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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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 지휘관으로, 엘라를 암살하고 바아사 가문을 몰락시킨 인물이다. 그는 7일 동안 통치했으나, 오므리의 반란으로 인해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지므리의 쿠데타는 군사적,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발생했으며, 그의 이름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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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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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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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 이스라엘 왕국 (사마리아) |
통치 기간 | 기원전 885년 |
이전 통치자 | 엘라 |
다음 통치자 | 딥니와 오므리 |
왕조 | 짐리 왕조 |
의미 | 칭찬할 만한 |
2. 혈통 및 배경
루이 긴즈버그에 따르면, 지므리는 시므온 지파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였다. 이 지파는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
J. H. 앨런은 ''유다의 왕홀과 요셉의 장자권''(1902)에서 지므리가 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세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다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유다 지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앨런의 추측은 역대기를 바탕으로 했다. 역대기 1장 2절 6절에는 "지므리"라는 또 다른 인물이 세라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으로 나열되어 있다.[3] 앨런은 세라의 아들 지므리가 지므리 왕의 조상과 이름이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3]
[4]
이시다 토모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파 간의 근본적인 경쟁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5] 성경적 서술에서 여로보암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바아사 가문은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다.[5] 오므리 왕조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르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두 번째 궁전을 유지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통제를 받았다. 이시다는 이 이야기가 오므리 자신이 잇사갈 지파의 구성원임을 시사한다고 본다.[5] 암살당한 엘라 왕과 오므리는 따라서 "공통된 지파적 기원"을 공유했고, 아마도 친족이었을 것이다. 지므리에 대한 오므리와 잇사갈 지파의 반대는 지므리가 그들의 지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5]
이시다는 지므리와 그의 계승자 디브니 모두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의 후보로 보았다.[5] 그러나 그는 또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데, 디브니는 아마르나 서한 (기원전 14세기)에 언급된 기나 (Beth-haggan으로도 알려짐)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서술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 지파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디브니는 대신 므낫세 지파의 왕위 후보일 수 있다.[5]
족보학자 데이비드 휴즈는 지므리와 디브니가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이고 서로 형제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6]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통치자 중 한 명인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의 후손이라고 추측했다.[6] 호세아와 아사시야는 역대기 (역대기상 27:20)에 짧게 언급된 인물로, 호세아는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다.[4]
2. 1. 시므온 지파 출신설
루이 긴즈버그에 따르면, 지므리는 시므온 지파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였다. 이 지파는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J. H. 앨런은 ''유다의 왕홀과 요셉의 장자권''(1902)에서 지므리가 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세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다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유다 지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앨런은 역대기를 바탕으로, 역대기 1장 2절 6절에 나오는 세라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인 "지므리"가 지므리 왕의 조상과 이름이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3]
[4]
이시다 토모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파 간의 근본적인 경쟁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5] 성경적 서술에서 여로보암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바아사 가문은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다.[5] 오므리 왕조는 이스르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두 번째 궁전을 유지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통제를 받았다. 이시다는 이 이야기가 오므리 자신이 잇사갈 지파의 구성원임을 시사한다고 본다.[5] 암살당한 엘라 왕과 오므리는 "공통된 지파적 기원"을 공유했고, 아마도 친족이었을 것이다. 지므리에 대한 오므리와 잇사갈 지파의 반대는 지므리가 그들의 지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5]
이시다는 지므리와 그의 계승자 디브니 모두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의 후보로 보았다.[5] 그러나 그는 또한 디브니는 아마르나 서한 (기원전 14세기)에 언급된 기나 (Beth-haggan으로도 알려짐)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성경적 서술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 지파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디브니는 대신 므낫세 지파의 왕위 후보일 수 있다.[5]
