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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호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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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운티 호의 반란은 1789년 4월 28일, 윌리엄 블라이 함장이 이끄는 영국 해군 함선 HMS 바운티 호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원래 빵나무 묘목을 서인도 제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플레처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한 12명의 선원이 반란을 일으켜 블라이 함장과 18명의 선원을 작은 보트에 태워 추방했다. 반란 이후, 크리스천은 바운티 호를 이끌고 타히티를 거쳐 피트케언 섬에 정착했다. 블라이는 3,500해리의 조난 항해 끝에 티모르 섬에 도착하여 반란 사실을 보고했다. 이후 영국 해군은 반란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판도라 호를 파견했으나, 판도라 호는 침몰하고, 체포된 반란자들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으며, 블라이 함장의 가혹한 통치와 크리스천의 반란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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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호의 반란
지도
기본 정보
사건바운티 호의 반란
발생일1789년 4월 28일
위치타히티 근처, 통가 북서쪽
결과반란의 성공, 바운티호의 침몰
반란자플레처 크리스천
승무원
충성파윌리엄 블라이와 충성파 선원
관련 장소타히티
피트케언 제도
토푸아 섬
원인선원들의 불만과 플레처 크리스천의 불만
선박 정보
선박 이름HMS 바운티
선박 종류무장 수송선
선박 소유영국 해군
주요 인물
함장윌리엄 블라이
반란 주동자플레처 크리스천
관련 인물존 애덤스 (반란자)
네메이아
테누
마우아투아
타히티의 아이노
사건 배경
영국 해군제빵 나무(빵나무) 수송을 위한 항해
타히티 체류장기간의 체류로 인한 선원들의 불만
사회적 배경영국의 해상 강국 시대의 사건
반란
반란 주도플레처 크리스천
반란 발생 이유선원들의 불만과 가혹한 함장의 통치
함장의 추방윌리엄 블라이와 충성파 선원들 구명정에 추방
반란 이후반란자들은 타히티로 돌아감
사건 이후
바운티호의 침몰피트케언 섬으로 이동 후 침몰
반란자들의 운명일부는 체포되어 영국으로 송환, 일부는 피트케언 섬 정착
윌리엄 블라이의 행적영국으로 돌아가 후에 해군에서 공훈을 세움
피트케언 섬반란자들의 후손들이 거주
기타
관련 영화여러 차례 영화화됨
참고 자료1935년 영화
1962년 영화
1984년 영화

2. 배경

바운티호는 타히티섬에서 빵나무 묘목을 서인도 제도로 운반하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빵나무는 카리브해 지역 노예들의 식량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29] 함장 윌리엄 블라이의 지휘 아래 1787년 출항한 바운티호는 1788년 10월 타히티에 도착했다. 약 5개월간의 타히티 체류 기간 동안, 플레처 크리스천을 포함한 많은 선원들은 섬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규율 문제가 발생하여 일부 선원이 탈영 혐의로 태형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후 발생할 반란의 배경이 되었다.

2. 1. 선박 및 임무

1960년에 복원된 바운티호


HMAV ''바운티''호(His Majesty's Armed Vessel ''Bounty''), 또는 HMS ''바운티''호는 1784년 요크셔주 의 블레이드스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이다. 원래 이름은 '베시아'(Bethiaeng)였으며, 상선인 탄광선으로 만들어졌다.[29] 1787년 5월, 영국 해군이 1,950 파운드(£)에 매입하여 '바운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바운티호는 3개의 돛대를 가진 전장 범선으로, 전체 길이는 약 27.74m, 가장 넓은 지점의 너비는 약 7.62m였으며, 건조자 구식 측정법으로 230톤 버든(tons burthen)으로 등록되었다. 무장은 4파운드 포 4문과 0.5파운드 스위블포 10문이었고, 머스켓과 같은 소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영국 해군성에서는 가장 작은 군함 부류인 커터(cutter)로 분류했기 때문에, 함장은 해군 중위 계급이었고 선내의 유일한 장교였다. 또한, 커터에는 함장이 권위를 유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왕립 해병대 파견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바운티호를 "전함"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29]

바운티호의 임무는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인 타히티(당시에는 '오타헤이트(Otaheite)'로 표기)에서 빵나무 묘목을 채집하여 서인도 제도의 영국 식민지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 탐험은 왕립 학회가 주도하고 회장인 조셉 뱅크스 경이 주관했다. 뱅크스와 카리브해 농장 소유주들은 빵나무가 서인도 제도에서 잘 자랄 경우, 노예들에게 값싼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임무 수행을 위해 바운티호는 템스 강의 뎁트퍼드 조선소에서 뱅크스의 감독 아래 개조되었다. 통상 함장의 숙소로 사용되는 대 선실은 1,000그루가 넘는 빵나무 묘목을 위한 온실로 바뀌었다. 이 온실에는 유리창, 채광창, 납으로 덮인 갑판, 그리고 담수를 아끼기 위한 배수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개조로 인해 선박 내부 공간이 크게 줄어들었고, 작은 배에 탑승한 승무원과 장교들은 긴 항해 기간 동안 심각한 과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승무원은 총 46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일한 장교인 함장 윌리엄 블라이를 포함하여, 상급 준사관 3명, 준사관 11명, 사관후보생 6명, 하사관 14명, 수병 11명이었다. 당시 33세였던 블라이는 이전에 제임스 쿡 선장 지휘 아래 레졸루션호의 항해사로 근무했고 상선에서도 항해한 경험이 있어 해당 해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함장직을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운티호는 1787년 12월 23일 영국 포츠머스 항구를 출항했다. 처음에는 남아메리카의 혼곶을 돌아 태평양으로 항해할 계획이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경로를 변경하여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1788년 10월 26일에 타히티에 도착했다. 항해 도중 블라이는 항해사 존 프라이어(John Fryer)를 강등시키고, 항해 준사관 중 한 명이었던 플레처 크리스천을 해군 중위 대행으로 임명했다.

바운티호는 빵나무와 기타 식물을 싣기 위해 1789년 4월까지 타히티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플레처 크리스천은 타히티 여성과 결혼했으며, 많은 선원들도 현지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3명의 선원이 탈영 혐의로 체포되어 태형을 받기도 했다.

2. 2. 윌리엄 블라이 함장

HMS ''바운티''호의 함장이었던 윌리엄 블라이 중위


뱅크스의 동의를 얻어, 탐험대의 지휘는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 중위에게 맡겨졌다.[3] 블라이는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1776년~1780년)에 HMS ''레졸루션''호의 항해사로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4] 이 항해에서 쿡 선장은 1779년 하와이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5][6] 블라이는 1754년 해군 및 군사 전통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리처드 로드니 블라이 제독은 그의 삼촌이었다.[3][5] 21세에 쿡의 배에 승선한 것은 상당한 영예였으나, 블라이는 자신의 기여가 탐험의 공식 기록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7]

1783년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 해군 규모가 축소되자, 블라이는 휴가 중 반봉급 상태로 육지에 머물게 되었다.[8] 한동안 직업이 없던 블라이는 영국 상선에서 임시 일자리를 구했고, 1785년에는 아내의 삼촌인 던컨 캠벨 소유의 상선 ''브리타니아''호 선장이 되었다.[9] 블라이는 이전 수입(연간 500GBP)에 비해 훨씬 적은 중위 봉급(연간 70GBP)에도 불구하고, 1787년 8월 16일 명망 있는 ''바운티''호의 임무를 수락했다. 이는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바운티''호는 허용된 장교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블라이는 배의 재무관 역할도 겸해야 했다.[10][11]

블라이의 항해 명령서는 중요하지만 덜 탐험된 해역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남아메리카의 케이프혼을 통해 태평양에 진입한 후, 타히티에서 빵나무를 수집하고, 엔데버 해협을 통해 서쪽으로 항해해야 했다. 이후 인도양남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서인도 제도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바운티''호는 남반구를 일주하게 될 예정이었다.[12]

2. 3. 승무원 구성

''바운티''호의 승무원은 함장 윌리엄 블라이를 포함한 영국 해군 인원 44명과 민간인 식물학자 2명을 합쳐 총 46명으로 구성되었다. 블라이 함장 바로 아래에는 해군 위원회(Navy Board)에서 임명한 항해사 존 프라이어를 비롯한 하급 장교들이 있었다. 이들 하급 장교에는 보트스웨인, 선의, 목수, 포수가 포함되었다. 또한, 두 명의 항해사 보조관과 두 명의 견습 함장 외에도 여러 명의 명예 견습 함장, 이른바 "젊은 신사들"이 승선했다. 이들은 해군 장교를 지망하는 청년들로, 함선 명부에는 숙련된 선원으로 기재되었지만 견습 함장들과 함께 생활하며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승무원 대부분은 블라이가 직접 선발했거나,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추천을 통해 구성되었다. 포수 윌리엄 페코버와 무기수리원 조셉 콜먼은 쿡 선장과 블라이와 함께 ''레졸루션''호에 승선했던 경험이 있는 베테랑 선원이었다. 컴벌랜드 출신의 부유한 맨섬 귀족 가문 자제인 23세의 플레처 크리스천도 승무원에 포함되었다. 그는 법조인의 길 대신 해양 생활을 택했으며, 이전에 블라이와 함께 두 차례 서인도 제도로 항해하며 사제 관계를 맺고 숙련된 항해사로 성장했다. 크리스천은 처음에는 봉급 없이 명예 견습 함장으로 승선하려 했으나, 블라이는 그에게 유급 항해사 보조관 직책을 부여했다. 블라이에게 추천된 또 다른 젊은 신사로는 15세의 피터 헤이우드가 있었다. 그는 크리스천의 먼 친척이자 맨섬 출신으로, 블라이의 장인인 리처드 베섬의 추천을 받았다.

