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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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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타고군은 기원전 550년 마고 1세의 개혁을 통해 서부 지중해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시민군, 용병, 동맹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시칠리아 전쟁 이후 용병 의존도가 높아졌다. 크산티포스의 개혁을 통해 육군의 전술이 발전했으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했다. 하밀카르 바르카와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하며 세력이 약화되었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을 거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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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군사 정보
국가고대 카르타고
활동 기간기원전 550년 – 기원전 146년
종류육군
해군
주요 참전그리스-카르타고 전쟁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해체기원전 146년
지휘부
주요 지휘관하밀카르 바르카
한니발

2. 역사

카르타고 군대의 재현


카르타고 군대는 당시 지중해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육군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 출신 병력으로 이루어진 반면, 해군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직접 운용했다. 카르타고는 시민들로 구성된 보병 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하는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에, 육군은 주로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베리아인, 골족, 그리스인 등 외국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 반면,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카르타고는 오랜 해양 민족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해군은 상시 운용되는 조직이었던 데 비해 육군은 특정 전쟁 기간에만 징집되었다가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카르타고 시민들이 보병으로 징집되는 경우는 도시 자체가 직접적인 위협에 처했을 때로 제한되었다.[2]

고대 역사가들은 카르타고가 용병 부대에 크게 의존했다고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3] 실제로 카르타고는 부유한 도시국가로서 많은 수의 용병을 고용했지만, 아프리카나 이베리아 출신의 많은 병력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거나 동맹 관계에 있는 지역 출신으로, 조약에 따라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 경우도 많아 단순 '용병'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4] 예를 들어, 정예 경기병으로 유명했던 누미디아 기병대는 주로 동맹 관계에 있던 누미디아인들이 제공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용병 급료 미지급 문제로 용병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으나[5], 이후에도 카르타고는 외국인 병력을 계속 활용했다.

2. 1. 마고 왕조의 군사 개혁 (기원전 550년 ~ 기원전 5세기)



기원전 550년, 마고 1세가 카르타고의 왕위에 오르면서 카르타고를 서부 지중해의 지배적인 군사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6] 비록 당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모도시티레에 여전히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 위상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마고 1세의 통치 아래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에트루리아인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 관계는 로마가 에트루리아 왕들을 축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마고 1세는 카르타고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이 개혁에는 시라쿠사의 참주였던 티몰레온의 군대를 모방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44][6] 이 시기 카르타고 군사의 핵심은 징병제로 모집된 시민군 호플리테스 창병들이 구성한 그리스 방식의 팔랑크스였다.

2. 2. 시칠리아 전쟁과 용병의 증가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4세기)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걸쳐 벌어진 시칠리아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하면서 많은 시민군 병력을 잃었다.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카르타고 의회는 이전부터 활용해오던 용병 고용을 더욱 확대하여, 군대의 주요 구성원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경향이었으나, 이 시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기원전 480년 항해자 한노의 통치 시기부터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자국 창병 부대를 보조하기 위해 이베리아인 보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정기적으로 고용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8]

발레아레스 투석병.


카르타고의 모병관들은 지중해 전역을 돌며 군 복무에 매력을 느낄 만한 용병이나 도망친 노예들을 찾아다녔다. 갈리아인, 리구리아인, 누미디아인, 리비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특히 이베리아인들이 대규모로 모집되었다. 병력 모집은 단순한 금전 계약을 통하거나, 다른 국가 및 부족들과 맺은 조약을 통한 협력 방식으로 이루어졌다.[4]

고대 역사가 폴리비우스 등은 카르타고가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했다고 기록했지만,[58] '용병'이라는 용어를 카르타고 지배하에 있던 아프리카나 이베리아 출신 병력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들은 로마의 보조병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카르타고는 진정한 의미의 용병들도 고용했다.[59]

