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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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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산은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서부에 위치한 산으로, 타이안시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옥황봉(1,532.7m)을 최고봉으로, 지질학적으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단층 지괴 산이며, 중국 동부에서 가장 오래된 캄브리아기 고변성암 지대인 '태산 복합체'로 알려져 있다. 80%가 식물로 덮여 있으며, 1,000종에 달하는 식물상이 존재한다. 중국 민간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중국 오악 중 동악에 해당하며,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다. 대묘, 벽하사, 십팔반 등 많은 명소가 있으며, 문학 작품과 관용구, 대중문화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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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산 - 동악대제
    동악대제는 중국 신화, 도교, 불교, 민간 신앙에서 숭배받는 신으로 인간의 수명과 지위를 다스리는 지하 세계의 최고 신이자, 도교에서는 오악과 명산을 통괄하는 신, 불교에서는 태산부군으로 지옥의 심판관, 《봉신연의》에서는 황비호로 묘사되며 태산 봉선 의식과 관련된 신앙 대상이다.
태산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태산 남천문
태산 남천문
중국어泰山
로마자 표기Tài Shān (병음)
다른 이름岱山 (다이산)
岱岳 (다이웨)
岱宗 (다이쭝)
太山 (타이산)
东岳 (둥웨)
설명높은 산
지리
위치중국 산둥성 타이안 시
높이1532.7m
돌출높이1505m
산맥(정보 없음)
지질변성암, 퇴적암
나이캄브리아기
등반
최초 등반(정보 없음)
쉬운 경로케이블카
세계유산
등재 유형복합 유산
지정 번호437
등재 연도1987년
기준문화: i, ii, iii, iv, v, vi
자연: vii
면적25,000 ha
기타 정보
지오파크유네스코 글로벌 지오파크
국가중점 풍경명승구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비준
관광지 등급AAAAA급

2. 지리 및 자연

태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경사진 단층 지괴 산이다. 원생대부터 시작된 융기 현상으로 형성되었으며, '태산 복합체'라고 알려진 캄브리아기의 고변성암 지대가 중국 동부에서 가장 오래된 예 중 하나이다.[10] 옥황봉 외에도 천촉봉, 부채 절벽, 후암 분지 등 독특한 암석 지형들이 있다.

선인교(仙人桥)라 불리는 자연 암석 지형


태산 전경


태산은 동아시아 낙엽 활엽수림대에 속하며, 약 80%가 식물로 덮여 있다.[11] 이 지역에는 1,0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나라 무제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한나라 측백나무', 약 1,300년 된 '당나라 회화나무', 500년 된 '손님맞이 소나무', 진시황제가 이름 붙였으나 약 250년 전에 다시 심은 '5품 소나무' 등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11] 정상에서 여섯 개의 하천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은 매우 낮은 미네랄 함량, 약산성(pH = 6.3), 비교적 높은 산소 함량(리터당 6.4mg)으로 유명하다.

2. 1. 위치 및 지형

태산은 산둥성 서부에 위치하며, 타이안시 바로 북쪽, 성도 지난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50m에서 1545m에 이르고, 기저부 면적은 426km2이다. 해발 1532.7m의 옥황봉(Jade Emperor Peak)은 북위 36° 16′, 동경 117° 6′에 위치한다.

태산의 정상인 옥황봉


정상으로 가는 길

2. 2. 지질학적 기원

태산은 약 3천만 년 전 신생대 중기에 형성되었다. 태산의 지층은 고대 지층으로, 주로 혼성암, 혼성 화강암 및 다양한 편마암 등 여러 종류의 고대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9]

낙서 지역(태산 포함)은 과거 거대한 침강대 또는 해협이었다. 조산 운동으로 침강대의 암석층이 습곡 작용을 일으켜 고대 육지로 융기되면서 거대한 산맥을 형성했고, 이 산맥은 20억 년 동안 풍화와 삭박 작용을 겪어 지형이 점차 평탄해졌다. 약 6억 년 전, 태산은 다시 바다에 잠겼다. 1억 년 이상이 지난 후, 이 지역 전체가 다시 육지로 융기되었고, 고대 태산은 비교적 낮고 황량한 구릉으로 융기되었다. 중생대 후기인 약 1억 년 전, 태평양판유라시아판에 섭입, 충돌하면서[9] 연산 운동의 영향으로 태산 지층은 광범위한 습곡과 단층 작용을 겪었다. 이러한 지각 운동 과정에서 태산은 급격히 융기되었다. 신생대 중기인 약 3천만 년 전, 현재와 같은 태산의 윤곽이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10]

태산은 산둥성 중부의 광활한 평원에서 솟아오르며, 자연적으로 많은 경승지가 있다. 지질학적으로, 남쪽이 북쪽보다 높은 경사된 단층 지괴 산으로, 동중국에서 캄브리아기 대표적인 고 변성암계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예이다. 태산 복합체(Taishan Complex)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17억~20억 년 전 시생대에 형성된 자화된 변성암, 퇴적암, 그리고 다양한 기원의 관입암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원생대에 태산 지역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원생대 말에는 대륙의 일부가 되었다. 융기는 신생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태산 지역에서 나타난 편마암은 북중국 전체의 기반암이다. 북쪽에 완전히 드러난 캄브리아기 지층은 화석이 풍부하다. 정상에서 여섯 개의 하천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은 매우 낮은 미네랄 함량, 약산성(pH = 6.3), 그리고 비교적 높은 산소 함량(6.4mg/L)으로 유명하다.

2. 3. 기후 및 식생

태산은 높이에 따라 수직적인 기후 변화를 보인다. 산 아래쪽은 온난 온대 지역이고, 산 정상은 중온대 지역이다. 산은 구름이 많고 안개가 자주 끼며, 연평균 강수량은 1132mm인 반면, 주변 지역은 750mm에 불과하다. 태산의 수림 피복률은 80%에 달한다.[11]

태산 지역은 온대 몬순 기후(쾨펜 Dwb)에 속하며, 일반적인 기후는 영하 2도 정도이다.[20]

산기슭에는 낙엽수림, 활엽수침엽수 혼효림, 침엽수림, 고산 관목, 초원이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수직적인 삼림대의 경계는 뚜렷하고 식생 경관이 다양하다. 144과에 속하는 989종의 종자식물이 있으며, 그중 72과에 속하는 목본식물 433종, 72과에 속하는 초본식물 556종, 111과에 속하는 약용식물 462종이 있다.[11]

식물은 79.9%의 면적을 덮고 있으며, 숲이 매우 울창하다. 식물상은 다양하며 989종으로 알려져 있고, 그중 433종은 목본, 나머지는 초본이다. 약용 식물은 총 462종이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며느리밑씻개, 대마, 태산인삼, 지치, 봉황삼 등이 포함된다. 일부 나무는 매우 오래되고 유명한데, 특히 한나라 무제가 2100년 전에 심었다는 '한나라 측백나무'와 500년 된 '손님맞이 소나무', 진시황제가 이름을 지었다는 '5품 소나무'가 있다.

