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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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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얄타 회담은 1945년 2월 소련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모여 개최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문제 논의를 위한 회담이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이 참석하여 독일 분할 점령, 폴란드 문제, 국제 연합 창설, 소련의 대일 참전 등을 논의했다. 이 회담은 얄타 밀약설과 한반도 분단에 영향을 미쳤으며, 얄타 체제와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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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회의 명칭얄타 회담
다른 명칭크림 회담
로마자 표기Yalta Conference
러시아어 표기Ялти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독일어 표기Konferenz von Jalta
회의 정보
장소리바디아궁
도시얄타,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날짜1945년 2월 4일 ~ 2월 11일
참가국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 윈스턴 처칠
미국: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전 회의테헤란 회담
다음 회의포츠담 회담
관련 정보
주요 논의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재편 논의
관련 문서아르고노트 작전
이미지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오시프 스탈린이 얄타 회담에 참석한 모습
얄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뒤에는 왼쪽부터 앨런 브룩, 어니스트 킹, 윌리엄 D. 리히, 조지 마셜, 로렌스 S. 커터, 알렉세이 안토노프, 스테판 쿠체로프,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이 서 있다.

2. 회담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주요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은 이미 항복했으며, 나치 독일의 패배도 임박한 상황이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폴란드를 지나 독일 국경까지 진격했고, 서부 전선에서는 미국영국의 연합군이 라인강 유역에서 독일군을 압박하고 있었다.[3][4][5]

이러한 군사적 상황 속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의 항복 이후 처리 문제와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회담 개최는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안했으며, 여러 장소가 검토되었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의 주장으로 소련 영토였던 크림 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리게 되었다.[8][9][10]

얄타 회담에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참석했다. 이들 '빅 3'는 각자 자국의 이익과 구상을 가지고 회담에 임했으며,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미국 (루스벨트):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미군의 희생을 줄이는 것, 그리고 계획 중이던 국제 연합(UN)에 소련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13]
  • 영국 (처칠): 폴란드를 비롯한 해방된 유럽 국가들에서 자유 선거를 통한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기를 원했다.
  • 소련 (스탈린): 동유럽과 중부유럽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 확보를 최우선 안보 과제로 여겼다. 특히 폴란드 문제를 '명예와 안보'가 걸린 사안으로 간주하며,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과 국경 조정을 강하게 주장했다.[12] 당시 소련군은 동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회담에서 매우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자신의 요구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1]

2. 1. 회담 장소 및 참석자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의 얄타에 모였다. 회담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과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별궁이었다. 얄타는 흑해 연안에 위치한 소련의 대표적인 휴양지였다.

회담 장소 선정 과정에서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중해의 중립적인 장소를 선호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건강 문제와 비행 공포증을 이유로 얄타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8][9][10]

회담의 주요 참석자는 '빅 3'로 불리는 연합국 지도자들이었다.

리바디아 궁전에서 얄타 회담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 (좌측부터):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L. S. 쿠터 소장, E. J. 킹 제독, 조지 C. 마셜 장군, 아베렐 해리먼 대사, 윌리엄 리히 제독,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리바디아 궁전, 크림 반도, RSFSR


미국 대표단에는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L. S. 쿠터 소장, E. J. 킹 제독, 조지 C. 마셜 장군, 아베렐 해리먼 대사, 윌리엄 리히 제독 등 주요 인사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보좌했다.

얄타 회담 당시 소련, 미국, 영국 외교관들


빅 3 회의실


한편,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과 중화민국장제스 총통은 이 중요한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드골은 루스벨트와의 개인적인 관계 및 소련의 반대로 인해 배제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이후 프랑스와 다른 연합국 간의 관계에 지속적인 불만을 남겼다. 드골의 불참은 그가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는 데에도 장애물로 작용했다.[6][7]

얄타 회담 직전인 1945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루스벨트와 처칠은 몰타에서 만나 사전 조율을 위한 몰타 회담을 가졌다.

