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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노예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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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노예 전쟁은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예 반란이다.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검투사들의 탈주로 시작되었으며, 가혹한 대우와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배경으로 했다. 반란군은 처음에는 로마의 토벌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전쟁은 로마 공화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노예 제도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스파르타쿠스는 억압받는 민중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며, 근대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2. 로마 공화정의 노예제

로마 공화국의 영토 확장 (기원전 510년 - 기원전 40년경)


고대 로마의 로마 공화정 시대에 노예는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노예는 외국 상인과의 매매, 군사 정복을 통한 외국인 노예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로마 노동력에 충원되었다.[1] 로마는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정복 전쟁을 활발히 벌여,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노예가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로마 경제로 유입되었다.[2]

목걸이를 걸고 로마 병사에게 연행되는 전쟁 포로. 그들은 노예 시장에서 팔릴 운명이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노예는 가혹하고 억압적인 대우를 받았다.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는 사람이 아닌 재산이었다. 소유주는 법적 처벌 없이 노예를 학대하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다. 노예의 등급과 유형은 다양했지만, 가장 낮은 등급의 노예(밭과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는 고된 육체 노동에 시달렸다.[4]

기원전 3세기 후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기원전 2세기에도 영토 확장을 위한 대외 전쟁에 매진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제3차 포에니 전쟁, 고대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 전쟁, 소아시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각지에 파견된 로마 군의 핵심은 중장 보병이었으며, 그 담당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 시민이자 중소 자작농민이었다. 그러나 잦은 종군으로 인해 농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점차 토지를 포기하게 되었다.

원로원 계급과 에퀴테스(기사 계급)는 이러한 토지를 흡수하여 대토지 소유제를 구축해 나갔다. 클라우디우스 법에 의해 대외 전쟁에서 얻은 자본상업 활동 투자가 금지되었던 원로원 의원은 캄파니아 등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토지를 투자처로 선택했다. 에퀴테스는 상업 활동을 하면서도 농지를 투자처로 선택했다. 그들은 로마가 정복한 갈리아, 게르마니아, 트라키아 등에서 대량의 노예를 수입하여[65] 라티푼디움을 발전시켰다.

노예 인구의 규모와 억압적인 대우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35년과 기원전 104년에 제1차와 제2차가 시칠리아에서 발발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를 심각한 내란으로 간주하면서도 공화국에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제3차 노예 전쟁의 발발로 인해 바뀌게 된다.

2. 1. 노예의 종류와 역할

고대 로마에서 노예는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군사적 확장으로 정복된 피정복민이나 야만족을 노예로 삼았으며, 노예의 수는 대략 자유민의 30~45%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예는 그리스어나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 회화 및 조각 등 숙련 기술자, 검투사, 가사 노동, 라티푼디움 농장 노동 등 다양한 일을 담당했다.[204]

로마에서 노예는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계층이 매우 다양하였다. 또한 로마에서는 일정 조건의 해방 노예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노예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204]

2. 2. 노예 해방과 로마 시민권

로마에서는 일정 조건을 충족한 해방 노예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가 있었다.[204] 이는 노예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3.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군은 전성기에 12만 명에서 2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97] 노예군의 구성원은 검투사, 목축 노예(소치기와 양치기), 가내 노예와 농업 노예, 수공업 노예 외에도 빈농, 몰락한 자유민, 로마 군단 탈영병 등 다양했다.[98] 민족적으로는 게르만족, 켈트족(갈리아인), 스코르디스키, 트라키아인, 이탈리아인 등이 있었다.[100]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노예군은 엄격한 군기를 유지했으며, 스파르타쿠스는 약탈품을 평등하게 분배하고 금은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다.[101] 살루스티우스 또한 스파르타쿠스가 불필요한 폭행과 약탈을 금지했다고 전한다.[102]

노예군의 목적에 대해 아피아누스와 플로루스는 로마 진군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했지만,[103] 이는 당시 로마 시민들이 느꼈던 공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04]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갈리아 키살피나까지 북상하여 동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원했을 뿐이라고 기록했다.[106]

몸젠이나 A.W. 미슈린을 비롯한 근현대 많은 연구자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는 스파르타쿠스파와 남이탈리아에 머물며 약탈을 계속하려는 크릭수스파로 탈주 노예들이 분열되었다고 주장한다.[105]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러한 분열은 실재하지 않았고 지역 분담에 따른 별도 행동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108]