2. 4. 동식물

태산은 다양한 식물상을 자랑하며, 989종의 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433종은 목본 식물이고, 나머지는 초본 식물이다. 약용 식물은 총 462종에 달하며, 며느리밑씻개, 대마, 태산인삼, 지치, 봉황삼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11]

오랜 역사를 지닌 나무들은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는데, 한나라 무제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한나라 측백나무', 약 1,300년 된 '당나라 회화나무', 500년 된 '손님맞이 소나무', 그리고 원래 진시황제가 명명했지만 약 250년 전에 다시 심은 '5품 소나무' 등이 대표적이다.[11]

태산에는 조류 122종을 포함하여 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1] 큰비늘납자루(*Xenocypris macrolepis*)는 해발 300~800m의 물살이 빠른 곳에서 발견된다.

3. 역사

태산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신석기 시대에는 대문구 문화와 룽산 문화가 나타났다. 하나(Xia dynasty) 시대에는 태산(岱山)으로 불렸으며, 상나라부터 청나라까지 3000년 동안 종교적 예배가 이어져 봉선제로 발전했다. 봉선제는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태산은 중요한 장소였다.

주나라 시대에는 제후들이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고, 공자는 권력을 찬탈한 신하들의 제사를 비판했다. 전국 시대에는 기나라가 성벽을 쌓았고, 태안이라는 도시 이름은 "태산이 안정되면 온 나라가 안정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진시황은 태산에서 통일을 선포하는 비문을 남겼고, 한나라 시대에는 봉선제가 가장 높은 제사로 여겨졌다.

수나라에서도 의식과 제사가 행해졌으며, 여러 왕조의 황제들과 문화적 인물들이 태산을 방문하여 비문과 조각들을 남겼다. 당 고종 때의 봉선제에는 일본,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의 대표가 참석했다.

태산옥황정(泰山玉皇頂)


일출(日の出)


태산은 태산부군(泰山府君)과 벽하원군(碧霞元君) 신앙으로 유명하다. 태산부군은 생사와 관련된 일, 벽하원군은 출산 등 여성과 관련된 소원 성취에 영험이 있다고 믿어졌다. 후한(後漢) 시대에는 태산 정상에 인간 수명을 기록한 장부가 있다는 신앙이 있었고,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부터는 이를 관리하는 조직과 태산부군이 등장했다. 불교(佛教)의 영향으로 태산지옥도 생겨났다. 북송(北宋) 시대부터는 벽하원군의 인기가 높아져 현재는 벽하원군에게 참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벽하궁


태산에는 두모궁(斗母宮), 관제묘(關帝廟) 등 많은 도관(道觀)과 경석곡(經石峪) 등이 있다. 정상 부근에는 벽하궁, 옥공각, 마애비(摩崖碑) 등이 있으며, 산중에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34][35] 산록에는 대묘(岱廟)가 있고, 태안박물관(泰安博物館)에는 진시황의 비문을 볼 수 있다. 태산 주변에는 보조사(普照寺), 죽림사(竹林寺), 영엄사(靈巖寺) 등 유서 깊은 불교 사찰도 많다.

태산 정상까지는 돌계단이 정비되어 있고, 중간까지 버스로 이동 후 로프웨이를 이용할 수 있다.

봉선제는 황제의 의례였지만,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태산 신앙은 오래되었다. 『장자(莊子)』에는 태산이 거대한 사물의 비유로 등장하며, 수신기(捜神記)에는 태산이 저승의 신으로 나타난다. 송대(宋代)에는 벽하원군 신앙이 변화하여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명대(明代)에는 태산부군의 인기를 넘어섰다.

태산은 1987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문화유산 등재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드문 사례이다.

3. 1. 선사 시대 ~ 하나라

태산에서 인간의 흔적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의 인류 정착 증거는 신석기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태산 근처에는 남쪽의 대문구 문화와 북쪽의 룽산 문화 두 문화가 나타났다.

하나(Xia dynasty) 시대(기원전 2070~1600년경)에 이 산은 태산(岱山)으로 알려졌으며, 고대 중국 구주의 영토 안에 있었다.[12]

3. 2. 상나라 ~ 청나라

태산에 대한 종교적 예배는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경)부터 청나라(1644~1912년)까지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예배는 봉선제로 발전하였다. 봉선제는 공식적인 황실 의식이었으며, 태산은 황제가 하늘(정상)과 땅(산기슭)에 제사를 지내는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봉(封(Fēng))과 선(禪(Shàn)) 제사는 각각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며, 종종 봉선제(封禪(Fēngshàn))로 함께 언급된다. 제사의 일환으로 비문을 새기는 것은 "태평성대"의 도래를 의미했다.[13]

주나라(기원전 1046~256년경) 시대에 이르러 태산의 제사는 고도로 의례화된 의식이 되었으며, 지역 제후가 음식과 옥으로 만든 제기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냈다. 이것들은 의례적으로 정확한 순서로 배열된 후 산에 묻혔다. 춘추 시대(기원전 771~476년)에 기와 노라는 제후국이 각각 태산의 북쪽과 남쪽에 접해 있었으며, 그들의 제후들은 태산에서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주나라의 의례적 신앙에 따르면 태산의 신은 제후가 바친 제사만 받아들였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 3.6에서) 권력을 찬탈한 신하들이 여기서 국가 제사를 올린 것을 비판했다.[14] 이어진 전국 시대(기원전 475~221년)에 기(Qi) 나라는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약 500km 길이의 성벽을 세웠고,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인근 도시 태안의 이름은 "태산이 안정되면 온 나라가 안정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태안의 두 글자 "泰"와 "安"은 모두 "평화"라는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다).

