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마와주 (카메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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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다마와주는 카메룬의 주로,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소를 기반으로 한 경제 활동이 두드러진다. 이 지역은 8세기 또는 9세기에 수단계 집단에 의해 정착되었으며, 19세기 초 풀베족의 지하드 이후 풀베족이 지배적인 민족이 되었다. 아다마와 주는 5개의 구로 나뉘며, 응가운데레가 주도이다. 주요 경제 활동은 목축업과 자급 농업이며, 이슬람교가 주요 종교이지만 토착 신앙도 존재한다.
아다마와 주의 초기 원주민은 다양한 고(古) 수단계 민족이었다. 8세기 또는 9세기에 수단계 집단이 침략해 오면서 이들은 대부분 쫓겨나거나 흡수되었다. 이주해온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뭄(Mboum), 응도로(Dourou), 쿠틴(Koutine), 라카-엠베레, 참바, 도아요, 팔리, 문당(Moundang), 투푸리(Toupouri) 등이 있다.[1]
2. 역사
카넴-보르누 제국은 이 부족들과 관계를 맺고 이 지역을 품비나 또는 마비나라고 불렀다. 1349년에서 1385년 사이에는 카노의 이슬람 중심지를 통해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으나, 소수의 통치자와 귀족, 상인들만이 개종했다.[1]
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는 차드 지역에서 세미-반투 부족(예: 바밀레케, 바문, 콤, 소, 티카르, 위디쿰, 윔밤)과 반투족(예: 베티-파윈, 마카, 넴) 등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왔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가바야와 차드호 지역에서 온 부테도 이주해 왔는데, 부테는 이 지역 최초의 철 제련공이었으며 맘냥(현재 바뇨)과 티바레(현재 티바티) 마을을 세웠다.[1]
18세기 초, 풀베족이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북부에서 아다마와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수가 적었지만, 지속적인 이주로 풀베 공동체가 성장했고, 17세기경 도시 풀베족을 중심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
1804년, 풀베족 지도자 우스만 단 포디오는 이교도 부족에 대한 불만과 영토 확장에 대한 열망으로 지하드를 선포했다. 그의 부관 모디마 아담 알-하산은 훔비나의 라미도(lamido)로 임명되어 군대를 일으켰다.[1] 아다마의 군대는 1835년에 Vute 중심지인 Mbamnyang과 Tibaré를 정복하고, 바뇨와 티바티로 개명했다. 1847년 아다마가 사망했을 때, 풀베 기병대는 서쪽의 나이저 강에서 동쪽의 로고네 강까지, 북쪽의 사하라 사막에서 남쪽의 사나가 강까지 영토를 장악하여 소코토 칼리프 국가를 형성했다.[1]
1830년경, 풀베족은 델베의 Mbum 마을을 정복하고 응가운데레로 개명했다. 많은 Mbum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북쪽으로 이주했다. 1850년까지 풀베족은 카메룬 북부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원주민들은 정복당해 라미도의 통치를 받거나 노예가 되거나 도망쳐야 했다. 풀베 상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소금과 말을 받아 노예와 교환했고, 소수의 노예는 대서양 시장으로 팔려나갔다.[1]
풀베족 지하드는 카메룬 남부의 인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카메룬 북부의 인구는 감소했다. 풀베 침략자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고 정복한 땅을 가축 목초지로 사용했다. 이들 중 많은 집단은 독일과 접촉했을 때 여전히 이주 중이었다.[1]
1822년 영국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아다마와 지역에 들어왔고,[4] 1869년에서 1873년 사이에는 독일의 구스타프 나흐티갈 박사가 이 지역을 탐험했다.[4] 1882년 영국의 에두아르트 E. 플레겔이 탐험을 이어갔지만 1883년 사망하면서 서방과 풀베 제국 사이의 평화로운 접촉은 끝났다.[4] 1884년, 독일은 아다마 제국의 일부를 병합했고, 다른 부분은 영국령 나이지리아의 일부가 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1916년,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했다. 프랑스는 라미도들의 형식적인 권력을 유지하면서 프랑스 정책을 수행하게 했고, 1936년까지 이 지역에는 39명의 라미도와 1명의 술탄이 있었다. 프랑스는 인프라 개선, 특히 도로 건설에 기여했다.[1]
1956년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식민지에 자치권을 부여했고, 앙드레마리 음비다가 카메룬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음비다는 아봉-음방 결의안으로 무슬림 북부를 소외시켰고, 무슬림 지도자들은 분리주의를 위협했다. 결국 음비다는 사임하고 북부 출신 무슬림인 아마두 아히조가 총리가 되었다.[1]
아히조는 1960년 카메룬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북부 발전에 힘썼다. 철도는 1961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0년 후 응가운데레에 도달했다.[1]
폴 비야 대통령은 1983년 북부 주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극북 지역 (카메룬), 북부, 아다마와 주를 만들고, 응가운데레 대학교를 국가 시스템에 흡수했다.[1]
