서 표트르 1세의 스웨덴령 리보니아 정복이 완료되었다. 이후 라트비아를 통한 러시아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러시아 상인 계층이 라트비아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리가 최초의 러시아 학교가 1789년에 설립되었다.[24] 러시아 제국은 제1차 폴란드 분할(1772년)로 라트갈레를 병합했으며, 1795년에는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을 병합하여 쿠르제메와 젬갈레 지역까지 확보했다.
19세기에는 러시아 자본이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해 연안 지역의 무역에 투자되었고, 이를 통해 러시아 소유의 산업 시설이 설립되었다. 산업 발전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끌어들였으며, 러시아 농민들의 유입도 계속되었다. 당시 발트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과 다른 법률이 적용되는 등 어느 정도 자치권이 부여되어 상대적으로 덜 억압적인 사회적, 종교적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귀족들도 이 지역에 진출했지만, 행정 통제는 여전히 발트 독일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4. 2. 경제 및 사회 발전
동슬라브족은 주로 도시 상인으로 라트비아 지역에 존재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 및 현재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의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상인들은 리가가 회원으로 있던 한자 동맹 및 리가 상인 길드를 통해 무역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독일이 주도하는 무역 동맹 내에서 러시아 상인들의 활동은 제한적이었고, 노브고로드가 리보니아와 교역하는 것을 막는 경제 봉쇄 조치도 있었다. 1392년 뉘보르그 협정으로 독일과 러시아 상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면서 상황이 변화했고, 이후 러시아의 무역은 리보니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10년 대북방 전쟁 중 셰레메테프 백작이 리가를 점령하면서 표트르 1세는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라트비아를 통한 러시아의 무역이 활발해졌고, 러시아 상인 계층이 라트비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리가에는 1789년 최초의 러시아 학교가 설립되었다.[24] 라트갈레 지역은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쿠르제메와 젬갈레 지역은 1795년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이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편입되었다.
러시아 자본은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의 무역에 투자되었고, 이 수익의 일부는 러시아인이 소유한 산업 시설을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산업이 발전하면서 러시아 노동자들이 라트비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농민들의 유입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발트 지방에 어느 정도 자치권이 부여되어 사회적, 종교적으로 덜 억압적인 환경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러시아 귀족들도 라트비아에 진출했지만, 행정적인 통제는 여전히 발트 독일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4. 3. 라트비아 민족 각성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의 자본이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해 지역 무역에 투자되면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업 발전은 러시아 본토로부터 노동자들을 끌어들였고, 동시에 제국 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종교적 억압이 덜했던 발트 지역의 자율성을 찾아 러시아 농민들의 이주도 계속되었다. 비록 행정적인 통제는 여전히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공동체는 점차 러시아 본토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스스로를 라트비아를 구성하는 한 민족 집단으로 여기게 되었다.[3]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인들의 사회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라트비아 민족 각성 운동과 시기적으로 비슷했다. 특히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제국 전역에 농노제 폐지를 단행한 개혁은 이러한 민족 의식의 성장을 더욱 자극했다. (사실 라트비아의 쿠를란트 현과 리보니아 현에서는 이미 1819년에 농노제가 폐지되었으나, 1802년 비테프스크 현에 편입된 라트갈레 지역은 예외였다.)
리가에서는 이미 1816년에 최초의 러시아어 신문인 Rossiyskoe ezhenedelnoe izdanie v Rige|로시스코예 예제네델노예 이즈다니예 프 리게rus (리가의 러시아 주간)가 창간되었다.[4] 1869년에는 예브그라프 체시힌(Евграф Васильевич Чешихин)이 러시아어 일간지 Rizhskij Vestnik|리시스키 베스트니크rus ("리가 헤럴드")를 창간하여 지역 러시아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 체시힌은 1876년 리가에 러시아 문학 서클(Русский литературный кружок)을 결성하기도 했다. 지역 러시아인들은 점차 시의회 선거나 이후 국가 두마 선거에도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883년에는 미하일 체호프 리가 러시아 극장이 설립되어 러시아 문화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인들은 주요 산업 도시 노동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라트비아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매우 열악했다. 평균 노동 시간은 하루 11시간에 달했고, 토요일에도 10시간을 일해야 했으며 작업 환경은 가혹하고 안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적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고,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이 겨울 궁전 앞에서 평화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코사크 기병대의 발포로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다친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혁명의 불길이 라트비아로 번졌을 때, 그 양상은 러시아 본토와는 다소 달랐다. 라트비아에서는 계급 투쟁보다는 오랫동안 특권층으로 군림해 온 발트 독일인 지배 계급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성격이 강했다. 러시아인과 라트비아인 농민들은 함께 작은 마을들을 점령하고 독일인 지주들의 영지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발트 독일인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혁명이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이 끝나자 니콜라이 2세는 국가 두마 설립을 약속하는 등 여러 양보 조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러시아화 정책이 철회되지는 않았지만, 발트 독일인 엘리트들은 다시 차르의 신임을 얻어 라트비아에서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독일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라트비아 민족주의를 억누르려 했고,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독일인과의 연대를 장려했다. 그러나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공동체의 입장은 복잡했다. 다수를 차지하던 구교도 후손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발트 지역으로 이주해 온 역사 때문에 차르 체제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발트 독일인과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1905년 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러시아인과 라트비아인 사이의 연대는 점차 약화되었고, 라트비아 민족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계속해서 발트 독일인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4. 4. 인구 통계
19세기 말, 라트비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러시아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1897년에 실시된 제1차 전러시아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인구는 총 171,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지역별 분포는 다음과 같다.