탐사 임무를 위해 뱅크스 경이 추천한 두 명의 민간인 식물학자("정원사")도 동승했다. 수석 식물학자인 데이비드 넬슨은 쿡 선장의 세 번째 항해에 참여하여 타히티 방문 경험이 있었고 현지 언어도 일부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조수인 윌리엄 브라운은 프랑스와의 해전 경험이 있는 전직 견습 함장이었다. 뱅크스는 또한 자신의 후원을 받는 토마스 헤이워드와 존 할릿에게 공식 견습 함장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전체적으로 ''바운티''호의 승무원은 비교적 젊은 편으로, 대부분 30세 미만이었다. 출항 당시 블라이 함장은 33세였다. 승무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쿡 선장의 세 번의 항해에 모두 참여했던 39세의 페코버와, 1년 연상으로 이전에 ''브리타니아''호의 항해사였던 로렌스 레보그가 있었다.[1] 가장 어린 승무원은 영국을 떠날 당시 15세였던 할릿과 헤이우드였다.

3. 탐험

바운티 호는 영국 정부의 임무를 받아 서인도 제도의 노예들을 위한 값싼 식량 공급원으로서 타히티의 빵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1787년 12월 23일 스핏헤드를 출항했다. 윌리엄 블라이 함장의 지휘 아래, 배는 대서양을 건너 남미 케이프 혼을 통과하려 했으나 거센 폭풍우로 인해 실패하고 동쪽으로 항로를 변경하여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경유했다. 이후 인도양과 타스마니아(당시 반디멘스랜드)를 거쳐 1788년 10월 26일, 마침내 목적지인 타히티의 마타바이 만에 도착했다. 타히티에서는 빵나무 묘목을 수집하는 주요 임무를 수행하며 약 5개월간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선원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블라이 함장과 일부 장교 및 선원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빵나무 묘목을 싣고 타히티를 떠난 것은 1789년 4월 5일이었다. 이 탐험 과정에서의 구체적인 항해 경로와 사건들은 다음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케이프 혼으로

1787년 10월 15일, 바운티호는 최종 출항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영국 해협의 스핏헤드로 향하여 뎁트퍼드를 떠났으나, 악천후로 인해 11월 4일에야 스핏헤드에 도착했다. 블라이는 짧은 남반구 여름이 끝나기 전에 케이프 혼에 도착하기를 원했지만, 해군성의 명령 발부가 3주 더 지연되었다. 11월 28일에 출항을 시도했으나 역풍에 막혀 결국 12월 23일에야 스핏헤드를 떠날 수 있었다. 출항 지연으로 케이프 혼 통과가 어려워질 것을 대비해, 블라이는 필요시 희망봉을 경유하는 대체 항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군성의 허가를 미리 받아두었다.

항해가 시작되자 블라이는 선장의 엄격한 위생 및 식단 규율을 도입했다. 그는 배의 청결 상태와 음식에 대해 끊임없이 신경 썼으며, 해군의 전통적인 4시간 교대 근무 대신 3교대 근무제를 시행하여 선원들에게 더 긴 휴식 시간을 보장했다. 또한 선원들의 사기를 위해 정기적인 음악과 춤 시간을 마련했다. 초기 보고서에서 블라이는 "남자들과 장교들이 모두 온순하고 잘 처신하며... 쾌활함과 만족감이 넘친다"고 만족감을 표하며 징벌의 필요성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다만, 외과의사 토마스 휴건이 게으르고 비위생적이며 술에 취해 있는 점이 유일한 문제였다.

항해 초기에 블라이는 플레처 크리스천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해사 존 프라이어보다 그를 더 신임하여 사실상의 2인자로 대우했다. 1788년 3월 2일,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대리 중위 계급을 부여하여 그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프라이어는 이 결정에 겉으로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이후 블라이와의 관계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크리스천이 승진한 지 일주일 후, 프라이어의 주장에 따라 블라이는 수병 매슈 퀸탈의 "무례하고 반항적인 행위"를 이유로 채찍질 12대를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징벌 없는 항해를 바랐던 블라이의 희망은 깨졌다.

1788년 4월 2일, 바운티호가 케이프 혼에 접근하자 극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블라이는 이를 "내가 전에 만났던 것보다 더 심한...우박과 진눈깨비가 섞인 심한 돌풍"이라고 기록했다. 거센 바람은 배를 계속 뒤로 밀어냈고, 4월 3일에는 일주일 전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블라이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한 달 가까이 악천후와 싸우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결국 4월 17일, 블라이는 지친 선원들에게 케이프 혼 통과를 포기하고 희망봉으로 항로를 변경한다고 알렸다. 블라이의 항해 일지에는 이 결정에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의 큰 기쁨에"라고 적혀 있다.

3. 2. 희망봉에서 태평양으로

1788년 5월 24일, 바운티호는 희망봉 동쪽의 폴스 만에 정박하여 5주 동안 수리와 보급을 진행했다.[9] 블라이 함장의 항해일지에는 자신과 선원들의 건강 상태가 다른 배들과 비교하여 매우 양호했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를 희망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1] 이 기간 동안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역사가 그렉 드닝은 이러한 금전 거래가 젊은 크리스천에게 부담을 주어 두 사람의 관계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2] 반면 캐롤라인 알렉산더는 이를 "중요한 우정의 표시"라고 묘사하면서도, 블라이가 크리스천에게 이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다고 지적했다.[11]

7월 1일 폴스 만을 떠난 바운티호는 남인도양을 가로질러 다음 기항지인 반디멘스랜드(현재의 타스마니아)의 어드벤처 만으로 향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 도중 외딴 생폴 섬을 지났으나 상륙하지는 않았다. 날씨는 춥고 겨울과 같았으며 항해 관측이 어려웠지만, 블라이의 뛰어난 항해 기술 덕분에 8월 19일 반디멘스랜드 남서쪽 끝의 뮤스톤을 발견하고 이틀 후인 8월 20일 어드벤처 만에 정박했다.[13]

바운티호 일행은 어드벤처 만에서 휴식을 취하며 낚시를 하고, 물통을 채우고, 목재를 베는 등의 시간을 보냈다. 원주민들과 평화로운 만남도 있었다.[13] 그러나 이곳에서 블라이와 장교들 사이의 공개적인 불화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블라이는 목재 절단 방식을 두고 목수인 윌리엄 퍼셀과 언쟁을 벌였다.[14] 블라이는 퍼셀에게 배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퍼셀이 거부하자, 블라이는 그의 식량을 끊어버리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고, 블라이의 기록에 따르면 퍼셀은 "즉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14]

타히티로 가는 항해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충돌이 계속 발생했다. 10월 9일, 항해사 존 프라이어는 블라이가 자신의 항해 능력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제공하지 않는 한 함선 계정 장부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블라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승무원을 소집하여 군법을 낭독했고, 프라이어는 결국 물러섰다.[15] 또한 외과의사 토머스 휴건과의 문제도 심각했다. 그는 천식을 앓던 선원 제임스 발렌타인을 치료하던 중 부주의한 사혈로 인해 선원이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만들었다.[16]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휴건은 블라이에게 발렌타인이 괴혈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고,[17] 이 때문에 블라이는 선내 괴혈병 예방법을 더욱 철저히 시행하게 되었다.[18] 휴건은 거의 항상 술에 취해 무능력한 상태였고, 결국 블라이는 그의 술을 압수했다. 휴건은 잠시 임무에 복귀하여 타히티 도착 직전 모든 승선 인원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실시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19]

1788년 10월 26일, 바운티호는 마침내 타히티의 마타바이 만에 도착하며 27086nmi의 항해를 마쳤다.[20]

3. 3. 타히티 체류

1776년 윌리엄 호지스(William Hodges)가 그린 그림에 묘사된 타히티(Tahiti)의 마타바이 만(Matavai Bay)


윌리엄 블라이는 타히티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타히티 왕인 포마레 1세(Pōmare I)를 비롯한 지역 족장들의 협조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최고 족장 티나(Tynah)는 15년 전 제임스 쿡 선장의 항해 때 블라이를 기억하고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블라이는 족장들에게 선물을 주고 그들의 왕인 영국 조지 3세빵나무 묘목만을 원한다고 알렸다. 그들은 이 간단한 요청에 기꺼이 동의했다.[10] 블라이는 플레처 크리스천에게 묘목을 재배할 구역을 설립하는 해안 파견대를 이끌도록 지시했다.[11]

