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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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 공산당은 1921년 창당된 정당으로, 노동 운동가와 반전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비합법 정당으로 활동하다가 합법화되었으며, 코민테른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 복지 제도 도입을 주장하며 활동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활동이 금지되었다가, 전쟁 후 노동진보당을 통해 활동을 재개했다. 소련 붕괴 이후 당은 분열과 재건 과정을 거쳤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재확인하고 사회주의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퀘벡 문제에 대해서는 퀘벡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다양한 연합 단체를 통해 조직을 확장해왔다. 현재는 엘리자베스 로울리가 당 대표를 맡고 있으며, 완전 고용, 최저 임금 인상, 사회 복지 체제 유지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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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공산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명칭 (영어) | Communist Party of Canada |
명칭 (프랑스어) | Parti communiste du Canada |
약칭 (영어) | CPC |
약칭 (프랑스어) | PCC |
![]() | |
창립일 | 1921년 5월 28일 |
본부 | 온타리오주 토론토, 290 Danforth Avenue, M4K 1N6 |
신문 | 인민의 목소리 |
지도자 | 엘리자베스 롤리 |
청년 조직 | 캐나다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 |
색상 | 빨강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이념 및 정치적 입장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
국제 관계 | |
국제 조직 |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1998년부터) |
과거 국제 조직 | 코민테른 (1921년–1943년) |
의석 현황 | |
상원 | 0석 / 105석 |
하원 | 0석 / 338석 |
2. 역사
캐나다 공산당은 1921년 창당 이후, 합법과 불법, 탄압과 저항, 분열과 재건 등 복잡한 역사를 거쳐왔다.
1921년 5월, 온타리오 주 구엘프의 한 농가에서 비밀리에 창당된 캐나다 공산당은[1] 초기에는 전시 대책법으로 인해 불법 정당으로 활동해야 했다. 초기 당원들은 대부분 노동조합 관계자나 반전 운동가였으며, 같은 해 12월 코민테른에 가입하여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했다.[1] 1922년 "캐나다 노동자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기관지 '더 워커'를 발행했으며, 1924년 전시 대책법 폐지 후 "캐나다 공산당"으로 복원되었다.[1] 1925년까지 당원 수는 약 4,500명에 달했으며, 주로 광부, 벌목 노동자, 철도 노동자, 농부, 의류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었고, 핀란드나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가 많았다.[2]
1920년대 후반, 당 내부에서는 레온 트로츠키 지지파와 니콜라이 부하린 지지파 등 이념 논쟁과 분열이 발생했다.[1] 1929년 팀 벅이 당의 총비서로 선출되어 1962년까지 장기간 재임했다.[1]
1929년 세계 대공황 발생 이후, 캐나다 공산당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실업 보험, 국민 건강 보험 제도 등 사회 개혁 정책을 제안했다. 1931년 당 지도부가 체포 및 투옥되면서 1934년까지 지하 활동을 해야 했지만, 노동자 단결 동맹, 캐나다 노동 방위 동맹 등 대중 조직을 통해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스페인 내전 발발 후에는 국제 여단에 1,500명 이상을 파병하여 국제적 연대 활동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인해 전쟁에 반대했지만,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전쟁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1] 1940년 캐나다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 1944년 징병 위기 당시에는 징병 찬성 운동을 벌였다.[1] 1940년대 중반에는 연방, 주, 지방 정부에서 14명의 선출직 공직자를 배출했다.[1]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캐나다 공산당은 큰 위기를 겪었고, 많은 당원들이 탈당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당을 떠났다.