대체로 도시 인구가 시골 인구보다 약 두 배 많았으나, 라트갈레 지역에서는 반대로 시골 인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였다.
비제메, 쿠르제메, 젬갈레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 인구의 절반 가량은 러시아 제국 내 인접한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라트갈레의 레제크네 구에서는 러시아인의 약 10%가 다른 지방 출신이었다. 주요 이주민들은 코브노(현재의 카우나스), 비테프스크, 빌뉴스 등 인접한 제국의 속주(губерния|구베르니야ru)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의 사회 구조는 다른 민족 집단과 차이를 보였다. 러시아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 집단은 농민으로, 전체의 54%에 달했으며 특히 라트갈레 지역 러시아인 대다수를 구성했다. 중산층은 35%, 세습 귀족 및 개인 귀족은 8%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라트비아인이나 주로 중산층 및 귀족 계층에 속했던 발트 독일인과는 달랐으며, 라트비아 내 폴란드인과 유사한 특징을 보였다.
5. 독립 라트비아 (1918-1940)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 민주 국가로 선포되면서, 이전 외국 통치 기간 동안 라트비아 영토에 거주했던 러시아인들은 제국 신민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라트비아의 소수 민족이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이들에게 민주 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했으며, 문화적 자치도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이 시기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 민족 집단이 성장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러시아 내전 이후의 난민 유입, 영토 조정, 그리고 높은 자연 출산율 등의 요인으로 러시아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1935년에는 약 20만 6천 명에 달하며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동부의 라트갈레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이 시기 러시아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와 비교하여 농촌 및 농업적 특징이 강해졌다.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으며, 특히 경제적으로 덜 발달된 라트갈레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이동성이 제한되었다. 독립 초기에는 문해율이 낮았으나, 교육 기회 확대로 개선되었다. 러시아어 교육권은 보장되었으나, 라트비아어 구사 능력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정치적으로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 시민으로서 선거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정당을 통해 목소리를 냈으나, 발트 독일인이나 유대인과 같은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 정치적 활동성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5]
5. 1. 민족 구성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 민주 국가로 선포되면서, 이전 외국 통치 기간 동안 라트비아 영토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 집단은 국가의 소수 민족으로서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러시아인들은 제국 시절의 민족적 소속 지위를 잃었지만, 라트비아에서는 민주 국가에서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부여받았다.
독립 라트비아 시기(1918-1940)는 러시아 민족 집단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라트비아 전체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 지역에서 러시아 소수 민족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 연도 | 러시아인 인구 수 | 전체 인구 대비 비율 |
|---|---|---|
| 1920년 | 91,000명 | 7.8% |
| 1935년 | 206,000명 | 10.5% |
이러한 러시아 인구 증가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첫째, 소비에트 연방에서 벌어진 러시아 내전과 소비에트 정권 수립 과정에서 많은 난민과 이민자가 발생하여 라트비아를 포함한 주변국으로 유입되었다. 둘째, 1920년 다우가프필스 전투 이후 폴란드군이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드빈스크(현 다우가프필스)를 라트비아에 넘겨주었다. 셋째, 라트비아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평화 조약에 따라 러시아인이 많이 살던 프스코프 지방의 일부 영토가 라트비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높은 자연 출산율이었다. 예를 들어 1929년 한 해 동안 러시아인의 자연 증가 인구는 2,800명이었던 반면, 인구수가 9배나 많았던 라트비아인의 자연 증가는 3,700명에 그쳤다.
