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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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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너리즘은 "스타일" 또는 "방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유래된 용어로,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적 조화와 균형에서 벗어나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 불안정한 구도, 강렬한 색채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예술 사조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로마, 피렌체, 만토바 등이 주요 중심지였다.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보이는 즉시성과 균형을 거부하고, 미켈란젤로의 기법을 모방하며 발전했다. 주요 특징으로는 인물의 신장 변형, 원근법 왜곡, 검은 배경, 명암의 사용, 조각적 형태, 선의 명료성 등이 있다. 주요 예술가로는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브론지노, 엘 그레코 등이 있으며, 첼리니 소금병,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 엘 그레코의 '라오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매너리즘은 17세기에 쇠퇴했지만,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미치며 재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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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개요
명칭매너리즘
다른 명칭후기 르네상스
시대1550년경 ~ 1600년경
국가유럽 및 식민지
특징
일반적 특징과장된 우아함
인위적인 세련미
복잡한 구도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 형태
강렬하고 비현실적인 색채
미술인체의 과장된 표현 (길쭉하거나 뒤틀린 모습)
역동적이고 복잡한 포즈
부자연스러운 공간감
밝고 강렬한 색상 대비
종교적 주제, 신화적 주제, 우화적 주제
건축고전적 요소의 변형 및 왜곡
불균형적 비례
복잡하고 장식적인 요소 강조
문학과장된 수사법과 화려한 문체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
비유와 상징의 사용
대표 작가
미술미켈란젤로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브론치노
파르미자니노
조르조 바사리
틴토레토
엘 그레코
얀 산더르스 판 헤메센
안토니오 알레그리 다 코레조
벤베누토 첼리니
건축안드레아 팔라디오
줄리오 로마노
역사적 배경
발생 배경르네상스 전성기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
종교 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
영향바로크 미술의 등장에 영향
기타
관련 용어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낭만주의

2. 명칭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는 "스타일" 또는 "방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유래했다. 영어 단어 "style"과 마찬가지로 ''maniera''는 특정 유형의 스타일(아름다운 스타일, 거친 스타일)을 나타내거나, 어떤 자격이 필요 없는 절대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다(누군가 "스타일이 있다").[6] 조르조 바사리[7]는 그의 저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삶''(1568년) 두 번째 판에서 ''maniera''를 세 가지 다른 맥락에서 사용했다. 예술가의 방식이나 작업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 중세 이탈로-비잔틴 양식을 가리키는 ''maniera greca''라는 용어나 단순히 미켈란젤로의 ''maniera''와 같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 스타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술적 품질에 대한 긍정적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8] 바사리는 또한 마니에리즘 화가였으며, 그가 활동했던 시대를 "la maniera moderna" 또는 "현대 스타일"로 묘사했다. 제임스 V. 미롤로는 "벨라 마니에라" 시인들이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능가하려고 시도한 방법을 설명한다. 이 "벨라 마니에라" 개념은 이렇게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이 자연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선배들을 모방하고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했음을 시사한다. 본질적으로 "벨라 마니에라"는 여러 출처 자료에서 가장 좋은 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종합했다.

스타일상의 명칭으로서 "마니에리즘"은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스위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사용했고 20세기 초 독일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16세기 이탈리아 예술, 즉 더 이상 고르고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을 분류하는 데 사용되었다. "고르네상스"는 조화, 위엄, 고전 고대의 부흥으로 구별되는 시대를 의미했다. "마니에리즘"이라는 용어는 1965년 프리츠 그로스만이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에서 마니에리즘 회화 전시회를 개최한 후 1967년 존 셔먼에 의해 재정의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마니에리즘이 스타일, 운동 또는 시대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어떤 저자들은 그것을 "후기 르네상스"라고 불렀다.[9] 이 용어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16세기 유럽의 예술과 문화를 식별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된다.[10]

3. 역사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는 "스타일" 또는 "방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유래했다.[6] 조르조 바사리[7]는 그의 저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삶''(1568년)에서 ''maniera''를 예술가의 작업 방식, 개인적 또는 집단적 스타일, 그리고 예술적 품질에 대한 긍정적 판단을 위해 사용했다.[8] 바사리는 또한 마니에리즘 화가였으며, 그가 활동했던 시대를 "la maniera moderna" 또는 "현대 스타일"로 묘사했다.

스타일상의 명칭으로서 "매너리즘"은 정의하기 어렵다. 20세기 초 독일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16세기 이탈리아 예술 중 고전 르네상스의 조화롭고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벗어난 예술을 분류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이 스타일, 운동, 또는 시대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10]

158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카라치, 카라바조, 치골리 등의 새로운 세대가 자연주의를 다시 강조했다. 발터 프리들랜더는 이 시기를 초기 매너리스트들이 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반응으로 "반고전주의"적이었던 것에 대해 "반매너리즘"으로 인식했다.[72] 그러나 이탈리아 밖에서는 매너리즘은 17세기까지 지속했다. 주요한 매너리즘의 중심지는 프라하의 루돌프 2세의 궁정, 하를럼, 안트베르펜 등이었다.

양식적 범주로써의 매너리즘은 영국의 시각 및 장식 예술에서는 덜 사용되며, 대신 "Elizabethan(엘리자베스 시대)"와 "Jacobean(제임스 시대)"와 같은 지역적 구분법이 더 일반적이다. 18세기의 장인 매너리즘은 예외이다.[73]

역사적으로, 매너리즘은 16세기의 자연주의를 넘어선 인위성을 강조하는 예술의 명칭이며, 예술가의 성장하는 자의식을 반영한다.


3. 1. 배경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성기 르네상스의 관습과 크게 대조되었다. 이들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볼 수 있는 즉각성과 균형을 따르지 않았다. 매너리즘은 라파엘로의 조수 줄리오 로마노와, 폰토르모와 로소 피오렌티노를 제자로 둔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이 고전에 접근한 두 거장의 제자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매너리즘 경향을 보였다.

잉글랜드 궁정에서의 매너리즘: 헨리 하워드, 1546년 그림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중심은 로마, 피렌체, 만토바였다. 베네치아 회화는 티티안의 긴 작업 기간으로 대표되는 분리된 방향을 추구했다.