소련 붕괴 이후, 캐나다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와 당 해체를 둘러싼 내부 분열을 겪었다.[1] 1992년, 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으로 재건되었지만, 지지 기반과 재원이 크게 약화되었다.[1] 1993년에는 캐나다 선거법 개정으로 인해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자산이 몰수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10년간의 법정 투쟁(''피게로아 대 캐나다 (AG)'') 끝에 승리했다.[1]
2001년 당 강령을 개정하고, 2007년 청년 공산주의 연맹(YCL)을 재건했다.[1] 2016년에는 엘리자베스 로울리가 당 최초의 여성 대표로 선출되었다.[1] 2022년, 당내 성희롱 문제와 중앙위원회의 대응 미흡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겪었다.[1]
2. 1. 창당과 초기 활동 (1921년 ~ 1929년)
1921년 5월 28일 및 29일, 온타리오주 구엘프 교외에서 지역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비밀 회합을 통해 캐나다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당시 전시 대책법이 발효 중이었기 때문에 비합법 정당으로 활동해야 했다.[1] 초기 당원들은 대부분 노동조합 관계자나 반전 운동가였다. 같은 해 12월 코민테른에 가입하여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했으며, 전 세계 공산당과 유사한 조직 형태와 정책을 채택했다.1922년 2월, 전시 대책법에 따라 당은 "캐나다 노동자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3월에는 기관지 '더 워커(The Worker)'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24년 캐나다 의회에서 전시 대책법이 폐지되자 지하 조직은 해산되었고, 당명은 다시 "캐나다 공산당"으로 복원되었다.
1925년까지 당원 수는 약 4,500명에 달했으며[2], 주로 광부, 벌목 노동자, 철도 노동자, 농부, 의류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당원들 중 상당수는 핀란드나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가 많았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캐나다 공산당은 "통일 전선" 전략의 일환으로 캐나다 노동당과 제휴했다. 퀘벡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이 노동당 조직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선거에 후보를 내지는 않았다. 1925년 윌리엄 콜리슨니크는 캐나다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여 북미 최초로 공산주의자로서 공직(위니펙)에 선출되었다.[3]
2. 2. 내부 논쟁과 분열 (1927년 ~ 1929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캐나다 공산당은 레온 트로츠키의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북미 예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추방하면서 일련의 정책 논쟁과 내부 이념 투쟁을 겪었다.[1] 추방된 사람들 중에는 당 기관지 ''노동자''의 편집자이자 당 의장이었던 모리스 스펙터, 그리고 분파주의로 인해 당의 총비서직에서 사임하고 추방된 잭 맥도날드가 포함되었다.[1] 플로렌스 커스턴스는 1929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당에서 추방되는 것을 면했다.[1]트로츠키주의 사상에 공감했던 맥도날드는 스펙터와 함께 국제 좌익 반대파(트로츠키주의자) 캐나다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 좌익 반대파의 일부를 형성했다.[1] 당은 또한 니콜라이 부하린과 제이 러브스톤의 우익 반대파 지지자들(예: 윌리엄 모리아티)을 추방했다.[1] J. B. 살스버그와 같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에 동조했지만, 193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당원들은 몇 년 동안 당 대회를 지배했던 논쟁 끝에 당에 남기로 결정했다.[1]
팀 벅은 1929년 당의 총비서로 선출되었다.[1] 그는 1962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1]
2. 3. 대공황과 반파시즘 투쟁 (1929년 ~ 1939년)
1929년 말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은 캐나다를 포함한 전 세계에 걸쳐 장기간의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캐나다 공산당은 대공황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규정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또한 실업 보험, 국민 건강 보험 제도, 청년층 취업 지원, 농가 소득 보장 등 다양한 사회 개혁 정책을 최초로 제안했다. 1930년대에 공산당이 제기한 이러한 요구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에서 대부분 입법화되어, 캐나다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1931년, 당 지도부가 체포 및 투옥되면서, 당은 공식적으로 존재했지만 공권력의 탄압으로 인해 1934년 대규모 석방 운동이 있기 전까지 지하에서 활동해야 했다. 특히 팀 벅의 석방을 기념하여 메이플 리프 가든스에서 열린 집회에는 17,000명 이상의 지지자들이 모였다.
