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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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용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신숙주의 손자이자 신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리학을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도승지, 이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겪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복귀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강조하는 사상을 펼쳤다. 저서로는 《이요정집》, 《이락정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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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개 | |
|---|---|
| 기본 정보 | |
| 한글 | 신용개 |
| 한자 | 申用漑 |
| 로마자 표기 | Sin Yong-gae |
2. 생애
신용개는 1483년(성종 14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동료들이 거벽(巨擘)으로 추대하였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재능이 있어 장상(將相)의 재질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권된 후, 홍문관대제학과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서 중종의 즉위 명분을 의심하자, 글로써 사신들을 설득하고 성희안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중종의 왕위 계승을 해명하고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 시절, 천안의 관비 사덕과 인연을 맺고 연서를 받았다.[5]
2. 1. 출생과 가계
1463년 10월 5일 함경도관찰사 신면과 영광 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이며, 증조부는 대제학 신장(申檣)이다. 어머니 영광 정씨는 우군사용(右君司勇)을 지낸 정호(丁湖)의 딸이다.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에 능했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소년기 때 아버지 신면이 이시애의 난으로 전사하면서, 할아버지 신숙주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는 백악산에서 악강(嶽降)하는 상서로운 태몽을 꾸고 손자의 아명을 백악(白岳)이라 지었다. 신숙주는 기품이 뛰어나고 글을 읽으면 바로 외우는 손자를 기특하게 여겨 자를 재유(纔踰)라 하였고, 후에 이름을 용개로 고쳤다.
2. 2. 수학
신용개는 할아버지 신숙주의 문하에서 성리학, 언어학 등의 학문을 배우다가 정효항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성리학을 배웠다.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서도 성리학과 사장, 경학을 수학하였다. 본래 훈구파였던 신용개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사림파로 전향하였다.2. 3. 관료 생활
1488년(성종 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에 등용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얼마 뒤 승문원부정자, 승문원정자(正字)가 되었다. 그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수찬, 교리 등 삼사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4년간 경연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다.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이조 좌랑(吏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등을 역임했다.1494년(연산군 즉위년)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언로를 탄압하던 왕에게 바른 말을 간언(諫言)하였다가 간언으로 문제가 되어 연산군에게 밉보여 평시서령(平市署令)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497년에는 검상(檢詳)이 되었다.
1497년(연산군 3년) 가을 어머니가 사망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왕의 특명으로 3년상을 마치지 않고도 여묘(廬墓)를 끝내고 홍문관 교리에 특별임명된 후 홍문관응교(應敎)가 되고 예문관응교도 겸임하게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면서 김일손, 정여창, 남곤 등 김종직의 문인들이 파면, 투옥과 유배, 처형당할 때 신용개 역시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명문거족의 자제라 하여 곧 석방되어 풀려났다.[3] 그 뒤 학문과 글씨 재주를 인정받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승정원도승지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과 소신으로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렀으며,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1503년 형조판서를 거쳐 행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선발, 연경에 다녀왔다. 1504년 귀국 직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에 유배되었다.[3]
2. 4. 두 번의 사화와 유배
1494년(연산군 즉위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언로를 탄압하던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간언(諫言)하였다가 평시서령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1497년에는 검상이 되었다.1497년(연산군 3년) 가을 어머니가 사망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왕의 특명으로 3년상을 마치지 않고 여묘(廬墓)를 끝내고 홍문관 교리에 특별 임명된 후 홍문관 응교가 되고 예문관 응교도 겸임하게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면서 김일손, 정여창, 남곤 등 김종직의 문인들이 파면, 투옥, 유배 및 처형당할 때 신용개 역시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명문거족의 자제라 하여 곧 석방되었다.[3] 그 뒤 사헌부 장령과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과 소신으로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렀으며,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503년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 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선발, 연경에 다녀왔다. 1504년 귀국 직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영광군에 유배되었다.[3]
2. 5. 중종반정과 복권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 후 풀려나 상경, 형조 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대제학과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서 중종의 즉위 명분을 의심하자 문서로 명나라의 사신들을 설득하였고, 이듬해 직접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 연경에 가서 연산군의 질병으로 중종이 왕위를 계승했음을 고하고, 중종의 조선 국왕 책봉 고명(誥命)을 받아왔다.[3] 중종의 즉위 승인을 성사시키고 책봉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귀국 직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2. 6. 생애 후반
1516년 우의정에 오르고, 영경연사와 감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1518년(중종 13년) 봄 좌의정에 이르렀다.[3]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인품 또한 대범, 호협하고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성종과 중종때 강상을 바로 잡기 위해 '속삼강행실도'를 펴낼 때 그 책임을 맡기도 했다.정승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았으며, 늘 검소하고 겸손하였다. 할아버지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학문 연구에 열성적이었으며 스스로 숙직을 여러 번 자청하였다. 그는 밤새도록 숙직을 서면서 예문관과 홍문관에 수장되어 있던 고전과 고서를 열심히 탐독하였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과 학문적 열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1519년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중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519년 10월 3일 좌의정으로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는 《속동문선 (續東文選)》, 《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가 있으며, 《국조보감》의 수정과 증보에 참여하였다.
