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르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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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르카니아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늑대를 뜻하는 고대 이란어에서 파생되어 "늑대의 땅"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카스피해 남동쪽에 위치했으며, 고대 메디아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238년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후 파르티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사산 제국 시대에는 사산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조로아스터교가 주요 종교였으나 기독교와 유대교도 존재했다. 히르카니아는 문학 작품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묘사로 자주 등장하며,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만화 레드 소냐의 배경으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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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르카니아 | |
---|---|
지리 | |
일반 정보 | |
다른 이름 | 고대 그리스어: Ὑρκανία |
위치 | 카스피해 남동쪽 지역 |
역사 | |
존속 기간 | 기원전 548년 - 서기 651년 |
시작 연도 | 기원전 548년 |
종료 연도 | 서기 651년 |
종료 사건 | 사산 왕조 멸망 |
국가 | 메디아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 |
수도 | 자드라카르타 (기원전 548년 – 서기 225년) 구르간 (서기 225년 – 651년) |
현재 위치 | |
위치 |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
2. 어원
'히르카니아'(Ὑρκανίαgrc)는 이 지역의 그리스어 이름으로, 다리우스 대왕의 베히스툰 비문(기원전 522년)과 다른 고대 페르시아어 설형 문자 비문에 기록된 고대 페르시아어 'Verkâna'에서 차용되었다. 'Verkā'는 고대 이란어로 "늑대"를 의미하며, 아베스타어 'vəhrkō', 길라키어 및 마잔다란어 'verk/verg', 페르시아어 'gorg', 산스크리트어 'vŗka' (वृकsa)와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히르카니아'는 "늑대의 땅"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카스피해까지 확장되었으며, 당시 히르카니아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였던 자드라카르타의 이름에 영향을 미쳤다.[4]
히르카니아는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비문(기원전 522년)에 기록된 고대 페르시아어 ''Verkâna''에서 유래된 그리스어 이름이다. ''Verkā''는 고대 이란어로 "늑대"를 의미하며, "늑대의 땅"을 뜻한다. 이 이름은 카스피해까지 확장되었으며, 당시 히르카니아의 수도였던 자드라카르타의 이름에 영향을 미쳤다.[2]
또 다른 고대 이름인 '''다히스탄'''(현대 이란어 단어 "구역" 또는 "카운티"를 의미하는 ''데헤스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은 때때로 히르카니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히스탄은 엄밀히 말해 기원전 5세기 초부터 히르카니아 바로 북쪽에 살았던 멸종된 민족인 다하에의 "장소"를 지칭한다.[4]
3. 역사
또 다른 고대 이름인 '''다히스탄'''은 때때로 히르카니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엄밀히 말해 히르카니아 북쪽에 살았던 다하에의 "장소"를 지칭한다.[4]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25년경 그의 사생아 아들 오쿠스를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했으며,[16] 그는 나중에 다리우스 2세로 왕위에 올랐고 이데르네스를 사트라프로 임명했다.[2] 이데르네스의 아들 테리투케메스는 그가 죽은 후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가 되었고, 다리우스 2세의 딸 아마스트리스와 결혼했지만, 심복 우디아스테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디아스테스는 아마스트리스를 살해하고 다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테리투케메스의 이복 여동생 록사나와 결혼하려 했다.[2]
3. 1. 고대 (헬레니즘 이전)
기원전 600년경, 히르카니아는 메디아 제국의 일부였다. 니콜라우스 다마세누스에 따르면, 메디아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는 아르타시라스를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했다.[5] 메디아 제국 멸망 후, 히르카니아는 아케메네스 제국에 복속되어 키루스 2세에게 기원전 549년-548년에 점령되었다.[6] 키루스 2세는 소아시아에 군사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히르카니아인들을 리디아의 헤르무스 계곡 중앙에 있는 히르카니아 평원에 정착시켰다.[8]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히르카니아는 파르티아 사트라피의 하위 지방으로 기능했으며,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피로도 알려졌다.[2] 때때로 카두시아는 히르카니아의 일부로 통치되었을 수도 있다.[9] 유목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아케메네스 시대에 요새가 건설되었다.