기원전 219년,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진시황은 정상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그의 제국의 통일을 선포하는 유명한 비문을 남겼다. 한나라(기원전 206년~서기 220년) 시대에는 봉선제가 모든 제사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13]

수나라에서도 의식과 제사가 행해졌다.[15]

과거 여러 왕조의 황제들은 하늘에 경배하고 땅에 알리기 위해 태산에 갔다. 유교, 불교, 설교, 경험을 전파하는 문화적 인물들은 태산에 올라 눈부신 돌에 새긴 글, 절벽, 대련(對聯) 조각들을 남겼다. 태산의 절벽 조각들은 가장 유명한 산의 조각으로도 알려져 있다. 태산에는 800개 이상의 비석과 1000개 이상의 절벽에 새긴 비문을 포함하여 1800개 이상의 돌에 새긴 비문이 있으며, 대묘(大廟) 157곳, 대로(大路) 215곳, 산동(山東) 동로(東路) 576곳, 대정(大鼎) 258곳, 대희(大溪) 80곳 이상, 대음(大陰) 44곳, 영염사(靈巖寺) 400곳 이상, 신통사(神通寺) 100곳 이상 등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주로 과거 왕조 황제의 5가지 종류의 제례, 사찰의 창건과 중건, 석경(石經)의 묘지명, 찬가(讚歌)의 시, 풍경과 대련 등을 포함하며, 대부분이 자연석에 새긴 비문이다.[16]

일본, 인도, 망명 페르시아 궁정, 고구려, 백제, 신라, 튀르크, 호탄, 크메르, 우마이야 칼리파국 모두 당 고종이 666년 태산에서 거행한 봉선제에 대표를 파견했다.[17]

3. 3. 주나라

주나라(기원전 1046~256년경) 시대에 태산에서의 제사는 고도로 의례화된 의식이 되었다. 지역 제후들은 음식과 옥으로 만든 제기들을 가져와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배열된 후 산에 묻혔다.[14] 춘추 시대(기원전 771~476년)에 기와 노는 각각 태산의 북쪽과 남쪽에 접해 있었고, 그들의 제후들은 태산에서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주나라의 의례적 신앙에 따르면 태산의 신은 제후가 바친 제사만 받아들였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 3.6에서 권력을 찬탈한 신하들이 태산에서 국가 제사를 올린 것을 비판했다.[14]

3. 4. 춘추전국시대

주나라(기원전 1046~256년경) 시대에 태산에서의 제사는 매우 의례화된 의식으로 발전했으며, 지역 제후들은 음식과 옥으로 만든 제기들을 가져와 제사를 지냈다. 이 제기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배열된 후 산에 묻혔다. 춘추 시대(기원전 771~476년)에는 기나라와 노나라가 태산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접해 있었고, 각 제후들은 태산에서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주나라의 의례 신앙에 따르면 태산의 신은 제후가 바친 제사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공자는 ''논어'' 3.6에서 권력을 찬탈한 신하들이 태산에서 국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비판했다.[14]

이어진 전국 시대(기원전 475~221년)에 기(Qi) 나라는 침략을 막기 위해 약 500km 길이의 성벽을 쌓았는데,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근처 도시 타이안의 이름은 "태산이 안정되면 온 나라가 안정된다"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태'(泰)와 '안'(安) 두 글자는 모두 "평화"를 의미한다.

3. 5. 진나라 ~ 한나라

기원전 219년,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진시황은 태산 정상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제국 통일을 선포하는 유명한 비문을 남겼다.[13] 한나라 시대에는 봉선제가 모든 제사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13]

3. 6. 수나라 ~ 청나라

수나라 때 태산에서 의식과 제사가 행해졌다.[15]

역대 여러 왕조의 황제들은 하늘에 경배하고 땅에 알리기 위해 태산을 방문했다. 유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가진 문화적 인물들은 태산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전파하고, 돌에 글을 새기거나 절벽, 대련 조각들을 남겼다. 태산의 절벽 조각들은 가장 유명한 산 조각으로도 알려져 있다. 태산에는 800개 이상의 비석과 1000개 이상의 절벽에 새긴 비문을 포함하여 1800개 이상의 돌에 새긴 비문이 있다. 이들은 주로 과거 왕조 황제의 5가지 종류의 제례, 사찰의 창건과 중건, 석경(石經) 묘지명, 찬가(讚歌)의 시, 풍경과 대련 등을 포함하며, 대부분 자연석에 새긴 비문이다.[16]

일본, 인도, 망명 페르시아 궁정, 고구려, 백제, 신라, 튀르크, 호탄, 크메르, 우마이야 칼리파국 모두 당 고종이 666년 태산에서 거행한 봉선제에 대표를 파견했다.[17]

3. 7. 당나라

당 고종이 666년에 태산에서 봉선제를 거행했을 때 일본, 인도, 망명 페르시아 궁정, 고구려, 백제, 신라, 튀르크, 호탄, 크메르, 우마이야 칼리파국 등 여러 나라의 대표단이 참석했다.[17]

3. 8. 근현대

2003년 태산에는 약 600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19] 2005년 10월 말에는 문화 유적을 복원하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손상된 건물을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보수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19] 태산은 특별한 의식과 제사로 널리 알려져 많은 시인과 문학 학자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방문했으며, 장엄한 사찰들과 많은 돌에 새긴 비문, 비석들이 있어 불교도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9]

4. 문화적 의의

태산은 중국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으로 불린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 이전 주나라 때부터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고 명상하던 신성한 장소였다.[23] 전설에 따르면 순임금이 황제의 태산 방문 전통을 시작했다고 한다.[23]

문인들은 영감을 얻고, 시와 수필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태산을 찾았다. 태산에는 태산부군(泰山府君), 벽하원군(碧霞元君)(태산낭낭(泰山娘娘)), 염광낭낭(안광낭낭) 등 다양한 신격이 존재하며, 이들은 각각 생사, 여성, 눈 건강과 관련된 일을 관장한다고 믿어졌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참도에는 두모궁(斗母宮), 관제묘(關帝廟)와 같은 도관(道觀)(도교 사찰)과 경석곡(經石峪)이 있다. 정상 부근에는 벽하원군을 모신 벽하궁(碧霞宮), 동악대제를 모신 옥공각(玉公閣), 한 무제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무자비(無字碑), 현종 황제가 새긴 봉선(封禪) 비문인 마애비(摩崖碑) 등이 있다. 산중에는 가이즈카사이카스(側柏), 구상나무(檜), 조각자단(槐), 만주적송(Pinus tabuliformis), 은행나무(銀杏) 등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34][35]

태산의 도관에는 관음보살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함께 봉안하는 곳도 많다. 산록에는 대묘(岱廟)가 있으며, 중국 3대 건축(中國三大建築) 중 하나로 꼽힌다. 대묘는 현재 태안박물관(泰安博物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사(李斯)의 비문을 볼 수 있다. 태산과 그 주변에는 영엄사(靈巖寺) 등 유서 깊은 불교 사찰도 많다.