3. 1. 반란의 배경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로마는 정복 전쟁을 활발히 벌이면서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많은 노예를 유입시켰다.[2] 이들 중 상당수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광산과 농지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3]

로마 공화정 시대에 노예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법적 제약 없이 학대받았다. 특히 농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받았다.[4] 이러한 억압과 대규모 노예 유입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제1차 (기원전 135년)과 제2차 (기원전 104년) 노예 전쟁이 시칠리아에서 일어났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검투사들의 탈주와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친 후 주변 농장 노예들이 합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204]

로마는 기원전 3세기 후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후에도 제3차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로마-시리아 전쟁 등 대외 전쟁을 계속했다. 잦은 전쟁으로 중소 자작농민들은 토지를 잃었고,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기사 계급)는 이 토지를 흡수하여 라티푼디움이라 불리는 대토지 소유제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갈리아, 게르마니아, 트라키아 등에서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하여[65]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노예의 억압적인 대우와 집중적인 사용은 결국 제3차 노예전쟁으로 이어졌다.

3. 2. 반란의 시작: 카푸아 봉기 (기원전 73년)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74명의 검투사들이 집단 탈주하여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쳤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 크릭수스는 갈리아 출신이었다.[8] 이들은 로마 군단이 아닌 3,000명의 토벌군을 격파했고, 이 소문으로 주변 농장의 노예들이 합류했다.[7] 캄파니아 지방은 대농장이 많아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검투사 군단에 합세한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 시대에 검투사 경기는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검투사 훈련 학교(''루디'')가 세워졌고,[5] 이 학교에서는 전쟁 포로와 노예로 간주된 사형수에게 검투 기술을 가르쳤다.[6] 기원전 73년, 렌툴루스 바티아투스 소유의 카푸아 학교에 있던 약 200명의 검투사들이 탈출을 계획했다. 음모가 발각되자, 약 70명이 부엌 도구("칼과 꼬챙이")를 사용하여 탈출했고, 검투사 무기와 갑옷이 실린 마차를 빼앗았다.[7]

탈출한 검투사들은 지도자로 크릭수스와 오이노마우스, 스파르타쿠스를 선택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군단에서 노예로 전락한 트라키아 보조병이거나 군단에 포로로 잡힌 인물이라고 전해진다.[8] 스파르타쿠스의 국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트라에스''는 로마의 검투사 유형 중 하나였으므로 "트라키아인"은 그가 훈련받은 검투사 전투 스타일을 지칭할 수도 있다.[9]

이들은 카푸아에서 파견된 소규모 병력을 격파하고, 검투사 무기와 군사 장비로 무장했다.[12] 카푸아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다른 많은 노예들을 합류시켰으며, 베수비오 산의 방어 가능한 위치로 물러났다.[13]

로마 당국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 지휘 아래 2개 정규군단을 파견했으나, 이들도 노예 반란군에 격파당했다. 노예군은 로마군의 장비로 무장을 보강했고, 많은 노예들이 새로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병력이 늘어났다. 기원전 73년 겨울, 스파르타쿠스는 늘어난 반란군을 조직화하고 훈련시켰다.

3. 3. 법무관 군대의 패배

로마는 처음에 이 반란을 단순한 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가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했다. 글라베르는 정규 로마 군단이 아닌, "급하게 임의로 징집된" 3,000명의 병력을 모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이 사건을 전쟁이 아닌 강도 공격과 같은 약탈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다. 글라베르의 군대는 베수비오 산에서 노예들을 포위하고 산에서 내려가는 유일한 길을 차단하여, 노예들이 굶주림으로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가용한 현지 도구를 활용하고, 훈련된 로마 보병에 맞서 기발하고 비정통적인 전술을 사용했다.[16] 스파르타쿠스의 부하들은 베수비오 산 비탈의 덩굴과 나무로 밧줄과 사다리를 만들어, 글라베르 군대 반대편 산 절벽에서 로프 하강하여 글라베르의 병력을 전멸시켰다.[17]

이후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휘하의 두 번째 원정이 파견되었다. 바리니우스는 휘하 장교 푸리우스와 코시니우스의 지휘하에 병력을 분산시켰다. 푸리우스가 약 2,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지만, 나머지 병력의 규모나 원정대의 구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병력 역시 노예 군대에 패배했고, 코시니우스는 사망했으며, 바리니우스는 거의 체포될 뻔했고, 군대의 장비는 노예들에게 빼앗겼다.[18] 이러한 승리로 더 많은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 군대에 합류했고, "이 지역의 많은 목동양치기들"도 합류하여 그들의 수는 약 70,000명으로 늘어났다.[19]

3. 4. 노예군의 확대와 조직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74명의 검투사들이 탈주하여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쳤다. 이들의 승리 소식이 퍼지자, 캄파니아 지방의 대농장에 있던 노예들이 합류하였다.[76] 캄파니아 지방은 로마 귀족들의 별장이 많아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로마 당국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가 이끄는 2개 정규군단을 파견했으나, 이들마저 노예 반란군에게 격파당했다. 이로 인해 더 많은 노예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병력이 크게 늘어났다.