2014년 초,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폭력 사태를 피해 수천 명의 난민이 아다마와 지역 등으로 유입되었다.[4]
2. 1. 초기 인구 이동
아다마와주의 가장 오래된 인구는 다양한 고(古) 수단계 민족이었다. 이들은 8세기 또는 9세기에 침략해 온 수단계 집단에 의해 대부분 쫓겨나거나 흡수되었다. 여기에는 뭄(Mboum), 응도로(Dourou), 쿠틴(Koutine), 라카-엠베레, 참바, 도아요, 팔리, 문당(Moundang), 투푸리(Toupouri)가 포함되었다.[1]
아다마와주의 남서쪽 측면은 기원전 2000년경 반투족의 확장이 시작된 최초의 (원시) 반투족 고향 지역의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반투족 분열과 중앙, 동부, 남부 아프리카로의 확산 이후 "고향에 남은 반투족" 중 일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분열 이후, 남서부 지역은 아마겟돈과 유사한 일련의 침략과 분산을 겪었다. 서부 초원 지역의 많은 인구가 이러한 분산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1]
카넴-보르누 제국은 이 부족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이 지역을 품비나 또는 마비나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현재의 주뿐만 아니라 오늘날 나이지리아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영토를 나타냈다. 카넴-보르누는 또한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카노에 있는 이슬람 중심지를 통해 1349년에서 1385년 사이에 이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했다. 그러나 소수의 통치자, 귀족 또는 상인만이 개종했다.[1]
14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더 많은 부족들이 차드 지역에서 이 영토로 들어왔다. 여기에는 세미-반투 부족, 예를 들어 바밀레케, 바문, 콤, 소, 티카르, 위디쿰, 윔밤이 포함되었다. 반투족 또한 유입되었으며, 베티-파윈과 마카, 넴이 그 예이다. 그 외에 들어온 집단으로는 현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가바야와 차드호 지역에서 온 부테가 있었다. 부테는 이 지역 최초의 철 제련공이었으며, 맘냥(현재 바뇨)과 티바레(현재 티바티) 마을을 세웠다. 세미-반투족은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맘강의 수원지 근처에 정착하기 전에 점차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투족은 그들의 동쪽, 아다마와 고원의 남쪽에 정착했다. 이들 인구 중 하나 이상이 바뇨, 티바티, 응아운데레를 세웠다.[1]
한편, 반투족과 세미-반투족의 침략으로 인해 더 오래 정착한 수단계 민족들이 북쪽으로 밀려났다. 뭄, 응도로, 쿠틴, 라카-엠베레는 현재 주의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고, 다른 수단계는 훨씬 더 멀리 이주했다. 이 시기는 근대 이전까지 아다마와 영토의 최대 인구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 사건이 이 지역에 극심한 결과를 초래했다. 풀베족의 도착이었다.[1]
2. 2. 풀베족의 지하드
13세기 초, 초기 풀베 정착민들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또는 카메룬 북부에서 아다마와로 들어왔다. 이들은 수가 많지 않아 종종 다른 부족들에게 종속적인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한 풀베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많은 지역에 풀베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 초기 풀베족은 17세기 경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는데, 이는 정착한, 즉 도시 풀베족에서 시작되었다.
1804년, 이 지역과 그 너머의 풀베족은 이교도 부족에게 복종하는 것에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더 넓은 영토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풀베족 지도자 우스만 단 포디오는 이러한 감정에 응답하여 지하드를 선포했다. 우스만은 그의 부관 모디마 아담 알-하산을 훔비나의 라미도(lamido)로 임명했고, 아다마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군대를 일으켰다.[1]
아다마의 군대는 거의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1835년에 주요 Vute 중심지인 Mbamnyang과 Tibaré를 정복했고, 그곳의 이름을 각각 바뇨와 티바티로 개명했다. 아다마가 1847년에 사망했을 때, 풀베 기병대는 서쪽의 나이저 강에서 동쪽의 로고네 강까지, 북쪽의 사하라 사막에서 남쪽의 사나가 강까지의 영토를 장악하여 소코토 칼리프 국가를 형성했다. 아다마의 토후국(아다마와 토후국으로 알려짐)은 주지사 밑에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고, 아다마와 고원은 응아운데레 하위 구역에 속했다.[1]
원주민과의 전투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1830년경, 풀베족은 델베의 Mbum 마을을 정복했고, 그곳의 이름을 근처 언덕의 이름을 따서 응가운데레로 개명했다. 많은 Mbum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남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주했다. 이 마을은 아르도 응조브디의 라미다트의 중심지가 되었다.[1]