육지에 있든 배에 있든, ''바운티(Bounty)''호가 타히티에 머무는 5개월 동안 선원들의 임무는 비교적 가벼웠다. 많은 선원들이 원주민 여성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었다. 크리스천을 포함한 18명의 장교와 선원들이 성병 치료를 받았고[12], 다른 선원들은 정기적인 파트너를 두었다.[13] 크리스천은 마우아투아라는 폴리네시아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컴벌랜드 출신의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라"라고 불렀다.[14] 블라이 자신은 정숙했지만[15], 선원들의 행동에 대해 관대했으며,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큰 방탕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효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기대했고, 장교들의 태만과 해이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는 분노하며 "이 배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태만하고 무가치한 하급 장교들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12]

외과의사 허건(Huggan)은 1788년 12월 10일에 사망했다. 블라이는 이것을 "과음과 나태의 결과…그는 항해 내내 한 번에 갑판을 몇 바퀴 돌아다니는 것조차 결코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17] 이전에 총애받았던 크리스천도 블라이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실제 또는 상상 속의 태만으로 선장에게 종종 함선 승무원과 타히티 원주민들 앞에서 굴욕을 당했고,[12] 장비의 분실이나 도난으로 이어진 부주의한 선원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외항 항해 중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태형이 이제 점점 더 흔해졌다.[18] 1789년 1월 5일, 찰스 처칠, 윌리엄 머스프랫, 존 밀워드 세 명의 승무원이 작은 보트와 무기, 탄약을 가지고 탈영했다. 머스프랫은 최근 태만으로 태형을 당했다. 처칠이 배에 남긴 소지품 중에는 블라이가 탈영 음모의 공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으로 해석한 명단이 있었는데, 선장은 나중에 그 명단에 크리스천과 헤이우드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블라이는 자신의 제자가 탈영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고,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처칠, 밀워드, 머스프랫은 3주 후에 발견되었고, 배로 돌아온 후 태형을 당했다.[18]

2월부터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1,000개가 넘는 빵나무 묘목이 화분에 심어져 배로 옮겨졌고, 선실을 가득 채웠다.[19] 타히티인들과 함께 보낸 편안한 생활과의 이별을 후회하는 사람들에 의해 장거리 귀항 항해를 위해 배가 수리되었다. 블라이는 떠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리처드 허우가 자신의 기록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타히티에서의 5개월간의 방탕하고 쾌락적인 생활 후에 바다에서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삶에 대해 자신의 승무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지 못했다".[20] 작업은 1789년 4월 1일에 완료되었고, 4일 후 티나와 그의 왕비의 다정한 작별 인사 후 ''바운티''호는 항구를 떠났다.[19]

4. 반란

바운티호와 그 선원들의 항로


1789년 4월 28일, 타히티 섬을 떠나 서인도 제도로 향하던 바운티 호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은 통가의 프렌드리 제도 인근 해상에서 일어났으며, 플레처 크리스천을 포함한 12명의 선원이 주도했다. 당시 배에는 항해 중 사망자를 제외하고 총 44명의 선원이 있었다.

반란 선원들은 윌리엄 블라이 함장을 포함한 19명을 작은 보트에 태워 추방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선원 중 13명은 바운티 호에 남게 되었다. 블라이 함장과 추방된 선원들은 41일간의 힘겨운 항해 끝에 티모르섬에 도착했다.

한편, 바운티 호를 장악한 반란자들은 투부아이 제도를 거쳐 타히티 섬으로 돌아갔다. 타히티에서 16명의 선원이 내렸고, 크리스천과 8명의 반란자는 타히티 원주민들과 함께 다시 항해를 떠났다. 이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합류한 사람도 있었지만, 유괴된 사람도 있었다.

크리스천 일행은 피지, 쿡 제도 등을 거쳐 1790년 1월 15일, 당시 영국의 해도에 없던 피트케언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바운티 호를 불태우고 섬에 정착했다.

4. 1. 반란의 발발

플레처 크리스천(Fletcher Christian)과 반란자들이 1789년 4월 28일 HMS 바운티(Bounty)호를 장악하는 모습. 1841년 하블롯 나이트 브라운(Hablot Knight Browne)의 판화


1789년 4월 28일 새벽, 바운티 호는 통가의 토후아 섬에서 남쪽으로 약 30 해리 (56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3] 거의 잠 못 이룬 밤을 보낸 플레처 크리스천은 마침내 행동을 결심했다. 그는 영(Young), 스튜어트(Stewart) 등 자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선원들을 미리 파악했고, 퀸털(Quintal)과 아이작 마틴(Isaac Martin) 등 몇 명을 추가로 포섭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크리스천은 신속하게 상갑판을 장악하고, 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는 침묵을 명령했다. 오전 5시 15분경, 크리스천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소총 상자 위에서 자고 있던 할릿(Hallett)을 제압하고 추종자들에게 무기를 나눠준 뒤,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선실로 향했다.

세 명의 선원이 블라이를 붙잡아 손을 묶고, 소리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블라이는 "도움을 바라며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3] 소란에 잠이 깬 항해사 프라이어(Fryer)는 반란자들이 블라이를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고, "다시 누워서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는 위협을 받았다.

블라이는 갑판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손은 크리스천이 휘두르는 총검 아래 묶여 있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반란 실패 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할 생각으로 목에 수심 측정 추를 걸고 있었다고 한다. 소음에 잠이 깬 다른 선원들도 침대에서 나와 혼란에 가담했다. 당시 누가 적극적인 반란자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며, 갑판은 고함과 저주, 조롱 소리로 가득 찼다. 블라이는 계속해서 자신을 풀어달라고 외치며, 때로는 특정 선원의 이름을 부르거나 선원 전체에게 "크리스천을 때려눕혀라!"라고 촉구했다. 프라이어는 잠시 갑판에 올라 크리스천과 대화할 기회를 얻었으나, 곧 총검에 위협당해 아래층으로 쫓겨났다. 프라이어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그에게 "지난 몇 주 동안 지옥에 있었다. 블라이 선장이 이것을 스스로 초래했다."라고 말하며, 블라이의 가혹한 통치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시사했다.

크리스천은 처음에 블라이와 그의 서기관 존 새뮤얼(John Samuel), 충성스러운 사관생도 헤이워드(Hayward)와 할릿(Hallett)을 바운티 호의 작은 조리보트에 태워 추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보트가 너무 작고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자, 약 10명을 태울 수 있는 더 큰 보트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크리스천과 그의 동맹들은 반란에 동조하지 않는 선원의 수를 과소평가했다. 최소 절반 이상의 선원이 블라이와 함께 떠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배에서 가장 큰 보트인 약 7.01m (약 7m) 길이의 런치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블라이에게 충성하는 선원들은 자신의 소지품을 모아 런치에 올랐다. 프라이어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는 배를 되찾을 기회를 엿보기 위해 블라이의 승인을 받아 배에 남으려 했지만, 크리스천은 그를 런치에 타도록 강요했다. 곧 런치는 20명이 넘는 사람들로 심하게 과적되었다. 이에 크리스천은 배의 항해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두 명의 목수 조수 노먼(Norman)과 맥킨토시(McIntosh), 그리고 무기수 조셉 콜먼(Joseph Coleman)에게 배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복종하면서, 블라이에게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다. 블라이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게나, 친구들아, 내가 영국에 도착하면 너희에게 정의를 베풀겠다"라고 안심시켰다.

새뮤얼은 선장의 일기, 임관 서류, 재무관 문서, 나침반 및 사분의를 챙길 수 있었지만, 블라이가 15년간의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귀중한 지도와 해도는 배에 남겨두어야 했다. 블라이를 따라나선 18명의 선원과 함께 런치에는 약 5일치의 식량과 물, 그리고 퍼셀(Purcell)의 공구 상자가 실렸다. 블라이는 자신의 일지에 반란자들이 육분의시간 측정 장치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선장 보조원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개인 육분의를 건네며 "자, 블라이 선장, 이것으로 모든 목적에 충분하고 육분의가 좋은 것을 알고 있잖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여 상반된 기록을 남겼다. 배의 크로노미터는 바운티 호에 남겨졌지만,[4] 페코버(Peckover)는 블라이가 시간을 재는 데 사용한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었다.[3] 마지막 순간, 반란자들은 커틀라스 네 자루를 보트에 던져 넣었다.

바운티 호의 승무원 중 휴건(Huggan)과 발렌타인(Valentine)의 사망 후 남은 44명 중 19명이 런치에 가득 탔고, 배와 수면 사이의 거리인 자유현면은 고작 약 17.78cm (약 18cm)밖에 남지 않았다. 바운티 호에 남은 25명의 사람들은 무장한 반란자들, 자신의 의지에 반해 배에 남겨진 충성파 선원들, 그리고 런치에 탈 공간이 없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오전 10시경, 런치를 배에 묶고 있던 밧줄이 잘렸다. 잠시 후 블라이는 돛을 올리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당면 목표는 지평선에서 화산 연기 기둥으로 위치가 확인되는 인근의 토후아 섬이었다.

