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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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뒤러는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이자 판화가로, 1471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1528년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으며, 회화, 판화, 수채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판화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이며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묵시록》, 《기사, 죽음, 악마》, 《멜랑콜리아 I》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예술 이론에도 관심을 가져 《인체 비례론》과 같은 저서를 남겼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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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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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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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브레히트 뒤러 |
다른 이름 | 아달베르트 아이토시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에러 |
출생일 | 1471년 5월 21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
사망일 | 1528년 4월 6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
국적 | 독일 |
배우자 | 아그네스 프라이 (1494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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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분야 | |
분야 | 회화 판화 |
사조 | 북방 르네상스 盛期르네상스 |
주요 작품 | 회화 판화 목판화 |
대표작 |
2. 생애
알브레히트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볼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부터 1494년까지 오버라인 각지를 여행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 동안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중 첫 번째였다. 마르틴 숀가우어를 만나려 콜마르를 방문했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다. 바젤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책 〈바보배〉에 실린 목판화를 제작했고, 1494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했지만 자식은 없었다. 뒤러 가문은 그와 형제들이 모두 자식을 얻지 못해 대가 끊겼다.
1494년, 뒤러는 베네치아로 첫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 이듬해 돌아왔다. 이 여행은 뒤러와 독일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행 중 그린 수채화는 유럽 풍경화 발전에 기여했다.
1497년부터 독립하여 작업장을 운영하며 초상화와 자화상을 제작했다. 〈아버지의 초상화〉(1498), 〈자화상〉(1498), 〈오스볼트의 초상화〉(1499), 〈자화상〉(1500) 등이 이 시기 작품이다. 그의 명성은 판화, 특히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으로 높아졌으며, 이는 유럽 목판화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뒤러는 인문주의자 콘라트 첼티와 교류하며 그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1502)의 삽화를 제작했고, 첼티는 뒤러를 제2의 아펠레스라고 칭찬했다.
1505년, 뒤러는 두 번째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조반니 벨리니 등과 교류하며 색채에 대한 예술적 감각을 발전시켰다. 베네치아 독일 상인들의 의뢰로 산 바르톨로메오 교회를 위한 대형 그림 《장미 화환의 축제》를 완성했다.
1507년 중반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1520년까지 머물며 라파엘로 등 주요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520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을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고, 안트베르펜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521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으나 질병으로 작업 속도가 줄었다. 말년에는 종교적 주제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건강 악화와 이론적 저술 준비로 많은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1528년 56세로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했으며,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그의 대저택은 뉘른베르크의 주요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
2. 1. 초기 생애 (1471-1490)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5월 21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브레히트 뒤러 더 에덜과 바르바라 홀퍼 사이의 셋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 더 에덜(원래 이름은 알브레히트 아조시)은 헝가리 왕국 죄르머제 인근 아조시 출신의 성공한 금세공인이었다. 그는 1455년에 뉘른베르크로 이주하여 1467년 자신의 스승의 딸인 바르바라 홀퍼와 결혼했다.[9]뒤러의 대부인 안톤 코베르거는 뒤러가 태어난 해에 금세공을 그만두고 인쇄업자와 출판업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가장 성공한 출판업자가 되었으며, 24개의 인쇄기와 독일 및 해외 여러 지사를 소유했다. 코베르거의 가장 유명한 출판물은 1493년에 출판된 ''뉘른베르크 연대기''로, 미하엘 볼게무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1,809개의 목판화 삽화가 포함되어 있었다.[12]