1500년대 중반에서 후반, 매너리즘은 비밀스러운 도상학(圖像學)적 프로그램과 예술적인 개성의 감각으로 식견있는 관객들을 매혹시켜 유럽 궁정에서 번성하였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목적이 외경심과 신앙심을 고양하고, 즐기고 교육하는 것이었던 추세를 반영한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 표지, 1568년


고르네상스 말엽, 젊은 예술가들은 위기를 겪었다.[44] 이미 모든 것이 달성된 것처럼 보였고,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해부학, 빛, 인상학에 대한 세밀한 지식, 인간이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인물 구성에서 인체의 혁신적인 사용, 미묘한 색조의 변화 사용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에 도달했다.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했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했다.[11] 이 시점에서 마니에리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44] 새로운 스타일은 1510년에서 1520년 사이에 피렌체 또는 로마, 또는 두 도시에서 동시에 발전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있는 모인 인물들, ''이그누디''


이 시기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예술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으로 묘사되어 왔다.[46]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는데, 처음에는 극찬을 받았지만, 이후 동시대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자주 모방되었다.[46] 당대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던 그의 특징 중 하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위엄을 뜻하는 ''테리빌리타''였으며, 후대 예술가들은 이를 모방하려고 했다.[46] 다른 예술가들은 거장의 작품을 모사함으로써 미켈란젤로의 열정적이고 개성 넘치는 화풍을 배웠는데, 이는 당시 학생들이 회화와 조각을 배우는 표준적인 방법이었다. 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특히 ''이그누디''라고 불리는 모여 있는 인물들과 리비아의 시빌라, 베스티불로 이어지는 로렌차나 도서관, 메디치 가의 묘비의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최후의 심판''을 통해 그들이 따를 만한 모범을 제시했다. 후기 미켈란젤로는 매너리즘의 위대한 모델 중 하나였다.[46] 젊은 예술가들은 그의 집에 침입하여 그의 그림을 훔쳐갔다.[12] 조르조 바사리가 저술한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에서 그는 미켈란젤로가 한때 "모방하는 자들은 결코 모방하는 대상을 넘어설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12]

미켈란젤로를 대표로 하는 고전주의의 성과는 압도적이었고, 예술은 정점에 달해 이제 완성되었다고 여겨졌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기법(마니에라 maniera)"을 고도의 예술적 기법으로 생각하고, 마니에라를 모르는 과거 작가들에 비해 현재 작가들이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고전주의 거장들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했다. 바사리는 이를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연결하여 가능한 한 아름다움을 갖춘 하나의 인체를 만드는 양식”으로, “아름다운 양식(벨라 마니에라)”으로 정의했다.

1520년경부터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앞서 언급된 거장들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출현했고, "마니에라"는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그 결과 고전주의 양식의 조형 언어에 대한 지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고전주의 양식은 극단적인 강조와 왜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고전주의에는 포함되지 못했던 불합리한 여러 원리를 표현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58] 피렌체에서 마니에리즘이 발생한 것은 1512년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추방과 그에 따른 메디치가의 피렌체 귀환, 그러한 사회적 긴장감의 발생과 예술가에 대한 의뢰 수의 증가[5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라파엘로 산티의 로마 이동에 따른 피렌체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하우저는 들고 있다.[60] 또한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니에리즘 양식의 모범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예술가로서 하우저는 야코포 다 폰토르모를 제시하고 있다.[60]

그러나 17세기의 Giovanni Pietro Bellori영어는 미켈란젤로의 "마니에라" 모방자들을 비난했고, 결국 형식에 매여 생기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19세기까지 이어져, 마니에리즘은 1530년경부터 로마와 피렌체에서의 회화 쇠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56년네덜란드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 마니에리즘의 승리』 등을 계기로[61], 20세기 독일에서의 독일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융성에 따라, 마니에리즘 또한 독립된 표현 형태이며, 추상적인 표현에서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재평가되게 되었다.

3. 2. 발전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성기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고, 이들의 양식은 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과장된 연장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이 양식은 "반(反)고전주의" 매너리즘으로도 알려져 있다.[72] 자코모 다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줄리오 로마노, 파르미자니노와 같은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자연스러운 조명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매너리즘 후기: 잠볼로냐의 후계자인 피에트로 타카의 분수, 1629년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광장)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보이는 즉시성과 균형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매너리즘은 라파엘로의 조수인 줄리오 로마노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제자인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매너리즘 경향을 보였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중심지는 로마, 피렌체, 만토바였다. 베네치아 회화는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방향을 추구했다. 1500년대 중반에서 후반, 매너리즘은 유럽 궁정에서 번성하여, 비밀스러운 도상학(圖像學)적 프로그램과 예술적인 개성으로 식견있는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고르네상스 말엽, 젊은 예술가들은 이미 모든 것이 달성된 것처럼 보이는 위기를 겪었다.[44] 해부학, 빛, 인상학 등에 대한 세밀한 지식과 표현 방식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목표와 접근 방식을 찾아야 했고, 이 시점에서 마니에리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1][44] 새로운 스타일은 1510년에서 1520년 사이에 피렌체 또는 로마, 또는 두 도시에서 동시에 발전했다.

이 시기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예술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으로 묘사되어 왔다.[46] 미켈란젤로는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고, 그의 특징 중 하나인 ''테리빌리타''는 후대 예술가들이 모방하려고 했다.[46] 다른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의 화풍을 배웠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이그누디를 포함하여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모범을 제시했다. 후기 미켈란젤로는 매너리즘의 위대한 모델 중 하나였다.[46]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모방하는 자들은 결코 모방하는 대상을 넘어설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12]

후원자들은 예술가들에게 기교적인 기법을 강조하고 서로 경쟁하도록 장려하여 경쟁적인 정신을 길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벽을 장식하라는 의뢰를 받고 서로 경쟁하며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도록 유도되었다.



야코포 폰토르모(Jacopo Pontormo), ''매장'', 1528년; 피렌체 산타 펠리치타 교회(Santa Felicita, Florence)


피렌체의 초기 매너리즘 화가들, 특히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제자들인 야코포 다 폰토르모와 로쏘 피오렌티노는 길쭉한 형태, 불안정하게 균형 잡힌 포즈, 무너진 원근법, 비이성적인 배경, 그리고 연극적인 조명으로 유명하다. 파르미자니노(안토니오 다 코레지오의 제자)와 율리오 로마노(라파엘로의 수석 조수)는 로마에서 유사하게 세련된 미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예술가들은 고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성숙했으며, 그들의 스타일은 고르네상스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과장된 연장선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젊은 예술가들은 자연을 직접 연구하는 대신 헬레니즘 조각과 과거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스타일은 종종 "반고전주의적"으로 여겨지지만,[13] 당시에는 고르네상스로부터의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여겨졌다.

