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번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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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번왕국은 18세기 초 무굴 제국의 붕괴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와 군사 보호 조약을 맺고 자치권을 인정받은 여러 국가들을 의미한다. 번왕국은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하라자, 라자, 나와브 등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영국은 이들을 '번왕'으로 통칭하며 외교와 방위권을 통제하고 내정에 간섭했다.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대부분의 번왕국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병합되었으며, 카슈미르, 하이데라바드, 주나가드 등 일부는 통합 과정에서 분쟁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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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번왕국 | |
---|---|
지도 | |
개요 | |
명칭 | 번왕국, 토후국, 인도 제후국 |
영어 명칭 | princely state, native state, Indian state |
존속 기간 | 1721년 - 1949년 |
지배 | 영국령 인도 제국의 보호 통치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통치자 | 마하라자, 라자, 나와브 등 |
주요 가문 | 무굴 제국의 지방 통치자, 토착 부족장 |
영국과의 관계 | 종속 관계, 자치권 인정 |
역사 | |
기원 | 무굴 제국 쇠퇴 이후 독립 또는 자치권을 획득한 세력 |
영국령 인도 제국 | 영국과의 종속적인 동맹 관계 형성 |
인도 독립 | 대부분 인도 공화국 또는 파키스탄에 합병 |
지리 및 인구 | |
위치 | 인도 아대륙 전역 |
면적 | 전체 인도 아대륙의 약 40% |
인구 | 전체 인도 아대륙 인구의 약 23% |
경제 | |
경제 구조 | 농업 기반, 일부 지역은 상업 및 공업 발달 |
통화 | 자체 통화 발행 (일부) |
사회 및 문화 | |
사회 구조 | 계급 사회, 종교 및 카스트 제도 영향 |
문화 | 지역별 다양한 문화, 예술, 언어 |
주요 번왕국 | |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 하이데라바드 |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 | 스리나가르, 잠무 |
마이소르 번왕국 | 마이소르 |
트라방코르 번왕국 | 티루바난타푸람 |
바도다라 번왕국 | 바도다라 |
그왈리어 번왕국 | 그왈리어 |
인도르 번왕국 | 인도르 |
기타 정보 | |
영향 | 현대 인도 및 파키스탄의 정치, 사회, 문화에 영향 |
현재 | 과거 번왕국의 궁전, 유적 등이 관광 자원으로 활용 |
2. 역사
인도 번왕국은 대부분 무굴 제국 붕괴 이후에 형성되었으며, 많은 수가 외래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데라바드 통치자는 튀르크족, 보팔 통치자는 아프간족, 잔지라 통치자는 아비시니아인 등이었다. 힌두 왕국 통치자 대부분은 크샤트리아였고, 라지푸트 국가와 남인도 왕국만이 무굴 제국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졌다.[7]
영국령 라지 시대의 인도("인도 제국")는 영국령 인도와 '번왕국'으로 구성되었다. 영국 의회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4.) "영국령 인도"는 여왕 폐하가 인도 총독 또는 그에게 종속된 관리를 통해 통치하는 모든 영토와 장소를 의미한다.
> (5.) "인도"는 영국령 인도와 여왕 폐하가 인도 총독 또는 그에게 종속된 관리를 통해 행사하는 모든 토착 군주 또는 수장의 영토를 의미한다.[8]
"영국령 인도"는 1774년부터 1858년까지 동인도 회사가 통치하는 지역을 지칭한다.[9][10] 영국 왕실은 가장 중요한 175개 번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했고, 나머지 약 400개 국가는 영국령 인도 지방 정부의 영향을 받았다.[11] 영국령 인도의 법은 영국 의회 제정 법률에 기반했고, 번왕국 법원은 통치자 권한 아래 존재했다.[11]
번왕들은 자유롭게 통치했으나, 인도 대반란 이후 분할 통치에 이용되는 괴뢰 세력으로 보호받았다. 크리슈나 라자 4세나 사야지 라오 가이콰드 3세 같은 명군 통치하에 근대화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배 계급 사치로 국가 예산이 낭비되는 시대착오적 체제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 대부분 번왕국은 인도나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75] 주나가드 번왕국은 인도에 강제 병합 후 주민 투표로 귀속이 결정되었고, 니잠 번왕국은 폴로 작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 귀속 문제는 카슈미르 분쟁으로 이어져 현재도 미해결 상태다. 인도 정부의 강제 병합에는 인도 대반란 당시 영국 측에 섰던 번왕국에 대한 보복 의미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미얀마 번왕국은 독립 후에도 지배력을 유지했지만, 1962년 네윈 군사 쿠데타로 버마식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자 지배층에서 배제되었다. 일부 번왕국은 버마 공산당 등 반정부 세력에 의해 축출되기도 했다.