뒤러는 몇 년간 학교 교육을 받은 후 아버지로부터 금세공과 드로잉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는 뒤러가 금세공 훈련을 계속 받기를 원했지만, 뒤러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486년, 15세의 뒤러는 미하엘 볼게무트의 견습생이 되었다.[10] 1484년에 은필로 그린 자화상 (알베르티나, 빈)은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어린이 그림 중 하나로 여겨진다.[11]

2. 2. 편력 시대와 결혼 (1490-1494)
1490년 부활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각지를 편력했다. 이는 뒤러가 살아생전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가운데 첫 번째였다. 그는 아마도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르틴 숀가우어를 만나기 위해 콜마르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는 이미 1491년 2월 2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81] 콜마르에서 뒤러는 숀가우어의 형제들인 금세공인 카스파와 파울, 그리고 화가 루드비히의 환영을 받았다.1492년 초, 뒤러는 바젤로 가서 마르틴 숀가우어의 또 다른 형제인 금세공인 게오르크와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책 〈바보배〉(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를 제작했다. 1493년 스트라스부르로 갔으며, 그곳에서 니콜라우스 게르하르트의 조각을 접했을 것이다. 뒤러의 첫 번째 유화 자화상(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은 이 시기에 그려졌으며, 아마도 뉘른베르크에 있는 약혼녀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12] 이 자화상에서 뒤러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식물은 '남편의 정조'를 의미하는 에린지움으로 여겨진다.[82]

1494년 7월 7일, 23세의 나이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직후, 뒤러는 부재중에 맺어진 약속에 따라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이 도시의 뛰어난 놋쇠 장인이자 자산가였던 한스 프라이의 딸이었다. 그러나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2. 3. 이탈리아 여행 (1494-1495, 1505-1507)
뒤러는 1494년 10월 초, 결혼한 지 약 3개월 만에 아내를 뉘른베르크에 남겨두고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뉘른베르크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83] 그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수채화로 풍경 스케치를 남겼는데, 이 중 일부는 현재까지 전해지며, 다른 일부는 그의 후기 작품(예: 판화 《네메시스》)에 등장하는 실제 장소의 정확한 풍경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이 풍경화들은 서양 최초의 순수한 풍경화로 여겨진다.[83]이탈리아에서 뒤러는 더 발전된 예술 세계를 연구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향했다.[17] 미하엘 볼게무트의 지도를 받으며 드라이포인트 판화 제작과 독일 양식의 목판화 디자인 방법을 배웠던 뒤러는[17] 독일에서도 이탈리아 작품을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조반니 벨리니를 베네치아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여전히 최고의 예술가라고 평했다.[84] 그의 그림과 판화는 신체 비례에 관심을 가졌던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로렌초 디 크레디, 안드레아 만테냐 등의 영향을 보여준다.[18] 뒤러는 이 여행에서 파도바와 만토바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05년, 뒤러는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 다시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등 유명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뒤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조반니 벨리니였다. 뒤러는 편지에서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4]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 상인들은 뒤러에게 산 바르톨로메오 교회를 위한 대형 그림 《장미 화환의 축제》를 주문했다. 이 그림은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큰돈을 주고 구입하여 프라하로 옮겨졌으며, 현재 프라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21]

그림에는 두 명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평화롭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과 베네치아 독일인 공동체 구성원들, 그리고 저작권을 나타내는 표지를 들고 있는 뒤러 자신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제단화는 플랑드르 회화의 사실주의가 초록색 식물과 의복 묘사에 사용되었고, 뒤러 자신의 색조를 사용한 것 외에도 강한 이탈리아적 영향을 보여준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으며, 베네치아 시 위원회는 그가 영구히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러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인 뉘른베르크로 돌아왔다.