카르타고 군대는 출신 민족별로 부대가 나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각 민족이 가진 전투 전문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각 부대 내에서는 모국어로 소통했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 예를 들어 그리스인 부대와 포에니인 부대 사이에서는 통역의 도움이 필요했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 장벽은 카르타고 군대 역사상 유일하게 기록된 대규모 반란인 용병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용병 전쟁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용병들의 급료 지급이 1년 넘게 지연되면서 촉발되었다. 최종적으로 급료 지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과 카르타고 당국 사이의 깊어진 불신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용병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리비아 출신 병사들은 다른 용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는 동안 자신들의 급료 지급이 미뤄지는 것을 거부했다. 전문적인 지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이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카르타고의 음모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퍼졌다. 과거 지휘관이었던 기스코가 카르타고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자신과 다른 귀족 500명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음에도, 용병들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용병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토착 반란 세력은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는 리비아 전역의 봉기로 확산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은 매우 잔혹하게 진행되었으며, 3년 만에 용병과 반란군이 모두 진압되면서 끝났다.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 육군의 정확한 구성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베리아인, 켈트인(갈리아인), 발레아레스 투석병, 이탈리아인(리구리아인), 토착 시칠리아 부족민, 누미디아 기병대, 리비아인 및 리보페니키아인(아프리카인으로도 불림), 그리스인, 그리고 카르타고 본토와 해외 정착지 출신의 순수 포에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 3. 크산티포스의 개혁과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3세기)

시칠리아섬의 주도권을 두고 로마 공화국과 벌인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56년, 로마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에크노무스 곶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로마군을 아프리카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전쟁 이전까지 육상 전투는 대부분 시칠리아에서 벌어졌으나, 이제 로마군은 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위협했다. 상륙 후 레굴루스의 군대는 즉시 초토화 작전을 시작하여 카르타고 영토를 약탈하고, 짧은 포위 끝에 켈리비아 시를 점령했다.[9] 이후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인근 아디스 전투에서 급조된 카르타고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카르타고는 평화를 구걸했지만, 레굴루스가 요구한 조건은 너무 가혹하여 전쟁은 계속되었다. 카르타고는 육상 군사력을 빠르게 확장하기 시작하여 자국 시민을 징집하고 스파르타 출신 용병 크산티포스를 포함한 더 많은 용병을 모집하여 카르타고 군대를 재훈련하고 재구조화하도록 지시했다. 크산티포스는 필리포스 2세 시대에 개발된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의 혼성 부대 모델을 채택했다. 크산티포스는 기병대를 양 날개로 나누고, 용병 보병이 기병대를 엄호하며, 급조된 시민 팔랑크스를 중앙에 배치하여 창병 앞에 코끼리 부대를 배치했다. 이전까지 카르타고 장군들은 코끼리를 중앙 팔랑크스 뒤에 배치했다.

또한 크산티포스는 로마군과의 개활지 전투를 피하고 불규칙한 지형만을 추구함으로써 카르타고인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깨달았다. 이는 로마의 우수한 보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카르타고의 가장 강력한 요소인 기병대와 코끼리를 제한했다. 불규칙한 지형은 또한 더 유연한 로마 군단에 유리하게 팔랑크스를 방해한다. 크산티포스는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임으로써 로마군이 코끼리와 기병대의 공격에 무너지는 등 카르타고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10]

크산티포스의 지휘 아래 개혁된 카르타고 군대는 기원전 255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로마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레굴루스를 포로로 잡아 당시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위협을 종식시켰다.[11]

2. 4. 하밀카르 바르카와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3세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지 18년이 지난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 원로원은 로마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카르타고 육군과 해군의 지휘관으로 하밀카르 바르카를 임명했다.[12] 비록 카르타고는 기원전 249년 드레파눔 해전에서의 승리로 해상권을 장악했지만, 시칠리아 대부분은 여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있었다.[12] 당시 카르타고는 토지를 소유한 귀족 계층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펼치기보다는 아프리카에서의 세력 확장을 더 선호했다. 한노 2세[13]는 기원전 248년부터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작전을 이끌었으며, 기원전 241년까지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4]

그러나 카르타고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시칠리아에 주둔한 함대와 병력을 유지하는 것 외에도,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인 및 누미디아인과의 전투도 벌여야 했다.[15]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하밀카르에게 주어진 군대는 비교적 소규모였고, 카르타고 함대 역시 점차 철수하여 기원전 242년 무렵에는 시칠리아에서 운용할 수 있는 해군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16]

3. 구조

카르타고 군대는 크게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구성 방식과 역할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육군은 동시대 다른 지중해 국가들과 달리, 주로 외국의 용병이나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거나 동맹 관계에 있는 지역 출신(주로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베리아인 등) 병력으로 구성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43][2][3] 카르타고 시민이 육군, 특히 보병으로 복무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주로 도시 방어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한정되었다.[43][2] 이러한 용병 및 동맹군 중심의 구조는 카르타고의 부유한 국력을 바탕으로 가능했지만,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발생한 용병 전쟁처럼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5] 육군의 지휘 체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외국인 부대는 고유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귀족 가문이 사병을 보유하거나 용병 고용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30][31]

반면, 해군은 페니키아로부터 이어받은 강력한 해상 전통을 바탕으로[43], 주로 카르타고 시민들로 구성되고 상비군으로 유지되었다.[43][2] 해군은 카르타고 하층민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경제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사회 안정에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68][41] 폴리비우스는 카르타고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해상 업무에 능숙했다고 평가할 정도로[67][40], 해군은 카르타고의 군사력과 해상 무역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기반이었다.

