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청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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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청치 시기는 17세기부터 1911년까지 청나라가 몽골 지역을 지배한 시기를 의미한다. 몽골 제국 멸망 이후 분열된 몽골은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었고, 만주족 팔기 제도로 통치되었다. 청나라는 몽골을 통치하기 위해 몽골 관련 사무국을 설치하고, 티베트 불교를 장려하여 몽골인들을 통제했다. 이 시기 몽골은 문학, 예술 등에서 발전을 이루었지만, 한족의 이주와 상업적 침투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쇠퇴하였다. 19세기 말부터 몽골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신해혁명을 거쳐 몽골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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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청치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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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청나라 통치하의 몽골 |
원어 명칭 | 중국어 간체: 清朝统治下的蒙古 중국어 정체: 清朝統治下的蒙古 병음: Qīngcháo tǒngzhì xià de ménggǔ 몽골어: Чин улсын захиргаанд байсан Монгол 몽골 문자: ᠴᠢᠨ ᠤᠯᠤᠰ ᠤᠨ ᠵᠠᠬᠢᠷᠭᠠᠨ ᠪᠠᠶᠢᠭᠰᠠᠨ ᠮᠣᠩᠭᠣᠯ 로마자 표기: Chin ulsyn zakhirgaand baisan Mongol |
별칭 | 몽골 청치시기 |
역사 | |
시작 | 1635년 북원의 에제이 칸 항복 |
주요 사건 | 1691년 북부 할하의 항복 |
종료 | 1911년 12월 외몽골의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선언 |
이전 | 북원 |
이후 | 중가르 칸국 |
정치 | |
정치 체제 | 청나라 계층제 |
수도 | 외몽골: 울리아스타이 내몽골: 후허하오터 |
인구 | |
민족 | 몽골족 |
경제 | |
통화 | 불명 |
기타 | |
현재 국가 | 중화민국 몽골 복드 칸국 우리앙카이 공화국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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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나라 이전의 몽골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현재의 내몽골과 외몽골을 포함한 광활한 몽골 지역은 점차 청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후금 시기 누르하치가 코르친 등 일부 몽골 부족과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으며,[3][4][5] 이후 홍 타이지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대에 걸쳐 군사적 정복과 외교적 복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차하르의 린덴 칸 세력 제압, 할하 몽골의 복속, 준가르 칸국 정복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청나라는 몽골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18]
17세기 초,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부상하면서 몽골 부족들은 점차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코르친 몽골족은 할하 몽골족과 차하르 몽골족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1626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과 동맹을 맺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는 1625년 할하족과 차하르족에게 코르친 귀족 7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으며, 청나라와 코르친 몽골의 오랜 동맹 관계의 시작이었다.[3]
청나라가 1644년 중국 본토를 장악하기 이전부터 여러 몽골 부족들은 후금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차하르의 린덴 칸이 다른 몽골 부족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많은 부족이 후금과 동맹을 선택했다. 누르하치는 초기에는 주로 동맹을 통해 몽골 부족과의 관계를 구축했다.[4][5] 린덴 칸이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은 1635년 홍 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옥새가 홍 타이지에게 넘어갔다고 전해지며, 이는 북원 시대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제이 칸은 친왕(親王)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현재의 내몽골 지역 대부분은 청나라 건국(1636년) 이전에 이미 새로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항복한 내몽골 부족들은 청나라의 행정 체제인 기(旗)로 편제되었다.
내몽골과는 달리 외몽골의 할하 몽골은 한동안 자치 상태를 유지했으나, 1688년 갈단 칸이 이끄는 준가르의 침략을 받으면서 상황이 변했다. 할하의 세 칸(투시예투 칸, 자사그투 칸, 세첸 칸)은 결국 청나라 강희제에게 복속을 청했고, 1691년 돌론 노르(多倫諾爾)에서 열린 회맹에서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강희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준가르를 공격하여 할하 지역에서 몰아냈으며, 이 전쟁을 계기로 외몽골 역시 청나라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할하의 칸들은 1694년까지 청나라 귀족 체제에 편입되었다.[18]
이후에도 청나라는 몽골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칭하이 지역의 호슈트 몽골은 1723년에서 1724년 사이에 정복되었고, 오랫동안 청나라와 대립했던 준가르 칸국은 1755년부터 1757년까지 이어진 전쟁 끝에 완전히 멸망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준가르 학살)이 발생했다. 제국에 마지막으로 편입된 몽골 부족은 1771년 볼가강 유역에서 일리 지역으로 돌아온 토르구트 칼미크였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자신들의 국가를 '중국'(中國, 만주어: 둘림바이 구룬 Dulimbai Gurun)으로 칭하며, 만주족, 한족뿐만 아니라 몽골족, 티베트인 등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통치 체제 아래 통합하려 했다. 1759년 준가르를 정복한 후에는 준가르의 옛 영토가 '중국'(둘림바이 구룬)에 흡수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6][7][8] 이러한 통합 이념은 내몽골, 외몽골, 오이라트 몽골, 티베트인 등 '외번'(外藩) 민족과 '내지'(內地)의 한족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는다는 생각으로 표현되었다.[9] 러시아 제국과의 캬흐타 조약(1768년 개정) 만주어판에서는 국경 지역 범죄 관할권을 다루면서 청나라 백성을 '중앙 왕국(둘림바이 구룬)의 사람'이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몽골족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10][11][12][13][14] 만주족 관리 툴리센이 토르구트 몽골의 지도자 아유카 칸을 만난 기록에서도 토르구트 몽골족은 러시아인과 달리 만주족과 같은 '중앙 왕국의 사람들'(中國之人, 만주어: 둘림바이 구룬 이 니얄마 Dulimbai gurun i niyalma)로 언급되었다.[15]
초기 만주족과 몽골 부족의 관계는 동맹과 통혼을 통해 유지되었다. 누르하치는 1594년부터 할하 몽골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코르친, 카라친 등 동부 몽골 부족들과도 관계를 공고히 했다. 그는 몽골 지도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의 생활 방식과의 유사점을 강조하기도 했지만[16], 때로는 실용적인 목적에 따른 관계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17] 홍 타이지는 이러한 통혼 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21개의 내몽골 부족과 동맹을 강화했다.
