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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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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카는 일본에서 정착하지 않고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다양한 표기로 불렸으며, 관공서, 경찰, 연구자 등에 따라 다르게 칭해졌다. 산카는 미 제조, 행상, 수선 등을 통해 생활했으며, 사유 재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도둑질 등의 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약 20만 명, 쇼와 시대 초에는 약 1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정확한 인구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카에 대한 연구는 야나기타 구니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산카는 문학,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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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카
지도
기본 정보
다른 이름산야시
산카쿠레
설명일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비정주민 집단
존속 시기에도 시대 ~ 20세기 후반
사회 및 문화
생활 방식떠돌이 생활
수렵
채집
노점상
주거 형태간이 천막 또는 동굴
이동 수단도보
언어산카 은어 (현재는 소멸)
역사
기원명확하지 않음
에도 시대에 등장
주요 활동 시기메이지 시대 ~ 쇼와 시대
쇠퇴20세기 후반, 사회 변화와 정착 정책으로 인해 사라짐
논란
존재 여부실제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음
차별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시달림
연구
연구자미야모토 쓰네이치
연구 분야일본 사회사, 민속학
관련 항목
관련 용어비정주민
부라쿠민
기타민
관련 문화야타
가와타

2. 호칭

「산카」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통일된 표기법이 없으며, 표기에 따라 "山窩", "山家", "三家", "散家", "傘下", "燦下" 등으로 표기했다. "燦下"는 거주하는 집 없이 우산이나 하늘을 지붕 삼아 야외에서 사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퐁", "카메츠리", "미나오시(箕直)", "미츠쿠리(箕作)", "텐바(転場)"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호칭들은 "호이트(거지)", "칸진(권진)" 등 특정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미나오시"나 "텐바"라고 불린 산카는 키나 사사라, 빗자루 등을 만들거나 고쳐서 파는 일을 주된 생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따르면, 산카는 자신들을 동료라는 의미의 "켄타"라고 불렀으며, 강가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이들을 "세부리켄타", 일정한 거처가 있는 이들을 "도야츠켄타"라고 구분하여 불렀다고 한다.[3]

2. 1. 관공서에 의한 호칭

주거지를 정하지 않은 '''부랑 표박자'''나 '''야비인의 무리''' 중 하나로 "산카" 등으로 기록되었다.[2]

2. 2. 경찰에 의한 호칭

예외 없이 '''산와'''로 표기했다. 마을에 정주하는 주민들로부터 물건을 훔치는 '''범죄 전과 단위 집단'''으로 규정했다.

2. 3. 연구자에 의한 호칭

경찰이 사용한 "산와"라는 호칭과 혼동되지 않도록 명확히 구분하여 "산카"라고 칭한다.[2]

2. 4. 농림성에 의한 호칭

농림성은 국유림이나 공유림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업무의 하나로, 나무를 몰래 베어가는 행위(도벌)를 막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을 "산카" 또는 "산와"라고 표기하고 불렀다.

3. 생활 형태

정착하지 않고 수렵 채집을 통해 생활했다. 미(箕)를 생산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교역을 위해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직업의 구별도 있어 "폰"이라고 불리는 산카는 강에서 고기를 잡고 부업으로 대나무 세공 등을 했다.[1] 또한 "미나오시", "텐바"라고 불리는 산카는 미(箕), 곁들여 사사라, 빗자루의 제조, 행상, 수선을 주 수입원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사유 재산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훔치고 함부로 토지에 침입했다는 비난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거점(천막, 급조한 집, 자연 동굴, 고대 무덤 유적, 절 등의 처마 밑 등)을 돌아다니며 생활했으며, 인별장이나 호적에 등록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산카는 메이지 시대에는 전국에 약 20만 명, 쇼와 시대에 들어서도 종전 직후 약 1만 명 정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산카의 인구가 정확하게 조사된 적은 없으며, 이상의 수치는 추정에 불과하다. 산카의 여성은 매춘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고, 산카는 매춘부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일본어를 사용했지만, 일부 단어에서는 독특한 산카어를 사용했다.

4. 역사

'산카'라는 단어는 에도 시대 말기 히로시마 지역의 관헌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4] 홋카이도 명명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탐험가 마츠우라 타케시로의 저서에는 산카에게 생명을 구원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1855년 히로시마의 한 촌장 문서는 '산카'를 '산에 사는 범죄자'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찰을 중심으로 한 행정 문서에는 '산와(山窩)'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는 주로 산적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민속학자 야나기타 쿠니오가 경찰의 의뢰를 받아 '산와'에 대한 현지 조사를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하지만 야나기타를 포함한 초기 연구자들은 대부분 관청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4] 야나기타는 타카노 야사부로 등이 주장한 '산카=범죄자'라는 시각을 비판하며, 그들의 절도 행위는 '재화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작가 미스미 히로시가 발표한 일련의 산카 소설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산카'라는 존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미스미의 소설은 실존했던 '마츠우라 일가'라는 산카 집단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내용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각색된 창작물에 가까우며 학문적인 가치는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소설이 유행하자, 이를 바탕으로 이키 히로유키 등이 더욱 환상적인 이야기를 덧붙인 대중 소설들이 연이어 나왔고, 미스미의 협력을 얻어 영화 《세오리 이야기》(감독 나카지마 사다오)가 제작되기도 했다.

