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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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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劉岱)는 삼국 시대 인물로, 한나라 시중과 연주 자사를 역임했다. 동탁 토벌 연합군에 참여했으나, 군량 부족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교모를 살해한 후 왕굉을 동군 태수로 임명했다. 원소, 공손찬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욱의 조언을 받아 공손찬에게 대항했다. 청주 황건적의 침공에 대응하다가 전사했으며, 이후 조조가 연주 자사를 계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와 대립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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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윤은 후한 말 관료로서 동탁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황건적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으나, 동탁 제거 후 잔당의 반란으로 헌제를 지키다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한, 뛰어난 능력과 충절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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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탁은 후한 말 군벌로, 폭정과 권력 찬탈을 시도했으며,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상국에 올랐으나 여포에게 암살당했으며, 독재와 폭정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유대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대
로마자 표기Yu Dae
공산
출생 및 사망
출생지청주 동래군 모평현
사망일192년 4월 (음력)
사망 원인전사
관직 및 경력
소속후한
주요 직책시어사 → 시중 → 연주자사
임관189년 ~ 192년
가족 관계
아버지유우
숙부유총
형제유요(동생)
조카유기
기타 정보
주군영제 → 소제 변 → 헌제
관련 활동동탁 토벌전, 연주 구원전

2. 생애

후한 말의 관료이자 군벌로, 산둥성 옌타이시 무핑구에 해당하는 동래군 모평현 출신이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백부 유총은 태위를 지내기도 했다.[1] 유대는 시중으로 조정에서 일하다가, 189년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후 연주 자사로 임명되어 중앙 정치에서 벗어났다.[4] 연주 자사 시절 그는 겸손한 태도로 민심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욱과 같은 인물들의 초빙에는 실패하기도 했다.

190년 봄, 동탁 토벌전이 일어나자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그는 장막, 원유, 교모, 포신, 조조 등과 함께 산조(酸棗)에 주둔했으나, 적극적으로 동탁과 싸우려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 조조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연합군은 식량이 떨어져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하였다.[6] 연합군 해산 후, 유대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군 태수 교모와 대립하다 그를 살해하고, 왕굉을 후임 동군태수로 삼았다.

이후 원소공손찬이 대립하자, 양측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는 공손찬으로부터 원소의 가족을 넘기라는 압박을 받았다. 결정을 망설이던 그는 별가 왕욱의 권유로 정욱에게 조언을 구했고, "공손찬은 원소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정욱의 분석을 받아들여 원소의 편에 섰다. 유대의 결정대로 공손찬은 곧 원소에게 패배했다.[9]

192년 음력 4월, 청주황건적 백만 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동평국으로 들어왔다. 제북상 포신은 농성을 진언했으나, 유대는 이를 듣지 않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가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그의 사후, 황건적을 토벌한 조조연주 자사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유대는 동생 유요와 함께 청렴하고 인망이 높아 명망 있는 한 왕실의 후예로 평가받았으며, 평원의 도구홍은 이들 형제를 "긴 길에 두 마리 용을 부리고, 천 리를 질주하는 두 마리 준마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의 기록과 다르게 묘사된다. 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한 후 유비에게 패배하고, 이후 조조에게 합류하여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지만 점차 자만해져 포신의 조언을 무시하다가 죽음을 맞는 인물로 그려진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한나라 제효왕(齊孝王) 유장려의 작은아들 모평공후(牟平共侯) 유설(劉渫)의 후손이다. 그의 백부 유총(劉寵)은 후한태위에 오르기도 했다.[1] 유대는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시 무핑구에 해당하는 동래군 모평현 출신이다.

초기에는 시어사(侍御史)로 활동했다. 185년(중평 2년),[2] 영제가 동상 제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농토 한 무(畝)당 10전을 징수하려 하자, 수해와 한해(旱害)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낙안태수(樂安太守) 육강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육강은 황제의 총명을 망국 군주에 빗대었다는 모함을 받아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시어사였던 유대가 사건을 조사하여 육강이 면직되는 선에서 그치도록 도왔다.[3] 이후 시중(侍中)으로 조정에서 일했다.