2. 1. 무굴 제국 붕괴와 번왕국의 등장
18세기 초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면서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독립한 주와 그 주변의 여러 영방들 중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와 군사 보호 조약을 맺고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들을 번왕국이라고 한다. 인도 번왕국은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일부는 오랜 외부 이주로 인해 외래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통치자는 튀르크족, 보팔 번왕국 통치자는 아프간족, 잔지라 번왕국 통치자는 아비시니아인이었다. 힌두 왕국 통치자 대부분은 크샤트리아였으며, 라지푸트 국가와 산발적인 남인도 왕국만이 무굴 제국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7]번왕국은 약 600개에 달했으며, 그 크기는 니잠 번왕국(하이데라바드 번왕국),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처럼 20만 평방 킬로미터를 넘는 것부터[70] 수 평방 킬로미터 정도의 것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독립 전 인도 전체 면적의 약 45%, 인구의 약 24%를 차지했다.
번왕의 칭호는 다양했는데, 힌두교도는 마하라자(대왕), 라자(왕), 데슈무크(향주), 타쿠르(지주) 등을 사용했고,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나와브(태수, 지사), 왈리(지배자) 등을 사용했다. 하이데라바드 번왕은 무굴 제국 시대에 유래하는 니잠(통치자)을 칭했다.[71][72]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모두 "번왕"(prince: "제후"의 의미)이라고 불렀다.
번왕국은 영국과의 군사 보호 조약에 의해 방위·외교권을 제외한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종종 영국이 파견한 정치 고문(주재관)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인도 총독 제임스 램지 (제1대 달후지 후작)의 "실권의 원리"(양자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번왕국 병합 정책)로 인해 많은 번왕국이 영국령에 병합되기도 했다.[73][74] 그러나 인도 대반란 이후에는 분할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괴뢰 세력으로서 보호받게 되었다.
2. 2.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
영국 동인도 회사와 인도 번왕국 간의 관계는 군사 보호 조약 및 동맹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18세기 초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여러 독립 국가와 영토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보호 관계를 맺었다.[70] 번왕국은 방위와 외교를 영국에 위임하는 대신, 내정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영국은 정치 고문(주재관)을 파견하여 번왕국 내정에 빈번하게 간섭했다.[71][72]번왕국의 수는 약 600개에 달했으며, 그 면적은 니잠 번왕국이나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처럼 20만 평방 킬로미터를 넘는 곳에서부터 수 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곳까지 다양했다. 번왕국의 총면적은 독립 이전 인도 전체의 약 45%를, 인구는 약 24%를 차지했다.
번왕의 칭호는 다양했는데, 힌두교도는 마하라자(대왕), 라자(왕) 등을,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나와브(태수), 왈리(지배자) 등을 사용했다. 하이데라바드 번왕은 무굴 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니잠(통치자)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71][72] 영국 정부는 이들을 모두 "번왕"(prince, 제후)이라고 불렀다.
인도 총독 댈하우지 후작은 "실권의 원리"를 강행하여, 후계자가 없는 번왕국을 영국령에 병합했다.[73][74] 이 정책은 양자 상속을 인정하지 않아 인도 전통과 충돌했다. 아와드, 나그푸르, 잔시, 사타라, 삼발푸르, 탄자부르 등이 이 정책으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인도 대반란 이후, 영국은 번왕국을 분할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세력으로 판단하여 보호 정책으로 전환했다.
번왕국에는 인도 의회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고, 번왕들은 자유롭게 통치했다. 크리슈나 라자 4세나 사야지 라오 가이콰드 3세와 같은 일부 명군이 통치한 번왕국은 근대 국가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배 계급의 사치로 국가 예산이 낭비되는 시대착오적인 체제였다.