러시아인은 라트비아의 다른 민족 집단에 비해 대가족의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차르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라트비아에서 가장 "젊은" 민족 집단 중 하나였다. 14세 미만 러시아 어린이 수는 같은 연령대 라트비아 전체 어린이 수의 14%를 차지했다. 또한 독립 시기 러시아 가정은 매우 높은 안정성을 보였는데, 평균 이혼 건수가 라트비아 가정의 절반, 독일 가정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지역적으로는 러시아 인구의 4분의 3(75%)이 라트갈레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수도인 리가에는 14%가 거주했다.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차르 시대와 비교하여 독립 라트비아의 러시아인들은 "도시 및 산업"적 특징보다는 "농촌 및 농업"적 특징을 더 많이 띠게 되었다. 압도적 다수인 80%가 농업에 종사했으며, 산업 종사자는 7%, 무역 종사자는 4.9%에 불과했다. 러시아인들이 주로 경제적으로 덜 발전된 라트갈레 지역에서 농장을 소유했다는 점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직업이나 농업 방식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비드제메, 쿠르제메, 젬갈레 지역의 도시에서는 러시아인의 사회적 모습이 라트비아인과 비슷해졌지만, 그곳에서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앞서나가는 민족 집단에 속하지는 못했다. 라트비아인, 독일인, 유대인에 비해 재산 소유자의 비율이 낮았고, 아동 노동이 비교적 널리 행해졌다.
라트비아 공화국 초기 러시아 인구의 전반적인 문해율은 제국 시대보다 낮았다. 1920년 기준으로 러시아 남성의 42%, 여성의 28%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 기간 동안 학교 교육을 받는 러시아 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여(1925-1935년 사이 1.5배 증가, 가장 높은 증가율), 6세에서 20세 사이 학생 비율에서 라트비아인(54%)과 러시아인(47%)의 차이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고등 교육 기관에서는 러시아인의 비율이 낮았다. 1920년 라트비아 대학교의 러시아 학생은 65명에 불과했으나, 1939년에는 220명으로 증가했다.
라트비아 공화국은 상당 기간 동안 민족 문화 자치를 기반으로 러시아 소수 민족을 통합하려 노력했다. 국립 학교 시스템 내에서 소수 민족이 자신의 언어로 교육받을 권리가 폭넓게 인정되었고, 러시아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초등 교육 단계에서 러시아어 사용이 중요하게 여겨져, 1920년대 말까지 러시아 어린이의 92%가 러시아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등 학교 네트워크 역시 소수 민족의 모국어 교육 수요를 고려하여 발전했다. 하지만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소수 민족 부모들이 자녀를 라트비아어 학교에 보내는 경향이 점차 증가했다. 1935년에는 러시아 어린이의 60%가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았다.
라트비아 내에서 러시아어가 계속해서 중요하게 사용된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인들이 일반적으로 라트비아어나 다른 소수 민족 언어를 배우려는 경향이 낮았기 때문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라트비아어를 말하고 쓸 수 있는 러시아인은 15% 미만이었다. 다만, 옐가바와 같이 라트비아인 환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러시아 주민의 70%가, 바우스타, 발미에라, 쿨디가 등에서는 80% 이상이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등, 도시 환경이 라트비아어 학습을 촉진하기도 했다.
5. 2. 사회경제적 특징
1918년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라트비아 영토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지위를 잃었지만, 민주 국가의 소수 민족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았다. 독립 라트비아 시기 동안 러시아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국가 내 최대 소수 민족 집단이 되었다. 1920년 약 9만 1천 명이었던 러시아계 인구는 1935년에는 약 20만 6천 명으로 늘어나 전체 인구의 10.5%를 차지했다(1920년에는 7.8%).
이러한 인구 증가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소비에트 연방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많은 난민과 이민자가 라트비아로 유입되었다. 또한, 1920년 다우가프필스 전투 이후 폴란드가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드빈스크(현재의 다우가프필스)를 라트비아에 넘겨주었고,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으로 프스코프 지방 일부가 라트비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해당 지역의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주된 요인은 높은 자연 출산율이었다. 예를 들어 1929년 러시아계 인구의 자연 증가분은 2,800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계보다 9배나 많았던 라트비아계 인구의 자연 증가분(3,700명)에 근접하는 수치였다.
러시아계는 라트비아의 다른 민족 집단에 비해 대가족 비율이 높았고, 14세 미만 아동 인구 비율(전체 아동의 14%)이 높아 상대적으로 "젊은" 민족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러시아계 가정은 이혼율이 라트비아계 가정의 절반, 독일계 가정의 5분의 1 수준으로 높은 안정성을 보였다.
지역적으로는 러시아계 인구의 약 4분의 3이 라트갈레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수도인 리가에는 14%가 거주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와 비교했을 때, 독립 라트비아 시기 러시아계 인구는 농촌 및 농업적 성격이 강해지고 도시 및 산업적 성격은 약화되었다. 대다수(80%)가 농업에 종사했으며, 산업 종사자는 7%, 무역 종사자는 4.9%에 불과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낙후된 라트갈레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거나 다른 직업으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비제메, 쿠를란트, 젬갈레 지역의 도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은 사회적으로 라트비아인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집단은 아니었다. 라트비아인, 독일인, 유대인에 비해 재산 소유자 비율이 낮았고, 아동 노동이 비교적 널리 행해졌다.