4. 2. 블라이와 충성파 선원들의 추방



1789년 4월 28일 새벽, 플레처 크리스천이 이끄는 반란 선원들은 블라이 함장의 선실로 들이닥쳤다. 세 명의 선원이 블라이를 붙잡아 손을 묶고 소란을 피우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3] 블라이는 도움을 요청하며 크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3] 소란에 잠이 깬 항해사 프라이어(Fryer)는 반란자들이 블라이를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고, 조용히 있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

블라이는 갑판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손은 크리스천이 휘두르는 총검으로 묶여 있었다. 블라이는 계속해서 풀어달라고 소리치며 선원들에게 크리스천을 제압하라고 외쳤다. 프라이어가 잠시 크리스천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총검으로 위협받아 물러나야 했다. 프라이어의 증언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지난 몇 주 동안 지옥에 있었다. 블라이 선장이 이것을 스스로 초래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크리스천은 처음에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인원만 작은 조리보트에 태워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블라이를 따르려는 선원들이 예상보다 많아지자, 배에서 가장 큰 보트인 약 7.01m 길이의 런치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후 몇 시간 동안 블라이에게 충성하는 선원들은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런치에 올랐다. 프라이어도 처음에는 배에 남아 반란을 진압할 기회를 엿보려 했으나, 크리스천의 명령으로 런치에 타게 되었다. 런치가 곧 20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심하게 과적되자, 크리스천은 배의 운항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목수 조수 노먼(Norman)과 맥킨토시(McIntosh), 그리고 무기 담당 조셉 콜먼(Joseph Coleman)에게 배에 남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따르면서 블라이에게 자신들의 의지가 아님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다. 블라이는 그들을 안심시키며 영국에 돌아가면 정의를 실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기관 존 새뮤얼(John Samuel)은 함장의 일지, 임명 서류, 재무 관련 문서, 나침반, 사분의를 챙겼지만, 블라이가 15년간의 항해 동안 작성한 소중한 지도와 해도는 배에 남겨두고 와야 했다. 블라이와 그를 따르는 18명의 선원이 탄 런치에는 약 5일치의 식량과 물, 그리고 목수 퍼셀(Purcell)의 공구 상자가 실렸다. 블라이는 자신의 일지에 반란자들이 육분의와 시간 측정 장치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선장 보조원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개인 육분의를 건네주며 사용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배의 정밀 시계인 K2 크로노미터는 바운티 호에 남겨졌으나,[4] 페코버(Peckover)는 시간을 재는 데 사용한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었다.[3] 마지막 순간, 반란자들은 런치에 커틀라스 네 자루를 던져 넣었다.

결과적으로 바운티 호의 선원 44명(항해 중 사망자 제외) 중 19명이 런치에 타게 되었고, 배는 물 위로 겨우 7인치의 자유현면만 남긴 채 위태롭게 떠 있었다. 바운티 호에 남은 25명에는 반란을 주도한 선원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게 된 충성파 선원들, 그리고 런치에 탈 자리가 없어 남겨진 선원들이 포함되었다. 오전 10시경, 런치를 바운티 호에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고, 블라이는 돛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수평선 너머 화산 연기 기둥으로 위치가 확인되는 인근의 토후아 섬이었다.

4. 3. 블라이의 조난 항해

1788년부터 1790년까지 바운티호의 항해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붉은색은 타히티 항해 및 반란 발생 지점, 초록색은 블라이의 쿠팡까지의 작은 보트 항해 경로, 노란색은 반란 이후 크리스천이 이끄는 바운티호의 항해 경로이다.


블라이가 작은 보트 항해 중 작성한 반란자 명단의 시작 부분 ("플레처 크리스천. 24세 – 키 5.9피트. 어두운 까무잡잡한 피부…"), 현재 호주국립도서관(캔버라 소재) 소장


블라이는 반란으로 구명정에 태워진 후, 처음에는 통가의 토푸아 섬에서 물과 식량을 구하려 했다. 이후 과 함께 방문했던 인근 통가타푸 섬으로 가서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로 항해할 보급품을 얻으려 계획했다. 토푸아에 상륙했을 때 처음에는 원주민들이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위협적으로 변했다. 1789년 5월 2일, 상륙 4일 만에 공격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블라이는 부하들을 서둘러 보트에 태웠다. 원주민들이 보트를 붙잡으려 하자, 사환 존 노턴이 이를 막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돌에 맞아 사망했다.

작은 보트는 간신히 바다로 빠져나왔고, 충격을 받은 선원들은 다른 섬에 상륙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블라이는 가지고 있는 배급량(빵 약 68.04kg, 물 28gal, 돼지고기 약 9.07kg, 코코넛과 빵나무 열매 약간, 와인 3병, 럼 5쿼트)만으로 약 3500nmi 떨어진 티모르 섬의 쿠팡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지까지 직접 항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정했다. 이는 각자에게 하루 1온스의 빵과 1/4파인트의 물만 배급되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선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항해 초기부터 날씨는 궂고 폭풍우가 몰아쳤으며, 거대한 파도가 끊임없이 보트를 위협했다. 블라이는 항해 중에도 꾸준히 일지를 작성하고, 관찰 기록을 남겼으며, 항로를 스케치하고 해도를 그렸다. 선원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해상 경험담을 들려주고,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때로는 기도를 올렸다. 보트는 유럽인 최초로 피지 제도를 통과했지만,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블라이는 5월 17일 일지에 "우리의 상황은 비참했다. 항상 젖어 있었고, 극심한 추위를 겪었다... 날씨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항해 시작 약 3주 후인 5월 28일,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산호초가 보였고, 블라이는 항해 가능한 틈을 찾아 보트를 조용한 석호 안으로 몰았다. 그날 늦은 오후, 북동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의 작은 섬(훗날 '레스토레이션 섬'으로 명명)에 상륙하여 풍부한 굴과 열매로 굶주림을 달랬다. 이후 4일간 석호 안쪽을 따라 북상했는데, 본토 원주민들이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좁은 보트 안에서의 긴장감은 높아져, 목수 퍼셀과의 격렬한 언쟁 끝에 블라이가 칼을 뽑아 드는 일도 있었다.

6월 2일, 보트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최북단인 케이프 요크 반도를 통과했다. 블라이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얕은 바다와 암초, 모래톱이 뒤섞인 토레스 해협 남쪽의 좁은 수로(훗날 '웨일스 왕자 해협')를 통과했다. 그날 저녁 아라푸라 해에 도달했으며, 쿠팡까지는 아직 1100nmi가 남아있었다. 이후 8일간의 항해는 가장 힘든 여정이었고, 많은 선원들이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마침내 6월 12일, 티모르 해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블라이는 "이 땅을 보았다는 축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6월 14일, 임시로 만든 영국 국기를 달고 쿠팡 항구에 도착함으로써 41일간의 조난 항해는 끝이 났다.

쿠팡에서 블라이는 당국에 반란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은 쿠팡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8월 20일, 생존자들은 유럽행 배를 타기 위해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떠났다. 그곳에서 요리사 토마스 홀이 병으로 사망했다. 블라이는 서기 새뮤얼, 하인 존 스미스와 함께 10월 16일 귀국길에 올랐다. 나머지 네 명(항해사 엘핀스톤, 사환 피터 링크레터, 정육점 로버트 램, 조수 외과의사 토마스 레드워드)은 바타비아 또는 귀국 도중에 사망했다. 결국 블라이를 포함한 19명의 추방자 중 12명만이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항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난 항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4. 4. 반란 이후 바운티호

1789년 9월 22일, 크리스천이 이끄는 바운티호는 타히티로 돌아왔으나 이전보다 훨씬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다. 타히티 사람들은 다른 영국 선원들을 통해 과 블라이가 아이투타키에 정착지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며, 쿡은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상황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타히티에 오래 머물지 않기로 결정했다. 타히티 정착을 원했던 16명의 선원 중 15명을 하선시켰고, 무기 제작 기술이 필요했던 조셉 콜먼만 배에 남겼다.

그날 저녁, 크리스천은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타히티 사람들을 바운티호에 초대해 사교 모임을 열었다. 축제가 한창일 때, 그는 몰래 닻줄을 끊고 배를 출발시켰고, 타히티 손님들은 의도치 않게 배에 갇히게 되었다. 콜먼은 이 틈을 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섬으로 돌아갔다. 크리스천은 납치된 타히티인 중 필요 없다고 판단한 노년 여성 여섯 명을 근처의 모레아 섬에 내려주었다.