2. 3. 인도 대반란과 번왕국의 역할 변화
1857년 인도 대반란 이후, 영국은 번왕국을 분할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괴뢰 세력으로 보고 보호하게 되었다.[73][74] 이로 인해 당시 번왕국에는 인도 의회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고, 번왕들은 자유롭게 통치했다. 크리슈나 라자 4세나 사야지 라오 가이콰드 3세와 같은 명군이 통치한 극소수의 번왕국에서는 근대 국가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배 계급의 사치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이 사용되는 시대에 뒤떨어진 체제였다.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당시 인도 정부가 많은 번왕국을 강제적으로 병합한 이유 중 하나는, 19세기 인도 대반란 당시 대부분의 번왕국이 반란을 진압한 영국 측에 붙었던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2. 4. 인도 독립과 번왕국의 통합
1947년 인도 독립 당시, 인도는 영국령 인도와 번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인도 국민 회의는 번왕국을 인도에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과 V. P. 메논은 번왕국 통치자들을 설득하여 인도에 합병하도록 했다.대부분의 번왕국은 인도나 파키스탄에 평화적으로 병합되었지만,[49]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주나가드 등 일부 번왕국은 예외였다.[50][51] 자와할랄 네루는 번왕국의 존재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1946년에는 어떤 번왕국도 독립 인도의 군대에 대항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59]
-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 통치자가 인도 합병을 결정하면서 카슈미르 분쟁을 야기했다.[50]
- 하이데라바드 번왕국: 독립을 선택했다가 인도의 침공과 병합이 이루어졌다.
- 주나가드: 통치자가 파키스탄에 병합을 선언했지만 인도가 병합했다.[51]
파키스탄 지역에서는 칼라트 칸국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1948년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압둘 카림 왕자의 반란이 발생하여 분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8]
인도 정부는 1971년 헌법 개정을 통해 번왕의 특권을 폐지하고, 사적 지갑 지급을 중단했다.[57]
2. 4. 1.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분쟁은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이다.카슈미르 지역은 주민 대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번왕국의 힌두교도 마하라자 하리 싱은 인도와 파키스탄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무슬림 반군이 봉기했고, 하리 싱은 인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인도 자치령 가입을 조건으로 인도는 군대를 파견했고, 이는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1]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휴전했지만, 카슈미르의 최종 지위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후 카슈미르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여러 차례의 전쟁과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카슈미르 주민들의 인권 침해와 자결권 문제가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1]
3. 번왕국의 지위와 칭호
번왕국 통치자들은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는데, 힌두교 통치자들은 마하라자(대왕), 라자(왕), 데슈무크(향주), 타쿠르(지주) 등의 칭호를 사용했고, 무슬림 통치자들은 나와브(태수, 지사), 왈리(지배자)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하이데라바드 번왕국은 무굴 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니잠(통치자)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71][72]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 모든 칭호를 '번왕'(prince)으로 통일하여 불렀다.
번왕국은 영국과의 군사 보호 조약에 따라 방위와 외교를 제외한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영국의 정치 고문(주재관)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기도 했다.
3. 1. 힌두교 및 이슬람교 통치자의 칭호
인도 통치자들은 마하라자, 라자, 술탄, 나와브, 에미르, 라제, 니잠, 와디야르(마이소르의 마하라자들만 사용, "영주"를 의미) 등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무굴 제국 이전부터 존재했거나, 이러한 오래된 국가에서 분리된 보다 권위 있는 힌두 통치자들은 종종 "라자" 또는 라제, 라이, 라나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 가장 권위 있는 힌두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마하-"("위대한", "대공"과 비교)를 칭호에 접두사로 사용했으며, ''마하라자'', ''마하라나'', ''마하라오''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슬림 통치자들은 거의 모두 무굴 총독이 사용했던 "나와브"(아랍어 존칭 ''나이브'', "대리인")라는 칭호를 사용했다.영국 정부는 인도 통치자들이 영국 군주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의 칭호를 모두 "번왕"으로 통일했다.[12][13]
3. 2. 예포 제도