교육 수준 측면에서는, 독립 초기 러시아계 인구의 문해율(1920년 기준 남성 42%, 여성 28%)은 제정 러시아 시대보다 낮았다. 그러나 독립 기간 동안 러시아어 학교가 설립되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면서 학교에 다니는 러시아계 학생 수가 크게 증가했다(1925년-1935년 사이 1.5배 증가). 그 결과, 6세에서 20세 사이 학령인구의 취학률에서 라트비아계(54%)와 러시아계(47%) 간의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 교육 기관에서의 러시아계 학생 비율은 여전히 낮았다. 라트비아 대학교의 러시아계 학생 수는 1920년 65명에서 1939년 220명으로 증가했지만, 전체 학생 수 대비 비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라트비아 정부는 초기에 민족 문화 자치를 보장하여 소수 민족이 자신의 언어로 교육받을 권리를 폭넓게 인정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어 초등학교가 많이 설립되어 1920년대 말까지 러시아계 아동의 92%가 러시아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도 소수 민족 언어 교육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는 자녀를 라트비아어 학교에 보내려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여, 1935년에는 러시아계 아동의 60%만이 러시아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러시아계 인구의 라트비아어 구사 능력은 낮은 편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라트비아어를 읽고 쓸 수 있는 러시아인은 15% 미만에 불과했다. 다만, 옐가바(70%), 바우스카, 발미에라, 쿨디가(80% 이상) 등 라트비아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도시 환경에서는 라트비아어를 배우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5. 3. 교육
라트비아 공화국 역사의 시작점에서 러시아 인구의 전체적인 문해율은 제국 시대보다 낮았다. 1920년 라트비아의 러시아 남성의 42%, 러시아 여성의 28%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독립 시대 동안 학교의 러시아 학생 수는 크게 증가하여, 1925년부터 1935년 사이 1.5배 늘어나는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그 결과, 6세에서 20세 사이 라트비아 학생과 러시아 학생 수의 차이가 상당히 줄어들었다(각각 54%와 47%).오랫동안 라트비아 공화국은 대규모 민족 문화 자치를 바탕으로 러시아 소수 민족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라트비아의 국립 학교는 자국어로 아이들을 가르칠 권리를 널리 사용했으며, 러시아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어는 초등 교육 단계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여, 1920년대 말까지 러시아 어린이의 92%가 러시아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등학교 네트워크의 개발 또한 소수 민족이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요구를 고려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소수 민족 출신 부모들이 자녀를 라트비아어 학교에 보내는 경향이 증가했다. 1935년에는 러시아 어린이의 60%만이 자국어(러시아어)로 교육을 받았다.
러시아인은 고등 교육 기관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를 차지했다. 1920년 라트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인 러시아 학생은 65명에 불과했지만, 1939년에는 220명으로 증가했다.
라트비아에서 러시아어가 널리 쓰였던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인이 일반적으로 라트비아어나 다른 소수 민족 언어를 배우려는 경향이 낮았기 때문이다. 라트비아어는 라트비아의 러시아 인구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러시아인의 15% 미만이 라트비아어를 말하고 쓸 수 있었다. 다만, 많은 도시의 라트비아 환경은 러시아인이 라트비아어를 배우도록 장려하는 역할을 했다. 옐가바 러시아 주민의 70%, 바우스타, 발미에라, 쿨디가 주민의 80% 이상이 라트비아어를 사용했다.
5. 4. 언어
라트비아 공화국은 독립 후 소수 민족에게 자국어로 교육받을 권리를 폭넓게 보장했으며, 이는 러시아 소수 민족에게도 적용되었다. 러시아 학교 시스템이 운영되었고, 특히 초등 교육 단계에서 러시아어 사용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1920년대 말까지 러시아 어린이의 약 92%가 러시아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중등학교 네트워크 역시 소수 민족의 언어 교육 수요를 고려하여 발전했다.그러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자녀를 라트비아어 학교에 보내는 소수 민족 부모들이 점차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기준으로 러시아 어린이의 60%는 여전히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일반적으로 라트비아어나 다른 소수 민족의 언어를 배우려는 경향이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라트비아어를 구사하고 쓸 수 있는 러시아인은 15% 미만에 불과했다. 다만, 옐가바 주민의 70%, 바우스타, 발미에라, 쿨디가 주민의 80% 이상이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등, 도시 환경에서는 라트비아어를 배우는 러시아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5. 5. 정치 생활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 민주 국가로 선포되면서, 라트비아 영토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제국 신민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라트비아의 소수 민족이 되었다. 새로운 라트비아 국가는 이들에게 민주 국가의 시민으로서 보장되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라트비아 인민 위원회가 채택한 ''소수 민족의 문화적 민족 자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러시아계의 특별한 문화적 관심사가 규제되었다.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 시민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누렸으며, 국가의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소수 민족으로서 라트비아 제헌 의회 선거와 이후 네 차례의 세이마(라트비아 의회) 선거에 모두 참여했다. 선거에서 러시아 정당들은 라트비아 전체 유권자의 2%에서 6% 사이의 득표율을 보였다. 특히 러시아인 인구가 많은 리가와 라트갈레 지역에서는 의회 국가 시대 동안 러시아인 유권자들이 점차 러시아 정당에 더 많이 투표하는 경향을 보였다.