족보학자 데이비드 휴즈는 지므리와 디브니가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이고 서로 형제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6]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통치자 중 한 명인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의 후손이라고 추측했다.[6] 호세아와 아사시야는 역대기 (역대기상 27:20)에 짧게 언급된 인물로, 호세아는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다.[4]
2. 2. 세라의 후손설
루이 긴즈버그에 따르면, 지므리는 시므온 지파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였다. 이 지파는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J. H. 앨런은 ''유다의 왕홀과 요셉의 장자권''(1902)에서 지므리가 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세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다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유다 지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앨런의 추측은 역대기를 바탕으로 했다. 역대기 1장 2절 6절에는 "지므리"라는 또 다른 인물이 세라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으로 나열되어 있다.[3] 세라의 아들들은 지므리, 에단, 헤만, 갈골, 다라였으니 모두 다섯이었다.[4] 앨런은 세라의 아들 지므리가 지므리 왕의 조상과 이름이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3]
이시다 토모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파 간의 근본적인 경쟁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5] 여로보암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바아사 가문은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다.[5] 오므리 왕조는 이스르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곳에 두 번째 궁전을 유지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통제를 받았다. 이시다는 이 이야기가 오므리 자신이 잇사갈 지파의 구성원임을 시사한다고 보며, 암살당한 엘라 왕과 오므리는 "공통된 지파적 기원"을 공유했고, 아마도 친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므리에 대한 오므리와 잇사갈 지파의 반대는 지므리가 그들의 지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5]
이시다는 지므리와 그의 계승자 디브니 모두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의 후보로 보았다.[5] 그러나 그는 또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데, 디브니는 아마르나 서한 (기원전 14세기)에 언급된 기나 (Beth-haggan으로도 알려짐)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서술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 지파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디브니는 대신 므낫세 지파의 왕위 후보일 수 있다.[5]
족보학자 데이비드 휴즈는 지므리와 디브니가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이고 서로 형제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6]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통치자 중 한 명인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의 후손이라고 추측했다.[6] 호세아와 아사시야는 역대기 (역대기상 27:20)에 짧게 언급된 인물로, 호세아는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다. ...에브라임 자손 중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4]
2. 3. 에브라임 또는 므낫세 지파 출신설
루이 긴즈버그에 따르면, 지므리는 시므온 지파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였다. 이 지파는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J. H. 앨런은 ''유다의 왕홀과 요셉의 장자권''(1902)에서 지므리가 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세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다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유다 지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앨런은 역대기를 바탕으로 세라의 아들 지므리가 지므리 왕의 조상과 이름이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3] 역대기 1장 2절 6절에는 "지므리"라는 또 다른 인물이 세라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으로 나열되어 있다.[3]
이시다 토모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파 간의 근본적인 경쟁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5] 성경적 서술에서 여로보암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바아사 가문은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다.[5] 오므리 왕조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르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두 번째 궁전을 유지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통제를 받았다. 이시다는 이 이야기가 오므리 자신이 잇사갈 지파의 구성원임을 시사한다고 보며, 암살당한 엘라 왕과 오므리는 "공통된 지파적 기원"을 공유했고, 아마도 친족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지므리에 대한 오므리와 잇사갈 지파의 반대는 지므리가 그들의 지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5]
이시다는 지므리와 그의 계승자 디브니 모두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의 후보로 보았다.[5] 그러나 그는 또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데, 디브니는 아마르나 서한 (기원전 14세기)에 언급된 기나 (Beth-haggan으로도 알려짐)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서술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 지파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디브니는 대신 므낫세 지파의 왕위 후보일 수 있다.[5]
족보학자 데이비드 휴즈는 지므리와 디브니가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이고 서로 형제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6]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통치자 중 한 명인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의 후손이라고 추측했다.[6] 호세아와 아사시야는 역대기 (역대기상 27:20)에 짧게 언급된 인물로, 호세아는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다.