그러나 모든 몽골 부족이 순순히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차하르의 린덴 칸은 만주족의 확장에 저항하며 몽골 제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이 항복한 후에도, 에제이 칸의 동생 아부나이는 청나라 통치에 불만을 품고 1675년 삼번의 난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3,000명의 차하르 몽골인들이 가담했으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아부나이를 비롯한 주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처형당했다. 이 사건 이후 차하르 몽골은 다른 내몽골 부족들과 달리 자치권을 잃고 청나라 황제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외몽골에서도 칭군자브가 준가르의 아무르사나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청나라는 몽골족을 통치하기 위해 전통적인 씨족 구조 대신 만주족의 팔기제를 도입했다.[19] 각 기(旗)의 지도자인 자사그는 기존 몽골 왕족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청나라 당국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는 몽골 부족 간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청나라 조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20] 또한 청나라는 몽골인들이 허가 없이 자신이 속한 기의 경계를 넘거나 만리장성 이남의 한족 거주 지역(内地)으로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는 몽골 부족들의 단결을 막고 청나라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21] 종교적 순례와 같은 목적으로 이동할 때에도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다.[22]
18세기부터 청나라는 공식적으로는 한족의 만주 및 몽골 이주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북 지역의 기근, 홍수, 가뭄 등으로 발생한 한족 난민들을 만주와 내몽골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1780년대에는 만주에서 500000ha, 내몽골에서도 수만 헥타르의 땅이 한족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었다.[23] 이러한 정착은 몽골 왕족들이 한족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기의 토지를 넘겨주면서 가속화되었다. 1791년에는 고를로스 전기의 몽골 왕자가 해당 지역의 한족 정착민을 합법화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24]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청나라 관리들과 몽골 귀족들이 호르친 지역의 초원을 한족 농민에게 팔아넘기면서 토지 황폐화가 심화되기도 했다.[25]
한편, 일부 한족들은 '몽골 추종자'(隨蒙古)로서 내몽골로 이주하여 몽골 왕족의 하인으로 일하거나 몽골 여성과 결혼했다. 이들의 후손은 여러 세대에 걸쳐 몽골족과 통혼하며 몽골족으로 동화되었는데, 리 쇼우신의 조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몽골인'(真蒙古)과 구별하기도 했다.[26][27][28]
청나라는 범죄를 저지른 몽골인을 중국 본토의 한족 기(旗) 주둔지로 보내 노예로 삼는 형벌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몽골뿐 아니라 러시아인, 위구르족 등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되었다.[29][30][31]
청나라 시기 몽골 사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엄격한 부계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으며, 4대 이상의 조상을 기억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청나라는 중국식 신유학 이념에 기반한 가부장적 씨족 질서를 몽골 사회에 이식하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32][33]
3. 청나라의 몽골 지배
청나라는 몽골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주족의 팔기 제도를 기반으로 한 '기'(旗) 단위의 행정 체제를 도입했다.[19] 이는 전통적인 몽골의 씨족·부족 구조를 해체하고 각 지역을 청나라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려는 의도였다. 기의 지도자인 자사그는 대부분 기존 몽골 귀족 중에서 임명되었지만, 청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20] 몽골인들은 소속된 기의 경계를 벗어나 이동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다.[21][22] 몽골 관련 행정 업무는 황제 직속 기관인 이판원에서 총괄하였다.
