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공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공근은 1889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나 안중근, 안정근의 동생으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1909년 안중근 의거 이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러시아 대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 자금 확보와 외교 활동을 펼쳤다.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끌며 일제 요인 암살을 주도했으나, 자금 관리 문제로 김구와 갈등을 겪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다 1939년 충칭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아들 안우생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화한인청년연맹 - 유자명
유자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원예학자로서 3·1 운동 참여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에서 아나키스트 노선을 걸었고, 중국에서 농학자로 활동하다 사망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남화한인청년연맹 - 정화암
정화암은 3·1 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무정부주의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광복군 활동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로마 가톨릭교도 - 이상재
이상재는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독립협회, YMCA, 조선일보,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끌고 청년 교육과 계몽에 헌신한 월남 이색의 후손이다. - 일제강점기의 로마 가톨릭교도 - 서상돈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유자명
유자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원예학자로서 3·1 운동 참여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에서 아나키스트 노선을 걸었고, 중국에서 농학자로 활동하다 사망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남화한인청년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0년 상하이에 결성되어 무력 투쟁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흑색공포단 활동과 육삼정 의거를 시도하며 친일파 처단 활동을 펼치다가 한국 광복군에 편입된 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 안공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안공근 |
| 출생일 | 1889년 7월 11일 |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청계동리 |
| 사망일 | 1939년 5월 30일 |
| 사망지 |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 |
| 국적 | 대한제국 |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사도 요한) |
| 학력 | |
| 학교 | 경성사범학교 졸업 |
| 가족 관계 | |
| 부 | 안태훈 |
| 모 | 조마리아 |
| 형제 | 안중근(형), 안정근(형) |
| 친척 | 안명근(사촌 형) 안경근(사촌 동생) 안문생(조카) 안준생(조카) 안미생(조카딸) 김인(조카 사위) 안진생(조카) 안봉생(5촌 조카) 안춘생(5촌 조카) |
| 자녀 | 안우생(장남), 안낙생(차남) |
| 정당 | |
| 소속 정당 | 무소속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 |
| 소속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직책 | 재무부 예하 행정관 직무대리 |
| 장관 | 이유필 대한 임정 재무총장 직무대행 서리 |
| 차관 | 신건식 대한 임정 재무차장 직무대행 서리 |
| 주석 | 이상룡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상 양기탁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상 권한대행 서리 |
| 총리 | 이동녕 대한 임정 국무총수상 |
| 수상 | 이동녕 대한 임정 국무총수상 |
| 임기 | 1925년 12월 8일 ~ 1926년 2월 15일 |
| 정치 활동 | |
| 경력 |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한국국민당 최고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
2. 생애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안공근은 공범 혐의로 심문을 받았고,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 최후를 함께 했다.[1] 조선총독부 등의 탄압으로 망명을 결심, 1910년 러시아로 건너가 러시아어를 배웠고,[9]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행하였다.[10] 1921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활동을 하였다.[9][10]
1924년 가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이주했고, 1926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31년 김구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단원 모집과 연락, 특무 활동 등을 총괄하였고,[10]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였다.[9]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등을 도왔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에게서 받은 지원금을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났다. 1937년 2월 장남 안우생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안공근이 형수를 모셔오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여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 생활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24][25]"
1939년 5월 충칭에서 실종되었으며,[10] 5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 살해범과 시신은 찾지 못했다.