러시아계 사회 내부에서는 정체성과 라트비아 사회와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그들은 라트비아 문화와 비교하여 러시아 문화의 자율성을 인정했지만, 러시아 본토의 러시아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역적 특징이나 자치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화국 초기인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최초의 러시아 민족 연합인 민족 민주 연맹(Националь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союз|나치오날노-데모크라티체스키 소유스rus, NDL) 내에서는 사회 조직의 민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정통파(N. 보르도노스)와 라트비아 사회 전체와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는 자유주의파(N. 베레얀스키, S. 만시레프)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이후 자유주의파는 라트비아 러시아 협회(ROL)로 이어졌다.
NDL의 자유주의적 흐름에서 파생된 "민주적 민족주의" 이념은 언론인 베레얀스키가 주창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역사적 조국인 러시아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 민주주의 라트비아에 감사해야 하며, 동시에 민족적 가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러시아 신문 "슬로보"(Слово|슬로보rus, '단어')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반면, 당시 가장 유명했던 러시아 신문인 ''세고드니아''(Сегодня|세고드냐rus, '오늘')는 특정 민족 사상을 전파하기보다는 모든 지역 소수 민족의 문화적-민족 자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N. 벨로츠벨로프와 같은 인물은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적 경향 강화를 자신들의 문화의 미래를 우려하는 이민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았다. 우익 성향의 러시아 농민 연합(RPU) 지도자들은 "민주적 민족주의" 사상을 지지했으며, RPU는 제4차 세이마에서 3명의 의원을 배출하여 러시아 농민 파벌을 구성했다.
정치 스펙트럼의 좌익에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제4차 세이마에서는 사회 민주당 소속 러시아인 1명과 공산주의 대표 1명이 선출되었다. 러시아 좌익 정당들은 리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라트비아의 러시아 소수 민족은 유대인이나 발트 독일인 소수 민족에 비해 정치적으로 덜 활동적인 편이었다.[5]
6. 소비에트 라트비아 (1940-1990)
1940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으로 시작된 소비에트 시대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기존 러시아계 사회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러시아계 주민들의 입장이 다양하게 나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기(1941-1944) 동안 러시아계 주민들은 전쟁과 점령 정책의 영향을 받았으며, 붉은 군대나 파르티잔으로 저항하거나 나치 당국에 협력하는 등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
전쟁 이후 소련의 다른 지역, 특히 러시아로부터 라트비아로 대규모 러시아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인구는 급증했으며, 라트비아 전체 인구 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높아졌다. 이주한 러시아인들은 주로 리가, 다우가프필스 등 도시 지역에 정착하여 산업 분야에 많이 종사했다. 이 시기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는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 비(非)라트비아계 주민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러시아어를 기반으로 한 교육 및 사회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1980년대 후반 민족 의식이 고양되는 '아토다(Atmoda, 각성)' 시기에는 라트비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러시아계 인사들이 라트비아 인민 전선과 같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상당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라트비아의 독립과 민족 국가화에 대해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소비에트 라트비아 시기 러시아계 주민들은 라트비아 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동시에,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경험했다.
6. 1. 1940-1941년
1940년 여름, 라트비아는 독립을 잃고 소련에 의해 점령당했다.이러한 소련의 점령에 대해 러시아계 소수 민족의 입장은 다양하게 나뉘었다. 첫째, 일부 러시아계 지식인과 성직자들은 볼셰비키 정권에 대해 완전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둘째, 일부 러시아계 대중은 요제프 스탈린의 독재 정권이 과거 러시아 군주제와 유사한 안정적인 체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셋째, 볼셰비키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련 통치 첫 1년 동안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기존의 러시아어 정기 간행물은 모두 폐간되었고, 많은 저명한 러시아계 인사들이 탄압받거나 살해당했다. 반면, 새로운 정권에 협력하는 러시아인들도 나타났다. 라트비아에는 집단 농장이 도입되었고, 소련의 보안 기관이나 노동자 경비대 등에는 러시아인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공산주의 간부 육성 과정에도 현지 러시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6. 2. 1941-1944년 (나치 독일 점령)
1941년,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고, 그 결과 라트비아 영토를 점령했다. 소련 시대에는 이 기간을 대조국 전쟁이라고 불렀으며, 이 용어는 오늘날 라트비아의 러시아계 커뮤니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나치 점령 하에서 지역 러시아인들의 대응은 나뉘었다. 일부 러시아인들은 붉은 군대에 복무하거나 파르티잔 운동에 참여하고, 지하 공산당 활동을 지원하며 침략자들에게 저항했다.