태산 정상까지는 도로와 로프웨이가 운행되어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돌계단의 각도는 약 70도이다.

4. 1. 중국 민간 신앙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장자》 소요유 편에는 큰 것을 비유하여 ‘태산’이라 한다고 적혀 있다. 장자는 인간의 작음을 나타내기 위해 태산을 썼는데, 이는 태산이 매우 큰 것을 대표한다는 개념이 춘추시대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진의 《수신기(捜神記)》에는 태산이 신성을 띄고 명계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후 태산부군을 중심으로 한 태산 신앙은 《태평광기(太平廣記)》, 《이견지(夷堅志)》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산은 중국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에 해당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 이전 주나라 때부터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고 명상하기 위해 찾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총 72명의 황제가 태산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23] 전설에 따르면 순임금이 태산을 방문하는 황제의 전통을 시작했다고 한다.[23]

문인들 또한 영감을 얻고 시를 짓고, 수필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태산을 찾았다. 태산에는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주로 “태산부군(泰山府君)”, “벽하원군(碧霞元君)”(동의어: 태산낭낭(泰山娘娘)), “광안낭낭(眼光奶奶)”을 봉안하고 있다. 태산부군은 질병, 수명, 사후 세계 등 생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벽하원군은 출산 등 여성과 관련된 소원 성취에, 광안낭낭은 눈에 이롭다고 각각 믿어진다. 그 인기는 푸터산(普陀山)의 관음(觀音) 신앙에 비견될 정도로 중국 대륙에서 큰 인기를 양분하고 있다.

태산 정상의 사찰 단지


본래 태산에서는 동악대제가 가장 중요한 신위로 봉안되었다. 후한(後漢) 시대에는 “태종(岱宗, 곧 태산) 위에 금궤(金篋)·옥책(玉策)이 있어 사람의 수명의 장단을 잘 안다”(『풍속통(風俗通)』 권2)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산 정상에는 인간 수명의 정수를 기록한 원부가 있다는 신앙이 존재했다. 이후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부터 당(唐)대 무렵, 인간계와 마찬가지로 그 장부를 관리하는 조직이 상정되기 시작한다. 장관으로서 태산부군이 출현하고, 휘하 관리로 태산주부, 태산록사, 태산오백 등이 생겨났다.

후한 시대 전래된 불교(佛教)의 한역 경전(經典)에 보이는 “태산지옥(太山地獄)”은 중국에서 실제 태산 지하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태산지옥도 탄생하게 된다.

송(宋)대 무렵 후계자 문제로 딸인 벽하원군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이 벽하원군에게 참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명(明)대 소설 『성생인연전(醒生姻緣傳)』에는 그 신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산록에는 태산부군을 모신 대묘(岱廟)가 있다. 대묘(岱廟)의 장대한 모습은 중국 3대 건축(中國三大建築)(공묘(孔廟), 자금성(紫禁城) 등) 중 하나로 꼽힌다. 대묘는 현재 태안박물관(泰安博物館)이 되어 있으며, 봉선 때 기념으로 새겨진 많은 비문이 있다. 진 시황제가 행차할 때 태산에 남긴 이사(李斯)의 비문도 볼 수 있다.

봉선(封禪)은 황제의 의례였지만,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태산 관련 신앙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춘추전국 시대 『장자(莊子)』 소요유에는 거대한 사물의 비유로 "태산"이 기록되어 있다. 장자는 인간의 작음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크기를 가진 가상의 붕(鵬)을 예로 들어 대비시켰다. 이는 태산이 엄청나게 큰 사물의 대표라는 개념이 춘추시대에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과 도교(道教)의 관계에서 보아도, 도교와 태산은 원래부터 궁합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동진(東晉)의 『수신기(捜神記)』에는 이미 태산이 신성을 띠고 저승의 신으로 등장한다. 이후, 태산부군(泰山府君)을 중심으로 한 태산 신앙은 『태평광기(太平廣記)』와 『이견지(夷堅志)』 등에 많이 등장한다.

송대(宋代)에 산정상의 벽하원군묘(碧霞元君廟) 주변에서 벽하원군(碧霞元君)상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태산에서의 신앙 형태가 변화한다. 태산부군의 딸로 여성과 관련된 모든 일에 영험이 있다고 여겨지는 벽하원군을 참배하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어, 명대(明代)에 들어서는 주신인 태산부군의 인기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 후, 벽하원군을 모신 벽하원군묘가 중국 각지에 세워졌다. 본묘 외에도 태안(泰安) 시내에도 벽하원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4개나 존재한다. 모두 전쟁 피해를 거쳐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복원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는 당시 베이징에 있던 벽하원군묘를 조사하여 『태산(泰山)』에 기록하고 있다.