예포 제도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활동하던 지역, 또는 일반적으로 주와 그 왕조의 주요 통치자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설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의 수장으로서 특정 번왕은 3문에서 21문까지 홀수로 포를 발사하여 경례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포의 수가 많을수록 위신이 높았다.[14] 포의 수는 일반적으로 특정 주의 모든 연속 통치자에게 동일하게 유지되었지만, 때로는 개별 군주에게 개인적인 기준으로 추가 포가 부여되기도 했다. 또한, 통치자는 때때로 자체 영토 내에서만 추가 예포를 받아 준 승진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통치자(약 120명)의 주는 예포 국가로 알려졌다.인도 분할 이후, 우다이푸르의 마하라나는 하이데라바드 주가 새로운 인도 자치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에서 가장 선임 군주로서 하이데라바드 니잠을 대체했으며, "전하"라는 칭호는 9문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통치자에게 확대되었다. 번왕국이 인도 연방에 통합되었을 때 그들의 통치자는 특권과 유지비(사적 수입)을 계속 약속받았다. 그 후, 인도 정부가 1971년에 사적 수입을 폐지했을 때, 비록 많은 가문이 여전히 사회적 위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통치자의 일부 후손은 여전히 지역 또는 국가 정치, 외교, 사업 및 상류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전체 번왕은 인도법에 따라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인도 독립 당시, 단 5명의 통치자, 즉 하이데라바드의 니잠, 마이소르의 마하라자, 잠무 및 카슈미르 주의 마하라자, 바로드의 가이콰드 마하라자, 그리고 과르의 신디아 마하라자만이 21문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보팔의 나바브, 홀카르 마하라자 인도르, 바라트푸르의 마하라자, 우다이푸르의 마하라나, 콜라푸르의 마하라자, 파티알라의 마하라자, 트라방코르의 마하라자는 19문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가장 선임 번왕은 하이데라바드 니잠이었으며, "고귀하신 전하"라는 독특한 칭호와 21문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14] 11문(곧 9문도) 이상의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는 다른 번왕 통치자는 "전하"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더 적은 수의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는 통치자는 특별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인도의 영국 "국왕-황제"는 무굴 제국의 "최고 통치자"이자 계승자로서 '황실' 101문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폐하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이는 유럽 전통에서 왕위 계승자(남성)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발사되는 포의 수이기도 했다.
작위의 등급과 예포의 등급 간에는 엄격한 상관관계가 없었지만, 실제 우선 순위의 척도는 예포의 수였으며, 예포가 많을수록 작위의 등급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예포를 받는 번왕국의 대다수는 최소 9문의 예포를 받았으며, 그 미만은 주로 영국의 보호를 받던 아덴 보호령의 아랍 셰이크들에게 부여되었다.
명성이 낮은 이른바 비예포 봉건국도 많았다. 예포 봉건국은 총 117개였고 번왕국은 500개 이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군주는 예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이들 모두가 소규모 통치자는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수르구자 번왕국은 카라울리 번왕국보다 더 크고 인구도 많았지만, 카라울리 마하라자는 17문의 예포를 받을 자격이 있었고 수르구자 마하라자는 예포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다.[15][16][17]
4. 주요 번왕국
인도 번왕국은 18세기 초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이 분열되면서 독립한 주와 그 주변의 여러 영방들 중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와 군사 보호 조약을 맺고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다.
번왕국은 약 600개에 달했으며, 니잠 번왕국(하이데라바드 번왕국),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처럼 면적이 200000km2가 넘는 곳부터, 수 평방 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곳까지 다양했다. 번왕국의 총면적은 독립 전 인도 전체의 약 45%, 인구는 약 24%를 차지했다.[70]
번왕의 칭호는 다양했는데, 힌두교도는 마하라자(대왕), 라자(왕), 데슈무크(향주), 타쿠르(지주) 등을,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나와브(태수, 지사), 왈리(지배자) 등을 칭했다. 하이데라바드 번왕은 무굴 제국 시대에 유래하는 니잠(통치자)을 칭했다.[71][72]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모두 "번왕"(prince: "제후"의 의미)이라고 불렀다.
번왕국은 영국과의 군사 보호 조약으로 방위·외교권을 제외한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종종 영국이 파견한 정치 고문(주재관)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인도 총독 제임스 램지 (제1대 달후지 후작)의 "실권의 원리"(양자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번왕국 병합 정책)로 인해 영국령에 병합된 번왕국도 많았다.[73][74] 그러나 인도 대반란 이후에는 분할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괴뢰 세력으로서 보호받게 되었다.
당시 번왕국에는 인도 의회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고, 번왕들은 자유롭게 통치했다. 크리슈나 라자 4세나 사야지 라오 가이콰드 3세와 같은 명군이 통치한 극소수의 번왕국에서는 근대 국가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배 계급의 사치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이 사용되는 시대에 뒤떨어진 체제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번왕국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75] 주나가드 번왕국은 인도가 파키스탄 내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강제 병합 후 주민 투표로 인도 귀속이 결정되었고, 니잠 번왕국은 폴로 작전으로 인도에 강제 병합되었다.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의 귀속 문제는 카슈미르 분쟁으로 이어져 현재도 계류 중이다. 인도 정부가 많은 번왕국을 강제 병합한 것은 인도 대반란 당시 영국 측에 붙었던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유사한 지배 체제는 종교·문화가 다른 미얀마(버마)에서도 행해졌으며, 현재의 카렌 주, 카친 주, 샨 주 등 소수 민족 거주 지역에 번왕국이 건국되었다. 미얀마의 번왕국은 독립 후에도 일정한 지배력을 유지했지만, 1962년 네윈의 군사 쿠데타로 버마식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자 정부군에 의해 지배층에서 배제되었다. 샨 주 등 일부 번왕국은 구 버마 공산당 등의 신흥 반정부 세력에 의해 축출되기도 했다.