반면, 나치 당국에 협력하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은 볼셰비키와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 러시아"라는 신화와 베르마흐트의 "해방 임무"를 선전하는 신문 등에서 활동했다. 러시아인들은 군사화된 부대에 동원되기도 했다. 나치는 특히 볼셰비키 정권 하에서 고통받았던 러시아인들에게 접근하려 했다.
당시 신문에는 러시아 민족 문화에 대한 정보가 실렸으며, 다우가프필스에는 러시아 극장이 개설되었고, 레제크네 교원 양성소에는 러시아어 교사를 위한 러시아어 강좌가 개설되는 등 문화적 활동도 일부 허용되었다.
라트비아 총독부 내에는 러시아 인구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과 라트비아 러시아 인구 문제에 관한 러시아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기구들은 러시아인들의 경제적, 문화적, 법적 필요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 3. 전후 이주
라트비아인 다음으로, 러시아인은 오늘날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이다. 1989년 라트비아 인구 조사에서 러시아계 주민은 전체 인구의 34.0%인 905,500명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비교했을 때 4.5배 증가한 수치이며, 라트비아 전체 인구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3.5배 증가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대다수는 소련의 다른 공화국, 특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이주한 러시아인들은 주로 시골보다는 도시에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특히 수도인 리가와 다우가프필스 같은 대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직업 분포에서도 라트비아인과 차이를 보였는데, 러시아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산업 분야에 종사한 반면(라트비아인은 4분의 1), 농업 분야 종사자는 7%(라트비아인은 22%), 문화 및 예술 분야 종사자는 1%(라트비아인은 2.5%)에 그쳤다.
러시아인은 수적으로나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소련의 주요 민족 집단이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에서는 러시아 문화가 라트비아인이 아닌 다른 민족 집단 사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는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등 라트비아 내 다른 소수 민족에게도 주요 소통 언어로 자리 잡으며 이들을 러시아어 사용 집단으로 묶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1959년부터 1979년까지 라트비아 내 민족 러시아인의 수는 47% 증가한 데 비해,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비(非)러시아인의 수는 78%나 증가했다. 라트비아 내에는 러시아어를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시스템(중등 및 고등 교육), 과학 연구, 대중 매체 등 잘 발달된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6. 4. 사회경제적 특징
라트비아인 다음으로 러시아인은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 집단이다. 198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계 라트비아인은 총 905,500명으로 전체 인구의 34.0%를 차지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인구 수가 4.5배,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배 증가한 수치이다. 오늘날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대다수는 소련 시절 다른 공화국, 특히 러시아 연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러시아인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 정착했으며, 시골보다는 리가나 다우가프필스와 같은 대도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업 분포에서도 라트비아인과 차이를 보였다.
| 분야 | 러시아인 비율 | 라트비아인 비율 |
|---|---|---|
| 산업 | 33.3% (1/3 이상) | 25% (1/4) |
| 농업 | 7% | 22% |
| 문화 및 예술 | 1% | 2.5% |
소련 시절 러시아인은 수적으로나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주요 민족 집단이었으며,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에서 러시아 문화는 비(非)라트비아계 주민 전체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러시아어는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등 다른 소수 민족들을 아우르는 공용어 역할을 하며 새로운 러시아어 사용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실제로 1959년부터 1979년 사이 라트비아 내 민족 러시아인의 수는 47% 증가했지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비러시아계 주민의 수는 78%나 증가했다. 라트비아에는 러시아어를 기반으로 한 중등 및 고등 교육 시스템, 과학 연구, 대중 매체 등 광범위한 사회 기반 시설이 구축되었다.
6. 5. 민족 의식
라트비아인 다음으로 러시아인은 오늘날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이다. 1989년 당시 러시아인은 라트비아 인구의 34.0%(총 905,500명)를 차지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비교하면 4.5배 증가한 수치이며, 라트비아 민족 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배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증가는 대부분 소련의 다른 공화국, 주로 러시아 연방에서의 이주에 따른 결과였다.러시아인들은 주로 시골보다는 리가, 다우가프필스와 같은 대도시에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업 분포에서도 라트비아인과 차이를 보였는데, 러시아인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산업에 종사한 반면(라트비아인은 4분의 1), 농업 종사자는 7%(라트비아인은 22%), 문화 및 예술 분야 종사자는 1%(라트비아인은 2.5%)에 그쳤다.