후한(後漢) 『博物지(博物志)』에는 태산(泰山)에서 사람의 수명을 측정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오환전(烏桓傳)에는 “죽은 자의 영혼은 태산으로 간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처럼 태산과 사후 세계가 연결된 문헌은 한대(漢代)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불경(佛經)에는 태산지옥(泰山地獄)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불교에서의 지옥은 인도 원어로 니라야(Niraya, 奈犂), 나라카(Naraka, 奈落)이며, 한역(漢譯)에서는 지하 감옥, 즉 지옥으로 의역되었다. 불교 전래 초기, 불경을 한역할 때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의 사물이나 어휘를 차용했다. 원어인 니라야와 나라카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태산이 인도의 수미산(須彌山)에 필적하는 높은 산이며 태산신(泰山神)이 영혼을 부른다는 속설을 이용하여 태산에도 지옥이 존재한다고 억지로 연결시켰다.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이르기까지 한역 불경에는 “태산지옥(太山地獄)”, “태산왕(太山王)”, “태산의 귀(太山の鬼)”, “태산 축생아귀(太山畜生餓鬼)”, “태산 소각하는 곳(太山焼煮の処)”, “태산 탕화의 독(太山湯火の毒)” 등과 같이 태산과 관련지어 만들어낸 지옥 관련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36] 또한 불경에는 “태산이 무너질 만큼의 참회(懺悔)”라는 표현이 있는데, 산이 몸을 표현하는 것으로, 큰 산을 태산으로 통일하여 태산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표현이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현재의 고뇌와 사후 갈등의 완화를 위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37]

4. 2. 주요 신격

태산은 중국 민간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으로 불린다. 태산에는 태산부군(泰山府君), 벽하원군(碧霞元君)(태산낭낭(泰山娘娘)), 염광낭낭(안광낭낭) 등 다양한 신격이 존재한다.

  • 태산부군(泰山府君): 질병, 수명, 사후 세계 등 생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한다.
  • 벽하원군(碧霞元君) (동의어: 태산낭낭(泰山娘娘)): 출산 등 여성 관련 소원을 돕는다.
  • 염광낭낭(안광낭낭): 눈 건강에 이롭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인기는 푸터산(普陀山)의 관음(觀音) 신앙과 비견될 정도로 중국 대륙에서 널리 숭배된다.[23]

동진(東晉)의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태산은 이미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으며 명계(冥界)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후 태산부군을 중심으로 한 태산 신앙은 《태평광기(太平廣記)》, 《위견지(夷堅志)》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후한(後漢) 시대 『박물지(博物志)』에는 태산에서 사람의 수명을 측정할 수 있다는 기록이, 『후한서(後漢書)』 오환전(烏桓傳)에는 “죽은 자의 영혼은 태산으로 간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대 이전에는 태산과 사후 세계를 연결하는 문헌은 없다.

불교(佛教) 경전에는 태산지옥(泰山地獄) 관련 내용이 많다. 불교 전래 초기, 불경 한역(漢譯)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태산이 인도의 수미산(須彌山)에 필적하는 높은 산이며 태산신(泰山神)이 영혼을 부른다는 속설을 활용, 태산에 지옥이 존재한다고 묘사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위진시대(魏晉時代)까지 한역 불경에는 “태산지옥(太山地獄)”, “태산왕(太山王)” 등 태산 관련 지옥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36]

4. 2. 1. 동악대제 (태산부군)

동악대제는 태산의 최고 신이다. 한 신화 전승에 따르면 그는 판구의 후손이다. 다른 신학에서는 그를 오방상제(五方上帝)의 다섯 가지 현현 중 동쪽의 신으로 본다.[23]

주로 “태산부군(泰山府君)”과 “벽하원군(동의어: 태산낭낭)” 그리고 “광안낭낭”을 봉안하고 있다. 태산부군은 질병, 수명, 사후 세계 등 생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벽하원군은 출산 등 여성과 관련된 소원 성취에, 광안낭낭은 눈에 이롭다고 각각 믿어지고 있다. 그 인기는 보타산의 관음 신앙에 비견될 정도로 중국 대륙에서 큰 인기를 양분하고 있다.

본래 태산에서는 동악대제가 가장 중요한 신위로서 봉안되어 왔다. 후한 시대에는 “속히 태종(岱宗, 곧 태산) 위에 금궤(金篋)·옥책(玉策)이 있어 사람의 수명의 장단을 잘 안다”(『풍속통』권 2)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태산 정상에는 인간의 수명의 정수를 기록한 원부에 해당하는 장부가 놓여 있다는 신앙이 존재했다. 이후 위진남북조부터 대 무렵이 되면서, 인간계와 마찬가지로 그 장부를 관리하는 조직의 존재가 상정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장관으로서 태산부군이 출현하고, 그 휘하의 관리로서 태산주부, 태산록사, 태산오백 등의 존재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후한 시대에 전래되었다고 여겨지는 불교의 한역 경전에 보이는 “태산지옥(太山地獄)”이 중국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태산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태산지옥도 탄생하게 된다.

북송대 무렵이 되면 후계자 문제로 딸인 벽하원군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이 벽하원군에게 참배하는 형식이 되었다고 한다. 대 소설 『성생인연전』에는 그 신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4. 2. 2. 벽하원군

벽하원군(碧霞元君)은 "푸른 여명의 여신"이라는 뜻으로, 옥황선녀(玉皇仙女) 또는 태산낭낭(泰山娘娘)이라고도 불린다. 일부 신화에서는 태산부군의 딸 또는 배우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벽하원군의 조각상은 종종 북두칠성이 새겨진 석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녀의 권위를 상징한다.[23]

동악대제와 벽하원군, 광안낭낭을 함께 모시는데, 태산부군은 질병, 수명, 사후 세계 등 생사와 관련된 일을 주관하고, 벽하원군은 출산 등 여성 관련 소원을 들어주며, 광안낭낭은 눈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벽하원군의 인기는 푸퉈산(普陀山)의 관음 신앙과 비견될 정도로 중국 대륙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4. 2. 3. 기타 신격

염광낭낭(안광낭낭)(眼光奶奶|Yǎnguāng Nǎinǎi중국어)은 시력의 여신으로 숭배되며, 종종 벽하원군의 시녀로 묘사된다.[23] 송자낭낭(送子娘娘|Sòngzi Niangniang중국어)은 다산의 여신으로 여겨지며, 염광낭낭과 마찬가지로 벽하원군의 시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23] 석감당(石敢當)(石敢當|Shígǎndāng중국어)은 벽하원군(碧霞元君)이 태산에서 내려 보낸 정령으로, 일반 사람들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23] 이와 관련하여, 건물이나 기타 장소 근처에 태산 석감당(泰山石敢當) 돌을 설치하여 악령을 막는 문화적 전통이 있는데, 이는 위패와는 다른 것이다.[23]

4. 3. 도교와의 관계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장자(莊子)》 소요유 편에는 큰 것을 비유할 때 '태산'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태산이 매우 큰 것을 대표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23]

동진 시대의 《수신기(捜神記)》에는 태산이 신성한 존재이자 명계(저승)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후 태산부군을 중심으로 한 태산 신앙은 《태평광기(太平廣記)》나 《이견지(夷堅志)》 같은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문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대에는 산 정상의 벽하원군묘(碧霞元君廟)에서 벽하원군 상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태산 신앙의 형태가 변화하였다. 태산부군의 딸로 여성과 관련된 일에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벽하원군을 참배하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명대에는 주신인 태산부군의 인기를 넘어섰다. 이후 중국 각지에 벽하원군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다.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는 당시 베이징에 있던 벽하원군묘를 조사하여 『태산(泰山)』에 기록하기도 했다.

