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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기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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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기아나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의 일부로 여겨지는 고대 지역이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에 정복된 후,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 시대에는 쿠샨, 파르티아, 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에프탈족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이슬람 시대에는 라시둔 칼리파조에 정복되었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으며, 조로아스터교가 우세했다. 불교,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공동체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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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기아나
지도
기원전 300년경의 마르기아나
기원전 300년경의 마르기아나
일반 정보
이름마르기아나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Margianē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281–261년경 - 651년
종료 사건라시둔 칼리파국에 합병 (651년)
현재 위치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행정
수도메르브
국가셀레우코스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
하위 구역속주

2. 역사

마르기아나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중요한 오아시스 지대로, 청동기 시대부터 문명이 발달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의 일부였으며,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을 거쳐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셀레우코스 제국,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 등 여러 세력의 흥망성쇠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중세에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함께 역사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2. 1. 고대

마르기아나 지역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BMAC) 또는 옥수스 문명으로 알려진 고대 문명의 일부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복 이전 마르기아나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명확히 합의된 바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 왕국이 세워지고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 사회가 발전했다고 주장한다.[4] 또한 호라즘을 중심으로 한 고대 이란 국가가 아리아, 소그디아, 파르티아와 함께 마르기아나를 지배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4] 반면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7세기경 발전된 관개 시설이 존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독립적인 국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4] 한편, 마르기아나가 메디아 제국 시대에 박트리아 사트라피의 일부였다는 주장도 있다.[2]

2. 1. 1.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

오른쪽


마르기아나는 페르시아키루스 2세에 의해 기원전 545년에서 539년 사이에 정복되었으며, 박트리아 사트라피의 일부로 편입되었다.[4] 키루스 2세는 메르브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5]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22년 9월 마구스 출신의 찬탈자 가우마타를 상대로 승리한 후, 제국 전역으로 반란이 퍼져나갔다.[6]

이 시기 마르기아나에서는 프라다(Frâda|프라다fa)라는 인물이 반란을 이끌었으나,[7] 기원전 521년 12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다다르시에 의해 거의 즉시 진압되었다.[8] 아람어로 기록된 베히스툰 비문에 따르면, 이 반란 진압 과정에서 55,423명의 마르기아나인이 살해되고 6,972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전해진다.[9] 다리우스 1세 통치 이후, 마르기아나는 박트리아 사트라피에서 분리되어 아리아 사트라피에 합류하게 되었다.[10]

2. 1. 2. 헬레니즘 시기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면서 마르기아나 지역도 헬레니즘 세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로 후퇴하려 했으나,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베소스는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며 아리아와 마르기아나를 거쳐 동쪽으로 도망쳤다.[11] 알렉산드로스는 베소스를 추격하여 게드로시아아라코시아를 지나 기원전 329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박트리아를 침공했다. 베소스는 북쪽 소그디아로 달아났지만, 결국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메스에게 배신당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다.[12]

기원전 329년 7월, 알렉산드로스가 소그디아 북부 국경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하는 동안, 스피타메네스가 반란을 일으켜 소그디아의 수도 마라칸다(현재의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의 침공에 대응하느라 즉시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지만, 야크사르테스 전투에서 스키타이를 격파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마라칸다를 구원했다. 스피타메네스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기원전 329년 겨울 발크를 공격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8년 봄, 장군 크라테루스를 마르기아나로 파견하여 메르브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도시를 '알렉산드리아 인 마르기아나'(Ἀλεξάνδρεια ἡ ἐν Μαργιανῇgrc)로 재건하도록 했다.[13] 스피타메네스의 반란은 기원전 328년 12월 가바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에노스에게 패배하면서 끝났고, 이후 소그디아는 박트리아와 합쳐져 필리포스의 통치 아래 하나의 사트라피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후계자들인 디아도코이에 의해 분할되었다. 바빌론 분할에서 필리포스가 박트리아와 소그디아의 사트라프로 인정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소그디아만 통치했다는 설도 있다.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수스 분할에서는 스타사노르가 필리포스를 대신하여 박트리아와 소그디아의 사트라프가 되었다.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스타사노르는 중립을 지켰으나, 기원전 311년에서 309년 사이 벌어진 바빌론 전쟁 이후 마르기아나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세운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280년경, 유목민인 파르니 부족이 마르기아나를 침략하여 여러 도시를 파괴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14] 셀레우코스 1세는 장군 데모다마스를 파견하여 이들을 격퇴하도록 했다.[15] 셀레우코스 1세의 뒤를 이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는 마르기아나의 오아시스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옛 알렉산드리아 인 마르기아나) 주변에 300km가 넘는 거대한 방어벽을 건설했다. 또한 도시를 재건하여 '안티오키아 인 마르기아나'(Ἀντιόχεια ἡ ἐν Μαργιανῇgrc)로 개칭하고, 마르기아나를 별도의 사트라피로 만들어 그 수도로 삼았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안티오크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통신 및 무역로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16]