1835년경부터 풀베 이민자들이 새로 정복한 영토로 대거 유입되었다. 1850년까지 풀베족은 카메룬 북부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원주민들은 정복당해 지역 라미도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도망쳐야 했다. 풀베 상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소금과 말을 받아 북쪽의 이슬람 제국에서 판매할 노예와 교환했다. 소수의 노예는 대서양 시장으로 팔려나갔다.[1]
저항했던 집단들은 가혹한 산이나 남쪽의 정글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풀베족과 전쟁을 벌인 Vute와 Gbaya와 같은 집단들은 카메룬의 반투족과 같은 다른 집단들을 몰아냈다. 따라서 풀베족 지하드는 카메룬 남부의 인구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하드는 카메룬 북부의 인구를 감소시키는 역할만 했다. 풀베 침략자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복한 땅을 가축의 목초지로 사용했다. 이러한 많은 집단은 카메룬의 새로운 식민주의자, 즉 독일과 접촉했을 때 여전히 이주 중이었다.[1]
2. 3. 유럽 식민 지배
1822년에 영국의 탐험가들이 아다마와 지역에 들어오면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4] 1869년에서 1873년 사이에는 독일의 구스타프 나흐티갈 박사가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탐험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4] 나흐티갈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집단, 그들의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활용 가능한 자원을 면밀히 관찰했다.[4] 1882년에는 영국의 에두아르트 E. 플레겔이 나흐티갈을 따라 아다마와를 탐험하며 무역을 시작했고, 남쪽의 바뇨까지 도달했다.[4] 그러나 1883년, 플레겔은 탐험 중 사망했고, 서방과 풀베 제국 사이의 평화로운 접촉은 끝이 났다.[4] 1884년, 독일은 아다마 제국의 일부를 병합했고, 다른 부분은 영국령 나이지리아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아다마 토후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4]
2. 4. 독립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916년 아프리카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이 프랑스로 넘어갔으며, 이는 불과 1세기 만에 이 지역의 세 번째 점령 세력이 되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이 지역을 가루아를 수도로 하는 모라-가루아 행정 구역에 배치했다.
프랑스 식민 정책은 독일의 전임자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라미도들은 형식적인 권력을 유지했지만, 프랑스 정책을 수행해야 했다. 프랑스는 또한 완강한 통치자들을 제거했으며, 1936년까지 이 지역에는 39명의 라미도와 1명의 술탄이 있었다. 프랑스가 이 지역에 기여한 주요 사항은 인프라 개선이었다. 특히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도로 건설이 가속화되었으며, 식민지 당국은 붐반에서 바뇨, 티바티, 응가운데레를 거쳐 가루아로 이어지는 도로를 건설했다.
1956년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앙드레마리 음비다는 카메룬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음비다는 그의 아봉-음방 결의안을 도입하면서 무슬림 북부를 빠르게 소외시켰다. 이 결의안 중 하나는 북부 카메룬의 "민주화"를 요구했는데, 무슬림 통치자들은 이를 그들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암호로 두려워했다. 따라서 무슬림 지도자들은 결의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카메룬에서 분리하여 프랑스령 차드에 합류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음비다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북부 출신의 무슬림인 아마두 아히조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아히조는 1960년 1월 1일 카메룬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카메룬 북부와 남부를 더 잘 연결하기 위해 야운데에서 북쪽으로 도로를 확장하는 등 북부 고향 발전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했다. 철도는 그 직후에 건설되어 1961년에 시작되어 10년 후 응가운데레에 도달했다.
북부 무슬림들은 카메룬의 두 번째 대통령인 폴 비야의 등장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이는 비야와 언론이 새로운 지도자에게 라미도(lamidos, 지역 지도자)를 대항하게 하려 한다고 비난한 무사 야야라는 아히조 지지자 때문이었다. 비야는 오늘날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인기는 카메룬 남부만큼 강하지 않다. 그 이유 중 일부는 비야가 북부에서 한 주요 활동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에 북부 주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오늘날과 같은 극북 지역 (카메룬), 북부, 아다마와 주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응가운데레 대학교를 국가 시스템에 흡수했다.