3. 1. 육군



카르타고 육군은 동시대 지중해 국가들과 달리, 주로 외국의 용병이나 동맹군으로 구성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해군이 주로 카르타고 시민들로 운용되고 상비군으로 유지된 반면[43][2], 육군은 특정 군사 작전 시에만 모집되었다가 해산되었으며, 도시 방어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시민들이 보병으로 징집되었다.[43][2] 페니키아에 뿌리를 둔 덕분에 강력한 해군 전통을 가졌다.

고대 역사가들은 카르타고의 용병 의존을 강조하지만[43][3], 군대의 상당수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거나 동맹 관계에 있는 지역 출신(주로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베리아인 등)으로, 이들은 단순 고용 관계를 넘어선 피정복민 또는 동맹 조약에 따른 병력 제공 의무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43][4][59] 물론 부유한 국력을 바탕으로 순수한 용병도 대규모로 고용했다. 대표적인 동맹군으로는 우수한 경기병을 제공한 누미디아 왕국이 있었다.[43]

육군의 기틀은 기원전 6세기 중반 마고 1세가 그리스식 팔랑크스를 형성하는 시민군 호플리테스를 중심으로 군사 개혁을 단행하면서 마련되었다.[44] 그러나 기원전 5-4세기 시칠리아 전쟁에서 시민군 손실이 커지자, 외국인 부대 고용이 본격화되었다.[8] 기원전 480년경부터는 이베리아인 보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 등을 정기적으로 고용했으며[8], 갈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등 지중해 전역에서 병력을 모집했다.[4] 기원전 4세기경 카르타고 시의 병영 규모는 보병 24,000명, 기병 4,000명, 전투 코끼리 300마리 수용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되며[45], 아가토클레스 침공 시에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다.[45]

제1차 포에니 전쟁로마 공화국에 연패하자,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용병 지휘관 크산티포스를 영입하여 군대를 개혁했다.[10] 크산티포스는 마케도니아식 혼합 병력 운용과 기병 및 전투 코끼리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1]

하지만 용병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제1차 포에니 전쟁 후 급료 미지급 문제로 용병 전쟁이라는 심각한 내란을 야기하기도 했다.[5] 전쟁 말기에는 하밀카르 바르카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카르타고는 재정난과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48][49]

카르타고 육군의 지휘 체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리스 기록의 스트라테고스나 로마 기록의 '보이타르크'(Boetharch) 등이 군 지휘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0] 귀족들은 사병 보유가 가능했으며, 특히 용병 전쟁 이후에는 부유한 가문이 직접 용병 고용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31] 외국인 부대는 고유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족별로 부대가 편성되어 언어 소통의 어려움도 있었다.

3. 1. 1. 보병

조르주 로슈그로스가 상상한 카르타고 시민 병사들의 행진


카르타고 육군의 보병은 시민군과 외국인 용병 및 동맹군으로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마고 1세의 군사 개혁을 통해 징병제로 모집된 시민군 호플리테스 창병들이 형성한 그리스 방식의 팔랑크스가 군사의 핵심이었다.[44] 그러나 기원전 5-4세기에 걸친 시칠리아 전쟁에서 많은 카르타고 시민군이 전사하자, 카르타고 의회는 군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 부대를 대규모로 고용하기 시작했다.[8] 이는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카르타고가 사용해 온 방식이었으나, 시칠리아 전쟁 패배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도시 자체가 위협받을 경우에는 시민들이 보병으로 징집되었다.[43]

고대 작가들은 카르타고가 용병에 크게 의존했다고 강조하지만[58], 북아프리카인이나 이베리아인 등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들은 엄밀한 의미의 용병이라기보다는 피정복민으로서 동원된 경우도 많았다.[59] 또한, 누미디아 왕국처럼 상호 조약을 통해 군대를 제공하는 동맹국들도 있었다. 용병과 동맹군은 주로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베리아인, 갈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발레아레스 투석병, 이탈리아인, 토착 시칠리아 부족민 등으로 구성되었다.[4] 이들은 금전 계약이나 동맹 조약을 통해 모집되었으며[4], 보통 출신 민족별로 부대가 편성되어 모국어로 소통했다.

