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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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벨라(필리핀)는 필리핀 바실란 섬 북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바실란 주의 수도였으나 2017년 라미탄으로 이전되었다. 이 도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미국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공존한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고무와 코프라 생산이 활발하다. 이슬람교가 다수를 차지하며, 기독교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사벨라는 바실란 해협을 통해 삼보앙가 시와 연결되며, 해상 페리와 육상 교통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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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필리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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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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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이사벨라 시 |
로마자 표기 | Lungsod ng Isabela |
별칭 | 해당 없음 |
명칭 유래 | 이사벨 2세 |
창건 | 1848년 |
시 승격 | 2001년 4월 25일 |
지리 | |
지역 | 삼보앙가 반도 (Region IX) |
지방 | 필리핀 |
주 | 바실란 주 |
면적 | 233.73 제곱킬로미터 |
고도 | 미터 |
정치와 행정 | |
시장 | 시티 잘리아 하타만 |
부시장 | Jhul Kifli L. Salliman |
하원 의원 | Mujiv S. Hataman |
유권자 | 명 () |
시 의회 | Candu I. Muarip Jeromy L. Casas Bimbo E. Epping Ar-Jhemar K. Ajibon Alan Ritchie Luis B. Biel Alha-zim S. Akbar James Abner S. Rodriguez Khaleedsher M. Asarul Begang D. Chavs Karel Annjaiza R. Sakkalahul |
인구 통계 | |
총 인구 | 명 |
가구 수 | 가구 |
경제 | |
빈곤율 | % () |
기타 정보 | |
시간대 | PST |
UTC 오프셋 | +8 |
웹사이트 | 이사벨라 시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이사벨라의 역사는 문화적으로는 인접한 삼보앙가 시의 연장선이지만, 바실란 섬과 술루 군도의 역사와 얽혀 있다.[2]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에 이사벨라 지역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토착 야칸족이 다른 민족 집단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부족하다. 다만, 야칸족이 보르네오와 가까운 바실란의 지리적 특성을 근거로 다약족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이 있다.[2]
중국 제국 법원의 기록에 따르면, 13세기와 14세기에 중국 상인들을 통해 영락제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친 쿠말라랑 왕국이 '마이'(필리핀 제도에 대한 중국 이름)의 남쪽 섬 중 하나에 있었다고 한다. 지역 역사가들은 이 왕국이 바실란 섬 북서 해안의 현대 쿠말라랑(현재 바랑가이)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2] 명사 기록에 따르면, 산둥성 더저우의 기록(1673년, 1788년, 1935년)에 파두카 바타라(중국 황제 영락제를 방문하여 1417년 사망한 타우수그 권력자) 사후, 고등 법원 만다린 잔 지안이 타구이마(바실란 섬) 북서 해안의 술루 술탄국 봉신 국가 쿠말라랑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잔 지안은 술루 술탄의 봉신으로서 왕국을 통치한 야칸 왕족으로 추정되는 라칸 이펜툰에게 접견을 받았다. 만다린 관리는 2년 동안 쿠말라랑에 머물렀다.[2] 이후 쿠말라랑 왕국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술탄 쿠다라트의 기지가 라미탄에서 제거된 해에 삼보앙가에서 도착하여 섬 북서 해안의 파상겐에 정착했다.[3] 그들은 아과다 강 어귀 근처에 첫 번째 나무 선교회와 울타리 벽을 건설하고 섬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에게 헌정했다.[3] 1654년경에는 약 1,000가구의 가톨릭 신자들이 섬에 살고 있었다.[3]
국성야의 침략을 예상하여 스페인 당국은 1663년 삼보앙가와 이사벨라를 직접적인 스페인 행정에서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다. 스페인 왕실 당국 부재 시기에 예수회는 "레두시온"이라 불리는 일종의 가톨릭 도시 국가를 형성했다.[3]
스페인 왕실 당국은 1718년에 돌아왔다. 1726년 스페인과 술루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자유 무역과 바실란 섬의 스페인 양도를 약속했지만, 1730년 술탄의 신민들이 조약을 위반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3] 한편, 예수회는 1768년 스페인 제국에서 추방되었다.
1840년대 프랑스는 바실란에 관심을 갖고 1844–45년 섬을 봉쇄했다. 1845년 프랑스는 술루 술탄에게 바실란 섬 양도를 강요했지만, 같은 해 포고령으로 섬의 주권을 스페인에 넘겨주었다.
1845년, 스페인은 파상겐 해안 정착지에 나무 요새를 세웠고,[3] 1848년 석조 요새로 대체하여 스페인 이사벨 2세를 기려 푸에르테 데 라 레이나 이사벨 세군다로 명명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 지배권을 미국에 넘겼다. 1899년 미군은 이사벨라 데 바실란의 스페인 해군 기지를 점령하여 이사벨라와 라미탄에 대한 주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8]
당시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미군은 술루 술탄국과 베이츠 조약을 체결하여 술루 군도에 대한 미국의 권한 행사를 규정했다.[9] 1899년 술탄 자말룰 키람 2세와 존 C. 베이츠 준장은 베이츠 조약을 체결하여 바실란을 포함한 술루 군도에 대한 미국의 행정 통제를 인정했다.
웬델 C. 네빌 대위 지휘 하에 미군 병력이 도착하여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바실란의 군정 총독으로 배치되어 문민 정부를 수립했다. 1901년 삼보앙가 자치시가 출범하여 삼보앙가와 바실란 섬을 포함했다.