2014년 초, 수천 명의 난민이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폭력 사태를 피해 아다마와 지역, 동부 지역 (카메룬), 북부 지역 (카메룬)의 국경 마을을 통해 카메룬에 도착했다.[4]
3. 지리
아다마와 주는 지형, 수계, 기후, 동식물 등 다양한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3. 1. 지형
아다마와 주는 카메룬에서 지질학적으로 다양한 지역 중 하나이다. 나이지리아와의 국경에는 고텔 산맥과 맘빌라 산맥이 있는데,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결정질 및 변성암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변성암에는 운모, 편암, 편마암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종종 화산 현무암으로 덮여 있으며, 이러한 조합은 파로 강까지 이어진다. 이 강 동쪽에서는 화강암이 다시 우세하지만, 퇴적암은 음베레 강 계곡을 형성하며, 변성암 지대가 이를 둘러싸고 있다. 롬 강 또한 변성암 지역에서 발원한다. 화산암은 고텔 산맥 바로 동쪽, 주도인 응가운데레 북동쪽, 북부 주와의 경계선에 위치한 북서부에 분포한다.[1]
토양은 대부분 갈색 또는 붉은 갈색 라테라이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건기와 우기의 연간 변화와 산의 토양 침식의 결과이다. 철과 알루미늄 함량이 높아 산화로 인해 표면 근처에 경반층, 경피, 또는 피갑이 형성된다. 롬 계곡의 토양은 원자재의 가볍게 발달된 조성이며, 음바카오 저수지의 바로 북서쪽과 파로 강 바로 서쪽의 토양도 그러하다. 주의 극서북부에는 대신 적철토가 있으며, 고테스 및 맘빌라 산맥을 포함한 주의 많은 산에는 여러 토양 유형의 혼합물이 포함되어 있다.[1]
강력한 지열 작용이 아다마와 주를 형성했다. 이 지역은 남쪽에서 남카메룬 고원의 일부로 시작된다. 지형은 완만하지만 고르지 않게 6도 위도까지 솟아오른다. 여기서 아다마와 고원이 시작되는데, 이는 고도가 1,000~2,000m(평균 약 1,100m)에 이르는 지형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까지 뻗어 있다. 지형은 제렘과 음베레 계곡과 응아운데레 북쪽 국경에서 500m까지 낮아진다. 고원은 8도 북위까지 이어지다가 베누에 저지대로 급격한 절벽과 활화산(이 전환 지역은 대부분 북부 주에 속해 있음)을 이루며 내려간다.[1]
단층도 이 지역을 가로지르며 뻗어 있으며, 주요 단층은 백악기 시대부터 이어진 카메룬 단층이다. 음방 산맥은 이 단층을 따라 동쪽으로 대략적으로 뻗어 있다. 다른 산들도 이 지역에 흩어져 있다. 맘빌라스 산맥은 나이지리아, 북서부 주, 서부 주에서 남서쪽 끝까지 뻗어 있다. 고텔 산맥은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접한 이 산맥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모든 산들은 카메룬 산맥의 일부를 형성한다. 고텔 산맥의 차발 음바보는 2460m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1]
3. 2. 수계
아다마와주는 카메룬의 "물의 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카메룬의 많은 강들이 이 지역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이 강들은 모두 열대 기후에 속하며, 우기인 5월부터 9월까지는 수위가 높고, 10월부터 4월까지는 수위가 낮거나 완전히 마르기도 한다. 이 중 일부 강은 홍수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음바카오 저수지 지역의 제렘강이 그 예이다. 주의 강들은 나이저강으로 흘러드는 강, 차드호로 흘러드는 강, 그리고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 이렇게 세 개의 서로 다른 유역으로 나뉜다.
마요 데오강은 고텔 산맥에서 발원하여 북부 주로 흘러든다. 파로강은 마요 데오강에서 조금 동쪽에서 발원하지만, 비나 구역과 파로-데오 구역 사이를 넓고 아치형으로 동쪽과 북쪽으로 흐르다가 북부 주로 들어간다 (두 강은 결국 합류한다).
차드 분지에는 두 개의 주요 강이 있다. 음베레강은 메이강가 마을 북쪽에서 발원하여 북부 주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경 방향으로 북동쪽으로 흐른다. 비나강의 발원지는 은가운데레 바로 북쪽에 위치하며, 그 후 북부 주로 들어간다. 이 두 강은 결국 합쳐져 로고네강을 형성한다.
음밤강, 킴강, 그리고 제렘강은 대서양 분지의 주요 강이다. 음밤강과 킴강은 모두 남서쪽에서 발원하여 중앙 주로 흘러든다. 제렘강은 동쪽과 서쪽 지류로 형성되어 음바카오 저수지에서 합류한다. 그 후 이 강은 남쪽으로 흘러 동부 주로 들어간다. 저수지(20억m3의 물을 담을 수 있음) 때문에 제렘강은 카메룬의 중요한 수력 발전 원천이 된다. 마지막으로, 롬강은 메이강가에서 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동부 주로 들어간다. 제렘강은 결국 사나가강이 되며, 이 다른 강들은 결국 사나가강으로 흘러든다.
오랜 화산 활동의 역사는 또한 이 주에 많은 수의 화구호를 만들어 냈으며, 이는 물로 채워진 붕괴된 화산의 결과이다. 가장 잘 알려진 호수 중에는 은가운데레 근처의 티손호와 음발랑호가 있다.