=== 시민 보병 ===

카르타고 시민이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은 흔치 않았으며, 대개 장교나 기병으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예 부대로서 시민 보병이 존재했다.

==== 카르타고 신성대 ====

'''카르타고 신성대'''는 카르타고 육군의 정예 부대로, 기원전 4세기에 창설되었다. 주로 카르타고 귀족 시민의 자녀들로 구성되었으며, 통상적으로 아프리카 밖에서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17][50] 이들은 중무장 창병대로서, 전투 코끼리 부대 바로 뒤, 전열 중앙에 배치되어 용병 및 기병으로 이루어진 양익의 보호를 받았다. 신성대는 카르타고군 최고의 장비를 지급받았는데, 그리스 호플리테스와 유사하게 긴 창, 검, 아스피스 방패(나중에는 투레오스 또는 스쿠툼 형태의 방패로 대체됨), 청동 각반, 투구, 가슴받이 등으로 무장하고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18]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병력 규모는 약 2,500명이었다.[18][51]

=== 용병 및 동맹군 보병 ===

카르타고 보병의 대다수는 용병, 동맹 공동체 출신 보조병, 피지배 지역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 리비아 보병 ====

리비아인들은 카르타고군의 가장 훈련된 부대를 형성했으며, 중보병과 경보병 모두를 제공했다.

  • 리비아 중보병: 긴 창과 둥근 방패(아스피스, 이후 투레오스/스쿠툼 형)로 무장하고, 투구와 리넨 흉갑(린토락스)을 착용했으며, 밀집 대형으로 싸웠다. 때로는 이베리아식 검을 사용하기도 했다.
  • 리비아 경보병: 재블린과 작은 방패를 사용했으며, 이베리아 경보병과 유사했다.


==== 이베리아 보병 ====

이베리아인 보병은 카르타고가 기원전 480년부터 정기적으로 고용한 핵심 병력이었다.[8] 이들은 자주색 테두리가 있는 하얀색 튜닉과 가죽 머리쓰개를 착용했다.[32] 방패 종류에 따라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나뉘었다.

  • 이베리아 중보병 (스쿠타리): 던질 수 있는 넓은 날의 창(론체(lonche) 또는 솔리페라), 긴 방패(스쿠툼), 그리고 짧고 구부러진 베기용 검인 팔카타(falcata)로 무장하고 밀집된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33][60]
  • 이베리아 경보병 (케트라티): 작은 방패(케트라)와 투창을 사용했다.


==== 기타 보병 ====

  • 갈리아인 및 리구리아인: 키가 큰 방패, 쇄자갑, 청동 투구를 착용하고, 더 무거운 창과 길고 곧은 검을 사용했다. 이들은 카르타고의 방패(투레오스/스쿠툼) 사용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 발레아레스 투석병: 뛰어난 투석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기원전 480년부터 꾸준히 고용되었다.[8]
  • 캄파니아인, 사르데냐인, 그리스인: 고유 장비를 사용하거나 카르타고로부터 장비를 지급받아 싸웠다.[34][61]


=== 무장 및 전술 ===

카르타고 보병의 주력은 팔랑크스 대형이었으며, 이는 시민군과 이베리아 중보병 등이 사용했다. 초기에는 그리스식 호플리테스 장비(긴 창, 아스피스 방패)가 표준이었으나, 점차 서부 지중해에서 널리 쓰이던 타원형의 큰 방패(투레오스 또는 스쿠툼)와 재블린, 팔카타 같은 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는 골족, 리구리아인, 이베리아인 용병과의 오랜 교류 결과로 보인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스파르타 용병대장 카르타고의 크산티포스는 카르타고 보병 전술을 개혁했다. 그는 시민군 팔랑크스를 중앙에 배치하고, 용병 보병들을 양익 기병대 앞에 배치하여 엄호하게 했다. 또한, 카르타고의 강점인 기병과 코끼리를 활용하기 위해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추구했다.[10]