기원전 73년 겨울, 스파르타쿠스는 급격히 늘어난 반란군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다.[76]

4. 노예군의 목표와 분열

기원전 73년 말,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는 로마 군대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 군대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3차 노예전쟁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노예들의 동기와 목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전쟁에 대해 기록한 역사가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22]

많은 대중적인 기록에서는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 했고, 크릭수스 휘하의 노예들은 이탈리아 남부에 남아 약탈을 계속하려 했다는 분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플로루스가 노예들이 약탈한 지역으로 언급한 투리메타폰툼놀라와 누케리아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다.[22]

루키우스 겔리우스는 크릭수스가 이끄는 약 3만 명의 병력을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주력 부대와는 별개로 묘사했다.[22] 플루타르코스는 일부 탈출 노예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도망가는 대신 이탈리아를 약탈하려 했다고 기록했다.[23] 이러한 분열은 고전 자료에 의해 반박되지는 않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소설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부패한 로마 사회를 개혁하고 로마의 노예 제도를 끝내기 위해 투쟁하는 자유 투사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 역사가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며, 반란 노예들의 목표가 공화국의 노예 제도를 끝내는 것이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반란 지도자들의 잔혹 행위 역시 노예 제도를 종식시키려는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24]

사건 발생 후 불과 몇 년 뒤에 기록을 남긴 고전 역사가들조차 스파르타쿠스의 동기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아피아누스와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로 진군하려 했다고 기록했지만,[25] 이는 로마인들의 공포심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만약 스파르타쿠스가 로마로 진군하려 했다면, 그는 나중에 이 목표를 포기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단지 알프스 이남 갈리아로 도망쳐 그의 부하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했다고 기록했다.[23]

독일의 몸젠이나 소련의 A.W. 미슈린을 비롯한 근현대 많은 연구자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 주장하는 스파르타쿠스파와 남이탈리아에 머물며 약탈을 계속하려 주장하는 크릭소스파로 탈주 노예들이 분열되었다고 주장한다.[105] 플루타르코스도 탈주 노예의 일부가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기보다는 이탈리아를 약탈하는 것을 원했다고 언급했으며,[106]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의 저작에는 크릭소스파 사람들은 "적을 향해 나아가 싸우기를 원했다"는 기술이 있다.[107] 분열이 발생한 것 자체는 고전 사료와 모순되지 않지만 이를 지지하는 직접적인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금까지 통설로 여겨졌던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소스의 불화로 인한 분열은 존재하지 않고, 지역 분담에 따른 별도 행동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108]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노예군의 분열이 민중 봉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5. 집정관 군대의 패배 (기원전 72년)

기원전 72년 봄, 노예군은 숙영지에서 나와 북쪽 갈리아로 향했다. 로마 원로원은 법무관 군단이 패배하고 반란군의 규모가 커지자, 그 해의 집정관 푸블리콜라와 클로디아누스를 모두 토벌에 투입했다.[32] 푸블리콜라의 로마군은 크릭수스가 이끄는 노예군 3,000명을 가르가노 산에서 만나 3분의 2를 죽였고, 크릭수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32]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아드리아 해를 따라 북상했다.

아피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약간 달라 스파르타쿠스의 행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집정관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거나 따돌리고 로마군에 엄청난 손실을 가했다.[32] 피세눔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노예군이 집정관의 군대를 다시 한번 격파한 후 북쪽으로 계속 향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내려와 스파르타쿠스를 저지하려 했으나 역시 패배했다고 전한다.[123] 그런데 갑자기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아피아누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32] 충분히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스파르타쿠스가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이유는 알 수 없다.