청나라는 몽골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티베트 불교, 특히 황모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사원과 승려에게는 세금 면제 등 각종 특권이 주어졌으며, 이는 몽골인들의 종교적 신념을 이용해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몽골 남성 인구의 상당수가 승려가 되는 등 불교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생산 인구 감소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청나라는 또한 관우를 몽골의 영웅 게세르 칸과 동일시하는 등 문화적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초기 금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점차 한족 상인들의 몽골 지역 진출과 농민들의 이주가 증가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북중국 지역의 재해 난민 구제와 변경 방어 강화 등의 이유로 한족의 정착이 용인되거나 장려되기도 했다.[23] 몽골 귀족들이 한족 상인에게 진 빚 때문에 토지를 넘기거나,[24] 청나라 정부나 귀족이 직접 초지를 한족 농민에게 팔거나 임대하면서[25] 전통적인 유목지는 점차 농경지로 잠식되었다. 이는 몽골 유목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한족 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한족들은 몽골인 귀족의 하인 등으로 내몽골에 정착하여 몽골 여성과 통혼하며 동화되기도 했다.[26][27][28]
이러한 청나라의 지배 정책에 대해 몽골인들의 저항도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차하르부의 아부나이 반란(1675년), 칭하이 호슈트 부족의 반란(1723-24년), 할하 몽골 왕자 칭군자브의 반란(1756-57년) 등이 대표적이지만 모두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나라의 분할 통치, 경제적 수탈, 한족 이주 심화 등은 몽골 사회의 불만을 누적시켰고, 이는 19세기 말 신정(新政) 실시와 맞물려 20세기 초 몽골 독립 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1. 청나라의 몽골 정복 과정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외몽골과 내몽골을 포함한 몽골족 거주 지역 대부분이 청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청나라 건국 이전인 후금 시절부터 만주족은 몽골 부족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명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차하르의 린덴 칸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견제 심리로 인해 여러 몽골 부족들이 후금과 동맹을 맺었다. 누르하치 시기 후금과 몽골 부족의 관계는 주로 동맹에 기반했다.[4][5]
특히 코르친 몽골족은 1625년 할하 및 차하르 몽골족에게 귀족 7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은 후, 1626년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는 청나라와 코르친 부족 간 동맹의 시작점이 되었다.[3] 누르하치는 몽골 부족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할하 몽골 등과 혼인 동맹을 맺고 몽골식 칸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때로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문화적 유사성을 강조하며 "언어는 다르지만 옷차림과 생활 방식은 같다"고 말하기도 했으나,[16]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 몽골족은 가축을 키우고 고기를 먹으며 모피를 입지만, 우리 백성은 밭을 갈고 곡식을 먹는다. 우리는 한 나라가 아니며 언어도 다르다"고 말하며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17]
홍 타이지는 혼인 동맹 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내몽골 부족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차하르의 마지막 칸인 린덴 칸은 만주족의 세력 확장에 맞서 몽골 제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하며 저항했다. 린덴 칸은 1620년대와 1630년대 초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배했고, 1634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은 결국 1635년 홍 타이지에게 항복했으며, 이때 원나라의 옥새를 넘겨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북원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에제이 칸은 친왕(親王) 작위를 받았고, 항복한 내몽골 부족들은 청나라의 팔기 제도 아래 별도의 행정 단위로 편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족은 청나라를 건국하고 중국 본토를 장악했으며, 이때 현재의 내몽골 지역 대부분은 이미 청나라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에제이 칸 사후, 그의 동생 아부나이가 뒤를 이었으나 청나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는 1669년 선양에 유폐되었고, 강희제는 그의 아들 보니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1675년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아부나이는 동생 루부중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3,000명의 차하르 몽골인들이 합세했다. 청나라는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같은 해 4월 20일 반란군을 격파하고 아부나이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차하르 몽골 왕족 남성들은 대부분 처형되었고, 여성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사건 이후 차하르 몽골은 다른 내몽골 부족들과 달리 자치권을 잃고 청나라 황제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외몽골의 할하 몽골은 청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 비교적 소극적이었으나,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에게 침략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삼번의 난을 진압한 강희제는 외몽골 문제에 집중할 여력이 생겼다. 처음에는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갈단이 할하 영토를 공격하자 강희제는 직접 팔기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갈단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1691년, 강희제는 돌론노르(Dolon Nor)에서 할하와 내몽골 지도자들을 모아 회의(맹)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할하의 칸들은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복속했다. 갈단과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할하 몽골을 청 제국으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1694년까지 할하의 세 칸은 청나라 귀족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17세기 말까지 청나라는 내몽골과 외몽골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18]
칭하이 지역의 오이라트계 호슈트 부족(상몽골)은 옹정제 시기인 1723-24년에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준가르 칸국은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1756-57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 과정에서 준가르 학살이 발생하며 그들의 영토는 청나라에 병합되었다. 할하 몽골의 왕자 칭군자브는 준가르의 지도자 아무르사나와 연계하여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 제국에 합류한 몽골 부족은 1771년 볼가강 유역에서 일리 지역으로 돌아온 토르구트 칼미크족이었다.