2. 1. 생애 초반: 출생과 성장 (1889년 ~ 1909년)
1889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1879~1910), 안정근(1885~1949)은 그의 형이었다. 안공근은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2]1892년부터 1900년까지 형 안정근을 따라 한문사숙에서 수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이후 진남포에서 큰형 안중근이 가산을 처분하여 세운 천주교 계통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敎)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4] 1899년 일어학교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안공근의 일본어 실력은 만주 뤼순에서 안중근의 동생 자격으로 참고인 신문을 받을 때 통역 없이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을 만큼 뛰어났다.[4] 1907년 3월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 교원 양성 기관인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속성 과정을 마쳤다.[5] 1908년 8월 판임관 4등에 임용되어 진남포 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발령받았다.[6] 진남포보통학교에서 부훈도(정교사가 아닌 부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8] 1909년 안중근 의거 직후 러시아로 망명한다.[7]
2. 2.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910년 ~ 1939년)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 직후, 안공근은 공범 혐의로 1개월 남짓 심문을 받았고,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는 최후까지 함께 했다.[1] 수시로 형 안중근을 면회했으며, 조선총독부 등의 탄압과 주변의 불편한 시선이 계속되자 망명을 결심, 자금과 인력을 모아 치밀하게 준비했다.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 촉성회,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형 안정근은 안중근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안창호와 친하게 지냈지만, 안공근은 안창호를 멀리하고 김구를 가까이 하였다. 이후 김구의 측근이 되어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의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였다.
2. 2. 1. 러시아 망명과 초기 활동 (1910년 ~ 1920년대 초)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한 그는 형 안중근의 뜻에 따라 러시아어를 배웠고,[9] 해외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안중근 기념사진 엽서를 발행하였다.[10]1920년 12월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이 되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에 임명되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를 벌였다.[9][10]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11][12] 같은 해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군자금 잔액 140만 루불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이주했고 1926년 안원생(형 안정근의 장남)과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였다.[14] 같은 해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서 물러난 여운형을 대신하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유필, 최창식, 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5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직을 사퇴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15] 안창호의 측근들은 그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그는 안창호 지지를 거부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촉성회가 구성되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는 전민족독립당이 창당되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인 홍남표, 정백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려 하자, 그는 참여를 거부하고 탈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석을 거부했는데도 전민족독립당에서는 계속 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두고 있었다.
2. 2. 2. 임시정부 참여와 독립운동 (1920년대 초 ~ 1930년대)
1920년 12월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이 되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9][10]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 촉성회,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형 안정근은 안중근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안창호와 친하게 지냈지만, 안공근은 안창호를 멀리하고 김구를 가까이 하였다. 이후 김구의 측근이 되어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의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였다.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유필, 최창식, 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직을 사퇴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안공근, 김규식, 김구 등은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15] 안창호의 측근들은 그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그는 안창호 지지를 거부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 지 13일 만에 사퇴하였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 연락, 특무 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고,[10]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였다.[9] 동시에 안공근은 서무와 재정, 자금 조달과 중화민국 장제스, 쑹메이링, 오철성 등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교류 및 후원금을 운반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등을 도왔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및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운영을 맡아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9][7]
1933년에는 박찬익, 엄항섭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친일 조선인인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단 유인발을 제거하였고, 친일파 변절 의혹이 있는 옥관빈을 암살하였다.
2. 2. 3. 김구와의 갈등과 독자 활동 (1930년대)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단원 모집과 관리, 통신 연락, 특무 활동 등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다.[10] 일제 요인과 친일파 암살을 주관하였다.[9] 동시에 안공근은 서무와 재정, 자금 조달, 중화민국 장제스, 쑹메이링, 오철성 등 중국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교류 및 후원금을 운반하는 활동을 하였다.그러나 중국 국민당에게서 받은 지원금을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30년대 윤봉길 의거 이전 어느 시기에 위혜림과 함께 한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18]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도박 자금으로 탕진하는 등의 행위가 계속되자 이는 김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1937년 2월 안공근은 장남 안우생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한인애국단 대표로서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 단체와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같은 달 8월 17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 9개 단체를 토대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7][20]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하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21] 백범일지에 의하면,[21]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김구는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들조차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 우선 데리고 나왔다.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15] 당시 상하이는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전황이 좋지 않았으나, 김구는 안공근이 형수를 모셔오지 못했다고 크게 질책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여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 생활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24][25]"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하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며 오히려 총독의 양자를 자처했고, 사위 황일청은 전향하여 일본에 항복할 것을 독려하다가 광복 직후 피살되기도 했다. 다만 명분, 도덕,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26] 함락된 상하이에서 형수와 형의 유족을 구해오지 못한 일로 심한 꾸중을 들은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안공근이 중국 국민당 정권에게서 지원받은 공금을 사적으로 사용하거나 도박 등에 돈을 날렸고, 이 일로 김구와 소원해지게 된다. 특히 중일전쟁 직후 그는 형인 안중근의 일가족을 한국에서 데려오라는 김구의 지시를 받았으나, 일본 경찰의 추격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비밀리에 선박으로 상하이로 데려왔다. 그러자 김구는 형님 의사(義士)의 가족은 데려오지 못하고 자신의 가족만 데려왔느냐며 안공근을 질책하였다. 김구의 질책에 화가 난 안공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족 이동에서 빠지기도 했다.