6.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등장 (기원전 71년)

기원전 71년 초, 스파르타쿠스와 그가 이끄는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계속되는 반란에 위기감을 느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진압 임무를 맡겼다.[32] 크라수스는 술라 휘하에서 사령관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35]

크라수스는 프라에토르 직위를 받고, 기존에 겔리우스와 렌툴루스가 지휘하던 2개 군단 외에 6개의 새로운 군단을 추가로 배정받았다. 이로써 그는 약 32,000~48,000명의 훈련된 로마군과 보조병을 거느리게 되었다.[36] 크라수스는 군대에 가혹하고 잔혹한 규율을 적용했으며, 군단 내 데시메이션 처벌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아피아노스는 크라수스가 이러한 처벌을 언제 시행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 간의 첫 대결에서 무미우스가 패배한 후 군단병 50명을 데시메이션 처벌했다고 기록한다.[37][38] 이러한 엄격한 통제는 "그가 적보다 그들에게 더 위험했다"는 것을 증명했고, 로마군의 전투력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37]

6. 1.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대결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와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 다급해진 원로원은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8개 군단을 주며 반란군 토벌을 맡겼다. 크라수스는 반란 토벌로 공을 세우고 싶어 매우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반란군을 응징했다.[3] 첫 전투에서 패배하자 적에게 등을 보인 군단병 60명을 뽑아 동료들이 죽이게 했고, 군단병들은 크라수스가 적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했다고 한다.[3]

크라수스의 잔인함 덕분인지 로마군은 노예군을 상대로 승기를 잡아 노예군을 험준한 산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스파르타쿠스는 키리키아 해적과 협상하여 시칠리아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도망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고 스파르타쿠스는 고립되었다.[3]

7. 전쟁의 종결: 실라루스 강 전투 (기원전 71년)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와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 로마 원로원법무관 크라수스에게 8개 군단을 주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크라수스는 잔혹한 방법으로 반란군을 억압했고, 로마군은 노예군을 산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물리치고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루쿨루스도 마케도니아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상륙했다. 크라수스는 이들에게 공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 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크라수스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2] 또한 마케도니아의 집정관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의 지휘 하에 증원군을 보냈다.[43] 폼페이우스 군단이 북쪽에서, 루쿨루스 군대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면서,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증원군과 함께 도착한 장군에게 공이 돌아갈 것을 깨닫고 서둘러 분쟁을 끝내고자 했다.[44]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크라수스와 협상하려 했으나,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했다.[45]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의 요새를 뚫고 브루티움 반도로 향했지만, 크라수스 군단이 뒤쫓았다.[46] 크라수스 군단은 간니쿠스와 카스투스가 지휘하는 반군 일부를 분리하여 12,300명을 죽였다.[47]

스파르타쿠스는 많은 병력을 잃었고, 크라수스 군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루키우스 퀸티우스라는 기병 장교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탈출한 노예들에게 전멸당했다.[48] 반란 노예들은 전문적인 군대가 아니었고 한계에 도달하여 더 이상 도망가려 하지 않았고, 집단으로 크라수스 군단을 독립적으로 공격했다.[49]

규율이 무너지자, 스파르타쿠스는 실라루스 강 전투에서 군대를 돌려 군단의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이 마지막 저항에서 스파르타쿠스 군대는 패주했고, 대부분 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50] 모든 고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쿠스도 전장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51]

7. 1. 폼페이우스의 역할

폼페이우스는 이 전쟁에서 직접 스파르타쿠스와 대적하지 않았지만 잔당을 소탕하는 데 협력했다.[1] 크라수스는 전쟁의 직접적인 승리자로 로마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고 대부분의 노예군을 학살했다.[1] 살아남은 노예군 6,000여 명도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아피아 가도변에 모두 십자가형을 당했다.[1] 십자가는 수십km에 달했다고 한다.[1] 이로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로마에서의 위상은 더욱 커졌다.[1]

8. 전쟁의 결과와 영향

폼페이우스는 이 전쟁에서 직접 스파르타쿠스와 맞서 싸우지 않았지만, 잔당 소탕에 협력했다. 크라수스는 전쟁의 승리자로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고, 대부분의 노예군을 학살했다. 살아남은 노예 6,000여 명은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아피아 가도변에 모두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십자가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했다고 한다.[45] 이로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로마 내 위상은 더욱 커졌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는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노예는 외국 상인과의 매매나 군사 정복을 통해 로마로 유입되었다.[1] 로마 공화정 시대에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법적으로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소유주는 노예를 학대하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4]

노예 인구의 규모와 억압적인 대우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제1차 및 제2차 노예 전쟁이 시칠리아에서 발발했지만, 로마 중심부에서는 노예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차 노예 전쟁은 이러한 인식을 바꾸었다.