1911년 삼보앙가 자치시는 위원회 형태의 정부를 가진 도시로 전환되었고, 1912년 미국인 크리스토퍼 F. 바더가 초대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실란 섬 포함으로 삼보앙가시는 토지 면적 기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914년, 모로 지방은 민다나오 술루부로 대체되었고, 바실란 섬 전체가 포함된 민다나오 술루부의 수도였다.
정치적으로 바실란은 모로 지방(1899–1914), 민다나오-술루 부(1914–1920), 삼보앙가 주의 구역(1920–1936) 및 삼보앙가 시 헌장(1936–1948)의 일부였다.
미국 초기 시대, 미국 농장주들은 바실란의 광대한 처녀림을 개간하여 농업을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연방 행정이 붕괴되었고, 1942년 일본군이 바실란을 점령하여 1945년까지 통치했다.
1936년 삼보앙가가 시로 지정될 때 바실란을 포함했다. 1948년 7월 1일, 바실란은 필리핀 의회에서 통과된 공화국 법 제288호에 의해 삼보앙가 본토와 분리되어 별도의 도시가 되었다.[1]
1954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리로이 S. 브라운을 바실란 시 시장으로 임명했다. 1955년 12월 31일까지 시장으로 재임했으며, 당시 도시는 1급 도시였다.[1] 바실란 시 헌장 개정으로 시장직은 선출직으로 변경되었다.[1]
1955년 11월 8일, 바실란에서 최초의 지방 선거가 열렸고, 브라운 시장이 첫 선출 시장으로 선출되어 5선을 역임했다. 이사벨라 지구는 경제 성장의 시대를 열었다.[1]
1972년 9월 21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바실란은 모로 민족 해방 전선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3년 12월 27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56호를 발령하여 바실란 시를 바실란 주로 전환했다. 1974년 12월 2일 제정된 대통령령 제593호는 바실란의 수도를 이사벨라 자치구로 규정했다.[1]
1975년 12월 11일 제정된 대통령령 제840호는 자치구 수를 7개로 줄였다. 이사벨라, 라미탄, 투부란, 티포-티포, 수미십, 말루소, 란타완이며, 이 중 5개가 현재 존재한다. 바실란 시의 영토 관할권은 이사벨라 자치구로 흡수되었다.[1]
계엄령 하에서 바실란은 토마스 G. 난퀼 주니어 대령을 첫 군 지사로 임명했다.
1975년 12월 11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산 G. 캄리안 부지사를 임명했고, 리카르도 G. 몬을 이사벨라 자치 정부의 첫 번째 자치구장으로 임명했다. 1976년 새해 첫날, 이사벨라는 바실란 주의 수도로서 독립을 되찾았다.[1]
공화국 법 9023호에 따라 이사벨라는 시로 승격되었으며, 2001년 4월 25일 주민투표에서 승격이 비준되었다.[1] 같은 해 11월, 이사벨라시 주민들은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RMM)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2. 1.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
이사벨라 지역의 초기 역사와 관련하여, 토착 야칸족의 스페인 이전 시대에 대한 기록은 다른 민족 집단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부족하다. 다만, 바실란이 보르네오와 가깝다는 점을 근거로 야칸족이 다약족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이 존재한다.[2]
중국 제국 법원의 기록에 따르면, 13세기와 14세기에 중국 상인들을 통해 영락제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친 쿠말라랑 왕국이 '마이'(필리핀 제도에 대한 중국 이름)의 남쪽 섬 중 하나에 있었다고 한다. 지역 역사가들은 이 왕국이 바실란 섬 북서 해안의 현대 쿠말라랑(현재 바랑가이)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2]
명사 기록에 따르면, 중국 산둥성 더저우의 기록(1673년, 1788년, 1935년)에 파두카 바타라(중국 황제 영락제를 방문하여 1417년 사망한 타우수그 권력자) 사후, 고등 법원 만다린 잔 지안이 타구이마(바실란 섬) 북서 해안의 술루 술탄국 봉신 국가 쿠말라랑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잔 지안은 술루 술탄의 봉신으로서 왕국을 통치한 야칸 왕족으로 추정되는 라칸 이펜툰에게 접견을 받았다. 만다린 관리는 2년 동안 쿠말라랑에 머물렀다.[2]
라칸 이펜툰과 그의 수행단은 1420년 11월 16일 중국 황제를 알현하고, 중국 황제에게 자신을 공인된 군주이자 용상의 봉신으로 선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황제는 요청을 받아들여 라칸 이펜툰에게 '왕'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1421년 5월 27일, 라칸 이펜툰은 푸젠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라피가 '왕' 칭호의 정당한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1424년 11월 3일 중국 황제에게 금판에 "기념비"를 제출했다.[2]
이후 쿠말라랑 왕국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쿠말라랑은 1973년 이사벨라 시 북서 해안의 바랑가이로 부활했다.[2]
2. 2. 스페인 식민지 시대
프란시스코 라도 신부(예수회)가 원주민 야칸족이 "파상겐"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첫 가톨릭 선교회를 설립하면서 바실란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파상겐"은 야칸족의 용어로 "공동체", "마을" 또는 "사람들이 방문하거나 머무는 곳"을 의미한다.[3] 그러나 이 해안 지역은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타우수그족과 사말족 정착민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현지에서는 "파그파살란" 또는 "정착지"라고 불렸다.[3] 예수회 선교사들은 술탄 쿠다라트의 기지가 라미탄에서 제거된 해에 삼보앙가에서 도착하여 섬 북서 해안의 파상겐에 정착했다.[3] 그들은 아과다 강 어귀 근처에 첫 번째 나무 선교회와 울타리 벽을 건설하고 섬을 예수회 설립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에게 헌정했다.[3]가톨릭 선교사들은 토착민과 결혼한 스페인 군인들과 함께 추가 정착군을 투입하여 바실란에 성공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1654년경에는 약 1,000가구의 가톨릭 신자들이 섬에 살고 있었다.[3]
국성야의 침략을 예상하여 스페인 당국은 남부의 모든 기지를 철수하여 인트라무로스에 갇힌 군대를 증강시키고 1663년 삼보앙가와 이사벨라를 직접적인 스페인 행정에서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다.