2. 4. 기타 가설
루이 긴즈버그에 따르면, 지므리는 시므온 지파에서 태어난 유일한 군주였다. 이 지파는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2]J. H. 앨런은 ''유다의 왕홀과 요셉의 장자권''(1902)에서 지므리가 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세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다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세라는 베레스의 쌍둥이 형제였으며, 유다 지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앨런의 추측은 역대기를 바탕으로 했다. 역대기 1장 2절 6절에는 "지므리"라는 또 다른 인물이 세라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으로 나열되어 있다.[3] 앨런은 세라의 아들 지므리가 지므리 왕의 조상과 이름이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3]
이시다 토모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조 불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파 간의 근본적인 경쟁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5] 성경적 서술에서 여로보암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바아사 가문은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다.[5] 오므리 왕조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르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두 번째 궁전을 유지했다.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이스르엘은 잇사갈 지파의 통제를 받았다. 이시다는 이 이야기가 오므리 자신이 잇사갈 지파의 구성원임을 시사한다고 본다.[5] 암살당한 엘라 왕과 오므리는 따라서 "공통된 지파적 기원"을 공유했고, 아마도 친족이었을 것이다. 지므리에 대한 오므리와 잇사갈 지파의 반대는 지므리가 그들의 지파의 구성원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5]
이시다는 지므리와 그의 계승자 디브니 모두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의 후보로 보았다.[5] 그러나 그는 또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데, 디브니는 아마르나 서한 (기원전 14세기)에 언급된 기나 (Beth-haggan으로도 알려짐)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 서술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 지파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디브니는 대신 므낫세 지파의 왕위 후보일 수 있다.[5]
족보학자 데이비드 휴즈는 지므리와 디브니가 에브라임 지파의 구성원이고 서로 형제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6]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에브라임 지파의 통치자 중 한 명인 아사시야의 아들 호세아의 후손이라고 추측했다.[6] 호세아와 아사시야는 역대기 (역대기상 27:20)에 짧게 언급된 인물로, 호세아는 다윗 시대의 사람이었다.
3. 치세
지므리는 전차 지휘관이었으며, 아르사의 집에서 엘라가 술을 마시는 동안 티르사에서 엘라 왕과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살해했다.[7] 지므리는 엘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므리는 단 7일 동안만 통치했는데, 군대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 오므리는 티르사를 포위했다.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므리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오므리는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인물인 팁니와의 4년간의 전쟁 후에야 그의 통치를 확고히 했다.[9]
지므리는 선대 왕 엘라의 부하로, 전차대의 절반의 대장이었다. 티르차에서 왕이 술에 취했을 때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으며, 엘라 외에 바아사 (엘라의 아버지)의 일족과 그 친구들을 숙청했다. 그러나 재위 7일 만에, 블레셋인과의 싸움에서 군을 이끌던 최고 사령관 오므리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지므리를 공격했다. 지므리는 도시를 제압당하고, 궁전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9]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모반자'의 대명사화되어, 후의 북이스라엘 왕비(이 시점에서는 태후) 이세벨은 자신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주군 살해자 지므리'라고 욕했다.[10]
또한, 모반자의 대명사 취급의 의미가 아닌 '지므리'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 아시리아 학자 도널드 와이즈먼 교수는 '아마도 아람계 이름일 것이다(마리의 짐리림 참조)'라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11]
3. 1. 쿠데타와 엘라 왕 살해
지므리는 전차 지휘관이었으며, 티르사에서 엘라 왕과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살해했다.[7] 엘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7일 동안만 통치했다. 군대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하고 오므리는 티르사를 포위하자, 지므리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오므리는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인물인 팁니와의 4년간의 전쟁 후에야 통치를 확고히 했다.[7]지므리는 선대 왕 엘라의 부하로, 전차대의 절반의 대장이었다. 티르차에서 왕이 술에 취했을 때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으며, 엘라 외에 바아사 (엘라의 아버지)의 일족과 그 친구들을 숙청했다.[9] 그러나 재위 7일 만에, 블레셋인과의 싸움에서 군을 이끌던 최고 사령관 오므리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지므리를 공격했다. 지므리는 도시를 제압당하고, 궁전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9]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모반자'의 대명사화되어, 후의 북이스라엘 왕비(이 시점에서는 태후) 이세벨은 자신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주군 살해자 지므리'라고 욕했다.[10]
아시리아 학자 도널드 와이즈먼 교수는 '지므리'라는 이름이 아람계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을 제기하였다.(마리의 짐리림 참조)[11]
3. 2. 바아사 가문 숙청
지므리는 전차 지휘관이었으며, 아르사의 집에서 엘라가 술을 마시는 동안 티르사에서 엘라와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살해했다.[7] 지므리는 엘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므리는 단 7일 동안만 통치했는데, 군대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 오므리는 티르사를 포위했다.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므리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오므리는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인물인 팁니와의 4년간의 전쟁 후에야 그의 통치를 확고히 했다.3. 3. 오므리의 반란과 죽음