3. 3. 기후
아다마와 주의 높은 고도는 섭씨 22도에서 25도 사이의 비교적 서늘한 기후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후는 남 카메룬 고원과 아다마와 고원 사이에서 다르다. 남 카메룬 고원은 4계절을 보이는 적도 기후인 기니형 기후를 보인다. 12월부터 5월까지는 길고 건조한 기간, 5월부터 6월까지는 짧고 습한 기간, 7월부터 10월까지는 짧고 건조한 계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월부터 11월까지는 길고 습한 계절이 나타난다.
아다마와 고원의 기후는 열대 기후인 수단형으로 분류된다. 이곳은 단 두 계절만 있는데, 11월에 건조기가 시작되고 4월에 우기가 시작된다. 연평균 강수량은 900mm~1500mm이며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한다. 5월과 6월이 가장 습하며, 때때로 토네이도가 발생한다. 8월도 강수량이 많은 시기이다. 또한, 11월부터 1월까지 기온이 하락하는데, 이는 온대 기후에서 겨울을 유발하는 조건과 유사한 현상이다. 1월에 하르마탄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상승하여 4월에 최고조에 달한다. 5월과 6월의 억수 같은 비는 다시 기온을 낮춘다.
세 번째 기후 유형은 아다마와 주의 남서쪽 모서리(마요-반요 지역의 대부분)를 특징짓는다. 이 지역은 카메룬형의 적도 기후를 보인다. 강수량은 1500mm~2000mm이며, 긴 건조 기간 뒤에 긴 우기가 이어진다.
3. 4. 동식물
아다마와 주의 식생은 인간의 영향으로 크게 변형되었다. 한때 울창한 숲이었지만, 반복적인 덤불 태우기와 가축의 짓밟힘으로 지형이 바뀌었다. 남부 지역은 기니 사바나로, 카메룬의 숲이 우거진 남부와 사막 북부 사이의 과도적 지대이다. 고원 자체에도 사바나가 이어지지만, 숲의 밀도는 낮다. 풀은 빽빽하게 자라며, 원래의 식생은 여전히 강 유역에서 살아남아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은 해발 약 1800m까지 상록수와 낙엽수이며, 그 이상에서는 고사리와 대나무가 우세해진다. 풀은 몇몇 숲 지역과 관목이 우거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식물 생태계의 지배적인 형태를 이룬다. 또한 마요-바뇨 지역의 남서쪽 절반은 숲이 더 울창한 삼림 사바나이다.
아다마와 주에는 두 개의 국립 보호 구역이 있다. 첫 번째는 음밤 에 제렘 국립공원으로, 아다마와 주와 동부 주에 걸쳐 4165km2를 보호한다. 이 공원은 넓은 사바나와 숲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붐바 은지다 국립공원의 작은 부분이 북부 주에서 아다마와 주 영토로 확장된다.
4. 인구
연도 | 인구 |
---|---|
1976년 | 359,334명 |
1987년 | 495,185명 |
2005년 | 884,289명 |
2015년 | 1,200,095명 |
아다마와 주의 인구는 1976년 359,334명에서 2015년 1,200,095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6]
4. 1. 인구 분포
아다마와 주는 인구 밀도가 낮다. 광대한 토지는 풀베족 소 치는 목동들의 용도로 거의 전적으로 사용되며, 이 목초지는 간헐적인 정착지로만 구분된다. 카메룬 정부는 풀베족 목동들에게 정착 생활 방식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유목 전통은 변화의 조짐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바나가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현재 중부 및 동부 주(Province)로 상당한 양의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다.[6]응가운데레는 카메룬의 남북 철도 종점에 위치하여 카메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따라서 현대적인 도시는 전통적인 마을을 둘러싼 구불구불한 거리의 팽창된 집합체이다. 또한 아다마와 주의 대부분의 민족 대표자들이 그곳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주의 민족적 다양성을 축소해 놓은 곳이기도 하다.[6]
남서부의 마요-반요 구역은 맘빌라 산의 고도로 집중된 맘빌라족과 콘자족, 그리고 고텔 산의 부테족과 페레족으로 인해 주 전체보다 약간 더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다. 페레족은 쿠틴 또는 쿠틴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풀베족이 그들에게 부여한 "개"를 의미하는 매우 경멸적인 용어이다. 북쪽 국경 또한 풀베족 내부 지역보다 약간 더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다.[6]
4. 2. 민족 구성
아다마와주에서 민족 집단을 분류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언어이다.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은 다양한 남부 반토이드어족 언어를 사용한다. 반토이드족은 주로 파로, 데오, 마요-바뇨 구역의 서부 3분의 1을 차지한다. 은도로족은 최북단, 나이지리아 국경의 상부 마요 데오에 거주한다. 그 남쪽에는 뭄족에게 수가라고 불리는 넴넴족이 마요-바뇨 구역 북쪽 3분의 1과 멩강 서쪽 강둑을 따라 위치한다. 부테족은 나이지리아 국경에서 남쪽에 위치하며, 엠바르카우 저수지 남서쪽 강둑에 두 번째 인구 중심지가 있다. 맘빌라족은 남서쪽 국경에, 콘자족은 바뇨-방킴 도로를 따라 내륙에 위치한다. 티카르족은 인접한 주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주의 남서쪽 모서리에 위치한다.