이후 바운티호에는 반란자 9명(크리스천, 영, 퀸털, 브라운, 마틴, 존 윌리엄스, 존 밀스, 윌리엄 매코이, 그리고 "알렉산더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존 애덤스)과 타히티 원주민 남성 6명, 여성 11명, 아기 1명이 남게 되었다. 참고로 타히티인 중에는 스스로 바운티호에 승선한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상 유괴나 다름없이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크리스천 일행은 안전한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먼저 투부아이 제도에 약 3개월간 머물렀으나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정착에 실패하고 타히티로 돌아갔던 경험이 있었다. 타히티를 떠난 바운티호는 피지, 쿡 제도를 거쳐 항해한 끝에, 1790년 1월 15일 당시 영국의 해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남태평양의 외딴 섬, 피트케언 섬에 도착했다. 섬에 도착한 후, 크리스천과 선원들은 추격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바운티호를 불태워 해체하고 그 자재를 이용하여 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5. 반란 진압 및 처벌

1790년 3월 15일, 블라이는 영국으로 돌아와 반란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영국 해군성은 1790년 11월, 에드워드 에드워즈 함장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판도라호를 파견하여 반란자들을 추적하도록 했다. 판도라호는 1791년 3월 타히티에 도착하여 14명의 전 바운티호 승무원을 체포했는데, 이들 중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블라이보다 훨씬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판도라호는 이후 바운티호를 찾아 남태평양을 수색했으나 피트케언 제도로 숨은 크리스천 일행을 찾지 못했고, 1791년 8월 30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근처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이 사고로 판도라호 승무원 31명과 체포된 바운티호 선원 4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판도라호 승무원 89명과 바운티호 선원 10명은 1792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송환된 10명의 바운티호 선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결과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2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면되었으며, 1명은 법적 절차 문제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3명은 반란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블라이 자신도 바운티호를 잃은 것에 대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직무에 복귀했다. 그는 1791년 프로비던스호를 지휘하여 두 번째 빵나무 운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는데, 이후 총독으로 부임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현지 유력자들과의 갈등 끝에 부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감금당하는 럼주 반란 사건을 겪었다. 두 번의 반란을 겪으면서 그의 평판은 크게 손상되었고, 유죄 판결은 면했지만 사실상 은퇴 상태에 놓였다. 이후 해군 중장까지 승진했으나 별다른 보직을 맡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5. 1. HMS 판도라 호 파견

1790년 11월, 영국 해군성은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함장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HMS ''판도라''호(HMS Pandora)를 파견하여 반란자들을 체포하고 재판을 위해 영국으로 송환하도록 했다. ''판도라''호는 1791년 3월 23일 타히티에 도착했고, 며칠 안에 살아남은 ''바운티''호 선원 14명 전원이 항복하거나 체포되었다.[1] 에드워즈 함장은 반란에 가담한 자들과 불가피하게 ''바운티''호에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체포했다.[2] 체포된 선원들은 ''판도라''호의 후갑판에 특별히 제작된 임시 감옥인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에 갇혔다.[3]

''판도라''호는 에드워즈 함장이 ''바운티''호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5주 동안 타히티에 머물렀다. 배는 마침내 5월 8일,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 사이에서 ''바운티''호를 찾기 위해 출항했다.[4] 팔머스턴 섬에서 ''바운티''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돛대 예비품을 발견한 것 외에는 도망친 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5] 에드워즈는 8월까지 수색을 계속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로 향했다.[6] 이 과정에서 ''판도라''호는 피트케언 섬 근처를 항해했지만 상륙하지는 않았다. 만약 에드워즈가 해도(海圖)를 통해 이 섬의 위도가 피트케언 섬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시 해도의 경도는 부정확했다), 마지막 남은 9명의 ''바운티''호 반란자들을 찾아 임무를 완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91년 8월 13일, 바니코로 섬을 지날 때 에드워즈는 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신호를 목격했다. 그러나 그는 ''바운티''호 수색에만 집중했고,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는 반란자들이 신호를 보낼 리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했다. 역사가 왈흐로스(Wahlroos)는 이 연기 신호가 라페루즈 원정대의 생존자들이 보낸 조난 신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배 ''부솔''호(Boussole)와 ''아스트롤라브''호(Astrolabe)가 난파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생존자들이 바니코로에 살아있었다는 후속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왈흐로스는 에드워즈를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며", "냉담하고", "무능한" 함장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가 실종된 라페루즈 원정대의 미스터리를 풀고 "해양 역사의 영웅"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7]

HMS ''판도라''호, 1791년 8월 29일 침몰, 피터 헤이우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로버트 배티가 1831년에 제작한 에칭


1791년 8월 29일, ''판도라''호는 외해 대보초에서 좌초되었다. 배가 침몰하는 동안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수감자들은 방치되었다. 에드워즈가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후에야 무기고원이 수감자들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지만, 작업이 끝나기 전에 배는 침몰했다. 수감자 중 피터 헤이우드(Peter Heywood)와 다른 9명은 탈출했지만, ''바운티''호 선원 4명(조지 스튜어트, 헨리 힐브란트, 리처드 스키너, 존 서머)과 ''판도라''호 승무원 31명이 익사했다. 살아남은 10명의 수감자를 포함한 89명의 생존자들은 2년 전 블라이가 항해했던 경로를 따라 구명정을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손발이 묶인 상태로 이동했으며, 9월 17일 쿠팡에 도착했다.[8][9]

수감자들은 쿠팡에서 7주 동안 감옥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박에 구금된 후 케이프타운으로 이송되었다.[10] 1792년 4월 5일, 그들은 영국 군함 HMS ''고르곤''호(HMS Gorgon)에 태워져 영국으로 출발했고, 6월 19일 포츠머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재판을 기다리기 위해 경비함 HMS ''헥터''호(HMS Hector)로 옮겨졌다. 수감자 중에는 블라이가 결백을 증명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충성파 3명(콜먼, 맥킨토시, 노먼), 앞을 못 보는 바이올린 연주자 마이클 번(Byrne), 그리고 피터 헤이우드, 제임스 모리슨, 토마스 버켓, 존 밀워드, 토마스 엘리슨, 윌리엄 머스프랫 등 반란에 연루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1] 당시 블라이는 두 번째 빵나무 운반 임무를 위해 HMS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를 지휘하며 1791년 8월 영국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군사재판에는 참석하지 못했다.[12][13] 재판 결과, 10명의 수감자 중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2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면되었으며, 1명은 법적 절차상의 문제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5. 2. 판도라 호의 침몰

1790년 11월, 해군성은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선장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HMS ''판도라''호(HMS Pandora)를 파견하여 반란자들을 체포하고 재판을 위해 영국으로 송환하도록 했다. ''판도라''호는 1791년 3월 23일 타히티에 도착하여 며칠 만에 살아남은 ''바운티''호 선원 14명 전원을 체포하거나 항복을 받았다. 에드워즈는 반란자와 ''바운티''호에 불가피하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판도라''호의 쿼터덱에 특별히 제작된 감옥인 "판도라의 상자"에 수감했다.

''판도라''호는 에드워즈가 ''바운티''호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5주 동안 타히티에 머물렀다. 배는 마침내 5월 8일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 사이에서 ''바운티''호를 찾기 위해 출항했다. 팔머스턴 섬에서 몇 개의 돛대가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도망친 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8월까지 수색을 계속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했다. ''판도라''호가 항해했지만 상륙하지 않은 섬 중 하나는 피트케언 섬이었는데, 만약 에드워즈가 해도를 확인하여 이 섬이 피트케언 섬의 위치와 위도는 같지만 경도는 다르다는 점을 알았다면, 마지막 아홉 명의 ''바운티''호 반란자들을 체포하여 임무를 완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나머지 반란자 수색은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91년 8월 13일 바니코로 섬을 지날 때, 에드워즈는 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신호를 목격했다. 그러나 그는 ''바운티''호 수색에만 집중했고, 발각을 두려워하는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알릴 리 없다고 판단하여 이 신호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했다. 왈흐로스(Wahlroos)는 이 연기 신호가 거의 확실하게 라페루즈 원정 생존자들이 보낸 조난 신호였으며, 그들의 배 ''부솔''호와 ''아스트롤라브''호가 난파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들이 바니코로 섬에 살아 있었다는 후속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왈흐로스는 에드워즈를 영국 해군 함장 중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며", "냉담하고", "무능한" 인물 중 하나로 묘사하며, 그가 실종된 원정대의 미스터리를 해결하여 "해양 역사의 영웅 중 한 명"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강하게 비판했다.[7]

1791년 8월 29일, ''판도라''호는 외해 대보초에 좌초되었다.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정규 승무원들이 노력하는 동안,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수감자들은 방치되었다. 에드워즈가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판도라''호의 무기고원이 수감자들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지만, 작업이 끝나기 전에 배는 침몰했다. 헤이우드와 다른 9명의 수감자는 탈출했지만, ''바운티''호 선원 4명(조지 스튜어트, 헨리 힐브란트, 리처드 스키너, 존 서머)과 ''판도라''호 승무원 31명이 익사했다. 10명의 남은 수감자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2년 전 블라이의 항해 경로를 대부분 따라 열린 보트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9월 17일 쿠팡에 도착할 때까지 대부분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수감자들은 7주 동안 처음에는 감옥에, 나중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배에 수감된 후 케이프타운으로 이송되었다. 1792년 4월 5일, 그들은 영국 군함 HMS ''고르곤''호(HMS Gorgon)를 타고 영국으로 출발하여 6월 19일 포츠머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재판을 기다리기 위해 경비함 HMS ''헥터''호(HMS Hector)로 이송되었다.