과거 분석에서는 매너리즘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527년 로마 약탈,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등 여러 사회적, 과학적, 종교적, 정치적 운동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이 스타일의 길쭉한 형태와 왜곡된 형태는 고르네상스 미술의 이상화된 구성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되었다.[14]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매너리즘의 두 번째 시기는 초기의 "반고전주의" 단계와 구분된다. 후기 매너리스트들은 지적인 기교와 예술적 기량을 강조했다. 시드니 조셉 프리드버그는 마니에라 예술의 지적 측면에는 관객이 이러한 시각적 참조를 알아차리고 감상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아뇰로 브론치노와 조르조 바사리는 이러한 마니에라 경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유럽 전역의 궁정과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니에라 예술은 과장된 우아함과 표면과 세부 사항에 대한 정교한 주의를 결합한다.

로마, 피렌체, 만투아는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 회화는 티치아노가 대표하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로마에서 활동했던 초기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그들의 스타일을 퍼뜨렸다. 그 결과 고딕 이후 처음으로 국제적인 예술 양식이 탄생했다. 북유럽의 다른 지역들은 이탈리아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라는 이점이 없었지만, 판화와 삽화가 있는 책을 통해 매너리즘 양식이 알려졌다. 북쪽에서 활동하는 개별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북부 매너리즘을 탄생시켰다. 프랑수아 1세는 브론치노의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시간''을 선물 받았다. 카라치 형제, 카라바조 및 치골리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자연주의를 부활시키면서 158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그 양식이 쇠퇴했다. 발터 프리들랜더는 이 시기를 "반 매너리즘"으로 규정했고, 오늘날 카라치 형제와 카라바조는 1600년까지 지배적인 바로크 양식 회화로의 전환을 시작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매너리즘은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2세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축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북부 매너리즘의 다른 중요한 대륙 중심지로는 루돌프 2세의 프라하 궁정과 하를렘, 앤트워프가 있다. 스타일 범주로서의 매너리즘은 영국 시각 및 장식 예술에는 덜 적용된다. 17세기 장인 매너리즘은 패턴북에 의존하는 건축에 적용되는 한 가지 예외이다.

미켈란젤로를 대표로 하는 고전주의의 성과는 압도적이었고, 예술은 정점에 달해 이제 완성되었다고 여겨졌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기법(마니에라 maniera)"을 고도의 예술적 기법으로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고전주의 거장들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했다. 바사리는 이를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연결하여 가능한 한 아름다움을 갖춘 하나의 인체를 만드는 양식”으로 정의했다.

1520년경부터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거장들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출현했고, "마니에라"는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그 결과 고전주의 양식의 조형 언어에 대한 지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고전주의 양식은 극단적인 강조와 왜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고전주의에는 포함되지 못했던 불합리한 여러 원리를 표현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58]피렌체에서 마니에리즘이 발생한 것은 1512년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추방과 메디치 가의 피렌체 귀환, 사회적 긴장감의 발생과 예술가에 대한 의뢰 수의 증가[59],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로마 이동에 따른 피렌체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하우저는 들고 있다.[60] 야코포 다 폰토르모는 마니에리즘 양식의 모범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예술가였다.[60]

그러나 17세기의 피에트로 벨로리는 미켈란젤로의 "마니에라" 모방자들을 비난했고, 결국 형식에 매여 생기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 되었다.

그 후 1956년네덜란드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 마니에리즘의 승리』 등을 계기로,[61] 마니에리즘 또한 독립된 표현 형태이며, 추상적인 표현에서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재평가되게 되었다.

4. 특징

매너리즘은 '양식(manner)'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유래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자연주의와 대비되는 인위성이 특징이다. 20세기 초 독일 미술사학자들이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을 분류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매너리즘은 예술가와 양식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초기 비평가들은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양식"(''maniera'')에서 작업한다고 비판했지만, 이들은 미켈란젤로를 주요 모범으로 삼았다. 조르조 바사리는 1530년경에서 1580년경까지 지속된 매너리즘을 예로 들었다. 158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카라치, 카라바조, 치골리 등의 새로운 세대가 자연주의를 다시 강조했다. 발터 프리들렌더는 이 시기를 "반매너리즘"으로 인식했다.[72] 그러나 이탈리아 밖에서는 매너리즘은 17세기까지 지속했다.

잔 파올로 로마초는 매너리즘 예술가의 예술과 자의식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가지 저작을 썼다. "Trattato dell'arte della pittura, scoltura et architettura"(1584)는 르네상스가 고대에서 부분적으로 물려받았으나 매너리즘이 공들여 만든 동시대의 형식(decorum) 개념에 대한 지침서이다. "Idea del tempio della pittura"(1590)에는 판단과 예술가적 착상에 있어서 개성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는 인간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네 가지 기질" 이론이 설명되어 있다.

매너리즘의 두 번째 시기는 초기의 "반고전주의" 단계와 구분된다. 후기 매너리스트들은 지적인 기교와 예술적 기량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후대 비평가들은 그들이 비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방식"(maniera)으로 작업했다고 비난했다. 아뇰로 브론지노와 조르조 바사리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로마, 피렌체, 만투아는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 회화는 티치아노가 대표하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1520년대 로마에서 활동했던 초기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도시에서 도망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13] 북유럽에서는 판화와 삽화가 있는 책을 통해 매너리즘 양식이 알려졌다. 북쪽에서 활동하는 개별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북부 매너리즘을 탄생시켰다. 158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자연주의를 부활시키면서 양식이 쇠퇴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매너리즘은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랑스 양식의 에로티시즘을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회화를 지배하게 될 초기 바니타스 전통과 결합한 퐁텐블로의 플랑드르 영향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회화의 탁월함은 세련됨, 풍부한 발명(invenzione), 거장의 기교(maniera)를 통해 표현되는 것, 그리고 완성된 작품에 나타나는 재치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마니에리스모는 르네상스의 미적 이데올로기와 크게 달랐던 반고전주의 운동이었다.[21]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21] 후에는 "자연의 진실을 왜곡하고 자연 공식을 진부하게 반복하는 것"으로만 여겨져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21]