후한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자, 동탁의 명사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연주 자사(兗州刺史)로 임명되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동탁전에 따르면) 연주 자사 시절 그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 민심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한서에 따르면) 그러나 정욱과 같은 인물들은 그의 초빙에 응하지 않기도 했다. (정욱전에 따르면)

유대는 동생 유요와 함께 청렴하고 인망이 높아 명망 있는 한 왕실의 후예로 평가받았다. 평원의 도구홍(陶丘洪)은 이들 형제를 추천하며 "만약 명군(明君)이 유대(劉岱)를 먼저 등용하고 그 후에 유요(劉繇)를 발탁한다면, 이는 마치 긴 여정에 두 마리 용을 부리고 천 리 길을 달리는 준마 두 필을 얻는 것과 같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극찬했다. (후한서에 인용된 오지에 따르면)

2. 2. 관직 생활과 동탁과의 대립

189년(중평 6년), 시중으로 조정에서 일하던 중, 이부상서 주비와 상서랑 허정의 추천으로 연주 자사에 임명되었다.[4] 이는 당시 실권을 장악한 동탁이 명사들을 우대하는 정책의 일환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유대를 중앙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유대는 연주 자사로서 겸손한 태도를 보여 민심을 얻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정욱과 같은 인물들은 그의 초빙에 응하지 않았다.

190년(초평 원년) 봄,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헌제를 인질로 삼은 폭군 동탁에 맞서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유대는 예주 자사 공주, 진류태수 장막, 동군태수 교모, 광릉태수 장초, 장홍 등과 함께 진류군 산조현에서 맹세하고 주둔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동탁군이 강하다는 이유로 서로 눈치만 보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주로 술자리를 가지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조조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한편,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기주목 한복이 위군 업현에 주둔하며 군량 공급을 줄이자, 유대는 ‘동탁은 무도하여 공공의 적이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동탁 사후에는 회군하여 한복을 토벌해야 한다. 강한 군대를 가지고도 흉역한 행동을 하니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라는 글을 써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5] 결국 연합군은 식량이 떨어지자 별다른 성과 없이 해산하였다.[6]

연합군 해산 후, 유대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군태수 교모와 대립하다 그를 살해하고, 왕굉을 후임 동군태수로 삼았다.

2. 3. 원소와 공손찬 사이의 갈등

192년,[7] 원소공손찬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대는 이전부터 원소, 공손찬 양측과 모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원소의 처자는 유대가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고, 공손찬의 종사(從事) 범방(范方)은 기병을 이끌고 유대를 돕고 있었다.

갈등이 깊어지자 공손찬은 유대에게 원소와의 관계를 끊고 그의 처자를 자신에게 보낼 것을 요구했다. 또한 범방에게는 별도로 "유대가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일단 복귀하고, 원소를 평정한 후에 유대를 공격하겠다"는 지시를 내렸다. 유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때 별가(別駕) 왕욱(王彧)은 재야에 있던 정욱이 지모가 뛰어나 큰일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언을 구하도록 권했다. 유대가 정욱에게 자문을 구하자, 정욱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까이 있는 원소가 아닌 멀리 있는 공손찬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에 익숙한[8] 월(越)나라 사람을 빌리는 것과 같습니다. 공손찬은 원소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원소가 잠시 열세에 있더라도 결국에는 공손찬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유대는 정욱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과연 범방이 공손찬에게 복귀하기도 전에 공손찬은 계교 전투에서 원소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유대는 정욱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9]

2. 4. 청주 황건적과의 전투와 최후

192년 음력 4월, 청주황건적 백만 명이 연주로 쳐들어와 임성국의 국상 정수(鄭遂)를 죽이고 동평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제북포신은 유대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적은 백만이고 백성은 두려워하며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없으니 지금 맞서면 안 됩니다. 적은 보급품 없이 오직 약탈에만 의존하므로 우선은 굳게 지키면서 군사력을 키워야 합니다. 적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으면 그 세력은 흩어질 것입니다. 그 후에 정예병으로 중요한 길목을 점거하고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직접 나서 싸우다가 결국 전사하였다. 그 후, 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조조가 연주 자사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3. 성품과 평가

유대는 부모와 형제에게 효도하고 자비심이 많아 인자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겸손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다.[10] 도구홍은 유대와 그의 형제인 유요를 추천하면서, 이들을 '두 마리 을 거느리고 먼 길을 가거나, 뛰어난 말(騏驥)을 부려 천 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1]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의 연주자사 유대와 동명이인인 유대의 행적을 합쳐 하나의 인물로 묘사한다.