5. 3. 군사 재판 및 처벌

1790년 11월, 영국 해군성은 반란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선장이 지휘하는 프리깃함 HMS ''판도라''호(HMS Pandora)를 파견했다.[7] ''판도라''호는 1791년 3월 23일 타히티에 도착하여 며칠 만에 생존해 있던 '''바운티'''호 선원 14명 전원을 체포하거나 항복을 받았다. 에드워즈는 반란에 가담한 자들과 불가피하게 '''바운티'''호에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판도라''호 갑판 위에 특별히 제작된 감옥인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에 가두었다. ''판도라''호는 5주간 타히티에 머물며 '''바운티'''호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실패했고, 5월 8일 남태평양의 섬들을 수색하기 위해 출항했다. 팔머스턴 섬에서 돛대 일부를 발견한 것 외에는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 에드워즈는 8월까지 수색을 계속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판도라''호는 피트케언 섬 근처를 지나갔지만 상륙하지는 않았다. 만약 에드워즈가 해도를 확인하여 이 섬이 피트케언 섬의 위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지막 반란자 9명을 체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91년 8월 13일 바니코로 섬 근처를 지날 때 에드워즈는 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신호를 목격했으나, 반란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알릴 리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했다. 역사가 왈흐로스(Wahlroos)는 이 연기 신호가 라페루즈 원정의 생존자들이 보낸 조난 신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에드워즈가 이 기회를 놓쳐 실종된 원정대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렸다고 비판했다. 왈흐로스는 에드워즈를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며", "냉담하고", "무능한" 함장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7]

1791년 8월 29일, ''판도라''호는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외곽에서 좌초되었다. 배가 침몰하는 동안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수감자들은 방치되었다.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후 무기고원이 족쇄를 풀기 시작했지만, 작업이 끝나기 전에 배는 침몰했다. 수감자 피터 헤이우드(Peter Heywood)와 다른 9명은 탈출했지만, '''바운티'''호 선원 4명(조지 스튜어트, 헨리 힐브란트, 리처드 스키너, 존 서머)과 ''판도라''호 승무원 31명이 익사했다. 10명의 남은 수감자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열린 보트를 타고 쿠팡으로 향했으며, 수감자들은 대부분의 여정 동안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수감자들은 쿠팡에서 7주간 구금된 후 케이프타운으로 이송되었고, 1792년 4월 5일 영국 군함 HMS 고르곤(Gorgon)호를 타고 출항하여 6월 19일 포츠머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경비함 HMS 헥터(Hector)호로 옮겨져 재판을 기다렸다. 수감자 10명은 블라이가 결백을 약속했던 조셉 콜먼(Joseph Coleman), 토머스 맥킨토시(Thomas McIntosh), 찰스 노먼(Charles Norman), 시각 장애인 바이올린 연주자 마이클 번(Michael Byrne), 그리고 반란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피터 헤이우드(Peter Heywood),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 토머스 버켓(Thomas Burkett), 존 밀워드(John Millward), 토머스 엘리슨(Thomas Ellison), 윌리엄 머스프랫(William Muspratt)이었다. 당시 블라이는 두 번째 빵나무 운반 임무를 위해 HMS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를 지휘하며 1791년 8월 영국을 떠났기 때문에 군사 재판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가발을 쓰고 해군 제복을 입고 오른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는 노년 남성의 초상화. 배경에는 돛을 활짝 편 두 척의 배가 보인다.
바운티 호 반란 사건 군사 재판을 주재한 후드 경


군사재판은 1792년 9월 12일 포츠머스 항의 HMS 듀크 함상에서 시작되었으며, 포츠머스 해군 사령관인 부제독 후드 경(Lord Hood)이 재판장을 맡았다. 헤이우드의 가족은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고, 다른 피고인 중에서는 머스프랫만이 변호사를 고용했다. 블라이와 함께 조난 항해에서 살아남은 토머스 헤이워드와 존 홀렛의 증언은 특히 헤이우드와 모리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콜먼, 맥킨토시, 노먼, 번의 결백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판결을 내렸다. 9월 18일, 나머지 6명의 피고인은 반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부는 헤이우드와 모리슨에 대해서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왕실 사면을 권고했다.

피고인판결최종 결과
조셉 콜먼 (Joseph Coleman)무죄석방
토머스 맥킨토시 (Thomas McIntosh)무죄석방
찰스 노먼 (Charles Norman)무죄석방
마이클 번 (Michael Byrne)무죄석방
피터 헤이우드 (Peter Heywood)유죄 (사형 선고)왕실 사면 권고 → 사면 및 석방 (1792년 10월 26일)
제임스 모리슨 (James Morrison)유죄 (사형 선고)왕실 사면 권고 → 사면 및 석방 (1792년 10월 26일)
윌리엄 머스프랫 (William Muspratt)유죄 (사형 선고)사형 집행 유예 → 사면 및 석방 (1793년 2월 11일)
토머스 버켓 (Thomas Burkett)유죄 (사형 선고)교수형 집행 (1792년 10월 28일)
토머스 엘리슨 (Thomas Ellison)유죄 (사형 선고)교수형 집행 (1792년 10월 28일)
존 밀워드 (John Millward)유죄 (사형 선고)교수형 집행 (1792년 10월 28일)



1792년 10월 26일, 헤이우드와 모리슨은 조지 3세 국왕의 왕실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머스프랫은 변호사를 통해 군사재판 규칙 때문에 자신의 변호를 위해 노먼과 번을 증인으로 세울 수 없었다고 항의하는 청원을 제출하여 사형 집행 유예를 받았다. 버켓, 엘리슨, 밀워드는 10월 28일 포츠머스 항의 HMS 브런즈윅 함의 마스트 끝(yardarm)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며, 다른 기록에서는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전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돈이 일부의 목숨을 구했고, 다른 이들은 가난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했다. 데닝은 헤이우드가 부유한 상속자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결국 계급이나 인맥, 후원이 차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머스프랫은 12월에 사면 소식을 들었고, 1793년 2월 11일에 석방되었다.

한편, 블라이는 '''바운티'''호 손실에 대한 군사재판에서는 1790년 10월 무죄 판결을 받고 대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반란 생존자들의 군사재판 증언 중 상당수가 블라이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다루었고, 1793년 8월 그가 두 번째 빵나무 운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전문가들과 대중 여론이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는 해군성에서 냉대를 받았고, 다음 임명을 받기까지 19개월 동안 반봉급 상태로 지내야 했다. 1794년 후반, 플레처 크리스천의 형인 변호사 에드워드 크리스천이 군사재판 절차에 대한 '부록'을 출판했는데, 이는 "크리스천과 반란자들의 행동을 변호하고 블라이 선장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충성파였던 포수 페코버마저 '부록'의 내용 상당 부분이 사실이라고 확인하면서 블라이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블라이는 이후에도 해군에서 복무하며 캠퍼다운 해전(1797)에서 HMS ''디렉터''를, 코펜하겐 해전(1801)에서 HMS ''글래튼''을 지휘했다. 1805년에는 HMS ''워리어''를 지휘하던 중 장교들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기도 했다. 1806년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 군 장교들이 일으킨 럼 반란으로 체포되어 축출당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소장(1811)과 중장(1814)으로 승진했지만 더 이상 해군 임명을 받지 못하고 1817년 12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면받은 반란자들 중 헤이우드와 모리슨은 해군으로 복귀했다. 헤이우드는 후드 경의 후원을 받아 1803년 31세에 함장으로 승진했으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1831년에 사망했다. 모리슨은 사수가 되었으나 1807년 HMS ''블렌하임''이 인도양에서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머스프랫은 해군 승무원으로 복무하다 1798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재판에 참여했던 다른 주요 인물들(프라이어, 페코버, 콜먼, 맥킨토시 등)은 재판 이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6. 피트케언 섬 정착

타히티에 남지 않기로 결정한 플레처 크리스천과 8명의 반란자들은 일부 타히티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1790년 1월, 해도 상의 위치 오류로 인해 발견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 외딴 피트케언 섬에 도착하여 정착했다. 섬에 도착한 후, 이들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발견을 막고 돌아갈 수단을 없애기 위해 ''바운티''호를 불태웠다.

초기에는 섬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듯했으나, 곧 유럽인 남성들과 타히티인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특히 타히티 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고 소유물처럼 여기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결국 폭력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1793년, 타히티 남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플레처 크리스천을 포함한 다수의 반란자를 살해했으며, 이후에도 섬 내부의 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수년간의 혼란 끝에 존 애덤스만이 유일한 반란자 생존자로 남게 되었다. 그는 남은 타히티 여성들과 아이들을 이끌고 성경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며 새로운 공동체의 기틀을 다졌다. 1808년, 미국의 포경선 ''토파즈''호가 우연히 피트케언 섬을 발견하면서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이후 영국 군함의 방문 등을 통해 완전히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존 애덤스는 1829년 사망할 때까지 섬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6. 1. 크리스천과 반란자들의 정착

플레처 크리스천과 8명의 반란자(에드워드 영, 매슈 퀸털, 윌리엄 브라운, 아이작 마틴, 존 윌리엄스, 존 밀스, 윌리엄 매코이, 존 애덤스)는 타히티에 남지 않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기로 결정했다. 1789년 9월 22일, 이들은 타히티를 떠나면서 6명의 타히티 남성과 14명의 타히티 여성을 배에 태웠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합류했지만, 다른 일부는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강제로 동승하게 되었다.