매너리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 인물의 신장 변형: 종종 인물의 신장이 길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19]
  • 원근법의 왜곡: 원근법의 왜곡은 완벽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이상을 탐구했다. 축약법 기법을 통해 극단적인 왜곡이 사용될 때는 이미지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19]
  • 검은 배경: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윤곽선의 완벽한 대비를 보여주는 평평한 검은 배경을 사용했다.[19]
  • 명암의 사용: 의도적인 조명을 사용하여 밤하늘의 정수를 포착하고, 종종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19]
  • 조각적인 형태: 조각과 판화를 참고하여 인체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19]
  • 선의 명료성: 인물의 깨끗한 윤곽선에 대한 관심은 마니에리스모에서 두드러졌다.[19]
  • 구도와 공간: 르네상스의 이상, 특히 1점 투시법 기법을 거부했다. 대신 대기 효과와 원근법의 왜곡을 강조했다.[19]
  • 마니에리스모 운동: 인체의 움직임 연구에 대한 관심은 종종 뱀 형태의 자세와 관련된 독특한 유형의 움직임을 표현하게 했다.[19]
  • 그림 틀: 일부 마니에리스모 작품에서는 그림 틀을 사용하여 그림의 배경과 어울리게 하고, 때로는 작품 전체의 구성에 기여하기도 했다.[19]
  • 대기 효과: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19]
  • 마니에리스모 색채: 순수하고 강렬한 청색, 녹색, 분홍색, 노란색의 색상을 사용했다.[19]
  • 기본 원리의 추상화: 원근법, 단축법, 명암법 등이 추상화되어 있다.[58]
  • 왜곡된 공간: 소실점의 고저를 극단적으로 설정한 원근법, 깊이가 막히고 평면화된 공간 등이 있다.[58]
  • 뱀 형태 "피구라 세르펜티나타": 구불구불하고 늘어난 인체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58]
  • 명암의 대비[66]


Angelo Bronzino 001
브론지노의 《사랑의 알레고리》(1540-1545년). 마니에리스모의 특징으로서, 알레고리가 포함된 작품으로 꼽힌다.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1534-1540년). 성모가 안고 있는 예수를 보면, 신체가 강하게 늘어나 있다.


고전주의에서는 같은 크기의 기둥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비뇨라는 고전적 형태 요소를 자유롭게 조합하여 대담한 평면의 건축물을 설계했고, 팔라디오파사드의 열주 기둥 크기를 다양하게 혼합했다.

4. 1. 회화

자코모 다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줄리오 로마노, 파르미자니노와 같은 초기 매너리즘 화가들은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자연스러운 조명을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성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으며, 이들의 양식은 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반작용 또는 과장된 연장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이 양식은 "반(反)고전주의" 매너리즘으로도 알려져 있다.[72] 매너리즘의 기형적인 자세, 불안정한 구도, 자의식 강한 기교는 초현실을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1580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카라치, 카라바조, 치골리 등의 새로운 세대가 자연주의를 다시 강조했다. 발터 프리들렌더는 이 시기를 초기 매너리스트들이 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반응으로 "반고전주의"적이었던 것에 대해 "반매너리즘"으로 인식했다.[72] 그러나 이탈리아 밖에서는 매너리즘이 17세기까지 지속했다.

역사적으로 매너리즘은 16세기의 자연주의를 넘어선 인위성을 강조하는 예술의 명칭이며, 예술가의 성장하는 자의식을 반영한다.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성기 르네상스의 관습과 적나라하게 대조되었다. 이들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성취한 즉시성과 균형과는 관련이 있거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매너리즘은 라파엘로의 조수인 줄리오 로마노와, 전형적인 매너리스트 화가인 폰토르모와 로소 피오렌티노를 제자로 둔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이 고전에 접근한 두 거장의 제자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매너리즘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특히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이런 경향이 보인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중심은 로마, 피렌체, 만토바이다. 분리된 "유파" 안에 머물러 있던 베네치아 회화는 티티안의 긴 작업 기간으로 대표되는 분리된 방향을 추구했다.

150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매너리즘은 비밀스러운 도상학(圖像學)적 프로그램과 예술적인 개성의 감각으로 식견있는 관객들을 매혹시켜 유럽 궁정에서 번성하였다. 이것은 예술의 중요한 목적이 외경심과 신앙심을 고양하고, 즐기고 교육하는 것이었던 추세를 반영한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동료 예술가들에 대한 칭찬을 통해 예술 창작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사리는 탁월한 회화에서는 섬세함과 숙련된 기교(''maniera'')를 통해 표현된 창작력(''invenzione'')의 풍부함이 필요하고, 완성 작품에 나타나는 지혜와 연구, 그리고 예술가의 지성과 후원자의 감성을 강조하는 모든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술가는 이제 단지 성 루카 길드의 숙련공 멤버였던 것에서 벗어났다. 예술가는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우아함과 복잡성에 대한 감상을 불러 일으키는 분위기의 궁정에 자리잡았다. 바사리의 후원자인 메디치의 문장이 그의 초상화 상단에 예술가의 고유한 것인 양 나타났다.

매너리즘 예술가인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평전》의 장식된 표지 그림 테두리(좌측 그림)는 영국의 흐름에서 보면 "제임스 시대(Jacobean)"로 볼 수 있다. 이 책 안에서 미켈란젤로의 메디치가 묘지는 위에는 종이같은 구멍뚫린 테두리와 바닥에는 사티로스의 나체를 표현하여 반(反)건축적인 "건축적" 특징을 시사한다. 피렌체의 비네트 바닥 부분에는 종이나 피지와 같은 재료가 소용돌이 장식 무늬 안으로 잘리고 늘어나고 말려있다. 이 디자인은 인위적으로 만든 "자연스러운" 조화롭지 않은 물리적으로 기발한 병치가 들어간 세부묘사로 자의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이 시기에 대한 또다른 저술은 잔 파올로 로마초가 쓴 것이다. 실제적 저작과 형이상학적인 저작은 매너리즘 예술가의 예술과 자의식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그의 "Trattato dell'arte della pittura, scoltura et architettura"(1584년 밀라노에서 출판)은 르네상스가 고대에서 부분적으로 물려받았으나 매너리즘이 공들여 만든 동시대의 형식(decorum)의 개념들에 대한 부분적인 지침서이다.