3. 주요 의제 및 합의 내용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인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 영국윈스턴 처칠 총리는 크림반도얄타에 모여 나치 독일 패망 이후의 세계 질서 재편을 논의했다. 프랑스샤를 드골은 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6]

얄타 회담 협상 테이블에 앉은 빅3 지도자들


회담의 주요 의제 및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 처리: 패전한 독일을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이 분할 점령하는 원칙에 합의했다. 또한 독일인에 대한 연합국의 의무는 최저 생계 보장에 한정하며, 군수 산업 폐쇄 및 몰수, 주요 전범에 대한 국제 재판 회부, 배상금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 구성 등에 합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 분할 점령 참조)
  • 폴란드 문제: 폴란드 임시정부 구성 방식과 자유 선거 실시에 합의하고,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커즌선으로 확정하며 대신 독일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할양하는 방식으로 국경선을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동의했다.[68]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 문제 참조)
  • 국제 연합(UN) 창설: 전후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연합 창설의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특히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에게 거부권을 부여하는 데 동의했다.[17] (자세한 내용은 #국제연합 창설 참조)
  • 소련의 대일 참전: 독일 항복 후 2~3개월 내에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외몽골(몽골 인민 공화국) 현상 유지, 사할린 남부 및 쿠릴 열도의 소련 귀속, 만주에서의 소련 이권 보장 등을 약속하는 비밀 협정(극동 밀약)을 체결했다.[13][14] (자세한 내용은 #소련의 대일 참전 (극동 밀약) 참조)
  • 유럽 해방 선언: 해방된 유럽 국가들과 이전 추축국 위성국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민주적 제도"를 수립할 권리를 가지며, 이를 위해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정부를 자유 선거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수립할 것"을 약속했다.[20][27] 이는 대서양 헌장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점령된 국가들의 정부 복원 및 민간인 송환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모든 합의 사항이 이후 완전히 이행되지는 않았다. 특히 폴란드 문제와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 체제 수립 과정에서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심화되며 냉전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3. 1. 독일 분할 점령

얄타 회담에서는 패전한 나치 독일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수도 베를린 역시 4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독일은 현재의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영토인 실레시아,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지역들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과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다[68] (동프로이센 북부는 소련 영토가 됨). 이는 당시 독일 국토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으로, 특히 프로이센의 발상지였던 동프로이센을 포함하고 있어 독일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무를 지지 않기로 합의했다. 나치 독일의 군수 산업은 폐쇄하거나 몰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주요 전범들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전후 배상금 문제는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하기로 했다.

3. 2. 폴란드 문제

얄타 회담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폴란드 문제였으며, 회담 일정의 절반 이상이 이 문제에 할애되었다.[11] 스탈린은 "소련 정부에게 폴란드 문제는 명예의 문제"이며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공하려는 세력을 위한 역사적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안보 문제라고 주장했다.[12] 그는 또한 "러시아인들이 폴란드에 대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그 죄를 속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며,[12] "폴란드는 강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소련은 강력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폴란드의 건설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당시 폴란드에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했다. 하나는 런던에 기반을 둔 폴란드 망명 정부였고, 다른 하나는 1944년 소련이 루블린에 세운 폴란드 국민해방위원회(루블린 공산당 정권)였다. 영국은 망명 정부를 지지했지만, 소련은 1943년 카틴 숲 학살 사건이 드러난 이후 망명 정부와 관계를 끊고 루블린 정권을 폴란드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내세웠다. 특히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소련군은 바르샤바 근처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봉기를 지원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폴란드 지하국군이 독일군에게 진압되도록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소련이 루블린 정권의 국내 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지하국군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얄타 회담에서 처칠은 망명 정부를, 스탈린은 루블린 정권을 지지하며 대립했다. 결국 미국루스벨트의 중재로, "현재 폴란드에서 기능하고 있는 임시 정부(루블린 정부)는 폴란드 내외의 민주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더 광범위한 민주적 기반으로 재편성"하고,[27] 이후 "보편적 선거와 비밀 투표를 기반으로 가능한 한 빨리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선거"를 실시하여 폴란드 국민 스스로 정부를 선택하도록 합의했다.[27] 이 합의는 표면적으로는 통합 정부 구성과 자유 선거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친소련 루블린 정부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28]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정해진 선을 따라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고, 그 대가로 폴란드에게 독일 동부 영토 일부를 할양하기로 합의했다.[68]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69][70]