반란군은 크라수스에 의해 전멸했다. 폼페이우스 군대는 스파르타쿠스 군대와 직접 교전하지 않았지만, 북쪽에서 이동해 온 그의 군단은 도망치는 반란군 약 5,000명을 생포해 모두 죽였다.[52]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가 노예를 정복했지만, 자신이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하며 크라수스의 적대감을 샀다.[53]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반란 진압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 두 사람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해산을 거부하고 로마 외곽에 주둔했다. 두 사람은 기원전 70년 로마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고, 폼페이우스는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55][56]

이 전쟁이 로마 노예에 대한 태도, 사용 및 법적 권리의 변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예 전쟁의 종결은 로마에서 노예가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되던 시대의 종말과 로마 사회와 법에서 노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시작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란은 로마인들을 뒤흔들었고, "순수한 공포심에 휩싸여 이전보다 노예를 덜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 같다".[57] 라티푼디움의 부유한 소유주들은 농업 노예의 수를 줄이고, 소작 계약으로 과거에 토지를 잃었던 자유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58] 아우구스투스 통치(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가 끝나면서, 트라야누스 통치(기원후 98–117년)까지 로마의 주요 정복 전쟁은 중단되었고, 군사 정복을 통한 저렴한 노예의 공급도 끝났다. 이러한 평화의 시대는 농업 영지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노동자로 사용하는 것을 더욱 촉진했다.

로마 노예의 법적 지위와 권리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기원후 41–54년 통치) 시대에, 늙거나 병든 노예를 죽이는 것을 살인 행위로 만들고, 그러한 노예가 소유주에게 버려지면 해방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59]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기원후 138–161년 통치) 치하에서 법은 노예의 권리를 더욱 확대하여, 노예를 살해한 소유주에게 책임을 물었고, 노예가 학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 노예의 판매를 강요했으며, 노예가 호소할 수 있는 중립적인 제3자를 제공했다.[60] 이러한 법적 변화는 제3차 노예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보기에는 너무 늦게 일어났지만, 수십 년 동안 진화한 로마의 노예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법적으로 성문화한 것이다.

제3차 노예 전쟁은 마지막 노예 전쟁이었고, 로마는 이 정도 규모의 노예 봉기를 다시 겪지 않았다.[61]

9. 평가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 노예로서 억압받는 민중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특히, 근대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졌다.[184][187] 카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칭송했다.[184]

스파르타쿠스를 높이 평가한 카를 마르크스.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부당한 억압에 대한 무력 투쟁으로 보고, "역사상 유일하게 올바른 전쟁"이라고 평가했다.[178] 18세기 말, 아이티 혁명을 이끈 투생 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렸다.[181] 반면, 헤겔은 제3차 노예 전쟁을 "혼란"으로 평가했고, 몸젠은 스파르타쿠스를 "도적의 우두머리"라고 불렀다.[182]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 카를 리프크네히트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187] 이들은 독일 공산당으로 발전했지만, 1919년 무장 봉기(스파르타쿠스단 봉기)에 참여했다가 궤멸되고,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살해되었다.[187]

레닌은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억압받는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평가했다.[188] 스탈린 체제 하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계급 투쟁으로 해석했다.[189]

냉전 시대 미국에서는 스파르타쿠스를 경계했지만, 매카시즘 속에서도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스파르타쿠스''가 출판되었고,[200]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 ''스파르타쿠스''로 제작되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했다.[201][202]

냉전 종결 후,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스파르타쿠스를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언급했다.[203]

9. 1. 현대적 의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오늘날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비록 제3차 노예 전쟁은 실패했지만, 노예들의 동기와 목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는 영화, 소설,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24]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스파르타쿠스''는 커크 더글러스 주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로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의 각본은 매카시즘 시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달튼 트럼보가 맡았으며, 영화의 성공은 블랙리스트 붕괴에 기여했다. 영화 속 "나는 스파르타쿠스다!"라는 대사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널리 인용되었다.

이후 패스트의 소설은 2004년 USA Network에서 고란 비슈니치 주연의 TV 영화로 각색되었고, 2010년부터 2013년까지 Starz 채널에서 TV 시리즈 ''스파르타쿠스''가 방영되었다.[62][63] 이 외에도 BBC의 다큐 드라마 ''영웅과 악당''(2007~2008), 히스토리 채널의 ''바바리안 라이징''(2016), 넷플릭스의 ''로마 제국'' 시즌 2 등 다양한 작품에서 스파르타쿠스와 제3차 노예 전쟁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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