청나라는 명나라 정복 이후 자신들의 국가를 '중국'(中國, ᠮᠠᠨᠵᡠ
|둘림바이 구룬mnc)으로 칭했다. 1759년 준가르를 정복한 후, 청나라는 새롭게 얻은 영토가 '중국'(둘림바이 구룬)에 통합되었음을 선언했다.[6][7][8] 청나라는 내몽골, 외몽골, 오이라트 몽골, 티베트인 등 비(非)한족 민족들을 한족과 함께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 청 제국에 통합시킨다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9] 1768년 캬흐타 조약의 만주어 판본에서는 청나라 백성을 '중앙 왕국(둘림바이 구룬)의 사람들'로 지칭했으며, 이는 몽골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10][11][12][13][14] 만주 관리 툴리센은 토르구트 몽골 지도자 아유키 칸과의 만남을 기록하며, 토르구트 몽골족이 러시아인과는 달리 만주족과 같은 '중앙 왕국의 사람들'(ᠮᠠᠨᠵᡠ
|둘림바이 구룬 이 니얄마mnc)이라고 언급했다.[15]
3. 2. 청나라의 몽골 통치 정책
청나라의 몽골 통치는 17세기 초 누르하치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코르친 몽골족은 할하 몽골과 차하르 몽골의 위협 속에서 1626년 누르하치의 후금과 동맹을 맺으며 보호를 요청했다.[3] 이는 청나라와 몽골 부족 간 관계의 시작점으로, 이후 청은 명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다른 몽골 부족들을 점차 복속시켰다. 특히 린덴 칸의 저항이 실패하고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이 1635년 홍 타이지에게 항복하면서 내몽골 지역 대부분이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4][5] 외몽골의 할하 몽골은 준가르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1691년 강희제에게 복속하였고,[18] 칭하이의 호슈트 부족은 1723-24년에, 마지막으로 강력한 세력이었던 준가르는 1756-57년 준가르 학살을 거치며 청나라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1771년 일리 카자흐 자치구에서 돌아온 토르구트 칼미크족이 마지막으로 합류한 몽골 부족이었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국가를 '중국'(만주어: 둘림바이 구룬)이라 칭하며, 몽골을 포함한 비한족 민족들을 한족과 함께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 제국에 통합시키려는 이념을 내세웠다.[6][7][8][9] 캬흐타 조약 (1768년)의 만주어 버전에서는 청나라 백성을 '중앙 왕국(둘림바이 구룬) 출신'으로 지칭했으며, 이는 몽골족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10][11][12][13][14] 만주 관리 툴리센이 토르구트 몽골 지도자 아유카 칸과의 만남을 기록한 문서에서도 토르구트 몽골족은 러시아인과 달리 만주족과 같은 '중앙 왕국의 사람들'(中國之人; 둘림바이 구룬 이 니얄마)로 언급되었다.[15]
행정 및 군사 통제청나라는 몽골의 전통적인 씨족 구조를 해체하고 만주족의 팔기 제도를 기반으로 한 행정 단위인 '기'(旗)를 도입했다.[19] 각 기의 지도자인 자사그는 기존 몽골 왕족 중에서 임명되기도 했으나, 청나라 당국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는 몽골 부족 간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청나라 조정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20] 또한 몽골인들은 기의 경계를 넘어 다른 기나 중국 본토로 이동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길 시 처벌을 받았다. 순례 등 특별한 경우에도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다.[21][22] 이러한 분할 통치 정책은 몽골인들의 단결을 막고 청나라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몽골 관련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초기에는 '몽골 주르간'이라는 기관이 있었으나, 1638년 이판원으로 개칭되었다. 이판원은 황제 직속 기관으로 내몽골과 외몽골의 행정뿐 아니라 티베트와 신장 지역의 암반 임명,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까지 담당했다. 법적으로는 청나라의 법전(대청회전)과 선례에 따라 몽골 지역을 관리했지만, 외몽골 내부의 분쟁은 전통적인 할하 법전에 따라 처리되기도 했다. 외몽골의 행정은 울리야스타이의 군정관이 총괄하였으나, 19세기 초부터는 동부 지역(투시예투 칸부, 세첸 칸부)은 울란바토르의 암반이, 서부 지역(사인 노얀부, 자사그투 칸부)은 울리야스타이 총독이 감독하는 방식으로 이원화되었다.
군사적으로 몽골인들은 청나라에게 중요한 동맹이자 병력 공급원이었다. 청나라는 몽골 기병을 제국 전역의 정복 전쟁과 반란 진압에 동원했으며, 제국의 군사 구조는 몽골 군대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청나라는 몽골인들의 군사적 영향력을 점차 통제하려 했다.
사회·문화 정책
청나라 치하 몽골 사회는 귀족과 평민의 두 계층으로 나뉘었다. 몽골 귀족은 청나라 귀족 체계 내에서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실질적인 통치 권력은 기의 군주에게 집중되었다. 기의 군주들은 매년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대가로 선물을 받았는데, 이는 경제적 부담이라기보다는 충성을 확인하는 의례적 성격이 강했다. 평민들은 자신이 속한 기의 군주와 청나라 정부에 세금과 봉사의 의무를 졌다.