크리스천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동쪽 멀리 떨어진 피트케언 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섬은 1767년 발견되었으나 해도 상의 위치가 부정확했다. 몇 달간의 탐색 끝에, 1790년 1월 15일, 크리스천은 기록된 위치보다 188nmi 동쪽에서 피트케언 섬을 발견했다. 이 위치 오류는 해군이 섬을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 판단하여 정착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섬에 도착한 반란자들은 ''바운티''호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내리고, 배의 목재 등을 활용하기 위해 해체 작업을 진행했다. 1790년 1월 23일, ''바운티''호는 바운티 만(Bounty Bay)에서 불태워졌다. 이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발견을 막기 위한 조치였거나, 혹은 매슈 퀸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섬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잃게 되었다.

바운티 만(Bounty Bay) (피트케언 섬), HMS ''바운티''호가 1790년 1월 23일에 불타 없어진 곳


피트케언 섬은 사람이 살지 않았고 접근이 어려웠지만, 물과 식량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여 반란자들에게 이상적인 은신처를 제공했다. 초기에는 반란자들과 타히티인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크리스천은 마우아투아(Mauatua)라는 타히티 여성과 함께 살며 서즈데이 옥토버 크리스천 1세를 포함한 자녀들을 낳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의 지도력은 약화되었고, 그는 종종 우울감에 빠져 고립되는 모습을 보였다.

공동체 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특히 유럽인 남성들이 타히티 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이 아닌 소유물처럼 여기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1793년 9월, 이러한 갈등은 폭력 사태로 폭발했다. 타히티 남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리스천을 포함한 반란자 5명(윌리엄스, 마틴, 밀스, 브라운)을 살해했다. 크리스천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생존자 존 애덤스와 타히티 여성 테후테아투아오노아는 크리스천이 정원을 가꾸던 중 뒤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고 증언했지만[8][11], 애덤스는 다른 시기에는 크리스천이 병으로 죽거나 자살했다고 말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9] 크리스천의 무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10]

크리스천 사후에도 섬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1794년까지 살아남았던 6명의 타히티 남성들은 모두 살해당했는데, 이는 살해된 반란자들의 아내들이 복수했거나 타히티 남성들 사이의 내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섬에는 4명의 반란자(영, 애덤스, 맥코이, 퀸털)와 타히티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만 남게 되었다.

에드워드 영과 존 애덤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여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윌리엄 매코이와 매슈 퀸털이 섬에서 자라는 식물로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부 여성들은 섬을 떠나기 위해 배를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1798년, 술에 취한 맥코이가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1년 뒤인 1799년에는 퀸털이 다시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자 애덤스와 영이 그를 살해했다. 이후 애덤스와 영은 섬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었다. 1800년 영이 천식으로 사망하면서 존 애덤스는 반란자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1808년, 미국의 포경선 ''토파즈''호가 우연히 피트케언 섬을 발견했을 때, 선장 메이휴 폴저는 존 애덤스와 10명의 타히티 여성, 그리고 20여 명의 아이들이 이루는 작은 공동체를 발견했다. 애덤스는 반란 이후 섬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고, 이로써 바운티 호 반란자들의 행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6. 2. 갈등과 폭력

피트케언 섬은 반란자들에게 이상적인 피난처로 보였다. 섬은 사람이 살지 않았고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식량과 물이 풍부하고 땅도 비옥했다. 한동안 반란자들과 타히티인들은 평화롭게 공존했다. 크리스천은 마우아투아(Mauatua)라는 타히티 여성과 정착하여 서즈데이 옥토버 크리스천을 비롯한 자녀들을 낳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의 지도력은 약해졌고, 그는 종종 우울감에 빠지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점차 유럽인들이 타히티인들을 자신들의 소유물처럼 여기기 시작하면서 긴장과 갈등이 생겨났다. 특히 여성들을 두고 벌어진 경쟁이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793년 9월, 상황은 폭력적으로 치달았다. 타히티 남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리스천, 존 윌리엄스, 윌리엄 마틴, 존 밀스, 아이작 브라운 등 다섯 명의 반란자를 살해했다. 존 애덤스와 타히티 여성 테후테아투아오노아(Teehuteatuaonoa)는 나중에 크리스천이 이때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8] 하지만 애덤스의 말은 일관성이 없어서, 다른 때에는 크리스천이 병으로 죽거나 자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9] 크리스천의 무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10] 테후테아투아오노아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정원을 위한 땅을 정리하던 중" 뒤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11]

이후에도 섬 내부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1794년까지 살아남았던 여섯 명의 타히티 남성들은 모두 살해당했는데, 이는 살해된 반란자들의 아내들이 복수했거나 타히티인들끼리 서로 죽인 결과로 추정된다.

결국 살아남은 반란자는 네드 영, 존 애덤스, 윌리엄 매코이, 매슈 퀸털 네 명뿐이었다. 영과 애덤스가 주도권을 잡고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려 했지만, 매코이와 퀸털이 섬의 식물을 이용해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부 여성들은 직접 만든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불안정한 생활은 1798년 매코이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졌다. 1년 뒤인 1799년, 퀸털이 또다시 살인과 혼란을 일으키려 하자 애덤스와 영은 그를 살해하여 마침내 섬에 평화를 가져왔다.

6. 3. 존 애덤스의 지도력

1800년 에드워드 영이 천식으로 사망하자, 존 애덤스는 반란자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남은 여성 9명과 아이들 19명의 교육과 복지를 책임지게 되었다. 애덤스는 바운티호에 있던 성경을 이용하여 주민들에게 읽고 쓰는 법과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으며, 이를 통해 섬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1808년 2월, 미국 물개잡이선 토파즈(Topaz)호가 우연히 핏케언 섬에 도착했을 때, 선장 메이휴 폴저는 애덤스가 이끄는 번영하는 공동체를 발견했다.[12] 당시 섬에는 애덤스와 10명의 폴리네시아 여성, 그리고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애덤스는 폴저 선장에게 바운티호의 방위 나침반과 해상 크로노미터를 주었다. 이 발견 소식은 1810년에야 영국에 전해졌으나, 당시 나폴레옹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영국 해군성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14년, 영국 군함 HMS 브리튼호와 HMS 타구스호가 다시 핏케언 섬을 방문했다. 함장 토마스 스테인스 경과 필립 피폰은 섬에서 애덤스의 지도 아래 성장한 플레처 크리스천의 아들 서즈데이 옥토버 크리스천과 에드워드 영의 아들 조지 영을 만났다. 그들은 총 46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보고서에서 "자비로운 얼굴에는 정직한 영국인의 모든 특징이 나타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섬의 평화와 질서는 전적으로 애덤스의 노력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해군성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여러 선박이 핏케언 섬에 들렀고, 방문자들은 애덤스로부터 정착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존 애덤스는 1829년에 사망했다. 그는 핏케언 섬 공동체의 설립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이후 빅토리아 시대에는 도덕성의 모범으로 여겨지며 존경받았다.

6. 4. 외부 세계와의 조우

1800년 영(Young)이 천식으로 사망한 후, 존 애덤스(Adams)는 남은 9명의 여성과 19명의 아이들의 교육과 복지를 책임졌다. 그는 바운티호(Bounty)의 선상 성경을 사용하여 읽고 쓰는 능력과 기독교를 가르치며 섬에 평화를 유지했다.

1808년 2월, 미국의 물개잡이선 토파즈(Topaz)호가 우연히 피트케언 섬에 도착하여 상륙했다.[12] 토파즈호의 선장 메이휴 폴저(Mayhew Folger)는 번영하는 공동체를 발견했는데, 당시 존 애덤스는 유일하게 생존한 반란자로서 10명의 폴리네시아 여성과 20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담스는 폴저에게 바운티호의 방위자석나침반(Azimuth compass)과 해상 크로노미터(Marine chronometer)를 주었다. 이 발견 소식은 1810년까지 영국에 전해졌으나, 당시 영국 해군성은 나폴레옹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14년, 영국 군함 HMS 브리튼(HMS Briton)호와 HMS 타구스(HMS Tagus)호가 우연히 피트케언 섬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한 사람 중에는 크리스천의 아들인 목요일 옥토버 크리스천(Thursday October Christian)과 에드워드 영의 아들인 조지 영(George Young)이 있었다. 선장 토마스 스테인스 경(Sir Thomas Staines)과 필립 피폰(Philip Pipon)은 크리스천의 아들의 모습을 "자비로운 얼굴에는 정직한 영국인의 모든 특징이 나타나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섬에서 존 애덤스가 이끄는 젊은 주민들 중심의 46명 공동체를 발견했으며, 섬 주민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애덤스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영국 해군성은 이 보고를 받고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여러 선박들이 피트케언 섬에 들렀고, 방문객들은 애덤스로부터 정착촌 건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애덤스는 1829년 사망할 때까지 공동체를 이끌었으며, 사후 빅토리아 시대 도덕성의 모범으로 여겨지며 공동체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7. 반란의 원인

반란의 정확한 원인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블라이 함장이 부하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인망이 없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가 내린 처벌이 당시 해군 기준에서 특별히 엄격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탐험의 주요 목적이었던 빵나무 묘목 운송을 위해 선원들의 거주 공간인 대 선실이 온실로 개조되었고, 이로 인해 230ton급의 작은 배에서 승무원들은 항해 내내 심각한 과밀 상태와 열악한 환경에 놓였다. 반면, 타히티 섬에서는 약 5개월간 머무르며 비교적 자유롭고 쾌적한 생활을 누렸는데, 이러한 극명한 대비가 선원들의 불만을 키웠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란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부함장 격이었던 플레처 크리스천이 많은 선원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 함선 규모가 작아 블라이 외 임관 장교가 거의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규율 유지를 위한 왕립 해병대 파견대가 승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꼽힌다. 실제로 블라이는 이후 다른 함선을 지휘할 때 상급 장교 수를 늘리고 해병대원을 반드시 승선시켰다.