폴리비우스는 한니발의 리비아 중보병이 사용한 무기를 그리스어 '롱케'(longche)로 기록했는데, 이는 보통 투창(재블린)을 의미한다. 일부 번역에서 이를 장창(사리사)으로 오역하기도 했으나, 카르타고 보병이 마케도니아식 장창 팔랑크스를 운용했는지는 불확실하다.[63][36] 자마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방식으로 싸우는 5,000명의 부대가 있었다는 언급이 있지만, 이것이 장창 팔랑크스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당시 해병대가 사용하던 양손 장창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62][35]

3. 1. 2. 기병

리비아인, 카르타고 시민, 리비아-페니키아인들은 찌르는 창과 아스피스 방패(나중에는 티레오스 방패)로 무장한, 규율이 잘 잡힌 훈련된 기병을 제공했다.[37] 누미디아는 척후 전술에 매우 뛰어난 우수한 경기병을 공급했는데, 이들은 여러 개의 재블린(투창)과 작은 원형 방패로 무장하고 안장이나 굴레 없이 말을 탔다.[37] 이베리아인과 갈리아인 역시 기병을 제공했으며, 이들은 주로 돌격 전술에 의존했다.[37] 리비아인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카르타고를 위해 4마리 말이 끄는 중(重)전차를 제공하기도 했다.[37]

카르타고의 용병 지휘관 크산티포스는 카르타고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기병을 양 날개에 배치하고, 보병이 이를 엄호하게 했으며, 개활지에서 기병과 전투 코끼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로마군을 격파했다.[10] 이러한 전술은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11] 카르타고에게 기병과 전투 코끼리는 매우 강력한 군사적 자산이었으며,[10] 전투 코끼리는 적 병력과 말들에게 공포심을 주어 전열에 혼란을 야기했고, 이렇게 생긴 틈을 카르타고 기병과 보병이 활용하여 공격했다.[38]

카르타고의 동맹 도시들 또한 군대에 병력을 제공했으며, 카르타고 장교단이 전체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지만, 많은 부대는 그들 고유의 지도자 아래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있다.

3. 1. 3. 전투 코끼리

카르타고 군대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작전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원정, 그리고 가장 유명한 한니발이탈리아 침공 등 해외 작전에서도 전투 코끼리를 동원했다. 이 코끼리들은 오늘날 멸종한 북아프리카 코끼리(''Loxodonta'' [''africana''] ''pharaoensis'')로, 아마도 아프리카 숲 코끼리(''Loxodonta cyclotis'')의 아종으로 여겨진다.[38] 이 코끼리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사용했던 인도 코끼리(elephas maximus)나 아프리카 부시 코끼리(Loxodonta africana)보다 크기가 작았다.[38]

전투에서 코끼리는 주로 심리적인 무기로 활용되었다. 코끼리의 존재는 적 병사들과 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여 전열을 무너뜨렸고, 이렇게 생긴 틈을 카르타고의 기병보병이 파고들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38][65] 기원전 4세기경 카르타고 시의 병영은 최대 300마리의 코끼리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5]

카르타고 코끼리가 전투 시 등에 망루(howdah)를 설치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일부 군사 기록에서는 아프리카 숲 코끼리가 특정 상황에서 망루를 탑재하고 전투에 나섰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도 한다.[39][66]

코끼리의 전술적 운용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스파르타 출신 용병 대장 크산티포스는 기존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코끼리를 팔랑크스 중앙 뒤편에 배치했던 것과 달리, 코끼리 부대를 창병 부대 정면에 배치하여 돌격력을 극대화했다.[10] 그는 또한 로마군의 강력한 보병을 의식해 개활지 전투를 피하던 기존 전략을 비판하고, 탁 트인 평야에서 코끼리와 기병의 위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전술 변화는 기원전 255년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11]

3. 2. 해군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 《역사》 제6권에서 카르타고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해상 업무에 더 능숙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뛰어난 해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67][40] 카르타고 해군은 주로 하층 계급 출신 시민들로 구성된 수병들과 해병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대부분 용병으로 구성된 육군과는 대조적인 특징이었다. 해군은 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업과 재정적 안정을 제공하며 카르타고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68][41] 다른 도시들에서는 실업이나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빈곤층이 사회 변화를 바라며 혁명 지도자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카르타고에서는 해군이 이러한 사회적 불안 요소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68][41]

3. 2. 1. 함선

마르살라 선박으로 알려진 카르타고 선박의 선수상.