이 시기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예술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으로 묘사되어 왔다.[46]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는데, 처음에는 극찬을 받았지만, 이후 동시대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자주 모방되었다.[46] 당대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던 그의 특징 중 하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위엄을 뜻하는 ''테리빌리타''였으며, 후대 예술가들은 이를 모방하려고 했다.[46]

피렌체의 초기 매너리즘 화가들, 특히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제자들인 야코포 다 폰토르모와 로쏘 피오렌티노는 길쭉한 형태, 불안정하게 균형 잡힌 포즈, 무너진 원근법, 비이성적인 배경, 그리고 연극적인 조명으로 유명하다. 파르미자니노(코레지오의 제자)와 율리오 로마노(라파엘로의 수석 조수)는 로마에서 유사하게 세련된 미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예술가들은 고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성숙했으며, 그들의 스타일은 고르네상스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과장된 연장선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로마, 피렌체, 만투아는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 회화는 그의 긴 경력 동안 티치아노가 대표하는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1520년대 로마에서 활동했던 초기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도시에서 도망쳤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유럽 대륙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그들의 스타일은 이탈리아와 북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13]

브론지노는 폰토르모의 제자였으며,[22] 그의 화풍은 매우 영향력이 컸고, 많은 작품의 작가를 밝히는 데 있어 종종 혼란을 야기했다.[22]

야코포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1594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의 유산 이후 베네치아 회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선배들과는 매우 다른 그의 작품은 조르조 바사리에게 "환상적이고, 과장되고, 기이한 스타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4] 그의 작품에서 틴토레토는 베네치아 회화의 고전적 개념에서 멀어지게 한 매너리즘적 요소를 채택했는데, 그는 종종 환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자연주의를 유지하는 작품을 만들었다.[24]

엘 그레코는 과장된 특징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고딕 시대의 사실적인 인체 묘사와 원근법 구사에 이어, 일부 화가들은 감정적·예술적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공간 속에서 비례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는 여전히 독창적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현대 학자들은 그를 어떤 전통적인 화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예술가로 묘사한다.[46] 엘 그레코의 매너리즘의 주요 특징으로는 자극적인 "산성" 색채, 길고 고통스러운 해부학적 표현, 비이성적인 원근법과 빛, 그리고 불분명하고 불안한 이미지가 있다.[25][26]

엘 그레코, ''라오콘'', 국립미술관


엘 그레코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과 매너리즘적 특징과의 연관성은 특히 ''라오콘''이라는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1610년에 그려진[29] 이 작품은 트로이인들에게 목마의 위험을 경고한 라오콘의 신화 이야기를 묘사한다.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정물화와 초상화를 결합한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33] 그의 화풍은 과장된 기법(매너리즘)으로 여겨지며, 과일과 채소를 조합하여 다양한 방식(거꾸로 또는 바로)으로 구성을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했다.[33]

아르침볼도의 다양한 매너리즘적 특징을 담고 있는 그림 중 하나는 "베르툼누스"이다. 검은 배경 앞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다양한 채소, 꽃, 과일로 구성된 루돌프 2세의 모습을 보여준다.[33]

다음은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다.

  • 인물의 신장 변형: 매너리즘 작품에서는 종종 인물의 신장이 길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19]
  • 원근법의 왜곡: 회화에서 원근법의 왜곡은 완벽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이상을 탐구했다. 왜곡이 탐구된 한 가지 방법은 축약법 기법을 통해서였다.[19]
  • 검은 배경: 매너리즘 화가들은 종종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윤곽선의 완벽한 대비를 보여주는 평평한 검은 배경을 사용했다.[19]
  • 명암의 사용: 많은 매너리즘 화가들은 의도적인 조명을 사용하여 밤하늘의 정수를 포착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종종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횃불과 달빛을 사용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19]
  • 조각적인 형태: 매너리즘은 16세기에 인기를 얻은 조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결과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은 조각과 판화를 참고하여 인체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19]
  • 선의 명료성: 인물의 깨끗한 윤곽선에 대한 관심은 마니에리스모에서 두드러졌으며 바로크와 고르네상스와는 크게 달랐다.[19]
  • 구도와 공간: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이상, 특히 1점 투시법 기법을 거부했다. 대신 대기 효과와 원근법의 왜곡을 강조했다.[19]
  • 마니에리스모 운동: 인체의 움직임 연구에 대한 관심은 종종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이 뱀 형태의 자세와 관련된 독특한 유형의 움직임을 표현하게 했다.[19]
  • 그림 틀: 일부 마니에리스모 작품에서는 그림 틀을 사용하여 그림의 배경과 어울리게 하고, 때로는 작품 전체의 구성에 기여하기도 했다.[19]
  • 대기 효과: 많은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은 회화에서 빛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19]
  • 마니에리스모 색채: 마니에리스모의 독특한 측면은 형태, 구성, 빛의 실험 외에도 같은 호기심이 색채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작품들이 순수하고 강렬한 청색, 녹색, 분홍색, 노란색의 색상을 사용했다.[19]
  • 기본 원리의 추상화: 원근법, 단축법, 명암법 등이 추상화되어 있다.[58]
  • 왜곡된 공간: 소실점의 고저를 극단적으로 설정한 원근법, 깊이가 막히고 평면화된 공간 등이 있다.[58]

  • 뱀 형태 "피구라 세르펜티나타": 구불구불하고 늘어난 인체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58]
  • 명암의 대비[66]


미켈란젤로가 그린 분실된 그림의 복제본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원본의 복제본(바스티아노 다 상갈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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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조각

미켈란젤로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매너리즘 경향을 보였다.[46] 초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조각은 고르네상스의 업적을 능가할 독창적인 양식을 찾으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주로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옆에 설치할 작품 의뢰에서 나타났다. 바치오 반디넬리는 ''헤르쿨레스와 카쿠스'' 프로젝트를 미켈란젤로로부터 넘겨받았지만, 벤베누토 첼리니는 "멜론 자루"에 비유하며 혹평했다. 그러나 반디넬리의 작품은 조각상의 받침대에 부조 패널을 도입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5] 첼리니의 청동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는 여덟 개의 시점으로 설계되었고,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다비드와 비교하여 인위적으로 양식화되었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의 특징을 보인다.[16] 금세공인이었던 첼리니의 소금병(1543년)은 그의 첫 조각 작품이며, 그의 재능을 잘 보여준다.[17]