1945년 폴란드의 구 국경과 신 국경 – 크레시(Kresy)는 연한 빨강색으로 표시


그러나 스탈린은 얄타 회담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귀국한 런던 망명 정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34][35] 자유 선거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처칠은 처음에는 스탈린을 믿었으나[30] 곧 소련의 의도를 파악하고 루스벨트에게 우려를 표명했다.[32] 루스벨트 역시 점차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야심을 깨닫게 되었다.[34] 1945년 3월 27일, 소련 NKVD는 정부 구성을 위해 초청했던 폴란드 반대파 지도자 16명을 체포하여 모스크바로 끌고 가 정치 쇼 재판에 회부했다.[34][35]

결국 폴란드에서는 1947년 선거를 통해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고, 1949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서방 동맹국들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으며, 특히 소련의 탄압과 처형을 피해 많은 군인들이 귀국을 거부했다. 이는 1947년 폴란드 이주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얄타 회담 이후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얄타 협정의 문구가 스탈린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자, 스탈린은 "괜찮아. 나중에 우리 방식대로 할 거야."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30] 결과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얄타 선언의 정신을 희생하면서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사실상 용인하게 되었다.[48]

3. 3. 국제연합 창설

얄타 회담에서는 국제 연합(UN) 창설에 대한 기초적인 논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11]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태평양 전쟁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과 더불어 소련이 국제 연합에 참여하기를 원했다.[11]

소련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에게 거부권을 부여하는 투표 방식에 대한 비밀 합의를 조건으로 국제 연합 가입에 동의했다. 이는 각 상임 이사국이 원치 않는 결정을 막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장치였다.[17] 이 회담을 통해 영국, 프랑스, 미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 5개국이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갖는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국제 연합 내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가입을 요구했다. 이 두 공화국은 당시 엄밀한 의미의 주권 국가는 아니었지만, 이들의 가입이 승인되면서 소련은 사실상 국제 연합 내에서 3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윈스턴 처칠이 영국령 인도를 가입시켜 균형을 맞추려 했고, 결국 루스벨트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거부권 문제에서 소련의 협조를 얻기 위해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했다.

3. 4. 소련의 대일 참전 (극동 밀약)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대일본 참전을 강력히 원했다.[13] 이에 따라 얄타 회담 중인 1945년 2월 8일, 루스벨트와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비밀 회담을 가졌고, 이후 영국윈스턴 처칠 수상과 함께 극동 문제에 관한 비밀 협정(얄타 협정 또는 극동 밀약)을 체결했다.

이 비밀 협정은 소련의 대일 참전 조건과 그 대가를 명시했다. 스탈린은 이미 1944년 12월 미국의 W. 애버렐 해리먼 주소련 대사에게 만주국의 권익(남만주 철도와 항만), 사할린 남부 및 쿠릴 열도의 영유를 요구한 바 있었다.[53] 루스벨트는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소련의 참전을 촉구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56]

조건내용
외몽골 (몽골 인민 공화국)현상 유지 인정
러일 전쟁(1904년) 이전 러시아 권리 회복
쿠릴 열도소련에 인도
참전 시기독일 항복 및 유럽 전쟁 종결 후 2~3개월 내



이 협정 내용 중 외몽골 및 항만, 철도에 관한 사항은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미국 대통령은 스탈린의 요청 시 동의를 얻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세 정상은 일본 패망 후 소련의 요구가 확실히 충족될 것임을 합의했다. 또한 소련은 중국을 일본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중소 동맹 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명했다.