지므리는 전차 지휘관이었으며, 티르사에서 엘라 왕과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7] 지므리는 바아사 (엘라의 아버지)의 일족과 그 친구들을 숙청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단 7일 동안만 지속되었는데, 군대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오므리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티르사를 포위했고,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므리는 궁전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7][9] 오므리는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인물인 팁니와의 4년간의 전쟁 후에야 그의 통치를 확고히 했다.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그의 이름은 '모반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후의 북이스라엘 왕비(이 시점에서는 태후) 이세벨은 자신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주군 살해자 지므리'라고 욕했다.[10]
아시리아 학자 도널드 와이즈먼 교수는 '지므리'라는 이름이 아마도 아람계 이름일 것이라는 설을 제기했다.(마리의 짐리림 참조)[11]
4. 평가 및 분석
| 쿠데타의 동기 = 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술의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아사는 통치 말년에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왕국 최북단 지역이 아람의 침략 위협에 놓였고, 라마다임(베냐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군사적, 정치적 재앙에 직면하여 바아사 가문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였던 아르자의 저택 안에서 암살당했고, 암살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을 완전히 몰살시켰으며, 예언에 따라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그 지역의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암살 당시 블레셋이 통제하고 있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고, 군대의 부재는 지므리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엘라 왕을 방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므리는 군대가 자신의 쿠데타에 대응하기 전에 왕좌를 확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합법적인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대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했다. 텍스트는 지므리가 군대의 지휘 계통에서 오므리에게 종속되었었고, 여전히 지므리보다 군대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므리와 그의 군대는 디르사로 급히 진군하여 그 도시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도시 방어를 조직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도시는 짧은 포위 공격 후에 함락되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오므리에게 항복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하여 자기 소멸로 죽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집니와의 내전이 이어졌다.
윌리엄 H. 반스는 "왕의 전차의 절반"이라는 구절이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군사 편성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지므리는 유다 왕국에 의한 군사 공격에 쉽게 대응할 수 있는 디르사 도시에 주둔한 전차 편성을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엘라가 암살 당시 사적인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아르자는 궁궐의 감독관으로 집사나 총리의 지위와 동일하다고 언급한다.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에는 엘라의 상속인들로부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절차"였다.
지므리는 성경에서 부칭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반스는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기브돈의 포위에 주목하며, 이스라엘 군대가 24년 동안 이 도시를 간헐적으로 포위했지만 한 번도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아사 가문의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성경은 지므리의 화염 속에서의 죽음을 "비극적인 영웅적" 죽음으로 보며, 그의 자살은 삼손의 자살과 유사성이 있다.
힐렐 I. 밀그램은 지므리의 쿠데타가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왕국의 모든 지배층이 신속하게 처형된 것은 암살 목록을 준비하고 암살단을 고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추론한다. 지므리의 신속한 처형은 반혁명 형성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다. 디르사가 짧은 포위 공격 후 함락된 것은 수도가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없었고, 시민들이 새로운 정권을 방어하는 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워드 F. 캠벨은 지므리와 오므리 왕에 관한 성경 서술에는 예언자가 묘사되지 않고, 신의 개입이나 승인/불승인의 힌트도 없으며, 정부의 전환이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 없이 설명된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로빈 갤러허 브랜치는 성경 텍스트가 지므리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에베드"(노예, 종)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그가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8]
| 성경적 묘사 =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8] 지므리에 대한 배경 정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엘라를 암살하고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마빈 A. 스위니는 지므리의 통치가 7일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다. 엘라는 암살 당시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언급된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을 완전히 몰살시켰으며, 이는 예언자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므리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개와 새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했다.