소련 시대에 러시아인은 수와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주요 민족 집단이었으며, 러시아 문화는 라트비아 내 비(非)라트비아계 인구 전반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어는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러시아어 사용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79년까지 라트비아 내 민족 러시아인의 수는 47% 증가했지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여기는 비러시아인의 수는 78%나 증가했다. 라트비아에는 러시아어를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중등 및 고등 교육 시스템, 과학 및 대중 매체 등 고도로 발달된 사회 기반 시설이 구축되었다. 소련 시기 동안 라트비아의 러시아어 대중 매체는 라트비아어 매체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라트비아 러시아인의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소련 시대에는 이처럼 규모가 큰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집단의 민족 문화적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합의된 방식이 없었다. 공산당 이데올로기는 라트비아의 러시아인을 소수 민족 중 하나로 규정했던 기존 라트비아 공화국의 전통을 거부했다. 소련에는 민족-영토 자치 형태가 존재했지만, 이는 모든 민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아 민족 간 사회적 대표성에 불평등을 야기했다. 국가는 연방 공화국 형태를 갖추어야만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라트비아에서는 라트비아인만이 유일하게 인정받는 민족이었다.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졌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 공화국 내의 개별적인 문화 및 민족 공동체로 여겨지지 않고, 더 큰 소련 내 러시아 공동체의 일부로만 간주되었다.
1980년대 말, 소련에 민주적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민족 의식이 고양되는 '아토다(Atmoda, 각성)' 시기가 도래했다. 이러한 새로운 민주적 흐름은 라트비아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의 민족 부흥에도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러시아인들은 개인 또는 조직화된 집단으로서 라트비아의 민족 각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88년 7월, A. 말체프는 민주적인 인민 전선 설립을 촉구하며 라트비아 작가 연맹 확대 총회에 보낸 공개 서한에 서명한 17명의 라트비아 문화계 저명 인사 중 한 명이었다. 라트비아 인민 전선(PFL) 설립 아이디어는 Ludmila Azarova|루드밀라 아자로바lv, Roalds Dobrovenskis|로알드 도브로벤스키lv, Vladlens Dozorcevs|블라들렌 도조르체프lv, Marina Kosteņecka|마리나 코스테네츠카야lv와 같은 러시아계 작가들, Aleksejs Grigorjevs|알렉세이 그리고리예프lv, A. 카자코프, 번역가이자 서지학자인 Jurijs Abizovs|유리 아비조프lv 등 많은 러시아계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1989년 L. 글라드코프, V. 도조르체프, V. 즈다노프, V. 코노노프, 코스테네츠카야가 라트비아 인민 전선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도조르체프는 이사회 이사가 되었으며, 그리고리예프는 PFL의 신문인 '아토다'의 편집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아토다' 러시아어판은 15,000부에서 100,000부에 달하는 발행 부수를 기록하며 라트비아의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 서구 지향적인 대중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PFL은 라트비아 러시아 문화 협회(RCSL) 창립의 기반이 되었다. 1989년 3월 4일에 열린 RCSL 창립 총회는 "러시아 민족 문화 발전, 전통적인 러시아-라트비아 관계 강화, 공화국 내 모든 국적 대표들과의 협력"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수의 라트비아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 국가 체제 부활에 대해 불신감을 나타냈다. 1989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비라트비아계 인구 중 라트비아 독립을 지지하는 비율은 49%에 그쳤다(라트비아인은 93% 지지). 1989년에 설립된 라트비아 노동 인민 국제 전선(인터프론트)은 소련 잔류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 유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라트비아를 민족 국가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7. 독립 라트비아 (1990-현재)
1991년 라트비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한 이후,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독립 라트비아 정부는 1940년 6월 소련 점령 이후 라트비아 영토에 정착한 이주민과 그 후손들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했다.[28] 이로 인해 상당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이 비시민권자 신분으로 남게 되었으며, 시민권 취득을 위해서는 라트비아어 구사 능력과 라트비아 역사 및 헌법에 대한 지식을 증명해야 했다.[28] 2017년 1월 기준으로도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의 약 28.5%가 비시민권자 상태였다.[27]
러시아계 인구는 주로 리가, 다우가프필스와 같은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거주하고 있다.[25] 이는 소련 시절 산업 발달과 함께 러시아인 노동자들이 도시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던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2018년 초 기준으로 러시아인은 라트비아 전체 인구의 25.2%를 차지했다.[23] 라트비아 중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7년 사이 라트비아로 이주한 러시아인보다 다른 나라로 이주한 러시아인이 더 많았다.[26]