폴리비우스는 그의 《역사》에서 카르타고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해상 업무에 더 능숙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뛰어난 해상 능력을 강조했다.[67][40] 전통적인 해상 전술로는 카르타고 해군을 이기기 어려웠던 로마는 코르부스(corvus)라는 특수한 승선용 다리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적의 배에 고정시켜 로마 병사들이 건너가 카르타고 선박을 점령하거나 침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카르타고 함대수병들과 해병들은 주로 카르타고 하층민 출신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진 육군과는 대조적인 특징이었다. 해군은 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업과 재정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이는 카르타고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다른 도시들에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빚에 시달리는 빈곤층이 사회 변화를 바라며 혁명 지도자들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카르타고에서는 해군이 이러한 불안정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68][41]

3. 2. 2. 전술

시칠리아섬의 패권을 두고 로마 공화국과 벌인 제1차 포에니 전쟁 중, 기원전 256년 로마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에크노무스 곶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에 상륙했다. 이후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인근의 아디스 전투에서 카르타고 육군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카르타고는 강화를 원했으나 레굴루스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가혹하여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 지휘관 크산티포스를 고용하여 육군의 훈련과 개혁을 맡겼다. 크산티포스는 필리포스 2세 시대에 발전한 마케도니아 육군의 혼합 병력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기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용병 보병으로 이를 보호하게 했으며, 중앙에는 급히 훈련시킨 시민군 팔랑크스 부대를, 그 앞에는 전투 코끼리 부대를 일렬로 배치했다. 이는 전투 코끼리를 중앙 팔랑크스 뒤에 두었던 이전 카르타고 지휘관들과 다른 방식이었다.

크산티포스는 또한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로마의 강력한 보병을 두려워하여 탁 트인 평야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울퉁불퉁한 지형에서 싸우려 했던 것이 실수임을 간파했다. 이러한 지형은 카르타고 군의 강점인 기병과 전투 코끼리의 활용을 제한하고, 팔랑크스 대형 유지에도 불리하여 오히려 유연한 레기온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크산티포스는 탁 트인 평야에서 적극적으로 교전을 모색함으로써 카르타고의 기병과 전투 코끼리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로마군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크산티포스의 지휘 아래 개혁된 카르타고 육군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해상 전술에 있어서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 《역사》 제6권에서 카르타고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해상 업무에 더 능숙했다"고 평가했다.[40][67] 전통적인 해전 방식으로는 카르타고 해군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로마는 코르부스(corvus)라는 특수한 승선용 다리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끝에 달린 갈고리로 적함에 고정시킨 후, 로마 병사들이 이를 통해 적함으로 건너가 백병전을 벌여 배를 나포하거나 침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4. 군사 전통과 문제점



카르타고 군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구성이었다. 당시 지중해의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달리, 카르타고 군대는 거의 전적으로 외국의 용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해군은 시민들이 운용했다. 카르타고는 시민 보병 부대에 대한 역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군대는 주로 외국 군대, 특히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이베리아인, 갈리아인, 그리고 그리스인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니키아 기원은 카르타고에게 오랜 항해 민족으로서의 역사를 부여했다. 또한, 해군은 영구적으로 운용되는 상비군이었던 반면, 육군은 특정 작전을 위해 징집되었다가 해산되었다. 카르타고 도시 자체가 위협받을 때만 시민들이 보병으로 징집되었다.[2][43]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를 비롯한 고대 작가들은 카르타고가 용병 부대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폴리비우스는 카르타고인들이 용병 부대에 의존했기 때문에 "보병을 완전히 무시했다"라고 언급한다.[3] 그러나 “용병”이라는 용어는 카르타고 육군 전체에 적용하기에는 오해가 있다. 종종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정체였던 카르타고는 진정한 의미의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인과 이베리아인들을 모집하는 카르타고의 관례는 이들이 카르타고의 피정복민이거나 동맹 관계에 있는 국가나 영토 출신이었기에, 상호 조약에 의해 카르타고 군대에 병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진정한 용병은 아니었다.[4] 대표적인 예로 누미디아 왕국은 양국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상당한 경기병들을 제공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는 파산 직전에 놓였고, 전쟁에서 복무한 진정한 용병들에게 빚진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 국내군과 일부 잔존 동맹국들은 미지불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후, 카르타고는 외국 징집병으로 군대를 계속 채웠지만,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고용된 용병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5]