산카 문학의 유행 이후, 일부에서는 산카를 피차별민으로 오해하고 이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그 시점에는 이미 산카로 불리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에 흡수되어 사라진 뒤였다.

1980년대 오컬트 붐이 일면서 수수께끼에 싸인 산카는 매력적인 소재로 다루어졌다. 신대 문자를 사용하고 초능력을 부리며 고대 문명의 후예라는 등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 다수 출판되어 산카에 대한 다양한 오해와 속설을 낳았다. 심지어 일부 회의주의자들은 산카가 오컬트 애호가들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존재가 아니냐며 그 실존 자체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학계에서는 산카를 생계를 위해 산간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단순 빈곤층과,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어 숨어 지내던 집단으로 나누어 파악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산카'라는 명칭 자체가 본래 관청에서 감시와 통제의 필요성에 따라 붙인 용어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 역시 객관성을 결여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4]

산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야마토 정권에 의해 산지로 쫓겨난 원주민(고대 난민설), 무로마치 시대의 전란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유랑민(중세 난민설), 에도 시대 말기의 기근과 사회 혼란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일본인(근대 난민설)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어느 것도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다. '산카'는 어디까지나 외부, 특히 관청에서 붙인 이름이며, 이들 사이에 문화적 또는 혈통적으로 공통된 특징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문헌상 그 존재가 확인된 에도 시대 말기부터 이들이 점차 모습을 감춘 쇼와 시대까지 일반 대중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들이 사라진 후에 등장한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추측이나 속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4. 1. 메이지 시대

サンカ|산카일본어라고 불린 불특정 계층은 서서히 원래의 생활권에 가까운 취락이나 도시부에 흡수된 것으로 생각된다.

4. 2. 쇼와 30년대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를 기점으로 마을 주변에서 정주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관련이 깊다. 일본 정부는 징세나 징병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 국민을 호적에 등록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에도 시대호적 없이 살아가던 계층들도 메이지 시대 이후 호적에 편입되고 정착 생활을 하도록 유도된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에는 호적이 없는 이들이 정착할 땅을 구하기 어려웠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정주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호적 등록과 정주 강요의 결과, 산카와 같은 집단이 전후 일본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사라졌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사회로 변화하면서 과거 마을 주변부에 거주하던 빈곤층 다수가 도시 내에서도 인구 이동이 잦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한, '산카'라는 명칭 자체가 메이지 시대 이후, 범죄 가능성 등으로 인해 이동 범위가 넓어 관헌의 감시나 주의가 필요했던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5. 연구

역사학자들은 산카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역대 중앙 정권과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종교 등 여러 면에서 관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또한 산카는 인구가 적고, 유적과 같이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낮다고 여겨졌다. 이 때문에 산카 연구는 일부 민속학자들에게만 한정되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전문 학회가 결성되었다.

산카에 관한 최초의 학술 조사는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911년(메이지 44년)부터 1912년(메이지 45년)까지 『인류학 잡지』에 「"이타카" 및 "산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당시 오가키 경찰서장이었던 히로세 주타로의 구술을 바탕으로, 산카의 실태를 야나기타 자신의 경험을 섞어 기술한 것이다[6][7].

다이쇼 시대에는 야나기타와 기다 사다키치가 주로 추론에 기반하여 산카 문제를 제기했고, 신문 기자였던 다카노 야사부로의 취재 기사 등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연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는 고토 고젠의 『마타기와 산카』(1940년) 정도가 있었을 뿐, 산카는 연구 대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야나기타 역시 가설 단계에서 연구를 더 진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후대의 연구자들이 야나기타의 연구 사실 자체를 과장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산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작가 미스미 히로시(필명: 삼각관)이다. 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사실을 기록한 소설처럼 보이는 형식으로 산카에 대한 자극적인 소설을 써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스미는 전쟁 전부터 1950년대까지 전국에서 수집했다고 주장하는 산카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논문 「산카 사회의 연구」를 작성했고, 이를 통해 1962년 도요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에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한 저서 『산카의 사회』를 출간하며 산카 연구가로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미스미의 연구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사진 자료는 다른 장소와 다른 날짜에 촬영된 것으로 설명되었음에도 동일 인물이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하는 등 신빙성이 의심되었고, 이후 사진 속 인물의 정체가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에도 시대 말기의 위작으로 알려진 『상기』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이는 '산카 문자'를 소개하는 등, 연구 내용 대부분이 미스미 자신의 창작이라는 사실이 현재는 거의 확정되었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학문적 가치가 매우 낮다고 평가받는다.