암살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가 부재했기 때문에 지므리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고, 엘라 왕을 방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오므리는 군대 내에서 지므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와 그의 군대는 디르사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충분한 방어 시간을 갖지 못하고 도시가 함락되자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윌리엄 H. 반스는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군사 편성이 있었으며, 지므리는 디르사에 주둔한 전차 편성을 이끌었다고 해석한다.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 보복을 피하기 위한 일반적인 절차였다. 지므리는 부칭이 없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수 있다.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거나,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수 있다.
반스는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기브돈 포위가 24년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을 들어 바아사 가문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지므리의 죽음을 비겁한 죽음이 아닌 "비극적인 영웅적" 죽음으로 묘사하며, 삼손의 자살과 유사하다고 본다. 열왕기는 지므리가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하지만,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만큼 오래 통치하지 않았다.
반스는 지므리가 찬탈자와 반역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죽음은 비극적인 영웅으로 취급받는 불일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므리의 자살은 고대 서술에서 독특한 것이 아니며,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 등의 죽음과 유사한 설명이 있다. 지므리는 수도를 디르사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고,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힐렐 I. 밀그램은 지므리의 쿠데타가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으며, 왕국의 모든 지배층을 신속하게 처형하기 위해 암살 목록을 준비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지므리는 반혁명의 형성을 막으려 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고, 디르사는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없었다. 지므리의 자살은 패배를 인정하고 적에게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므리의 통치는 갈등 고조의 사건을 나타낸다. 오므리는 왕살해 혐의에서 벗어난 세 번째 이스라엘 왕이 된다.
에드워드 F. 캠벨은 지므리와 오므리에 관한 성경 서술에 예언자나 신의 개입이 묘사되지 않아 정부 전환이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 없이 설명된다고 지적한다. 로빈 갤러허 브랜치는 지므리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회적 지위가 "에베드"(노예, 종)로 표현되어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다고 본다.[8] 엘라는 다윗처럼 전선에서 떨어져 시간을 보냈고, 이는 지므리에게 암살 기회를 제공했다.[8]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8]
| 역사적 의의 =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 지므리의 통치는 7일에 불과했고,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킨 것 외에는 역사적으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기는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였던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으며, 당시 엘라는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한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 전체를 몰살시켰고, 이는 예언자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므리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개와 새의 먹이가 되게 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므리가 엘라를 암살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오므리는 군대를 이끌고 디르사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지므리는 디르사를 수도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으며,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지므리의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수도 있다.
성경은 지므리가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하지만,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만큼 오래 통치하지는 않았다. 지므리의 자살은 사르다나팔루스, 샤마쉬-슘-우킨, 신샤리쉬쿤과 같은 고대 왕들의 자살과 유사하다.
지므리의 쿠데타는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왕족과 지지자들을 신속하게 처형한 것은 반혁명의 형성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8]
| 추가 분석 =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 지므리의 배경 정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그의 통치는 7일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이로 인해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쿠데타의 배경으로 추정된다.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는데, 당시 엘라는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언급된다. 지므리는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키고, 그 시체를 들짐승의 먹이로 방치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 이는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지므리의 쿠데타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므리는 왕을 방어할 군대가 없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여 지므리에 대항했다. 오므리는 군대를 이끌고 디르사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지므리는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부대가 있었으며, 그 중 하나를 지휘했고, 다른 하나는 므깃도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엘라의 암살 당시 상황은, 왕이 사적인 파티에 참석하여 과도하게 술을 마신 틈을 타 지므리가 공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8]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 보복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절차였다.[8]
지므리는 부칭이 없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수 있다.[8]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거나,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가능성이 있으며, 야훼가 지므리의 수호신이었을 수도 있다.[8]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언급된 기브돈 포위는, 24년 전 이스라엘의 나답 통치 시기에도 있었으며, 이는 바아사 가문 통치 하 이스라엘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8]
지므리의 죽음은 삼손의 자살과 유사하게 비겁한 죽음이 아닌 비극적 영웅적 죽음으로 묘사된다.[8]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받지만,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때문에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8]