미국의 소련에 대한 대일 참전 요청은 진주만 공격 직후인 1941년 12월 8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과 일소 중립 조약을 이유로 거절했다.[57] 그러나 스탈린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서 독일 패망 후 대일전에 참전할 의사를 처음으로 명확히 밝혔다.[58][59] 얄타 협정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60]

한편, 한국의 운명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회담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15][16]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2월 8일 처칠이 없는 자리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비밀 논의가 있었다. 루스벨트는 한국을 미국, 소련, 중국 3개국이 20~30년간 신탁통치할 것을 제안했고, 영국 참여에는 소극적이었다. 스탈린은 영국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신탁통치 기간 단축을 제안했으며, 양국 군대를 한반도에 주둔시키지 않기로 합의했다.[13][16]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1945년 5월 8일로부터 약 3개월 후인 8월 9일, 스탈린은 얄타 협정에 따라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소련군은 즉시 만주 소련 침공을 개시하고 쿠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소련 참전 바로 다음 날인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하면서, 소련의 실제 참전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얄타 협정에 근거하여 점령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북방 영토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극동 밀약의 내용은 1946년 2월 11일에 공식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를 통해 일본군 측에 내용 일부가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후 1956년 미국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얄타 협정이 루스벨트 개인의 약속일 뿐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아니므로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미국 상원 역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비준 시 얄타 협정의 소련 관련 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채택했다.[61]

일본 내부에서는 1945년 초부터 쇼와 천황의 지시에 따라 종전 방안 모색이 있었고,[62][63] 7월에는 고노에 후미마로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여 소련의 평화 중재를 요청하려 했으나, 이미 얄타 협정을 맺은 소련은 이를 거절했다.[64][65]

4. 얄타 회담과 한국

얄타 회담의 공식 합의 기록에는 한반도의 운명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었다.[15][16] 그러나 회담 중인 1945년 2월 8일, 처칠이 부재한 가운데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비밀 논의가 있었음이 이후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13][16] 이 논의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을 소련, 미국, 중국 3개국에 의한 20~30년간의 신탁통치하에 둘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을 가능한 한 짧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두 정상은 한국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기로 합의했다.[13][16] 이러한 논의는 당사자인 한국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승만 등은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된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UN 창립 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려던 시도마저 분열된 한인 사회의 대표성 문제 등으로 인해 무산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미·영·소 3국이 한반도를 전후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하는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며 국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했다.[72] 그는 이 주장을 통해 강대국들이 한국의 운명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의 얄타 밀약설 주장 참조)

얄타 회담에서의 이러한 논의와 결정들은 이후 냉전 체제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현실화되었다. 전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게 되었고, 신탁통치안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구체화되어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얄타 회담을 전후한 강대국들의 결정은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한국 전쟁 발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얄타 회담의 한반도 분단에 대한 영향 참조)

4. 1. 이승만의 얄타 밀약설 주장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UN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보장을 받으려 했으나, 중국은 물론 미국조차 극심하게 분열된 한인들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이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이승만은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영어) [71]라는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소련인 내부자가 제공한 정보에 기반하여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당시 국제 여론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72]

에밀 구베로가 제공했다는 정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을 태평양전쟁 후까지 소련의 세력하에 두되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해 아무 공약도 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면 한국의 운명은 명백히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스태디니어스 미 국무장관은 오히려 연립정부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한 한국 대표들의 배후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분망하고 있다.[72]