제5회에서 연주자사로서 반동탁 연합군에 제4진으로 참가하는 것이 첫 등장이다. 제6회에서는 교모가 양식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한 것으로 설명된다. 제15회에서는 동생 유요의 가계를 설명하며 잠시 언급된다.

이후 조조가 연주를 점령하자 그에게 귀순하여 편장(偏將)이 된 것으로 설정된다. 일부 판본에서는 조언자 포신의 제안으로 조조에게 합류하여 황건적 잔당 토벌에 참여했으나, 공을 세우자 자만해져 포신의 조언을 무시하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묘사도 있다. 다만 이는 연의 본편의 주요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제22회, 유비서주에서 차주를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하북의 원소와 연계하자, 승상 조조는 유대를 전군, 왕충을 후군으로 삼아 5만 명의 병력으로 유비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이때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에 유비를 직접 응징할 것이니, 자신의 깃발을 사용하여 마치 조조 본인이 직접 온 것처럼 위장하고 신중하게 진군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유대는 서주 100리 거리에서 진군하기를 망설이며 왕충과 서로 선봉을 미루다가,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 왕충이 먼저 절반의 병력을 이끌고 나아간다. 하지만 왕충은 관우에게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왕충이 사로잡히자 유대는 장비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고 수비를 굳힌다. 이에 장비는 에 취한 척 일부러 병사를 심하게 매질한 뒤 몰래 풀어주어, 그날 밤 2경(更)에 유대의 진영을 기습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린다.

유대는 장비의 계략에 속아넘어가 진영을 비우고 매복하여 기다린다. 장비는 소수의 병력만 보내 유대의 빈 진영에 방화하게 하고, 유대군이 속아서 매복 지점에서 뛰쳐나오자 미리 배치해 둔 복병으로 이들을 공격하여 궤멸시킨다. 유대 역시 이 과정에서 장비에게 사로잡힌다.

유비는 사로잡힌 유대와 왕충을 처형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며, 차주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군사를 일으킨 것이지 조조를 배반할 생각은 없다고 해명한다. 그리고 조조에게 돌아가 자신을 위해 변호해 줄 것을 부탁한다. 유대와 왕충이 이를 약속하고 돌아가는 길에 장비가 나타나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관우가 급히 달려와 말린다. 장비가 "이들은 틀림없이 다시 우리를 공격하러 올 것"이라고 주장하자, 유대는 "만약 다시 온다면 우리 삼족(三族)이 멸망할 것"이라고 맹세하며 위기를 넘긴다.

허도로 복귀한 유대는 조조에게 유비가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두둔하지만, 조조는 크게 분노하여 유대를 참수하려 한다. 제23회에서 공융이 나서서 간곡히 만류한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강등 처분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이후 연의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대는 정사의 연주자사 유대와 소패 유대의 행적이 혼합되어 묘사되며, 특히 유비 토벌전 관련 내용은 소패 유대의 사적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5. 가계

동생 유요

  • 할아버지 : 유본(劉本) 혹은 유비(劉丕)[13] - 여러 경전을 배워 박학했기에 통유(通儒)라 불렸다.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뽑혀 평원군현장(般縣長)을 지냈다.[14]
  • * 아버지 : 유여(劉輿) 혹은 유방(劉方) - 산양태수에 재직하였다.[1]
  • ** 동생 : 유요

6. 기타

조조의 부하 중에도 이름이 '유대'이고, 까지 '공산'(公山)으로 똑같은 동명이인이 있다. 다만 이 유대는 예주 패국 출신이다. 199년(건안 4년)에 서주자사 차주를 물리치고 거병한 유비조조의 명령에 따라 왕충과 함께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이때 유비는 유대 등에게 “너희 백 명이 온다고 해도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조조가 직접 온다면 모를까!”라고 말했다고 한다.[11] 한편, 사공장사(司空長史)로서 조조의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열후(列侯)에 봉해졌다는 기록도 있다.[12]

참조

[1] 서적 삼국지
[2] 서적 후한서
[3] 서적 후한서
[4] 서적 삼국지
[5] 서적 영웅기
[6] 서적 삼국지
[7] 서적 자치통감
[8] 서적 자치통감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영웅기
[11] 서적 헌제춘추
[12] 서적 위무고사
[13] 서적 후한서
[14] 서적 속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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