바티칸 사본의 그리스어 텍스트에는 지므리의 통치 기간이 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야밈"이 "날" 또는 "년"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로 보인다.[8]
지므리는 찬탈자이자 반역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서술에서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는 불일치가 나타난다.[8] 지므리의 자살은 전설적인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처럼 고대 서술에서 독특한 것이 아니다.[8]
지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긴 오므리 이전, 디르사를 수도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다.[8]
지므리의 쿠데타는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암살 목록을 준비하고 암살단을 고용하여 왕족과 지지자들을 신속하게 처형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8] 지므리는 반혁명의 형성을 막기 위해 신속한 처형을 단행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고, 군대의 분노를 일으켜 오므리가 이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8]
디르사는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부족했고, 시민들은 새로운 정권을 방어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저항으로 함락되었을 것이다.[8] 지므리는 디르사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벧엘 성지 순례를 할 시간이 없었다.[8]
지므리의 통치는 갈등 고조의 사건을 나타내며, 이전 왕위 찬탈자들보다 더 무자비하고 피에 굶주린 인물로 묘사된다.[8] 지므리의 자살은 오므리가 왕살해 혐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8]
지므리와 오므리에 관한 성경 서술은 예언자나 신의 개입 없이, 이스라엘 군대 자체가 행동을 주도하여 두 왕을 권력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8]
지므리는 성경에서 "에베드"(노예, 종)라는 용어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8] 엘라는 다윗처럼 전선에서 떨어져 자신의 시간을 술과 파티에 쏟았고, 이는 지므리에게 암살 기회를 제공했다.[8]
지므리는 사울, 아히도벨, 가롯 유다와 같이 자살을 저지른 성경 인물 중 하나이다.[8]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잠언의 왕이 된 종들에 대한 비난과 연결되기도 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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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쿠데타의 동기
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술의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아사는 통치 말년에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왕국 최북단 지역이 아람의 침략 위협에 놓였고, 라마다임(베냐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군사적, 정치적 재앙에 직면하여 바아사 가문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였던 아르자의 저택 안에서 암살당했고, 암살 당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을 완전히 몰살시켰으며, 예언에 따라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그 지역의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암살 당시 블레셋이 통제하고 있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고, 군대의 부재는 지므리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엘라 왕을 방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므리는 군대가 자신의 쿠데타에 대응하기 전에 왕좌를 확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합법적인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대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선출했다. 텍스트는 지므리가 군대의 지휘 계통에서 오므리에게 종속되었었고, 여전히 지므리보다 군대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므리와 그의 군대는 디르사로 급히 진군하여 그 도시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도시 방어를 조직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도시는 짧은 포위 공격 후에 함락되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오므리에게 항복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하여 자기 소멸로 죽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집니와의 내전이 이어졌다.
윌리엄 H. 반스는 "왕의 전차의 절반"이라는 구절이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군사 편성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지므리는 유다 왕국에 의한 군사 공격에 쉽게 대응할 수 있는 디르사 도시에 주둔한 전차 편성을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엘라가 암살 당시 사적인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아르자는 궁궐의 감독관으로 집사나 총리의 지위와 동일하다고 언급한다.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에는 엘라의 상속인들로부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절차"였다.
지므리는 성경에서 부칭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반스는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기브돈의 포위에 주목하며, 이스라엘 군대가 24년 동안 이 도시를 간헐적으로 포위했지만 한 번도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아사 가문의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성경은 지므리의 화염 속에서의 죽음을 "비극적인 영웅적" 죽음으로 보며, 그의 자살은 삼손의 자살과 유사성이 있다.
힐렐 I. 밀그램은 지므리의 쿠데타가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왕국의 모든 지배층이 신속하게 처형된 것은 암살 목록을 준비하고 암살단을 고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추론한다. 지므리의 신속한 처형은 반혁명 형성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다. 디르사가 짧은 포위 공격 후 함락된 것은 수도가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없었고, 시민들이 새로운 정권을 방어하는 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워드 F. 캠벨은 지므리와 오므리 왕에 관한 성경 서술에는 예언자가 묘사되지 않고, 신의 개입이나 승인/불승인의 힌트도 없으며, 정부의 전환이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 없이 설명된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로빈 갤러허 브랜치는 성경 텍스트가 지므리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에베드"(노예, 종)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그가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8]
4. 2. 성경적 묘사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8] 지므리에 대한 배경 정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엘라를 암살하고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마빈 A. 스위니는 지므리의 통치가 7일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다. 엘라는 암살 당시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언급된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을 완전히 몰살시켰으며, 이는 예언자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므리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개와 새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했다.