사비니아노 만리케 데 라라 총독은 1662년 5월 6일 칙령에 서명하여 삼보앙가 요새와 몰루카 제도의 향료 제도인 테르나테를 포함한 기타 스페인 식민지의 군사 철수를 명령했다.

운명은 삼보앙게뇨(루손과 비사야에서 온 강제 정착민으로 삼보앙가를 점령)와 파상겐, 예수회를 포함하여 적대적인 위협과 모로족 마스터 선원들의 귀환 속에서 놀랍게도 56년(1662–1718) 동안 고립된 존재와 확산을 견뎌낼 것이다.[3] 모로족은 버려진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스페인 왕실 당국이 부재한 가운데 예수회는 삼보앙가와 바실란에 있는 30년 된 프레시디오 주변과 그 안에서 "레두시온"(스페인어 Reducciones, 포르투갈어 Reduções)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가톨릭 도시 국가를 형성했다. 이것들은 이상화된 신정 모델에 따라 세워진 사회였다.[3]
스페인 왕실 당국은 결국 1718년에 돌아왔다.
18세기에는 모로족 토착민과 루마드 동맹과의 적대 행위가 다시 발생했는데, 이는 1718년 후안 안토니오 데 라 토레 부스타만테 총독이 이전에 양측이 추가 요새를 건설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어기고 삼보앙가 바굼바얀에 레알 푸에르자 데 산 호세를 재건하기로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 당시 바다르 우드-딘 술탄 술루는 마닐라와 중국과의 상업적 관계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스페인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그들이 1726년에 체결한 협정에 따르면, 스페인과 술루는 서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었고 바실란 섬은 스페인에게 양도되었다.[3]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삼보앙가의 인력과 자원을 얻은 비사야 섬에 대한 일련의 습격에서 술탄의 화가 난 신민들이 조약을 위반하여 1730년까지 대규모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3]
삼보앙가 반도의 절반은 북쪽의 신당안에서 남쪽의 바실란 섬 전체에 걸쳐 관할 구역이 있는 코레히미엔토(구역) 데 삼보앙가로 만들어졌고, 반도의 북쪽 절반은 미사미스 구에 속했다. 1837년에 정부는 고비에르노 밀리타르로 변경되었다.

한편, 예수회는 1768년 포르투갈, 프랑스, 두 시칠리아, 파르마 그리고 스페인 제국에서 추방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스페인 외의 식민지 열강들은 서부 민다나오에, 특히 술루 술탄국의 영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43년,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베트남에 세실 제독과 샤르네 선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함대를 파견하여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을 시작했다.
1844–45년 세실 제독 휘하의 프랑스가 바실란을 봉쇄했을 때, 그들은 이 섬을 타귀메라고 불렀으며, 이 지역에서 프랑스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 기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다.

1845년 2월 20일, 프랑스는 술루 술탄에게 100000피아스터 또는 500000프랑과 교환하여 바실란 섬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양도하도록 강요했다.
프랑스의 바실란에 대한 주장은 술루 술탄의 공식 양도와 바실란 다투스들의 공식 서면 합의에 근거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프랑스에 의해 철회되었고, 1845년 8월 5일자 포고령으로 공식화되어 섬의 완전한 주권을 스페인에 넘겨주었다.
1845년, 삼보앙가의 해군 책임자인 돈 라몬 로보가 삼보앙가 지역 총독인 돈 카예타노 수아레즈 데 피게로아와 함께 파상겐 해안 정착지로 향했다. 나무 요새는 처음에는 해안에서 약 800m 떨어진 좁은 해협을 마주보는 정착지의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졌다.[3] 200년 된 예수회 선교지는 요새와 해안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3]
1848년까지 석조 요새가 완공되어 나무 요새를 대체했다. 요새는 스페인 이사벨 2세와 인도를 기리기 위해 푸에르테 데 라 레이나 이사벨 세군다로 명명되었다.
니에토 아길라르(1894)는 요새를 "웅장하다"고 묘사한다. 해발 20m에 위치한 이 요새는 바실란 섬과 말라마위 섬으로 형성된 만의 두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새 안에는 우물이 있었고, 경비대, 주둔 병력, 감옥, 포병대, 그리고 ''카사 코만단시아''를 위한 네 개의 건물이 있었다.
1859년 7월 30일, 왕령이 발효되어 예수회가 민다나오에서 오토콜렉트 교단으로부터 선교지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는 마침내 1862년에 바실란과 테투안으로 돌아왔다.