6. 산카의 발생에 관한 여러 가설

'산카'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 말기,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한 주고쿠 지방의 관청 문서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山窩'라는 표기와 함께 주로 범죄 가능성이 있는 집단이나 관청의 요주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대중 소설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후에는 영화와 소설 등을 통해 산카에 대한 특정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야나기타 구니오를 비롯한 민속학자들이 처음으로 산카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시도했으나, 연구 초기에는 주로 관청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호적 제도가 도입되어 모든 국민이 국가에 등록되면서, 산카로 불리던 사람들은 점차 산간 지역이나 농촌 사회에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는 이들을 단순히 산지에 거주했던 정착 빈민층, 혹은 범죄 도피자나 은둔자 집단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현재 널리 알려진 산카의 이미지는 미스미 히로시가 쓴 일련의 저작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글 대부분은 개인적인 창작으로 여겨지며 학술적 가치는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고대 난민설, 중세 난민설, 근세 난민설 등 다양하다. 그러나 '산카'는 본질적으로 관청에서 붙인 명칭이며, 이들로 불린 집단 사이에 문화적 또는 혈통적 공통성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문헌상 그 존재가 확인되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고, 이들이 사라진 이후에 등장한 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가설이나 속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 1. 고대 난민설

산카는 원일본인(혹은 조몬인)이며, 야마토 정권에 의해 산간 지역으로 쫓겨난 이들이라는 설이다. 이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산인론에 근거하지만, 야나기타는 산카와 산인을 구분하여 기술했다.

6. 2. 중세 난민설

전란이 이어진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전국 시대)의 유랑민, 직능 집단을 기원으로 하는 가설이다. 기원을 비교적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단어인 "삼가(三家)", "삼계(三界)", "언덕의 자(坂の者)" 등을 근거로 한다. 기다 사다키치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어원을 찾는 데 설득력을 갖지만, 에도 시대 말기의 주고쿠 지방 문서에 나타난 "산카"와의 인과 관계를 검증하기 어렵다.

6. 3. 근세 난민설

에도 시대 말기에 발생한 기근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회적 혼란을 피해 산간 지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산카의 다수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러한 주장은 산카에 대한 기록이 근세 말, 특히 덴포 대기근이 극심했던 주고쿠 지방에서 처음 나타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설은 오키우라 가즈미쓰가 주장하였다.

7. 산카를 다룬 작품

산카는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들 작품 속에서 산카는 신비로운 존재, 혹은 사회적 약자 등으로 묘사되곤 한다. 자세한 작품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 소설


  • 해골의 검은 이삭 (유메노 큐사쿠의 소설)
  • 특수 방첩반 시리즈 (곤노 빈의 소설) - 주인공의 설정이 "산의 민족"이다.
  • 산의 비밀 (오카모토 키도의 소설 "탐정 야화" 수록)
  • 진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 - 표제 인물의 어머니가 "산카의 여성"이며, 후에 나타난 산에 혼자 사는 기묘한 노파가 그녀가 아닌지 의심받는다.
  • 가면 극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 - 산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산카 사람들이 맡겨진 농아 아이에게 독순술을 가르쳐, 면전에서 이야기하면 청각 장애인인지 모를 정도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7. 2. 만화


  • 와타리
  • 덴포 이문 요키시 - "산의 민족"이라는 민족이 등장한다.
  • 충사 - "와타리"라고 불리는 집단이 등장한다.
  • 지옥락 - 산카의 후예가 등장한다.
  • 황야의 소로닌 - "흐름 마타기"라고 불리는 집단이 등장한다.

7. 3. 영화


  • 세오리 이야기 (나카지마 사다오 감독, 1985년)

7. 4. 드라마


  • 라스트 뉴스: 눈앞에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살해당한 산카의 아이가 50년 후에 복수하는 이야기가 있다.
  • 야스라기노 토키~미치: 극중극의 등장인물이 산카에 들어간다.

7. 5. 애니메이션


  • 와타리
  • 덴포 이문 요키시 - "산의 민족"이라는 민족이 등장한다.
  • 충사 - "와타리"라고 불리는 집단이 등장한다.
  • 지옥락 - 산카의 후예가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サンカの起源: クグツの発生から朝鮮半島へ 河出書房新社
[2] 서적 サンカ: 幻の漂泊民を探して 河出書房新社
[3] 서적 暗黑街往來: 隱語・符牒辭典 https://dl.ndl.go.jp[...] 東亞書房 2022-11-23
[4] 서적 サンカ: 幻の漂泊民を探して 河出書房新社
[5] 간행물 「イタカ」及び「サンカ」(其二) https://www.jstage.j[...] 1911-09-10
[6] 간행물 「イタカ」及び「サンカ」 https://www.jstage.j[...] 1911-09-10
[7] 간행물 「イタカ」及び「サンカ」(其三) https://www.jstage.j[...] 191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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