2. 3. 의문의 죽음 (1939년)
1939년 5월 충칭에서 실종되었다.[10] 충칭에 있을 무렵 상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의 집을 출입했는데, 유진동의 집에 출입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27] 유진동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때 김구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5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 그러나 살해범과 안공근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향년 49세.안공근의 딸 안정생은 쑹메이링에게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잡아줄 것을 청원, 쑹메이링의 요청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경찰이 상하이를 수색하였으나, 용의자는 끝내 잡지 못하였다. 안공근의 암살 배경에는 일본 스파이에 의한 암살설, 중국계 마적단에 의한 암살설, 안공근과 갈등하던 김구의 다른 측근에 의한 암살설 등이 있다.[28] 또한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한 암살설도 있다.[27]
3. 사후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9][7]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은 광복 후 1948년 4월 김구를 따라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김구 사후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1980년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알려졌다.
그의 사인으로는 그와 갈등 관계에 있던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에 의한 암살설, 국제간첩인 나검북(羅劍北)에 의한 암살설 등이 있다.[28] 참고로 김자동 씨에 의하면 안공근의 시신은 한인 의사 유진동의 집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4. 평가
안공근은 김구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했을 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보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먼저 모시고 난징으로 피신했다.[21] 오영섭은 이를 두고 안공근이 김구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15]
한편, 안공근의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럽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는데, 중국 정부의 지원금을 관리하던 안공근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29]
5. 가족 관계
| 항목 | 내용 |
|---|---|
| 아버지 | 안태훈(1862~1905), 가톨릭 진사 |
| 어머니 | 조마리아(1862~1927) |
| 형 | 안중근(1879~1910) |
| 누나 | 안성녀 루시아(1881~1954) |
| 형 | 안정근(1885~1949) |
| 부인 | 광주 이씨(廣州 李氏) |
| 아들 | 안우생(1907~1991), 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있음. |
| 손녀 | 안기애(1938~) |
| 손자 | 안기철(1939~) |
| 손부 | 고부 이씨(古阜 李氏), 남로당 제주도 유격대장 김달삼의 딸 |
| 손자 | 안기호(1946~) |
| 손자 | 안기영 |
| 손부 | 김씨(金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김병식의 딸 |
| 아들 | 안낙생(1913년 6월 22일 - 1950) |
| 딸 | 안연생(1917년 ~ ?) |
| 딸 | 안금생(安錦生) |
| 사위 | 한지성(韓志成),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 딸 | 안지생(安志生) |
6. 관련 작품
- 도마 안중근 (2004년, 배우: 홍산표)
참조
[1]
뉴스
안공근 선생 7월의 독립운동가
http://www.newsis.co[...]
뉴시스
2008-07-12
[2]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3]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4]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5]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6]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7]
뉴스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8-07-12
[8]
문서
교사는 훈도라고 불렀다.
[9]
뉴스
7월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http://news.chosun.c[...]
조선닷컴
2008-07-12
[10]
뉴스
7월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선생 선정
http://news.chosun.c[...]
대전일보
2008-07-12
[11]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2]
서적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3]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4]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5]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1)
경인문화사
[16]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7]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8]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19]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1]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2]
서적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23]
서적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4]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5]
서적
백범일지
[26]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7]
뉴스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http://www.catholicn[...]
가톨릭뉴스
2008-07-29
[28]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9]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30]
뉴스
“호국영령 영원히 기억할 것”
나라사랑
2008-07-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