1863년까지 이사벨라 세군다 요새는 민다나오 경찰-군정부의 제6지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2. 3. 미국 식민지 시대
미국-스페인 전쟁을 종식시킨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 넘겼다. 1899년 12월, 제임스 S. 프티 대령이 이끄는 미군은 이사벨라 데 바실란의 스페인 해군 기지를 점령했다. 이로써 이사벨라와 라미탄에 대한 주권은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8]당시 루손에서는 필리핀-미국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은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분할 통치 전술을 썼다. E.S. 오티스 소장은 존 C. 베이츠 장군을 보내 술루 술탄국과 협상하게 했다. 베이츠 조약으로 알려진 이 협정은 무슬림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는 대신 술루 군도에 대한 미국의 권한 행사를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삼보앙가 공화국과는 대조적이었다.[9]
베이츠 조약은 1899년 술탄 자말룰 키람 2세와 존 C. 베이츠 준장 사이에 체결되었으며, 바실란을 포함한 술루 군도에 대한 미국의 행정 통제를 인정했다. 술탄 키람은 처음에는 미국에 통제권을 넘긴 것에 실망했지만, 베이츠의 주요 목표는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술탄국의 중립을 보장하고 민다나오에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이전의 스페인 조약을 바탕으로 했지만, 번역상의 차이가 있었다. 영어 버전은 완전한 종속을, 타우수그어 버전은 보호령을 의미했다. 베이츠 조약은 미국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지만, 술탄에게 너무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에 대한 모로족의 관행을 인정한 조항은 워싱턴 D.C.에서 논란이 되었다. 베이츠는 나중에 이 조약이 북부의 전쟁이 끝나고 더 많은 병력을 남부에 투입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방편이었다고 인정했다.[10]
그러나 베이츠 조약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지속된 민다나오의 정치-군사 정부인 모로 지방을 거부했고, 곧 모로 반란이 일어났다. 미국 식민 정부는 점유되지 않은 모든 토지를 국유지로 선언했고, 이후 미국 투자가 민다나오에 유입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의 대량 이주가 장려되었다.
미군 병력은 웬델 C. 네빌 대위의 지휘 하에 도착했고, 그는 나중에 해병대 사령관 중 14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바실란의 군정 총독으로 배치되어 바실란 섬에 문민 정부를 수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1년 7월 1일, 삼보앙가 자치시가 출범하여 삼보앙가와 바실란 섬을 포함했다.
1911년 9월 15일, 삼보앙가 자치시는 위원회 형태의 정부를 가진 도시로 전환되었다. 1912년 1월 1일, 미국인 크리스토퍼 F. 바더가 초대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실란 섬이 삼보앙가에 포함되면서 삼보앙가시는 토지 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2년 후, 필리핀계 삼보앙가인인 빅토리아노 타로사스가 도시의 첫 번째 시장이 되었다.
1914년, 모로 지방은 민다나오 술루부로 대체되었고, 그 구역은 다바오, 미사미스, 라나오, 코타바토, 술루, 삼보앙가 등 별도의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자치시에는 바실란 섬 전체가 포함되었으며,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 시민 총독이 관할하는 문민 정부가 있는 민다나오 술루부의 수도였다.
프랭크 W. 카펜터 주지사가 이끄는 민다나오 술루부는 1914년에 창설되어 1920년 2월 5일에 종료되었다. 비기독교 부족 사무국이 조직되었으며 잠시 테오피스토 깅고나 시니어가 이끌었다. 1916년 미국 의회가 존스 법을 제정하면서 필리핀의 궁극적인 독립이 보장되었고, 공공 행정의 필리핀화가 시작되었다.
다투 칼룬은 1904년 7월 16일, 미국과의 첫 접촉 직후 58세의 나이로 바실란에서 사망했다. 그의 조카 가비노 파마란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다투 무르살룬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무르살룬은 친미적이었으며 미국 모델의 문민 정부와 개발을 이끌었다.
정치적으로 바실란은 모로 지방(1899–1914), 민다나오-술루 부(1914–1920), 삼보앙가 주의 구역(1920–1936) 및 삼보앙가 시 헌장(1936–1948)의 일부가 되었다.
군사적 진압과 함께 교육 정책이 시행되었다. 공립학교가 세워졌지만, 무슬림 학생 등록률은 기독교 학교 출석률보다 훨씬 낮았다. 무슬림들은 공교육을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정부 업무에 무슬림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은 서부 민다나오에 대한 매력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필리핀 경찰(PC)은 미국 육군 부대를 대체했다. 미국 군대의 교체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의 적대감을 증가시켰다.
정치 분야에서 1914년 민다나오-술루 부의 조직을 통한 무슬림 업무 관리는 실패했는데, 부의 지도력이 기독교인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 지도자들은 역사적으로 독립이라는 개념에 반대했는데, 이는 무슬림 지역이 기독교인이 지배하는 정치 시스템에 통합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초기 시대에, 미국 농장주들은 바실란의 광대한 처녀림을 개간하여 농업을 설립했다. 필리핀 고무 산업의 아버지인 미국인 제임스 D. W. 스트롱 박사는 필리핀 최초의 고무 농장을 발루노에서 개시했다.