2. 7. 사후
묘비문은 이행이 지었다. 경기도 양주군에 임시로 묻혔다가 후에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현재 동두천시 상패동 산 65)로 이장되었고, 신도비도 은현면 상패리(현 동두천시 상패동 468-3)로 옮겨졌다. 신도비는 증손 신응구의 신도비와 함께 대한민국 시대에 와서 동두천시로 옮겨졌다.현재 신도비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구문천리 산104-1 고령신씨북백공파묘역에 있으며, 2020년 2월 20일 화성시 향토문화재(유형) 제22호 '신용개 신도비'로 지정되었다.[6]
3. 연보
- 1463년 10월 5일 : 함경도관찰사 신면과 영광 정씨의 아들로 출생. 할아버지는 신숙주.
- 1483년 :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
- 1488년 :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
- : 승문원 정자, 홍문관 정자, 수찬, 교리 등 역임.
- 1492년 : 사가독서.
- 1498년 :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승정원도승지로 발탁.
- 1502년 :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
- 1503년 : 형조판서, 행예조참판을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 1504년 : 귀국 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영광군에 유배.
- 1506년 : 중종 반정 후 석방, 형조참판,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역임.
- 1507년 : 성희안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중종의 책봉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에 책록.
- :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역임.
- 1516년 : 우의정
- 1518년 : 좌의정
- 1519년 10월 3일 : 사망
4. 사상과 신념
신용개는 대학과 논어의 논의를 바탕으로 덕이 근본이고 법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덕본법말(德本法末)의 정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논어의 '도덕제례'(道德齊禮)를 들어 백성을 다스릴 때 형벌과 정령(刑政)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만으로는 백성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1]
그는 법으로 다스리기 전에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며, 법으로만 해결하려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인간의 사리사욕 때문에 법의 존재는 필요하다고 보았다.[1] 그는 임금이 모범을 보이면 벼슬아치와 백성에게 귀감이 된다고 보았다.[1] 대학을 인용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논리에 기초,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군주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항목으로 제시하였다.[1]
凡爲天下國家, 有九經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근본 강령이 있으니, 자신을 수양하는 것, 현인을 높이는 것, 친족을 친애하는 것, 대신을 공경하는 것, 여러 신하들을 자기 몸과 하나로 생각하는 것,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기술자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 변방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 등이다.중국어
중용의 '구경(九經)' 논리에 따라 국가 경영에서 군주의 수신을 가장 우선시하고, 덕과 법 중 덕을 근본으로 앞세우면서도 인재 등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맹자를 인용, '군주의 선한 마음이나 법만 가지고는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될 수 없으며, 군주가 위에서 덕으로 이끌고 아래로는 시의에 맞게 법을 수정하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가 군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
이는 유교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법제의 중요성을 부차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이다. 그는 '구경(九經)'을 정치에서 우선시해야 할 아홉 가지 지침으로 해석하였다.[1] 사사로운 인맥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른 인재를 채용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보았으며, '현인이 자리에 있게 하고 유능한 이가 그 직임을 맡게 한다면, 법이 실행되어 백세가 지나도 폐단이 없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중용의 구경(九經) 중 '수신(修身)'을 첫머리에, '현인을 존중하는 것'을 그 다음에 두고, '위에서 덕을 잘 밝히고, 아래로 현인을 임용한다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요 법은 저절로 지켜져 풍속이 대도(大道)의 수준으로 향상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부터 마음을 바로잡고 수신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날마다 법을 하나씩 바꾸어 날마다 폐단 하나씩 제거한다고 해도 폐단은 법이 생기는 것에 비례하여 생겨날 것이니, 장차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임금께서 이미 위에서 덕을 잘 밝히고 그것으로 백성을 쇄신하는 근본으로 세웠으며, 아래로 법을 바로잡아 수정하고 보완하는 시의(時宜)'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신용개는 호탕한 성품으로 술을 좋아했으며, 늙은 종을 불러 큰 잔을 주고받고 취하면 그만두기도 하였다. 국화와 난을 좋아하여 여덟 개의 화분을 길렀는데, 어느 날 귀한 손님 8명이 온다고 하였다.[5]
:'오늘은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5]
날이 저물어도 손님이 오지 않자, 밤이 되어 달빛이 국화 꽃빛에 비치니 술을 내오라 하고 여덟 개의 국화 분을 가리키며 '이것이 내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화분마다 술 두 잔씩을 따라 주고 자신도 마시며 취하였다.[5]
4. 1. 덕치주의론