[10]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22년 9월 마구스의 찬탈자 가우마타를 상대로 승리한 후, 제국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다.[11] 기원전 522년 12월, 메디아 지도자 프라오르테스를 지지하는 반란이 히르카니아에서 발생했으며,[2] 기원전 521년 3월, 히르카니아 반란군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히스타스페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12] 5월에 프라오르테스가 패배했고 히르카니아는 아케메네스 통치로 돌아갔다.[2] 다리우스는 나중에 히르카니아인들을 리디아의 히르카니아 평원에 있는 다레이오코메(Δαρειονκώμη|다레이온코메grc) 정착지에 정착시켰다.[2] 헤르무스 계곡의 다른 히르카니아 정착지로는 오르모이타와 티아노라가 있었다.[13]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히르카니아 군인들은 기원전 480년에 메가파누스의 지휘 하에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참여했다.[14] 전쟁 후, 히르카니아 군인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헤르무스와 카이쿠스 강 계곡에 배치되었다.[2] 크세르크세스 1세 치하에서 히르카니아는 파르티아 사트라피로부터 분리되어 별도로 통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5]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복했을 무렵, 히르카니아는 파르티아 사트라피에 다시 합쳐져 하위 지방으로 통치되었다.[2] 히르카니아 군인들은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에 맞서 벌어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언급된다.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가 사망한 후, 많은 페르시아 귀족들이 히르카니아로 도망갔다.[2]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0년에 히르카니아에 도착하여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프라타페르네스와 천인대장 나바르자네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2] 알렉산드로스는 그해 늦게 히르카니아의 수도인 자드라카르타(이후 시린스로 알려짐)를 점령했으며, 다른 사트라프와 귀족들의 항복을 받았다.[17] 히르카니아에 있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장군 아미나페스를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했지만,[18]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디아와 타푸리아의 사트라프인 아우토프라다테스가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 자리를 계승했다.[19] 기원전 328년, 아우토프라다테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반란을 일으켰고, 파르티아의 사트라프로 복위된 프라타페르네스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20] 아우토프라다테스는 기원전 324년 파사르가다에에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패배하고 처형되었으며, 프라타페르네스는 히르카니아, 타푸리아, 마르디아의 사트라피를 부여받았다.[2]
3. 2.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3세(기원전 323년) 사후, 그의 제국은 디아도코이들에 의해 바빌론 분할로 분할되었고, 히르카니아는 프라타페르네스의 지배를 받았다.[2]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 이후, 히르카니아는 필리포스에게 주어졌으나,[2] 그는 페이톤에게 살해되었다.[2] 페이톤은 그의 형제 에우데무스를 사트라프로 임명했지만, 에우데무스는 인두스의 사트라프인 페이톤에게 쫓겨났다. 이후 페이톤은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하였다.[21] 안티고노스는 니카노르를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는데, 그는 상부 사트라피라고도 불리는 지역을 다스렸다. 니카노르는 기원전 310년 바빌론 전쟁 중 셀레우코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셀레우코스가 제국의 동부 영토를 정복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22]
안티오코스 1세는 안드라고라스를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했으나, 그는 안티오코스 2세에 반란을 일으켰다.[23] 안드라고라스는 파르니의 파르티아 정복 동안 사망했고, 히르카니아는 아르사케스가 이끄는 아르사케스 제국(파르티아)의 일부가 되었다.[24] 셀레우코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 대한 통치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5]
기원전 209년 라부스 산 전투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히르카니아를 침공하여 탐브락스와 시링크스를 점령하고,[2] 아르사케스 2세는 파르티아를 속국으로 만들었다.[26] 아르사케스 2세는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독립을 다시 주장했을 수 있다.[28] 미트리다테스 1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왕실 휴양지로 사용했다.[30] 데메트리우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왕족 거처를 제공받고, 미트리다테스의 딸과 결혼했다.[2] 사카 족의 침입으로 히르카니아는 약탈당하고, 두 명의 아르사케스 왕이 살해되었다.[31] 미트리다테스 2세는 히르카니아를 회복하고 아르사케스 통치를 재확립했다.[32]