4. 4. 불교와의 관계

태산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후한 시대에 전래된 불교 경전에는 '태산지옥(太山地獄)'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실제로 태산 지하 깊숙한 곳에 있다고 믿어졌다.[36] 불교에서 지옥은 인도 원어로 니라야(Niraya, 奈犂), 나라카(Naraka, 奈落)이며, 이를 한역(漢譯)하면서 중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태산 신앙과 연결시킨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위진시대에 걸쳐 한역된 불경에는 "태산지옥", "태산왕", "태산의 귀" 등 태산과 관련된 지옥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36]

오호십육국 시대에 숙승랑(竺僧朗)이 태산에 은둔하면서 태산과 불교의 관계가 시작된다. 숙승랑은 불도징(佛圖澄)의 제자로, 전진 황시(皇始) 원년(351년)에 태산 곤취곡(琨瑞谷, 금여곡 金輿谷)에 은거하였고, 이 골짜기는 랑공곡(朗公谷)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전진의 부견(苻堅), 후진의 요흥(姚興) 등 오호의 군주들뿐만 아니라 북위 도무제(道武帝)의 존경을 받았다.

북위 시대에 랑공곡에 세워진 랑공사(朗公寺)는 황실의 보호를 받았으며, 동위와 북제까지 이어졌다. 그 주변에는 영엄사(靈巖寺)와 신보사(神寶寺) 등 여러 사찰이 세워졌다. 영엄사는 숙승랑과 관련된 곳에 세워졌다는 전승이 있으며, 북송 시대에는 천하의 4대 절경 중 하나로 꼽혔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들이 유학을 위해 영엄사를 많이 찾았으며, 보조사(普照寺)는 고려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산과 그 주변에는 영엄사, 보조사, 죽림사(竹林寺) 등 유서 깊은 불교 사찰이 많다.

4. 5. 유교와의 관계

태산은 중국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중국의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에 해당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태산은 기원전 1000년 이전 주나라 때부터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고 명상하기 위해 찾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총 72명의 황제가 태산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23] 전설에 따르면 순임금이 태산을 방문하는 황제의 전통을 시작했다고 한다.[23]

문인들 또한 영감을 얻고 시를 짓고, 수필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태산을 찾았으며, 태산에는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공자가 태산을 방문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태산에는 공자와 관련된 명소와 공자묘가 세워져 있다. 송대에는 손복을 비롯한 태산학파라 불리는 유학자들이 남서쪽 산기슭, 오현사로 이주하여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5. 주요 명소

태산에는 수많은 문화 유적과 명소가 남아있다. 태산은 중국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산으로, 태산부군(泰山府君)과 벽하원군(碧霞元君)(태산낭낭(泰山娘娘))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다. 태산부군은 질병, 수명, 사후 세계 등 생사와 관련된 일을, 벽하원군은 출산 등 여성과 관련된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어지며, 광안낭낭은 눈 건강에 좋다고 여겨진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두모궁(斗母宮), 관제묘(關帝廟) 등 도교 사찰(도관(道觀))들이 많으며, 계곡에는 『화엄경(華嚴經)』이 새겨진 경석곡(經石峪)이 있다. 정상 부근에는 벽하원군을 모시는 벽하궁(碧霞宮), 동악대제를 모시는 옥공각(玉公閣), 한무제가 세웠다는 비문 없는 “무자비(無字碑)”, 당 현종의 봉선(封禪) 의식을 새긴 마애비(摩崖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산에는 한나라 때 심은 가이즈카사이카스(側柏)와 구상나무(檜), 당나라 때 심은 조각자단(槐), “망인송(望人松)”, “오대부송(五大夫松)”, 은행나무(銀杏), 황매화(臘梅), 등 오래된 나무들도 자라고 있다.[34][35]

태산의 도관에는 동악대제와 벽하원군 외에도 관음보살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함께 모시는 곳이 많다. 산 아래에는 태산부군을 모시는 대묘(岱廟)가 있는데, 중국 3대 건축(中國三大建築)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웅장하다. 대묘는 현재 태안박물관(泰安博物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진 시황제가 태산에 남긴 이사(李斯)의 비문 등 봉선 의식과 관련된 많은 비문들이 있다.

태산과 그 주변에는 보조사(普照寺), 죽림사(竹林寺), 영엄사(靈巖寺) 등 유서 깊은 불교 사찰도 많다. 특히 영엄사(靈巖寺)는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들이 송대(宋代)에 많이 찾았던 곳이다.

태산 정상까지는 중간 지점까지 일반 도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로프웨이도 운행되어 쉽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산기슭에서 걸어 올라가면 3시간 정도 걸린다. 등산로는 돌계단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남대문으로 가는 마지막 돌계단은 경사가 약 70도 정도로 가파르지만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다.

5. 1. 대묘 (다이먀오)

대묘(岱庙)는 태산의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온전하게 보존된 고대 건축물 단지이다. 태안 시 태산 기슭에 위치하며 면적은 96,000㎡이다. 사당은 진나라 때 처음 건립되었다. 한나라(기원전 206년 ~ 서기 220년) 이후로는 황궁을 본떠 건축되었으며, 중국에 현존하는 황궁 양식의 건축물 세 곳 중 하나이다(자금성, 곡부의 공자묘).

대묘는 다섯 개의 주요 전각과 여러 개의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 건물은 북송 휘종 재위 시기인 1008년에 건립된 천광전(天贶殿)이다. 천광전에는 1009년에 제작된 "태산신의 여행" 벽화가 있는데, 동쪽, 서쪽, 북쪽 벽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높이 3.3m, 길이 62m이다. 벽화의 주제는 신의 순찰이다. 천광전 옆에는 약찬각(藥賛閣)과 정문, 그리고 북동쪽 모서리에는 동종각(銅鐘閣)이 있다.