암살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가 부재했기 때문에 지므리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고, 엘라 왕을 방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오므리는 군대 내에서 지므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와 그의 군대는 디르사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충분한 방어 시간을 갖지 못하고 도시가 함락되자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윌리엄 H. 반스는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군사 편성이 있었으며, 지므리는 디르사에 주둔한 전차 편성을 이끌었다고 해석한다.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 보복을 피하기 위한 일반적인 절차였다. 지므리는 부칭이 없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수 있다.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거나,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수 있다.
반스는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기브돈 포위가 24년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을 들어 바아사 가문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지므리의 죽음을 비겁한 죽음이 아닌 "비극적인 영웅적" 죽음으로 묘사하며, 삼손의 자살과 유사하다고 본다. 열왕기는 지므리가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하지만,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만큼 오래 통치하지 않았다.
반스는 지므리가 찬탈자와 반역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죽음은 비극적인 영웅으로 취급받는 불일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므리의 자살은 고대 서술에서 독특한 것이 아니며,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 등의 죽음과 유사한 설명이 있다. 지므리는 수도를 디르사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고,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힐렐 I. 밀그램은 지므리의 쿠데타가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으며, 왕국의 모든 지배층을 신속하게 처형하기 위해 암살 목록을 준비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지므리는 반혁명의 형성을 막으려 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고, 디르사는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없었다. 지므리의 자살은 패배를 인정하고 적에게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므리의 통치는 갈등 고조의 사건을 나타낸다. 오므리는 왕살해 혐의에서 벗어난 세 번째 이스라엘 왕이 된다.
에드워드 F. 캠벨은 지므리와 오므리에 관한 성경 서술에 예언자나 신의 개입이 묘사되지 않아 정부 전환이 신의 권위에 대한 호소 없이 설명된다고 지적한다. 로빈 갤러허 브랜치는 지므리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회적 지위가 "에베드"(노예, 종)로 표현되어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다고 본다.[8] 엘라는 다윗처럼 전선에서 떨어져 시간을 보냈고, 이는 지므리에게 암살 기회를 제공했다.[8]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8]
4. 3. 역사적 의의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 지므리의 통치는 7일에 불과했고,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킨 것 외에는 역사적으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기는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였던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으며, 당시 엘라는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한다. 지므리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바아사 가문 전체를 몰살시켰고, 이는 예언자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므리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아 개와 새의 먹이가 되게 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므리가 엘라를 암살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오므리는 군대를 이끌고 디르사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지므리는 디르사를 수도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으며,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지므리의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수도 있다.
성경은 지므리가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하지만,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만큼 오래 통치하지는 않았다. 지므리의 자살은 사르다나팔루스, 샤마쉬-슘-우킨, 신샤리쉬쿤과 같은 고대 왕들의 자살과 유사하다.
지므리의 쿠데타는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왕족과 지지자들을 신속하게 처형한 것은 반혁명의 형성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8]
4. 4. 추가 분석
지므리는 이스라엘 왕 엘라의 군대에서 전차 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이었다. 지므리의 배경 정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그의 통치는 7일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지므리의 쿠데타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왕국이 유다 왕국과 아람의 군사 동맹으로 인해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이로 인해 바아사 가문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쿠데타의 배경으로 추정된다.