이 폭로 이후 세계 언론과 미영 정계에서는 이 문제가 새로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언론들이 이 사실을 반복하여 보도하자 결국 영국 하원이 이 문제를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밀약의 사실 여부를 묻는 한 의원의 질문에 대해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 협정은 없었고 많은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모두 일반적인 것뿐이었다고 모호하게 답변하였다.[72] 이승만은 한국이 과거 가쓰라-태프트 밀약처럼 또다시 강대국 간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45년 5월 14일, 이승만은 미 상원의원 오웬 브루스터(Owen Brewster영어), 월터 F. 조지(Walter F. George영어)와 미 하원의원 클레어 E. 호프만(Clare E. Hoffman영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나는 귀하가 친우가 한 조언에 의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정보를 보내니 용기있는 정치가가 이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폭로할 것을 호소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맡긴다는 비밀 협정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얄타 협정에 관한 정보의 근거로 보아 확실합니다. 이 비밀 협정은 미·영·소에 의하여 서명되고 대일 전쟁이 종결할 때까지 한국을 소련에게 맡기고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한 공약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자유를 약속한 카이로 선언과 대조될 수 있는 이 협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귀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바입니다. 이 비밀 협정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연합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위에 폭로한 사실은 소련이 극동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 한, 소련의 정책은 한국의 운명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스터티니어스 국무장관은 이와같이 버림받은 한국 문제의 토의를 거부하고 배후 조사를 위한 시간만을 요구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초 이 협정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대통령은 백악관을 통하여 겨우 사실을 알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민은 한국이 국제연합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정하여야 한다고 권고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일순, 일각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이와같은 과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을 미국민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바입니다.[73]


또한 이승만은 신문 기자들을 모아 이 '밀약'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73] 당시 유엔 관련 뉴스가 적었던 상황에서 기자들은 이승만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에 미국 국무성은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비난이 계속되자 백악관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73]

이승만의 폭로가 설령 근거가 부족했을지라도, 그는 이를 통해 강대국들이 한국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시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과의 뒷거래를 통해 한국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되는 상황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4. 2. 얄타 회담의 한반도 분단에 대한 영향

얄타 회담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도 논의되었다. 연합국 주요 정상들은 논의를 통해 한반도에 대해 일정 기간 동안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전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이 잠정적으로 분할 점령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소련의 대일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얄타 비밀 협정의 맥락 속에서 결정된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한국인의 의사는 배제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승만 등은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된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당시 분열된 한인 사회의 대표성 문제 등으로 인해 유엔 창립총회 참석이 무산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1945년 초, 소련 내부자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로부터 입수했다는 정보를 근거로[71], 얄타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이 한반도를 전후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하는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며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72]

이승만이 폭로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을 태평양전쟁 후까지 소련의 세력하에 두되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해 아무 공약도 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면 한국의 운명은 명백히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스태디니어스 미 국무장관은 오히려 연립정부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한 한국 대표들의 배후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분망하고 있다.[72]


이 주장은 당시 국제 언론과 미·영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영국 하원에서는 진위 여부에 대한 질의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 협정은 없었다고 모호하게 답변하였다.[72]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예를 들며 한국이 또다시 강대국 간 비밀 협약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는 1945년 5월 14일, 미 상하원 의원들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맡긴다는 비밀 협정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 밀약이 카이로 선언의 정신에 위배되고 한국의 국제연합 가입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73] 또한 기자회견을 통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했으며, 이에 미 국무성과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73]

이승만의 '얄타 밀약설' 제기는 정보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강대국들의 결정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강대국 간의 밀실 협상 가능성에 제동을 걸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38도선 분할 점령은 이후 냉전 체제가 심화되면서 미·소 간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졌으며,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얄타 체제와 냉전

1945년 2월 15일, 얄타 회담 종료 4일 후 연합군 점령 지역(빨강)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 질서, 즉 '''얄타 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미국, 영국, 소련과 같은 승전국들이 전후 세계의 틀을 짜는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자리였다. 특히, 독일 분할 통치, 폴란드의 국경 설정, 동유럽 여러 국가들의 처리 문제 등 영토와 정치 체제에 관한 주요 합의들이 당사국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18]

회담에서 스탈린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의 자유 선거 실시를 약속했지만, 처칠과 같은 일부 서방 지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30][3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은 점령한 동유럽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서방 동맹국들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으며, 소련의 탄압을 피해 귀국을 거부하기도 했다. 1947년 폴란드 총선거는 사실상 공산당의 지배를 확정지었고, 폴란드는 1949년 공식적으로 인민 공화국이 되었다.