당이 불법화된 상황에서도 노동자 단결 동맹(WUL), 캐나다 노동 방위 동맹 등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에스테반 광산 노동자 파업과 같은 역사적인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1934년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에 따라 반파시즘 통일 전선 전략을 채택하고, 사회 민주주의 세력 및 개량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한편, 프레리 지역에서는 농민 통일 연맹을 조직하여 관헌의 감시를 피해 수백 명의 농가를 동원해 농지 강제 퇴거 반대 운동과 기아 행진을 벌였다. 또한 노동자 계급 청소년들의 여가 활동을 위한 노동자 스포츠 협회 등을 창설했다.
스페인 내전 발발 후, 캐나다 공산당은 국제 여단에 1,500명 이상을 파병하여 국제적 연대 활동에 참여했다. 이 중에는 휴대용 수혈 장치를 발명한 의학 박사 노먼 베쑨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후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다. 세계 대공황 시기 노동당, 사회당과 협력했던 것처럼, 스페인 내전에서도 협동 연방당(CCF) 당원들과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1935년 이후, 캐나다 공산당은 주요 현안에 대해 CCF와 선거 연합을 결성하여 투쟁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CCF 내부에서도 논의되었으나, 1936년 온타리오 주 당 대회에서 부결되었고,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앨버타 주, 서스캐처원 주 당 대회에서는 잇따라 찬성되었다.
1936년 제임스 리터릭이 위니펙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마니토바 주의회 최초의 공산당원이 되었다.[4]
1937년 퀘벡 주 뒤플레시스 정권은 '공산주의자'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에게 부여하는 '공산주의 선전으로부터 퀘벡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었다). 같은 시기, 파시스트 단체들이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1939년 ~ 1956년)


캐나다 공산당(CPC)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에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쟁을 자본주의 국가 간의 싸움으로 보고 반대했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조약이 붕괴되자, 전쟁을 반파시즘 투쟁으로 규정하고 전쟁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1940년, 캐나다가 전쟁에 참전한 직후 ''전시 조치법''의 ''캐나다 방위 규정''에 따라 캐나다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파시스트보다 먼저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일부 당원들은 지하 활동을 하거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수용소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수감자들의 아내들은 가족 면회와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권 운동을 벌였다.
도리스 닐슨은 1940년 캐나다 의회 선거에서 진보적 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유일한 여성 의원이었다. 닐슨은 1943년까지 자신이 공산당원임을 숨겼다.
1944년 징병 위기 당시, 금지된 공산당은 전국에 "팀 벅 국민 투표 위원회"를 설치하여 징병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찬성" 투표를 독려했다. 투표 후 위원회는 도미니언 공산주의-노동 총력전 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자들의 협력과 파업 금지를 촉구했다.
1940년대 중반, 캐나다 공산당은 연방, 주, 지방 정부에서 14명의 선출직 공직자를 배출했다. 여기에는 1945년에 선출된 연방 국회의원 프레드 로즈가 포함되며, 이 해에 CPC의 연방 선거 득표율은 2.13%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2. 5.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당의 위기 (1956년 ~ 1991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 연설에서 조셉 스탈린의 통치를 비판하고 1956년 헝가리 침공은 전 세계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을 흔들었다. 당은 또한 저명한 당원인 J.B. 샐스버그가 소련 여행에서 돌아와 만연한 당 주도의 반유대주의를 발견한 후 위기에 직면했다. 샐스버그는 자신의 발견을 보고했지만 당에서 거부하여 지도부에서 그를 정직시켰다. 이 위기로 인해 1956년 유나이티드 유대인 인민 기구, 샐스버그, 로버트 락서 및 대부분의 당 유대인 구성원이 탈당했다. 많은, 아마도 대부분의, 캐나다 공산당 구성원들은 여러 저명한 당원을 포함하여 떠났다.1960년대 중반, 미국 국무부는 당원 수를 약 3,500명으로 추산했다. 소련의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 공산당을 떠났다. 당시 여성의 정치에 다소 저항적이어서 많은 여성들이 당과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렸다. 당은 섹스, 젠더 및 여성 정치에 대한 논의가 계급 혁명의 전반적인 목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반박했을 수 있으며, 예를 들어 많은 급진적인 여성들은 여러 간통을 저지르면서 섹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거부한 당원 남성들의 위선을 기억했다.