청나라는 몽골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티베트 불교, 특히 황모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고위 라마의 권위 아래 사원과 승려들은 세금 면제 등 각종 특권을 누렸다. 이는 몽골인들의 신앙심을 이용하여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려는 정책이었다. 심지어 중국의 영웅 관우를 몽골의 전설적 영웅 게세르 칸과 동일시하는 등 종교적, 문화적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몽골 남성 인구의 절반 가량이 승려가 될 정도로 불교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동시에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청나라는 몽골 사회에 중국식 신유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여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33]
경제적 변화와 한족 이주
초기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 땅에 한족의 이주 및 정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북중국 지역의 재해로 인한 난민들을 만주와 내몽골에 정착시키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23] 또한, 많은 몽골 왕족들이 한족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기의 토지를 담보로 제공하거나 농경지로 넘겨주면서 한족의 토지 잠식은 가속화되었다.[24] 19세기 말에는 청나라 정부와 몽골 귀족들이 호르친 지역의 초원을 한족 농부들에게 팔아넘기면서 목초지 감소와 토질 악화가 심화되었다.[25]
사원의 증가와 함께 한족 상인들의 몽골 지역 침투도 활발해졌다. 사원은 한족 상인들이 몽골 스텝 깊숙이 들어와 상업적 통제력을 확립하는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몽골인들은 한족 상인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게 되었고, 이는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몽골을 군사 예비군으로 유지하기 위해 한족 상인들의 활동을 제한하려 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청나라 관리들은 한족 상인들과 결탁하여 상업 침투를 용인하거나 지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한족들은 '몽골 추종자'로서 몽골 왕족의 하인으로 일하며 내몽골로 이주했고, 몽골 여성과 결혼하여 그 후손들이 몽골족으로 동화되기도 했다.[26][27][28] 한편, 청나라는 범죄를 저지른 한족을 신장의 기 주둔지로 보내 노예로 삼는 동시에, 몽골족을 포함한 내륙아시아의 범죄자들을 광저우 등 중국 본토의 한족 기 주둔지로 보내 노예로 삼는 역추방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29][30][31]
후기 변화와 저항
19세기 들어 청나라의 통치는 안정화되었지만, 몽골 사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과도한 세금, 늘어나는 부채, 한족의 이주로 인한 목초지 감소, 기 군주의 권력 남용 등으로 평범한 몽골 유목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일부 몽골인들은 유목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이 역시 한족 지주나 기 군주에게 토지를 임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몽골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삼번의 난 시기인 1675년, 차하르 몽골의 왕족 아부나이가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차하르 지역은 청 황제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옹정제 시기에는 칭하이의 호슈트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했으며, 건륭제 시기에는 할하 몽골의 칭군자브가 준가르의 아무르사나와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일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청나라는 변경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신정(新政)을 추진했다. 이는 몽골 지역에 대한 한족 이주를 더욱 장려하고 행정 시스템을 중국식으로 개편하려는 시도로, 몽골인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켜 20세기 초 몽골 독립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4. 몽골의 독립 운동과 근대화
(내용 없음)
5. 현대 몽골과 한국의 관계
(내용 없음)
6. 청나라 시기 몽골의 문화
청나라 시기, 몽골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17세기부터 외몽골과 내몽골을 포함한 대부분의 몽골 거주 지역이 청 제국에 편입되면서[4][5], 몽골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문화는 청나라의 통치 정책 아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초기 만주족 지도자들은 몽골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문화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누르하치는 몽골족에게 때로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옷차림과 생활 방식이 같다고 강조하며 유대감을 내세우다가도[16], 다른 때에는 농경 민족인 만주족(주센)과 유목 민족인 몽골족은 생활 방식과 언어가 다르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17] 이는 몽골과의 관계가 문화적 동질성보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홍타이지는 몽골 귀족 가문과의 통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만주-몽골 동맹을 강화했다. 이러한 통혼 정책은 두 민족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한편, 몽골 귀족들을 청나라 체제 내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청나라는 몽골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만주족의 팔기 제도를 몽골 사회에 도입했다.[19] 이로 인해 몽골의 전통적인 씨족 구조는 해체되었고, 각 기(旗)의 지도자인 '자사그'는 청나라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다.[20] 비록 기존 몽골 왕족이 자사그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몽골 부족 간의 수평적 관계를 약화시키고 청나라 조정과의 수직적 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청나라는 몽골인들이 허가 없이 자신이 속한 기의 경계를 넘어 다른 몽골 기나 중국 본토(네이디, 內地)로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21] 이러한 이동 제한 정책은 몽골인들을 각자의 영역에 고립시켜 통일된 세력 형성을 막고 청나라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종교적 순례와 같은 목적으로 이동할 때조차 여권을 발급받아 허가를 받아야 했다.[22]
청나라의 통치 아래 몽골 사회 구조는 귀족과 평민으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몽골 귀족은 청나라 귀족 체계에 편입되어 10개의 작위를 받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기의 군주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은 매년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대가로 선물을 받았는데, 이는 경제적 부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복속 관계를 확인하는 의례였다. 반면, 평민들은 자신이 속한 기의 군주와 청나라 정부에 세금을 내고 봉사할 의무를 졌다. 이들은 기의 군주 허락 없이는 거주지를 떠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족 문화의 영향력도 점차 커졌다. 특히 내몽골 지역에서는 기의 군주들이 궁궐을 지을 때 중국 건축 양식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타났다.[19] 또한, 18세기부터 청나라는 기근이나 재해를 피해 북중국에서 이주해 온 한족 난민들을 만주와 내몽골에 정착시키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23] 이는 공식적으로는 한족의 몽골 이주를 금지했던 기존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몽골 왕족들이 한족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기의 토지를 한족 농민들에게 넘겨주는 경우도 발생하면서[24], 한족 농경지가 몽골 초원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25] 일부 한족들은 몽골 왕족의 하인으로 일하며 내몽골로 이주하여 몽골 여성과 결혼하고 그 후손들이 몽골인으로 동화되기도 했다.[26][27][28]