스탈린은 얄타 협정의 문구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몰로토프 외무장관의 우려에 "괜찮아. 나중에 우리 방식대로 할 거야."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30] 실제로 소련은 발트 3국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합병하고,[36][37][38] 헝가리,[39] 체코슬로바키아,[40]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41] 그리고 동독[42] 등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결국 미국과 영국은 얄타 선언의 정신을 희생하면서 공산권의 확대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다.[48]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된 얄타 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를 고착화시켰고, 이는 곧 본격적인 동서 냉전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5. 1. 비판적 시각

프랑스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은 얄타 회담이나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는데, 이는 심오하고 오래 지속되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6] 드골은 루스벨트의 오랜 개인적 적대감 때문에 자신이 얄타 회담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소련 역시 그의 정식 참여를 반대했다.[7]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제시한 관대한 조건들은 그의 후임자인 트루먼 행정부 하에서 냉전의 시작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때문에 얄타 회담은 미국 여론, 특히 공화당원들과 보수적인 민주당원들, 그리고 동유럽 출신 이민자 사회에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여졌다.[50]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새로운 행정부와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얄타 회담 합의를 파기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으나, 스탈린 사후 이는 무산되었다.[50]

얄타 회담 이후 형성된 전후 국제 질서를 종종 '''얄타 체제'''라고 부르며, 이 회담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 간의 본격적인 동서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얄타에서의 서약이 1947년 트루먼 선언으로 붕괴되었고, 이것이 이데올로기 전쟁으로서 냉전의 시작이었다고 지적했다.[66]

2005년 5월 7일,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라트비아 리가에서 연설하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맺은 얄타 협정이 역사상 큰 실수 중 하나이며, 안정을 명분으로 소국의 자유를 희생시킨 결정이 유럽 대륙을 분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67]

6. 같이 보기


  • 『전후의 탄생 테헤란·얄타·포츠담 회의 전의사록』(戦後の誕生 テヘラン・ヤルタ・ポツダム会議全議事録일본어)

: 모타 히로시(茂田宏)·가와바타 이치로(川端一郎)·고니시 마사키·쿠라이 타카시 역, 추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2022년 3월

  • 아르튀르 콩트(Arthur Conte) 『얄타 회담 세계의 분할 전후 체제를 결정한 8일간의 기록』(ヤルタ会談 世界の分割 戦後体制を決めた8日間の記録일본어) 야마구치 토시아키(山口俊章) 역, 니겐샤(二玄社)(신판), 2009년 - 구판은 사이말슈판카이(サイマル出版会)
  • 쿠라타 야스오(倉田保雄) 『얄타 회담 전후 미소 관계의 무대 뒤』(ヤルタ会談 戦後米ソ関係の舞台裏일본어) 치쿠마쇼보(筑摩書房)〈치쿠마 라이브러리(ちくまライブラリー)〉, 1988년
  • 수전 버틀러(Susan Butler) 『루즈벨트와 스탈린 테헤란·얄타 회담과 전후 구상』(ローズヴェルトとスターリン テヘラン・ヤルタ会談と戦後構想일본어) 마쓰모토 코케이 역, 하쿠스이샤(白水社)(상하), 2017년
  • 로버트 셔우드(Robert E. Sherwood) 『루즈벨트와 홉킨스』(ルーズヴェルトとホプキンズ일본어) 무라카미 미츠히코(村上光彦) 역, 미치타니(未知谷)(신판), 2015년
  • 오카베 노부루(岡部伸) 『사라진 얄타 밀약 긴급 전보 정보 사관·오노데라 신의 고독한 싸움』(消えたヤルタ密約緊急電 情報士官・小野寺信の孤独な戦い일본어) 신초샤(新潮社)〈신초센쇼(新潮選書)〉, 2012년 - 제22회 「야마모토 시치헤이상(山本七平賞)」
  • NHK 스페셜 영상 세기 제7집 승자의 세계 분할』(NHKスペシャル 映像の世紀 第7集 勝者の世界分割일본어), NHK 종합, 1995년 10월 방송. 신판 DVD, NHK 엔터프라이즈, 2016년 1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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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서적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新太陽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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