아다마와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주요 집단은 다음과 같다. 페레족은 이들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세 곳의 주요 거주지에 산다. 첫 번째는 마요-발레오 마을 북쪽, 주의 북서쪽이다. 티그네르 남쪽 파로 마을에 또 다른 중심지가 있으며, 세 번째는 멩강에 위치한다. 칼리족은 주의 북동부, 벨렐을 중심으로 북부 주 경계를 따라 위치한다. 뭄족 (Mboum)은 응가운달 마을과 그 주변 지역을 점유한다. 응가운데레 동쪽에는 디이족이 있으며, 북부 주에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우방기어족 언어 사용자인 그바야족은 또 다른 중요한 집단이다. 그들의 영토는 엠베레 구역 전체와 비나 구역 남서쪽의 작은 지역에 걸쳐 있으며, 남쪽으로 동부 주까지 이어진다.
풀베족은 아다마와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며, 정착형 풀베족(도시 풀베족)과 유목형 풀베족(보로로)으로 나뉜다. 정착형 풀베족이 더 많으며, 바뇨, 티바티, 티그네르, 수도인 응가운데레를 포함한 주의 대부분 주요 도시에 거주한다. 수년에 걸쳐 토착 인구와 혼합되면서 수단의 이웃과 신체적으로 닮게 되었다. 유목형 풀베족은 대규모 소떼와 함께 주와 그 너머를 돌아다니며 임시 정착지만을 만든다. 이들은 도시 형제들보다 피부색이 더 밝고, 키가 크고 마르며,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다.
풀베족은 세네감비아어족 풀풀데의 카메룬 방언을 사용한다. 역사적인 영토 지배 때문에 풀풀데는 링구아 프랑카로도 사용된다. 다른 주요 언어로는 비타레어, 디이어, 그바야어, 맘빌라어, 티카르어가 있다. 교육받은 주민 대부분은 프랑스어 또한 사용한다.
4. 3. 종교
아다마와에서 이슬람교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으며, 특히 풀베족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풀베족 내에서도 종교성이 강한 정착민과 형식적으로만 무슬림인 경우가 많은 유목민 보로로족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도 세력을 확장했지만, 기독교인은 소수이다. 많은 부족들이 나이지리아 국경 근처 산악 지역에서 토착 신앙 또는 "이교" 신념을 유지하고 있다.[1]5. 경제
아다마와 주의 경제는 목축업, 농업, 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 섹션에서 각 분야별 자세한 내용을 다룬다.
5. 1. 목축업
아다마와 주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풀베족의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이 지역은 인구가 적고 습도가 높으며, 광활한 풀밭이 펼쳐져 있어 방목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목동들은 목초지를 순환하며, 자신과 가축을 위해 급수 구덩이나 우물을 건설하기도 한다.[1]보로로족과 그들의 가축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풀베족에게 소의 수를 매우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 만들었으며, 남자가 소를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부유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목동들은 가축을 죽이지 않고, 순자산의 일부를 잃을까 두려워 병든 가축을 살려두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풀베족 목동들은 소를 야운데와 두알라의 대규모 시장으로 운송하여 판매하며 (일부는 가봉과 콩고 공화국까지 가기도 한다). 주요 이동 방목 경로는 주의 서쪽 3분의 1 지점과 차드와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1]
이 가축의 대부분은 혹이 있는 제부 품종이다. 응아운데레와 바뇨 인근에서는 이를 풀라니 제부라고 부르며, 이는 짙은 갈색 가죽과 흰 반점이 있는 크고 살이 많은 동물이다. 반면, 유목 풀베족은 보로로 제부를 사육한다. 이들은 더 마르고, 밝은 색을 띠며, 장거리를 이동하는 데 더 적합하다.[1]
정부 운영 기관인 동물 기술 연구소(IZR)와 SODEPA도 몇몇 현대식 가축 목장을 설립했다. 주요 목장은 라로, 왁보, 은도카요 마을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목장주들은 토착 풀베 가축과 미국산 브라만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의 소를 축산했다. 또한, 정부의 주도로 이 지역의 체체파리를 박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많은 목장주와 보로로족은 말과 당나귀도 사육한다. 또한, 아다마와 주는 다른 어떤 주보다 더 많은 염소와 양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더 큰 마을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돼지는 이 지역의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 있어 훨씬 덜 흔하다.[1]
5. 2. 농업
아다마와주의 거의 모든 농업은 자급자족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수수가 주식이며, 옥수수, 매니옥도 중요하다. 소량 재배되는 다른 작물로는 토란, 참마, 땅콩이 있다.가바야족, 뭄족, 두루는 이 지역에서 가장 농사를 많이 짓는 부족이지만, 목축업자들조차 우기에는 농사를 짓는다. 농장은 일반적으로 덤불을 개간하거나 태운 작은 구획으로, 건기에 파종한다. 작물은 우기에 자라 수확된다. 건기가 매우 길기 때문에 작물을 보존해야 하며, 대부분은 곡물로 변환되어 절구와 절구공이로 손으로 찧는다.