2. 4. 뉘른베르크에서의 활동 (1495-1520)
1495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러는 자신의 작업실을 열었다. 결혼은 작업장 개설의 필수 조건이었다.[19] 이후 5년 동안 그는 북부 양식에 이탈리아의 영향을 점차 통합했다. 작업실 초기 그의 최고 작품은 판화였는데, 대부분 종교적이었지만, ''남자들의 목욕''과 같은 세속적인 장면도 있었다.[85] 이것들은 이전 독일 판화보다 크고 정교하게 잘렸으며, 구성이 훨씬 더 복잡하고 균형 잡혔다.[85]뒤러가 직접 목판을 자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작업은 전문 장인이 수행했을 것이다.[85] 그러나 미하엘 볼게무트의 작업실에서 받은 훈련은 그에게 이 기술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목판 조각가와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었다.[85] 뒤러는 자신의 디자인을 목판 자체에 직접 그리거나 종이 그림을 판에 붙였다.[85] 어떤 경우든 그의 그림은 판을 자르는 동안 파괴되었다.[85]

그의 ''묵시록''[19] 디자인 연작은 1498년이며, ''미카엘이 용과 싸우는 모습'' 판화도 마찬가지다. 그는 같은 해에 ''대수난''의 첫 일곱 장면을 만들었고, 약간 후에 성 가족과 성인들에 관한 11개의 연작을 만들었다.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가 1496년에 의뢰한 ''일곱 가지 슬픔 제단화''는 뒤러와 그의 조수들이 1500년경에 제작했다. 1502년에 뒤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03-1505년경 뒤러는 몇 년 동안 완성하지 못한 ''성모의 생애''를 묘사한 세트 중 처음 17개를 제작했다. 이것들과 ''대수난''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세트로 출판되었지만, 판화는 상당한 수로 개별적으로 판매되었다.[12]
같은 기간 동안 뒤러는 부린을 사용하여 판화를 만드는 어려운 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초기 훈련을 받으면서 이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은 금세공인에게도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1496년에 그는 ''탕아''를 제작했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는 수십 년 후에 이 작품을 칭찬하며 독일적인 특징을 언급했다. 그는 곧 ''네메시스''(1502), ''바다 괴물''(1498), ''성 에우스타치우스'' 등 화려하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제작했는데, 배경에는 매우 상세한 풍경과 동물들이 묘사되었다. 그의 이 시기의 풍경화는 그의 이전 수채화와는 상당히 다르다. 지형을 묘사하기보다는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훨씬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여러 점의 성모상, 단독 종교 인물,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농부 그림이 있는 작은 장면들을 만들었다. 판화는 휴대성이 뛰어나 이 작품들로 인해 뒤러는 몇 년 안에 유럽의 주요 예술 중심지에서 명성을 얻었다.[12]
뒤러가 베네치아에서 만난 베네치아 예술가 야코포 데 바르바리는 1500년에 뉘른베르크를 방문했고, 뒤러는 그에게서 원근법, 해부학, 비율의 새로운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72] 데 바르바리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몰두하게 될 자신의 연구를 시작했다. 현존하는 일련의 드로잉은 뒤러의 인체 비율 실험을 보여주며, 이는 피부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 부린을 사용하는 그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판화 ''아담과 이브''(1504)로 이어진다.[12] 이것은 그의 전체 이름으로 서명된 유일한 현존하는 판화이다.
뒤러는 특히 그림과 판화를 위해 많은 수의 예비 드로잉을 제작했고, 그 중 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508년경의 ''기도하는 손''(Heller 제단화의 사도를 위한 연구)이다. 그는 또한 수채화와 과슈로 이미지를 계속 만들었으며, ''어린 토끼''(1502)와 ''큰 잔디 조각''(1503)을 포함한 초원 단면 또는 동물의 정물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회화에 복귀하여 처음에는 템페라로 리넨에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초상화와 제단화가 포함되며, 특히 파움가르트너 제단화와 ''동방 박사의 경배''가 있다. 1506년 초, 그는 베네치아로 돌아와 1507년 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4] 그는 베네치아에서 청색 종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1505년부터 1507년까지 그곳에서 완성한 그림을 위한 준비 그림을 그렸다.[20] 이때 뒤러의 판화는 큰 인기를 얻어 복제되기도 했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산 바르톨로메오 교회를 위해 이주한 독일인 공동체로부터 귀중한 의뢰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장미 화환의 축제''로 알려진 제단화였다. 이 그림은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그녀의 왕좌 앞에서 평화롭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두 사람 모두 왕관을 벗고 있다. 또한 베네치아의 독일인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저작권을 나타내는 표지를 들고 있는 뒤러 자신의 초상화도 오른쪽에 포함되어 있다. 플랑드르 회화의 사실주의가 초록색 식물과 의복 묘사에 사용되었고, 그 자신의 색조를 사용한 것 외에도, 이 제단화는 강한 이탈리아적 영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에 의해 획득되어 프라하로 옮겨졌다.[21]


뒤러는 1507년 중반에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1520년까지 독일에서 머물렀다.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는 라파엘로를 포함한 많은 주요 예술가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소통했다.