3. 3. 헬레니즘 이후 시대
아르타바누스는 원래 히르카니아의 왕이었으나, 서기 10년 로마의 지원을 받은 보노네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아르사케스 왕조의 왕이 되었다.[33] 그러나 로마의 간섭으로 티리다테스 3세가 즉위하면서 아르타바누스 3세는 잠시 히르카니아로 추방되었다.[2] 이 기간 동안 그는 히르카니아 사트라프의 아들 고타르제스를 입양했다.[34][35]
아르타바누스 3세는 왕위를 되찾았고,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뒤를 이었지만, 고타르제스는 왕위를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다헤로 추방되었다.[2] 서기 46년, 고타르제스는 히르카니아인과 다헤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히르카니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서 고타르제스와 바르다네스 1세를 모두 제거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두 형제는 화해했고, 고타르제스는 히르카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타르제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다헤로 추방되었다.[2]
아르사케스 제국 시대에는 히르카니아를 이웃 부족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르간 만리장성이 건설되었다.[37] 58–63년 로마-파르티아 전쟁 중 히르카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은 네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38] 볼로가세스 1세는 반란군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39] 히르카니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2] 이들은 알란족과 동맹을 맺고 메디아와 아르메니아를 약탈했다.[2]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히르카니아는 독립하여 아르사케스 제국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40]
서기 225년, 히르카니아는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사산 제국에 병합되었고,[2] 지방 중심지는 고르간으로 옮겨졌다.[42] 아스파바드 가문은 히르카니아에 토지를 소유한 일곱 개의 대가문 중 하나였다.[43] 야즈데게르드 1세는 히르카니아에서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44] 야즈데게르드 2세 시대부터 고르간은 주조소를 소유했다.[2] 아마투니 가문의 구성원들은 반란 실패 후 히르카니아로 추방되었다.[46] 페로즈 1세는 에프탈족의 침입을 받아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48] 바흐람 초빈의 반란 이후, 비스탐이 히르카니아의 마르즈반(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패배하고 사망했다.[50] 스바트 바그라투니는 히르카니아의 마르즈반으로 임명되어 번영을 이끌었다.[51][52]
4. 종교
히르카니아와 고대 이란의 나머지 지역은 대다수의 인구가 신봉했던 조로아스터교가 지배했다.[53] 기독교와 유대교 또한 이 지역에서 신봉되었으며, 서기 4세기의 외경 인물인 바르샤바는 히르카니아에 기독교 수도원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54] 동방 교회의 구르간 교구는 서기 424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5]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43년 페니키아의 반란 진압과 이집트 정복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그에게 반대하는 페니키아와 이집트 유대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히르카니아로 추방했다.[56][57] 일부 히르카니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지만, 서기 4세기까지 이 지역에 계속 존재했다.[2]
5. 문학적 언급
라틴 문학에서 히르카니아는 종종 호랑이와 관련되어 언급된다.[58][59]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디도가 아이네아스를 "히르카니아 호랑이가 너를 길렀다"라고 비난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에서 "히르칸 호랑이"(''맥베스'') 또는 "히르카니아 야수"(''햄릿'')를 잔혹성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헨리 6세 3부''에서는 요크 공작이 마가렛 여왕을 "히르카니아의 호랑이"에 비유했다.[60] ''베니스의 상인''에서 모로코의 왕자는 "히르카니아 사막과 광활한 야생"을 언급했다.
월터 스콧 경은 아이반호 35장의 표제에서 "히르카니아 사막의 호랑이"를 언급했다.[61]
만화책 여주인공 레드 소냐는 로버트 E. 하워드의 허구적인 하이보리아 시대의 히르카니아 출신으로 묘사된다.
6. 통치자 목록
이름 | 재위 기간 |
---|---|
아르타시라스 | |
아스티아게스 | |
메가베르네스 | |
오쿠스 | 기원전 425년경 - 423년경 |
이데르네스 | 기원전 423년 - ? |
테리투케스 | |
프라타페르네스 | ? - 기원전 330년 |
아미나페스 | 기원전 330년 |
아우토프라다테스 | 기원전 330년 - 324년 |
프라타페르네스 | 기원전 324년 - 321년 |
필리포스 | 기원전 321년 - 318년 |
에우데무스 | 기원전 318년 - 317년 |
니카노르 | 기원전 315년 - 310년 |
안드라다고라스 | ? - 기원전 238년 |
아르타바누스 | ? - 서기 10년 |
아르다완 | |
고타르제스 | 서기 46년 - 47년 |
비스탐 | 서기 591년 - 596년 |
스므바트 바그라투니 | 서기 596년 - 6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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