2. 6. 소련 붕괴와 당의 분열, 재건 (1991년 ~ 현재)
소련 붕괴 이후, 대부분의 공산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캐나다 공산당도 위기를 겪었다. 당시 조지 휴이슨 서기장(1988년-1991년) 체제 하에서 공산당 및 당원 일부는 당의 지도 원리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당 자체를 해산한 뒤, 이를 대신할 좌파·사회민주주의적 단체 창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오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위기는 당내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결국 휴이슨이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다수파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미겔 피게로아, 엘리자베스 로울리, 전 당 간부 윌리엄 캐스탄 등 중앙위원회의 소수파가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1]
1990년 가을의 제28차 당대회에서 휴이슨 파는 중앙위원회의 주도권을 어떻게든 유지했지만, 이듬해 봄까지 당원들 사이에서 휴이슨 지도부의 개량주의적 방침이 비판받게 되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온타리오주에서 1991년에 열린 당대회에서는 모두 휴이슨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고, 휴이슨 파 관계자들이 축출되었다.[1]
휴이슨 파는 같은 해 8월 27일, 로울리 등 방침에 비판적인 11명의 당 간부를 제명 처분하는 동시에 온타리오 주위원회를 해산시켰다. 다만 지방 지부 및 위원회의 다수는 제명에 반대하며, 심화되는 위기를 민주적인 수법으로 해결하고자 임시 당대회 개최를 요구했다. 10월의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도 항의가 잇따랐지만, 임시 당대회는 열리지 않았다.[1]
남겨진 선택지는 로울리 등 제명된 당원들이 휴이슨 파와 법정에서 다투는 것뿐이었지만, 양측 간의 수개월에 걸친 교섭 끝에 휴이슨 지도부가 탈당하게 되었다. 휴이슨 파의 이탈 후 첫 당대회가 1992년 12월에 열렸고, 대의원들은 공산당의 존속을 승낙했다(그 때문에 대회 명칭은 제30차 공산당대회가 되었다). 대표 위원은 휴이슨 파가 시작한 개량주의적 정책을 거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으로서 재출발을 선언했으며, 동시에 피게로아를 새 당수로 선출했다.[1]
당의 혁신을 꾀했지만, 지지 기반과 재원이 극도로 약화되어 현재 당 존속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 브라이언 멀로니 진보보수당 정부가 도입하고 1993년 봄 의회를 통과한 ''캐나다 선거법'' 개정으로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서 50명의 공천 후보를 낼 수 없는 정당은 자동으로 정당 요건을 잃고 자산이 압류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총선에서는 50명의 후보를 내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8명의 후보밖에 내지 못함), 자산이 압류되었다.[1]
이에 대해 10년 동안 재판 투쟁(''피게로아 대 캐나다 (AG)'')이 벌어졌는데, 녹색당 등 소수 정당의 지원을 받는 등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재판 결과, 선거법에서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서 50명의 공천 후보를 내지 못하는 정당은 자산이 압류된다는 조항이 삭제되었다 (2000년). 이러한 승리는 정치적 신념에 관계없이, 다른 소수 정당들로부터도 민주적으로 선택할 권리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1]
2001년 당은 당 강령을 포괄적으로 개정하고 "캐나다의 미래는 사회주의"로 이름을 변경했다.[1]
2007년에는 청년 공산주의 연맹(YCL)을 재건했다.[1]
2016년 엘리자베스 로울리가 당 최초의 여성 대표로 선출되었다.[1]
2022년 당내 성희롱 문제와 중앙위원회의 대응 미흡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겪었다.[1]
3. 퀘벡 문제와 민족 문제
캐나다 공산당은 창당과 동시에 퀘벡에서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애니 불러, 윌리엄 카슈탄, 프레드 로즈, 매들린 파렌트, 레아 로백 등 캐나다 공산당의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몬트리올 출신이었으며, 노먼 베튠은 몬트리올에서 당에 가입했다.[1] 퀘벡 지구는 뒤플레시 정권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데, 뒤플레시 정권은 패드락 법을 사용하여 당을 불법화하고,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했다.[1] 카르티에에서 프레드 로즈가 당선된 것은 퀘벡 공산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도시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 사이에서 캐나다 공산당의 지지를 반영했다.[1]