18세기 말에 이르러 몽골의 전통적인 유목 생활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청나라의 분할 통치 정책인 기 제도는 몽골 부족들의 단결을 저해했고, 티베트 불교의 확산으로 많은 남성 인구가 생산 활동 대신 승려가 되면서 노동력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원을 중심으로 한족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몽골 경제가 중국 상업 자본에 종속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족 상인들의 침투는 몽골인들에게 과도한 부채를 안겨주었고, 목초지가 농경지로 전환되면서 유목민들의 생활 기반을 위협했다. 청나라는 몽골인들을 군사 예비군으로 유지하기 위해 한족의 상업 침투를 제한하려 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청나라는 몽골인들 사이에 부계 씨족 중심의 중국식 신유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 했으나, 몽골 사회의 전통적인 친족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았고 이러한 시도는 대체로 실패했다.[33] 몽골인들은 여전히 조상에 대해 4대 이상을 기억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사회 조직의 기본 단위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32]
청나라 시기 몽골 문화는 만주족의 통치, 티베트 불교의 확산, 한족 문화의 유입 등 다양한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으며 복합적인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인 유목 문화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몽골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6. 1. 티베트 불교의 확산과 영향
1578년 투메드 몽골의 알탄 칸이 제3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사건은 몽골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약 50년 만에 거의 모든 몽골인이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특히 겔룩파(황모파)를 따르고 달라이 라마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승려가 배출되었다.청나라 초기 지도자 홍타이지는 몽골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티베트 불교를 후원하며 보편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교 신앙이 몽골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약화시킨다고 보아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몽골 왕자들이 몽골어를 버리고 라마승을 따라 이름을 짓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34] 심지어 라마승들을 "교정 불가능한 자", "거짓말쟁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35], 몽골인과 티베트인들의 깊은 신앙심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불교 후원 정책을 유지했다.[36] 만주족 지배층은 대체로 개인적인 불교 신앙을 갖기보다는, 몽골과 티베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티베트 불교를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37]

건륭제 시대에 이르러 티베트 불교에 대한 후원은 더욱 강화되었다. 건륭제는 만주족 통치자와 문수보살의 오랜 연관성을 강조하고, 개인적으로도 티베트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관련 예술과 경전 번역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티베트어를 배우고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등 개인적인 신앙심도 깊었으며, 이는 그의 무덤에 티베트 불교 양식이 반영된 것에서도 확인된다.[38] 건륭제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후원하는 이유로 "몽골인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38], 이는 정치적 이점과 그의 개인적 신념이 결합된 결과로 해석된다. 1744년에는 베이징의 용화궁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몽골인들을 위한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만들었다.[39]
청나라의 티베트 불교 후원 정책은 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건륭제는 외몽골 할하 귀족들의 의사와는 달리, 티베트 동부 리탕 출신의 인물을 제3대 젭춘담바로 임명했다. 이는 할하 몽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환생자 문제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40][41] 이러한 결정은 티베트가 환생자가 나오는 유일한 중심지임을 강조하여 몽골의 종교적·정치적 자율성을 제한하려는 청나라 정책의 일환이었다.[42]
몽골인들은 청나라 황제를 '복다 칸(Bogd Khan, 신성한 칸)' 또는 '복다 카간(Bogd Khagan)'이라고 불렀는데[46], 이는 황제의 권위를 종교적으로 신성시했음을 보여준다. 젭춘담바 쿠툭투나 판첸 라마와 같은 고위 종교 지도자들 역시 몽골인들에게 '복다(Bogd)'로 불렸다.[44] 몽골 귀족들은 매년 베이징을 방문하여 '복다 칸'인 황제에게 예를 표해야 했다.[45]
6. 2. 몽골 문학과 예술의 발전
이 시기 몽골 인구의 대다수는 문맹이었지만, 몽골인들은 훌륭한 문학 작품들을 생산했다. 19세기의 글을 아는 몽골인들은 몽골어와 표준 티베트어로 많은 역사 기록을 남겼으며, 어원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중국어와 티베트어로 된 소설이 많이 번역되었다. 청나라 시대 몽골인들은 연대기, 시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저술했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보르지긴 반친발린 인진아시(Borjigin Vanchinbalyn Injinash)가 쓴 '허흐 수다르'(Köke Sudur, 푸른 경전) 등이 있다.6. 3. 훠레(울란바토르) 문화
청나라 시대에 훠레(현재 울란바토르, 몽골의 수도)는 풍부한 문화를 간직한 곳이었다. 훠레 스타일의 노래는 몽골 전통 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알리아 젠더", "아르반 타브니 사르", "차강 사린 시닌 네겐", "자드가이 차강 에굴레" 등이 그 예시이다.7. 청나라 시기 몽골의 행정 구역
청나라 시대 몽골 지역의 행정은 몽골 관련 사무를 총괄하기 위해 설립된 이판원(理藩院, 만주어: 몽골 주르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판원은 처음에는 몽골 관련 업무만 담당했으나 점차 티베트, 신장 지역의 암반 임명 및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까지 감독하는 등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청나라는 몽골 지역을 크게 내몽골(만주어: Dorgi Mongol, 도르기 몽골)과 외몽골(만주어: Tülergi Mongol, 투레르기 몽골)로 나누어 관리했다. 이러한 구분은 현재의 몽골국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분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는 전통적인 몽골의 씨족 구조를 해체하고 만주족의 팔기 제도를 본떠 코슈(khoshuu, 기旗)라는 행정 단위를 기본으로 삼았다. 여러 개의 코슈는 아이마크(aimag, 부部)나 출간(čuulghan, 맹會盟)으로 묶여 관리되었다.