수집가의 진열장을 위한 작은 청동 조각상들은 인기 있는 르네상스 양식이었으며, 장 불로냐가 이 분야에서 뛰어났다. 그는 실물 크기의 조각상도 제작했는데, 그중 두 점이 시뇨리아 광장의 소장품에 들어갔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종 두 개의 얽힌 인물로 된 ''세르펜티나타상''의 예를 고안해냈다.[18]

아드리아엔 드 브리스, ''수성과 프시케'', 북부 매너리즘 실물 크기 청동상, 159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위해 제작


벤베누토 첼리니는 1540년 금과 에나멜로 만든 ''첼리니 소금병''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는 포세이돈암피트리테(물과 땅)가 늘씬한 비율로 표현되어 있으며, 매너리즘 조각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4. 3. 건축

콜디츠 성 교회당의 반암으로 된 정문, 작센 주, 독일. 1584년 안드레아스 발터 1세가 설계하였으며, "안트베르펜 매너리즘"의 좋은 예이다.


매너리즘 건축의 예는 로마 교외의 시골인 카프라롤라의 빌라 파르네세이다.[41] 16세기 조판공의 급증은 매너리즘 양식을 이전의 어떤 양식보다도 빨리 전파시켰다. 16세기 성기 르네상스의 매너리즘 디자인의 중심은 안트베르펜이었다. 안트베르펜을 통해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양식은 잉글랜드, 독일, 북유럽과 동유럽에 널리 전파되었다.[47] "로마"식의 세부묘사가 들어간 장식으로 들어찬 콜디츠 성의 현관 표현(왼쪽 그림)은 북유럽 양식의 좋은 예시가 되어 질박하고 풍토적인 벽체에 대해 개성적으로 독립적인 작품으로 표현된다.

네덜란드 하를렘의 플레샬(Vleeshal)


폴란드 자모시치의 시청, 베르나르도 모란도 설계


마니에리즘 건축은 르네상스 규범에 도전하는 시각적 속임수와 예상치 못한 요소들을 특징으로 한다.[34]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그곳의 마니에리즘 발전에 영향을 받은 많은 플랑드르 예술가들은 알프스 북부 유럽, 특히 건축 분야에 마니에리즘 경향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35] 이 기간 동안 건축가들은 건축 형태를 사용하여 입체적이고 공간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실험을 했다.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조화는 더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리듬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로렌차나 도서관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마니에리즘 건축가이자 선구자는 미켈란젤로 (1475–1564)이다.[36] 그는 여러 층의 정면을 따라 아래에서 위까지 뻗어 있는 큰 필라스터 또는 기둥인 거대 질서를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7] 그는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 설계에 이것을 사용했다. 헤레리아 양식(estilo herrerianoes 또는 ''arquitectura herreriana'') 건축은 16세기 후반 필립 2세 (1556–1598)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에서 발전했으며,[38] 17세기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당시의 바로크 양식에 의해 변형되었다. 이는 스페인 르네상스 건축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며, 초기 플라테레스크 양식에서 16세기 중반의 고전적인 순수주의를 거쳐 헤레리아 양식을 도입한 장식의 완전한 제거라는 점진적인 장식 정화의 과정을 거쳤다.

20세기 이전에는 "마니에리즘"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지만, 현재는 더 일반적이고 비판적인 견해 없이 역사적 시기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39] 마니에리즘 건축은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모더니즘 건축의 규범을 깨면서 동시에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경향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40] 이러한 맥락에서 마니에리즘을 정의하며, 건축가이자 저자인 로버트 벤트리는 "우리 시대 건축의 마니에리즘은 독창적인 표현보다는 관습적인 질서를 인정하지만, 복잡성과 모순을 수용하기 위해 관습적인 질서를 깨고, 모호함을 명확하게 다룬다"라고 썼다.[40]

1560년대 후반부터 몰타의 새로운 수도 발레타에 있는 많은 건물들이 건축가 지롤라모 카사르에 의해 마네리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건물로는 세인트존스 공동대성당, 그랜드마스터 궁전 및 원래의 7개의 오베르주가 있다. 카사르의 많은 건물들은 수년에 걸쳐, 특히 바로크 시대에 개조되었다. 그러나 아라곤 오베르주와 세인트존스 공동대성당의 외관과 같이 몇몇 건물들은 카사르의 원래 마네리즘 디자인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42]

많은 건축 양식이 조화로운 이상을 탐구하는 반면, 마네리즘은 양식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과장과 과장의 미학을 탐구한다.[44] 마네리즘은 지적인 세련됨과 인공적인 (자연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특성으로 주목할 만하다.[45] 마네리즘은 균형과 명료함보다는 구성적인 긴장과 불안정을 선호한다.[46] 마네리즘의 정의와 그 안의 단계는 여전히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북부 또는 안트베르펜 마네리즘은 이탈리아 마네리즘보다 앞서 있으며 이와는 구별된다. 16세기 호황기를 누린 안트베르펜은 초기 르네상스 요소를 포함한 초기 네덜란드 회화의 마지막 단계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고전주의에서는 같은 크기의 기둥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비뇨라는 고전적 형태 요소를 자유롭게 조합하여 대담한 평면의 건축물을 설계했고, 팔라디오파사드의 열주 기둥 크기를 다양하게 혼합했다. 성기 르네상스까지의 예술 작품은 교회나 광장 등 공공시설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마니에리즘 시대 작품의 대부분은 궁정 등 폐쇄적인 환경에서 감상되었다. 또한 다양한 풍자를 곁들인 지적이고 난해한 작품이 선호되었다.

이름설명그림
팔라초 델 테만토바에 있으며, 줄리오 로마노가 설계함. 마네리즘 건축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
만토바 공작궁줄리오 로마노 설계
줄리오 로마노의 자택만토바에 있음
팔라초 마시모 알레 콜론네로마에 있으며, 발다사레 페루치가 설계--
로렌치아나 도서관 현관미켈란젤로 설계--
세인트존스 공동대성당몰타 발레타에 있음--
살바도르 대성당브라질에 있으며, 1657년~1746년 건축. 유네스코 세계유산[43]--
산프란시스코 성당키토에 있으며, 1535년~1650년 건축--
콜디츠 성 "교회 건물"의 유문암 응회암 현관안드레아스 발터 2세 설계, 1584년 건축. 안트베르펜 마네리즘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예.