기원전 239년 또는 238년경,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디오도토스 1세는 다시 침입해온 파르니족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7] 이 사건은 당시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쿠스가 제국 동쪽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디오도토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기원전 245년경 스스로 왕을 칭하며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18] 이로써 마르기아나 지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2. 2. 중세

1세기 경 쿠샨족이 마르기아나로 돌아와, 사트라프 사나바레스가 기원후 50년부터 65년경까지 스스로 왕을 칭하는 것을 도왔다.[22] 3세기 초, 마르기아나는 파르티아 제국의 봉신으로 복원되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로 계속 존재했다.[23]

사산 제국아르다시르 1세가 224년 호르모즈간 전투에서 마지막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5세에게 승리한 후, 아르다시르라는 왕이 통치하던 마르기아나는 아르다시르 1세에게 복종하여 봉신이 되었다.[24] 이 봉신 왕국은 샤푸르 1세가 260년경에 정식으로 병합할 때까지 자체 주화를 계속 주조하도록 허용되었다. 샤푸르 1세는 마르기아나의 통치권을 그의 아들 나르세에게 힌드, 사기스탄, 투란의 일부와 함께 양도했다.[25]

5세기, 사산 왕 바흐람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마르기아나와 북부 지역은 에프탈족, 일명 백훈족의 침략과 약탈을 받았다.[26] 바흐람 5세는 처음에는 평화 제안을 보낸 후, 에프탈족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이 야영하는 동안 학살했고, 그들이 자신들의 영토로 도망치려 할 때 추격했다. 바흐람은 마르기아나의 아무다리야강까지 에프탈족을 추격했으며, 그의 장군 중 한 명을 강 건너로 보내 그들을 크게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프탈족은 480년경에 돌아와 565년까지 마르기아나를 점령했다.

2. 2. 1. 이슬람 시대

642년 니하반드 전투에서 사산 제국이 라시둔 칼리파조에게 멸망한 후,[26] 마지막 사산 왕 야즈데게르드 3세다리우스 3세처럼 동쪽으로 도망쳐 651년에 마르기아나에 도착했다.[26]

당시 메르브의 마르즈반(변경 지역 총독)이었던 마호 수리는 야즈데게르드 3세를 처음에는 잘 대접했다. 그러나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도착 후 자신의 측근인 파루흐자드를 새로운 마르즈반으로 임명하고 마호 수리에게 도시를 완전히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마호 수리는 거절했고, 파루흐자드는 왕에게 타바리스탄으로 후퇴할 것을 조언했지만 왕은 무시했다.[27] 파루흐자드는 그 후 타바리스탄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나중에 스스로 왕이 되었다.[28]

이슬람 군대가 접근하자 마호 수리는 에프탈족 통치자 네자크 타르칸과 함께 야즈데게르드 3세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나중에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마르기아나 남부의 마르위르-라드흐(Marw al-Rudh)로 후퇴했다. 마호 수리는 라시둔 장군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동의했고, 아흐나프는 마르기아나에서 이슬람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으며 증원군을 기다렸다.[29]

아흐나프는 메르위-루드를 점령하여 야즈데게르드가 남은 지지자들과 함께 발흐로 도망가도록 강요했다.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는 아흐나프에게 메르브에 머물면서 야즈데게르드를 추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야즈데게르드가 마르기아나 너머의 에프탈족과 동맹을 맺고 메르브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흐나프는 병력을 소집하여 옥수스강 전투에서 야즈데게르드를 격파했다. 패배 후 사산 왕은 방앗간에 숨으려 했으나 마르기아나의 방앗간 일꾼에게 살해되었고, 이로써 사산 제국은 멸망했다.[30]

3. 종교

마르기아나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여 이슬람 정복 이전 시기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발전했다.[31][32]

3. 1. 조로아스터교

마르기아나는 실크로드에 위치하여 이슬람 정복 이전 시기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인구의 대부분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공동체도 함께 존재하며 번성했다.[31][32]

3. 2. 불교

마르기아나에는 불교 수도원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특히 메르브 시는 불교 학문의 주요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3. 3. 기독교

알 비루니에 따르면, 기독교는 그리스도 탄생 후 200년 이내에 마르기아나 지역으로 전파되었다.[32] 서기 3세기에는 적어도 하나의 기독교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334년에는 메르브에 기반을 둔 교구가 처음 언급되었다.[32] 동방 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 교구는 서기 424년부터 메르브시에 기반을 두었다.[33] 이후 554년에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메르브의 첫 주교로 기록된 인물의 이름은 바르 샤바인데, 이는 "추방의 아들"이라는 특이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마르기아나의 기독교 공동체가 로마 제국 영토에서 추방된 이들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554년에는 마르기아나 남부에 메르위루드 교구도 존재했다.[34]

3. 4. 마니교

마니교 공동체는 서기 3세기 중반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참조

[1] 인용
[2] 인용
[3] 서적 Behistun, minor inscriptions - Livius https://www.livius.o[...]
[4] 인용
[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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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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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용
[23] 인용
[24] 인용
[25] 인용
[26] 인용
[27] 인용
[28] 인용
[29] 인용
[30] 인용
[31] 인용
[32] 인용
[33] 인용
[34]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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