곧 B. F. 굿리치 고무 특허의 성공은 이사벨라 시 북부 지역에서, 영국-말레이시아의 시메 다비와 히스파노-독일의 한스 멘치 기업과 같은 다른 다국적 기업들이 도시 남부 지역에 고무 농장을 열도록 유도했다. 필리핀 소유 농장은 말로로스 출신의 돈 후안 S. 알라노가 말라마위 섬에 설립했는데, 그는 필리핀 연방 시대(1936–1942) 동안 전체 모로 지방(민다나오)의 대표로, 그리고 공화국 첫 의회(1946–1949)에서 삼보앙가 주(현재 북삼보앙가, 남삼보앙가, 시부그아이 삼보앙가, 삼보앙가 시, 바실란 포함)의 첫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바실란 시와 삼보앙가 시의 헌장을 저술했다.
라미탄의 쿠에바스-플로레스-파마란-안토니오 가문과 이사벨라 자체의 파르도, 바라디노, 브라운, 단스, 골베오, 누날 가문과 같은 더 많은 필리핀 정착민 가족들이 곧 뒤따라 대규모 농장을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연방 행정을 붕괴시켰다. 1942년 일본군은 바실란에 상륙하여 1945년까지 점령했다.
민다나오와 술루의 군구의 기독교인과 무슬림 장교와 병사들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모로 게릴라 활동으로 전환했다. 자유 술루 정부라는 시민 정부가 그 지역의 활동을 관리했다.
일본 점령군은 삼보앙가와 바실란을 모두 통치하기 위해 바실란에 정부를 수립했다. 다투 무르살룬과 그의 가족은 1945년 필리핀-미국 연합군이 바실란을 탈환하는 신호탄이 된 이사벨라의 스페인 요새와 해군 병원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큰 관심 없이 지켜봤다.
삼보앙가 작전과 함께 필리핀 연방 군과 미 제41사단의 소규모 부대가 삼보앙가 반도에서 북보르네오에 이르는 긴 섬인 술루 군도를 침공했다. 바실란, 말라마위, 타위타위, 상가 상가, 봉가오가 연이어 빠르게 점령되었다. 이 작전 단계에서 일본군이 군사 본부, 감옥 및 탄약고로 사용했던 이사벨라 세군다 요새가 미국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스페인" 해군 병원이 파괴되었다. 4월 9일, 홀로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다보 산 주변에서 완강한 방어선을 구축한 약 3,900명의 일본군은 필리핀 군인과 현지 모로 게릴라의 지원을 받은 미 제163보병대의 진격을 막았다. 4월 22일까지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그 지점을 점령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도주하여 서쪽에서 두 달 더 버텼다.

2. 4. 필리핀 독립 이후
1936년 삼보앙가가 시로 지정될 때 바실란을 포함했다. 1948년 7월 1일, 하원 의원 후안 S. 알라노가 발의한 법안에 따라, 바실란은 필리핀 의회에서 통과된 공화국 법 제288호에 의해 삼보앙가 본토와 분리되어 별도의 도시가 되었다. 이는 섬과 삼보앙가 시 사이의 거리를 고려한 것이었다.[1]초대 시장은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임명한 니카시오 S. 발데로자였다. 그는 지방 재무관, 구 삼보앙가 주의 임시 주지사, 바기오 시장, 삼보앙가 시 초대 시장, 다바오 시 초대 시장, 그리고 바실란 시의 초대 임명 시장을 역임한 도시 건설자로 평가받았다.[1]
1954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리로이 S. 브라운을 바실란 시 시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1955년 12월 31일까지 이 도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임명 시장이었다. 당시 이 도시는 1급 도시였다.[1]
바실란 시의 헌장을 개정하는 공화국 법 제1211호가 승인되면서 시장직은 선출직으로 변경되었다.[1]
1955년 11월 8일, 바실란에서 최초의 지방 선거가 열렸다. 브라운 시장은 압도적인 지지로 첫 번째 선출 시장으로 선출되어 5선을 역임했다. 당시 시 중심지였던 이사벨라 지구는 경제 성장의 시대를 열어준 많은 시 공공 사업 프로젝트가 진행된 곳이었다.[1]
그는 바실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선출된 시 행정 수반이었다. 그는 카를로스 P. 가르시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행정부 아래 1954년 1월부터 1975년 12월 31일까지 계속 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시 의회는 1954년부터 1975년까지 새로운 입법가와 지도자를 배출했다. 이 시기는 이후 바실란의 "황금기"로 불렸다.[1]