대묘는 한나라 시대부터 있는 2100년 된 측백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6000개의 화강암 계단은 가장 오래된 계단으로 여겨진다.

대묘에는 휘종 재위 시대의 잘 보존된 비석들이 여러 개 있으며, 그중 일부는 비희 거북이 등에 세워져 있다. 건륭제 시대의 비희에 세워진 비석도 있다.[24]

5. 2. 벽하사



벽하사(碧霞祠, Bìxiá Cí)는 태산 정상 부근에 있는 건축물 단지로, 벽하(碧霞) 여신에게 봉헌된 사당이다. 금속 부품, 목재, 벽돌 및 돌 구조물이 특별하게 결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태산사(泰山廟)에서 벽하사까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비석과 명문, 그리고 고대 건축물들이 있다.

송(宋)대에 산 정상의 벽하원군묘(碧霞元君廟) 주변에서 벽하원군(碧霞元君)상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태산에서의 신앙 형태가 변화하였다. 태산부군의 딸로 여성과 관련된 모든 일에 영험이 있다고 여겨지는 벽하원군을 참배하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어, 명(明)대에 들어서는 주신인 태산부군(泰山府君)의 인기를 넘어서게 되었다.[23] 그 후, 벽하원군을 모신 벽하원군묘가 중국 각지에 세워졌다.

5. 3. 십팔반

"십팔반"(十八盘|스바판중국어)은 태산에서 가장 험준한 18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의미한다. 총 1,827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산의 주요 상징 중 하나이다. "태산의 장엄함은 모두 십팔반에 있고, 태산의 웅장함은 모두 오르는 데에 있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십팔반은 "완만한 십팔"(慢十八|만스바중국어), "험준한 십팔"(紧十八|진스바중국어), "완만하지도 험하지도 않은 십팔"(不紧不慢又十八|부진부만유스바중국어)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완만한 십팔"은 오르기가 비교적 수월한 구간을, "험준한 십팔"은 오르기가 더 어려운 구간을 의미하며, 이러한 구분이 흥미롭다.[23]

5. 4. 기타 명소

태산에는 총 22개의 사찰, 97개의 유적, 819개의 비석, 그리고 1,018개의 절벽과 바위에 새겨진 비문이 있다. 주요 명소는 다음과 같다.

  • 사찰 및 묘:
  • 옥황묘(玉皇庙|Yùhuáng Miào중국어):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 청제궁(青帝宫|Qīngdì Gōng중국어): 청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 공자묘(孔子庙|Kǒngzi Miào중국어):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 도모궁(斗母宫|Dòumǔ Gōng중국어): 도모를 모시는 사당이다.
  • 푸자오사(普照寺|Pǔzhào Sì중국어): 불교 사찰이다.

  • 비문:
  • "오악독존"(五岳独尊|Wǔyuè Dúzūn중국어) 비문: 일월봉에 위치하며, 1907년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씨족이 쓴 것으로 5위안 지폐 뒷면과 중국 생체 인식 여권 26페이지에 실려 있다.[23]
  • "잠루대"(瞻鲁台|Zhānlǔ tái중국어) 비문: 공자가 자신의 고향인 루나라를 바라보며 "천하는 작다"라고 말한 곳을 표시한다.
  • 무자비(无字碑|Wúzì Bēi중국어): 옥황묘 앞에 있으며, 비문을 세운 황제가 서기관들이 제안한 비문에 만족하지 못해 비어두었다는 전설이 있다.[23]

  • 기타:
  • 사신애(舍身崖): 명나라 시대에 애신애(爱身崖)로 개명되었다.
  • 일관봉(日观峰)
  • 월관봉(月观峰)
  • 잠루대(瞻鲁台)
  • 탐해석(探海石)
  • 경석곡(經石峪): 계곡 한 면에 『화엄경(華嚴經)』이 새겨져 있다.
  • 대묘(岱廟):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으로, 중국 3대 건축(中國三大建築)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는 태안박물관(泰安博物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진 시황제가 남긴 이사(李斯)의 비문을 볼 수 있다.
  • 영엄사(靈巖寺): 일본 조동종(曹洞宗) 유학생들이 송대(宋代)에 많이 방문했던 유서 깊은 불교 사찰이다.


태산에는 한나라의 가이즈카사이카스(側柏)와 구상나무(檜), 당나라의 조각자단(槐), “망인송(望人松)”, “오대부송(五大夫松)” , 은행나무(銀杏), 황매화(臘梅) 등 오래된 나무들도 많다.[34][35]

6. 한국 문화와의 관계

양사언의 시조에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다.[34] "걱정이 태산같다", "갈수록 태산"과 같은 표현과 "티끌모아 태산", "태산을 넘으면 평지를 본다", "태산이 평지된다", "보리고개가 태산보다 높다" 등의 속담에도 태산이 등장하여 한국 문화에서 태산은 매우 친숙한 산으로 인식된다.[34]

7. 문화적 참조

태산은 문학, 예술, 관용구, 게임, 만화, 소설, 화물선 이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언급된다.


  • 금병매에는 태산 순례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25] 사마천은 태산과 죽음의 무게를 비교했다.[26] 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한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고 말했으며,[27]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태산을 언급했다.[23] 두보는 '태산을 바라보다'라는 시를 지었고,[28] 에즈라 파운드는 "칸토스"에서 태산을 언급했다.
  • "태산과 북두칠성"은 뛰어난 인물을, "有眼不识泰山"은 무지하고 오만한 사람을, "稳如泰山"은 매우 안전하고 견고한 것을 비유하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제5차 인민폐 5위안 지폐 뒷면에는 태산이 도안되어 있다. 러시의 노래 "태산", 류츠신의 소설 『구체번개』, 북두의 권의 태산천랑권, 문명 IV의 대묘 등에도 태산이 등장한다.
  • 화물선 MV 태산과 달의 뒷면의 몬스 타이[29]는 태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7. 1. 문학