1507년에서 1511년 사이에 뒤러는 ''아담과 이브''(1507), ''만 명의 순교자들의 순교''(1508, 작센의 프리드리히를 위해), ''붓꽃을 든 성모''(1508), 제단화 ''성모 승천''(1509, 프랑크푸르트의 야콥 헬러를 위해), ''삼위일체 숭배''(1511, 마테우스 란다우어를 위해) 등 유명한 그림 작업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대수난''과 ''성모의 생애'' 두 개의 목판화 연작을 완성했으며, 두 작품 모두 1511년에 ''묵시록'' 연작의 두 번째 판과 함께 출판되었다. 베네치아 이후의 목판화는 명암대비 모델링 효과에 대한 뒤러의 발전을 보여주며,[23] 판화 전체에 하이라이트와 그림자를 대조할 수 있는 중간 톤을 만들었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37점의 ''작은 수난'' 목판화가 있으며, 1511년에 출판되었고, 1512년에는 같은 주제의 15점의 작은 판화 세트가 제작되었다. 회화가 판화에 비해 시간을 투자할 만큼 충분한 수입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불평하며,[24] 그는 1513년부터 1516년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513년과 1514년에 뒤러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1513), ''성 제롬의 서재'', ''멜랑콜리아 I''(1514) 등 유명한 세 개의 판화를 제작했다. 1513년 뒤러의 펜과 잉크 드로잉은 그의 친구 피르크하이머를 위한 초안이었다. 이 초안은 Lusterweibchen 샹들리에를 디자인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사슴 뿔과 나무 조각을 결합했다.
1515년에 그는 ''코뿔소 목판화''를 제작했는데, 그는 동물을 직접 본 적은 없었고, 다른 예술가의 필사본 설명과 스케치를 통해 리스본에서 도착한 코뿔소를 묘사했다. 인도 코뿔소의 이미지는 매우 강력하여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지난 세기까지 일부 독일 학교 과학 교과서에서 사용되었다.[12] 1520년까지 그는 1515년에 서양 최초의 인쇄된 별자리 차트 목판과 1516년에 린넨에 템페라로 그린 초상화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유일한 에칭 실험은 이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1515-1516년 사이에 5점, 1518년에 6점을 제작했다. 그는 체계적이고 고전적인 형태에 대한 자신의 미학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기술을 포기했을 수 있다.[28]


1512년부터 막시밀리안 1세는 뒤러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192개의 개별 블록으로 인쇄된 방대한 작품인 ''개선문''을 의뢰했으며, 그 상징성은 피르크하이머가 호라폴로의 ''상형문자집''을 번역한 데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설계 프로그램과 설명은 요하네스 스타비우스가 고안했고, 건축 설계는 석공이자 궁정 화가인 요르크 쾰데러가, 목판 자체는 히에로니무스 안드레아가 맡았으며, 뒤러는 수석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개선문''에 이어 1512년경 완성된 ''개선 행렬''이 제작되었다.
뒤러는 황제의 인쇄된 기도서의 여백 이미지를 펜으로 작업했다. 이 작품들은 1808년에 석판화로 출판된 첫 번째 책의 일부로 복제본이 출판될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뒤러의 책 작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었고, 장식은 루카스 크라나흐와 한스 발둥을 포함한 예술가들이 이어갔다. 뒤러는 또한 1519년 막시밀리안의 죽음 직전에 그린 초상화를 포함하여 황제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막시밀리안은 때때로 지불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뒤러에게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된, 매우 궁핍한 군주였다.[29][30][31] 그는 당시에 흔치 않게 궁정에서 예술가와 학자들을 존경했다.[32][33] 1495년에 만나 막시밀리안의 심복이 된 피르크하이머는 고전 지식과 인문주의적 비판적 방법론에 대한 그의 스승이자 협력자로서 뒤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궁정의 중요한 인물이자 위대한 문화 후원자였다.[34][35] 막시밀리안의 궁정에서 뒤러는 요하네스 스타비우스, 콘라트 포이팅거, 콘라트 켈테스, 한스 체르테(황실 건축가)와 같은 당대의 다른 많은 훌륭한 예술가 및 학자들과 협력하여 친구가 되었다.[36][37][38][39]
2. 5. 네덜란드 여행과 말년 (1520-1528)