1972년 9월 21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바실란은 1968년 3월 18일 자비다 학살 폭로로 촉발된 모로 민족 해방 전선 봉기의 중심지였다. 많은 모로 지도자들이 MNLF 반란에 가담하여 바실란은 전쟁터가 되었다. 최초의 무력 대결은 섬 서부 란타완의 바그바곤과 카니붕간의 울창한 언덕 주변에서 발생했다. MNLF "문두힌"과 "블랙셔츠"가 알라노 농장을 점령하고 (군대에 의해 "무인지대"로 선언됨) 군대의 공습으로 농장이 파괴되었다. MNLF 반군은 라미탄의 포블라시온을 포위했지만, 무장 부대와 필리핀 경찰대, 그리고 라미탄 주민들의 저항으로 저지되었다.[1]
섬 전역에서 여러 차례 습격과 매복이 발생하여 농장 운영이 중단되었다. 이사벨라 포블라시온 내에서도 산발적인 총격전이 벌어졌고, 해적 습격으로 바실란과 삼보앙가 사이의 어업 활동과 여객선 교통이 마비되었다.[1]
2년이 넘는 전투 끝에 바실란의 기독교 인구 상당수가 떠나면서 기독교인은 소수 민족이 되었다. 삼보앙가, 비사야, 루손에서 거의 50년 동안 지속적인 이주가 이루어진 후, 바실란은 처음으로 인구 순유출을 경험했다.[1]
1973년 12월 27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56호를 발령하여 바실란 시를 바실란 주로 전환했다. 1974년 12월 2일 제정된 대통령령 제593호는 제356호를 수정하여 도시의 영토를 정의하고 바실란의 수도를 이사벨라 자치구로 규정했다. 또한 새로운 바실란 주를 구성하기 위해 10개의 자치구를 만들었다.[1]
1975년 12월 11일 제정된 대통령령 제840호는 대통령령 제593호를 수정하여 자치구 수를 7개로 줄였다. 이 수정안에 명시된 자치구는 이사벨라, 라미탄, 투부란, 티포-티포, 수미십, 말루소, 란타완이며, 이 중 5개가 현재 존재한다. 또한 바실란 시의 영토 관할권을 이사벨라 자치구로 흡수하여 포블라시온을 주의 수도로 삼도록 규정했다.[1]
주로 전환되고 자치구가 창설되면서, 바실란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은 무기를 내려놓는 대가로 항복하는 MNLF 사령관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번성했던 바실란 제1급 도시는 이사벨라 포블라시온 내 반경 1km 지역으로 축소되었다.[1]
계엄령 하에서 바실란은 바실란 주둔 제24 보병 여단 사령관 토마스 G. 난퀼 주니어 대령을 첫 군 지사로 임명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세 명의 부지사를 두었다. 난퀼 대령은 약 1년 반 동안 복무했다.[1]
바실란이 주로 전환되기 전, 바실란 시의 구역인 이사벨라, 라미탄, 말루소는 일반 자치구였다. 난퀼 대령이 군 지사로 임명되었을 때도 바실란 시는 1975년 12월 31일까지 브라운 시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1]
두 번째 군 지사는 로물로 M. 에스팔돈 해군 소장이었다. 그는 필리핀군 남부 사령부 (SouthCom), 남술루해 국경 사령부 사령관, 민다나오 군사 감독관, AFP 참모차장 및 제IX 지역 이슬람 문제 지역 위원 등 많은 দায়িত্ব을 맡고 있어 바실란 군 지사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제21 보병 여단 사령관 플로렌시오 마그시노 대령을 바실란 군사 감독관 겸 관리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의 부 여단장 레카레도 칼보 대령이 그를 보좌했다. 마그시노 대령이 바기오 필리핀 육군 사관학교 (PMA) 교장으로 임명되고 칼보 대령이 본부로 소환되자 알프레도 릴레라 대령이 여단 지휘권을 맡아 바실란 군사 감독관이 되었다. 그 후 살바도르 미슨 대령, 아우구스토 나라그 주니어 대령이 차례로 부임했다. 마지막 군사 감독관은 로돌포 톨렌티노 장군이었으며, 바실란에서 군사 감독관으로 임명된 최초의 스타 계급 장성이었다. 에스팔돈 제독은 마지막 군 지사였으며, 임기는 1975년 12월 31일까지였다.[1]
1975년 12월 11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세 번 시의원을 지낸 아산 G. 캄리안 부지사를 임명했고, 리카르도 G. 몬을 부활한 이사벨라 자치 정부의 첫 번째 자치구장으로 임명했다. 1976년 새해 첫날, 이사벨라는 바실란 주의 수도로서 독립을 되찾았다.[1]
공화국 법 9023호에 따라 이사벨라는 시로 승격되었으며, 2001년 4월 25일 주민투표에서 승격이 비준되었다. 초대 시장은 1998년에 선출된 루이스 루비오 비엘 2세였다.[1]
같은 해 11월, 이사벨라시 주민들은 확대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 자치구](ARMM)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3. 지리
이사벨라 시는 바실란 섬 북쪽 해안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삼보앙가 시 건너편 바실란 해협을 따라 뻗어 있다. 관할 구역에는 말라와이 섬이 포함된다.
이사벨라 전체 지역의 지형은 불규칙하고 완만하다. 가장 가파른 경사(60% 이상)는 바실란 본섬의 멘지, 부사이, 파눈술란, 칼바리오, 카파야완, 카파타간 바랑가이 일부와 해안에 위치한 말라와이 섬의 파니가얀, 산타 바르바라 바랑가이에서 발견된다.