신용개는 대학과 논어의 논의를 이론적인 기반으로 하여 덕이 근본이고 법은 말단이라는 정치론(덕본법말, 德本法末)을 주장하였다. 그는 논어의 '도덕제례'(道德齊禮)의 논리를 들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형벌과 정령(刑政)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만으로는 백성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1]그는 법으로 다스리기 이전에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며, 무조건 법으로만 해결하려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사리사욕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법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1] 그는 임금이 모든 것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 보았다.[1] 신용개는 대학을 인용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국가 통치에서 군주가 가장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힘써야 할 항목으로 제시하였다.[1]
凡爲天下國家, 有九經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근본 강령이 있으니, 자신을 수양하는 것, 현인을 높이는 것, 친족을 친애하는 것, 대신을 공경하는 것, 여러 신하들을 자기 몸과 하나로 생각하는 것,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기술자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 변방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 등이다.중국어
중용의 '구경(九經)' 논리에 따라 그는 국가 경영에서 군주의 수신을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덕과 법의 관계에서 덕을 근본적인 것으로 앞세우면서도 적절한 인재 등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맹자를 인용하여 '군주의 선한 마음이나 법만 가지고는 국가 운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으며 오직 군주가 위에서 덕으로 이끌고 아래로는 시의에 적절하게 법을 수정하고 동시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로 하여금 군왕의 국가 통치를 보좌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
이는 덕치와 인정을 근간으로 하는 유학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법제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나마 나름대로 인정하였다. 그는 '구경(九經)'을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할 아홉 가지 지침으로 해석하였다.[1]
4. 2. 임금의 수신론
그는 임금이 모든 것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 보았다. 신용개는 대학을 인용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국가 통치에서 군주가 가장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힘써야 할 항목으로 제시하였다."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근본 강령이 있으니, 자신을 수양하는 것, 현인을 높이는 것, 친족을 친애하는 것, 대신을 공경하는 것, 여러 신하들을 자기 몸과 하나로 생각하는 것,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기술자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 변방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 등이다."
중용에서 '구경(九經)'의 논리를 원용하여 그는 국가 경영에서 군주의 수신을 가장 선차적이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덕과 법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덕을 근본적인 것으로 앞세우면서도 적절한 인재의 등용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맹자를 인용해서는 '군주의 선한 마음이나 법만 가지고는 국가 운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으며 오직 군주가 위에서 덕으로 이끌고 아래로는 시의에 적절하게 법의 수정하고 동시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로 하여금 군왕의 국가 통치를 보좌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덕치와 인정을 근간으로 하는 유학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법제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서나마 나름대로 인정하였다. 그는 '구경(九經)'을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할 아홉 가지 지침으로 해석하였다.
4. 3. 인재 등용론
그는 임금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용개는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국가 통치에서 군주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항목으로 제시하였다.중용의 '구경(九經)' 논리를 원용하여 그는 국가 경영에서 군주의 수신을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덕과 법의 관계에서 덕을 근본적인 것으로 앞세우면서도, 적절한 인재 등용을 중요하게 보았다. 맹자를 인용하여 '군주의 선한 마음이나 법만 가지고는 국가 운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으며, 군주가 위에서 덕으로 이끌고 아래로는 시의에 적절하게 법을 수정하며 동시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로 하여금 군왕의 국가 통치를 보좌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덕치와 인정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법제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나마 인정한 것이다. 그는 '구경(九經)'을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할 아홉 가지 지침으로 해석하였다. 신용개는 사사로운 인맥과 연줄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른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현인이 자리에 있게 하고 유능한 이가 그 직임을 맡게 한다면, 법이 실행되어 백세가 지나도 폐단이 없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신용개는 유교 경전 중용의 구경(九經)을 인용했는데, 그 중 구경에서 '수신(修身)'을 첫머리에 두고, '현인을 존중하는 것'을 그 다음에 두었다. 그는 '만약 위에서 덕을 잘 밝히고, 아래로 현인을 임용한다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요 법은 저절로 지켜져 풍속이 대도(大道)의 수준으로 향상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현명한 인재 등용과 임금의 솔선수범을 역설하였다.