환금 작물은 이 지역 경제에서 작은 역할을 한다. SODEBLE은 응아운데레 근처 와상데에서 100km2에 밀을 재배한다. 남서 마요-바뇨 지역에는 커피 밭도 몇몇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사업체들이 땅콩, 수수, 밀 농장을 설립했다.
5. 3. 산업
아다마와주는 약간의 산업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은 주도에 위치해 있다. 이 산업의 상당 부분은 지역의 소 기반 경제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가죽 세공은 Société des Tanneries et Peausseries du Cameroun(STPC) 공장이 증명하듯 응아운데레의 중요한 산업이다. 고무, 향수, 유제품 또한 주도에서 가공된다. 목공예 및 매트 직조를 포함한 수공예품은 또 다른 산업 분야를 형성한다. 주석은 마요 다르레와 나이지리아 국경 근처 및 반요 남서부에서 채굴되며, 보크사이트는 응아운달과 미님-마르타프 근처에서 채굴된다. 광천수는 둥게에서 얻을 수 있다.6. 교통
응아운데레 공항은 야운데, 두알라, 가루아, 마루아 등 여러 도시를 운행한다. 응아운데레는 "Transcam II" 철도 노선을 통해 카메룬 남부에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기차 여행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침대칸이 있어 어느 정도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좌석이 부족하고 혼잡하여 도난의 위험이 있다.[1]
도로의 경우, 남쪽에서 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중앙 주와 동부 주의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이동이 어렵다. 아다마와 주 내의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상태이고 유지 보수가 잘 되지 않아 (특히 응아운데레 남쪽) 상태가 나쁘다. 응아운데레에서 북부 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되어 있어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지역 공항은 응아운데레에서 야운데, 두알라, 가루아, 마루아로 가는 항공편을 운행하며, 티니에레, 바뇨, 응아운달, 티바티, 음바카오 저수지에는 모두 활주로가 있다.[1]
6. 1. 도로
응아운데레는 아다마와 주의 관문이며, "Transcam II" 철도 노선을 통해 카메룬 남부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기차 여행은 12시간에서 30시간이 걸리지만, 침대칸이 있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은 식당칸을 포함하여 이용 가능한 모든 좌석에 빽빽하게 들어선다. 혼잡한 상황 때문에 도둑 또한 위험하다.남쪽에서 도로 여행도 가능하지만, 이는 중앙 주에서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로 제한되거나, 동부 주를 통과하는 긴 우회로를 거쳐야 하는데, 그곳의 도로도 별반 나을 것이 없다. 아다마와 주 내의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상태이며, 유지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특히 응아운데레 남쪽) 종종 상태가 좋지 않다. 응아운데레에서 북부 주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되어 있어,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큰 불편함 없이 북부와 극북부까지 갈 수 있다. 국도 6호선은 서부 주의 푸음반에서 아다마와 주에 진입하여 바뇨, 티바티, 메이가응가로 이어진다. 국도 15호선은 중앙 주의 상베에서 티바티를 거쳐 응아운데레로 이어진다.
6. 2. 철도
응아운데레는 아다마와 주의 관문이며, "Transcam II" 철도 노선을 통해 카메룬 남부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기차 여행은 12시간에서 30시간이 걸리지만, 침대칸이 있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은 식당칸을 포함하여 이용 가능한 모든 좌석에 빽빽하게 들어선다. 혼잡한 상황 때문에 도둑 또한 위험하다.[1]6. 3. 항공
응아운데레 공항은 야운데, 두알라, 가루아, 마루아, 티그네레, 바뇨, 응아운달, 티바티 등을 운행한다.[1] 티그네레, 바뇨, 응아운달, 티바티, 음바카오 저수지에는 모두 활주로가 있다.[1]7. 행정 구역
아다마와 주는 5개의 도(Départements)로 구성되어 있다.