3. 1. 행정 구역
이사벨라 시는 45개의 바랑가이로 구성되어 있다. 각 바랑가이는 푸록으로 구성되며, 일부는 시티오를 가지고 있다.포블라시온에 해당하는 바랑가이는 굵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바랑가이 |
---|
아구아다 |
발라타나이 |
발루노 |
베강 |
비누안간 |
부사이 |
카분바타 |
칼바리오 |
카본 |
디키 |
이사벨라 이스트사이드 |
이사벨라 프로퍼 |
도나 라모나 T. 알라노 |
카파타간 그란데 |
카움푸르나 존 I |
카움푸르나 존 II |
카움푸르나 존 III |
카파야완 |
쿠마라랑 |
라 피에다드 |
람피니간 |
라노테 |
루크부톤 |
룸방 |
마키리 |
말리게 |
마랑마랑 |
마켓사이트 |
마술라 |
멘지 |
파니가얀 |
파눈술란 |
포트 에어리어 |
리버사이드 |
산 라파엘 |
산타 바바라 |
산타 크루즈 |
시사이드 |
스몰 카파타간 |
수마그당 |
선라이즈 빌리지 |
타비아완 |
타부크 |
탐팔란 |
팀풀 |
3. 2. 기후
이사벨라 시는 필리핀 대기 지구물리 및 천문 서비스 행정부(PAGASA)의 수정된 코로너스 기후 분류 체계에 따르면, 1~3개월 지속되는 짧은 건기가 있는, 뚜렷한 강우량이 없는 유형 III 지역으로 분류된다.[24]월 | 최고 기온(°C) | 평균 최고 기온(°C) | 평균 최저 기온(°C) | 최저 기온(°C) | 강수량(cm) |
---|---|---|---|---|---|
1월 | 39°C | 28°C | 24°C | 17°C | 4cm |
2월 | 38°C | 27°C | 23°C | 17°C | 5cm |
3월 | 37°C | 27°C | 23°C | 20°C | 4cm |
4월 | 41°C | 28°C | 24°C | 13°C | 5cm |
5월 | 37°C | 28°C | 24°C | 21°C | 9cm |
6월 | 42°C | 28°C | 25°C | 20°C | 12cm |
7월 | 40°C | 28°C | 24°C | 17°C | 13cm |
8월 | 38°C | 27°C | 24°C | 21°C | 12cm |
9월 | 41°C | 28°C | 24°C | 15°C | 13cm |
10월 | 37°C | 27°C | 24°C | 17°C | 16cm |
11월 | 37°C | 27°C | 24°C | 21°C | 11cm |
12월 | 38°C | 27°C | 23°C | 20°C | 8cm |
연간 | 42°C | 27°C | 23°C | 15°C | 119cm |
4. 인구
연도 | 인구 |
---|---|
1903 | 4,480 |
1918 | 23,089 |
1939 | 57,561 |
1948 | 110,297 |
1960 | 158,876 |
1970 | 202,655 |
1975 | 230,832 |
1980 | 248,039 |
1990 | 331,235 |
1995 | 399,727 |
2000 | 459,099 |
2007 | 587,919 |
2010 | 638,535 |
2015 | 730,385 |
2020 | 769,627 |
4. 1. 민족
202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사벨라 시의 인구는 명이다.이사벨라는 차바카노족, 타우스그족, 야칸족, 사마족, 마라나오족, 일로카노족, 힐리가이논족, 세부아노족, 한족 등 다양한 공동체의 거주민들이 살고 있다.
1960년대 말 모로 반란으로 농장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 독일, 스페인, 영국, 미국 출신의 외국인들도 상당수 거주했다. 이로 인해 바실란은 1960년대 초중반 1급 도시에서 1970년대 말 5급 주로 격하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차바카노어 (주로 기독교 주민의 모국어이자 도시 공용어), 타우스그어, 세부아노어, 야칸어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사마어, 마라나오어, 일로카노어, 힐리가이논어는 소수 언어이다. 타갈로그어와 영어는 모든 민족 집단에서 널리 사용되며 비즈니스, 교육, 행정 언어로 사용된다.
4. 2. 언어
이사벨라는 다양한 공동체의 거주민들의 터전으로, 차바카노족, 타우스그족, 야칸족이 이 도시에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마족, 이주한 마라나오족, 일로카노족, 힐리가이논족, 세부아노족, 그리고 훨씬 적은 규모로 한족이 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이 도시에서는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다. 차바카노어는 주로 대부분의 기독교 주민의 모국어이며 도시의 공용어로 사용된다. 또한 타우스그어, 세부아노어, 야칸어도 사용된다. 소수 언어로는 사마어, 마라나오어, 일로카노어 및 힐리가이논어가 있다. 타갈로그어와 영어도 모든 민족 집단에서 널리 사용되며 비즈니스, 교육 및 행정 언어로 사용된다.
4. 3. 종교
필리핀 통계청(PSA)의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이사벨라 주민 86,672명(88.60%)이 이슬람교를 믿으며, 주로 수니파에 속한다.[12] 이슬람교 신자는 주로 타우수그족과 야칸족이다. 로마 가톨릭교 신자는 41,855명(22.16%)으로 시에서 많은 신봉자를 가지고 있으며, 시의 대부분의 차바카노족과 비사얀족이 따른다. 나머지 인구는 민간 신앙 및 기타 종파와 같은 다른 신념을 따른다.5. 경제
이사벨라 시티의 비즈니스 부문은 1975년에 설립된 바실란 상공회의소(Basila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Inc.)에 의해 대표된다.[25] 농업 생산성이 높은 토지의 거의 90%는 이사벨라 시티 거주민이 소유하고 있다. 거의 모든 무역 활동은 거주하는 중국인 커뮤니티가 처리하며, 이들은 전문직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삼보앙게뇨스는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이거나 시 정부 직원으로 일한다. 타우수그족/마라나오족은 주로 소매 상업, 판매 및 어업에 종사한다. 비사야족은 소규모 기업과 농촌 농업에 종사한다. 야칸족은 대부분 코프라 상인, 상인 또는 지방 정부 직원이다. 필리핀 통상 산업부(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Philippines)) 이사벨라 시티 사무소는 이사벨라 시티 홀 단지, 선라이즈 바랑가이에 위치해 있다.
주요 경제 기업은 다음과 같다.