8. 이후

군법재판 증언 상당수는 블라이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1793년 8월 그가 프로비던스호(Providence)를 타고 서인도 제도빵나무를 성공적으로 운반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전문가들과 대중 여론이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는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해군성에 갔을 때 무시당했고, 다음 임명을 받기 전 19개월 동안 반봉급 상태에 있었다. 1794년 후반, 플레처 크리스천의 형제인 법률가 에드워드 크리스천이 군법재판 절차에 대한 '부록'을 출판했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크리스천과 반란자들의 행동을 변호하고 블라이 선장을 비난하는" 내용이라고 보도했다. 충성파였던 포수 페코버가 '부록'에 주장된 내용 상당 부분이 사실임을 확인하면서 블라이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블라이는 이후에도 해군 경력을 이어갔다. 1797년 10월 캠퍼다운 해전에서는 HMS ''디렉터''를, 1801년 4월 코펜하겐 해전에서는 HMS ''글래튼''을 지휘했다. 그러나 1805년, HMS ''워리어''를 지휘하던 중 장교들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기도 했다. 180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인 1808년 군 장교들이 그를 체포하고 축출하는 럼 반란이 일어났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블라이는 1811년에 소장으로, 1814년에 중장으로 승진했지만, 더 이상 해군 임명을 받지 못했다. 그는 1817년 12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면받은 반란자들 중 헤이우드와 모리슨은 해군으로 복귀했다. 헤이우드는 후드의 후원을 받아 1803년 31세의 나이에 함장 계급에 올랐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1831년 사망했다. 모리슨은 사수가 되었으나, 1807년 HMS ''블렌하임''이 인도양에서 침몰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머스프랫은 1798년 이전 또는 그 해에 사망하기 전까지 해군 승무원으로 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군법재판에 참여했던 다른 주요 인물들—프라이어, 페코버, 콜먼, 맥킨토시 등—은 재판 절차가 끝난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9. 문화적 영향

블라이는 자신의 항해 기록 "바운티호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하여 초기에 사건을 알렸으나[16], 선원들과의 불화는 숨기고 항해를 긍정적으로만 묘사했다.[17] 이는 조지프 뱅크스의 편집 방향과도 관련이 있었다.[18]

그러나 체포된 선원들의 군법 재판 증언[19]과 1794년 에드워드 크리스찬(플레처 크리스찬의 형제)이 발간한 "부록"은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이 기록들은 블라이가 식량 배급을 줄이고[20],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선원들을 가혹하게 대했으며[21][22], 크리스찬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주장하며 블라이를 압제적인 폭군으로 묘사하는 시각의 시초가 되었다.

1831년 존 배로 경의 책은 블라이의 엄격함을 강조하며 이러한 인식을 강화했고, 크리스찬이 죽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왔다는 전설을 만들기도 했다. 1870년 다이애나 벨처의 기록 역시 크리스찬을 옹호하며 블라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굳혔다.

리처드 허우(1972)나 캐롤라인 알렉산더(2003) 같은 역사가들은 블라이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시도했지만, 대중문화 속 전형적인 악덕 사령관으로서의 블라이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책에 대한 볼티모어 선의 평론처럼 "시가 과학을 물리쳤고 그 이후로 그 분야를 장악해 왔다"는 평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35년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홍보 포스터. 찰스 로턴이 블라이 역, 클라크 게이블이 크리스천 역을 맡았다.


바운티 호의 반란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 1916년 호주 무성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The Mutiny of the Bounty) (유실)
  • 1933년 호주 영화 《바운티 호의 항적》(In the Wake of the Bounty) (에롤 플린 데뷔작)
  • 1935년 MGM 제작 《바운티 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찰스 로턴이 연기한 블라이는 잔혹한 폭군의 대명사처럼 각인되었고, 클라크 게이블이 연기한 크리스천과의 대립은 "폭정과 정의로운 대의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으로 묘사되었다. 이 영화는 대중의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 1962년 《바운티 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트레버 하워드와 말론 브란도 주연. 1935년작과 유사하게 블라이를 폭군으로, 크리스천을 비극적 영웅으로 그렸다.
  • 1984년 《바운티》(The Bounty): 앤서니 홉킨스멜 깁슨 주연. 이전 영화들과 달리 블라이를 좀 더 동정적으로, 크리스천을 덜 영웅적으로 묘사하며 실제 역사에 가깝게 접근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실제 블라이 함장이 보여준 뛰어난 항해 능력과 지휘관으로서의 면모(이는 군사 재판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됨)와 비교할 때, 영화적 묘사는 여전히 한계를 가졌으며, 반란의 이유가 명확히 그려지지 않아 오락성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1998년 BBC 다큐멘터리는 블라이의 명예 회복을 시도했으나, 블라이와 크리스천 후손 간의 견해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진행자 디아 버킷은 "크리스천 대 블라이는 반란 대 권위주의, 제약된 삶 대 자유로운 삶, 성적 억압 대 성적 해방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2017년 영국 채널 4는 전직 군인 앤트 미들턴을 주연으로 블라이의 항해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23]

1985년 데이비드 에섹스가 공동 집필하고 크리스천 역을 맡은 뮤지컬 《바운티 호의 반란!》(Mutiny!)이 런던 웨스트엔드의 피카딜리 극장에서 16개월간 공연되었다. 영국 코미디 듀오 모어캠브 앤드 와이즈(Morecambe and Wise)는 아서 로우가 블라이 역을 맡은 패러디극 《본티 호의 몬티》(Monty on the Bonty)를 제작했다.[24]

피트케언 섬 박물관(Pitcairn Island Museum)과 노퍽 섬의 바운티 박물관(Bounty Museum)은 유물과 기념품을 통해 반란자들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25][26][27][28]

참조

[1] 논문
[2] 논문
[3] 서적 Log of the Proceedings of His Majestys Ship Bounty Lieut. Wm Bligh Commander from Otaheite towards Jamaica
[4] 웹사이트 Letter from Captain William Bligh to Sir Harry Parker (RGO 14/24: 490) https://cudl.lib.cam[...] University Of Cambridge 2020-05-21
[5] 웹사이트 HMS Pandora Encyclopedia http://library.puc.e[...] Pacific Union College 2012-10-31
[6] 뉴스 I Found the Bones of the Bounty National Geographic 1957-12
[7] 서적 Mutiny and Romance in the South Seas Salem House Publishers, c/o Harper & Row
[8]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9]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10]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11]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12] 웹사이트 An transcription of Floger Log entry Concerning the Bounty and Pitcairn Island pp.36–40 https://books.google[...]
[13] 웹사이트 Pitcairn Miscellany https/www.miscellany[...]
[14] 간행물 The 'Bounty's' Last Relics https://books.google[...] 2012-10-31
[15] 웹사이트 Bounty anchor at the town square https://web.archive.[...] 2012-10-31
[16]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17]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18]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19]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20]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21]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22] 서적 Men Without Country Ultimo Press
[23] 웹사이트 Mutiny https://web.archive.[...] 2020-04-28
[24] 웹사이트 BBC – Cult – Classic TV – Morecambe and Wise https://www.bbc.co.u[...]
[25] 웹사이트 Bounty Folk Museum History & Culture Norfolk Island https://www.norfolki[...] 2023-03-29
[26] 학술지 Brushing up on Mutineers: Music with Art at Fletcher's Mutiny Cyclorama, Norfolk Island https://www.jstor.or[...] 2010
[27] 서적 Sydney & Australia's New South Wales https://books.google[...] Hunter Publishing, Inc 2011-04-15
[28] 서적 The Travel Book: A Journey Through Every Country in the World https://books.google[...] Lonely Planet 2016-10-01
[29] 기타
[30] 웹사이트 Find A grave memorial https://www.findagra[...]
[31] 웹사이트 The True Story of Mutiny on the Bounty p.182 https://archive.org/[...]
[32] 웹사이트 Royal Naval Biography pub 1825 p.762 https://www.google.c[...]
[33] 웹사이트 The Scots Magazine Volume 86, 1820 https://www.googl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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