그는 올바른 인재를 채용하려면 임금부터 마음을 바로잡고 수신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법을 하나씩 바꾸어 날마다 폐단 하나씩 제거한다고 해도 폐단은 법이 생기는 것에 비례하여 생겨날 것이니, 장차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임금께서 이미 위에서 덕을 잘 밝히고 그것으로 백성을 쇄신하는 근본으로 세웠으며, 아래로 법을 바로잡아 수정하고 보완하는 시의(時宜)'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4. 4. 주도(酒道)
신용개는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했다. 때로는 늙은 사내종이나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주고받되 취하여 쓰러지면 술을 그만두기도 하였다. 그는 평소 국화와 난을 좋아하여 여덟 개의 화분을 길렀는데, 어느 날은 집안 사람들에게 귀한 손님이 8명 온다고 하였다.[5]:'오늘은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5]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저물어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밤이 되고 달이 떠오르자 국화 꽃빛에 달빛이 비쳐 희고 깨끗하였다. 그제서야 신용개는 술을 내오라 하고, 여덟 개의 국화 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것이 내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화분마다 각각 술 두 잔씩을 따라 주고 자신도 마시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신용개도 또한 취하였다.[5]
5. 평가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인품 또한 대범하고 호협하며 꿋꿋하여 당대 선비들의 신망을 얻었다. 학문 연구에도 열성적이어서 일부러 숙직을 자청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서책을 탐독하여 성종을 감격시키기도 했다.[5]
사돈이기도 한 이행은 신용개가 재주를 실전과 실무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6. 저서 및 작품
신용개는 《이요정집》, 《이락정집》을 저술하고,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속동문선》, 《속삼강행실도》는 그가 저술하고 편찬한 책이다.
6. 1. 저서
- 《이요정집》
- 《이락정집》
- 《속동문선》
- 《속삼강행실도》
6. 2. 편서 및 공저
- 속동문선
- 속삼강행실도
- 국조보감
6. 3. 작품
주어진 자료에는 신용개의 작품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7. 시
舟下楊花渡|주하양화도중국어 / 배타고 양화도에 내려서[1]
水國秋高木葉飛|수국추고목엽비중국어 / 강마을 가을 하늘 높고, 바람에 낙엽은 날리고[1]
沙寒鷗鷺淨毛衣|사한구로정모의중국어 / 차가운 모래벌에 갈매기 더욱 희구나[1]
西風落日吹遊艇|서풍락일취유정중국어 / 날은 어두워지고, 놀이 배에 바람 불어오니[1]
醉後江山滿載歸|취후강산만재귀중국어 / 취하여 강산이나 싣고 돌아갈꺼나.[1]
8.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고조부 | 신포시(申包翅) |
| 증조부 | 신장(申檣) |
| 종조부 | 신말주(申末舟), 신송주(申松舟) |
| 조부 | 신숙주(申淑舟) |
| 조모 | 윤경연의 딸 |
| 백부 | 신주(申澍) |
| 숙부 | 신찬(申澯), 신정(申瀞), 신준(申浚), 신부(申溥), 신형(申泂), 신필(申泌) |
| 아버지 | 신면(申㴐) |
| 어머니 | 정호(丁湖)의 딸 |
| 부인 | 박건(朴楗)의 딸 |
| 장남 | 신한(申瀚) |
| 손자 | 신여주(申汝柱) |
| 손서 | 이순효(李純孝) |
| 장녀 | 박은(朴誾) |
| 외손자 | 박공량(朴公亮) |
참조
[1]
웹사이트
申用漑
http://100.daum.net/[...]
[2]
뉴스
이덕일 사랑 부자정승(父子政丞)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9-26
[3]
웹사이트
申用漑
http://koreandb.nate[...]
[4]
문서
이씨조선시대 부총리 중 하나
[5]
뉴스
성애 편지
http://danmee.chosun[...]
조선일보
2008-12-04
[6]
간행물
화성시 향토문화재 신규 지정 고시
화성시장
2020-02-20
[7]
뉴스
酒道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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