- 발루노와 멘지는 농산물, 주로 고무를 생산하는 두 개의 바랑가이이다. 이들은 생고무 수액에서 자체 고무 가공 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제품을 수출을 위해 상인들에게 판매한다. 이 고무 가공 협동조합은 이사벨라 시티의 고용률에 크게 기여한다.
- 이사벨라 시티의 OTOP(One Town One Product) 쇼케이스는 도시 내에 위치한 고무 가공 공장의 수로 인해, 크럼 고무(crumb rubber)이다.
- BF 굿리치 및 심 다비 타이어는 이 도시의 주요 국제 투자 기업이다.
- 기타 주요 경제 활동으로는 코코넛/코프라 생산과, 덜하지만 대나무 공예품/가구 등이 있다.
5. 1. 빈곤율
필리핀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사벨라의 빈곤율은 다음과 같다.[25]연도 | 2000 | 2003 | 2006 | 2009 | 2012 | 2015 | 2018 |
---|---|---|---|---|---|---|---|
빈곤선 이하 인구 (%) |
6. 교통
이사벨라는 여러 해상 페리를 통해 바다로 접근할 수 있으며, 분주한 삼보앙가 시 - 이사벨라 노선을 운항한다.[1]
해운 회사 | 선박 |
---|---|
알레손 해운 | M/V 스테파니 마리 1 및 2, M/V 시에라 조이, M/V 씨 제트 |
SRN 패스트 시크래프트 | 위삼 익스프레스 2 및 위삼 익스프레스 8 |
몬테네그로 해운 | 레이나 클레오파트라, 레이나 반데라다, 레이나 저스티샤 |
페리는 평균 3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1]
D'비엘 라 버진 밀라그로사 교통 회사에서 운행하는 버스가 이사벨라-라미탄 노선을 운행한다.[1] 다수의 면허를 받은 밴도 이사벨라-라미탄, 이사벨라-말루소 노선을 운행한다.[1] 이사벨라 시의 대중교통은 최대 5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동 삼륜차에 의존하며, 택시로 사용하거나 특정 노선을 운행한다.[1]
7.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시설
이사벨라 시에는 다음과 같은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시설이 있다.
8. 보건
이사벨라 시에는 다음과 같은 병원 시설이 있다.
병원명 | 비고 |
---|---|
후안 S. 알라노 기념 병원 | 구 바실란 병원, 바실란 섬 최초의 사립 병원 |
인판테 병원 경영 공사 | |
바실란 커뮤니티 병원, Inc. | |
바실란 종합 병원 | 정부 운영 시설 |
보건소 및 약국 현황은 다음과 같다.
- 거의 모든 바랑가이에 유능한 바랑가이 보건 요원들이 근무하는 신축 보건소가 있다.
- 수많은 약국이 이사벨라 시 인구 밀집 지역에 산재해 있다.
9. 치안
이사벨라 시는 2002년과 2005년에 필리핀 군과 미국 군의 발리카탄 훈련을 주최했다.
이사벨라 시의 치안 관련 기관은 다음과 같다.
기관명 | 위치 |
---|---|
이사벨라 시 경찰서 | 마켓사이트 바랑가이 (BJMP - 이사벨라 시 교도소와 함께 위치) |
필리핀 국가 경찰 - 바실란 경찰 지방 사무소 | 멘지 바랑가이 |
육군 제15 특수부대 공수 중대 | 타부크 바랑가이 |
육군 특수 작전 태스크 포스 바실란 | 타비아완 바랑가이 |
육군 제4 특수부대 BN(강변) | 카분바타 바랑가이 |
10. 교육
- 바실란 주립 대학교 - 수마그당 바랑가이에 있으며, 이 도시의 고등 교육 기관 중 가장 많은 과정을 제공한다.
- 모든 공립 고등학교와 초등학교는 이사벨라 시티 교육청, 필리핀 교육부(DepEd) 삼보앙가 반도에서 관리한다.
- 바실란 국립 고등학교 - 이 지역의 주요 중등 교육 기관이다.
- 이사벨라 클라레트 칼리지 - 과거 파티마 학교였으며, 도시 내 유일한 가톨릭 종교 학교로, 산타 크루스 바랑가이에 있으며, 고등학교와 초등학교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 컴퓨터 기술 연구소(COMTECH) Inc. - 포트 지역 바랑가이에 있으며 잠보앙가 시에 본교가 있다. BS 정보 시스템, HRM 디플로마, 컴퓨터 운영 프로그래밍, 컴퓨터 엔지니어링 기술자, 컴퓨터 비서 관리 및 8개의 테스다 국가 자격증을 제공하는 IT 대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푸리가이 칼리지 Inc. - 리잘 애비뉴, 도냐 라모나 T. 알라노 바랑가이에 있으며, HRM 및 BSN 등을 제공한다.
- 후안 S. 알라노 기념 학교 Inc. - 후안 S. 알라노 기념 병원 Inc.와 제휴하여 조산학 및 관련 보건 과학 과정을 제공하며, 도냐 라모나 T. 알라노 바랑가이에 있다.
- 잭 앤 질 통합 학교와 한젤 앤 그레텔 국제 학교는 미취학 아동을 위한 예비 및 유치원 교육을 제공하며, 전자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과정을 제공한다.
- 기독교 어린이들을 위한 불특정 수의 주일 학교와 무슬림 학습자를 위한 마다리스(마드라사)도 도시 내에서 운영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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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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