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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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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항섭은 189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 운동 참여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장대학을 졸업하고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재정 지원과 선전 업무를 담당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김구 암살 이후 북한으로 갔으며, 1958년 '엄항섭 사건'으로 체포되어 1962년 사망했다.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1990년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2. 생애

1898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의 동제사 요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항저우의 지장대학을 졸업하고,[1] 중국어, 영어, 불어 등 어학을 공부했다.

1922년 지강대학 졸업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 이동휘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부재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 취직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계를 지원하고, 일본영사관의 정보를 빼내려는 노력을 했다. 김구를 만나 임시정부에 투신, 그의 생활비를 조달하며 신뢰를 얻었다.

2. 1. 생애 초기

1898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엄주완과 김규식의 딸 청풍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엄세영(嚴世永)은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주완(柱完)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이며, 외할아버지 김규식은 규장각 제학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단발령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단발령에 저항하는 성리학자들에게 암살당했다. 형제로는 형 엄승섭(嚴承燮), 동생 엄홍섭(嚴弘燮) 등이 있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보성고등보통학교(보성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예관 신규식을 찾아가 비밀결사인 동제사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 중국 공화(신해)혁명에 참가한 신규식의 공화주의 항일 독립혁명을 지원하는 신아동제사의 본부가 있었던 항주의 지장대학에 입학했다. 중국 망명 당시에는 일명 예빗·엄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일파(一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필명으로 대위(大衛)를 사용한 적도 있다.[1] 1920년 항저우(杭州)에 있는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하였다.[1] 지장대학에서 중국어·영어·불어 등 어학을 공부한 것이 후일 임시정부 활동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후 상해로 돌아왔다. 당시 임시정부는 여러 사정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상해에 부임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각원들도 대부분 사퇴하였고, 젊은 청년들 역시 임시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수립 초기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독립자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으나, 사람이 떠나면서 자금도 함께 줄어들어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임시정부를 유지하던 김구·이동녕 등도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곤궁은 극심했다.

엄항섭은 임시정부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였다. 월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상하이 불조계 프랑스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김구(金九)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투신했다. 이후 김구를 극진히 대우하였고, 김구의 생활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어도 임정을 떠나지 않고 김구를 보좌하면서 김구의 신뢰를 얻었다.

2. 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40년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44년 임시정부 선전부장과 김구 판공비서를 겸임하였다.[1] 김구가 미국 육군 OSS 특무대와 합동 작전으로 조선 진공계획을 추진할 때, 김구미국에 있는 이승만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며 OSS 훈련 유치를 위한 활동과 공작을 전개했다.[1]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외무분과위원장이 되었다.[1]

3. 해방 이후 정치 활동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
앞줄 가운데는 김구, 뒷줄 왼쪽 첫 번째가 엄항섭, 앞줄 왼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오른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광복 후 김구를 따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월 3일 김구의 복귀 명령 교서를 낭독하였다.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엄항섭 역시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3. 1. 귀국과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 1진의 한사람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출발해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하였다.[2] 귀국 후에도 김구를 따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 1945년 12월 24일에는 한국 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되어, '우리 소년군은 오늘과 같이 길러온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방침인데 일반 사회에서도 많은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라는 취임사를 발표하였다.[3]

1946년 1월 1일 미군정청에 소환되어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노선을 바꾸자, 그 역시 이에 동참하여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섬네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 건설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한 단체이다.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1940년 9월 충칭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조소앙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해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에 1947년 3월 건국실천원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하여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6]

강사는 조소앙·조완구·신익희·지청천·나재하·김성주·김경수·최호진·김정실·양주동·민영규·엄상섭·엄항섭·김학규·설의식·김기석·이상조·주석균·홍병선·김하선·김석길·안재홍·정인보·황기성·이인·김활란·김법린·박순천·이은상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엄항섭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양주동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안두희에게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7][8][9]

3. 2. 남북 협상 참여와 김구 암살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노선을 전환하자, 엄항섭 역시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김구이승만과 결별한 후, 엄항섭은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김구를 따라 참가했다. 김구 암살 이후, 엄항섭은 지인들과 거리를 두며 정치적으로 몰락해 갔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갔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북한으로 간 인물들 중 50대 초반으로 비교적 젊고 건강한 편이었기에, 1958년 구 우익 계열의 재북 인사들이 김일성을 지지하며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4]

3. 3. 한국 전쟁과 납북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4]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10]

엄항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인물들 중 50대 초반으로 비교적 나이가 젊고 건강한 편이었기에, 1958년 구 우익 계열의 재북 인사들이 김일성을 지지하며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4]

1958년 9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 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 '엄항섭, 명재세, 노일환' 등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어 연행했다. 이것이 바로 북측이 자행한 '엄항섭(嚴恒燮)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함께 납북됐던 조소앙은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조소앙은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알려졌고 1962년 7월 30일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10]

4. 입북 논란과 사후 평가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다. 이후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도 없었다.[10]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망하였지만,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 정신적 지주로 모시던 김구가 암살되면서 더욱 희망을 잃고 비통해하였다.[10]

민족의 분단은 6.25 전쟁을 불러왔고, 엄항섭은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1958년 9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 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하며 '엄항섭, 명재세, 노일환' 등에게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워 연행했다. 이것이 바로 북측이 자행한 '엄항섭(嚴恒燮) 사건'이다. 엄항섭 등이 체포되자 함께 납북됐던 조소앙은 조작이라며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조소앙은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알려졌고 1962년 7월 30일 외롭게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을 지냈다.[10]

입북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납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막내딸의 출생지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일 정도로 김구와 가깝던 엄항섭이 1949년 김구 암살 후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이승만 대통령과는 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자진 월북했다는 소문도 오랫동안 나돌았다. 이러한 이유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1989년에 추서되었다.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12][13] 1988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북측에서는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11]

1948년 10월 엄항섭이 간행한 김구각주 최근 언론집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경찰에 압수 조치되었다.[14]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엄세영(嚴世永)
아버지엄주완
어머니청풍 김씨 (동명이인인 충청도 관찰사 김규식의 딸)
엄승섭(嚴承燮)
동생엄홍섭(嚴弘燮)
부인연미당
장녀엄기선
인척이기붕, 김규식
외척김규식 (외조부와 동명이인)



부인 연미당과 맏딸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여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독립운동가이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이기붕은 그의 인척이었다.[1]

6. 상훈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11]

7. 엄항섭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백과사전 엄항섭, 'Daum' 등 인터넷 백과사전 http://enc.daum.net/[...]
[2]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3]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4] 웹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역사적 진실 http://www.kcrc.or.k[...] 웹진 민족화해 2005-01-02
[5] 간행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2011
[6] 뉴스 백범과 나의 아버지 http://www.econotalk[...] 경제풍월 2013-07-30
[7] 뉴스 「建實(건실)」解散(해산) 경향신문 1949-08-25
[8] 뉴스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경향신문 1949-09-25
[9] 기사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http://news.koreanba[...] 대한변협신문 2015-02-09
[10] 백과사전 엄항섭 한국학중앙연구원
[11] 뉴스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
[12] 웹사이트 평양룡성구역 '재북인사들의 묘'를 가다 http://www.minjog21.[...] 민족21 2004-05-01
[13] 뉴스 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http://www.prometheu[...] 프로메테우스 2006-08-13
[1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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