1520년 7월,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가 제공했던 황실 연금을 갱신하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을 확보하기 위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주요 여정을 떠났다.[56] 뒤러는 아내와 하녀와 함께 라인강을 거쳐 쾰른으로 간 뒤, 안트베르펜으로 갔다. 그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고, 은점, 분필, 목탄으로 많은 드로잉을 제작했다.[56] 대관식 참석 외에도 쾰른(슈테판 로흐너의 그림에 감탄), 네이메헌, 헤르토겐보스, 브뤼헤(미켈란젤로의 ''브뤼헤의 성모''를 보았다), 헨트(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에 감탄),[57] 젤란트주를 방문했다.[56]뒤러는 많은 양의 판화를 가지고 갔고, 일기에 누구에게 그것들을 주고, 교환하거나 판매했는지, 그리고 얼마에 팔았는지 기록했다. 이는 판화에 매겨진 금전적 가치에 대한 드문 정보를 제공한다.[58] 뒤러의 네덜란드 일기는 그 여행이 수익성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뒤러는 막시밀리안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에게 제공했지만, 마르가레테가 초상화를 싫어하고 받기를 거부한 후 결국 그림을 흰 천으로 교환했다.[59] 이 여행 동안 그는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얀 프로보스트, 헤라르트 호렌보트, 장 모네, 요아킴 파티니르, 토마소 빈치도르를 만났지만, 퀜틴 마시스는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59]
연금을 확보한 뒤러는 1521년 7월에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지만, 불특정 질병에 걸려 평생 동안 고통받았고, 작업 속도를 크게 줄였다.[12]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러는 종교적 주제를 담은 많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여기에는 십자가 책형 장면과 성스러운 대화(이탈리아어: Sacra conversazioneit)가 포함되었지만, 둘 다 완성되지 못했다.[60] 이것은 부분적으로 건강이 악화된 탓일 수도 있지만, 기하학과 원근법, 사람과 말의 비율, 그리고 요새에 관한 이론적 저술 준비에 시간을 쏟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초점의 변화로 인해 뒤러는 말년에는 예술가로서 비교적 적은 작품을 제작했다. 회화 분야에서는 --, --, --, 그리고 --와 그 옆에 있는 --를 묘사한 두 패널이 전부였다. 이 마지막 위대한 작품인 《네 명의 사도》는 뒤러가 뉘른베르크시에 기증했는데, 그는 그 대가로 100길더를 받았다.[68]
판화의 경우, 뒤러의 작업은 초상화와 그의 논문을 위한 삽화로 제한되었다. 초상화에는 어린 시절 친구인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 마인츠 추기경 선제후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필리프 멜란히톤,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포함된다. 추기경, 멜란히톤, 그리고 뒤러의 마지막 주요 작품인 뉘른베르크 귀족 울리히 슈타르크의 드로잉 초상화에서 뒤러는 모델들을 옆모습으로 묘사했다.
뒤러는 생전에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측량에 관한 네 권의 책》은 1525년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되었으며, 독일어로 된 성인을 위한 최초의 수학 서적이었고,[12]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서도 인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1527년에 출판된 도시 요새에 관한 작품이었다. 《인체 비례에 관한 네 권의 책》은 1528년 사망 직후 사후 출판되었다.[4]
뒤러는 56세의 나이로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했으며, 6874플로린 상당의 재산을 남겼다. 그는 요한니슈프리드호프 묘지에 묻혔다. 그의 대저택(1509년 천문학자 베른하르트 발터의 상속인으로부터 구입)은 그의 작업장이 있었고, 미망인이 1539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뉘른베르크의 주요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12]
3. 작품 세계
알브레히트 뒤러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여 북유럽과 독일 미술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를 남겼고, 이상미(理想美)에 대해서도 논했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등을 주로 그렸으며, 동판과 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89]
1512년부터 막시밀리안 1세는 뒤러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92개의 개별 블록으로 인쇄된 방대한 작품인 ''개선문''을 의뢰했다. 요하네스 스타비우스가 설계 프로그램과 설명을 고안했고, 석공이자 궁정 화가인 요르크 쾰데러가 건축 설계를, 히에로니무스 안드레아가 목판 제작을 맡았으며, 뒤러는 수석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개선문''에 이어 1512년경에는 ''개선 행렬''이 제작되었다.