엘라는 디르사에서 왕실 집사 아르자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는데, 당시 엘라는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언급된다. 지므리는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키고, 그 시체를 들짐승의 먹이로 방치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 이는 예후의 예언을 따른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지므리의 쿠데타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이 통제하던 기브돈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므리는 왕을 방어할 군대가 없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여 지므리에 대항했다. 오므리는 군대를 이끌고 디르사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했고, 지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므리의 죽음 이후, 오므리와 집니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지므리는 이스라엘 군대에 두 개의 전차 부대가 있었으며, 그 중 하나를 지휘했고, 다른 하나는 므깃도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엘라의 암살 당시 상황은, 왕이 사적인 파티에 참석하여 과도하게 술을 마신 틈을 타 지므리가 공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8] 지므리가 이전 지배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한 것은 당시 보복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절차였다.[8]
지므리는 부칭이 없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미천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낼 수 있다.[8] '지므리'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했거나, 야훼의 힘'이라는 구절의 축약형인 신칭 이름일 가능성이 있으며, 야훼가 지므리의 수호신이었을 수도 있다.[8]
지므리 통치 서술에서 언급된 기브돈 포위는, 24년 전 이스라엘의 나답 통치 시기에도 있었으며, 이는 바아사 가문 통치 하 이스라엘의 군사적 약점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8]
지므리의 죽음은 삼손의 자살과 유사하게 비겁한 죽음이 아닌 비극적 영웅적 죽음으로 묘사된다.[8] 지므리는 여로보암의 죄를 반복했다고 비난받지만,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때문에 여로보암의 정책을 모방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8]
바티칸 사본의 그리스어 텍스트에는 지므리의 통치 기간이 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야밈"이 "날" 또는 "년"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로 보인다.[8]
지므리는 찬탈자이자 반역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서술에서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는 불일치가 나타난다.[8] 지므리의 자살은 전설적인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처럼 고대 서술에서 독특한 것이 아니다.[8]
지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긴 오므리 이전, 디르사를 수도로 사용한 마지막 이스라엘 왕이었다.[8]
지므리의 쿠데타는 세심한 계획의 결과였을 것이며, 암살 목록을 준비하고 암살단을 고용하여 왕족과 지지자들을 신속하게 처형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8] 지므리는 반혁명의 형성을 막기 위해 신속한 처형을 단행했지만, 왕립 군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했고, 군대의 분노를 일으켜 오므리가 이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8]
디르사는 긴 포위 공격을 견딜 비축 물량이 부족했고, 시민들은 새로운 정권을 방어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저항으로 함락되었을 것이다.[8] 지므리는 디르사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벧엘 성지 순례를 할 시간이 없었다.[8]
지므리의 통치는 갈등 고조의 사건을 나타내며, 이전 왕위 찬탈자들보다 더 무자비하고 피에 굶주린 인물로 묘사된다.[8] 지므리의 자살은 오므리가 왕살해 혐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8]
지므리와 오므리에 관한 성경 서술은 예언자나 신의 개입 없이, 이스라엘 군대 자체가 행동을 주도하여 두 왕을 권력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8]
지므리는 성경에서 "에베드"(노예, 종)라는 용어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군사적 지위를 위임받은 문자 그대로의 노예였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8] 엘라는 다윗처럼 전선에서 떨어져 자신의 시간을 술과 파티에 쏟았고, 이는 지므리에게 암살 기회를 제공했다.[8]
지므리는 사울, 아히도벨, 가롯 유다와 같이 자살을 저지른 성경 인물 중 하나이다.[8] 지므리는 숙련된 살인자였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잠언의 왕이 된 종들에 대한 비난과 연결되기도 한다.[8]
5. 현대적 해석
지므리의 이름은 주인을 살해한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를 모두 살해했다. 또한, 여왕 이세벨을 처형하기 위해 이스르엘 요새로 들어갔을 때, 이세벨은 그에게 "살인자야, 네 주인을 죽인 지므리, 평안한가?"라는 말로 그를 맞이했다. 존 드라이든의 ''압살롬과 아히도벨''에서 지므리라는 인물은 조지 빌리어스, 2대 버킹엄 공작을 상징한다.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
지므리의 이름은 주인을 살해한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를 모두 살해했다. 또한, 여왕 이세벨을 처형하기 위해 이스르엘 요새로 들어갔을 때, 이세벨은 그에게 "살인자야, 네 주인을 죽인 지므리, 평안한가?"라는 말로 그를 맞이했다. 존 드라이든의 ''압살롬과 아히도벨''에서 지므리라는 인물은 조지 빌리어스, 2대 버킹엄 공작을 상징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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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6: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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