한동안 당은 당 창당 이후 상당히 변화된 캐나다의 민족 문제에 대한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30년대 초부터 캐나다 공산당은 퀘벡이 하나의 국가임을 인식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퀘벡의 자결권 주장을 시작했다.[1]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당은 이 입장을 명확히 하여, 민족 문제에 대한 민주적인 해결책과 분리를 포함하여 퀘벡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캐나다산" 헌법을 옹호하는 최초의 정당이 되었다.[1] 분리할 권리를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퀘벡이 캐나다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반대하며, 당시 일반적으로 프랑스 캐나다와 영어 캐나다라고 불리던 국가 간의 새롭고 평등하며 자발적인 파트너십을 제안했다.[1]
1950년대 후반, 당은 마침내 패드락 법을 뒤집었다. 흐루쇼프의 폭로와 냉전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새로운 에너지와 희망을 주었다.[1] 민족 문제에 대한 더 깊은 정치적 이해를 실천하기 위해, 1965년 11월 퀘벡의 캐나다 공산당은 퀘벡 공산당 (Parti communiste du Québec|PCQ프랑스어)으로 재조직되었으며, 이는 "국경 내에 둘 이상의 국가가 있는 국가"로서 캐나다의 다민족 현실을 반영했다.[1] 퀘벡 공산당은 캐나다 공산당의 "독립적인 실체"로 등장하여, 당원 자격을 공유하고 동시에 자체 헌법을 포함하여 정책과 행정을 완전히 통제했다.[1]
조용한 혁명, 이중 언어 및 이중 문화에 관한 왕립 위원회, 이후 10월 위기로 인해 당의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은 전국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캐나다 노동 의회가 퀘벡 노동 연맹과 평등하고 자발적인 기반으로 협력하겠다는 합의에 영향을 미쳤다.[1] 공산주의자들은 독립 운동에 공감하는 노동자들이 영어권 캐나다 노동자들과의 공동 투쟁을 위한 일반적이고 즉각적인 계급 기반 프로그램에 따라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1] 퀘벡 공산당은 몬트리올의 대규모 메이데이 시위를 다시 시작하는 데 기여했고, 퀘벡 연대의 형성과 함께 그 선견지명을 입증한 연합 노동당 아이디어를 포함하여 많은 독특한 정책을 발전시켰다.[1] 연합 노동당 제안은 1960년대 후반에 대부분의 노동조합 중앙에서 지지받았지만, 이 프로젝트는 퀘벡당의 등장으로 가려졌다.[1]
1980년대에 이르러 캐나다 공산당과 퀘벡 공산당은 원주민, 퀘벡 및 영어권 캐나다의 평등하고 자발적인 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주적 헌법 체제를 요구하며 상원을 국가 의회로 대체했다.[1] 이러한 맥락에서 퀘벡 공산당과 캐나다 공산당은 주권 연합에 대한 첫 번째 국민투표 질문을 비판적으로 지지했으며, 이후 캐나다 공산당은 1995년 두 번째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을 옹호했다.[1]
1990년대 캐나다 공산당의 위기 동안 퀘벡 공산당은 조직력을 잃고 사무실을 폐쇄했으며, 남은 당원들은 캐나다 공산당에서 멀어졌고, 지도부의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을 채택했다.[1] 1997년이 되어서야 다양한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그룹들이 모여 퀘벡 공산당을 재조직했다.[1] 몇 년 후, 당은 좌파의 여러 경향을 모아 진보 세력 연합(UFP)을 결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퀘벡 연대가 되었다.[1]