'''내몽골''' 지역은 기존의 24개 아이마크가 해체되고 49개의 코슈로 재편되었으며, 이 코슈들은 다시 6개의 맹(자림 맹, 저쑤투 맹, 주우 우다 맹, 시린골 맹, 울란차브 맹, 이허 주 맹)으로 조직되었다.[47] 또한, 구이화(현 후허호트) 주변의 차하르 8개 코슈와 투메드 2개 코슈는 맹에 속하지 않고 청나라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서부 허타오 지역에는 에지네 코슈와 알라샤 코슈 등이 별도로 존재했다.
'''외몽골''' 지역은 주로 할하 몽골의 4개 아이마크(세첸 칸, 투셰투 칸, 사인 노욘 칸, 자사그투 칸 아이마크)와 그 휘하의 여러 코슈들로 구성되었다. 할하 외에도 훕스골 지역[48]과 탄누 우량카이 등이 외몽골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이 외에도 청나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변방 지역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코브도 지역과 일리 지역(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부), 칭하이 지역 등에도 다수의 몽골 코슈들이 설치되어 관리되었다. 이러한 행정 구역 편제는 몽골족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청나라의 정책적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7. 1. 내몽골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현재의 내몽골을 포함한 몽골족 거주 지역 대부분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장악하기 이전부터 여러 몽골 부족들은 후금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코르친 몽골족은 1625년 할하 몽골족과 차하르 몽골족에게 귀족들이 살해당하는 등 위협을 느끼자, 1626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과 동맹을 맺고 보호를 요청했다. 이는 청나라와 코르친족 간 동맹의 시작이었다.[3]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몽골 부족들을 포섭하거나 정복했는데, 누르하치 시기에는 주로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4][5] 그러나 모든 몽골 부족이 순응했던 것은 아니다. 차하르의 린덴 칸은 만주족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며 몽골 제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후금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배하고 1634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제이 칸은 결국 1635년 홍 타이지에게 항복했고, 이때 원나라의 옥새를 넘겨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북원 시대가 끝나고 현재의 내몽골 지역 대부분이 청나라 건국 이전에 이미 그 세력권에 편입되었다.[18] 홍 타이지는 몽골 귀족 가문과의 혼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21개 내몽골 부족과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항복한 내몽골 부족들은 각각 별도의 행정 단위인 코슈(기, 旗)로 재편되었다.
에제이 칸이 1661년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아부나이가 뒤를 이었다. 아부나이는 청나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저항적인 태도를 보이다 1669년 선양에 유폐되었고, 강희제는 그의 아들 보니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발발하자 아부나이는 기회를 틈타 1675년 동생 루부중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3,000명의 차하르 몽골인들이 합세했다. 청나라는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아부나이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 사건 이후 차하르 몽골 왕족 남성들은 처형되었고, 여성들은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작위는 폐지되었다. 이로써 차하르 몽골은 자치권을 유지했던 다른 내몽골 부족들과 달리 청나라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청나라는 내몽골을 포함한 정복지의 여러 민족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 통치한다는 이념을 내세웠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국가를 '중국'(中國, 만주어: 둘림바이 구룬)으로 칭했으며,[6][7][8] 캬흐타 조약 (1768)의 만주어 판본에서는 조약의 대상이 된 몽골족을 '중앙 왕국(둘림바이 구룬)의 사람' 또는 '중국인'(둘림바이 구룬 이 니얄마)으로 지칭하기도 했다.[10][11][12][13][14] 또한 만주족 관리 툴리센은 토르구트 몽골족을 러시아인과 달리 만주족과 같은 '중앙 왕국의 사람들'(中國之人; 둘림바이 구룬 이 니얄마)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5]
그러나 실제 통치 방식은 분할과 통제에 중점을 두었다. 청나라는 몽골의 전통적인 씨족 구조를 해체하고 만주족의 팔기 제도를 본떠 코슈(기) 단위로 재편했다.[19] 각 기의 지도자인 자사그는 기존 몽골 왕족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종 임명권은 청나라 당국이 가졌다.[20] 이러한 팔기 제도는 몽골 부족 간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청나라 조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기의 경계를 넘어 다른 기나 한족 거주 지역(네이디,内地)으로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했다. 이는 몽골족의 통합을 막고 청나라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21] 종교적 순례와 같은 목적으로 이동할 때도 여권을 발급받아 허가를 받아야 했다.[22] 내몽골 지역에서는 기의 구조가 중국 문화의 영향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일부 몽골 왕족들은 궁궐 건축 등에 중국 양식을 받아들였다.[19]