5. 주요 예술가 및 작품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성기 르네상스의 관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라파엘로의 조수인 줄리오 로마노, 안드레아 델 사르토는 폰토르모와 로소 피오렌티노를 제자로 두었으며, 미켈란젤로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매너리즘 경향을 보였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중심은 로마, 피렌체, 만토바였으며, 베네치아 회화는 티치안으로 대표되는 분리된 방향을 추구했다.

150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매너리즘은 유럽 궁정에서 번성하였으며, 예술의 중요한 목적이 외경심과 신앙심을 고양하고, 즐기고 교육하는 것이었던 추세를 반영한다.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 창작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탁월한 회화에서는 섬세함과 숙련된 기교(''maniera'')를 통해 표현된 창작력(''invenzione'')의 풍부함이 필요하고, 완성 작품에 나타나는 지혜와 연구, 그리고 예술가의 지성과 후원자의 감성을 강조하였다. 예술가는 성 루카 길드의 숙련공에서 벗어나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궁정에 자리잡았다. 바사리의 후원자인 메디치의 문장이 그의 초상화 상단에 나타났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평전》의 장식된 표지 그림 테두리(좌측 그림)는 영국의 흐름에서 보면 "제임스 시대(Jacobean)"로 볼 수 있다. 이 책 안에서 미켈란젤로의 메디치가 묘지는 위에는 종이같은 구멍뚫린 테두리와 바닥에는 사티로스의 나체를 표현하여 반(反)건축적인 "건축적" 특징을 시사한다. 피렌체의 비네트 바닥 부분에는 종이나 피지와 같은 재료가 소용돌이 장식 무늬 안으로 잘리고 늘어나고 말려있다.

잔 파올로 로마초는 마니에리즘 화가의 예술관을 정의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서 ''Trattato dell'arte della pittura, scoltura et architettura''는 decorum (decorum) 개념에 대한 안내서이며, ''Idea del tempio della pittura'' (''회화의 이상적인 신전'')는 인간의 본성과 성격에 대한 "사상의 체액설" 이론에 따라 설명하며, 판단과 예술적 창작에서 개성의 역할을 정의한다.

요아힘 뷔테바엘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616년, 루브르 박물관.


폰토르모는 종교적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으며,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21] 그의 작품의 잘 알려진 요소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묘사하는 것이다.[21] 폰토르모는 작품의 질에 대해 불안감을 표현했으며, 느리고 체계적으로 작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그의 유산은 아뇰로 브론지노와 같은 화가들과 후기 매너리즘의 미적 이상에 영향을 미쳤다.[20]

1517년에 그려진 폰토르모의 『이집트의 요셉』[21]은 요셉이 그의 가족과 재회하는 네 개의 성경 장면을 담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폰토르모의 『이집트의 요셉』은 조화되지 않는 색상을 사용하는 것과 요셉의 이야기에 대한 시간을 일관성 없이 다루는 등 많은 매너리즘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로소 피오렌티노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화실에서 폰토르모와 함께 수학했으며, 1530년 피렌체 매너리즘을 퐁텐블로로 가져왔다. 그는 퐁텐블로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퐁텐블로의 장식 양식은 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탈리아 양식을 앤트워프로 더욱 널리 퍼뜨렸고, 거기에서 런던에서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북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아뇰로 브론지노는 폰토르모의 제자였으며,[22] 그의 화풍은 매우 영향력이 컸다.[22] 브론지노는 조르조 바사리와 협력하여 무대 디자인가로 활동하며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22] 브론지노의 작품은 수요가 많았고, 1539년 메디치 가문의 궁정 화가가 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22] 브론지노 작품의 독특한 매너리즘적 특징은 우유빛 피부색을 묘사하는 것이었다.[22]

그림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 그리고 시간''에서 브론지노는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다. 전경에는 큐피드와 비너스가 거의 키스를 할 듯하지만, 멈춥니다. 그 쌍 위에는 시간의 신이 오른쪽에 커튼을 잡아당겨 그 쌍을 드러내고 왼쪽에는 밤의 여신을 나타냅니다. 구성에는 또한 가면 무리, 소녀와 뱀의 특징으로 이루어진 잡종 생물, 그리고 극심한 고통 속에 묘사된 한 남자가 포함된다.

브론지노의 매너리즘 초상화는 고요한 우아함과 세심한 디테일에 대한 주의로 구분된다. 브론지노의 인물들은 시청자에게서 냉담함과 두드러진 감정적 거리를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다. ''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 그리고 시간''에서 브론지노는 매너리즘 운동, 세부 사항, 색상 및 조각 형태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전술을 사용한다.

알레산드로 알로리(1535–1607)의 <수산나와 장로들>은 잠재적인 에로티시즘과 의도적으로 뛰어난 정물묘사가 혼잡하고 뒤틀린 구성 속에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의 유산 이후 베네치아 화파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조르조 바사리에게 "환상적이고, 과장되고, 기이한 스타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4] 그의 작품에서 틴토레토는 매너리즘적 요소를 채택했는데, 그는 종종 환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자연주의를 유지하는 작품을 만들었다.[24] 틴토레토 작품의 다른 독특한 요소로는 거친 붓놀림을 정기적으로 사용하여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24]과 환영을 만들어내기 위한 안료 실험이 있다.[24]

매너리즘적 특징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있는데, 1591년 미켈레 알라바르디의 의뢰로 산 조르조 마조레를 위해 제작되었다.[24]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에서 이 장면은 구성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묘사된다. 그림의 왼쪽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테이블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다를 따로 떼어놓았다. 어두운 공간에는 몇 개의 광원이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후광과 테이블 위에 매달린 횃불에서 나온다.

''최후의 만찬''은 검은색 배경, 스포트라이트 효과, 연기 속에 형태가 잡힌 인물들과 구성물 주위를 떠도는 대기 효과 등 매너리즘적 특징을 보여준다.