카르타고 호플리테스 (신성대, 기원전 4세기 말)


카르타고 신성대 기병


카르타고 전차


역사가 A. 호이스(A. Heuss)에 의하면:

"카르타고 정치 구조가 가진 핵심 문제는 군사적 측면과 관계가 있다." (Das zentrale Problem des karthagischen Staatslebens ist sein Verhältnis zum Militärwesen.de)[19][52]


카르타고페니키아의 도시 티레키프로스의 귀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시작부터 카르타고는 점토와 바다 소금 같은 중요 자원에 접근하기 쉬운 지점에 있는 완전하고 독립적인 도시였다. 그 후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지중해로 뻗어 나가는 포에니인들의 요람이자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군사적 전통은 페니키아의 기원에서 비롯되었으며 토착민 리비아인과 그리스인들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전통적으로 카르타고는 평화로운 상인들의 도시 혹은 잔혹한 식민지로 여겨졌는데, 이 두 이론은 오히려 현대적인 인식에 의존한 것들이다.[20][53] 카르타고를 향한 거의 모든 연구법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카르타고의 정책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로마의 구조와 근본적으로 대조를 한다는 것이다.[21][54] 하지만 카르타고 폴리스는 서부 지중해의 지배권을 수 세기간 유지해왔고 포에니 문화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넓은 영역에 동맹들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북아프리카의 도시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 이 지역들에서 서기 5세기까지 포에니어가 사용 가능하였다.[22][55]

상업과 호전적인 태도가 정반대라는 개념은 계몽주의에서 발생한 것이며,[23][56] 고대의 자료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유된 것은 아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카르타고에 대해 쓴 아이네이스에서 : 이러한 이유가 카르타고인들이 전쟁에서 영광을 누려 수 세기 동안 쉽게 식량을 얻을 것이다 (sic nam fore bello / egregiam et facilem victu per saecula gentemla)라고 하였다. 리비우스는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직업 군인 최소 40,000명을 수용했다고 이미 언급한 바가 있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스파르타와 크레타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구 구성에 속하는 적은 포에니 인구에 고도의 군사 전문성을 언급하는 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카르타고의 군인 정신 영역에 관한 역사가들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포에니인 군대를 언급한 자료가 드물고 전쟁에서 상대측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접근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24][57] 카르타고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무역업에 귀족층 계층들의 관여했다는 자료들의 부족이 키운 의문을 입증해준 것으로 보인다. 번역 (포에니어를 번역한 것이며, 자세한 것은 논쟁 중이다)은 돈을 적게 가진 이들 중에 상인들이 존재하고, 반면 생산 시설 소유자들이 돈을 더 많이 가진 자들로 언급된다.카르타고 비문 관련 자료

유사한 의문이 포에니 무역인에 대한 유일한 자료가 희곡 포에눌루스였고 그곳에서 카르타고인 다소 공손한 상인들로 등장했기 때문에 초창기에 발생했다. 포에니 문화의 중요한 부분은 신에 대한 그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 사료에서 “신성대”라고 알려진 그들의 유명한 부대는 그들 시대의 정예 부대로 여겨졌다. 이 부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병은 군사 훈련에 전념하는 도시의 젊은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5. 주요 전투 및 군사 활동


  • 그리스-포에니 전쟁, 기원전 600년경 – 기원전 265년
  • * 제1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480년
  • * 제2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410년 – 기원전 340년
  • * 제3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315년 – 기원전 307년
  • 피로스 전쟁, 기원전 280년 – 기원전 275년, 로마와 동맹
  •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 용병 전쟁,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38년
  •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정복,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18년
  •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1년
  • 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6년


누미디아 전쟁 (기원전 114년 – 기원전 104년)에서는 포에니인과 포에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로마의 적들 중에 있었다.[69]

참조

[1] 서적 The Military 100: A Ranking of the Most Influential Leaders of All Time Citadel Press 200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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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On the ''Perseus'' project https://www.pers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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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간행물 Carthaginian Mercenaries: Soldiers of Fortune, Allied Conscripts, and Multi-Ethnic Armies in Antiquity digitalcommons.woffo[...] 2016
[6] 문서
[7] 문서 The Foreign Wars: The Punic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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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웹사이트 The Numidian War §1 and §5 https://www.livius.o[...] 200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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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간행물
[48] 서적 The Punic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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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Historical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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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간행물
[54]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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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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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간행물 Histori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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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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