뒤러는 황제의 인쇄된 기도서 여백에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작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었고, 루카스 크라나흐와 한스 발둥 등이 장식을 이어갔다. 뒤러는 1519년 막시밀리안 1세 사망 직전에 그린 초상화를 포함하여 황제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막시밀리안 1세는 가끔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지만, 뒤러에게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다.[29][30][31] 그는 당시에 드물게 궁정에서 예술가와 학자들을 존경했다.[32][33] 1495년에 막시밀리안 1세를 만나 그의 심복이 된 피르크하이머는 뒤러에게 고전 지식과 인문주의적 비판 방법론을 가르친 스승이자 협력자였으며, 궁정의 중요한 인물이자 위대한 문화 후원자였다.[34][35]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요하네스 스타비우스, 콘라트 포이팅거, 콘라트 켈테스, 한스 체르테(황실 건축가) 등 당대의 훌륭한 예술가 및 학자들과 협력하며 친구가 되었다.[36][37][38][39]
뒤러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졌다.[40] 황제가 숯으로 뒤러에게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려고 하자 뒤러는 막시밀리안의 손에서 재료를 가져와 그림을 완성했다. 한번은 막시밀리안이 뒤러가 사용하던 사다리가 너무 짧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귀족에게 사다리를 잡아주라고 말했지만, 귀족은 비천한 농부를 섬기는 것은 자신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이 직접 사다리를 잡고 귀족에게 자신은 농부를 언제든지 귀족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귀족에게서 뒤러와 같은 예술가를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44][45][46]
뒤러는 궁정 천문학자 요하네스 슈타비우스와의 관계 및 협력을 통해 공간 탐구를 했다.[50] 1515년, 뒤러와 슈타비우스는 고체 기하학적 구체에 투영된 최초의 세계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1515년에 슈타비우스, 뒤러, 콘라트 하인포겔은 남반구와 북반구의 최초의 평면 천구도와 최초의 인쇄된 천체 지도를 제작했으며, 이는 유럽 전역에서 우라노메트리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52][53][54][55]
1507년 중반까지 뒤러는 베네치아인들의 존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1520년까지 독일에 거주했다.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으며, 라파엘로, 조반니 벨리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유명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거나 연락을 주고받았다. 1507년부터 1511년까지 뒤러는 가장 잘 알려진 회화 작품들을 남겼다.
3. 1. 판화
뒤러는 판화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목판화와 동판화 모두에서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의회의 임명 미술가가 되었고, 이 시기에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이 있다:
제목 | 제작 연도 | 기법 |
---|---|---|
작은 크기의 수난 연작 | 1509/1510년 | 목판화 |
커다란 크기의 수난 연작 | 1510년 | 목판화 |
마리아의 생애 | 1510/1511년 | 목판화 |
성 삼위일체 | 1511년 | 목판화 |
그 외에도 〈성 그레고르의 미사〉, 〈성 그리스토프〉,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 〈묵주를 들고 있는 요아힘〉 등이 있다.