도(Department) | 중심 도시 |
---|---|
제렘 | Tibati|티바티영어 |
파로에데오 | Tignère|티니에르영어 |
마요바뇨 | Banyo, Cameroon|바뇨영어 |
음베레 | Meiganga|메이강가영어 |
비나 | 은가운데레 |
8. 사회
아다마와 주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종종 나타나는데, 이는 이 지역의 높은 문화적 동질성에서 비롯된다. 주민 대다수는 무슬림 풀베족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특히 시골 지역에서 인종차별과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다.[1] 카메룬 정부는 유목민 정착을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1]
아다마와 주는 인구가 적어 카메룬 정치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1] 그러나 풀베족은 북부 3개 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 있어, 카메룬 정치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다.[1] 이는 카메룬 북부가 남부에 유리한 정책에 반대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1]
8. 1. 사회 문제
아다마와 주의 사회적 불평등은 이 지역의 높은 문화적 동질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슬림 풀베족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특히 더 시골 지역에서 인종차별과 차별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1] 카메룬 정부는 이 지역의 유목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1]아다마와 주는 인구가 적어 카메룬 정치인들에게 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1] 그러나 풀베족은 특히 북부 3개 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들은 함께 카메룬 정치인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다.[1] 이것은 카메룬 북부가 남부에 더 유리한 정책에 반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1]
8. 2. 정치
아다마와 주는 5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다.구 이름 | 프랑스어 표기 | 수도 |
---|---|---|
제렘 | Jérém | 티바티 |
파로에데오 | Faro-et-Déo | 티그네레 |
마요바뇨 | Mayo-Banyo | 바뇨 |
음베레 | Mbéré | 메이가가 |
비나 | Vina | 응아운데레 |
각 구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지사() 또는 수석 구역 관리자가 통치한다. 대통령은 또한 주지사를 임명하며, 주지사의 사무실은 응아운데레에 있다.
라미도(Lamidos)는 전통적인 이슬람 통치자로, 여전히 자신들의 풀베(Fulbe)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의 대부분 대도시에는 라미도가 있으며, 많은 작은 마을에도 라미도가 있다. 다양한 라미도들은 자신들을 섬길 의원들을 선출하며, 이들은 풀베와 다른 부족 집단 출신일 수 있다. 카메룬 정부는 이러한 통치자들이 자체 법정을 열고 자체 감옥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인권 단체들이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1]
이 지역의 다른 대부분 부족들은 명목상 부족장의 통치를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대부분 명목상의 지도자일 뿐이다. 그러나 티카르(Tikar)족 사이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이 여전히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각 티카르 족의 추장을 섬기는 고문단, 즉 "명사 위원회"가 있다. 그 아래에는 특정 마을이나 도시의 일부를 다스리는 다양한 구역장 (sous-chefs프랑스어|수셰프}})들이 있다. 분기별 촌장 (chefs de quartier프랑스어|셰프 드 카르티에}})은 특정 이웃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1]
8. 3. 교육
아다마와주의 교육 수준은 일반적으로 매우 낮다. 유목민인 보로로족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드물다. 한편, 도시의 풀베족은 종종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조기에 결혼시키며, 결혼한 소녀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1] 아다마와주의 문맹률은 약 80%로 추정된다.[1]학교와 교사의 부족 또한 교육의 장애물이다. 대부분의 학교는 대도시나 주도에 위치하고 있어, 학생들은 특히 중등 교육 단계에서 종종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집을 떠나 생활해야 한다.[1] 또한, 아다마와주에 배정된 카메룬 교사들은 지역의 외진 곳에 있다는 이유로 종종 파견을 거부한다.[1]
8. 4. 보건

아다마와주 대부분의 도시에는 작은 진료소 형태의 의료 시설이 있다. 주도에는 병원도 있다. 이 지역의 주요 건강 문제는 위생 부족이며, 이는 점점 더 도시화되는 은가운데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또 다른 문제는 HIV와 AIDS인데, 정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의 HIV 감염률은 17%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이 수치는 은가운데레의 표본에서만 나온 것이며, 더 농촌 지역의 감염률은 아마 더 낮을 것이다.
9. 문화
아다마와주는 활기찬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예시로는 티카르족의 춤인 메낭이 있다. 무용수들은 전사들을 돕거나 여성의 관능미를 축하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춤을 춘다. 출생, 장례, 결혼식은 이 지역의 비무슬림 인구에게도 성대한 축하 행사가 열리는 경우가 많다.
10. 인접 지역
참조
[1]
웹사이트
- CRTV
http://crtv.cm/fr/la[...]
2017-11-13
[2]
웹사이트
Cameroun • Fiche pays • PopulationData.net
https://www.populati[...]
[3]
웹사이트
Sub-national HDI - Area Database - Global Data Lab
https://hdi.globalda[...]
2018-09-13
[4]
웹사이트
Cameroon: Location of Refugees and Main Entry Points (as of 02 May 2014) - Cameroon
http://reliefweb.int[...]
2014-06-08
[5]
웹사이트
Cameroon: Administrative Division population statistics
http://www.citypopul[...]
[6]
웹사이트
Cameroon: Administrative Division population statistics
http://www.citypop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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