진보 세력 연합은 퀘벡 독립 문제를 사회 또는 계급 문제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당이 퀘벡 연대로 변모하면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이 논쟁은 퀘벡 공산당으로도 옮겨갔다.[1] 이러한 입장은 당의 퀘벡 지도자인 앙드레 파리조에 의해 의문을 제기 받았으며, 2004년에 즉각적인 독립을 지지하는 일련의 수정안을 만들었지만, 퀘벡 당의 전국 집행 위원회 (4–2 투표)와 캐나다 당의 중앙 집행 위원회 (7–1 투표) 모두에 의해 거부되었다.[1] 2005년 1월, 파리조는 퀘벡 공산당 당원들에게 당이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의 수정안에 반대하는 4명의 전국 집행 위원(NEC)을 친연방주의 "4인방"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을 즉시 해고하는 서한을 썼다.[1] 그의 퀘벡 민족주의적 관점이 2005년 4월 퀘벡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간신히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대표 선출 과정은 매우 논란이 많았다.[1] 파리조는 이후 파벌주의와 당에 해로운 행동으로 인해 캐나다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의해 제명되었다.[1] 거의 같은 시기에 그의 그룹은 캐나다 공산당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1] Élections Québec은 파리조가 "Parti communiste du Québec|italics=no프랑스어"라는 이름에 대한 선거 등록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계속 인식했기 때문에, 퀘벡 공산당은 파리조의 그룹과 구별하기 위해 PCQ-PCC 약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
당의 중앙 위원회는 2005년 6월 18–19일에 이전 퀘벡 공산당 전국 집행 위원회의 권한을 확인했다.[1] PCQ-PCC는 새로운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프랑스어 공산주의 정기 간행물 ''Clarté''의 부활, 새로운 사무실 및 열람실 개설, 새로운 웹사이트 출시, 퀘벡 연대와의 재가입을 이끌어냈다.[1] PCQ-PCC는 청소년 단체 퀘벡 공산주의 청년 동맹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1] 이 상황에 대한 캐나다 공산당의 설명은 온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2] 파리조의 퀘벡 공산당 그룹의 서한도 확인할 수 있다.[3]
4. 조직
캐나다 공산당은 창당과 함께 퀘벡에서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애니 불러, 윌리엄 카슈탄, 프레드 로즈 등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몬트리올 출신이었으며, 노먼 베튠은 몬트리올에서 당에 가입했다.[1] 퀘벡 지구는 뒤플레시 정권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뒤플레시 정권은 패드락 법을 사용하여 당을 불법화했다.[1]
1930년대 초부터 CPC는 퀘벡이 하나의 국가임을 인식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퀘벡의 자결권 주장을 시작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당은 이 입장을 명확히 하여, 민족 문제에 대한 민주적인 해결책과 분리를 포함하여 퀘벡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캐나다산" 헌법을 옹호하는 최초의 정당이 되었다.[1]
1950년대 후반, 당은 흐루쇼프의 폭로와 냉전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패드락 법을 뒤집는데 성공했다. 1965년 11월, 퀘벡의 CPC는 퀘벡 공산당 (Parti communiste du Québec|PCQ프랑스어)으로 재조직되었으며, 이는 캐나다의 다민족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PCQ는 CPC의 "독립적인 실체"로, 당원 자격을 공유하고 정책과 행정을 완전히 통제했다.[1]
1921년5월 28일 및 29일, 온타리오주 겔프 교외에서 결성된 캐나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비합법 정당이었다. 결당 당시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조합 관계자나 반전 운동가였다. 같은 해 12월 코민테른 캐나다 지부에 가입하면서 세계의 공산당과 유사한 조직 형태와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2] 1922년2월 전시 조치법에 의해 "'''캐나다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3월에는 기관지 발행을 시작했다. 1924년 캐나다 의회에서 전시 조치법이 실효되자 지하 조직은 해산되었고, 당명도 '''캐나다 공산당'''으로 되돌렸다.[2]
1925년까지 광산 및 임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원 수가 약 4,500명이 되었다.[2] 당원 대부분은 핀란드나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가 많은 지역 출신이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지방 지부가 "가입 전술"의 일환으로 캐나다 노동당에도 가입했다. 퀘벡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이 노동당 조직을 주도하기도 했다.[2]