러시아어의 지위 또한 독립 이후 주요 쟁점이 되었다. 라트비아 헌법과 국가언어법은 라트비아어를 유일한 국가 공용어로 지정하고 있어,[30][28] 러시아어 사용 권리를 주장하는 일부 러시아계 주민 및 정치 세력과의 갈등이 이어졌다. 사회민주당 "조화"[29], 라트비아 러시아계 연합 등이 대표적이다. 2012년에는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제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부결되었다.[31][32] 또한 2019년부터는 공립 고등학교와 사립 대학 등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한 교육이 점차 제한되고 있다.[33][34]
한편, 1992년 여름 이전에 합법적으로 라트비아에 거주지를 등록한 사람은 독립 이후에도 거주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는 민족이나 시민권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거주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7. 1. 인구 분포
라트비아의 러시아인들은 주로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2006년 기준으로 러시아인들은 수도 리가 인구의 42.3%를 차지했고,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다우가프필스에서는 53.5%를 차지했다.[6] 소련 시절, 러시아인들은 주로 공장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 산업 중심지에 정착했으며, 라트비아 동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농촌 지역은 거의 전적으로 라트비아인들이 거주했다. 이 지역들은 러시아-라트비아 혼합 마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6] 2022년 초, 러시아계는 라트비아 전체 인구의 24.2%를 차지했다.[6]
라트비아 중앙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7년까지 19,932명의 러시아인이 라트비아로 이주했으며, 같은 기간 48,851명의 러시아인이 다른 국가로 이주했다.[7]
7. 2. 시민권
1991년 라트비아가 다시 독립한 후, 1940년 6월 이후에 조상이 도착한 사람에게는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주로 러시아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었다.[9] 시민권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라트비아어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으나, 이후 이러한 초기 조건은 완화되었다.[28][9]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라트비아의 상당수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비시민권자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거주자 등록 데이터에 따르면, 2017년 1월 1일 기준으로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 557,618명 중 159,069명(28.5%)이 비시민권자였으며,[8][27] 71.1%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27] 2022년 1월 기준으로는 라트비아 러시아계의 66.5%인 302,230명이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다.[8]
한편, 1992년 여름 이전에 (구 소련법에 따라) 라트비아에서 합법적으로 거주지를 얻은 사람은 누구나 라트비아 독립 이후에도 거주지를 주장할 수 있었다. 소련 시절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받으려는 소유자에게는 해당 재산 자체를 돌려주는 대신 다른 지역의 동등한 가치의 토지로 보상하거나, 사유화된 재산의 주식을 취득할 때 할인 쿠폰으로 사용할 수 있는 증서로 보상했다. 또한 라트비아 정부는 민족이나 시민권, 비시민권 지위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거주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7. 3. 러시아어
라트비아의 일부 러시아인과 러시아어 사용자는 라트비아어가 국가언어법에 의해 유일한 공용어로 지정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사회민주당 "조화"[29][10], 라트비아 러시아계 연합, 러시아어 학교 보호 본부, 모국어를 위하여! 등의 단체가 이러한 입장을 보인다.[30][28][11][9][12] 라트비아 헌법과 국가 언어법은 라트비아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규정하고 있다.2012년 2월 18일, 라트비아에서는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할지 여부를 묻는 헌법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31][13] 투표 결과, 74.8%가 반대하고 24.9%가 찬성했으며, 투표율은 71.1%였다.[32][14]
2019년부터는 교육 언어로서 러시아어 사용이 점진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했다. 공립 고등학교에서의 일반 교육뿐만 아니라, 사립 대학과 사립 대학교에서도 러시아어를 사용한 교육이 중단될 예정이다.[34][15] 다만, 러시아 소수 민족의 러시아 문화 및 러시아 역사와 관련된 과목(예: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 수업)은 이러한 제한에서 제외된다.[33][16]
7. 4. 정치적 대표성
라트비아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의 권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정당과 정치인이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라트비아 러시아 연합은 타탸나 즈다노카가 유럽 의회 의석 1석을 확보하고 있으며, 조화당은 닐스 우샤코프스와 안드리스 아메릭스가 유럽 의회 의석 2석을 가지고 있다. 이들 정당은 공통적으로 러시아어 사용 권리 보장과 라트비아 내 모든 비시민권자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며,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좌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러시아계 정치인 중에서는 라트비아 정부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도 있다. 예를 들어, Vladimirs Makarovs는 라트비아 복지부 장관을 지냈으며,[17] 뱌체슬라프 돔브롭스키스는 라트비아 교육과학부 장관[18]과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19] 또한, 닐스 우샤코프스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수도 리가 시장으로 재직했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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