목판화에서는 《묵시록》 연작[19], 《대수난》, 《마리아의 생애》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498년에 제작된 《묵시록》 16개의 디자인 시리즈 중 하나인 《미카엘이 용과 싸우는 모습》 판화도 유명하다. 같은 해에 《대수난》의 첫 일곱 장면을 만들었고, 이후 성 가족과 성인들에 관한 11개의 연작을 만들었다. 1503-1505년경 뒤러는 《성모의 생애》를 묘사한 세트 중 처음 17개를 제작했다. 이것들과 《대수난》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세트로 출판되었지만, 판화는 상당한 수로 개별적으로 판매되었다.[12]
동판화에서는 《기사, 죽음, 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멜랑콜리아 I》 등이 유명하다. 뒤러는 부린을 사용하여 판화를 만드는 어려운 기술을 연마했다. 1496년에 그는 《탕아》를 제작했는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는 수십 년 후에 이 작품을 칭찬하며 독일적인 특징을 언급했다. 그는 곧 '네메시스'(1502), '바다 괴물'(1498), '성 에우스타키우스' 등 화려하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제작했다.[12]
뒤러의 판화는 정교한 세부 묘사와 명암 표현, 깊이 있는 주제 의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89]
3. 2. 회화
뒤러는 템페라 기법을 사용하여 린넨에 초상화와 제단화를 포함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파움가르트너 제단화와 《동방 박사의 경배》가 이 시기 작품이다.[4] 1506년 초, 그는 베네치아로 돌아가 1507년 봄까지 머물렀다.[4] 그는 베네치아에서 청색 종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1505년부터 1507년까지 그곳에서 완성한 그림을 위한 준비 그림을 그렸다.[20] 베네치아에서 그는 산 바르톨로메오 교회를 위해 이주한 독일인 공동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장미 화환의 축제''라는 제단화를 제작했다. 이 그림은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성모 마리아의 왕좌 앞에서 평화롭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두 사람 모두 왕관을 벗고 있다. 또한 베네치아의 독일인 공동체 구성원들과 뒤러 자신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다. 플랑드르 회화의 사실주의가 초록색 식물과 의복 묘사에 사용되었고, 뒤러 자신의 색조를 사용한 것 외에도, 이 제단화는 강한 이탈리아적 영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에 의해 획득되어 프라하로 옮겨졌다.[21]1507년부터 1511년까지 뒤러는 "아담과 이브"(1507), 프리드리히 3세를 위해 그려진 "만 명의 기독교 순교"(1508), "붓꽃을 든 성모"(1508),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야콥 헬러를 위해 그려진 "성모 승천"(1509), 마테우스 란다우어를 위해 그려진 "삼위일체 숭배 (란다우어 제단)"(1511) 등 유명한 회화 작품들을 제작했다.
1526년에는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소장되어 있는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가 제작되었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 〈히에로니무스 홀츠슈허〉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요한 클레베르거〉의 그림이 제작되었는데, 이 그림이 뒤러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3. 이론 연구
뒤러는 예술 이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저술을 남겼다. 1525년에 출판된 《측량 교습》(Underweysung der messung mit dem zirckel und richtscheyt|측량 교습de)은 독일어로 쓰인 최초의 수학 서적 중 하나로,[12] 기하학적 작도법과 원근법을 다루었다. 이 책에서 뒤러는 나선, 콩코이드, 사이클로이드 등 다양한 기하학적 도형을 소개했다.[69] 또한 정다각형 작도에 있어서는 유클리드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방법을 선호했다.[70]1527년에는 《요새 축조법》(Etliche Underricht zu Befestigung der Stett, Schloss und Flecken|요새 축조법de)을 출판하여 도시 방어를 위한 요새 설계 방법을 제시했다.[74]
1528년 뒤러가 사망한 직후 출판된 《인체 비례론》(Vier Bücher von menschlicher Proportion|인체 비례론de)은 르네상스 미술 이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저서이다.[4] 뒤러는 비트루비우스와 "2~3백 명의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68]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탐구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 비율을 다양한 유형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볼록 거울과 오목 거울을 이용한 수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체 비율을 수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72] 또한 인간의 골상학도 다루었다.[72]

뒤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도 제시했는데,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주장한 알베르티와 달리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상대주의적인 아름다움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진실이 자연 속에 숨겨져 있으며, 아름다움을 정돈하는 규칙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 규범을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뒤러는 예술가의 '선택적 내적 종합', 즉 풍부한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강조했다.[68]
뒤러의 모든 이론 저작은 독일어로 작성되었으며, 장인의 언어에 기반한 그래픽 표현을 사용했다.[68] 예를 들어, Schneckenlinie|슈네켄리니de("달팽이 선")는 나선형 형태를 가리키는 뒤러의 용어였다. 이는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독일어 산문 확장에 기여했다.[68]
4. 영향과 유산
뒤러는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특히 판화 분야에서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판화는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주요 매체였으며, 그의 회화 작품들은 주로 소수의 도시에 위치한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되었다.[12] 판화를 통해 유럽 전역에 그의 명성을 떨친 성공은 라파엘로, 티치아노, 파르미지아니노와 같은 주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들은 모두 판화가들과 협력하여 자신들의 작품을 홍보하고 배포했다.
