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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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용성은 한국 불교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 1864년 전라남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선종과 교종을 공부했으며, 전국 사찰을 순례하며 수행했다. 3·1 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불교의 대중화와 종단 정화를 위해 힘썼으며, 한글 금강경을 간행하고, 화과원을 설립하여 선농불교 운동을 펼쳤다. 1930년에는 윤봉길 의사에게 불교의 계를 주어 불자로 삼았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과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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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이름 변경과 소실 및 재건을 거쳐 1783년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내설악의 대표 사찰이자 만해 한용운의 저술 활동 장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둔 생활 장소로 알려져 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기본선원이자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장수군 출신 -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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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은 대한민국의 6선 국회의원, 산업자원부 장관, 민주당 대표, 국회의장, 그리고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으로, '세균맨'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백용성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용성 진종 / 용성(龍城) 진종(震鍾) |
본명 | 백상규(白相奎) |
법호 | 용성(龍城) |
출생 | 1864년 5월 8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남원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
사망 | 1940년 2월 24일 (향년 75세) |
국적 | 한국 |
종교 | |
종교 | 불교 |
종파 | 조계종 |
수행 | 간화 선 |
칭호 | 선사 |
학력 및 출가 | |
출가 | 1879년 해인사 |
저서 | |
저서 | 《수심론》, 《귀원정종》, 《용성선사어록》 |
가족 | |
부모 | 아버지 백남현, 어머니 밀양 손씨 |
훈장 | |
훈장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1990년 은관 문화훈장 추서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백용성(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백용성은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하여 한때 전라도 남원군 송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고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고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졌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백용성은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1940년“사자(獅者)뱃속에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다.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라남도 남원시에서 백상규(白相奎)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조용했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아홉 살에 첫 한시 시가를 썼다.[1] 그는 1877년 덕밀암에서 처음으로 사찰에 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에 의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879년, 열다섯 살에 그는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환월 스님으로부터 스님으로 정식 승려가 되었고, 법명은 진종(眞宗)을 받았다.[1] 그는 이후 수월 스님을 찾아가 다라니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양주시 봉선사에서 6일 동안의 좌선 수행 후 "깨달음의 경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선승 무영 선사 아래에서 화두 무에 대한 "참구"를 시작했다.[1][2]
1884년, 스무 살에 백용성은 통도사에서 율사 성옥 스님으로부터 계율과 보살계를 받아 완전한 승려가 되었다. 백용성은 이 시기에 송광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후 수년간 한국 전역의 사찰에서 선 수행을 하고 한국 대장경을 연구하며 많은 스님들과 법거량을 했다. 1903년부터 그는 다양한 제자들과 함께 선불교와 정토교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고, 사찰을 위한 선원을 짓고 해인사에 보관된 대장경 판목을 수리했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그는 중국 일부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찰과 스님들을 방문했다.[1]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에 따르면, "중국 불교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한국 불교를 폄하하는 중국 승려에게 그는 '하늘에 해와 달이 당신의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불교의 진리는 세상의 공통된 진리인데, 어떻게 세상의 공통된 진리가 중국에만 국한될 수 있겠소?'라고 답하며 한국 불교의 정당성을 옹호했다."[2]
1910년 그는 지리산 칠불암 선원의 선원장이 되었고, 신도들은 그에게 불교적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을 비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그는 ''귀원정종''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작품은 주로 기독교의 결점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1][2] 1911년 그는 서울로 떠났고,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한국 불교의 상황에 실망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대각사 등 여러 사찰을 세웠다. 그는 또한 자신의 불교 선교 사업 자금 조달을 돕기 위해 광업 회사를 운영했다. 1919년 그는 대한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으며, 불교계를 대표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일본인들에게 체포되어 1921년까지 구금되었다.[1][2] 석방 후 백용성은 한국에서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두 배로 늘렸고, 1925년에는 불교 교육 운동을 설립하기 위한 단체인 "최고 깨달음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남은 생을 불교를 전파하는 데 썼으며, 1940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2. 1. 출가와 수행
백용성은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하여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1]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고,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여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졌다.[1]1879년, 열다섯 살에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환월 스님으로부터 스님으로 정식 승려가 되었고, 법명 진종(眞宗)을 받았다.[1] 이후 수월 스님에게서 다라니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양주시 봉선사에서 6일 동안의 좌선 수행 후 "깨달음의 경험"을 했다고 전해진다.[1][2]
1884년, 스무 살에 통도사에서 율사 성옥 스님으로부터 계율과 보살계를 받아 완전한 승려가 되었다.[1] 송광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후 수년간 한국 전역의 사찰에서 선 수행을 하고 한국 대장경을 연구하며 많은 스님들과 법거량을 했다.[1] 1903년부터는 선불교와 정토교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고, 선원을 짓고 해인사에 보관된 대장경 판목을 수리했다.[1]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중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찰과 스님들을 방문했다.[1]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국 불교를 폄하하는 중국 승려에게 한국 불교의 정당성을 옹호했다고 한다.[2]
1910년 지리산 칠불암 선원의 선원장이 되었고, ''귀원정종''이라는 논문을 썼다.[1][2] 1911년 서울로 가서 대각사 등 여러 사찰을 세우고 불교를 가르쳤으며, 불교 선교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광업 회사를 운영했다.[1]
2. 2. 중국 방문과 한국 불교 옹호
백용성은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사찰과 승려들을 만났다.[1] 중국 승려들이 중국 불교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한국 불교를 폄하하자, "하늘의 해와 달이 당신의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불교의 진리는 세상의 공통된 진리인데, 어떻게 세상의 공통된 진리가 중국에만 국한될 수 있겠소?"라고 반박하며 한국 불교의 정당성을 옹호했다.[2]3. 독립운동
1919년 2월 27일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1][2] 당시 불교 대표는 2인으로서 백용성과 한용운이었다. 백용성은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백용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일설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한다. 그무렵,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1][2] 3·1 운동 이후에도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3귀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았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蔣介石), 장쉐량(張學良), 마오쩌둥(毛澤東)을 차례로 만나 대한의사군 무장진격작전을 피력, 지원을 요청했다. 귀국하여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안모라는 일제 밀정에 의해 계획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소가 완전 파괴됨으로써 21만명의 조·중 무장진격전이 무산되고 말았다.