4. 1. 인도 지역
인도 독립 당시의 번왕국은 대부분 무굴 제국의 붕괴 이후에 형성되었다. 많은 번왕국은 인도에 대한 오랜 외부 이주 기간으로 인해 외래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일부는 하이데라바드 통치자(튀르크족), 보팔 통치자(아프간족) 및 잔지라 통치자(아비시니아인) 등이었다. 힌두 왕국 중 대부분의 통치자는 크샤트리아였다. 라지푸트 국가와 산발적인 남인도 왕국만이 무굴 제국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7]번왕국 이름 | 면적(제곱마일) | 1941년 인구 | 현재 주(州) | 통치자의 칭호, 민족, 종교 | 통치자에 대한 예포 |
---|---|---|---|---|---|
-- 잠무 카슈미르 | 약 218777.80km2 | 4,021,616 | 잠무 카슈미르 | 마하라자, 도그라, 힌두교 | 21 |
하이데라바드 | 약 214185.77km2 | 16,338,534 | 텔랑가나, 마하라슈트라, 카르나타카 | 니잠, 튀르크, 이슬람교 | 21 |
칼라트 | 약 189788.21km2 | 250,211 | 발루치스탄, 파키스탄 | 칸 또는 왈리, 발루치, 이슬람교 | 19 |
약 93423.00km2 | 2,125,000 | 라자스탄 | 마하라자, 라토르, 힌두교 | 17 | |
마이소르 | 약 76295.49km2 | 7,328,896 | 카르나타카 | 워데야르 왕조; 마하라자; 칸나다인; 힌두교 크샤트리아 (칸나다어로 우르스/아라스) | 21 |
괄리오르 | 약 68367.58km2 | 4,006,159 | 마디아프라데시 | 마하라자, 마라타, 힌두교 | 21 |
-- 비카네르 | 약 60390.45km2 | 936,218 | 라자스탄 | 마하라자, 라토르, 힌두교 | 17 |
-- 바하왈푸르 | 약 45909.90km2 | 1,341,209 | 펀자브 (파키스탄) | 나와브 아미르, 아바스 왕조, 이슬람교 | 17 |
-- 자이살메르 | 약 41698.60km2 | 76,255 | 라자스탄 | 마하라자, 바티, 힌두교 | 15 |
-- 자이푸르 | 약 40406.20km2 | 2,631,775 | 라자스탄 | 마하라자, 카츠와하, 힌두교 | 17 |
-- 바스타르 | 약 33830.26km2 | 306,501 | 차티스가르 | 마하라자, 카카티야 - 반지, 힌두교 | - |
4. 2. 파키스탄 지역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에 발루치스탄 지역에는 마크란, 카란, 라스 벨라, 칼라트 4개의 번왕국이 있었다. 처음 세 나라는 파키스탄에 병합되었다.[63][64][65][66] 그러나 네 번째 번왕국인 칼라트의 아흐마드 야르 칸은 칼라트 칸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모든 번왕국에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였다.[67] 칼라트 번왕국은 1948년 3월 27일에 병합될 때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아흐마드 야르 칸이 병합 문서에 서명하자 그의 형제인 압둘 카림 왕자는 1948년 7월 형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반란이 발생했다.[68]바하왈푸르는 1947년 10월 5일 펀자브 에이전시에서 파키스탄에 합류했다. 북서 변경 주 번왕국 에이전시의 번왕국에는 디르, 스와트, 치트랄 에이전시 그리고 암과 풀라의 정치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하자라의 부청장이 포함되었다. 이 국가들은 영국의 독립과 함께 파키스탄에 합류했다.
번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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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왈푸르 번왕국 |
카이르푸르 번왕국 |
카라트 번왕국 |
라스 베라 번왕국 |
마크란 번왕국 |
암브 번왕국 |
치트랄 번왕국 |
디르 번왕국 |
스와트 번왕국 |
훈자 번왕국 |
나가르 번왕국 |
발루치스탄 번왕국 |
신드 번왕국 |
칼라트 번왕국 |
초리스타안 번왕국 |
시크 번왕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