그의 판화는 독일의 후계자들에게 위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작은 거장들은 대형 판화는 거의 시도하지 않고 뒤러의 주제를 작고 다소 좁은 구도로 이어갔다. 루카스 판 레이덴은 16세기 초, 대형 판화를 성공적으로 계속 제작한 유일한 북유럽 판화가였다. 뒤러의 영향 아래에서 훈련받은 이탈리아 판화가 세대는 그의 풍경 배경의 일부를 직접 모사하거나(줄리오 캄파놀라, 조반니 바티스타 팔룸바, 베네데토 몬타냐, 크리스토파노 로베타), 혹은 작품 전체를 베꼈다.(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아고스티노 베네치아노) 그러나 1515년경 마르칸토니오가 새로운 판화 스타일을 완성하면서 뒤러의 영향력은 약해졌고, 이 스타일은 알프스를 넘어 북부 유럽의 판화에도 영향을 미쳤다.[12]
뒤러는 이탈리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었는데, 아마도 그의 제단화가 베네치아에서 유일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그의 독일 후계자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스타일을 융합하는 데 덜 효과적이었다. 그의 강렬하고 자기 연출적인 자화상은 오늘날까지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더 극적인 초상화 스타일을 추구했던 19세기와 20세기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뒤러는 비평가들의 호감을 잃은 적이 없으며, 1570년부터 1630년경의 "뒤러 르네상스", 19세기 초, 그리고 1870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 민족주의 시대에 그의 작품에 대한 상당한 관심이 부활했다.[12]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89]
루터교회는 미켈란젤로,[77] 루카스 크라나흐(아버지) 그리고 한스 부르크마이어와 함께 매년 4월 6일에 뒤러를 기념한다.[76]
5. 평가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여 북유럽과 독일 미술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Lehrbuch der Malerei|인체 비례론de 및 Underweysung der Messung|원근법에 관한 고찰de 등의 저서를 남겼고, 이상미(理想美)에 대해서도 논했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를 그렸으며, 동판, 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Adam und Eva|아담과 이브de, Anbetung der Könige|동방 세 박사의 예배de, Selbstbildnis im Pelzrock|자화상de, Die heimlich offenbarung iohannis|요한 묵시록de 등이 있다.[89]
만년의 뒤러는 고향 뉘른베르크 시에 대표작 Die vier Apostel|네 명의 사도de를 기증했다. 당시 독일은 마르틴 루터 등에 의한 종교 개혁 시기였고, 루터에게 공감했던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가 신교 측에 서는 것을 알고 이 그림을 기증했다. 그림 하단에는 루터 번역 성서의 인용과 함께 "세상의 지배자들이여,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훈계가 적혀 있다.
1516년에 대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수련 시대에 신세를 진 은사 미하엘 볼게무트의 초상을 그렸다.[80] 늙은 스승을 미화하지 않고 그린 초상화에는 "1516년, 스승 볼게무트를 앞에 두고 이를 그렸다. 볼게무트는 당시 82세였으며, 1519년까지 살았다"라는 명문이 있다. 그림 완성 3년 후인 1519년, 은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말을 그림 속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뒤러의 목판화 코뿔소는 리스본에 있던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려졌으며, 뒤러는 코뿔소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래서 등에 원래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 뿔'이 있는 등 실제 코뿔소와는 다르다. 이 코뿔소는 리스본에서 교황청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바다의 물거품이 되었지만, 뒤러의 상상으로 그려진 '코뿔소'는 네덜란드의 동물학자 욘스톤의 '동물도감'(1660년)에 등장했고, 당시 에도 시대의 일본에도 전해졌다. 뒤러의 '코뿔소 그림'은 매우 유명해져서, 1741년에 네덜란드인 반 데르 메르가 인도 코뿔소 Clara (Nashorn)|클라라de를 유럽에 데려와 20년 가까이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실제 코뿔소의 모습'이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다양한 매체에 반복적으로 그려졌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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