3. 1.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2월 27일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당시 불교 대표는 2인으로서 백용성과 한용운이었다. 백용성은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백용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일설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한다. 그무렵,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3·1 운동 이후에도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3. 2. 상해 임시정부 지원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했다.[1][2] 한용운에게 3·1운동 계획을 듣고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위탁, 불교측 민족대표로 서명·날인하게 했다. 당시 불교 대표는 2인으로서 백용성과 한용운이었으며, 백용성은 한용운의 사형이었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3·1 운동 이후에도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3. 3. 윤봉길 의사와의 인연
1919년 3·1 운동 당시 한용운의 요청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1][2]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백용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백용성은 3·1 운동에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1 운동 이후에도 불상, 불교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에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3귀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았다.
3. 4. 대한의사군 결성 시도
1919년 3·1 운동 이후, 백용성은 독립운동 자금 마련과 무장 투쟁을 계획했다.[1][2] 불상, 불교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으며, 1930년에는 윤봉길 의사에게 3귀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았다.[1]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 장쉐량, 마오쩌둥을 만나 대한의사군 무장진격작전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했다.[1] 귀국 후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일제 밀정에 의해 계획이 발각되어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 거소가 파괴되면서 21만 명 규모의 조·중 무장진격전이 무산되었다.[1]
4. 불교 정화 및 대중화 운동
백용성은 출옥 후 불교 종단 정화에 힘썼다. 1920년대 일제가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대각사를 중심으로 왜색 불교 추방 운동을 주도했다.[3]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사용하는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4] 그는 1921년 한국 불교 최초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5]
1924년에는 박한영과 함께 잡지 《불일(佛日)》을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는데, 당시 언론은 이를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6]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여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치며 사원 경제 자립을 추구했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되었다. 《화엄경》 등 경전 한글화, 일요 어린이 법회, 거리 포교, 찬불가 도입 등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4. 1. 왜색 불교 추방 운동
백용성은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3]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6]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6]
4. 2. 불경 한글 번역
백용성은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4] 1921년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5] 1928년에는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는데,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6] 불교계에서는 조선 후기의 불맥인 지안 조사가 135년 만에 용성 스님으로 환생하였다고도 한다.[3]4. 3. 불교 대중화 노력
백용성은 출옥 후 불교 종단 정화에 힘썼다. 1920년대 일제가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대각사를 중심으로 왜색 불교 추방 운동을 주도했다.[3]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사용하는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4] 그는 1921년 한국 불교 최초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5]1924년에는 박한영과 함께 잡지 《불일(佛日)》을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1928년에는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는데, 당시 언론은 이를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6]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여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치며 사원 경제 자립을 추구했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되었다. 《화엄경》 등 경전 한글화, 일요 어린이 법회, 거리 포교, 찬불가 도입 등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5.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백용성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는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5. 1. 서훈
대한민국 정부는 백용성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는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6. 10가지 유훈
7. 관련 문화재
- 백용성 역 조선글화엄경은 등록문화재 제629호이다.
- 백용성 역 선한역 대방광불화엄경 원고는 등록문화재 제630호이다.
- 백용성 역 신역대장경(금강마하반야바라밀경)은 등록문화재 제631호이다.
- 백용성 역 조선어능엄경은 등록문화재 제632호이다.
- 함양 백룡성선사 화과원 유허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29호이다.
참조
[1]
문서
Chʻan-ju Mun, 249-251
[2]
웹사이트
Yongseong Jinjong ( 1864 ~ 1940 )
http://www.koreanbud[...]
2008-03-21
[3]
뉴스
용성 스님 유훈 실현 앞장 도문 스님
https://news.naver.c[...]
부산일보사
2004-06-04
[4]
뉴스
용성 스님, 3·1운동때 태극기 처음 제안 불경 한글화도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07-10-04
[5]
뉴스
용성스님 생가터 죽림정사 낙성식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7-10-03
[6]
뉴스
용성 스님 '뜻'이 살아나고 있다
https://news.naver.c[...]
부산일보사
2004-06-04
[7]
뉴스
염화실의 향기(18) 전북 장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7-10-05
[8]
뉴스
세계불교성지 보존회 초대총재 도문스님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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