  • 소설 금병매에서 월하선녀는 태산으로 순례를 떠나는 장면이 묘사된다.[25]
  • "태산과 북두칠성"은 뛰어난 인물을, "有眼不识泰山" (눈이 있지만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은 무지하면서 오만한 사람을, "稳如泰山" (태산처럼 굳건하다)은 매우 안전하거나 견고한 것을 가리키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고대 역사가 사마천은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찾아오지만,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벼울 수 있다"고 말했다.[26] 마오쩌둥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인민을 위해 죽는 것은 태산보다 무겁지만, 파시스트를 위해 일하고 착취자와 압제자를 위해 죽는 것은 깃털보다 가볍다"고 말했다.[27]
  • 덩샤오핑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정치적 수사에 태산을 포함시켰다.[23]
  • 태산은 두보의 시 '태산을 바라보다'의 주제이며,[28] 에즈라 파운드의 "칸토스"에도 언급된다.
  • 태산은 제5차 인민폐 5위안 지폐 뒷면에 도안되어 있다.
  • 캐나다 록 밴드 러시의 1987년 앨범 『홀드 유어 파이어』에는 닐 피어트의 태산 여정을 언급한 "태산"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 류츠신의 소설 『구체번개』의 중요한 장면들은 태산을 배경으로 한다.
  • 장종창은 태산을 언급하는 시를 썼다.
  • 1995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The Year of The Boomerang' 가사에는 태산이 언급된다.[30]

7. 2. 관용구


  • "태산과 북두칠성"은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有眼不识泰山" (직역: 눈이 있지만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은 무지하면서도 오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稳如泰山" (직역: 태산처럼 굳건하다)은 매우 안전하거나 견고한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7. 3. 기타


  • "태산과 북두칠성"은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有眼不识泰山" (직역: 눈이 있지만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은 무지하면서도 오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稳如泰山" (직역: 태산처럼 굳건하다)은 매우 안전하거나 견고한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중국어 관용구이다.
  • 고대 역사가 사마천은 "비록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찾아오지만,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벼울 수 있다"고 말했다.[26] 마오쩌둥은 1944년 연설 『인민을 섬겨라』에서 "인민을 위해 죽는 것은 태산보다 무겁지만, 파시스트를 위해 일하고 착취자와 압제자를 위해 죽는 것은 깃털보다 가볍다"고 인용했다.[27]
  • 덩샤오핑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정치적 수사에서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적절한 경제 성장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태산처럼 굳건히 설 것이다"라며 태산을 언급했다.[23]
  • 태산(Mount Tai)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태산을 바라보다'의 주제이며,[28] 에즈라 파운드의 "칸토스", 특히 피사 칸토스에서 광범위하게 언급된다.
  • 태산은 금각과 은각 요괴가 손오공을 깔아뭉개는 세 개의 성스러운 산 중 하나이며, 다른 두 산은 메루산과 와불산이다.
  • 태산은 제5차 인민폐 지폐의 5위안짜리 뒷면에 표시되어 있다.
  • 캐나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러시의 1987년 앨범 『홀드 유어 파이어』에는 드러머이자 작사가인 닐 피어트의 태산 여정을 언급한 "태산"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 대묘는 시드 마이어의 문명 IV에서 위대한 예언자가 건설할 수 있는 종교 단지로 등장하며, 도교 성지에 도교를 위한 성역을 세운다.
  • 태산, 일부 사찰, 그리고 옥황상제는 댄 시몬스의 책 엔디미온의 부상에서 언급되고 방문된다.
  • 태산은 북두의 권에서 태산천랑권이라는 무술의 기원으로 언급되며, 유리아의 오빠인 류가가 사용한다.
  • 태산은 달의 뒷면창어 4호가 착륙한 지역 근처에 위치한 몬스 타이의 이름이기도 하다.[29]
  • 류츠신의 소설 『구체번개』의 중요한 장면들은 태산에서 벌어지며, 그는 이곳을 잦은 뇌우와 기상 연구의 장소로 묘사한다.
  • 화물선 MV 태산(1986–2016)은 태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산둥성을 지배했던 군벌 시대의 인물 장종창은 태산을 언급하는 시를 썼다.
  • 1995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 발매한 'The Year of The Boomerang'의 가사에는 "So I'm goin' out heavy sorta like Mount Tai"라는 구절에서 태산이 언급된다.[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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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과사전 Mount Tai http://www.britannic[...] 2015-01-31
[4] 논문 山东泰安地区断层的最新活动与"泰山震" http://www.ixueshu.c[...] 2020-04-28
[5] 논문 夏帝发七年"泰山震"的解读 https://max.book118.[...] 2020-04-28
[6] 논문 夏发七年"泰山地震"考 http://www.cqvip.com[...]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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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Confucius Analects: With Selections from Traditional Commentaries Hackett 2012-11-17
[15]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6] 웹사이트 泰山:"五岳之首"承载华夏至尊 http://www.gov.cn/te[...]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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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The Southern Tour: Deng Xiaoping and the Fight for China's Future Bloomsbury Academic
[24] 웹사이트 岱庙-------碑碣、唐槐、汉柏_迎春花_新浪博客 http://blog.sina.com[...] 2010-01-12
[25] 서적 The Golden Lotus, Volume 4 Graham Brash (PTE) Ltd 1979
[26] 서적 中国万花筒 https://books.google[...] 2015-01-31
[27] 웹사이트 SERVE THE PEOPLE http://www.marxists.[...] 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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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웹사이트 Rage Against The Machine Year Of Tha Boomerang lyrics http://www.lyricstim[...]
[31] 웹사이트 TAISHAN UNESCO GLOBAL GEOPARK (China) https://en.unesco.or[...] 2021-07-27
[32] 웹사이트 国务院批转城乡建设环境保护部等部门关于审定第一批国家重点风景名胜区的请示的通知 http://fgcx.bjcourt.[...] 北京法院法規検索 1982-11-08
[33] 웹사이트 泰安市泰山景区 https://www.mct.gov.[...] 中华人民共和国文化観光部 2021-07-22
[34] 웹사이트 Mount Taishan https://whc.unesco.o[...]
[35] 웹사이트 泰山风景名胜区管理委员会 泰山古树名木认养专栏 泰山认养古树名木介绍 http://tsgw.taian.go[...] 2021-05-21
[36] 서적 中国の泰山 講談社 1982-03-30
[37] 서적 仙鏡往来 春秋社 200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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