청나라는 초기에는 만주족과 몽골 땅에 한족의 이주 및 정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북중국 지역의 기근, 홍수, 가뭄 등으로 발생한 한족 난민들을 만주와 내몽골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23] 또한 일부 몽골 왕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한족 상인들에게 빚을 지고, 그 대가로 기의 토지를 한족 농민들에게 경작하도록 넘겨주는 경우도 발생했다. 1791년에는 고를로스 전기의 몽골 왕자가 자신의 영지 내 한족 정착민들을 합법화해달라고 청나라 정부에 청원하기도 했다.[24] 이러한 한족의 이주와 정착은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청나라 정부와 몽골 귀족들이 호르친 지역의 초원을 한족 농민들에게 대규모로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해당 지역의 토양 황폐화를 초래하는 등 환경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25] 한편, 일부 한족들은 몽골 왕족의 하인 등으로 일하며 내몽골로 이주하여 몽골 여성과 결혼하고 그 후손들이 몽골족으로 동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몽골족"(真蒙古)과 구분하기도 했다.[26][27][28]
범죄를 저지른 내몽골인은 광저우 등 중국 본토의 한족 기 주둔지로 추방되어 노예로 삼는 형벌이 시행되기도 했다.[29][31]
청나라 시대 몽골 지역은 크게 내몽골(만주어: Dorgi)과 외몽골(만주어: Tülergi)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 몽골국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 분리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내몽골 지역의 행정 구역은 기존의 24개 아이마크를 해체하고 49개의 코슈(기)로 재편한 뒤, 이를 다시 6개의 출간(맹, 會盟)으로 묶어 관리했다.
맹(盟) 이름 | 주요 지역 (현대 지명) |
---|---|
자림 맹 (Jirim) | 퉁랴오 시 등 |
저쑤투 맹 (Josutu) | 차오양 시, 푸신 시 등 |
주우 우다 맹 (Jo'uda) | 츠펑 시 등 |
시린골 맹 (Shilingol) | 시린골 맹 |
울란차브 맹 (Ulanqab) | 우란차부 시 등 |
이허 주 맹 (Yekejuu) | 오르도스 시 등 |
이 6개 맹 외에도, 구이화(현 후허호트) 주변의 8개 차하르 코슈와 2개의 투메드 코슈는 맹에 속하지 않고 청나라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47]
- 차하르 8개 코슈
- 구이화(후허호트) 투메드 2개 코슈
또한 서부 허타오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코슈들이 별도로 존재했다.
- 에지네 코슈 (현 내몽골 자치구 알라샨 아이마크의 에진 기)
- 알라샤 코슈 (현 알라샨 아이마크의 알라샨 좌기 및 알라샨 우기)
7. 2. 외몽골
할하 몽골은 청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을 비교적 꺼렸으나, 갈단이 이끄는 오이라트 준가르 칸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상황이 변하였다. 할하 서쪽의 오이라트족은 갈단의 지도 아래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결국 할하의 영토를 공격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강희제는 이 문제에 개입하여, 직접 팔기 부대를 이끌고 대포를 동원하여 갈단의 군대를 격파하였다.이 과정에서 강희제는 1691년 돌룬에서 할하와 내몽골 통치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할하 칸들로부터 공식적인 충성 맹세를 받았다. 갈단과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할하족을 청 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였으며, 할하의 세 칸은 1694년까지 청나라 귀족 체제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17세기 말 청나라는 내몽골뿐만 아니라 외몽골 지역까지 통제하게 되었다.[18]
그러나 청나라의 지배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칭군자브 왕자가 이끄는 할하 몽골의 반란 세력은 준가르 지도자 아무르사나와 연계하여 청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이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칭군자브와 그의 가족 전체를 처형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청나라의 통치 하에서 외몽골을 포함한 몽골족의 전통적인 씨족 구조는 만주족의 팔기 제도로 대체되었다.[19] 각 기의 지도자(자사그)는 기존 몽골 왕족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청나라 당국에 의해 선택되었기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20] 이러한 행정 구조 개편은 몽골 부족 간의 연계를 약화시키고 청나라 조정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몽골족은 다른 몽골 기나 한족 거주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길 시 처벌을 받았다. 이는 몽골족의 통합을 막고 지역별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청나라의 의도를 보여준다.[21] 종교적 순례와 같은 목적으로 기의 경계를 넘으려면 여권을 발급받아 허가를 얻어야 했다.[22]
청나라 시기 외몽골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할하
- * 세첸 칸 아이마크 23개 코슈
- * 투셰투 칸 아이마크 20개 코슈
- * 사인 노욘 칸 아이마크 24개 코슈
- * 자사그투 칸 아이마크 19개 코슈
- 훕스골 지역[48]
- 탄누 우량카이
- 코브도 지역 30개 코슈
- 일리 지역 13개 코슈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
- 칭하이 지역 29개 코슈 (칭하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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