엘 그레코는 과장된 특징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엘 그레코는 독창적인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현대 학자들은 그를 어떤 전통적인 화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예술가로 묘사한다.[46] 엘 그레코의 매너리즘의 주요 특징으로는 자극적인 "산성" 색채, 길고 고통스러운 해부학적 표현, 비이성적인 원근법과 빛, 그리고 불분명하고 불안한 이미지가 있다.[25][26] 엘 그레코의 화풍은 그의 그리스 유산과 스페인과 이탈리아 여행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발전의 정점을 보여준다.[27]

엘 그레코의 작품은 비잔틴 요소뿐만 아니라 카라바조파르미자니노의 영향, 그리고 베네치아의 채색 기법을 포함한 다양한 화풍을 반영한다.[27]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그가 그림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로 여겼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28] 엘 그레코의 작품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높은 수요를 유지했으며, 마드리드의 엔카르나시온 대학과 같은 곳에서 중요한 위촉 작품들을 완성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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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과 매너리즘적 특징과의 연관성은 특히 ''라오콘''이라는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1610년에 그려진[29] 이 작품은 트로이인들에게 목마의 위험을 경고한 라오콘의 신화 이야기를 묘사한다. 엘 그레코는 장면을 트로이가 아닌 스페인 톨레도 근처에 배치하여 "이야기의 시대적 관련성을 부각시켜 보편화했다."[29]

엘 그레코의 ''라오콘''은 인물 형태의 신장이 길어진 점과 뱀과 같은 움직임, 흐릿한 하늘과 배경의 풍경을 흐릿하게 함으로써 만들어낸 대기 효과 등 많은 매너리즘적 특징을 보여준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1540년 금과 에나멜로 만든 ''첼리니 소금병''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는 포세이돈암피트리테(물과 땅)가 불편한 자세로, 늘씬한 비율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매너리즘 조각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라비니아 폰타나(1552–1614)의 ''미네르바의 차림''(1613).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라비니아 폰타나(1552–1614)는 서유럽 최초의 여성 전문 예술가로 널리 인정받는 매너리즘 초상화가였다.[30] 그녀는 바티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31] 그녀의 화풍은 카라치 화가 가문의 영향을 받았으며, 베네치아 화파의 색채가 특징이다. 그녀는 귀족 여성들의 초상화와 당시 여성에게는 드물었던 누드 인물화로 유명하다.[32]

타데오 추카로는 우르비노 근처 산탄젤로 인 바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던 오타비아노 추카로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제인 페데리코 추카로는 1540년경에 태어나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프레데리코 추카로의 화가로서 기록된 경력은 1550년 형인 타데오 추카로 밑에서 일하기 위해 로마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후 피우스 4세를 위해 장식 작업을 완료하고 카프라롤라의 파르네세 빌라의 프레스코 장식 작업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1563년부터 1565년 사이에는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의 그리마니 가문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다. 베네치아 시대 동안 그는 프리울리에서 안드레아 팔라디오와 함께 여행했다.

요아힘 뷔테바엘(1566~1638)은 생애 말년까지도 북방 마니에리스무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바로크 미술의 등장을 무시하여 아마도 마지막으로 활동한 중요한 마니에리스무 화가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 주제에는 피터르 아르첸의 방식을 따른 정물이 포함된 대형 그림과 신화적인 장면, 구리판에 아름답게 제작된 소형 탁상화가 많았으며, 대부분 누드를 특징으로 한다.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정물화와 초상화를 결합한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33] 그의 화풍은 과장된 기법(매너리즘)으로 여겨지며, 과일과 채소를 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을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했다.[33]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관객에게 유머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매너리즘을 적용했는데, 르네상스 작품처럼 진지함을 유지하지 않기 때문이다.[33] 화풍적으로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괴물 같은 모습"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하다.[33]

아르침볼도의 다양한 매너리즘적 특징을 담고 있는 그림 중 하나는 "베르툼누스"이다. 검은 배경 앞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다양한 채소, 꽃, 과일로 구성된 루돌프 2세의 모습을 보여준다.[33] 이 그림의 유머는 루돌프 2세 황제가 그의 공적인 이미지 뒤에 어두운 내면을 감추고 있다는 권력의 풍자를 전달한다.[33] 반면에 그림의 진지한 어조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번영할 행운을 예시한다.[33]

"베르툼누스"는 구성과 메시지 측면에서 다양한 매너리즘 요소를 담고 있다. 하나의 요소는 아르침볼도가 황제의 지위와 정체성을 강조하고 그의 통치의 환상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한 평평하고 검은 배경이다. 루돌프 2세의 초상화에서 아르침볼도는 르네상스의 자연주의적 표현에서 벗어나 과일, 채소, 식물, 꽃의 뒤섞임으로 그를 표현함으로써 구성의 구축을 탐구한다. 그림이 묘사하는 또 다른 매너리즘적 요소는 농담과 진지한 메시지의 이중적 서사인데, 유머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작품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6. 한국에서의 수용과 영향

매너리즘은 원래 16세기 미술에 대한 개념이지만, 초현실주의 등 현대 미술 작품에서도 매너리즘과 공통되는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구스타프 르네 호케는 그의 저서 '미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67]

문학에서도 매너리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스타프 루네 호케의 Manierismus in der Literatur|문학에서의 매너리즘de은 1959년에 출판되었다.[67]

7. 평가 및 의의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성기 르네상스의 관습과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이들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성취한 즉시성과 균형과는 관련이 있거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매너리즘은 라파엘로의 조수인 줄리오 로마노와, 전형적인 매너리스트 화가인 폰토르모와 로소 피오렌티노를 제자로 둔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이 고전에 접근한 두 거장의 제자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매너리즘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특히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현관과 메디치 가 무덤의 조상들에서 이런 경향이 보인다.[67]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중심은 로마, 피렌체, 만토바이다. 분리된 "유파" 안에 머물러 있던 베네치아 회화는 티티안의 긴 작업 기간으로 대표되는 분리된 방향을 추구했다.

150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매너리즘은 비밀스러운 도상학(圖像學)적 프로그램과 예술적인 개성의 감각으로 식견있는 관객들을 매혹시켜 유럽 궁정에서 번성하였다. 이것은 예술의 중요한 목적이 외경심과 신앙심을 고양하고, 즐기고 교육하는 것이었던 추세를 반영한다.

원래는 16세기 미술에 대한 개념이지만, 현대 미술(예: 초현실주의 작품 등)에서 매너리즘과 공통되는 성격을 인정하여,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문학에서도 구스타프 루네 호케(Gustav René Hocke)의 『문학에서의 매너리즘』이 1959년에 출판되는 등[67], 미술뿐 아니라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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