4. 1. 연합 단체
캐나다 공산당은 1920년대 후반까지 당과 연계된 연합 단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단체들은 당의 지침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단체들은 종종 공산당 창설 이전에 존재했던 좌파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기원했으며, 다양한 이민자 집단 사이에서 정치적, 문화적 활동을 펼치고, 잡지를 발행하며, 자체적인 문화 센터와 회의실을 운영했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민자 집단은 핀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각각 캐나다 핀란드인 기구(1911년 캐나다 핀란드 사회주의 기구로 설립), 연합 우크라이나 캐나다인 협회(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노동 농민 템플 협회로 알려짐) 및 연합 유대인 인민 기구(1945년까지 노동 연맹으로 알려짐)에 조직되었다.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헝가리 노동자 클럽, 폴란드 인민 협회 (이전에는 폴란드 노동자 및 농민 협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민주 협회로 알려짐), 세르비아 인민 운동,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 노동자 클럽) 및 카르파토-러시아 협회도 활동했다. 러시아 농민-노동자 클럽은 1930년대 초에 결성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캐나다 방위 규정에 따라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1942년 소련이 캐나다의 동맹국이 되자, 이들은 캐나다 러시아인 연맹으로 다시 나타났다. 독일계 캐나다인 연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결성되었고, 캐나다 슬라브 위원회는 1948년에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불가리아인, 마케도니아인, 유고슬라비아인, 카르파토-루신인을 위한 당 연계 문화 협회를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카르파토-러시아 캐나다인 협회는 재결성되었으며, 1950년에는 토론토 280 Queen Street West에 회관을 인수하여 21세기에도 계속 운영하고 있다.
연합 유대인 인민 기구는 "흐루쇼프 폭로" 시기인 1956년 소련의 반유대주의 혐의와 관련하여 당과 결별했다.
후기 연합 단체로는 1967-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을 피해 이주한 좌파 출신 이민자들이 결성한 그리스 캐나다 민주 기구와, 우파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포르투갈을 떠난 좌파 출신 이민자들이 결성한 포르투갈 캐나다 민주 협회가 있다. 포르투갈 협회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4. 2. 지방 조직
캐나다 공산당은 각 주에 지방 조직을 두고 있으며, 대부분 '캐나다 공산당 ([주])' 형식의 명칭을 사용한다. 현재 활동 중인 지방 조직은 앨버타, 브리티시 컬럼비아, 매니토바, 온타리오, 퀘벡에 있다.주 | 조직 이름 | 창당 | 지도자 | 최고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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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 앨버타 | 1930년 | 나오미 랭킨 | 1944년 | |
브리티시 컬럼비아 공산당 | 1945년 | 킴벌 캐리우 | 1945년 | |
캐나다 공산당 - 매니토바 | 1921년 | 프랭크 코마르니스키 | 1945년 | |
캐나다 공산당 (온타리오) | 1940년 | 드류 가비 | 1945년 | |
퀘벡 공산당 | 1965년 | 아드리안 웰시 | 1976년 | |
캐나다 공산당 (서스캐처원) | 1938년 | 해당 없음 | 1938년 |
는 활동이 중단된 지방 조직을 나타낸다.
1965년 11월 캐나다 공산당은 퀘벡의 주권을 보장하고 분리 독립할 권리까지 시야에 넣은 신헌법 제정을 목표로 하는 등 독자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퀘벡 공산당을 설립했다.[1]
1990년대 퀘벡 공산당은 혼란을 겪은 결과 사무소를 폐쇄했으며, 남은 당원은 캐나다 공산당을 탈당했다. 공산주의자 및 공산주의 단체가 퀘벡 공산당을 재건한 것은 1997년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